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나를 선택해라 (1)
[그럴 땐 내가 필요하지 않겠느냐, 인간.]
주헌은 낯익은 목소리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이 목소리는?'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틀림없이 낯이 익었다.
유물의 목소리였으니까.
하지만 까마귀는 아니었다.
까마귀의 목소리는 몇 번 들어봤기 때문에 익숙했다.
이런 간사하고 역겨운 톤이 아니었다.
까마귀는 굳이 비유하자면 과거에 고고한 귀족 남자가 대충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은 톤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유물들?
아니 그건 더더욱 아니다.
제 유물 중에서도 못돼 쳐먹은 놈들은 많지만, 다들 장난기가 많은 도깨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달랐다.
주헌이 싫어하는 유물 중에서도 제일 싫어하는 놈들이었다.
즉 유물들 중에서도 역겨운 타입들.
비열하고 간사하며 인간을 개돼지처럼 생각하는 간악한 놈들 말이다.
그런 역겨운 놈들이 내는 목소리와 매우 흡사했다.
그리고 언제였더라.
'채원아, 이건 뭐야?'
'아, 그거?'
당시 권 회장의 명령으로 진채원에게 접근했을 때일 것이다.
권 회장은 그때 미국과 굉장히 친했고, 미국과 전쟁을 하려는 중국의 동향에 신경을 썼다.
그래서 늘 그러하듯, 주헌에게 명령을 내려 일부러 진채원에게 접근시켰다.
진채원과 굉장히 가까워진 주헌은 진채원의 연구실 깊숙한 곳에도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그때 분명히 보았다.
'이거 뭐야? 유물인 것 같은데.'
'아, 그거 나도 감당하기 힘들어서 가둬 둔 유물이야. 그런데 이번에 미국한테 써볼까 하고. 주헌이 네가 관심 있으면 보여줄까?'
'그래도 돼?'
'너에게라면 얼마든지 보여줄 수 있어.'
그때 보았던 유물들.
얼핏 히틀러 유물이나 세기를 풍미할 악인들, 질병 유물들이 담겨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악질적인 유물들이 내던 목소리와도 흡사했다.
[인간, 여기서 우리를 꺼내라.]
[어서.]
[여기서 꺼내주면 널 최고의 왕으로 만들어주마.]
음습하고 소름 돋는 목소리.
목소리뿐만 아니라 오라조차도 너무 불쾌해서 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위험해도 너무 위험했다.
그때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유물들이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때 유물들이 여기서.'
진채원의 연구실에 있어야 할 그 유물들의 목소리가 왜 왕의 무덤에서.
그럴 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주의. 왕의 비보 중에 악랄한 유물이 숨어 있습니다.]
[주의. 그 사악한 왕의 비보가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주의. 당신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습니다.]
동시에 흉흉한 오라가 주헌을 습격해왔다.
마치 뾰족하고 검은 촉수 같았다.
쿵! 쿠구웅!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오라는 동굴 전체에 뻗어 주헌을 쫓아오기 시작했다.
[주의. 강력한 유물증후군에 노출됩니다.]
[오라에 피부가 무너져내립니다.]
[내성으로 막아냅니다.]
[내성 스킬로도 다 막아내기 힘듭니다.]
"칫."
주헌은 급하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나 가시넝쿨처럼 뻗어오는 검은 오라는 주헌의 발밑을 습격했다.
쿵!
동시에 주헌이 몸을 튕기듯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그런 주헌을 농락하듯 천장에서 돌들의 잔해가 떨어졌다.
쿠구궁!
다른 신급 유물이 있으면 일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변강쇠와 동아줄 뿐!
"큭!"
주헌은 동아줄을 붙잡고 가까스로 잔해를 피했다.
그러나 놈의 집착은 끝나지 않았다.
[역시 비보를 가지지 않은 인간은 약하구나.]
[흉흉한 오라가 당신과 함께 하고 싶어 합니다.]
[당신의 몸을 탐냅니다.]
[이 불쾌하고 강력한 비보는 당신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합니다.]
[계약을 하고 싶어 합니다.]
넌 필요없다 이놈아.
정체는 모르겠지만 소름이 돋았다.
'뭐지 저 유물.'
주헌조차도 본 적이 없는 유물.
아니, 세상에 드러난 적이 없는 위험하고 탐욕적인 유물.
곧 놈의 흉흉한 오라가 주헌을 옭아매려고 했다.
그러나 그 순간.
위험해! 위험해!
동아줄이 엄청난 힘으로 주헌을 낚아채고 순식간에 그 자리를 피했다.
쿠궁!
그리고 자리를 피한 주헌은 헉헉거리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헌은 켁켁 기침했다.
동아줄 때문이었다.
더러운 게 묻었어! 묻었어!
동아줄은 씩씩거리며 주헌의 얼굴부터 시작해 놈의 오라를 벅벅 닦기 시작한 것이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 보였다.
다른 유물이 주헌을 탐내는 게 몹시 싫은 기색이었다.
그럴 때였다.
[주의. 놈이 다시 다가옵니다.]
이에 동아줄이 이빨을 세우는 것 같았다.
덤빌 테면 덤비라는 기세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주헌은 거기가 아니라는 듯, 재빨리 동아줄의 꼬리를 낚아챈 후 스킬을 발동했다.
[무덤 파괴를 사용했습니다.]
쿠구궁!
주헌은 재빨리 무덤에 없는 구멍을 뚫어 도망쳤다.
'칫, 내가 먼저 계약할 놈은 저딴 놈이 아니다.'
15개의 비보를 다 쓸어간다고 해도 일단 첫 번째로 계약할 비보를 고르긴 해야 했다.
하지만 저딴 비보는 줘도 싫었다.
그리고 저딴 새끼는 단원들에게도 줄 생각이 없었다.
'너무 위험하다.'
동시에 주헌은 자신을 쫓아오는 유물의 정체를 깨달았다.
'설마 진채원, 그 여자가 풀어놓은 유물이 비보가 된 건가.'
진채원이 위험한 유물을 세상에 풀어놓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애초에 사기왕으로 등장한 루이 마틴.
유재하의 아들(?)로 추정되는 그놈 역시 진채원이 푼 유물로 왕급이 된 것이 아닌가.
현재 과거에 비해 왕급 후보자가 늘어난 것은 그 탓일 것이었다.
어쨌거나 그 유물들이 늦건 빠르건, 진채원이 죽고 나면 세상에 나올 걸 알았기에 주헌은 준비를 하고 있었다.
'뭐 왕의 비보가 되어 있을 줄은 몰랐지만.'
그리고 그럴 때였다.
[주의. 유물이 뒤까지 쫓아왔습니다.]
"!"
아까의 스토커 유물이 금세 주헌에게 따라붙은 모양이었다.
놈은 주헌에게 말했다.
[네가 마음에 든다. 나와 계약하자.]
놈은 다짜고짜 주헌과 계약하려고 들었다.
물론 순순히 따를 주헌도 아니었다.
"닥치고 꺼져. 넌 내 취향 아니야."
어디 그뿐인가.
주헌은 유재하가 한 말을 떠올렸다.
'아셨죠? 아무 비보하고나 계약하면 안 돼요. 비보의 버프 성능이 상당히 복불복이라서.'
'복불복?'
'초인이 되긴 하는데, 오히려 디버프를 먹이는 것들도 있어서요. 예를 들면, 지배력이 제로가 된다거나... 고자가 된다거나... 이성한테 인기가 없어진다거나... 흑.'
'...그거 설마 니 이야기는 아니지?'
'그게 없으면 신급 유물을 못 다루게 되니까 썼던 거지... 젠장.'
어쨌거나 비보하고 계약은 신중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이놈하고 계약해버리면 다른 비보하고는 계약을 못 하게 되어버렸고.
그리고 그걸 떠나서라도 이놈은 느낌이 싫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이 기분나쁜 유물은 다짜고짜 주헌을 강제로 붙잡았다.
[너처럼 강한 왕급은 드물다. 마음에 든다.]
아니? 난 싫다니까?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검은 오라는 주헌의 다리를 움켜잡고 점점 기어 올라왔다.
[위험. 침식당합니다.]
[유물이 강제로 계약을 시도합니다.]
이에 불길함을 느낀 건지 변강쇠가 '나리!' 하고 달려들다가 오라에 닿자마자 파괴되었고.
"!"
동아줄 역시 분노해서 놈을 움켜잡으려고 했다.
그걸 본 주헌이 아차 싶었다.
'안 돼. 저놈, 디버프 먹었을 텐데.'
그 예상은 맞았다.
검은 오라에 닿은 동아줄은 바로 부식되어버렸다.
상대의 유물이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흉흉했기 때문이었다.
그럴 때였다.
수상쩍은 유물이 주헌의 몸을 완전히 잠식해 강제로 계약을 맺으려는 그 순간.
동아줄이 낑낑거리며 눈을 번득였다.
그리고 그 순간.
[어딜 감히 그 인간에게 손을 대느냐.]
낯익은 목소리와 함께 눈부신 빛이 번쩍였다.
***
언젠가 주헌은 유재하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아니고 전생 때의 일이다.
"내가아아~ 병신 단장님한테에 술 얻어먹었으니까 조은 거 말씀드릴게요."
"병신아, 자라."
"아씨 좀 들어! 아무래도 유물들은 인간 중에서 뛰어난 지도자를 뽑으려는 거 같단 말이에요!"
"지도자?"
"네에에.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고 영향력 있는 지도자요. 비유하자면 예수나 석가모니 급으로? 뭐, 그래봐야 유물들은 자신들을 대신해서 인간사회를 뒤흔들어줄 강력한 파괴자를 바라는 것뿐이겠지만요."
그래서 왕의 비보가 나타난 것 같다고 했다.
왜?
"유물을 잃어버리면 다들 똑같은 인간이잖아요오호?"
유물은 쉽게 말해 아이템.
게임으로 비유하면 물약이나 장비에 가까웠다.
그래서 아이템이 파기되거나 빼앗기면 평범한 인간이 되고 만다.
여러 가지로 불확실한 요소가 많은 것이다.
하지만 비보를 얻게 되면 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비보를 얻으면 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아니게 되니까요."
"설마 비행기에서 떨어져도 안 죽는 네 기이한 몸뚱어리는 그 탓이었냐?"
"커, 커흠."
"미친 놈."
아무튼 보통의 인간보다 더 초인이 되어서 보다 더 유물을 잘 다룰 수 있게, 보다 더 유리하게, 보다 더 오래 살아남게 만들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간사한 인간이라도 힘이 없거나, 암살당하거나 체포당하면 끝나버리는 거니까.
즉, 인간을 잘 괴롭힐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 비보가 나타났다고 해야하나.
과연 유물다웠다.
그리고 지금 현재.
주헌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 정체 모를 유물 역시 같은 이유로 자신을 탐내는 것이라고.
어쩌면 까마귀도 단순히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당장 꺼져라, 유물. 그 인간에게는 손대지 마라.]
[크윽!]
까마귀로 추정되는 낯익은 오라가 흉흉한 오라를 몰아냈다.
[마신급 유물이 서로 부딪칩니다.]
엄청난 힘의 충돌이었다.
그 충격으로 바닥과 천장이 무너지고 주헌은 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 소름끼치는 유물은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큭."
동시에 주헌은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까마귀가 또 나타난 건가?'
왜 여기에 있는 건가 싶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로 했다.
놈은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쫓아다니는 스토커니까.
그런데 그럴 때였다.
[나리, 나리! 냄새가 납니다.]
벌벌 떨고 있던 팬티... 아니 변강쇠 놈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기어나왔다.
[냄새가 난다고요!]
"난 너한테서 냄새가 난다."
주헌은 짜증을 내며 돌아서려고 했다.
"저놈 말고 다른 비보를 찾아야겠어. 계약할 만한 놈으로."
한번 비보 놈을 겪어보니까 알 것 같았다.
'강하다.'
주헌은 신이 난 듯 입꼬리를 올렸다.
방금 전, 그놈이 특별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보 유물은 급이 다르긴 달랐다.
그래서 굉장히 탐났다.
왜 비보를 가진 놈들이 넘사벽으로 강해졌는지 알 것도 같았다.
곧 주헌이 눈을 반짝이며 샛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집중해보면 알았다.
'저쪽에서 비보가 느껴진다.'
그럴 때였다.
그쪽 아냐! 그쪽 아냐!
"큭!"
동아줄이 어째서인지 낑낑거리며 주헌의 발을 콱 붙잡았다.
그것도 아무것도 없는 방향 쪽으로 잡아 당겨서 주헌은 좀 화를 냈다.
"놔 이거! 그쪽은 아니야!"
그러나 동아줄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쪽 아니야!
"놓으라고!"
안 돼! 안 돼!
이 녀석이 도대체 왜 이러지?
주헌은 그냥 무시하고 다른 비보를 찾으러 가려고 할 때였다.
쿠르릉.
무덤이 갑자기 뒤흔들렸다.
그게 이상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다시 갈 길 가려고 할 때였다.
쿠르릉.
역시나 다른 비보를 찾으러 가려고 할 때마다 무덤이 성난 듯 뒤흔들렸다.
주헌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변강쇠가 그 말을 하기 전까진.
[나리. 까마귀 무덤이 이 근처에 있는 것 같은데요.]
"!"
주헌은 발걸음을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