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45 저건 도굴꾼이라고! =========================================================================
〈 저건 도굴꾼이라고! (1) 〉
“잘 들어요. 이건 계약 위반이야.”
풍문왕 웨이드 하르만은 어딘가에 전화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몹시 화가 나보였다.
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여자의 까칠한 목소리 때문이었다.
[계약 위반이라니, 들을 가치가 없네요.]
“뭐?”
[죄송하지만, 그 계약서에 도장조차 찍은 기억이 없습니다. 하실 말씀 없으면 끊습니다.]
뚝.
끊겼다.
정말 사정없이 끊어버렸다!
결국 멍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던 하르만이 화를 냈다.
“강탈왕. 이게 진짜!”
부하들 교육도 제대로 안 시키나!
한 편 풍문왕의 전화를 벌레 숨통 끊어놓듯 끊은 것은 다름 아닌 이설아였다. 하르만의 전화를 받았던 그녀는 정말 싫은 듯이 핸드폰을 쏘아보았다.
애초에 자신의 스캔들을 날조한 풍문왕 놈이 마음에 들 리도 없지 않은가.
‘이 나치 추종자 같으니.’
곧 그녀가 이를 갈고 있자 주헌이 돌아보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주헌은 여전히 경매 중이었다.
핏이 완벽한 수트, 멋스럽게 올린 머리. 거기에 다리까지 꼬고 있는 모습은 화보 촬영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멋졌다.
단지, 시가라도 물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놈이 막대사탕을 물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곧 주헌은 길거리 아이가 한 개만 사달라고 했던 사탕을 쌓아놓고 먹으며 물었다.
“전화 상대가 누구였는데?”
“풍문왕입니다.”
“아, 그 새끼. 연락 올 줄 알았다. 그래서 뭐래?”
“아,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이설아는 언제 으르렁 거렸냐는 듯 방긋 예쁘게 웃어보였다.
이딴 귀찮은 놈. 단장님이 신경써주는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때, 또다시 들고 있던 주헌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설아는 액정에 뜬 ‘조루’ 라는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식.
끈질기기는.
이설아가 거칠게 전원을 끄려고 하자 주헌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줘봐.”
“하지만…”
받으셔도 귀찮을 거라는 표정에 주헌은 상관없다면서 받았다.
“뭘 자꾸 전화해. 풍문꾼.”
동시에 열이 바짝 오른 하르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드디어 받았구나. 서주헌.]
“용건이 뭐냐.”
그 말에 풍문왕은 실소를 흘렸다.
[지금 몰라서 묻나? 왜 내 유물을 멋대로 팔고 있느냐고.]
“니 유물?”
이건 뭔 개소리래.
“이번엔 니 유물 안 훔쳤어.”
뭐? 이번엔?
[……아니 이 뻔뻔한 놈아. 훔쳐 가놓고 지금 실시간으로 팔고 있잖아! 내 유물!]
훔치긴 뭘 훔쳐.
“지금 니 껀 관심도 없어.”
그건 사실이었다. 지금 풍문왕이 가진 유물은 죄다 주헌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그나마 선동꾼 괴벨스의 유물이 탐이 나긴 하지만, 솔직히 나치의 유물을 쓰고 싶은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알았나? 더 좋은 걸 모은 후에 다시 연락해라.”
주헌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풍문왕은 기가 막혔다.
[안 기다려?! 그 무덤은 내가 발굴신고를 낸 곳이야. 당연히 거기서 파낸 유물은 이쪽에 넘겨야지!]
이건 또 뭔 개소리인지.
“끊는다. 조루.”
뚝.
또 전화가 끊겼다.
아마 지금쯤 수화기 너머로 욕이 터져 나오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게 괜히 사람 귀찮게 하고 있어.”
주헌은 툴툴거렸다.
물론 이놈이 하는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었다.
판도라가 제시한 〈발굴신고〉.
그 거지같은 룰에 의하면 자신은 풍문왕에게 얻은 유물을 건네줘야 했다. 애초에 발굴신고제를 도입한 이유가 무덤을 둔 분쟁조절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즉, 발굴신고는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지원을 받아 무덤을 먼저 독점하겠다는 의미였다.
‘단, 무덤 발굴에 실패했을 경우. 순번은 다음 신고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처럼 발굴신고제는 상당히 메리트가 있었다. 쓸데없는 경쟁을 안 해도 되니까.
아니나 다를까.
나름대로 주헌을 따라 멋을 부렸지만, 신나게 묻히고 있는 유재하가 물었다.
“단장님. 우리도 발굴신고 해야 하는 게 이득 아니에요?”
무덤의 독점권도 얻고 장비지원도 받고.
여러모로 이득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헌은 비웃었다.
“너 발굴신고 하고 60% 떼일래?”
“엥?”
“발굴신고를 하면 무덤의 정보, 출입증, 유용한 장비, 인력까지 지원받을 순 있지. 하지만 최대 60%까지 떼 가는 건 알고 있냐?”
세금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발굴하기 전, 판도라와 일종의 파트너쉽 계약을 하고 들어가는 개념이었으니까.
서포트를 해 줄 테니, 니들 발굴하고 나와. 그리고 가지고 나온 거 수익 셰어하자.
대략 그런 식으로.
쉽게 말해, 판도라는 발굴자들과 유물사용자들에게 비즈니스 사업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대충 판도라의 모든 수익은 세계의 평화와 무덤과 유물로 인한 피해복구사업, 연구 등에 쓰인다는 명목으로.
“그럼 풍문왕도 독점권을 얻기 위해 판도라에 돈을 처발랐다는 거죠?”
“그래.”
그러니 풍문왕이 지금 빡칠 만도 했다.
돈을 쏟아 독점한 무덤에 웬 도둑놈이 나타난 셈이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한참 경매가 진행될 때 또 다시 전화가 왔다.
주헌은 대수롭지 않게 전화를 받았다.
“뭐냐, 시스콤.”
[누가 시스콤이야.]
전화를 건 것은 조지 홀튼이었다.그는 아무래도 굉장히 피곤한 항의 전화를 받은 듯 했다.
[은인. 너 풍문왕이 발굴신고 한 무덤을 멋대로 털었냐?]
얼씨구.
이제 안 되겠으니까 판도라에 직접 찔러 넣으셨나.
[은인. 풍문왕이 판도라에서 난리를 쳤어. 도둑놈이 자기 무덤에서 유물을 들고 튀었다고.]
주헌은 하하 웃었다.
[발굴신고를 안하면 도둑취급 받는 거 알지?]
“아주 잘 아신다.”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 발굴신고를 안하려고 그 노친네가 우리를 꾸린 거잖아.’
그렇다.
그렇게 권 회장 대신 더러운 일을 하던 도굴단이 탄생한 것이었다. 뭐 세간에서는 발굴신고가 세계평화와 발굴자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했지만.
‘그거야 모르니까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고.’
실제로는 판도라가 세상의 모든 유물과 유물 사용자들을 쉽게 관리하고 종속시키기 위한 것이다.
발굴신고를 하면 돈만 뜯기나?
개인정보도 털리고 판도라의 시스템 유물에 실시간으로 감시를 당하니까.
그렇다고 발굴신고를 안하자니, 판도라나 중러 연합과 정치적인 문제가 너무 깊었다. 그래서 권 회장이 그림자 부대처럼 육성한 게 TKBM의 특수부대.
즉 주헌의 도굴단이다.
‘룰의 맹점을 이용한 거지.’
발굴인력이 10명 미만일시, 발굴신고를 안 해도 된다는 허점을 이용한 것이었다. 많은 인간을 죽이려는 무덤의 성향상, 소수 인력으로는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주헌과 그가 이끄는 도굴단은 달랐다.
들어갈 때 고작 2,3명이서 무덤을 쓸어버린다.
그야말로 독보적인 발굴단.
물론 지금 생각하면 토가 나올 지경이었다. 권 회장이 바라는 조건을 맞추기 위해 얼마나 피를 토하고 실력을 갈고 닦은 건지.
뭐 남는 건 토사구팽이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다르지 않나.’
그리 생각하며 주헌은 날카롭게 웃었다.
“어쨌든 훈계할 생각이면 니들 판도라 의장단부터 똑바로 하라고 해. 애초에 사람 골라서 출입증을 나눠주는 주제에.”
[……그, 그 부분은 미안하다. 거기까진 나도 손이 안 닿아서.]
판도라 의장단.
쉽게 말해, 판도라의 시스템 유물의 계약자들이다. 그 유물로 유물사용자들을 감시까지 할 수 있는 실세들.
동시에 지난 번 주헌의 살생부에는 증거가 없어 넣지 못했던 놈들.
“록펠러는 니 성격에 대충 닥치게 했을 거고, 버거운 건 로스차일드랑 다른 부자들. 그리고 왕족들이냐?”
[잘 아네. 좀 강해, 그 사람들은.]
주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하지.
조지 홀튼 혼자서는 아직 어떻게 할 수 있는 적들이 아니었다.
“어쨌든 알았으니…….”
바로 이때였다.
“네 낙찰 되었습니다! 유물 버전 춘약! 서주헌 씨가 중동에서 막 가져온 따끈따끈한 기적의 약!”
“부작용도 없습니다! 조금만 마셔도 데면데면했던 부부 사이 회복! 말 그대로 열병! 사랑의 물약!”
“8000만 달러에 낙찰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주헌은 굉장히 만족스러워했다.
계륵 같은 놈이라 생각했는데, 저런 좋은 가격을 받다니!
하지만 뒤이어 주헌 일행은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낙찰 받은 사람의 이름이 호명되었기 때문이다.
“낙찰 감사합니다, 아이린 홀튼씨!”
엥? 잠깐. 누구라고?
아이린?
실제로 박수를 받고 있는 것은 낯익은 미인이었다.
금발의 긴 머리와 어깨와 가슴이 파인 붉은 드레스.
‘진짜 아이린이잖아!’
동시에 유재하는 푸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단장님이 내놓은 열병의 약을 아이린이 낙찰해가다니!”
그렇다.
주헌이 이번에 가지고 나온 건 고대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연관된 무덤 중 하나.
[역병의 신 남타가 버린 병균시약 ? 열병 (A급-보물급 / 소모유물)]
길가메쉬 신화에 나오는 역병의 신.
역병의 신답게 각종 전염병이 담긴 시약병들이 있었다.
그리고 주헌은 그 중 하나. 열병이라 쓰고 최음제라 읽는 유물을 내놓은 것 뿐!
그런데 그걸 아이린이 낙찰했다고?
동시에 주헌은 심각해졌다.
아니, 아이린이 낙찰 받는 건 상관없는데……
“……저걸 누구한테 쓰려고?”
좀 당황하는 듯한 단장의 중얼거림에 유재하는 미친 듯이 배를 잡고 웃었다.
“부메랑이네, 부메랑!”
그리고 정작 이설아는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아니 아이린이 저걸 왜 사는지 모를 리가 없지 않은가!
“저게 어디서 단장님에게 쓰려고……!”
물론 그 말에 동아줄이 눈을 반짝였다는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
한편 전화를 끊은 조지 홀튼의 표정이 미묘했다.
“………열병? 사랑의 물약?”
을 핸드폰 너머로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은 거겠지?’
그러나 이 때 조지 홀튼과 친한 부하직원이 발을 동동 굴렸다.
“자, 잠시만요! 홀튼 의원님! 정작 중요한 말은 안하고 끊으시다니요!”
“무슨 말?”
“서주헌한테 깝치지 말… 아니 주의하라고요!”
그런데 그렇게 훈훈하게 끊어도 되는 거냐며 직원은 난처해했다.
“지금 풍문왕이 밖에 와있다고요! 무덤관할기관으로서 도둑놈에게 처벌을 하라고요!”
그 말에 조지 홀튼이 삐뚜름하게 웃었다.
“처벌은 무슨 처벌?”
“네?”
“10인 미만은 발굴 신고를 안 해도 되잖아? 듣기론 서주헌. 세 명이서 들어갔다는데?”
“네……?”
“그러니까 전혀 규칙을 어긴 게 없다고. 뭐가 문제인데?”
그 똑 부러진 말에 직원이 거품을 물었다.
“의원님! 이래선 판도라의 위신이 안 섭니다!”
“위신?”
“네! 풍문왕이 정식적으로 발굴신고를 했고, 저희도 꾸준히 수익을 떼 왔는데 이런 식이면…”
직원은 밖의 눈치를 보며 결국 외쳤다.
“판도라는 돈쳐먹고 뭘 하는 거냐고 할 거예요!”
“뭘 하긴, 뼈 빠지게 일하고 있잖아.”
“의원님! 서주헌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이런 식이시면 자칫 퇴출…….”
“왜 이래? 나 이래보여도 투표로 뽑힌 정당한 의원이야.”
“하지만 본보기를 안 보이면 다들 불법발굴을 하게 될 겁니다! 누가 수익셰어를 하려고 하겠어요!”
“알게 뭐야? 꼬우면 개헌해.”
“의원님!”
그 말에 조지가 하하 웃었다.
풍문왕.
그래봐야 언론을 선동하고 판도라 중심인물들에게 샤바샤바 손을 굴리던 놈.
조지 홀튼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아무튼 받은 돈도 있는데 지금 풍문왕을 저대로 둘 수는……”
“음. 풍문왕한테서 지금까지 뗀 수익이 80만 달러 정도였나?”
“네! 하지만 서주헌은…!”
“8000만 달러.”
“네…… 네?”
“서주헌이 국제유물재단에 쿨하게 던져준 기부금이야. 피해복구에 쓰든 뭘 하든 마음대로 하라더군.”
“…….”
턱을 괸 조지 홀튼은 맹수마냥 눈을 번득이며 경고했다.
“마리아. 우리 고작 80만 달러로 덜덜 떨지 말자고. 폼 안 나잖아.”
“…….”
“알았으면 풍문왕에게 답변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조지 홀튼은 풍문왕의 항의서를 찢었다.
“꼬우면 니도 세 명이서 발굴하세요.”
========== 작품 후기 ==========
+ 추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