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78 서주헌의 저주 =========================================================================
< 제176화. 서주헌의 저주 (4) >
그리고 이때 주헌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거 찾으십니까?”
주헌의 목소리에 율리안은 내심 반가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라면 서주헌의 목소리 따위 반가울 리가 없겠지만, 장소가 장소다.
아무리 율리안이라고 하더라도 경비가 삼엄한 백악관 한가운데에서 홀로 있는 건 심장이 쫄리는 일이리라.
그래서일까.
“너 늦었잖….”
율리안은 환한 얼굴로 주헌을 반겼지만, 곧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도, 도대체 뭘 들고 온거야?’
주헌은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왔다. 그리고 백악관의 사람들과 대통령은 주헌이 들고 온 보따리에 감탄하기 시작했다.
“설마 그 보따리가 우리 유물이 들었나요?”
“세상에, 우리 유물이 저렇게 많았나?”
“아니요. 사과의 의미로 다른 유물도 가지고 왔을지도요.”
그 말에 사람들이 음흉하게 기대하기 시작했다. 유물 앞에서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 유일하게 율리안만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그도 그럴 법한 게, 제갈공명의 눈으로는 똑똑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자식, 어쩐 일로 유물을 순순히 넘겨준다 했다!’
율리안은 당장 이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율리안은 제 옆에 앉는 주헌에게 속삭였다.
“너 미쳤어? 뭘 들고 온 거야!”
“뭐긴? 폭탄.”
아오! 이 또라이!
“백악관 테러범으로 끌려갈 일 있어?! 설아랑 재하는?”
주헌은 대답 대신 밖을 가리켰다. 둘은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한 곳에 몰려 있다가 갇히기라도 하면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러니 밖에서 주헌의 호위를 맡는다. 귀신도 몇 마리 풀어 주헌에게 딸려 보냈다.
그런데 그럴 때, 이설아는 자신을 뚫어져라 보는 시선을 느꼈다.
유재하였다.
“뭘 그렇게 봐?”
그러자 유재하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쯧쯧 혀를 찼다.
“그냥 아쉬워서. 어린애 모습도 꽤 귀여웠는데.”
“…………….”
“아니, 사실 너 같은 딸이 있으면 …… 커헉!”
유재하는 발을 밟혔다.
그리고 이설아는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말했다.
“미, 미쳤어? 은팔찌 차볼래?”
“아오! 야!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
“뭐?”
“설아처럼 예쁜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단장님이 그렇게 말했다고!”
그 말에 이설아는 언제 까칠하게 굴었냐는 듯 양 볼을 붉혔다.
뭐라고? 단장님이?
이설아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예, 예전에는 불가능했을지라도…지금이라면…’
이설아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꺄아 얼굴을 짚으며 부끄러워했다. 그 모습을 유재하가 이상하게 보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과거에 주헌을 만났을 무렵엔 세상 모든 사람들이 거의 불임 상태.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않나.
‘다, 단장님만 바라신다면….’
그런데 그럴 때 유재하가 초를 쳤다.
“아 그런데 아이린 같은 딸도 좋다고 하셨다.”
그 말에 행복한 상상을 하던 이설아의 얼굴이 야수처럼 변했다.
아, 아이린 같은 딸?
그 말은 즉……….
‘단장님, 설마….’
그럴 때 유재하가 이설아의 속마음도 모르고 눈치 없이 지껄였다.
“그리고 나도 혼혈이 예쁠 거 같아. 단장님하고 아이린 정도면 분명 예쁜 딸이… 그리고 그 딸은 내가…… 커, 커허억!”
이설아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유재하의 목을 졸랐다.
“넌 도대체 누구편이야! 어?!”
“누구긴. 부, 부자들의 편….”
“이씨!”
그럼 아이린을 이길 수가 없잖아!
“재하 너, 같은 단원끼리 이러기야? 내가 너 이것저것 뒷수습 해준 건 생각도 안 나지? 은혜를 원수로 갚냐!”
“뭔 소리야, 니가 언제? 커, 커헉!”
유재하는 숨이 막혀 죽으려고 했다. 결국 이설아는 굉장히 슬퍼했지만 사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직 나한테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니까.’
이설아는 분명히 기억했다. 파라오의 무덤에서 저주가 풀리던 때의 일을.
분명 무덤에서 나오는 길이었던가.
낭떠러지에서 내려와야 할 때가 있었다.
낭떠러지라고 해봤자 동아줄을 타고 내려오면 그만이긴 했지만, 굉장히 험난해서 주헌은 아이린을 안고 내려오려고 했다.
“설아는 이런 경험 많으니까 괜찮지? 길달을 쓰면 되니까.”
아니요, 전혀 안 괜찮아요.
설아는 바로 주헌 등에 코알라처럼 찰싹 붙었다.
그러더니 큰맘 먹고 외쳤다.
“저, 사, 사실 유물 사용이 안 돼요! 어린애로 변해서 지배력이 떨어졌나 봐요!”
“…………뭐? 아까 유물 쓰는 거 다 봤는데?”
“차, 착각이세요!”
이설아는 다리까지 동원해 꼬옥 주헌의 등을 끌어안았다.
어린아이로 변했을 때가 아니면 감히 언제 이런 투정을 부려보랴!
결국 주헌은 어린아이 둘을 한꺼번에 안고 절벽을 내려가려고 했다. 보다 못한 유재하가 음흉하게 끼어들기도 했다.
“단장님, 한 명은 그냥 제가 데리고 내려갈까요?”
하지만 곧 묘한 살의에 유재하는 없던 일로 해야만 했다.
어쨌든 그렇게 주헌이 두 아이를 안고 내려가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꺄아악!”
주헌에게 안겨있던 둘의 모습이 동시에 변해버렸다. 어린아이였던 모습이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변화에 둘은 당황했다.
뭐, 그래도 주헌이 팔 힘이 센 지라 둘을 감당하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
“아이린, 가슴 때문에 앞이 안 보여요. 그리고 설아야, 바지 입어.”
지면에 내려오고 나서 주헌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던 둘은 분명 뭔가를 느꼈다.
‘분명해. 단장님, 기분이 좋으셨다는 증거야!’
주헌의 몸은 솔직했다. 물론 그 뒤엔 아이린과 다른 문제로 티격태격 해야만 했다. 누구 때문에 주헌이 반응을 했느냐 시시비비를 가려야 했기 때문이다.
뭐, 결국 누구 때문이었는지 아직까지 결론이 안 나왔지만, 아무튼.
‘아직 포기하기에는 일러.’
하지만 이설아가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창문 너머로 안을 보던 유재하가 헉하고 놀랐다.
그 모습에 이설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아, 아니….”
유재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유재하의 시선에 걸린 것은 대통령에게 슬금슬금 향하는 동아줄이었다.
그것도 그냥 향하는 게 아니라 직원한테서 음료수 잔을 받아 직접 서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착착 주헌과 대통령에게 나눠주었다.
아니, 지가 무슨 웨이트리스가 된 것도 아니고!
‘동아줄 주제에 지금 뭐하는 거야!’
물론 더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지금 저 자식 알바하고 있는 거 아냐?’
그렇다.
대통령에게 서빙 서비스를 해준 것으로도 모자라 슬금슬금 서류도 가져다주고, 책상도 정리해주는 듯 했다.
심지어 대통령이 아닌 백악관의 다른 간부 직원에게도!
물론 사람들은 그저 신기해했지만.
“오오, 음료수 고마워. 거참 신기한 유물이군요.”
“이런 친절한 도구가 있으면 좋을 거 같기도…….”
친절은 개뿔이!
‘어유, 저거, 저거 이젠 백악관을 싹 털어갈 셈이냐!’
아니나 다를까.
동아줄은 눈을 번득이면서 영수증을 작성하고 있었다.
[책상정리 3억]
[서류정리 10억]
[서빙비 10억]
[봉사료 8억]
.
.
[총합 34억 원]
[*VAT 별도, 달러 결제 가능]
어째 가격이 더 올라가고 있는 건 착각일까.
사람들은 잠시 후 자신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갈 걸 상상도 못 한 채 서비스를 만끽했다.
뭐, 주헌이야 훌륭하게 컸다며(?)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리고 이때였다.
“자, 그럼 우리 미군의 유물을……”
사람들이 주헌의 보따리를 열어볼려고 하자 율리안은 아차 싶었다.
‘저걸 열면 저 사람들, 분명 무사하지 못할 거다.’
진짜 폭탄을 담은 건 아니지만 골치아픈 게 있었다.
그래서일까, 율리안이 외쳤다.
“잠시만요!”
“?”
“기다리세요. 그 보따리 안에 든 건….”
하지만 그 순간.
뻐억!
“큭!”
율리안은 정강이를 얻어맞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아프다, 정말 아팠다.
그리고 정강이를 움켜쥔 채 주헌을 쏘아보았다.
“야씨! 너 이게 무슨….”
그러나 턱을 괴고 있는 주헌은 눈빛으로 말했다.
닥쳐.
그리고 입모양으로 말했다.
안 닥치면 니 약혼녀. 또 내가 꼬실 거야. 그리고 니 동생까지.
“#*&$*!”
그 말에 율리안은 눈에 불꽃이 튀겼다.
아니, 뭐라고!
이번 삶은 안 된다.
아니, 이번 삶을 떠나서, 그냥 이놈한테는 절대로 안 됐다!
하물며 동생이라니!
율리안은 상상만으로도 거품을 물면서 얌전히 앉았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으며 말했다.
“그냥 열어보세요. 별거 아닐 겁니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그깟 저주로 죽진 않겠지.
***
한편 백악관에 있던 아누비스는 기묘한 부름을 받았다.
[아누비스, 이리로 와라.]
그리고 동료의 부름에 아누비스는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찔리는 구석이 많으니 그건 당연한 것이었다.
‘젠장, 갑자기 왜 부르는 거지.’
아누비스는 눈치를 보다가 결국 주헌의 품에서 빠져 나왔다. 그리고 인적이 없는 정원에 도착했을 때 아누비스는 까무러치고 말았다.
‘내 권속의 유물들이!’
아누비스를 따르던 이집트 유물들이 처참한 꼴로 소멸하고 있었다.
그는 당황해서 주변을 살폈다.
[도대체 누가…!]
그러나 이때 아누비스는 커헉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고 말았다.
푸욱!
아누비스는 등 뒤에 꽂히는 기습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가벼운 상처가 아니었다.
영혼이 소멸할 정도의 깊은 상처.
그리고 이런 게 가능한 자는…!
[너희들…!]
눈앞에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하나같이 처형 도구를 들고 있는 게…….
‘이단심판관!’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아누비스를 보면서 웃었다.
[서주헌을 못 죽인 죄. 유물들을 선동한 죄. 그것이 너의 죄다.]
[아누비스, 넌 능력은 있는데 결국 중대한 실수를 했어.]
아누비스는 이를 갈았다.
[너희들… 총수님이 이 사실을 아시고도 가만히 계실 것 같으냐! 당장 총수님께 말할….]
그러자 사단장 동료들이 이죽이면서 웃었다.
[어이쿠, 미안해라. 애석하게도 그 총수님이 시키신 일이라.]
[………뭐라고?!]
[총수님이 명령을 내리셨다. 널 제거하라고. 뭐, 그간 수고 많았다고는 하시더라.]
[………!]
[니들 상관들도 회유하지 못하고, 결국 토트까지 서주헌에게 넘어갔다. 너를 포함해 이집트 문물들은 전부 쓰레기라고 하시는 군.]
[잠………!]
[너희는 우리 사단장의 수치다. 영원히 사라져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누비스는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푸욱!
몸을 찌르는 고통과 함께 아누비스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커, 커헉.]
정신이 아득해졌다.
동료들은 죽어가는 아누비스를 보면서 신이 난 듯 웃어댔다.
[그러게 누가 잘난 듯이 설치래.]
[서주헌, 그딴 천한 인간에게 붙잡히기나 하다니. 이놈도 소문에 비해 별거 아니었군.]
[총수님도 빠른 결정 내리신 거지.]
동료들의 기척이 점점 사라져갔지만 아누비스는 치가 떨렸다.
‘젠장, 젠장……!’
저것들도 동료라고…!
사단장으로서 충성을 맹세한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의 실수로…!
심지어 이집트 문물 전체를 모욕하다니.
애초에 유물들은 자신의 문물에 대한 자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그랬기에 아누비스는 억울하고 배신감이 치밀어 올랐다.
진짜로 자신을 제거하라고 한 게 총수라면…….
‘총수님… 아니, 총수 놈.’
아누비스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세우려고 했지만, 곧 피를 한가득 쏟으며 쓰러졌다.
‘꼼짝도 못하겠군.’
총수는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파괴한다.
‘아마 어떤 인간도 복원을 하지 못하겠지.’
그런데 그럴 때였다.
죽어가는 아누비스의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작품 후기 ==========
연휴가 끝났......ㄷ..
+ 오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