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나를 선택해라 (2)
[나리. 까마귀 무덤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요.]
"!"
주헌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지금 뭐라고?
그는 뭔가 잘못 들었다는 듯이 제 주머니의 변강쇠를 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냐?"
[까, 까마귀님... 아니, 저주받을 까마귀가 근처에 있습니다요, 나리!]
그 말을 하는 변강쇠는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까마귀는 신급 유물들도 굉장히 꺼려하는 유물.
고작 B급 언저리에서 놀고 있는 변강쇠 유물이 두려워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까마귀라는 말에 주헌은 눈살을 찌푸렸다.
"까마귀의 무덤이 이 근처에 있다고?"
주헌은 의아해했다.
물론 예측을 하지 못한 건 아니다.
'운명왕이 그런 예언을 했다.'
비보가 나타날 때 까마귀의 무덤이 나타날 거라고.
그걸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러나 주헌은 이곳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던 참이다.
왜?
'까마귀의 무덤의 기운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자신은 이미 까마귀의 무덤에 가봤었다.
그 무덤의 감각을 잊을 리가 없었다.
자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인상에 남았고, 존재감을 과시하는 무덤이었다.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던 자신들조차도 정체를 알지 못했던 무덤.
함정을 눈치채면 그 순간 죽었고, 죽은 동료의 장례는커녕 수습할 시간도 없었던 곳.
그런 만큼 이 근방에 그 엿 같은 무덤이 있었더라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만한 무덤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까마귀의 무덤이라고?"
[네, 상당히 멀긴 하지만...]
그러자 잠시 생각하던 주헌은 원래 향하려던 곳으로 향했다.
왜?
바로 가까운 곳에 비보가 있었으니까.
[매우 강력한 비보가 느껴집니다.]
하지만 주헌이 이동하려고 하자 동아줄이 당황해서 또 주헌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쪽은 아니야, 아니야!
아니, 이 녀석이?
주헌은 이놈 보라며 동아줄을 황당하게 보았지만 동아줄은 낑낑거렸다.
평소라면 이러지 않을 녀석이 이상했다.
하지만 동아줄이 그러는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그쪽은 위험한 게 있어, 있어!
비보 중에서도 위험한 놈이었다.
아까 주헌을 쫓아오던 스토커 유물보다는 낫지만 위험하다.
주인의 생명을 깎아먹을 타입이기 때문이다.
동아줄은 필사적으로 바디랭귀지로 말을 전달하려고 했다.
그리고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하던 동아줄을 빤히 보던 주헌이 수긍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았다."
그 말에 동아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응원 고맙다. 땡큐."
[?!]
동아줄은 충격을 받았다.
곧 주헌이 대수롭지 않게 발걸음을 옮기자 동아줄은 새하얗게 질렸다.
그, 그거 아니야, 아니야!
결국 동아줄이 훌쩍이며 필사적으로 쫓아오자 보다 못한 변강쇠가 한마디 했다.
[나, 나리. 아무래도 이쪽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 같은데요?]
"알아, 나도."
그냥 놀린 것뿐.
이러니저러니 해도 필사적으로 씰룩이는 모습은 꽤 귀여웠으니까.
곧 주헌이 집중해서 오라를 탐지했다.
설아가 있었으면 더 정밀하게, 더 확실하게 캐치를 하겠지만 지금은 그녀가 없다.
그래도 충분했다.
[간악한 유물이 느껴집니다.]
[성스러운 성배가 느껴집니다.]
[지식의 유물이 느껴집니다.]
[매우 흉포한 까마귀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주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굳이 변강쇠에게 묻지 않아도 까마귀 무덤이라는 게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그걸 본 주헌은 대수롭지 않게 방향을 정했다.
"좋았어, 그럼 이 성스러운 유물 쪽으로 가볼까?"
[예이, 제가 느껴도 느낌이 좋은 유물입니다.]
그러자 뒤흔들리는 무덤.
쿠르르릉!
"..."
갑자기 무덤이 뒤흔들리자 주헌은 의아한 듯 무덤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냥 지식의 유물 쪽을 노릴까?"
[오오! 거기도 좋을 것 같습니다요!]
하지만.
쿠르르릉!
무덤은 또 다시 뒤흔들렸다.
아까보단 좀 더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이에 주헌이 웃으며 방향을 잡았다.
"아니다. 역시 간악한 유물 쪽이지."
주헌이 가운데 길로 들어가자 무덤이 미친 듯이 요동을 쳤다.
쿠르르릉!
다른 놈들은 몰라도 왜 하필 그쪽으로 가느냐는 듯한 시위 같았다.
그럴 때였다.
참다못한 건지 무덤이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나, 나리!]
물론 동굴이 무너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지각 변동이 일어나듯 무덤이 뒤틀리면서 길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윽고 주헌의 오른쪽에 나타난 낯선 샛길.
샛길은 마치 이쪽으로 와달라는 듯이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떠오르는 메시지.
[이쪽 길을 걸으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습니다.]
[엄청난 행운이 따를 것 같습니다.]
[매우 유익한 유물을 얻을 것 같습니다.]
주헌은 그걸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거참, 이놈 봐라.
***
한편 그 무렵.
"하씨, 저기까지 어떻게 들어가냐."
유재하는 도끼를 든 채 동굴 안에서 기웃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사기왕 비보를 구하러 온 것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들어갔던 곳은 잘 기억했으니까.
하지만.
"젠장, 여기 혼자서 들어가는 건 무린데..."
그렇다.
여긴 굉장히 위험한 길목이었다.
옛날에도 TKBM 발굴단 사이에 껴서 들어갔다가 구한 것이고.
그리고 유재하는 슬쩍 제 옆의 친구(?)를 보았다.
"야, 니가 들어가 봐."
"돌았냐?"
식인종에서 겨우 벗어난 일리야는 씩씩거리면서 유재하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베테랑이라서 잘 알았다.
'이대로 저기로 들어가면 뒤진다.'
그래서 여차여차 비보가 있는 곳까지 왔으면서도 들어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던 것이다.
"이를 어쩐다..."
"비보가 바로 코앞에 있는데..."
그럴 때였다.
"얼씨구? 니가 왜 여기에 있냐?"
"새로운 친구도 사귀었나 보네?"
낯익은 목소리에 유재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를 돌아보자 낯익은 얼굴들이 있었다.
'줄리앙, 신승희.'
그들을 알아본 유재하는 헛웃음을 흘렸다.
"선배... 아니 니들이야말로 여긴 어쩐 일이래?"
그렇다.
눈앞에 있는 건 오피셜 수석 복원사 팀.
그리고 오피셜 수석 복원사이자 유재하의 선배와 후배가 있었다.
그리고 유재하의 말에 줄리앙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째서인지 전과 다르게 세게 나오는 유재하가 영 마음에 안 들었던 것이리라.
"흥, 어쩐 일이긴. 네놈 때문에 실추된 명예를 찾으러 온 거다."
"비보만 얻으면 왕급으로 확정될 수 있으니까요."
"그걸로 감옥에 계신 리더츠 교수님을 빼올 거야. 알았어?"
유재하를 공개망신 시키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 허세에 유재하는 코웃음을 쳤다.
확실히 바로 앞에 비보가 있긴 하지만...
"니들이 비보를 얻는다고?"
저들도 자신들과 똑같은 복원사들이었다.
비전투원이라는 의미였다.
"들어갔다가 뒤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상관없거든? 들어가는 건 우리가 아니니까."
"?"
"우리랑 손잡은 발굴단이 대신 들어갈 거야."
"!"
그럴 때였다.
"어머, 너희들의 단장... 서주헌은 없나보지?"
그들은 눈앞에 나타난 왕급에 식겁하고 말았다.
저, 저 사람은!
***
한편 그 무렵.
달기는 아이린 때문에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았다.
아니, 왕의 무덤에 오자마자 주헌에게서 떨어진 건 그렇다 쳤다 이거였다.
이건 비보들이 왕급들을 뽑는 테스트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즉 모든 유물 사용자들이 무장해제 상태라는 것.
그리고 이 섬에는 평소 눈엣가시라고 생각했던 아이린이나 이설아, 클로에가 있었다.
'그 인간 여자들을 처리하고 주헌을 차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이 섬에서는 다들 무장해제가 되었을 테니까.
물론 단순한 질투심 뿐만은 아니었다.
그 여자들과 밧줄 하나(?)는 엄청난 방해꾼이었다.
자신이 주인의 침실에 들어가 양기를 얻으려고 하면 꼭 방해를 해서는.
게다가 클로에와 밧줄은 아직 경계하지 않아도 될 범위라고 쳐도 설아와 아이린이 문제였다.
주헌은 그 여자들하고 무척 가까웠다.
심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런 여자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유혹에도 넘어오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달기는 초조했다.
'어서 서주헌의 양기로 SS급 유물로 승급해야 하는데.'
그 여자들을 어떻게든 처리해야 했다.
뭐, 죽일 생각은 없었다.
주헌에게 미움을 받기는 싫으니까.
양기를 얻을 상대라고는 하나, 달기는 주헌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냥 무장해제 상태인 아이린 일행을 만나 쓴맛을 보여주려고 했던 것뿐.
그리고 방해꾼이 없는 이 무덤에서 주헌의 양기를 빼앗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게 웬걸.
[왜 하필 주인으로 걸린 게 파산왕이야!]
달기는 울부짖으며 아이린을 죽이려고 들었다.
아이린이 주인이라니, 굉장히 굴욕적이었기 때문이다.
강제로 아이린에게 무릎을 꿇는 기분이었다.
하녀가 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아이린은 달기를 처음 만났을 땐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왜?
미우나 고우나 주헌의 유물이니까.
하지만...
[썩 꺼져라! 너한테 지배당하기는 싫다!]
달기는 아이린을 죽이려고 들었고, 아이린에게 단숨에 제압당해버렸다.
아이린 역시 괜히 왕급이 아닌지, 아니면 주헌의 교육 효과가 엄청 났던 건지.
다루기 쉬운 유물이 아닐 텐데도 아이린은 달기 유물을 잘 억제했다.
그리고 그녀는 달기가 평소 마음에 들지 않았어도 잘 어르고 상냥하게 대했다.
하지만...
[인간. 넌 서주헌이 내 몸의 어디를 가장 좋아하는 줄 아느냐?]
달기가 아이린의 심기를 엄청나게 건드리기 시작했다!
멘탈을 휘둘리게 하면 인간의 지배력은 떨어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지배력이 떨어지긴 개뿔!
"주헌 씨가 어떤 스킨쉽을 좋아하는 줄 아느냐고?"
그리고 어디를 만져주면 좋아하는 줄 아느냐고?!
"이 망할 색욕의 유물이 진짜."
뭐가 어쩌고 저째?!
콰앙!
아이린은 기어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
[꺄아악! 아니다, 내가 잘못했다, 그만, 그마아안! 꺄악!]
달기는 아이린의 지배력에 쾅쾅 부서졌다.
그녀도 주헌의 모범학생이기 때문에 남들은 쉽게 모르는 유물 파괴법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어디 그뿐인가.
"뭐라고? 단장님의 양기가 어쩌고 저째? 저 유물 놈이!"
"어디서 요망한게 굴러들어와서! 단장님 유물이라고 봐줬더니!"
[이거 안 놔? 이 세컨드들이! 본처는 나다!]
"이게 미쳤나!"
아이린에게 합세한 클로에와 설아도 분노의 응징을 가했다.
달기는 그 와중에 자신의 수인들을 불러내며 방어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달기는 강제로 힘을 빼앗기고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며 덜덜 떠는 이들이 있었다.
"여, 역시 왕급. 파산의 유물이 없어도 강해."
"그뿐이 아니야. 틀림없어, 저 여자들 모두 왕급이야."
"서주헌의 주변엔 엄청난 인재들이 있다."
그녀들을 해치우려고 접근했던 사냥꾼들은 감히 다가갈 생각을 못했다.
"이, 일단 도망가자."
하지만 이때였다.
"가긴 어딜 가?"
"?!"
그들은 자신들의 어깨를 잡는 한 남자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너, 넌! 책략왕!"
율리안은 빙긋 웃었다.
"됐으니까 니들도 가진 거 다 내놔."
곧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유물 폭탄 덕분에 적들이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그리고 그는 태연하게 놈들의 지갑이며 유물이며 모조리 쓸어갔다.
어째 책략왕이 약탈왕으로 변할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었다.
결국 그 광경에 아이린 일행이 깜짝 놀랐다.
"부단장님?"
"밀러 씨?"
율리안은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라며 말을 이었다.
"슬슬 빨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주력 발굴단들이 섬에 하나둘씩 도착한 것 같거든."
그는 주헌이나 다른 멤버들은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다.
"이 근처에서 비보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그러자 설아가 난처해하며 중심부 쪽을 가리켰다.
"단장님의 기운은 저쪽에서 느꼈어요."
그럴 때였다.
주헌이 있을 돌산 쪽에서 엄청난 섬광이 터져 나왔다.
"저건!"
특히 율리안과 설아는 깜짝 놀랐다.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흉흉한 오라.
분명 낯이 익은 오라였기 때문이다.
바로 자신들이 죽었던 무덤에서 느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