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7 일해라, 노예야 =========================================================================
< 일해라, 노예야 (2) >
젠장, 왜 하필이면!
유재하는 순간적으로 주헌의 밑에 들어간 것을 후회할 뻔했다. 그것도 그럴 법한게 아이린 홀튼이라니!
안 그래도 지금 저 일가한테서 도망 중인데, 이건 무슨!
덕분에 다급해진 유재하는 침을 튀기며 주헌을 붙잡을 수 밖에 없었다.
“야! 아니, 사장님! 너 어떻게 홀튼가랑 면식이 있는 건데, 아니 있는 건데요!”
어찌나 당황했는지, 유재하의 말은 제대로 꼬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이쪽으로 다가오는 아이린을 보면서 주헌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어떻게 알긴.
“저 여자가 나 쫓아왔어.”
“뭐예요?!”
저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왜! 너 같은 양아치한테 왜!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유재하는 신음을 흘렸다.
그러나 유재하가 부정하려 한들, 틀린 말이 아니다. 저주를 풀고 싶다며 쫓아왔으니까. 그리고 그 일에 유재하가 필요한 만큼, 주헌의 굳센 팔은 유재하의 멱살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힘으로는 주헌을 이길 수 없는 터라, 도망도 못치는 유재하는 진짜 미치고 환장할 판이었다.
아이린이 저기 있다는 건, 자신의 생존 사실이 들켰을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유재하는 자신이 사기를 친 조지 홀튼의 얼굴을 떠올리며 똥줄이 타 들어갔다.
‘젠장, 그 인간이 알면 진짜 청부살인 당할지도 모르는데!’
홀튼가가 평범한 거부 집안이면 이런 반응을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막내인 아이린 홀튼을 끔찍하게 사랑하며, 조금이라도 해를 가하면 청부살인업자를 고용하든 인맥을 총 동원하든, 3대를 멸망시키고 지구 끝까지 따라가게 만든다는 맛 간 집안이다.
소문이니까 어느정도 거짓은 섞여 있겠지만, 어쨌든 한 성격 하는 집안인 건 확실하다.
그리고 자신의 경우에도 유물의 힘 때문에 그들의 눈을 속일 생각을 했던 것이고 말이다.
‘젠장, 기껏 유물로 시체를 만들어서 속여놨더니!’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아이린이 다가오자 유재하는 갑자기 배가 살살 아픈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주변에서도 '어? 내 지갑!' 하고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주헌은 신경도 안 썼다.
그저 태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유재하 놈도 제 딴엔 미래의 왕급이니, 파산왕 옆에서 죽진 않겠지.'
뭐, 놈이 사둔 주식이라도 폭락할지 모르지만 그딴 거야 제 알 바가 아니고. 게다가 유물이 파괴되어도 어차피 이놈이 복원 할거고.
그리고 기어이 아이린이 가까워지자 유재하는 기어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놓으라고, 사장님아. 제발 놓으라고!”
“내가 왜.”
유재하가 자신을 붙잡은 주헌의 손을 필사적으로 꼬집었지만, 그 발악이 무색하게 아이린은 어느 사이 유재하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그렇게 미래의 사기왕과 파산왕이 조우한 것이다.
곧 아이린을 본 주헌은 가볍게 인사했다.
“왔어요?”
“네, 제 저주를 풀어주실 수가 있다고 하셔서!”
그녀는 굉장히 기뻐 보였다. 반달처럼 곱게 접히는 눈매가 반할 정도로 예뻤지만 유재하에겐 그래봐야 잠재적 재앙의 여신이다.
하지만 발악하던 유재하는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잠깐. 내가 사기를 친 건 조지 홀튼이지. 이 여자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실제로 그 집에 가서 사기를 쳤으나, 이 여자를 본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잘하면 이 여자가 날 모를 수도 있다.’
게다가 동양인이 서양인의 얼굴을 잘 구별 못하는 것처럼, 서양인이 보기에도 동양인들의 얼굴은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잘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기대를 품고 유재하는 천연덕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아, 반갑습니다. 저는 레오나르도 강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를 보자마자 아이린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 그 사기꾼.”
젠장.
역시 속이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 * *
유재하는 고개를 넙쭉 숙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지금 굉장히 속이 쓰리고 머리가 아파오는 기분이었지만, 그는 꾹 참았다. 제발 살려만 달라는 듯이 고개를 숙이고 고개를 들 줄 몰랐다.
그의 요구는 단 하나였다.
“오라버니께는 제발 비밀로 해주십쇼.”
그 말에 주헌은 하하하 웃었다.
이 바보 같은 놈.
그러니까 사기는 치지 말 것이지.
“도대체 얼마나 사기 쳤는데 그러냐?”
“7천만 달러(800억원).”
거참 많이도 빼돌렸다.
“그럼 사기 친 돈 돌려주면 그만이잖아?”
그러자 유재하는 아이씨, 눈을 질끈 감았다.
그 돈이 남아 있으면 이 짓은 안하지!
그리고 차마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를 보며 주헌은 킥 비웃었다.
물어보나 마나 도박으로 다 날렸을 것이라는 것에 제 전재산을 걸 수 있었다.
“남은 돈이 얼만데?”
“5...5백.”
그 말에 주헌은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5백억? 오, 그래도 너 치곤 많이 남겼네.”
“아니 5백 만원....”
그럼 그렇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훌륭한 부하다.
뭘 어떻게 쓰면 800억원이 5백만원으로 변하는 마술이 벌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 이놈은 도박운이 없으니까.’
유재하는 고개를 차마 들지 못한 채 훌쩍였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십쇼.”
미래의 사기왕은 파산왕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게 어찌나 웃긴지 주헌은 속으로 큭큭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재하를 보며 아이린은 쓰게 웃었다. 주헌에게 앞 뒤 사정을 들은 아이린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유재하가 자신의 저주를 풀어주는 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도 듣긴 들었다. 그래서 아이린은 딱히 유재하에게 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사기를 친 건 괘씸하지만, 800억 쯤이야 돈이야 저주를 풀어주는 값 대신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거니까.
‘게다가 지금은 주헌씨의 직원이 된 것 같으니.’
믿을 만 할지도 모른다.
틀림없이 오빠인 조지 홀튼도 저주만 풀어준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있을 것이었다. 그만큼 동생의 저주를 풀기 위해 애를 쓰던 오빠였으니. 지금이야 유재하가 살아 있다는 걸 알면 머리에 구멍을 내기 위해 쫓아오겠지만 말이다.
그랬기에 아이린이 고개를 들라면서 뭐라 말하려고 했다.
“저.....”
하지만 이 때 주헌이 그녀의 입을 막는 것이었다.
“?”
아이린이 의아하게 보자 주헌은 쉿, 하고 검지를 올렸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저주를 풀어줄 사람이니 용서해주겠다고 할테지만.’
하지만 주헌은 마침 유재하를 교육 시킬 좋은 채찍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성실한 놈은 아니라 자신이 일을 부린다고 해도 속도가 제대로 나올지 안 나올지는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가둬놓고 일을 시킨다고 해도, 막말로 유물 하나 복원 하는데 1년이 걸릴 정도로 늦장을 피울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아이린은 마침 좋은 채찍이었다.
그랬기에 주헌은 아이린에게 속닥였다. 그러자 아이린은 알겠다는 듯 수긍하며 유재하에게 말했다.
“저, 이 사실을 오빠가 알면 분명 유재하씨는 무사하지 못할 거에요.”
“아이고, 압니다. 잘 알고 말고요.”
“유재하씨가 살아 있다는 건, 오빠한테는 비밀로 하겠어요. 대신.”
“대, 대신?”
“제가 부탁하는 걸 들어주시면요.”
“부탁이라면?”
아이린은 주헌을 보며 말했다.
“이 분은 제 소중한 비즈니스 파트너에요. 이분에게 의뢰한 일이 있는데, 이 분이 그 일을 해결해주시려면 유물부터 빨리 복원 하셔야 해요.”
그러니까 늦장 피우지 말고 유물 복원을 마쳐 달라는 것이다.
“기한은 열 개 해서 3일 드릴게요.”
“네, 네?!”
10개 다 해서 3일?
이게 미쳤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복원 작업은 시간을 넉넉하게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섬세한 작업이었다.
숭례문이나 건축물을 복원하는게 몇 년은 걸렸다. 물론 건물과 비교할 수는 없고, 유물의 손상도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한 개당 아무리 빨라도 일주일은 걸린다.
그런데 10개를 다 해서 3일?
이건 뭐 MMORPG 게임 개발을 3일 만에 해내라는 것도 아니고!
결국 유재하는 울먹이면서 이번엔 주헌에게 사정했다.
“사장님! 3일은 진짜 무립니다. 개당 일주일은 주셔야!”
그럼 10개면 얼추 두 달을 달라는 의미인가?
그 말에 주헌은 가소롭다는 듯이 픽 웃었다.
“그래 봐줬다. 10개 다 해서 일주일. 그 이상은 안 돼.”
유재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개당 일주일은 줘야 한다니까, 무슨 10개야!
“아이씨, 그러니까 개당 일주일 잡아야 한다니까! 심지어 사장님이.....!”
“사장님 말고, 단장.”
단장?
왜 그렇게 부르라는지 모르겠지만, 유재하는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단장님이 가져온 유물은 죄다 엉망진창에 파괴 직전의 유물이잖아요! 개당 몇 주는 잡아도 모자를 판에!”
유재하는 답답해 죽겠는지 가슴을 퍽퍽 치기까지 했다. 차마 이래서 문외한은 안 된다는 말은 할 수가 없어서 유재하는 한숨만 푹푹 쉬었다.
‘이래서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이래서 문제라니까.’
“저기요. 단장님. 복원 일을 잘 모르실테니 이해는 합니다만, 진짜 10개 일주일은 무리입니다.”
그 말에 주헌은 같잖다는 듯이 웃었다.
복원 일을 모르긴 뭘 몰라?
주헌도 엄연히 복원에 대한 고대예술, 물리, 화학적 지식이 있었다. 그렇게 고고학자의 유물을 통해 얻은 복원 능력으로 유물의 복원을 해왔던 것이다.
“유물 복원 지식만 놓고 보면 내가 너보다 한 수 위다. 이 바보야. 일주일에 유물 10개면 떡을 칠 수 있어.”
그러자 순간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유재하가 울컥해서 주헌을 보았다.
“저보다 유물 복원 지식이 한 수 위라고요?”
미안하지만 그건 사실이었다.
유재하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건 맞지만, 지금은 햇병아리 수준.
그러니 유물에 대한 내공이 깊은 주헌이 한 수 위인 건 당연했다.
하지만 그걸 알 턱이 없는 유재하는 물 없이 찹쌀떡이라도 먹는 기분으로 가슴을 쳐댔다.
‘으이구, 말로는 누구나 복원할 수 있다고 할테지!’
그랬기에 유재하는 홧김에 외쳤다.
“그럼 단장님! 그렇게 자신만만하시면 어디 제게 복원 지식을 설명해보시죠! 얼마나 알고 있는지 들어나 봅시다!”
그 말에 주헌은 요놈 보라면서 사납게 웃었다.
“좋아, 대신 납득하면 기간을 일주일에서 하루로 줄인다. 이의 없지?”
어째 지면 지옥일 것 같은 엄청난 내기에 유재하는 잠시 움찔하다가, 자신만만하게 승낙했다.
그래봐야 문외한이 설명할 수 있을리도 없고, 그 방법을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리도 없으니까.
“네! 그러시던가요!”
그 말에 주헌은 씨익 웃었다.
유재하, 이 꾀돌이놈.
넌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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