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내성이라고 들어봤어? =========================================================================
< 내성이라고 들어봤어? (2) >
[꽤나 곤란한 상황 같구나. 어리석은 인간이여.]
주헌은 낯익은 목소리에 미간을 좁혔다. 검은 연기 탓에 아무것도 안 보이지만, 확실히 그 목소리만큼은 똑똑히 들렸다.
그리고 분명 이 목소리는.
‘그 때의 그 까마귀.’
까마귀의 목소리는 주헌에게만 들리는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세 이집트 유물은 까마귀의 존재에 대해서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놈들은 지옥의 힘에 휩쌓인 주헌을 보며 웃을 뿐이었다.
[지옥으로 떨어져라! 인간놈!]
[그래봐야 산자가 망자들을 이길 순 없을 거다!]
하지만 주헌의 눈 앞에 떠오르는 메시지는 다른 것이었다.
[까마귀의 가호를 받아 내성스킬이 D랭크에서 일시적으로 A랭크로 올랐습니다.]
[일시적으로 폭발한 내성 덕분에, 지속적으로 침식되고 있던 보이지 않는 상처가 완전히 멎어들었습니다.]
[망자에 의해 썩어가던 피부가 일시적으로 멈춰듭니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주헌의 내성에 일시적으로 손을 댄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가?
그리고 그런 주헌의 의문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까마귀가 말을 걸어왔다.
[또 보는 구나, 미천한 인간이여.]
목소리 자체는 언제 들어도 고압적이었다. 하지만 다른 유물들과는 좀 달랐다. 주헌에게 호의를 가졌다고 해야 할까, 적어도 다른 유물처럼 인간을 벌레로 취급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딴 건 주헌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유물은 유물 놈이다.’
달콤한 말로 속삭여오든, 오만하게 소리를 치든, 유물은 인간의 적이니까.
그랬기에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주헌이 신경 쓰이는 건 까마귀의 말내용 뿐이었다.
‘또 보는 구나?’
그랬다. 그 까마귀는 마치 자신과 구면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물론 자신은 놈을 기억한다. 하지만 여긴 과거가 아닌가. 놈이 자신을 알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주헌의 속내를 읽기라도 하듯, 까마귀는 가볍게 웃었다.
[왜 널 알아보는지에 대해선 의아할 것도 없다. 어느 시간대든 나는 하나니까.]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지만, 눈치 빠른 주헌은 바로 그 말의 의미를 알아들었다.
‘과거든, 미래든, 놈은 연결 되어 있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까마귀는 느긋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듯 이렇게 말했다.
[저놈들은 잠깐 내가 막겠다.]
동시에 눈부신 섬광이 터져나왔다. 그러자 감싸고 있던 망자들도 비명을 지르면서 땅 밑으로 도망가버리고 말았다.
덕분에 세 유물은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거지?]
[어떻게 된 거긴.]
그 낯익은 목소리에 세 마리의 짐승들은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이집트 건축 양식에 표표히 앉아 있는 까마귀가 있었다.
짐승들은 저들보다 높은 곳에 앉아 웃고 있는 까마귀를 보면서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들로서는 저 까마귀의 낯짝이 울화가 치밀어 오르는 면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저 빌어먹을 까마귀가 여기에 왜!]
[여기가 어디인줄 알고!]
유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분명 무덤에 봉인 시켜놓았을 텐데!]
[저 새끼가 어떻게 여기에 다시 나올 수 있었지?]
세트가 사납게 크르릉거리자, 아누비스가 말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일단 저 인간놈부터 처리하고....]
하지만 아누비스가 힘을 쓰려는 순간, 사납게 웃던 까마귀가 힘을 방출했다. 그러자 강력한 공격을 맞은 아누비스가 피를 토하며 쓰러지고 말았다.
동시에 아누비스가 불러냈던 42명의 배심원과 재판장이 사라지고 말았다. 능력이 해제 된 것이다.
그랬기에 아누비스는 이를 갈아야만 했다.
‘저놈이....!’
하지만 아누비스가 이를 갈거나 말거나, 까마귀는 그런 아누비스를 보면서 검은 눈을 가늘게 뜨며 충고했다.
[그 이상 아픈 꼴을 당하고 싶지 않거든 얌전히 있어라. 저승의 안내견이여.]
그러자 아누비스는 몸을 푸르르 떨면서 이를 갈았다.
감히 누가 안내견이야?
하지만 까마귀의 공격을 받은 세 이집트 유물은 치를 떨 수 밖에 없었다.
왜?
방금 전에 까마귀가 쓴 힘은 이집트의 최고신이자 태양신 라(Ra)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아누비스나 오시리스, 세트 같은 이집트 주요신들의 창조자이며 우위에 있는 주신급이라고 봐도 되었다.
그랬기에 이집트의 유물들은 그 힘을 사용하는 까마귀를 저주할 수 밖에 없었다.
[저 도둑 까마귀 놈. 뻔뻔하게 훔쳐간 힘을 또 쓰다니!]
그들은 그렇게 이를 갈면서도 몸을 떨고 있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물론 저 까마귀도 처음엔 자신들과 같은 평범한 신급이었다. 하지만 어느날 미쳐 돌았는지 다른 유물들을 파괴하고, 그 힘을 먹어 치웠다. 덕분에 저 까마귀 놈은 어지간한 신급들로는 대항할 수 없는 놈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 인간놈들을 위한 짓이었으니, 유물들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배신자 놈이 또 나타났다고?
결국 참다 못한 세트가 외쳤다.
[됐어! 일단 이 일을 다른 놈들한테도 알려야 해! 빌어먹을 유물 포식자놈이 다시 나타났다고!]
길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누비스까지 당하고, 공격은 안 통하는 미친 인간 놈이 있고, 거기에 보기 싫은 까마귀까지 나타났다.
이 자리에 계속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곧 세트가 제 몸이 깎이는 것도 개의치 않고 능력을 썼다. 그리고 이번엔 오시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쿵!
곧 세트와 오시리스의 힘이 합쳐진 재앙이 라스베가스를 중심으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갔다. 세상은 다시 한 번 지진이 일어나며 파괴되기 시작했고, 그 갈라진 땅에서 미라의 형상을 한 지옥의 망자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들이 주헌에게 꼴 좋다는 듯 외쳤다.
[멍청한 인간놈, 이제 널 상대할 시간은 없다. 그 벌레 같은 목숨, 어디 한 번 끝까지 잘 살아남아봐라!]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레이 하운드, 그리고 검은 개와 목걸이의 형상으로 나타났던 세 유물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이다.
그걸 보며 주헌은 쯧 혀를 찼다.
‘도망쳤군.’
예상은 했었지만, 역시 저것들은 본체가 아닌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금도끼 은도끼 때와 같은 것이다. 아무리 지들이 잘났다고 지껄여봐야 저놈들은 유물, 그러니까 물건이다.
생물형 유물이 아닌 이상, 저놈들은 인간들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는 단순한 고물짝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움직일 몸이 필요했고, 분신을 만드는 것이다. 쉽게 말해 인간과 컨텍하기 위한 형체라고 해야 할까.
금도끼 은도끼 때도 구렁이 산신령이 나와 자신을 위협하고 들지 않았나. 그 구렁이는 금도끼 은도끼의 분신이었다.
같은 원리로 저놈들도 어딘가에 숨어서 분신을 내보낸 것이었다.
곧 그들이 사라지자 까마귀는 드디어 주헌과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다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준 선물은 잘 쓰고 있는 모양이군.]
그 말에 눈을 가늘게 떴지만, 주헌은 칼 같이 잘라냈다.
“닥쳐, 까마귀. 너랑 대화할 시간 없으니까.”
[…….]
그 말대로였다. 지금은 이딴 까마귀 놈을 상대할 시간은 없었다.
주변에는 이집트 3종 세트 유물이 싸놓고 간 똥들이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녀노소, 나이대도 다양한 미라들이 산자의 목숨을 노리며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주헌은 그걸보며 혀를 찼다.
“거참 좀비 시티가 따로 없네.”
결국 말이 뚝 잘렸던 까마귀가 좀 꽁해진 건지, 아니면 단순한 비아냥인지 삐죽거리며 한마디 했다.
[인간이여. 이미 넌 무덤의 과제를 실패했고, 놈들은 도망갔다. 이제 세 놈이 만든 이 대고분에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을 거다. 네놈도 결국 여기서 죽겠지.]
하지만 그런 도발에 넘어갈 주헌도 아니었다.
“없긴 왜 없어.”
주헌은 점점 가까워지는 미라들을 보며 몸을 풀었다.
“본체를 찾아낸다.”
분신은 유물의 본체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방금 전에 사라진 그 건방진 유물 3인방도 이 근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 근처에 숨어서 미라를 조종하는 거겠지.’
놈들을 찾아낸 다음엔 간단했다.
“말을 안 듣는 놈은 말을 듣게 해야지."
그리고 그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주헌이 아닌가. 그 말에 까마귀는 픽 웃으며 단서를 던져주었다.
[놈들은 저 미라 안에 숨어 있다.]
“오호.”
[하지만 한낱 천한 인간 따위가 유물이 숨어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아내겠느냐.]
비웃음으로 들렸지만, 주헌은 그 말에 오히려 헛웃음을 흘렸다.
“물건 따위에게 설교하고 싶지 않지만 한마디 해두지.”
주헌은 품속에서 이집트 신관의 나이프를 꺼내며 웃었다.
“너희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을 얕보지 마라.”
그 말에 까마귀는 흡족하게 웃었고, 주헌은 발동된 유물 덕에 미라들의 속이 투시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 * *
[정말 환장하겠군, 도대체 까마귀는 왜 나타난거지?]
[알게 뭐야! 일단 힘 좀 회복하고 이 사실을 빨리 알려야지!]
한편, 미라의 몸에 숨어서 힘을 회복하고 있는 세 유물들은 화를 내고 있었다.
[그 도둑 까마귀, 설마 그 인간을 택한 것인가.]
물론 과거에도 인간 때문에 동족들을 먹어 치웠고, 그렇게 힘을 빼앗아갔으니 이번에도 인간의 힘이 되려는게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서주헌, 그 젊은 인간에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나?]
[무슨 소리야! 오히려 지배력만 따지면 그 옆에 있던 노인네가 훨씬 높다고!]
[굳이 왜 그런 놈을.]
그러나 그들은 생각하기를 관두기로 했다.
주헌의 함무라비 법전에 당한 데다가 까마귀에게 당해 힘을 회복하는데 집중해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인간 따위가 잘나봤자 우리를 찾아낼 순 없다.’
이 수 많은 미라 중에서 어떻게 숨어 있는 자신들을 찾아낼 수가 있겠는가.
그렇게 생각한 아누비스는 어두운 장소에서 숨을 고르고 잠에 들려고 했다.
하지만.
[끄아아아아악!]
멀지 않은 곳에서 세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깜짝 놀란 아누비스가 정신을 퍼득 차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지만, 미라의 몸 밖을 투시한 아누비스는 기겁하고 말았다. 꽤 멀리 있었던 세트의 유물이 일본도에 찍혀 비명을 지르며 파괴당하고 있던 것이다.
그 일본도의 정체는 무라마사.
보다 강한 적일수록 무자비한 저주를 뿜고, 파괴력이 높아지는 양아치 놈이었다.
그리고 그 뿐이 아니었다.
세트를 먼저 보내버린 주헌이 섬뜩한 눈빛으로 다음엔 오시리스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다른 미라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마치 주헌은 세트와 오시리스가 어느 미라에 숨어 있는지 똑똑히 아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유물들은 놀라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저, 저 인간이!]
어떻게 자신들이 있는 곳을!
하지만 그 의문은 그렇게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주헌이 들고 있는 또 다른 나이프 때문이었다.
형태는 양날 나이프, 문자나 형태는 이집트 양식, 그리고 손잡이 끝에는 아누비스를 상징하는 검은 자칼의 장식!
‘저건!’
아누비스는 주헌이 들고 있는 검을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저건! 내 가호를 받는 검이 아닌가!’
저건 이집트 장의사의 나이프고, 아누비스는 장의와 미라의 신이다. 쉽게 말해 근처에 있는 아누비스의 힘이 더해져 저 장의사의 나이프는 더욱 강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누비스의 가호를 받아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장의사의 검은 신이 나서 미라들을 난도질 해댔다.
[#$*#^^&!]
다 죽어라! 다 죽어!
미라들도 어차피 결국은 인간. 인간을 난도질하니 신이 난 것도 당연하긴 하지만, 문제는 저게 이집트 신 유물들이 소환한 것이라는 것이다.
쉽게 말해 자기의 상관이 벌인 일을 신이 나서 파괴하며 망쳐놓고 있다는 의미였다.
덕분에 세트가 욕을 하는 것도 당연했다.
[야이씨! 야! 저거 네 관할 놈이잖아! 뭐하는 거야! 막아!]
하지만 아누비스의 유물도 저 유물은 미처 몰랐다. 주헌이 유물의 기운을 귀신같이 숨기고 있었기 때문에 저 유물의 기척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찰나의 순간, 이번엔 뒤에서 오시리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졌다.
[끄아악!]
무라마사를 통한 두 번째 유물의 파괴. 물론 상대가 신급 유물인 만큼, 세트나 오시리스나 완벽하게 파괴할 순 없다.
하지만 딱 죽지 않을 만큼 저주를 받아 파괴된다고 해야 할까.
한마디로 무지하게 고통스럽다는 의미였다.
[저, 인간놈이!]
이제 남은 것은 한 마리.
달려드는 미라들 쯤이야 발의 때를 벗기기 위해 달려드는 닥터피쉬 쯤으로 취급하는 건지, 주헌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아누비스에게 날아들었다.
멀리서 세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막으라고!]
하지만 지금 아누비스는 힘을 굉장히 잃은 상태가 아닌가. 장의사의 검을 막기는커녕, 제 몸을 회복 시키는 것이 고작!
결국 사납게 달려드는 맹수한테 목을 내어줄 수 밖에 없었다.
서걱!
[크으윽!]
마침내 주헌이 미라 한 마리를 난도질 하자, 안에서는 이집트 형식의 금팔찌 하나가 허공에 날아 올랐다. 그리고 주헌은 그걸 놓치지 않고 무라마사를 사용해 아누비스를 베어버렸다.
쾅!
동시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 왔고, 아누비스의 유물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이자식!]
곧 두동강난 팔찌가 바닥을 굴렀다. 아누비스는 괴로웠지만, 그걸 순순히 봐주고 있을 주헌도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콰직!
주헌이 두동강난 금팔찌를 밟으면서 한마디 했다.
“신급 유물 주제에 아직 파괴 안된거 잘 안다.”
[?!]
“자, 우리 과제를 다시 시작해볼까?”
[뭐야?]
주헌은 아누비스의 유물을 반드시 얻어갈 생각인지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러니까 그 빌어먹을 42개의 질문을 다시 내보라고. 얼마든지 예스라고 대답해줄테니까.”
하지만.
주헌은 무라마사를 들고 협박하듯 웃었다.
“아프기 싫으면, 이번엔 내가 말하는 대로 질문 내용을 고친다. 알았어?”
젠장, 시험 문제 따위, 고치면 그만이지.
============================ 작품 후기 ============================
+ 선추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