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화. 기억을 돌릴까, 말까? (2)
"잘했다. 일리야. 서주헌을 길들여놨... 엥?"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일리야?"
그의 부름에 일리야는 눈을 질끈 감았고 주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게 무슨..."
이상해도 굉장히 이상했다.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은 공사장 1층.
그리고 저들이 있는 곳은 7층 옥상.
충분히 목소리가 닿을 거리였고, 저기에 서 있는 것도 분명 그 둘이 맞았다.
주헌은 검은 라이더자켓에 캡모자를 쓰고 있었고, 금발의 일리야는 후드에 청자켓.
일리야 쪽이 키가 더 크긴 하지만 둘 다 키가 컸고, 체격들도 왜소하지 않고 건장한 축.
둘 다 어디 가서 맞고 다닐 상은 아니었다.
아무튼 일리야가 주헌과 함께 있는 것 까지는 좋은데...
"일리야 씨, 어떻게 된 겁니까!"
권혁수와 함계 온 경호원도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건 당연했다.
"서주헌을 부하로 만들어둔 거 아니었어요?!"
"왜 잡혀 있는 거예요!"
부하는 개뿔이.
"죽을래? 누가 누구의 부하야. 그치?"
주헌이 일리야 머리를 거칠게 짓누르자 일리야는 크윽 눈살을 찌푸렸다.
'이자식이 진짜.'
그리고 그 광경에 권혁수 일행은 입을 떡 벌렸다.
비록 시멘트에서는 꺼내진 모양이지만, 동아줄에게 꽁꽁 묶인 채 서 있는 꼴이 가관이었다.
그것도 난간 근처에 서 있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아찔한 위치에!
물론 숨어 있는 단원들은 그걸 보며 쯧쯧 혀를 찼다.
'저건 뭐 영락없는 후크 선장이잖아.'
진짜로 그래보였다.
왜?
[주이이인! 턱 빠지겠어!]
[언제까지 이래야해!]
[빨리 떨어트려!]
밑에는 악어들 대신 이집트 멍멍이 유물들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나운 이빨이 굉장히 날카로웠다.
어디 그뿐이랴.
[저 인간은 내가 찢어발길 거다!]
[아니야! 나야! 나라고!]
[빨리 떨어트려!]
아누비스가 불러낸 짐승들이 크아앙 입을 벌리고 있었다.
상황은 흡사 피라냐들이 쩍쩍 입을 벌리고 있는 아마존 강가의 모습.
다들 고대 악어 형태의 미라였는데, 치아가 그대로 남아 있어 저기에 떨어지면 사정없이 살점이 뜯겨나갈 기세였다.
그러니 단원들은 혀를 찰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짜 안 떨어트리는 게 다행이지.'
아니, 수틀리면 진짜 떨어트릴 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일리야가 포로가 된 상황이니 권혁수가 기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주헌은 이딴 말을 했다.
"이미 늦었어. 오늘부터 이놈은 내 졸개다."
저 미친놈이 무슨 개소리를!
권혁수의 경호원들은 곧바로 주헌에게 향했다.
"저놈의 입을 닥치게 하고 오겠습니다!"
유물 사용자의 경호원답게 그들은 유물을 뽑아 들었다.
얼핏 보면 권총 형태의 유물.
그때였다.
"어허, 가까이 오지 마시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리야가 비명을 질렀다.
주헌이 제 옆에 있던 일리야를 확 걷어찬 것이다.
쿵!
동시에 꽁꽁 묶인 일리야는 땅에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
한편 그 무렵.
[한편 운명왕을 찾는데 미국의 거상, 톰 휴건이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톰 휴건, 그러니까 권혁수 씨는 TKBM의 정복왕 권태준 회장과 의형제를 맺고 있으며...]
화장실에 감금 중이던 운명왕의 얼굴이 밝아지고 있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TV 소리는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휴건? 권혁수 말야? 자애왕? 날 찾기 위해 그놈이 나섰다고?!"
권혁수는 왕급.
비록 명단에는 이름이 아직 안 올라왔지만, 그는 독식자들에겐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다.
전면으로는 TKBM의 권 회장을 내세우면서 본인은 수면 밑에서 지금까지 착실히 힘을 기르고, 유물사용자들을 길렀다고 해야 하나.
'그놈은 사후처리반이랑 암살자들을 기르고 있다.'
특히 사후처리반에는 일리야 볼고프라는 특출한 놈이 있다고 들었다.
'그놈이면 분명 서주헌을 처리하고 날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웃던 운명왕은 더 자세히 듣기 위해 낑낑 욕조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문에 귀를 대면서 더 많은 정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떻게든 정보를 캐내 조금이라도 놈들이 자신을 찾는데 도움이...
그런데 이때였다.
쾅!
"쿨러억!"
대뜸 문이 열리고,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졸지에 문에 얻어터진 운명왕이 울부짖었다.
문을 연 것은 다름 아닌 단이었다.
운명왕은 코피가 흐르는 코를 만지면서 쌍욕을 했다.
"야씨, 너 죽을래?! 시팔, 이 하등한 놈이...!"
하지만 곧 그는 헉 입을 다물었다.
단이 들고 있는 물건 때문이었다.
그건 소를 잡을 때 쓰는 도축용 칼!
그리고 칼에 묻어 있는 피(?)를 보고 운명왕은 끄아아 비명을 질렀다.
"알았어! 얌전히 있을게! 얌전히 있으면 되잖아!"
제풀에 놀란 운명왕은 다시 욕조 안으로 쪼르르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쭈그리고 앉아 훌쩍였다.
'젠장, 반항하면 저 칼에 내 목이 따일 거야.'
그렇다.
자신을 감시하는 서주헌 멤버들이 몽땅 사라져서 '아이고 좋아라! 부하들아 나 여깄어! 어서 찾아내!'하고 탈출을 계획하고 있었건만.
갑자기 이 호텔에 단이 들이 닥친 것이다.
아무래도 주헌의 명령을 받고 온 모양이었다.
아직 기억을 찾은 건 아니었지만, 단은 주헌을 딸을 구해 준 운인으로 여기고 있었다.
거절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처음엔 단이 들이닥치자 '이 새끼, 너 결국 그 서주헌 개새끼하고 편먹었냐?!'하고 소리를 쳤지만 글쎄.
주헌에 대해 쌍욕을 했다가 도축칼로 오히려 위협당했다.
운명왕은 그때의 눈빛을 아직도 잊지 못했다.
"VIP 나리, 돼지 멱따는 소리 들어 보셨어?"
아무리 뚫린 게 입이라지만 말은 똑바로 하라는 눈빛.
그냥 칼만 들고 있었을 뿐인데도 정말 무서웠다.
눈빛도 험악한데 체격도 크지, 근육도 빵빵하지.
그 두꺼운 팔로 툭 맞으면 갈비뼈는 쪼개질 것 같지.
거기에 도축업자라 칼은 조폭 놈들보다 잘 쓸 테지.
깝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정작 단은 훌쩍이는 운명왕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주헌 씨가 무슨 고기를 좋아하는 줄 아느냐고 물으려고 한 건데.'
그리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시 주방으로 갔다.
오늘은 가장 좋은 고기가 들어오는 날.
주헌이 돌아오면 특등급 고기라도 대접하리라.
***
"으아아악!"
한편 주헌에게 걷어차인 일리야는 순식간에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높이는 7층 높이.
떨어지면 죽는다!
하지만 그 순간!
턱!
다행히 돌아줄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아찔한 순간에 멈췄다. 물론 그걸 보는 사람들은 심장이 떨어질 뻔 했지만.
"저놈이 진짜!"
"십년감수했네!"
하지만 그런 일리야에게 몰려든 멍멍이들과 사나운 악어떼들.
일리야는 바로 제 하반신을 뜯기 위해 펄쩍 뛰는 악어들을 보며 질겁했다.
심지어 일리야의 중요한 부분을 물어뜯으려는 놈이 있어 권혁수 일행도, 심지어 단원들도 비명을 질렀다.
진짜 부하를 다루는 게 거칠다고 해야 할지, 험하다고 해야 할지!
"야! 서주헌! 적당히 안 해?!"
"맞아요! 전 남자인 채로 동료로 받아들이고 싶단 말이에요!"
유재하까지 질겁했지만 주헌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그러거나 말거나 주헌이 놈들을 향해 천연덕스럽게 지껄이는 것이었다.
"이놈을 이대로 부하로 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다."
"제안?"
권혁수도 황당하다는 듯이 주헌을 보고 있었다.
어찌나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던 건지, 늘 웃는 얼굴에 웃음기도 사라져 있었다.
"그래, 니들이 가진 유물을 내놔. 그럼 이놈을 풀어주지."
"저놈이 미쳤나!"
"저 빌어먹을 강탈왕!"
예상대로 그들은 입에 거품을 물었다.
"회장님, 듣지 마십시오!"
"저건 일리야가 아닙니다. 호구왕이 만든 가짜일 거라고요!"
"그 병신! 또 이상한 걸 만들어내다니."
"저런 것도 우리가 못 알아챌까봐?"
그 말에 숨어 있던 유재하가 울컥해서 '뭐라고 이놈들아!' 하고 달려들려고 했고, 설아가 그를 붙잡고 있었다.
이윽고 부하들이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이었다.
[멈춰라, 이놈들아!]
일리야의 그림자에서 악마들이 뛰쳐나왔다.
그리고 그것이 일리야가 부리는 귀속성 유물.
솔로몬의 악마라는 걸 깨달은 그들은 기겁했다.
"미친, 저거 가짜가 아니라 진짜 일리야야?"
"진짜로?"
그럴 때 주헌이 사납게 웃었다.
"진짜다, 이것들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일리야가 비명을 질렀다.
주헌의 뜻을 읽은 건지, 동아줄이 묶고 있던 일리야를 확 풀어버렸기 때문이다.
"악!"
일리야는 사정없이 악어밭으로 곤두박질 쳤다.
'젠장!'
그는 엉겁결에 밧줄의 끝을 움켜쥐었다.
다행히 악어밭으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허공에 떠 있는 동아줄에 매달려 있는 게 고작이었다.
덕분에 일리야는 주헌을 쏘아볼 수밖에 없었다.
'저게 진짜 날 죽일 셈이냐!'
그리고 그 광경에 권혁수의 부하들도 충격에 빠졌다.
악마가 튀어나오다니.
'진짜 회장님의 제자다.'
아무리 유재하 놈이라고 해도 소환물까지 복제할 수는 없는 법일 테니.
이에 그들이 다급하게 외쳤다.
"일리야! 유물을 쓰면 되잖아! 뭐하고 있는 거야!"
"악마들을 부려!"
젠장, 부릴 수 있으면 벌써 부렸지!
곧 경호원들이 외쳤다.
"회장님. 아무래도 악마들을 못 사용하나 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주헌한테 붙잡힐 리가 없어요!"
"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권혁수가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늘 모든 걸 꿰뚫고 있는 그 답지않게 황당하다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저 일리야를 붙잡다니.'
서주헌 저놈 도대체 뭐지?
심지어 기억 조작도 안 통한 것 같고!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솔직히 권혁수는 굉장히 놀라고 있었다.
설령 기억 조작이 통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건 이상했다.
왜?
일리야는 자신이 길들이고 있는 제자들 중에서도 톱.
그에 비하면 서주헌은 그래봐야 도굴하는 재능 밖에 없는 도둑일 텐데.
'어째서.'
자신이 서주헌을 잘못 판단한 건가?
하지만 곧 권혁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그래봐야 도둑놈이다.'
요행으로 왕급이 된 놈.
그렇게 생각한 권혁수가 착한 척 웃음을 지으며 나섰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일단 일리야부터 풀어주게."
"회장님!"
서주헌의 요구에 응할 거냐는 지탄이었다.
그러나 권혁수는 속으로 우습다는 듯 비웃었다.
'바보 같은 일리야.'
그래봐야 일리야에게 또 트라우마가 발동한 것이리라.
그렇다.
사실 일리야는 유물을 사용하는데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늘 그 트라우마를 잠재우기 위한 신경안정제를 줘야 했고, 권혁수는 그걸 이용해 일리야를 길들였던 것이다.
'서주헌은 운 좋게 그 순간과 맞닥뜨린 거겠지.'
덕분에 악마도 못 다루게 되고, 기억 조작도 못한 것이리라.
뻔한 이야기였다.
그런 주제에 무슨 오늘부터 자신의 부하라는 둥, 자신이 잡은 것처럼 설쳐대기는.
'같잖다, 서주헌.'
권혁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는 일단 주헌의 요구에 응해주는 척하기로 했다.
'요구에 응해주는 척하면서 일리야에게 신경안정제 유물을 투입한다.'
그럼 일리야도 다시 악마를 부를 수 있을 테고.
그러면 서주헌의 기억 조작도 가능할 테지.
마침 여기에 서주헌의 부하들도 전부 숨어 있는 것 같으니 잘된 셈이었다.
'전원 내 부하로 길들인다.'
곧 권혁수가 유물을 써서 주헌에게 다가갔다.
"회, 회장님!"
아무래도 허공을 부유할 수 있는 유물 같았다.
권혁수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의 유물을 내밀었다.
"이게 내가 가진 유물 전부일세. 그럼 이제..."
그런데 이때였다.
뻐어어억!
"?!"
"회, 회장님!"
권혁수가 사정없이 날아갔다.
그의 턱을 후려쳐 날린 건 다름 아닌 솔로몬의 악마.
일리야가 불러낸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