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기억에 우는 자 (3)
"죽여라. 왕급이던 네가 서주헌의 밑에서 지내는 것도 자존심 상하지 않느냐?"
"...그건!"
"서주헌을 내버려두면 너무 위험하다. 저놈은 보통 놈이 아니야. 지금은 충성하는 척하지만 날 죽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건 자신이 주헌을 배신했던 때의 일.
하지만 그 광경을 보면서 양 쳰은 공포에 떨었다.
이상했다. 틀림없이 이 광경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이건만.
어쩐지 이게 과거에 겪었던 일 같았다.
그렇게 몸이 반응했다.
어디 그뿐인가.
자신이 살해당한 사진을 발동했을 때 그는 미치는 줄 알았다.
"이 배신자."
서늘한 눈빛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서주헌.
자신이 도살당하는 미래!
그 미래는 유일하게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
앞으로 그가 겪게 될 미래였다.
결국 그는 비명을 지르면서 유물사용을 그만뒀다.
"헉... 허억. 허억!"
그런 양 쳰을 보며 진채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본 거 있어?"
"서주헌, 서주헌, 서주허어언...!"
쾅!
양 쳰은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
공포에 질린 그는 충혈된 눈으로 손을 떨었다.
아주 약간 생각이 난 것 같았다.
서주헌, 단장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그래서일까.
"젠장, 젠장...!"
양 쳰의 두 동공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자신이 동료들을 배신한 일, 그리고 압도적으로 강했던 주헌의 실력.
그런 주헌을 질투하고 두려워하던 권 회장.
"젠장!"
주헌을 아주 약간이나마 떠올린 그는 무서웠다.
물론 까마귀의 눈물을 쓰듯 기억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었다. 진채원이 사용한 키메라 유물은 그래봐야 A급의 재생기.
기억이 돌아올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그래서 주헌처럼 미래의 유물이나 무덤 정보는 전혀 몰랐다.
하지만 영화에 깊이 몰입해서 봤다고 해야 하나. 마치 영화 속 주인공에 빙의한 것처럼.
충분히 자신의 것으로 느낄 만했다.
그래서일까.
'내가, 내가 동료들을 배신했나.'
그는 그런 생각을 했다.
동시에 그는 애써 부정했다.
'아냐, 이건 앞으로 올 미래의 일이다. 서주헌이 미래에 TKBM에 들어오는 거고... 거기서 내가 서주헌을 배신하게 되는 것뿐...'
하지만 그는 사진 속 주헌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단장님!"
후회보다는 무서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걸 보며 진채원이 다급하게 일어섰다.
"뭐야. 뭘 봤는데 그래?"
진채원은 너무 궁금했다.
주헌에 대해서라면 뭐든지 관심이 생겼고, 뭐든지 알고 싶었다.
"이봐, 양 쳰!"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양 쳰은 아무나 쉽게 믿지 못했다.
진채원도 결국엔 적.
지극히 일부분밖에 못 봤지만, 자신이 본 걸 이딴 여자에게 쉽게 말할 리도 없었다. 하지만 그는 힐끗 사진들을 다시 보았다.
'어쩌면 이걸로 서주헌의 약점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뭔지는 몰라도 이건 자신만 볼 수 있는 서주헌의 미래.
'분명 회장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덜덜 떨었지만 다시 사진에 손을 뻗었다.
이번엔 주헌이 권 회장과 함께 찍혀 있는 사진이었다.
***
"주헌씨. 아무래도 진채원, 그 교수가 수상한 카메라를 들고 교도소를 찾아간 것 같아요!"
주헌은 뜻밖의 소식에 흥미로워했다.
"카메라요? 양 쳰한테?"
"네. 이런 모양의..."
아이린은 자신의 오빠에게서 받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사진에 주헌은 헛웃음을 흘렸다.
'운명왕의 유물이군.'
잘 아는 도구였다.
사람의 미래를 찍고, 그 미래를 직접 체험하게 하는 것.
동시에 주헌은 대충 진채원과 운명왕의 꿍꿍이가 뭔지도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양 쳰을 이용해서 미래를 읽으려는 것 같은데...'
그래봐야 크게 바뀌는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놈들이 뭔 짓을 하려고 해도 자신이 바꿔버릴 테니까.
그런데 이때였다.
'음? 아니 잠깐.'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 카메라로 찍힌 사진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지금의 미래일까.
아니면 전생이라 할 수 있는 그 미래일까.
그 생각에 미친 주헌은 입꼬리를 올렸다.
'잘 됐다.'
아무래도 자신들이 죽고 난 후의 미래가 궁금했던 참이었던 것이다.
'그 외의 기억은 죽여서 없애고.'
사실 그 미래야 유일한 생존자일 유재하의 기억을 되살려서 물으면 그만이지만...
주헌은 훌쩍거리면서 유물을 복원하고 있는 유재하를 보았다.
'그래. 사기왕은 안 돼. 골치 아파.'
주헌은 암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주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깐 교도소 좀 다녀온다."
"네?"
"진채원 그 또라이가 이번엔 쓸 만한 짓을 했네."
"네? 그게 무슨...!"
주헌이 대답 대신 휙 호텔을 빠져나가자 아이린은 좀 시무룩해졌고 설아는 으득 이를 갈았다.
'그 집착녀가 이 이상 단장님과 엮이면 안 되는데.'
주헌은 진채원을 단순한 관종 또라이라며 혐오하고 있지만, 설아는 좀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다.
주헌을 향한 그 교수의 광기는 애정이 베이스로 깔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죽하면 주헌의 앞에서 자살까지 했겠나 싶었다.
'아직은 그 정도로 단장님한테 빠진 건 아닌 것 같지만...'
어쨌든 이 이상 그 여자가 단장님에게 호감을 느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왜?
애정이 있으면 뭘 해.
그 애정은 비뚤어져 있을 테고, 그 여자는 사황. 결국 주헌에겐 적일테니까.
그리고 그 무렵.
'진채원 그 또라이가 이번엔 쓸 만한 짓을 했네.'
주헌의 칭찬(?) 아닌 칭찬에 동아줄은 충격에 빠졌다.
아니, 주인님이 또 자신이 아닌 사람에게 칭찬을 하다니!
그리고 시무룩해지는가 싶던 동아줄이 번득 눈을 번쩍였다.
그 모습에 유재하는 불길함을 느끼고 뒷걸음질을 쳤다.
"야, 야야...?"
동아줄은 유재하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크아아앙!
"야, 야! 그마아안!"
하지만 유재하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던 동아줄은 그 옆 호텔 바닥을 팍팍팍팍 파기 시작했다!
"?!"
마치 화장실에 숨겨둔 유재하의 비밀 금고를 찾았을 때처럼!
마치 숨겨둔 비상금이라도 찾는 것 마냥, 개가 뼈다귀를 묻은 장소를 찾는 것마냥 수색견이 된 동아줄은 땅을 팠다.
땅을 파면 주인님이 좋아할 뭔가가 또 나오지 않을까 하는 눈빛!
그리고 그걸 보며 유재하는 울부짖었다.
결국 저렇게 호텔을 망가트리면 그걸 복원하는 건 다 제 몫이기 때문이다.
"야! 그만 안 해?!"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동아줄은 신나게 씰룩거리며 땅을 팠다.
지난번에도 화장실을 팠더니 츄리닝이라고 쓰고 유물이라고 읽는 게 나오지 않았나!
그러니......
이번에도 땅 파면 또 유물이 나올 거야! 나올 거야!
신명난 동아줄은 여기저기를 파기 시작했다.
물론 그 속내를 모를 리 없는 유재하는 죽을 맛이었다.
보나마나 땅을 파서 단장님한테 뭔가 주려는 모양인데!
"야! 땅 판다고 뭐가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어?!"
그러나 유재하가 비명을 지르거나 말거나 동아줄은 슬쩍 유재하의 손에 삽을 들려주었다.
너도 파자. 파자.
"야! 이거 기물파손이거든!"
그리고 루이는 그런 아버지(?)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TV 채널을 돌렸다.
***
한편 그 무렵.
양 쳰은 사진 속에서 주헌의 약점을 찾고 있었다.
장소는 TKBM 사옥.
하지만 TKBM의 규모는 지금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컸다.
비유하자면 거의 제국이라고 해야하나.
그리고 발굴단원들은 눈앞에 있는 충격적인 소식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사황, 중동의 지배자 붕괴]
[4개의 거성들 차례차례 무너지나]
[TKBM의 서주헌이 중동-유럽-아프리카 일대를 차지하다.]
"대박. 서주헌이 포교왕을 완전히 몰락시켰어!"
"와씨, 고작 10명으로 사황급을 무찔렀단 말이야?! 중동하고 유럽하고 아프리카 연합군을? 저 쬐그만한 팀이?"
"돌았네. 역시 회장님이 기르는 오른팔답네..."
"뭐 솔직히 우리 회장님을 사황의 자리에 올린 것도 사실상 저 놈이잖냐..."
"쳇."
사황 중 하나였던 포교왕을 쓰러트린 주헌은 권 회장이 거느린 막강한 패였다.
"회장님, 축하드립니다. 사황도 이제 중국의 탐식왕. 진채원 하나 밖에 안 남았군요."
"그래."
"역시 서주헌... 아니, 회장님의 개는 훈련이 잘 되어 있어요. 정말 부럽습니다."
"...그래."
하지만 그 패가 언제나 자랑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서주헌이 중국의 사황만 쓰러트리면 계획을 진행해라."
"죽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 서주헌을 포함한 그 일당 전원 세상에서 없애라. 너무 위험해."
자신을 이 자리에 올려준 서주헌.
그리고 사황들을 고작 10명으로 상대하고 몰락시킨 팀원들.
권 회장은 도리어 그게 무섭고 비위가 거슬렸는지도 모른다.
키우던 노예 따위가 자신의 목을 따고 그 자리에 오르지 않을까 하는 마음.
양 쳰은 권 회장의 눈치를 살폈다.
"서주헌을 없애라고 하셔도 쉽게 죽을 놈들이 아닐 텐데요..."
"유재하를 꼬셔봐. 서주헌을 싫어하는 기색 같으니."
"사기왕은 좀 못 미덥긴 한데요..."
그리고 그 후, 양 쳰은 훔쳐낸 클로에의 진료기록들을 확인했다.
그 안에는 주헌과 팀원들의 몸 상태, 그리고 감정과 약점들까지 나열 되어 있을 터였다.
그리고 이 기억을 보는 양 쳰은 좋아했다.
이제 한 장만 넘기면 서주헌의 약점들을 볼 수 있끼 때문이었다.
'그래. 넘겨라. 한 장만 넘겨!'
그런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인간. 하찮은 인간 주제에 감히 누구의 미래를 엿보려는 거냐.]
"!"
갑자기 자신이 들어와 있던 사진 속 공간이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아주 오싹한 오라였다.
"뭐, 뭐야!"
쿵!
양 쳰은 순간적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양 쳰은 자신의 뒤에 앉아 있는 짐승을 보고 기겁했다.
싸늘한 붉은 눈.
유물을 포식하는 까마귀가 그의 뒤에 있었다.
이미 수차례 신급들을 삼키고, 지금껏 주헌을 지켜봤을 그 유물이.
[이 이상은 네 놈이 볼 자격이 없다.]
동시에 양 쳰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 강제로 쫓겨났다.
"끄아아악!"
그리고 사진에서는 양 쳰이 탈출하자마자 펑! 뭔가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진채원은 깜짝 놀랐다.
"멀린의 유물이!"
미래가 담긴 사진들이 불타오르고 운명왕의 카메라 유물까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아아악! 내 머리, 내 머리!"
양 쳰은 자신의 머리를 쥐며 괴로워했다.
그가 사진 속에서 본 정보들이 닥치는 대로 파괴당했다.
남은 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기억과 증오뿐!
심지어 손을 대는 것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흉흉한 오라가 주변을 감쌌다.
진채원은 그 오라의 기운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 까마귀의 기운이다.'
"왜 또 그 유물이..."
그때였다.
"...그놈부터 죽입시다. 그놈부터 죽여야 해요...!"
"?"
양 쳰은 무의식중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죽이다니 누굴?"
그 대상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유재하. 사기왕 이 개새끼!'
그가 사진 속에서 잠깐 본 것은 주헌 일행이 까마귀 무덤에서 죽은 직후의 과거였다.
극히 일부였지만 그는 거의 발작을 일으켰다. 마치 전생과 현실 사이에서 착란을 일으키듯이.
덕분에 교도관들이 들이닥쳐 그를 끌고 나갔다.
진채원은 멀어지는 그를 보며 황당해했지만, 교도관에게 끌려가면서도 이성을 잃은 양 쳰은 계속 외쳤다.
"이거 놔! 당장 서주헌 옆에서 저놈을 떼어내야 한다고! 그 자식은 서주헌이 죽고 나서 TKBM의 비밀을!"
도굴단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았던 생존자.
복원을 시켜야 한다며 자신들이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살려줬던 유일한 생존자.
하지만.
"복수니 뭐니 그 개새끼 때문에 TKBM이...!"
그때였다.
"그게 뭔 소리야?"
"커헉!"
누군가가 양 쳰을 짓밟았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양 쳰은 기절할 뻔했다.
왜?
"방금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
"복수? TKBM의 비밀이 뭐?"
마치 흥얼거리는 듯한 즐거운 목소리.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네?"
눈앞에 있는 건 주헌이었기 때문이다.
양 쳰은 주헌을 보자 본능적으로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호랑이를 마주친 초식동물처럼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그리고 그런 양 쳰을 보는 주헌은 같잖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우선 한 가지 확인하지."
"...!"
"너 나 기억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