261화. 나를 선택해라 (4)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는 은은한 빛.
그리고 무엇인가 앉아 있었다.
[왔구나, 인간.]
칠흑의 날개를 펼친 그 녀석이.
주헌은 미간을 좁혔다.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넓은 동굴 안.
동굴 곳곳에는 모래가 떨어지고 있었고, 넓은 호수가 있었다.
주헌은 그 무덤이 제법 낯익었다.
'그때 그 무덤.'
덕분에 그의 손이 잠시 떨렸다.
그건 당연할지도 몰랐다.
제아무리 자신이라고 하더라도 죽음을 경험한 무덤이었다.
어느 인간도 제 죽음 앞에서 완전히 초연할 수는 없었다.
그것도 이미 참혹하게 죽은 장소라면 더더욱.
더군다나 기억력이 좋은 주헌은 아직도 그때의 감각이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떨리지 않을 리가 없으리라.
하지만 곧 주헌의 떨림이 조금씩 멈춰가기 시작했다.
문득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냐, 그 무덤이 아니다.'
까마귀 때문에 착각했는데 달랐다.
'그때와는 다르다.'
묘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무덤인건가.
그것도 아니면 설마 가짜 무덤인 것인가.
주헌은 눈을 부릅뜨고 놈을 보았다.
답은 저놈에게 달려있었다.
놈은 검은 날개를 펼치며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붉은 눈을 번득이면서.
[오랜만이구나, 인간.]
아마 직접적으로 본 것은 딱 두 번 정도일 것이다.
한 번은 최후의 무덤.
과거로 돌아가던 그 눈부신 섬광 속에서 주헌은 보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탐낼 까마귀의 모습을.
터져 나오는 빛 속에서 비상하는 까마귀의 환영을.
그리고 또 한 번은 대고분화 당시, 권 회장과 조우했을 때다.
이집트 멍멍이 유물들이 만들어낸 대고분 당시, 놈이 나타났었다.
새까만 날개를 흩날리며.
그 고압적인 눈빛으로.
그리고 지금 역시도.
그래서일까.
주헌은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이 스토커 놈아."
아마 분신은 아닐 것이다.
단순한 분신체라면 한눈에 알아봤을 테니까.
심지어 보통 유물이란 놈들은 꼭꼭 숨어 과제를 내면서 인간들을 훔쳐보는 관음증 환자들.
하지만 놈은 찾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헌은 놈에게 물었다.
사실 궁금한 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날 살려줬지? 아니, 되살렸지?"
유물들이란 놈들은 죄다 꿍꿍이가 있기 마련이다.
절대로 순수한 호의로 자신에게 이런 능력을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널 꺼내주길 바랐던 거냐? 그것도 아니면 포동포동 살찌워서 잡아먹을 생각이었나?"
유물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인간의 고통을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는 음험한 무리들이니까.
그래서 이득이 되니까 까마귀의 능력을 쓰고는 있었지만, 내심 경계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놈의 능력을 활용해 무덤을 파헤치는 일도 될 수 있으면 삼갔다.
까마귀놈이 바라는 건 아무래도 자신이 능력을 활용해 무덤을 파헤치는 일 같았으니.
그러나 까마귀가 말했다.
[이유 따윈 없다. 원래 인간에게 큰 관심이 없거든. 네놈을 살린 것도 그냥 여흥이고.]
"여흥?"
[그래. 잠을 자고 있는데 네놈이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지 않았느냐.]
뭐 그건 그렇다.
동료들도 다 죽고, 결국 혼자 뱀에게 잡혀먹고 있을 때 분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권 회장 그놈에게.
[인간 놈이 어디까지 할 수 있나 여흥거리로 삼은 것뿐.]
"그럼 딱히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거군."
[그래.]
주헌은 수긍했다.
그리고 그럴 때였다.
까마귀가 기특하다는 듯 큰 날개를 펼쳤다.
[좋다. 그럼 여기까지 온 상이다. 특별히 네놈에게 무덤의 과제를 내려주겠...]
과제를 내려주겠다, 그렇게 말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응, 수고해, 안녕."
[!]
주헌은 너무 대수롭지 않게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했던 것이다.
한 치의 미련도 없이!
그러자 까마귀가 주헌을 불렀다.
[이봐라, 인간.]
묘하게 당황한 듯한 어조였다.
내색하지 않아도 왠지 그런 것 같았다.
[기다려라. 계약을 하겠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주헌은 샛길로 빠져나가려고 했다.
덕분에 주헌의 목에 감겨 있던 동아줄도 다급하게 주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가도 돼? 가도 돼?
틀림없이 주헌이 까마귀 유물을 얻으러 온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까마귀 역시도.
[인간. 비보를 얻기 위해 온 것이 아니냐?]
"맞는 데, 넌 아니잖아."
그러자 까마귀는 뭘 모르는 거라며 웃었다.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 나도 왕을 간택하는 비보 중 하나니. 분명 네놈에게 도움이...]
"그래? 그럼 열심히 다른 놈 뽑아봐."
[?!]
주헌은 도로 빠져나가며 웃었다.
아니, 비보면 뭘 하는가.
'저런 흉포한 까마귀, 어디에 써먹으라고.'
모든 유물들이 두려워하는 까마귀.
확실히 탐은 나긴 하지만...
'그 까마귀는 결국 자기 주인마저도 죽였다.'
멍멍이들이 그렇게 말했다.
물론 주헌도 까마귀에게 전 주인이 있었다는 건 잘 안다.
하지만.
'내가 듣기론 까마귀의 주인을 너희가 회유했다고 했는데.'
까마귀의 전 주인이 까마귀를 배신하게 했다고.
결국 그 전 주인을 죽인 것도 다른 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 까마귀가 주인을 죽였어?'
'죽였다. 유물들이 까마귀를 잡으러 갔을 때 그 인간은 이미 죽어있었어. 그 까마귀 말고는 죽을 이유도 없었고.'
뭐 정확한 인과관계는 멍멍이들도 잘 모르는 듯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저주받은 까마귀라는 것이다.
그런 뒤숭숭한 놈을 굳이 제 유물로 삼을 필요는 없지.
심지어 비보라면 더더욱 계약하면 안 됐다.
비보는 1인 1계약 형태의 영구귀속유물.
여기서 까마귀와 계약하면 다른 비보와 계약할 기회도 사라지는 게 아닌가!
'더 뽀대나는 놈들도 많다.'
주헌의 눈이 반짝였다.
사실 탐나는 유물들이 있었다.
얼핏 운명왕을 갈궈서(?) 들은 것 인데, 비보 중에는 주헌이 관심을 가질 만한 놈들이 있었던 것이다.
정확한 명칭을 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특징을 조합하면 예상가는 놈들이 있긴 했다.
그중 하나가 복을 가져다주는 신수 해태.
혹은 성군을 뽑는다는 신수 기린.
그 외에 악마의 상징 파리왕도 있는 것 같긴 하지만 어쨌든.
'그쪽이 훨씬 탐난다.'
저주받은 까마귀보단 다른 비보 쪽이 탐이 났다.
결국 그렇게 생각한 주헌이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쿠르르릉!
[샛길이 닫힙니다.]
[무덤의 문이 닫혔습니다.]
아니 이 녀석이.
주헌은 까마귀를 보았다.
***
그리고 그 무렵이었다.
"교수님, 우리 단장님한테 관심 있죠. 그쵸."
문득 떨어진 유재하의 말에 일리야는 미쳤냐는 듯 그를 보았다.
아니 이놈이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일리야는 유재하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웬걸.
"그거랑 너랑 무슨 상관이지?"
진채원이 그렇게 대답하자 일리야는 입을 떡 벌렸다.
'진짜로 관심이 있는 거였냐!'
그리고 유재하는 진채원에게 딜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엄청 귀하고 좋은 거 줄게. 우리 손잡지 않을래요?"
그 말에 진채원의 부하들과 수석 복원사들도 당황스러웠다.
아니, 유재하 저놈이 갑자기 무슨 말을 지껄이나 했더니.
"이 상황에서 무슨 개소리를...!"
하지만 코웃음이 나왔다.
보나마나 이 상황에서 제일 강력한 진채원을 아군으로 끌어들여 비보를 얻을 심산인가 본데.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교수님이 너와 손을 잡진 않아."
실제로 진채원도 유재하의 속내를 뻔히 읽은 듯 했다.
"안 됐지만 너한테는 비보도, 다빈치 유물도 주지 않아. 중국의 이익이 걸려 있거든."
그렇게 미소를 짓는 그녀는 무척이나 우아하고 예뻤다.
덕분에 유재하와 일리야도 침을 꿀꺽 삼킬 정도로.
솔직히 저 여자의 마녀 같은 모습, 그리고 사황 다운 무서움을 알기 때문에 안 넘어가는 것이지, 기억이 없었다면 넘어가고도 남았다.
그럴 때 일리야가 유재하를 쿡쿡 찔렀다.
어쩔 거냐는 것이었다.
"야, 뭘 주려고 하겠다는 건지는 몰라도, 저 여자가 네 협상에 넘어갈 리가... 엥?"
일리야는 유재하가 꺼내드는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유물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사진.
'그런데 저런 게 먹힌다고?'
하지만 유재하가 자신 있게 외쳤다.
"이거 우리 단장님 비밀 사진인데, 안 필요해? 손 잡자니까?"
내용물은 보여주진 않았다.
단지 사진의 뒷면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리고 유재하의 말에 주변의 발굴단들이 죄다 폭소를 터트렸다.
저놈이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진채원 역시 웃었다.
"내가 서주헌한테 관심이 있는 건 맞지만 그런 사진은 필요 없어."
"그래, 교수님은 서주헌을 실험대상으로서 흥미를 느끼는 것뿐이니까."
아니, 사실은 서주헌의 사진이야 얼마든지 찍어놨기 때문이지만.
그때 진채원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며 비보 쪽으로 향했다.
저것부터 빨리 얻고 까마귀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가야 했다.
"알았으면 비켜. 아니면 진짜 죽는다?"
동시에 진채원이 인드라 유물을 발동 시켰다.
인드라 유물은 본래 강한 지배력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굉장히 다루기 힘든 유물!
진채원은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인드라 유물을 굉장히 자유롭게 다루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그걸 본 다른 발굴단은 환호했고, 일리야는 쌍욕을 날렸다.
'망할 놈의 사황!'
곧 일리야가 다급하게 유재하를 보았다.
진채원이 당당하게 비보가 있는 무덤 안으로 들어가려했기 때문이었다.
"자, 어서 가자."
그녀는 줄리앙을 불렀다.
틀림없이 줄리앙에게 비보를 넘겨주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가면 후회할 텐데? 이거 보통의 사진이 아닌데?"
"?"
"이거 우리 단장님 19금 사진인데!"
줄리앙을 데리고 무덤으로 가려던 진채원이 우뚝 멈춰섰다.
***
"뭐? 무슨 사진이라고?"
진채원은 굉장한 흥미를 가지는 듯 했다.
표정은 침착하고, 웃음기도 없지만 분명했다.
'좋아, 미끼를 물었다!'
유재하는 속으로 낄낄 웃었다.
물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진채원이 멈춰서자 당황하는 눈치였다.
"저, 교, 교수님?"
유재하는 자신이 들고 있는 사진의 앞면을 슬쩍 보여주었다.
그러자 문득 보인 살색 덩어리.
순식간에 진채원의 눈이 사진을 쫓았다.
하지만 빠르게 사진을 거둔 유재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봤지? 진짜 19금 사진이야. 무려 단장님 알몸샷이라고! 적나라하다고!"
그 말에 일리야가 충격을 받은 듯했다.
아니 이 자식은 그걸 왜 들고 있는 건데?
그러나 유재하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내가 단장님 팬들한테 큰 떡밥 뿌리려고 보관하고 있던 건데, 어쩔까. 드릴까?"
그 말에 듣다 못한 줄리앙이 화를 냈다.
"야, 그딴 딜이 통할 것 같으면...!"
그런데 이때였다.
"그거 진짜 서주헌이야?"
"?!"
뜻밖에도 진채원이 반응을 했다!
그들은 입을 떡 벌리고 진채원을 보았다.
"교, 교수님."
"그래, 나랑 손잡으면 이거 준다니까."
그리고 그 순간 번개가 내리쳤다.
콰르릉!
유재하는 깜짝 놀랐다.
그러나 진채원은 빼앗으면 된다는 건지, 인드라의 유물로 유재하를 공격하고 들었다.
그러자 유재하는 재빨리 사진을 호수에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만해, 날 습격하면 사진은 호수로 떨어진다! 이 호수는 평범한 호수가 아닌 거 알지!"
알다마다.
빠지면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끔찍한 호수.
사진 역시 무사할 수 없다.
"참고로 이거 원본이야. 사본도 없다. 알았어? 단장님이 데이터 싹 지우라고 해서 이제 세상에 하나밖에 안 남은 귀한 사진이라고!"
동시에 진채원이 뒤돌아섰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반응에 발굴단들은 긴장했다.
'저 여자가 없으면 비보는 못 얻을텐데.'
그들은 침을 꿀꺽 삼키고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저 여자가 배신할 리가 없지.'
'저런 거에 넘어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녀는 충격적인 말을 내뱉었다.
"좋아. 오피셜 복원사 말고 호구왕 너, 따라와. 비보를 얻게 해주지."
"...교, 교수님?!"
유재하가 입꼬리를 올렸다.
후환은 생각하지 않는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