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135화 (16/16)

128.

천족과 마족. 그 둘이 한 자리에 섬으로써 기이한 대결 구도가 이루어졌다. 둘 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던 존재들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를 보고 놀라는 건 현장에 선 각성자들이나 TV 너머로 보고 있는 시청자나 똑같았다.

허, 허허허. 내가 살다 천사도 다 보네.”

레나는 허허거리며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다가 선우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선우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뭔가를 아는 사람 같았다. 그렇기에 길드원인 레나나 아인도 좀 더 침착해질 수 있었다.

침착하자, 침착.

속으로 연신 되뇌는 사이, 천사와 악마가 싸우기 시작했다. 악마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무시무시한 괴물들을 이용해 수적 우위로 천사를 누르려고 했다. 하지만 천사들은 각성자들처럼 쉽게 당하지 않았다. 그들이 빛에 휩싸인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괴물들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꼭 게임을 보는 것 같네.”

누군가 중얼거렸다.

갑자기 무슨 게임?

어느 게임이건 빛 속성하고 어둠 속성은 상극이거든.”

그 말대로였다. 천사가 휘두르는 무기에 의해 괴물들이 무너지고 있었지만, 반대로 악마들이 중간중간 끼어들 때마다 천사들의 전열도 무너지곤 했다.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도무지 끼어들 엄두가 나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때 저편에서 남자 셋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

?

저 사람 그 사람 아냐지현우. 잡혀 있다더니 풀려났나 보네?

그 말에 몇몇 각성자가 몸을 긴장시켰으나 그도 잠시였다. 그를 잡아 가둔 사람이 저 레온이다. 어쩌면 그도 잘못된 피해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딱히 막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

현우는 반갑게 그를 부르는 선우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다. 그런 후에 바닥에 떨어진 벽의 파편을 손으로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다음 완벽한 아치를 그린 팔이 파편을 집어 던졌다.

평범해 보이던 시멘트 조각이 순식간에 무시무시한 흉기로 변했다. 그리고 그건 한창 싸우는 중인 천족의 이마에 명중했다.

아하하하하하!

그를 본 아이나스가 손가락질하며 웃었다.

넌 또 왜 웃어?

그러나 이어 날아온 파편이 이번에는 아이나스의 뒤통수를 두드렸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

어찌나 빠르게 날아왔던지 평범한 파편인데도 머리통이 움푹 패이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천족과 마족 양쪽에 공평하게 한방씩 먹인 현우는 알베르크의 멱살을 잡았다.

이번엔 너도 도와.”

싫다면?

평생 미워한다.”

마족한테 그런 건 의미가 없는데?

정말?

현우는 알베르크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말 상관없어?

그 말과 함께 현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이대로 알베르크를 놓아 버리려는 것이다. 알베르크는 뒤늦게야 현우가 말하는 미워한다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니.”

현우의 손을 잡은 알베르크는 그에게 고이 멱살을 내주었다.

아무래도 조금 상관이 있는 듯하군.”

그럼 닥치고 따라와.”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도진은 현우에게 속삭였다.

굳이 멱살을 잡아서 끌고 가야 해?

현우가 만져서는 안 되는 징그러운 거라도 만지고 있는 듯한 말투다.

안 그러면 튀고도 남을 놈이라서.”

신뢰도가 너무 없는데.”

닥치라고 했지?

그제야 알베르크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먼저 알베르크를 안으로 밀어 넣은 현우는 이어 도진과 함께 몸을 던졌다.

어떻게 하면 돼?

그냥 여기 있는 모든 녀석들을 때려잡으면 돼.”

전부?

도진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그래도 날개 달린 쪽은 자신의 편이 아니던가?

천족이나 마족이나 그게 그거야.”

현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손에 잡히는 대 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기기 시작했다. 그는 알베르크도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도진도 자연 그들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괴물을 썰고, 뭉개고, 던지고 천족 앞으로 다가간 알베르크가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하나 더 나타난 마족에 당황한 천족들이 그를 상대하는 사이, 현우는 아이나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아이나스는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괴물들을 불러들였지만, 그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도진이 현우를 보조하는 사이, 그가 다가와 냅다 머리통을 두들기고 멱살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곤란하군요. 이런 건 계획에 없었는데.”

아이나스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잡혀 있는 주제에 말은 많네.”

그게 제 장점이니까요. 원래는 이대로 멋지게 사라지는 거였는데.”

아련한 눈빛으로 장내를 훑어본 아이나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판이군요.”

곧 더한 개판을 보여 주마.”

현우는 위협적으로 주먹을 흔들었다.

앗, 저는 육박전에는 재능이 없습니다. 저보단 리비 님과 싸우시는 게 어떻습니까?

너부터 족치고.”

하하하하.”

현우는 난감하게 웃는 아이나스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패고, 패고, 또 패고. 곤죽을 만들어 놓고서야 만족하며 멱살을 놓았다.

으으.”

이어 현우는 리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 방해만 되는 사람이군요.”

나에겐 네가 방해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림자가 리비의 시야를 가렸다. 이어 현우가 그를 향해 빠르게 달려들었다.

선우는 숨을 고르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더 싸울 수 있어.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음을 확인한 그는 다시 안으로 뛰어들었다. 형이 싸우고 있는데 그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를 레나는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아아, 역시 보고만 있을 수 없어!

그 말과 함께 무기를 휘두르며 움직이자, 아인이 그 뒤를 따랐다. 이어 나지막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나도 가만있을 수 없지.”

각성자들 중 아직 싸울 수 있는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구를 쳐야 하는 거야?

일단은 몬스터들?

그리고?

몬스터를 조종하는 녀석들.”

그럼 저기 천사들은?

다른 녀석들은 얼마든지 쥐어팰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천사는 망설여졌다.

흠. 일단 마지막으로 미뤄 두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지금은 천사도 상대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대충 합의를 끝낸 각성자들은 다시 열심히 움직였다.

포털에서도 이렇게는 안 싸운 것 같은데!

누군가 불평하며 몬스터를 붙들어 맸다. 그런 몬스터를 또 다른 누군가가 뭉개 버렸다. 불꽃이 살아남은 것들을 불태우고, 검이 확인 사살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여전히 방송을 타고 있었다.

TV에 떠오른 영상에 사람들은 또다시 새로운 희망을 가졌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우기 위해 움직이는 각성자들을 보며 투쟁을 느꼈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갑자기 밖에서 커다란 고함이 들려왔다. 소녀는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으나, 이내 다시 어깨를 폈다. 고함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옆집에서 거리에서 연신 들려왔다.

그래, 그렇게 하는 거야!

힘내라고!

할 수 있어!

다들 싸우고 있는 각성자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희생자는 많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있었다. 분명 무섭고 괴로울 텐데도 물러서지 않고 나아가는 모습에 울컥 눈물이 솟아났다.

히, 힘내요!

소녀도 커다랗게 소리를 쳤다. 인류를 수호하는 줄 알았던 레온은 사실 빌런이었다. 한순간 절망했으나,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이들이 있었다. 그렇기에 소녀는 재차 고함을 내질렀다.

모두 해치워 버려!

평소 얌전했던 소녀지만, 지금만은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힘을 모아 응원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응원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TV 화면이 새까맣게 변하더니 이내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다.

안에서 밖에서 터져 나오던 응원이 멈췄다. 혹시나 해서 TV를 두드려봐도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

현우, 도진과 싸우고 있던 리비는 잠시 한눈을 팔았다. 그 때문에 몇 차례 더 얻어맞았지만, 괜찮다. 그 정도는 각오했으니까.

내 계획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인간들이 좀 더 절망하고, 괴로워하길 원했다. 마족에게는 그마저도 달콤한 양식이 되니까. 그런데 이 모습은 뭐란 말인가. 약한 녀석들이 힘을 모아 괴물들을 상대하며 분발하고 있다. 아이나스는 무력화된 지 오래였다.

어떻게든 몸을 회복시켜 보려 하고 있었지만,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모든 건 리비가 원했던 모양새가 아니었다. 리비는 머리를 흔들고는 허공을 바라보았다.

진짜 짜증 나는군.”

리비는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던 카메라를 부숴 버렸다. 이제 인간들은 직접 여기 오기까지, 내부 사정을 알 수 없다. 게다가 때맞춰 히드라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결계를 쳐.”

그 말에 히드라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결계를 쳤다. 바닥이 늪처럼 변하고 결계가 건물을 뒤덮자, 각성자들의 움직임이 굼뜨게 변했다.

그 상황에서 리비는 내내 숨기고 있던 날개를 꺼냈다. 피막이 달린 새카만 날개가 펼쳐지고 이어 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천족을 열심히 때리던 알베르크가 손을 놓고 현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변한다고아무리 결계를 쳤다고 해도 천족들이 남아 있는데 진짜 막 나가네?

알베르크가 혀를 찼다.

129.

우엑. 저게 뭐야.”

열심히 싸우던 누가 중얼거렸다. 리비의 모습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형태의 괴물이었다.

얼핏 보면 거대한 식물처럼 보였으나, 가지가 무척 굵었으며 위에는 빼곡하게 가시가 들어차 있었다. 중앙에는 꽃이 피어 있었는데, 촉수가 들썩일 때마다 중심부에 가득 돋아나 있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빛났다.

저거 식물계였어?

현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알베르크에게 물었다.

그런 모양인데?

본의 아니게 알베르크의 원래 모습을 본 적 있는 현우였다. 그렇기에 리비의 본모습도 인간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 것이라곤 상상하긴 했으나, 식물이라니.

식물은 강한 힘을 가지기 어렵다며?

일단은 제자리에서 이동하기 힘드니까하지만 하나 예외적인 식물이 있긴 하지.”

뭔데?

블러드 메리라고 질 낮은 몬스터의 시체와 피를 찾아 움직이는 이동형 식물이다. 원래는 저 정도 성장하기 쉽지 않은데 어디서 고위 마족의 피라도 흡수했던 모양이네.”

그리고 저렇게 자랐고저거 지금도 더 자라고 있는데?

현우는 조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대로라면 히드라의 결계 안을 꽉 채우게 생겼다. 뭘 어떻게 하기도 전에 압사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얼릴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선우가 의견을 제시했다. 예로부터 식물에게 위험한 것이 둘 있었으니, 하나는 불이고, 다른 하나는 추위였다.

저걸 다 얼릴 수 있겠어?

해 볼게.”

선우가 비장하게 대답했다.

아냐, 됐어. 지쳤을 거 아냐.”

현우는 앞으로 나서려는 동생을 붙잡았다.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불을 다루는 이들이 불을 붙여 보겠다고 나서고 있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촉수 같은 줄기에서 끈적끈적한 점액이 새어 나와 불이 옮겨 붙지 않았다.

여기서 얼리는 건 나만 가능한 것 같은데.”

그 말에 현우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나도 가능해.”

현우의 능력은 죽인 몬스터나 마족의 능력을 복사하는 것이다. 그중에 마침 냉기 속성의 마족도 있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여기서 그 능력을 발휘해도 되느냐, 였는데.

안 하면 다 죽겠군.

알베르크에게 묶여 있던 천족들이 리비에게 달려드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라고 딱히 커다란 데미지를 주지는 못하고 있었다. 촉수의 재생력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었다.

너 냉기도 다룰 수 있지 않아?

알베르크는 눈치도 없이 현우의 능력을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눈치 없는 척하는 것이리라. 현우는 그대로 알베르크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예전에는 지나치게 여려 보이는 미소년 형태가 손을 대기 다소 민망했는데, 지금은 거리낌이 없다. 워낙 튼실해 보였기에 인정사정없이 차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프군.”

알베르크는 엄살을 떨며 옆으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리고 그 빈틈을 도진이 채웠다. 뒤늦게 알베르크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지만, 도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망설여져?

도진의 질문에 현우가 쓴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조금은.”

원래 힘을 발휘하는 바람에 몰린 걸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게 레온, 지금의 리비가 꾸민 음모였지만 그걸 알아도 기분이 나아지진 않았다. 그 음모에 동조해 현우를 비난한 건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럼 하지 마.”

도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하면 사람들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기적이라고 할지는 몰라도 나는 네가 더 소중해.”

그러면서 웃어 보이는 도진 덕분에 용기가 났다. 현우는 작게 웃고는 마기를 끌어냈다.

냉기를 다루던 마족.

그래도 초반에는 삼킨 능력의 주인들을 기억하고자 애썼는데, 후반으로 갈수록 외우는 걸 포기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인간인 현우에게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쯤 되었을 때, 리비는 부피를 늘리는 걸 멈췄다. 더 덩치를 키웠다가는 결계를 빠져나가게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천사들은 그런 리비를 연신 공격해 댔다. 그리고 다른 각성자들도 그들이 때린 곳을 또 때렸다. 조금이라도 효과를 볼까 싶어서 그런 것이었다.

간악한 마족 놈능력을 숨기고 있었구나!

뭘 새삼스럽게. 너희도 그렇지 않나?

맞았다. 마족들이 본 모습을 숨기고 다니듯이 천사들도 능력에 제한이 있었다. 정식 루트로 중간계에 내려오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 힘을 다시 풀려면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혼자 비공식적인 방법으로 이곳으로 들어온 리비와는 달랐다.

너도 정식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잖아?

공격 준비를 하던 현우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난 통로가 좀 좁았어. 그 때문에 약화된 채 넘어 왔는걸. 본모습으로 돌아가도 금방 풀릴 거다.”

도움이 안 되네.”

신랄한걸.”

알베르크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저리 꺼져 있어.”

현우는 매정하게 말하고는, 손을 앞으로 들어올렸다. 그러자 일어나는 마기와 함께 냉기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스멀스멀 솟아오른 하얀 연기는 촉수를 감싸고 올랐다. 처음에는 심각하지 않다 생각하여 무시하던 리비는 어느 순간부터 몸이 둔해짐을 느꼈다. 그리고 그제야 냉기가 몸을 감사고 있음을 깨달았다.

여기엔 아까 불을 막기 위해 뿜어내던 액체도 소용이 없는지라, 좀 더 적극적으로 촉수와 같은 줄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후웅!

어찌나 세게 휘두르는지 바람 소리가 살벌하게 났다. 몇몇은 그 촉수를 막아섰고, 몇은 피했다. 결론적으로 피하는 쪽이 옳았다. 덩치만큼 촉수는 강하고 단단했으며, 막아 낼 만한 것이 아니었다.

정신 집중하십시오이제부터 저희는 몬스터 명 블러드 메리를 레이드할 겁니다!

선우가 외쳤다.

탱커는 앞으로, 원거리 딜러는 뒤로힐러와 지원계열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십시오!

지시가 떨어지자, 각성자들은 그에 맞춰 움직였다. 예전에 티아매트를 상대할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본격적인 레이드가 되어 가고 있었다.

후욱.”

요정은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 간신히 죽을힘을 다해 여왕님께 연락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나서 시선을 돌리니 히드라의 뒷모습과 그를 공격하려고 틈을 엿보는 두눈이 보였다.

으으, 안 돼.”

이 상황에서 결계까지 사라지면, 마족의 힘이 더 멀리멀리 퍼져 나가게 된다. 한마디로 개판이 된단 소리였다. 요정은 후들거리는 몸을 움직여 두눈에게로 움직였다. 그리고 간신히 그의 머리 위에 착지하는 걸 성공했다.

안 돼요, 안 돼.”

요정이 머리를 철썩철썩 때리자 두눈이 멈춰 섰다.

곧 여왕님이 해결해 주실 테니까. 일단은 가만 계세요.”

두눈은 고개를 내저었다.

안에 현우.”

현우 씨라면 이 상황도 잘 버텨 낼 겁니다. 더한 상황도 이겨 냈던 사람 아닙니까?

그래도.”

쓸데없는 걱정이에요.”

요정은 재차 두눈의 머리를 두들겼다. 워낙 머리 가죽이 두꺼워 별 느낌도 안 나겠지만, 나름의 화풀이였다. 실상 잘못한 건 두눈이 아니라 다른 쪽이었지만.

조금만 참아 주세요.”

그리고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듯 드러누웠다. 결계 하나를 두고 참으로 평온하다.

아니, 그 말은 정정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각성자들이 우르르 안쪽으로 몰려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가장 먼저 두 눈을 보고 화들짝 놀랐으나 누군가 외쳤다.

지현우의 몬스터다!

다행히 요정은 제대로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어 그들의 시선이 히드라에게로 향했다.

저쪽을 물리쳐야 해.”

그러자 선두에 서 있던 거대한 방패를 든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요정과 두눈은 모르고 있었지만, 뉴욕에서 세 번째 가는 길드 썬더의 길드장 록슨이었다. 그는 오래지 않아 히드라가 홀 안쪽으로 통하는 곳을 막고 있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그를 목표로 잡았다.

일단은 내가 지휘를 맡겠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모여든 각성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과 바카디가 빌런인 게 밝혀진 이상, 그들 길드의 명령은 받을 수 없었다. 의심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안으로 들어온 것도 그 두 길드를 제외한 이들이었다.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가디언 길드의 각성자는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누군 이런 걸 원했나?

피닉스 길드의 길드원이 뾰족하게 대답했다. 길드장은 빼도 박도 못할 빌런에 길드원 대부분도 그에 동조한 게 알려진 뒤로 그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대부분 그들을 배척했고, 그 앞에서 무고를 주장해봤자 소용없었다.

정신 차려요. 그래도 우린 여기 모였어요.”

그 모든 걸 알면서도 사람들을 돕기 위해 여기 모였다.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불평이 잦아들었다.

그래,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돼.”

그게 당장은 기다려야 하는 일일지라도.

130.

전투는 격렬하게 이어졌다. 리비의 몸은 점점 얼어붙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되니 둔한 표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각성자도 지쳤으나, 리비도 지쳤다. 고작해야 인간을 이겨 내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변수가 너무 많았다.

생각보다 강했던 지현우, 갑자기 등장한 천족 꼬맹이, 거기에 알베르크까지 더해서.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계획을 틀어 버리기 시작했다. 그 결과가 이것이다.

물러나는 게 나을까.

죽은 척 쓰러져 있던 아이나스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지금이라면 그녀가 가지고 있는 포털생성기를 통해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 리비는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몰아친 차가운 바람이 전신을 얼려 버렸다.

도망치게 내버려 둘 것 같아?

현우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손을 흔들던 아이나스는 어느새 알베르크에게 목덜미를 잡힌 상태였다. 퇴로는 없었다.

이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힘을 쓰면 리비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의 원흉. 그만 죽이면 이제 세상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현우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몸의 대부분이 얼어서 굼떠진 리비에게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 허공에 포털이 열리더니 그 사이로 요정 하나가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각성자들이 보아 온 요정보다 덩치가 더 컸고, 화려했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요정들의 관리자, 여왕이라고 합니다.”

여왕은 우아하게 인사했으나, 현우는 움직이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빠각.

얼어붙은 줄기 하나가 현우에 의해 조각났다.

저기, 잠시 제 말 좀 들어 주시겠어요?

말해.”

그 상황에서도 리비는 여전히 버둥거렸고, 현우는 열심히 줄기를 줄여 나갔다. 그는 도진과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여왕은 그런 이들을 어처구니없이 바라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여러분, 이건 아시죠. 마족도 천족도 이 세계에 와선 안 돼요. 그건 모든 차원계의 규칙이랍니다. 그런데 여기엔 마족도 천족도 있네요. 그래서 그를 수습하고자 제가 왔습니다.”

빨리도 왔네.”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여왕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러나 그 주체가 현우인 걸 알자 다시 눈매가 누그러졌다.

저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답니다. 그보다 마족은 인제 그만 내버려 두는 건 어떨까요둘 다 제가 원래 세계로 돌려보낼 거랍니다.”

이걸 돌려보내겠다고?

현우의 표정이 더 사나워졌다.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존재니까요.”

안 돼. 이건 여기서 죽어야 해.”

그동안 이 세상에 분탕을 친 게 얼만데 그냥 돌려보내란 소린가. 그건 납득할 수 없었다. 자연 현우의 목소리도 날카로워졌다.

일단 진정하시고.”

여왕은 어떻게든 현우를 말려 보려고 했지만, 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의무처럼 리비를 조각조각 내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돌려보내겠다고 끼어들었다가는 그녀의 날개도 잡아 뽑을 기세였다.

그, 그럼 일단 천족분들부터 돌아가실까요?

여왕은 어색하게 웃으며 천족에게 말을 걸었다.

여기 마족을 두고 돌아가라고난 그럴 수 없다.”

천족은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언제나 단정하던 옷차림은 엉망이 되어 있었고, 머리도 흐트러져 있었다. 날개 또한 멀쩡하진 않았다. 마족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고 우기긴 했으나, 실상은 인간들의 취급에 화가 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걸 여왕이 알 리 없었다.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꾹꾹 내리눌렀다.

그러니까 그 마족은 저기서 죽어 가고 있는데요.

규격 외 강자인 현우가 작정하고 덤벼드니 마족도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나마 같은 마족인 알베르크는 아이나스를 붙잡고 히죽대기만 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왕이 천족을 설득하기 위해 다시 입을 여는데 뒤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리비의 얼어버린 줄기 조각이었다.

닥치고 당장 꺼져. 이 녀석 다음은 너희다.”

현우가 살벌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말했다. 그 기운이 얼마나 험악한지 몇몇 이들을 빼고 전부 소름이 돋아 올라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를 마족과 같은 취급 하는 건가?

마족이나 천족이나 이 세계에는 필요 없어.”

다를 게 뭐람현우는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고집했다. 그에 일부 천족이 반발했으나 미리엘이 말렸다.

제가 남을 테니 다른 분들은 돌아가셔도 될 것 같습니다. 마족이 완전히 사라지는지 확인한 후엔 저도 돌아가겠습니다.”

세상에, 아직 어린 너만을 두고 갈 순 없다. 차라리 내가 남으마.”

아닙니다. 그나마 인간들과 관계를 지속해 온 건 저니까요.”

미리엘은 차분히 친가 어른들을 설득해 나갔다. 한참 실랑이를 하던 그들은 결국, 여왕에 의해 다시 원래 세계로 돌아갔다. 미리엘만을 남겨 두고서 말이다, 혼자 남게 된 미리엘은 사뿐히 걸어 알베르크의 옆에 섰다.

여어, 꼬맹이.”

꼬맹이라 하지 마라, 마족.”

꼬맹이를 꼬맹이라고 하지, 뭐.”

알베르크는 아이나스를 내팽개치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그래, 네 음모는 전부 깨진 것 같다만. 이제 어쩔 거지?

지금까지의 일로 상황을 전부 파악한 미리엘은 알베르크의 계획 또한 깨졌음을 깨달았다.

나도 잘 모르겠군.”

알베르크는 그리 말하곤 죽어 가는 리비를 바라보았다.

돌아, 돌아가겠다!

죽음의 위기 앞에 선 리비가 여왕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이미 늦었다.

한 번 화가 난 현우는 나도 못 말리거든.”

마계에서 가장 강한 게 너 아닌가?

현우가 알베르크와 종종 싸웠단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랑에 빠진 알베르크가 봐주었기 때문 아닌가미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봐줬다고?

알베르크가 코웃음을 쳤다.

그런 적 없어. 현우는 지금까지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나와 겨뤄 왔다. 그래서 더 사랑스럽지. 절대 굽히지 않는 그 성격이 마음에 들어.”

역시 마족. 취향이 최악이군.”

미리엘은 알베르크를 매도하고, 리비의 최후를 감상했다.

그만해!

리비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줄기를 휘둘렀다.

돌아가겠다고 했잖아!

어찌나 다급한지 평소 쓰던 존댓말은 나오지도 않았다. 그도 현우의 능력에 대해 미리엘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건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이제는 어떻게 학살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남는냐에 집중해야 했다. 그 사이, 결계를 유지하고 있던 히드라 카이가 쓰려졌다. 새로운 각성자들이 안으로 난입했고, 그들은 들어오자마자 리비와 현우를 발견했다.

세상에, 저건 뭐람?

괴이한 몬스터네.”

괴이쩍은 모습에 몸을 떨면서도 각성자들은 레이드에 끼어들었다. 내내 싸우느라 지쳐 있던 이들은 뒤로 빠지고 새로운 이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리비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이제 정말 끝이네.”

거의 모든 줄기를 뜯어 낸 현우가 중앙에 달려 있던 꽃 옆에 섰다.

정말 이 모든 게 끝일 거라고 생각해?

이 세상엔 아직 리비가 심어 둔 수많은 몬스터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은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하며 움직일 것이다.

그렇겐 생각 안 해. 이제 시작일지도 모르지.”

현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리고는 두꺼운 꽃잎에 손을 올렸다. 순식간에 굳어 가는 몸을 느끼며 리비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마기를 이용해 자신의 몸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다 죽어 버려!

그렇지만 그도 큰 효과를 발휘하진 못했다. 일차적으로 현우가 마기로 폭발을 감싸고, 이차적으로 도진이 자잘한 피해를 그림자로 삼켰다. 그래도 빠져나간 건 있었지만, 여기 있는 이들은 손꼽히는 강자들이었다. 그 정도는 각자 막아 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모두를 속이고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어 온 가디언 길드의 수장은 생각보다 너무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자, 이제 남은 문제는.

리비를 해결한 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급한 일이 해결되고 나면 다음 문제가 두드러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다음 문제는 바로 그였다.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아마도 배척이겠지.

자신이 가진 힘이 정상은 아니니까. 현우는 손을 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는데 지금은 기이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도.”

그때 누군가 입을 열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쳐서 구석에서 쉬고 있던 앰버였다. 그녀는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는 현우에게 허리를 숙였다.

현우 님이 아니었으면 저희 모두 죽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

앰버가 나서자 이반도 거기에 말을 얹었다.

진짜 끔찍한 괴물이었습니다.”

준이치 또한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현우 님의 능력은 몬스터들과 달라요.”

앰버는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 능력에 저희는 모두 도움을 받았어요.”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하나둘 현우를 향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고마워.”

네 덕분에 살아남았어.”

자칫하면 현우를 향할 수도 있던 적의가 사라졌다. 그는 앞서서 나선 앰버 덕분이었다.

131.

현장을 정리하는 데는 제법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아이나스에 의해 몬스터가 되어 버린 사람들이 누가 있는지를 알아내야 했고, 그로 인해 죽어 버린 사람들도 명단에 올려야 했다.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게다가 대부분이 가디언 길드 각성자들이라, 미국은 곤란에 처했다.

국력이 약해지기 때문이었다. 뿐이랴. 다른 나라에서는 미국의 길드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다며 책임을 지라 요구했다.

우리도 피해자입니다!

외쳐 보았지만, 그들에게는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사로잡힌 아이나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 입을 열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사용해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옆에 붙은 요정은 아이나스와 알베르크, 미리엘도 돌려보내야 한다고 징징거렸다.

때 되면 돌려보낼 거야.”

그때가 언제란 말입니까지금 보내 주세요, 네?

요정은 무척이나 끈질겼다. 그 상황에서 아이나스는 현우에게 면회를 요청했다.

그런 거 들어줄 필요 없어, 형.”

선우는 반대했지만, 현우는 한 번쯤은 만나 볼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그렇기에 미국 정부의 허락을 받고 아이나스와 대면했다.

오랜만입니다.”

고된 생활을 했을 텐데 아이나스는 예전과 변한 것이 없었다.

제법 매섭게 굴고 있지만, 그래 봤자 인간 아닙니까마족은 통증에 강한 편이라서요. 그들로서는 제 입을 열 수 없을 겁니다.”

아이나스는 장담했다.

그건 됐고, 왜 만나자고 했어?

따르던 분이 죽었으니, 저도 슬슬 살길을 찾아야 할 것 같아서요. 충실한 부하 필요 없으신가요?

이게 돌았나.”

현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나스를 바라보았다.

종종 듣던 소리군요. 하지만 저는 진심입니다. 적어도 데리고 다니는 몬스터들 보다는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난 네 적이었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료가 되는 법이지요.”

됐어. 헛소리하지 말고 아는 거나 빨리 털어 놔.”

싫습니다. 제가 왜 아무런 이득 없이 그걸 밝혀야 합니까?

아이나스는 혀를 날름 내밀어 보였다. 아무래도 그에게서 정보는 뽑아내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 같았다. 저질러 놓은 일이 적기라도 하면 그냥 돌려보내고 자력으로 해결할 텐데.

현우는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지나가던 사람들은 현우를 볼 때마다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이 모든 것이 앰버덕분이었다. 그녀는 현우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가디언 길드의 숨겨진 죄악을 밝혔다.

그 때문에 현우가 힘을 감추고 있던 건 숨겨진 악인 레온을 처치하기 위함이었다고 알려졌다.

그런 게 아닌데.

졸지에 히어로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모퉁이를 돌아서자 익숙한 남자 둘이 보였다.

하나는 귀여운 동생,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

형, 아무런 일 없었어?

선우의 물음이 끝나기 무섭게 도진도 입을 열었다.

괜찮아아이나스가 해를 끼치진 않았어?

말은 다르지만, 뜻은 똑같다. 둘 다 현우를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괜찮아. 그보다 선우는 바쁠 텐데 기다려 준 거야?

현우의 말에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레온이 그런 최후를 맞이한 후, 각성자들은 새 협회장을 뽑기로 했다. 그 후보 중 하나는 러시아의 표드로, 다른 하나는 한국의 지선우였다. 원래는 현우를 후보로 올리려 했으나, 극구 거절했다.

이제 모든 일이 끝났는데, 협회장 같은 자리를 떠맡는 건 사양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형을 기다릴 시간은 있어.”

아이고, 귀여워라. 현우는 선우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그러자 구겨져 있던 미간이 슬슬 풀려나간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협회장은 선우가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해외 거주가 늘어날 테고, 많이 바빠질 것이다.

도진은 그를 기꺼워했다. 현우에게 소중한 이는 그에게도 소중했지만, 선우는 형과 조금 떨어질 필요가 있었다.

그보다 국장은 어떻게 할까?

김철수 씨 말이지.”

응.”

예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돌아가는 미국의 상황에 국장인 철수는 당황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자리를 보존하고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다니는 모양인데. 딱히 효과는 없어 보였다.

지금이라면 쉽게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있을 거야.”

그럼 국장을 바꿀 수 있단 소리네?

그렇지.”

그럼 최무혁이 국장이 되는 건가?

그건 아냐.”

선우와 현우의 대화에 도진이 끼어들었다.

국장이 되기엔 최무혁은 너무 젊거든. 그 전에 다른 사람을 한 번 더 세워야 할 것 같아.”

누구?

그건 최무혁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도움을 주긴 하지만, 인재는 스스로 찾아야 할 거야.”

하긴, 그 정도는 스스로 해야지.”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얼추 상황은 정리되어 가고 있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장례식만 참여하고 돌아가면 되네.”

그런 셈이지.”

이번에 억울하게 죽은 각성자와 시민들의 합동 장례식이 치러진다. 그들은 비록 죽었지만, 남은 가족들을 위해 훈장과 연금을 수여하기로 했다.

가디언 길드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피닉스 길드는 대부분의 사람이 떠나고 소수만 남았다. 길드장인 바카디가 빌런인 탓이었다. 그러니 가디언 길드도 그와 비슷하게 되리란 건 추측하기 어렵지 않았다.

망하는 건가?

일단 가디언 길드는 사라질 것 같아. 하지만 남은 사람들끼리 뭉쳐서 새로 길드를 만든다고 해.”

가디언 길드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은 매서워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포기할 수 없는 가치를 위해 다시 뭉쳤다.

[정의]

그 단어 하나를 위해서.

쉽지 않을 텐데.”

그렇지. 편견의 시선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그들은 노력하길 선택한 거야.”

도진은 웃으며 답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일어서는 사람이 있다. 그렇기에 세상은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장례식은 엄숙한 분위기에서 치러졌다. 관의 절반 이상은 비어 있었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슬픔과 의지를 끌어내는 데는 충분했다. 까만 정장을 입은 현우는 그 모든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크.”

그래.”

너도 이제 그만 돌아가.”

너무 냉정한 거 아냐?

미리엘은 네가 돌아가면 곧바로 돌아가기로 했어. 아이나스는 못 돌아갈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나스는 원한을 너무 많이 샀다. 이대로 돌려보내기엔 상황이 여의찮았다. 아마 그녀는 이곳에서 죽게 될 것이다.

나는 갈 수 없어. 널 두고 내가 어딜 가.”

알베르크. 알잖아, 내가 누굴 좋아하는지.”

그래, 한도진을 좋아하고 있지. 언젠가 스러져 갈 허무한 생명을 말이야.”

괜찮아. 그때가 되면 나도 같이 갈 거니까.”

나와 함께 가면 훨씬 더 오래 살 수 있는데.”

그 말에 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냐.”

그래.”

알베르크는 잠시 하늘을 올려보았다.

강제로라도 데려갈까.

이후 요정의 참견만 없다면 현우는 자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이상한 생각 안 했는데.”

그걸 어떻게 믿어?

현우는 손을 내저었다.

돌아갈 수 없다면?

강제로 돌려보내야겠지.”

여기는 장례식장이니 싸우긴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곳으로 끌고 가서 싸우리라.

좋아.”

알베르크는 서글프게 웃었다. 현우를 손에 넣고 싶지만, 그에게 미움받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조금 인내심을 가져 보기로 했다. 어차피 마족의 삶은 길지 않던가.

지금은 돌아가도록 하지. 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 거야. 그땐 반드시 너와 함께 갈 테니 각오해 두라고.”

그때라고 따라갈 것 같아?

그땐 정말 강제로 데려갈 거야.”

죽여서라도, 영혼만 끌어안게 되더라도 데려갈 것이다.

어차피 인간의 삶은 100년.

각성자는 좀 더 오래 살긴 하지만, 그래도 마족에 비해선 턱없이 짧은 시간이다.

아아, 대단하십니다!

알베르크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어디선가 요정이 뿅하고 나타났다.

역시 현우 님이세요이렇게 훌륭하게 알베르크 님을 설득하시다니요!

됐고 빨리 데려가.”

문을 열겠습니다!

요정은 두 손을 크게 펼치며 원을 그렸다. 그러자 허공에 사람이 하나 통과할 만한 포털이 생겨났다.

그럼 마지막으로.”

알베르크는 가까이 나가와 현우에게 입 맞췄다.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피하지도 못했다.

!

마지막이니 이 정도는 용서해 줘.”

현우가 주먹을 휘두르기도 전에 알베르크는 포털을 통과했다. 이제 남은 이는 미리엘뿐이었다. 미리엘은 몸만 돌아간 알베르크와는 다르게 커다란 짐을 가지고 있었다. 그게 무엇이냐는 물음에 그는 새침하게 대답했다.

가준이 챙겨 줬다.”

제법 이곳의 삶을 즐겼나 본데좋아하는 게 한둘이 아니다.

언젠가 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도록 하지.”

그 말을 끝으로 미리엘도 떠났다. 마지막에 그 말을 들은 요정이 절대로 안 된다고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이미 미리엘은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럼 저도 이제 돌아가 볼게요.”

그래.”

현우는 요정을 배웅했다.

이제는 정말로 현우 님이 원하는 대로 사세요.”

그게 요정의 마지막 말이었다.

132.

현우는 러그 위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오른쪽으로 한 번, 왼쪽으로 한 번 굴렀다.

뀨우우.”

그 옆에는 케로가 배를 까 놓고 자고 있고, 점박이가 가끔 잠꼬대같이 기이한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으나, 지금은 아무런 감흥도 들지 않는다.

하아.”

현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암만 굴러다녀도 심심함이 가시질 않았다.

TV? 이미 실컷 보았다. 어찌나 많이 보았던지 이제 드라마 앞부분만 봐도 다음 내용이 저절로 떠오른다. 만화그도 마찬가지였다. 게임한동안 현질까지 해 가며 서버 1위에 등극했으나, 더 하기 귀찮아져서 그만뒀다.

마지막으로 외출. 아서라. 아무리 꽁꽁 감싸도 들러붙는 기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찌나 끈덕지게 붙는지 열이 오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러다 결국엔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나가지 않게 되었다. 물론 큰일이 나는 쪽은 현우가 아닌 기자들이다.

범법 행위를 저지를 순 없지.

이제는 평범한 준법 시민으로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그럼 포털이라도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지금 세계적으로 손이 모자라 보통 난리가 아닙니다. 하나같이 격무에 시달리고 있지요.”

그렇게 말하는 부길드장 찬영의 눈 밑은 새카맸다.

도움을 요청한 길드가 여럿 있는데, 목록을 보시겠습니까?

너무하네요. 아직 쉰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 네.”

현우의 말에 찬영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하는 것 없이 뒹굴기만 하니 보기 싫은 모양이었다. 남들 눈엔 어떻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언제나 변함없이 대하는 그가 딱히 싫지는 않았다. 외려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 주니 좋았다. 그걸 직접 말하면 진저리를 칠 테지만 말이다.

하기 싫다는 데도 찬영은 기어이 길드 목록을 두고 나갔다. 이런 걸 옆에 두고 가면 궁금해서라도 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지능범 같으니라고.

현우는 데굴데굴 굴러 서류 앞까지 도착했다.

유독 미국의 도움 요청이 많네.”

하긴 상위권 길드가 다 무너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거긴 땅이 워낙 넓어야지.

어쩌나.

현우는 잠시 생각해 보았다. 일어나서 짐을 챙기고 미국에 가서 포털을 공략하는 걸 말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류를 고이 덮었다. 심심하다고 가기엔 너무 귀찮을 것 같았다.

그때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야.”

도진이었다. 한동안 바쁘게 움직이더니 오늘은 시간이 좀 남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입구의 비밀번호 혹시 바꿨어?

아니?

그래?

둘은 잠시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비밀번호를 바꿔 둔 것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선우가 바꾸고 갔나 보네.”

도진은 그림자를 밀어 넣어서 안쪽에서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러니 선우가 한 행동은 심통을 부린 거에 지나지 않았다.

귀여운 동생이라니까.”

그건 너한테만 그런 거고.”

아냐. 객관적으로 봐도 선우는 귀여운걸.”

현우는 도진의 말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그나저나 선우도 못 본 지 3일째네.

정말 어지간히 바쁜 모양이었다.

끙차.”

현우는 생각하기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도진이 왔는데 주스라도 내줄 생각이었다.

참, 나 이번에 미국에 다녀올 것 같아.”

미국에?

그래. 그러니 같이 갈래?

어, 음.”

거긴 좀 그런데. 여기서도 기자들에게 시달리는데 미국은 더할 것이다. 거긴 파파라치의 나라니까.

그거 꼭 가야 해?

앰버가 연락을 해 와서. 도움도 받았는데 가만있긴 그렇잖아.”

그것도 그렇네.”

당장 가는 건 아니니 고민 좀 해봐. 가면 일주일쯤 있다 올 거야.”

응, 그래볼게.”

이럴 줄 알았으면 두눈도 남겨둘 걸 그랬다. 요정이 다른 둘은 괜찮으나, 두눈은 규격 외라며 억지로 돌려보냈다. 때문에 남은 몬스터 케로와 점박이뿐이었다.

가끔 현우에 의해 파견을 나가긴 하지만, 아닐 때는 언제나 그의 옆에서 졸고 있었다. 주인이 게으르게 지내니 몬스터도 그를 본받은 모양이었다.

도진에게 주스를 건넨 현우는 그의 옆에 기대앉았다. 옆에서 보니 반 듯 선 콧날이며, 붉은 기를 머금은 입술이며 유독 어여뻐 보인다. 뽀뽀라도 한번 해 볼까그러면 어떤 반응을 보이려나.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눈이 딱 마주쳤다.

이건 해도 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도진을 올라타고 있었다.

뭐, 어때.

현우는 그대로 고개를 숙여 도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맞댔다. 가볍게 입술에 쪽쪽 거리자 도진이 간지럽다는 듯이 웃었다. 그게 사랑스러워서 이마에 한 번, 잘생긴 콧날에 한번, 뺨에 한 번. 키스를 퍼부었다.

도진은 그런 현우를 끌어안고서 바닥을 굴렀다. 그러고 나니 어라어느새 현우가 도진의 밑에 와 있었다.

너무 익숙한데?

무슨 소리야. 나는 순결한 몸이야.”

도진이 당당하게 자신이 동정임을 밝혔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혀로 현우의 입술을 핥았다.

벌려 줘.

의도가 선명하게 와 닿았다. 그에 배시시 웃으며 입술을 벌리자 파고든 혀가 여린 안쪽을 더듬기 시작했다. 얽힌 혀가 지나치게 뜨겁다. 뿐만 아니라 서서히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느새 바닥을 짚고 있던 도진의 손이 허리에 와 닿았다.

헐렁한 티셔츠가 위로 걷히고 탄탄하게 단련된 현우의 몸이 드러났다. 겉보기에는 말라 보이는데 벗기면 잔근육이 제법이다. 도진은 그 근육을 천천히 만져 보았다. 그 손길이 애타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갔다. 그리고 진도를 더 나가려는 찰나, 옆에서 귀여운 소리가 들려왔다.

키르륵.”

어느새 잠에서 깨어난 점박이와 케로가 둘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도진은 어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로와 점박이가 대단한 몬스터인 건 알지만, 작은 모습일 때는 한없이 여리게만 보였다. 그 때문에 차마 둘 앞에서 관계를 계속 이어갈 수가 없었다.

눈치 없긴.”

현우는 손가락으로 케로의 촉촉하게 젖은 코를 눌렀다.

왕왕!

케로는 아니라고, 모든 것은 점박이 때문이라고 필사적으로 해명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억울해!

점박이한테 불평을 늘어놓아도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점박이는 이런 경험이 없는 모양이었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 새끼도 안 낳았나. 케로는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점박이를 바라보았다. 점박이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단 밥이나 먹자. 뭐 먹고 싶어?

스파게티!

그래, 재료는 다 있으니까 해 줄게.”

몇 인분을 하면 좋을까, 고민하는데 문이 거침없이 열렸다.

혀엉!

이어 선우가 애교 어린 목소리를 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곧바로 현우에게 달려가 안겼다. 동생쪽이 키가 더 크기에 다소 어색한 그림이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던 도진이 헛기침 소리를 내었다. 암만 선우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더라도, 조금이라도 체면을 챙겨 줄 참이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도진의 존재를 눈치챈 선우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일이 끝나서 잠시 들렀습니다.”

선현 길드가 동네 사랑방입니까평화 길드 길드장이 왜 여깄냐는 소립니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뭘 말입니까?

저랑 현우가 사.”

그만, 그만 말하십시오!

선우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분노했다.

제가 망상은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망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그럴 리 없습니다.”

선우는 그리 말하며 애처로운 눈빛으로 현우를 돌아보았다. 그 모습이 마치 장화 신은 고양이와도 같아 넘어가 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언제까지 그래선 안 되겠지. 동생도 이제 어른이니까. 생각을 정리한 현우는 입을 열었다.

도진 형과 나는 사귀는 사이지.”

!

선우야, 이제 인정할 때도 됐잖아.”

나는 인정 못 해왜 하필 저런 사람이랑!

형이 어때서형도 엄연한 길드장인데다가 잘생겼잖아.”

그래도 안 돼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용납 못 해!

선우는 흔한 시어머니가 하는 멘트를 내뱉었다.

왕왕!

케로는 그런 선우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현우라면 실제로 눈에 흙을 넣고도 남을 사람이다. 물론 상대가 사랑하는 동생이니 안 넣을 수도 있겠지만.

흙만 들어가면 돼?

?

선우가 충격받은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아니, 각성자니까 흙 조금은 괜찮지 않나 싶어서.”

이럴 수가형이 변했다. 선우는 서러운 얼굴을 하였다.

나를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야 소중한 동생이니까.”

그런 그 소중한 동생의 말 좀 들어!

아니, 그건 또 별개지.”

선우는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으나, 현우에게 붙잡혔다. 그를 뿌리치려고 해도 현우의 힘에는 이길 수 없었다. 현우는 강제로 선우를 잡아당겨 다시 끌어안았다.

선우야, 들어 봐. 나는 너를 사랑해. 하지만 도진 형도 사랑해.”

난 싫어.”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모르겠네.”

현우는 선우의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너도 언젠가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야.”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형이야.”

아니, 형제로서 말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거라니까?

안 생겨.”

아니, 왜내 동생이 얼마나 잘났는데!

형제가 서로 투닥거리는 사이, 도진은 스파게티 3인분을 완성했다. 더불어 케로와 점박이의 식사도 같이 준비했다.

133.

식사는 즐겁게 끝났다. 이어 간식으로 과일까지 깎아 먹으니 이 어찌 완벽하지 않으랴. 이후 현우는 도진의 일정을 보며 그사이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했다.

최근 바빠서 제대로 붙어 있질 못했으니 그 시간을 늘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으니, 선우 또한 조금씩 시간에 여유가 생기고 있단 사실이었다.

형, 뭐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은 형인 현우가 도진과 단둘이 있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둘이 될 것 같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사이에 끼어들었다.

안 되겠다. 외부로 나가야겠어!

이제 이쯤이면 기자들도 좀 조용해졌겠지. 모자에 선글라스를 낀 현우는 도진과 함께 외부로 데이트를 갔다. 적당히 거리를 걷고, 식사를 하고, 이후 호텔로 가는 완벽한 계획이었다.

선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너 오늘 던전에 간다고 하지 않았어?

그거야 다녀왔지.”

벌써어려운 던전이라며.”

사람에게 불가능은 없더라고.”

상황이 이러니 현우도 서서히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욕구불만. 결국 원하던 호텔은 가지도 못하고 끝났다.

집으로 돌아온 현우는 대충 보고 던져 둔 서류부터 찾았다.

어디 보자.

국내가 안 되면 미국에 가서 데이트를 하면 되지 않겠는가현우는 야심에 찬 생각을 가지고 찬영에게 말했다.

미국에 가겠습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 하더라도 미국은 미국입니다. 나중에는 반드시 도움이 될 겁니다.”

찬영은 빠르게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눈치챈 선우는 자신도 가겠다고 나섰다.

안 돼.”

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

어떻게 불러도 안 돼.”

선우는 어떻게든 현우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는 웃는 얼굴로 끝끝내 거절했다.

이번에 따라오면 아프리카로 가 버릴 거야.”

그래도 따라가면 되지.”

내가 작정하고 따돌리려면 못 따돌릴 것 같아?

!

현우의 말에 선우는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현우는 이번만은 꿋꿋하게 버텨 보기로 했다. 도진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 그리고 맨살을 만져 보고 싶었다. 키스도 좋으리라.

나도 엄연히 성욕이 존재하는 사람이다.

현우는 요즘 들어 그걸 깨닫고 있었다. 더는 손만 잡는 것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러니 따라오지 마. 케로를 놓고 갈 거니까.”

케로라면 훌륭한 감시견이 되어 주리라. 그렇게 현우는 선우를 내버려 두고, 도진과 함께 미국으로 향했다.

*

현우!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앰버가 그들을 반겨 주었다.

이번에는 셋이 아니네요?

선우는 할 일이 많아서 두고 왔어요.”

저런. 하긴 이제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기도 하니 많이 바쁠 거예요. 일단 숙소부터 안내해 드릴게요.”

숙소는 제법 유명한 호텔이었다.

방은 일단 두 개 잡았는데요.”

필요 없습니다.”

?

방은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럼 트윈베드 방이면 될까요?

아뇨. 더블베드.”

현우의 말에 앰버가 작게 웃었다.

알았어요. 침대는 하나면 된다는 소리죠?

네.”

좋아요. 그럼 그 방으로 잡아 줄게요. 더 원하는 건 없나요?

혹시 방에 그게 있나요?

그거요?

앰버의 물음에 현우는 수줍게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보였다.

저게 뭔데?

의아해하며 바라보자, 현우가 설명을 덧붙였다.

그 연인들끼리 쓰는 거요.”

아하!

그제야 앰버는 현우가 바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현우를 한 번 보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귀끝이 조금 붉었다.

기본적으로 비치되어 있지만, 원한다면 더 준비해 둘게요.”

감사합니다.”

대답하는 현우의 얼굴도 빨갛다. 워낙 급하여 요청하긴 했지만, 그라고 부끄럽지 않을 리 없었다.

일은 이틀 뒤부터 시작하니까, 그 전까지 데이트라도 하세요.”

친절하게 배려해 준 앰버가 호텔을 떠나고, 둘은 정해진 방으로 올라갔다. 제법 넓은 거실과 여러 개의 방을 갖춘 공간에는 침대가 하나 있었는데, 더블베드였다.

완벽하네.

현우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일단 씻을까?

도진은 그를 아는지 모르는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부터 씻을래?

아니, 형부터 씻고 와.”

혹시나 자신이 씻는 사이 도진이 자리를 떠날까 봐, 현우는 그렇게 말했다.

아니면 같이 씻을래?

그런 현우에게 도진이 물어왔다.

같이?

생각보다 도진은 대담하게 나왔다. 너무 대담해서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조, 좋아!

현우는 수줍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욕실로 들어선 도진이 먼저 상의를 벗었다. 옷을 벗으면서 드러난 등 근육이 근사하다. 늘씬한 자신의 몸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였는가.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쿡.

가느다란 손가락이 도진의 등을 찔렀다. 그러자 탄탄한 등이 움찔거렸다.

현우야.”

도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참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현우는 그게 뭔지 알고 있었다. 손가락에서 시작해 손바닥이 그의 등에 닿아왔다.

너도 옷 벗어야지.”

아, 그렇지.”

현우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의를 벗었다. 도진과는 다른 몸이었지만, 그 또한 완벽했다. 마계에서 싸워온 세월은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그래도 몸에 상처는 없네.”

없앴으니까.”

현우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원래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강해지면서 자신의 몸을 수복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상처를 하나둘씩 없애 나갔다. 나중에 동생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했던 행동이었다.

도진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현우를 끌어안았다.

어느 쪽이건 넌 예뻤을 거야.”

이왕이면 멋있다고 해 주지.”

현우도 도진을 마주 끌어안았다.

그래, 멋있기도 하지.”

잠시 끌어안고 있다가 전부 벗어 버린 둘은 얌전히 몸을 씻었다. 둘 사이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흘렀지만, 그걸 지금 터트리지는 않았다. 이제 처음인데 좀 더 근사하게 치르고 싶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손놀림이 좋아?

현우는 자신의 머리를 감겨 주는 도진을 보며 투덜거렸다.

어렸을 적에 가끔 동생 머리를 감겨 준 적이 있었거든. 그땐 나도 어려서 매우 서툴렀는데, 하다 보니 점점 더 나아지더라고.”

상냥한 오빠였네.”

다음에는 현우가 도진의 머리를 감겨 주었다. 그리고 깔끔하게 씻은 뒤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섰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손장난을 쳤다. 도진은 보기보다 간지러움에 약했고, 현우는 간지러움을 거의 타지 않았다.

후후후.”

그러니 자연 지는 건 도진이었다. 현우는 양 손가락을 현란하게 움직이며 도진을 괴롭혔다.

그만, 그만!

웃다 지친 도진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얼굴이 새빨개졌는데도, 여전히 멋있는 모습은 반칙과도 같았다. 자연 간지럽힘을 태우던 손의 움직임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도진도 바뀐 분위기를 눈치채고 얌전해졌다. 넓은 창밖에선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둘은 가만히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 행위는 밤을 지나 새벽까지 이어졌다.

으음.”

현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언제나 가볍게만 느껴지던 몸이 묵직하다. 그래도 허리는 멀쩡하다. 원체 체력이 좋으니 그런 모양이었다. 헤실거리며 웃던 그는 옆에 누워 있는 도진의 품에 파고들었다. 근육이 많은 몸이라 그런지 따뜻하다.

일어났어?

방금 일어났음에도 도진의 얼굴은 여전히 멋있었다. 굴욕적인 부분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

몸은 괜찮아?

당연히 괜찮지.”

애초에 둘 다 각성자다. 이 정도 가지고 지칠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아침에 일어나서 얼굴을 보면 좀 더 어색할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아니네오히려 가슴이 벅차오르고 기쁜걸.”

현우는 웃으며 도진의 뺨에 입 맞췄다.

나도 그래.”

도진은 현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럼 오늘까지는 자유시간인데 뭘 할까나갈래?

굳이 나가야 하나?

현우가 은근한 표정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나가지 않아도 되긴 하지.”

그럼 좀 더 침대에 누워 있자.”

그러면서 발로 도진의 종아리를 슬며시 문지른다. 그 행동에 자극받은 도진은 현우를 잡아당겨 자신의 배 위로 올렸다. 만약에 그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어제 했던 걸 계속했을지도 모른다.

배고파?

조금?

그럼 밥 먹고 마저 할까?

그것도 좋지. 룸서비스 시킬게!

현우는 바닥에서 벗어 던진 가운을 주워 입고는 메뉴판을 뒤적여 보았다. 미국에서의 첫날밤은 완벽하게 지나갔다.

*

어쩐지 얼굴에서 빛이 나네요?

이틀 후 안내를 위해 도착한 앰버가 웃으며 말했다. 둘 다 이틀 전에 보았던 것보다 안색이 좋고, 맑다. 마치 묵혀두었던 무언가를 모두 날려 버린 표정이었다.

데이트는 좀 했어요?

아뇨. 방 안에서만 있었어요.”

그 말만 들어도 뭘 했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한창 좋을 때지.

앰버는 그리 생각하며 둘에게 던전 목록을 보여 주었다.

134.

짧은 휴식이 끝나자 현우와 도진은 곧바로 포털을 닫는 일에 투입되었다.

할당량만 끝내 주시면 됩니다.”

앰버의 그 말에 현우는 무시무시하게 날뛰었다. 하루에 여러 개의 포털을 닫기 시작한 것이다. 보통은 하나 닫고 휴식을 취한 뒤 다시 닫는데, 현우는 그런 것도 없었다. 무척이나 탐나는 속도였던지라, 중간 중간 관리하러 온 앰버는 이런 권유까지 했다.

혹시 국적을 바꾸실 생각은 없으세요?

없습니다.”

그럴 것 같긴 했어요.”

현우의 단호한 대답에 앰버는 더 권유하지 않고 넘어갔다. 그동안 다른 사람들도 이런 권유는 많이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신만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너무나도 뛰어난 실력을 보니 절로 말이 튀어 나갔다.

어쨌든 이 속도라면 일정도 금방 끝나겠네요. 그러면 귀국까지는 시간이 좀 남는데 뭘 하실 건가요?

데이트요.”

현우는 야무지게 말하며 도진의 손을 잡았다.

그것도 나쁘진 않죠.”

이미 둘이 사귀고 있는 건 제법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저렇게 붙어 다니며 애정에 가득 찬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데, 모를 리 없었다. 앰버는 귀여운 커플에게 데이트 장소를 추천해 주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데이트 장소를 현우와 도진이 가는 일은 없었다. 둘은 빠른 속도로 던전을 공략하고는, 곧바로 호텔에 틀어박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둘은 데이트보다 다른 것에 관심이 큰 모양이었다. 하긴 어디든 어떨까. 같이 있기만 하면 되는 것을. 앰버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그렇게 둘이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선우도 미국에 도착했다. 주변에서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으나, 그는 마침내 형을 따라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오자마자 선우는 곧바로 형이 머무는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벨을 눌렀다.

당장 문이 열리진 않았다. 예민한 귀에는 안에서 후다닥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선우는 침착하게 시간을 재며 기다렸다. 그렇게 30초가 지날 무렵, 문이 열렸다.

어서 와!

현우가 웃으며 선우를 반겼다. 그런데 상태가 심상치 않다. 입고 있는 반쯤 흐트러졌으며 목에는 벌레에게 물리기라도 한 것처럼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거기다 숨을 왜 몰아쉬고 있는 건데몬스터를 상대하는 것도 아닌데 호텔에서 숨을 몰아쉴 만한 일이 있는가?

선우는 침착하게 움직였다. 일단 형의 가운을 제대로 입혀 주고 허리끈을 꽁꽁 동여맸다. 그런 뒤, 뒤쪽에 서 있는 도진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주변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

현우가 그런 선우의 볼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여기는 다들 쓰는 호텔이야. 함부로 능력을 발휘하면 안 되지.”

하지만 형, 저 벌레 같은 놈이 형에게!

들켰나현우는 최대한 침착하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뭐, 뭘 했다고 그러니. 아무것도 안 했어. 일단 멀리서 왔으니 차라도 마시면서 좀 쉬도록 해.”

안 하긴 뭘 안 해!

그쯤 되어 현우는 부끄러움에 타 버릴 것 같았다. 선우는 도진을 닦달하고, 그런 선우를 도진은 관대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말리긴 했지만, 선우는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다.

싸우는 건 좋은데 이럴 거면 그냥 포털에 들어가서 싸우자.”

알았어. 비어 있는 포털은 내가 잡도록 하지.”

현우야?

현우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도진에게 적당히 상대해 달라고 귓속말을 했다. 그제야 도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선우가 미국에 온 첫날, 둘은 포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앞으로도 쭉 이어지게 된다. 선우는 그 누구보다 훌륭한 시누이였다.

으아아, 일이 너무 많아!

아윤은 칭얼거리며 책상에 엎어졌다. 포털 관련 사건은 외국에서 더 크게 문제가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국내가 편한 것도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연일 도움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고, 유독 많은 길드와 동맹을 맺은 요람 길드로서는 전부 무시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더 힘내자, 아윤아.”

흑흑. 오빠.”

헌터 관리국의 국장이 바뀌고, 권력의 중심은 무혁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다른데 신경이 쏠린 선우 대신 자윤이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덕분에 무혁과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국내에서의 권력 지분이 높아졌다. 그래도 1위 길드인 선현은 이길 수 없겠지만, 좀 더 위를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두고 봐. 적어도 2위까지는 올라가 주겠다고.”

도가준이 들으면 난리 나겠는걸.”

뭐, 어때. 지금 여기엔 없는걸.”

아윤은 헤헤 웃으며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사람, 요즘 뭔가 빠진 것처럼 굴고 있어서 예전보다 덜 무섭다고.”

그건 그래.”

자윤은 아윤의 말에 맞장구 쳤다.

허전하다. 미리엘이 돌아가고부터 가준은 허전함을 느끼고 있었다. 있을 때는 그렇게 귀찮더니 없어지니 가슴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좋아했었던 건가.”

다 큰 성인이면서 코코아에 집착하고, 툭하면 악마에 대해 험담을 하곤 했다. 가끔은 날개를 파닥이며 격렬하게 흥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도 과자를 쥐여 주면 다시 얌전해졌다. 어찌 보면 육아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육아는 개뿔이.”

이 마음은 자신이 돌보는 아이에 대한 마음이 아니었다. 명백한 사랑이었다.

이 나이에 사랑이라니.”

그걸 깨닫게 되면서 가준은 자연스럽게 현우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여전히 현우는 좋았지만, 그에게 사랑을 느끼진 않았다. 아마도 그건 우정이겠지.

이제 다시 볼일은 없겠지.

미리엘은 돌아갔고 요정의 말에 의하면 다시 돌아오긴 힘들 거라고 했다.

그게 규칙이니까요!

세계의 평화를 위한 규칙이라 천족이라 해도 깰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규칙을 깰 수도 있잖아?

못 깨요. 꿈 깨세요. 알베르크 님은 그나마 마족에서 손꼽히게 강한 분이라 자기가 생각한 걸 밀고 나가셨지만요. 미리엘 님은 성인이라도 천족 중에선 어린 편이에요. 아직 보호받고 교육받을 나이라 이겁니다.”

성인인데요?

성인이라도요. 특히 미리엘 님의 가문은 가족을 잘 보호하는 편이니, 더는 몰래 내려오실 수 없을 겁니다.”

요정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뒤로 가준은 미리엘과 닮은 사람이라도 찾아보려 했지만, 어디 그 미모가 흔한가. 그렇게 사랑은 끝난 모양이다.

누군가의 사랑이 끝나도 세상은 돌아간다. 최강 길드의 혜선은 국내 5위 길드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상위 길드들이 갑자기 성장한 탓에 간신히 끄트머리에 매달려 있는 꼴이었다. 그 때문에 혜선은 길드를 부흥시키기 위해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와모토 준이치. 일본에서 선우의 라이벌을 자처하던 그는 선우가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 되면서 폐관 수련에 들어갔다. 좀 더 강해져서 다음에는 협회장 자리를 빼앗을 생각이었다. 협회장은 5년을 주기로 바뀌니까. 연임이 가능한 걸 고려해 보면 지금부터 많은 노력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길드를 위해서 최고가 되어야 합니다.”

그 말과 함께 준이치는 모습을 감췄다.

이반. 평이한 이름을 지닌 그는 아버지의 밑에서 수련에 힘썼다. 예전에는 이리 부지런하지 않았으나, 미국에서 커다란 사건을 겪고 그는 변했다. 아버지 표드로가 시켜도 하지 않던 훈련을 자진해서 하고, 훈련 시간을 늘렸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정말 죽을 뻔했다. 다시는 그런 감각을 느끼고 싶지 않았던 이반은 자신을 갈고 닦기로 했다. 표드로한테는 잘된 일이었다.

한 편, 천족이 사는 천계에서 미리엘은 고민에 잠겨 있었다.

미리엘!

다른 천족이 불렀으나, 대답도 없이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뭐를 보고 있는가 싶어 궁금해 옆에서 같이 봐도 보이는 건 구름뿐이었다.

뭘 보는지 모르겠네.”

처음에는 옆에 달라붙어 이유를 알아내려던 다른 이들도 서서히 떨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제야 미리엘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이상해.

요즘 들어 자꾸 생각나는 얼굴이 있다. 인간 중에서는 나은 편이지만, 천족 중에서는 못생긴 편에 속하는 그 얼굴. 그 얼굴의 주인은 성질도 그리 좋지 못했다. 툭하면 욕을 내뱉고 거칠게 행동한다. 그런데도 왜 자꾸 생각나는 걸까?

모르겠다.

아니, 사실은 모르지 않는다. 아무리 보호받는 중이라고 하더라도 미리엘은 엄연한 성체였다. 성교육도 이미 전부 받았다. 사랑의 의미도 알고 있었다.

그래, 이건 사랑이네.”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많고 많은 이들 중 다른 세계의 인간을 사랑한다니. 말도 안되는 이야기였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곤란하네.

그 세계로 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이대로 죽을 때까지 그, 가준의 얼굴을 못 보게 될 수도 있었다.

그건 싫은데.

다시 그를 보고 싶었다. 미리엘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135.

미리엘이 사랑에 대해 고민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시각, 알베르크는 마계를 횡단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제법 넓은 풀밭 위에 세워져 있는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마계의 현자, 로스린이 머무르는 곳이었다.

여어!

알베르크는 그대로 오두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공간 확장 마법이 걸린 내부는 겉보기와는 다르게 넓었다. 그 안에는 팔이 여러 개 달린 인간 형태의 마족이 뭔가를 열심히 적는 중이었다.

알베르크 님오랜만이군요.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로스린은 하던 걸 멈추지 않은 채 물었다.

물어볼 게 있어서.”

무엇입니까?

중간계로 가고 싶은데, 방법이 있나?

아, 중간계 말이군요. 중간계, 중간계라. 중간계?

로스린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거긴 갈 수 없지 않습니까?

아이나스는 문을 여는 데 성공했던데.”

한동안 안보이더니 거기 다녀오신 겁니까?

그래.”

오, 맙소사. 그나저나 아이나스가 문을 여는 데 성공했다고요그 미치광이가요?

정확히는 리비라는 마족과 함께. 알고 있나?

리비, 어디 보자. 기억납니다. 되게 특이한 걸 추구하던 마족이었죠. 순위권 싸움에도 뛰어들기 싫어하고, 특이한 걸 많이 연구했습니다.”

좋아. 그럼 그걸 너도 할 수 있나?

저요?

알베르크의 질문에 로스린이 심통 난 표정을 지었다.

할 수 있죠. 그들이 하는 거면 저도 할 수 있습니다제가 누굽니까마계의 현자 아닙니까.”

그럼 재료는 제공해 줄 테니, 그에 관해 연구해 봐.”

연구야 어렵지 않지만, 해서는 안 될 일 아닙니까?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딨어하면 하는 거지. 너도 사실 궁금하잖아. 어떻게 하면 중간계로 갈 수 있는지가 말이야.”

그건 그렇죠.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걸 연구해 보도록 하죠.”

로스린은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알베르크로서는 기꺼운 일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패서라도 시킬 셈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포기할 줄 알고.

현우는 유일하게 사랑하게 된 존재였다. 마계로 돌아왔다고 해서 포기한 건 아니었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가서 데려올 생각이었다. 그걸 위해 알베르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기다려, 현우.

알베르크는 지금은 여기 없는 현우의 이름을 불렀다.

*

어쩐지 귀가 가려워.”

현우가 투덜거리며 말했다.

어디여기?

도진이 손을 뻗어 현우의 귓가를 매만졌다. 만지는 손길이 제법 끈적거린다. 며칠 사이 너무나도 많은 것이 변했다. 포털에 들어갔다 나온 뒤로 선우는 조금이지만 얌전해졌다. 아무래도 도진에게 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선우는 선우, 사사건건 참견하는 건 멈추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제대로 된 데이트도 불가능했기에, 둘은 지금 몬스터를 앞에 두고 있었다.

뀨우우웅!

죽을 만큼 패서 쓰러트린 몬스터를 앞에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바구니를 얹었다. 바구니 안에는 피크닉에서 먹을 법한 샌드위치와 주스 같은 가벼운 식사가 들어 있었다.

형이랑 같이 보고 싶은 게 많이 있었는데.”

나도 그래.”

선우는 대체 형을 왜 이리 싫어하는지.”

현우는 나지막이 한숨을 쉬고는 도진의 다리를 베고 누웠다.

아직 형이 너무 좋은 거겠지.”

나도 선우를 좋아해.”

그걸 아니까 선우도 저 정도 참는 거겠지.”

그게 참는 거라고시누이도 이런 시누이가 없다 싶을 정도로 도진을 괴롭히던데. 잘만 하면 TV방송에 나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때문에 현우는 도진에게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미안한 거야?

조금.”

그러면 미안한 만큼 뽀뽀는 어떠신지?

뽀뽀로만 만족하는 거야?

아니, 사실은 키스가 더 좋지.”

둘은 키득거리며 서로의 얼굴이 키스의 비를 퍼부었다. 그를 보는 몬스터의 눈빛이 썩어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몬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 그는 죽어 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설사 멀쩡해진다고 해도 다시 덤빌 생각도 없었다. 그만큼 둘은 강했으니까.

몬스터의 생각을 알지 못하는 현우와 도진은 식사를 마치고 한참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고는 그 시간이 끝나고 나서야 몬스터를 편안하게 해 주었다.

자, 그럼 나가 볼까?

참, 저녁 일정은 없지내가 근사한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는데.”

없어그런데 선우도 같이 가는 거야?

아니. 이번에도 우리 둘이서만.”

선우가 섭섭해할 것 같은데.”

현우가 아쉬운 목소리를 냈으나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도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현우를 설득했다.

이번은 둘이서 먹고 다음번엔 선우도 같이 오면 되잖아.”

그럴까?

그래, 선우도 슬슬 형에게서 독립할 때가 되었지.”

형이 그런 말 하는 거 처음 봐!

그럴 수밖에. 그동안은 현우에게 잘 보이려고 선우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았다. 둘이서 돌아다니는 와중에도 종종 선우를 끼워 넣곤 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번은 절대 안 되지.

잘못하다간 준비해 뒀던 모든 일들이 엉망이 될 수 있었다. 일부러 선우에게 일이 있는 저녁을 골랐는데 말이다. 도진은 감정을 감추며 현우에게 웃어 보였다.

그날 저녁, 도진은 현우와 함께 근사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야경이 보이는 제일 좋은 창가 자리였다. 현우가 자리에 앉도록 에스코트한 도진은 이어 자신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차례로 나오는 음식을 음미했다.

여기 음식 맛있네.”

그렇지?

현우는 맛있는 음식 때문인지 조금 들뜬 모양새였다. 그리고 본 식사가 끝날 무렵, 직원이 자그마한 케이크를 들고 나왔다. 빨간색 하트모양 케이크 위에는 멋들어진 글씨로 현우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아직 생일은 아닌데.”

고개를 갸웃거리는 현우에게 도진이 말했다.

일단 케이크를 썰어 보자.”

그 말에 현우는 칼을 들어 조심스럽게 케이크를 썰었다.

근사한 레스토랑의 식사, 마지막으로 나오는 작은 케이크. 이쯤 되면 현우가 모르는 것도 이상했다.

뭔가 있네.

그리고 그 뭔가는 아마도 로맨틱한 무언가가 아닐까현우는 기대감을 가지고 케이크를 반으로 갈랐다. 하트가 잘리는 모습이 조금 그렇긴 했지만, 이어서 그 안에서 나온 물건에 눈이 동그래졌다.

반지?

그것도 제법 큰 다이아가 박힌 반지였다. 조심스럽게 반지를 꺼내서 바라보는데, 도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어디선가 가슴을 간질이는 노래가 들려오고, 그는 꽃을 들었다. 이건 틀림없이 그거다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도진을 불렀다.

?

현우야, 나와 평생을 함께해 줄래?

청혼이었다.

세상에, 맙소사!

현우는 당황하여 도진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는 승낙 전에는 일어나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부끄러워!

하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받아들일게, 청혼. 나도 형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어.”

그제야 도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의 품에 꽃다발을 안겼다. 그가 미리 준비해 둔 반지도 닦아서 손가락에 끼워 봤는데 딱 맞았다.

형 거는?

나도 있지.”

도진은 자신의 손을 들어 보였다. 똑같은 반지가 손가락에서 빛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저나 남자끼리의 청혼인데 용케도 레스토랑에서 허락했구나, 싶었다.

돈이면 다 되더라.”

현우의 궁금증에 도진이 답해 주었다. 그렇게 둘은 그곳에서 평생을 맹세했다.

!

뒤늦게 선우가 난입했지만, 이미 모든 상황은 종료된 뒤였다.

말도 안 돼!

선우는 이 모든 것을 물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현우는 도진에게 홀딱 넘어간 상태였으니까. 행복한 마무리였다.

*

으히히히!

로스린은 수많은 팔을 허우적거리며 춤을 추었다.

드디어 성공입니다성공이에요이제 중간계로 갈 수 있습니다!

아직은 작은 몬스터만 가능하잖아.”

작은 것부터 시작해서 커지는 거죠. 한 번 성공한 이상, 다음은 빠르게 진행할 수 있습니다!

당당한 목소리에 알베르크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마계의 현자답군.”

칭찬은 마족도 춤추게 하죠. 더, 더 해 주십시오!

원한다면 얼마든지.”

이제 다시 현우를 만나러 갈 수 있다. 그게 말 몇 마디로 된다면 뭔들 못 해주겠나. 알베르크는 로스린에게 칭찬 몇 마디를 더 건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니, 이제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다. 알베르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동생이 영웅이라 꿀 빱니다』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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