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9~127화 (15/16)

119.

끼이익.

반쯤 망가진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엉망이 된 내부가 보였다. 군데군데 핏자국이 남아 있고, 사람이 쓰러져 있다. 그 모습은 뉴욕에 게이트가 열린 그 날을 떠올리게 했다. 바카디가 중앙으로 쳐들어오고, 수많은 사람을 죽인 그날 말이다.

흠칫 돋는 소름에 앰버는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 뒤따라 들어오던 남자와 부딪쳤다.

괜찮으십니까?

까만 옷을 입은 남자는 괜찮냐며 물어 왔다.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이름을 묻지 않았네요.”

율무, 율무라고 불러 주십시오.”

율무는 내부를 훑어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일단 내부를 살펴봅시다.”

이번에는 율무가 앞서서 움직였다. 그는 로비를 살펴보다가 살아 있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고 위로 올라갔다. 위쪽도 아래쪽과 상황이 다르지 않았다.

다시 아래로 내려가 보죠.”

앰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샅샅이 찾아본 결과 무너진 책장 뒤에서 지하로 향하는 문 하나를 발견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둘은 점점 내려갔다.

생각보다 깊이 내려온 듯싶군요.”

네.”

더는 밖에서 요란하게 싸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쯤, 앞을 가로막는 문을 하나 더 발견했다. 앰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여기는 가디언 길드의 지부다. 그런데 이런 깊은 지하에 문이 있다니, 이곳의 용도는 무엇일까.

대피 용도인가?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가디언 길드는 급할 때 지역 주민의 대피소 역할도 할 수 있게 지어졌으니까. 하지만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았다.

열겠습니다.”

율무는 힘을 주어 문을 열어젖혔다. 안은 무척이나 어두워 제대로 보이는 것이 없었다. 앰버는 가방을 뒤적거리다 허리 가방에서 작은 손전등 하나를 꺼냈다. 다행히 망가지지 않은 모양인지 불이 켜졌다.

앰버는 그대로 손전등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으로 입을 막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곳은 실험실이었다. 좌우로 실험관이 늘어서 있고, 그 안에는 기괴하게 변한 사람들이 한 명씩 들어 있었다.

살아 있나?

가장 가까운 실험관에 손을 대고 조심스럽게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눈을 감고 가만있던 실험체가 꿈틀거렸다. 이어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이게 누구람. 여긴 허락받지 않은 사람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돌아보니 가죽 잠바를 입은 갱같이 생긴 적발의 남자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부분은 인간과 흡사했으나… 눈. 살기가 담긴 역안의 눈이 인간이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를 알아차리는 순간, 바짝 붙어 있던 율무가 앞으로 나서며 등에 메고 있던 무기를 휘둘렀다.

어잇차!

적발의 남자는 손쉽게 공격을 피해 냈다. 그 틈을 타서 앰버도 그에게 정신 공격을 걸었다. 그녀는 공격 쪽으로는 약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효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남자가 순간이지만 비틀거렸고, 율무의 도끼가 그의 가슴에 박혀 들었다.

성공했나?

앰버는 침을 삼키며 그를 바라보았다.

제기랄!

티아매트는 험한 소리를 내뱉었다. 선우 한 명도 상대하기 쉽지 않은데, 다른 이들이 붙어 서서 그 공격을 보조한다. 그리고 지쳤다 싶으면 다른 사람과 교대한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저들은 정말로 거대 몬스터 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게다가 더 짜증 나는 건 그게 제법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공격은 번번이 가로막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도망치려고 하면 어찌 알고 그쪽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중간중간 머리가 찡하니 아파 왔다. 정신계 능력자들이 티아매트의 정신에 간섭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위대한 종족, 당연히 효과는 없었지만 정신이 사나워졌다. 전투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날아오르려 했으나 날개에 집중 공격이 가해지는 바람에 포기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데미지는 착실하게 쌓여 가고 있었다. 그나마 원체 튼튼한 몸이니 버티고 있지, 인간 형태였더라면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대체 그 녀석을 뭘 하는 거야?

같이 지부를 무너트리러 온 녀석을 떠올렸으나,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지하에 머물고 있는 건가. 대충 불 지르고 나오면 되는 것을. 티아매트는 혀를 찼다. 그러기를 한참이 지났다.

티아매트도 지치고 선현 길드의 사람들도 지쳤다. 하지만 선우는 여기서 티아매트를 완벽히 없앨 생각이었다.

준비해.”

그 때문에 만약을 가정하고 데려온 이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장 뒤쪽에서 보호받던 몇몇 사람들이 빛에 휩싸인 손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지금까지 싸우느라 지친 길드원들에게 체력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정신마저 맑아졌다.

듣기로 마계의 블랙 드래곤은 회복 마법은 잘 쓰지 못한다더군.”

선우가 담담하게 말했다.

그럼 다시 싸워 볼까?

레나가 처음처럼 씩씩하게 앞으로 나섰다. 아인과 다른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더라니.

여기가 자신의 무덤이 될 모양이었다.

하지만 쉽게 목숨을 내주진 않을 거야.

적어도 저들 중 대부분은 자신과 같이 죽게 될 것이다. 티아매트는 그리 생각하며 피어를 내뱉었다.

헉헉.”

손전등은 망가진 지 오래, 연구실은 다시 어둠에 젖어 들었다. 그 와중에 율무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적발의 남자는 한 번에 죽지 않았다. 외려 바카디가 그랬듯이 한 번 더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해 가며 둘을 죽이려 했다.

율무는 필사적으로 앰버를 지켰고, 앰버는 적발의 남자에게 끊임없이 정신 간섭을 했다. 그 결과, 마침내 그의 목을 자를 수 있었다. 목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낸 앰버는 시체에 다가갔다. 그리고 가방에서 꺼낸 작은 총으로 머리에 한 방, 가슴에 한 방 총을 쏘았다.

확인 사살. 원래 이런 괴물은 다시 살아나곤 하잖아요.”

그도 그렇군요.”

율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무기를 갈무리했다.

이제 자료를 찾아볼까요?

다행히 적발의 남자가 모든 걸 파괴하기 전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실험 자료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실험체가 된 사람들의 인적 사항과 그들이 바라는 것이 상세히 적혀 있었고, 이어 사람과 마기의 결합이라는 연구 자료가 정리되어 있었다.

[뛰어난 각성자일수록 마기에 더 잘 적응한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런 능력 없는 이들도 마기로 물들여 싸울 수 있게 만들어야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 모든 내용을 읽은 앰버는 허탈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미쳤네요.”

동감입니다.”

율무는 가지고 있던 가방에 닥치는 대로 자료를 쑤셔 넣었다. 일부는 사진으로 남겼다. 컴퓨터에 입력된 자료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거기엔 아무것도 없었다.

자료를 챙겼으니 이제는 남은 실험체들의 처우를 결정할 차례였다.

하지만 어떻게?

대부분 죽었지만, 일부는 살아 있다. 그렇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지성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평소대로라면 당연히 가디언 길드에 모든 걸 넘기겠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었다.

여기가 가디언 길드의 지부였으니까. 거기다 그녀의 감이 이걸 다른 가디언 길드 사람들에게 알려선 안 된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

앰버는 재차 물음을 던졌다. 멍하니 서 있는 앰버를 율무가 빤히 바라보았다. 뭔가 망설이는 눈빛이었다.

당신들은 전부 알고 있었나요?

무엇을 말입니까?

가디언 길드에서 이런 실험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을요.”

저희도 전부 알고 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의심했을 뿐이지요.”

“……의심.”

지금까지는 조금도 의심을 품은 적이 없었다. 가디언 길드는 세상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인다고, 그렇기에 정의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굳건히 이루어진 그 세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앰버는 짧은 고민을 끝냈다.

도와드릴게요.”

?

손이 부족한 것 아닌가요그러니 도와드릴게요. 가디언 길드 지부는 어디 있지 전부 외우고 있어요. 특별히 찾는 곳이 있으면 제가 찾아 드릴 수 있어요.”

어째서입니까?

가디언 길드는 정의로워야 하니까요.”

타락한 자를 봤다고 해서 전부 다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니 썩은 부분만 도려내면 될 것이다. 앰버는 그렇게 생각했다.

만약에 말입니다.”

네.”

길드장이 모든 일의 원인이라고 해도 도울 수 있습니까?

“……레온 님이요?

네.”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네, 그래도 돕겠어요.”

그럼 좋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율무는 앞서서 지하실을 올라갔다.

둘이 밖으로 나서니 사슬과 말뚝으로 바닥에 고정된 거대한 드래곤이 보였다. 상처투성이의 드래곤은 피를 무척 많이 흘렸지만, 아직 살아 있었다.

율무.”

레나가 상쾌한 표정으로 땀을 닦으며 율무를 불렀다.

거하게 해치우셨군요.”

해치웠어이제 마무리를 지으려던 참이었어. 사실 정보라도 뽑아내면 좋겠지만, 정신 공격이 거의 통하지 않더라고. 그렇다고 우리한테 유리한 증언을 해 줄 것도 같지 않으니 그냥 죽이기로 했어. 그런데 그쪽은 아까 봤던 분이네?

앰버라고 합니다. 앞으로 같이 다닐 테니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앰버. 뭐 하는 분이신데요?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분이십니다.”

중앙 본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왜 여기에?

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정의를 위해서요.”

앰버는 그 말만을 남기고 드래곤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다면 죽이기 전에 제가 잠깐 접근해 봐도 될까요?

선우는 그런 앰버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앰버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두 손을 엉망으로 깨진 드래곤의 머리에 대었다.

꺼… 져!

티아매트가 으르렁거리며 앰버를 밀어 내려 했으나, 철저하게 구속되어 있기에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앰버는 티아매트의 정신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120.

끔찍하게 뒤틀린 심상에 구역질이 났다. 일반적인 몬스터보다 훨씬 역겹고 두려웠다. 이건 어떻게 손을 댈 수가 없는 괴물이다.

허억!

앰버는 진저리를 치며 티아매트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티아매트가 킥킥 웃었다.

어떻습니까?

건질 수 있는 게 없어요. 이건 그냥 괴물이에요.”

그럼 살려 둘 필요가 없단 소리군요.”

“……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양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길드원들이 무기로 티아매트의 머리를 내려쳤다. 한 번에 부서지지 않으니 죽을 때까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그렇게 그녀는 허무하게 숨을 거뒀다.

혹시 모르니 심장도 뽑아내죠.”

숨을 쉬지 않는 걸 확인한 뒤에도 선우는 철저하게 확인했다. 그도 앰버와 같이 확실하게 해결해야 마음이 놓이는 타입인 듯했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날뛸 때는 숨어 있다가 이제 안전하다고 판단되니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돌아간다.”

선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와 동시에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좀 아깝긴 하네.”

드래곤의 시체를 포기하고, 무기를 갈무리한다. 그런 뒤에 잽싸게 준비된 차에 올라탔다.

이대로면 놓친다!

그렇게 생각한 앰버는 용기를 내어 같이 차에 올라탔다. 그녀의 뒤에 타던 율무가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모르는 척했다. 당장은 급하니 끌어 내리지 않을 거란 판단에서였다. 그리고 그 판단은 맞아떨어졌다.

출발!

명랑한 여성의 목소리와 함께 차가 사람들 사이를 해치고 출발했다. 한참을 달려 나간 차는 은근슬쩍 따라오는 이들의 추격을 물리치고 어느 산속 깊은 곳에 도착했다. 차 문이 하나하나 열리고 길드원들이 쏟아져 내렸다.

자, 그럼 다음으로 가기 전에 좀 쉬자고!

여성이 그렇게 말하자 길드원들은 아무 데나 자리를 잡고 쉬기 시작했다. 그걸 확인한 뒤, 여성은 마지막 차로 다가와 앰버에게 말했다.

그리고 귀여운 아가씨, 저와 함께 이야기를 해 보실까요?

귀엽다고 불릴 나이는 아닙니다만.”

저보다 어려 보이면 다 귀여운 거예요.”

제가 보기엔 그쪽이 더 귀여워 보여요.”

어머나, 그래요?

속지 마십시오. 속은 마녀입니다.”

율무가 투덜거리며 말하자 여성은 그의 목을 팔뚝으로 졸랐다.

!

자, 그럼 진지하게 자기소개를 할까요제 이름은 레나. 선현 길드의 팀장이랍니다. 저보다 더 강한 사람도 있지만, 그쪽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아서 제가 당신을 담당하게 될 거예요. 그쪽 이름은?

앰버라고 합니다. 가디언 길드 정보부에서 일하고 있어요.”

와우. 그런데 어쩌다 이런 일에 끼어드셨대요?

그게 그러니까.”

잠깐일단 길드장님과도 같이 이야기해요.”

레나는 어느새 세워진 천막을 가리켰다.

네, 좋아요.”

앰버는 심호흡을 하고 발을 내디뎠다.

오랜만입니다.”

선우는 앰버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런가요.”

앰버는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러고는 준비된 의자에 앉아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현우가 빌런이라는 사실에 위화감을 느꼈던 일, 그 때문에 할머니를 찾아가 도움을 받았던 일, 지부를 찾아갔다가 율무와 함께 이상한 실험실을 발견했던 일 등등.

자료는 여기 있습니다.”

율무가 저장 장치와 카메라를 내밀었다.

내부에서 끔찍한 실험을 하고 있더군요.”

가디언 길드의 지부에서 이런 실험이라.”

선우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직, 아직은 몰라요. 이곳만 이런 곳일지도 모르니까.”

가디언 길드를 전부 믿어선 안 된다는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저도 모르게 옹호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럼 더 살펴보면 되겠군요. 마침 추측 가는 장소도 조사해 두었으니까요. 그럼 앰버, 그쪽은 어떻게 할 겁니까앞으로 같이 움직일 생각입니까?

네, 그러려고 동행했으니까요.”

굳게 다짐한 앰버의 얼굴을 보며 선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앰버와 같이 하는 건 그에게도 손해는 아니었다. 일단 그녀는 가디언 길드의 정보부에 속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아는 것도 많을 터였다.

지금까진 일이 잘 풀리고 있었다. 이제 도진만 제대로 하면 된다.

*

도진의 일은 선우와는 달랐다. 선우가 숨어 있는 가디언 길드와 레온의 치부를 찾아낸다면, 도진이 할 일은 현우의 안전을 확인하고 레온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본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마련하고 매일같이 그 앞에 있는 카페에 출근했다.

모습을 드러내는 일이니 들킬 확률이 높았으나, 애초에 들키지 않는 게 어려운 일이었다. 레온은 언제나 자신의 주위를 예민하게 살피고 있었고, 도진의 그림자도 금방 잡아냈다. 하지만 그림자를 없애진 않았다.

씩 웃더니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어디 지켜볼 테면 지켜보란 소리였다. 레온의 생활은 단순했다. 훈련, 아니면 몬스터 사냥. 그게 전부였다. 보기에는 세상에 다시 없을 모범생으로 보였다.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나는 일도 없었고, 의심 가는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평소와는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오셨습니까, 레온 님.”

넓은 공간 중앙에 네모난 작은 집이 있었다. 정확히는 집이라기보단 좀 크기가 큰 상자 같아 보였다. 사방이 막혀 있고 들어가는 입구는 정면에 있는데, 각성자 둘이 거길 지키고 있었다.

최소 A급 이상.

S급보다는 약하다 하더라도 소리 없이 한 번에 쓰러트리긴 쉽지 않을 것이다.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 들렀습니다.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네, 얼마든지요.”

짧은 대화가 오고 간 뒤 둘이 동시에 문에 손을 댔다. 그제야 문이 열리는데 그 두께가 상당하다. 레온은 몸을 굽혀 입구로 몸을 밀어 넣었다. 그 와중에 도진도 아슬아슬하게 그림자를 같이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현우!

내부의 반대편 벽면에는 커다란 의자가 있었고, 현우는 거기에 구속되어 있었다.

재수 없는 놈이 나타났네?

입은 막아 두지 않은 모양이었다.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진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지친 듯한 낮은 목소리, 원래도 가느다랗던 몸이 더 말라 있었다. 분노로 인해 몸에 힘이 들어갔다.

재수 없다니. 너무한 소리군요.”

레온은 상냥하게 웃으며 맞은편의 의자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일인데이미 아까 아이나스가 다녀갔거든?

아이나스라뇨. 그녀의 이름은 아나이스입니다. 벌써부터 이름이 헷갈리시는 겁니까?

아,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

현우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좋아. 그럼 네 용건은?

딱히 없습니다. 그냥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찾아왔을 뿐입니다.”

무슨 이야기.”

이를테면.”

레온의 시선이 잠시 그림자에 닿았다 떨어졌다.

이만 포기하는 게 어떤지, 라든가?

그 말이라면 지겹도록 들었거든참신하지 않아. 그러니 다른 이야기를 하도록 해.”

그러면 저건 어떨까요?

하얀 손가락이 구석을 가리켰다. 그에 따라 현우의 시선이 이동했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안을 엿보고 있군요.”

일부러 데리고 들어왔군.”

현우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그렇습니다. 뭔가 꾸미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렇게 그림자를 붙여 놓으면 아무리 저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습니다. 레온은 인간 세상에서는 제법 강자니까요?

사람인 척하지 마.”

사람인 척이라뇨. 지금의 저는 엄연한 사람입니다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물어도 전부 같은 답이 나올 겁니다. 그보다는 오랜만에 보는 지인에게 인사를 하는 건 어떨까요나는 괜찮으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거나.”

구역질 나는 배려는 집어치워.”

슬프군요. 전 당신을 위해 그런 건데.”

레온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어 맨손으로 현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현우가 고개를 돌리며 그 손가락을 물어뜯으려고 했으나, 간발의 차로 성공하지 못했다.

이런, 너무 난폭하군요.”

이번에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풀려나기만 하면 너부터 죽인다.”

현우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그거 기대되는군요.”

머리를 툭툭 두드린 레온이 그대로 몸을 뒤로 물렸다. 내내 지켜보기만 하던 그림자가 공격적으로 그를 찔러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제가 손대는 게 싫은 모양입니다.”

누가 그걸 좋아하겠어.”

전 남이 싫다고 하는 걸 하는 것도 제법 좋아합니다. 아, 벌써 다음 일정 시간이군요. 그럼 다음번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도진의 시야가 잠시 까맣게 변했다. 레온이 들여보낸 그림자를 없애 버린 것이다.

으드득.

도진은 이를 갈며 탁자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두 동강 난 탁자의 모습에 주변 사람들이 당황했지만, 그도 보이지 않았다.

121.

분노가 시야를 가렸다. 이미 사전에 동의하고 현우를 보낸 거지만, 막상 모습을 보니 더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이를 꽉 문 도진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가로막혔다. 선현 길드에서 붙여 준 사람 중 하나였다.

안 됩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선현 길드내의 4팀의 팀장인 그녀의 이름은 유리. 가진 능력은 정신계 능력이었다.

상대에게 환각, 환청을 유도할 수 있으면 정신 조종 및 파괴가 가능하다. 그 외에 정신계 능력자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는 감정의 공유도 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유리는 지금 도진의 심정이 어떠할지 느낄 수 있었다.

분노, 절망, 괴로움. 여러 감정이 버무려졌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비키십시오.”

안 돼요.”

유리는 양팔을 벌리고 그 자리에서 버텼다. 그리고 능력을 쓰려는 도진을 정신계 능력으로 건드렸다.

이러려고 현우 님 보내신 거 아니잖아요. 지금 가시면 모든 게 엉망이 됩니다. 그러니 제발 참으세요.”

도진은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쥐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간신히 진정했는지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장소를 옮겨서 계속 감시하지요. 여긴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유리는 일부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고, 부서진 테이블을 물어 주었다. 카페 주인은 놀라긴 했지만, 연인이 싸운다면 그럴 수도 있다며 웃어 보였다.

대체 설정을 뭘로 하신 겁니까팀장님?

내가 알아서 해. 그나저나 도진 씨는 괜찮아 보이셔?

네, 이제 감정을 가라앉히신 모양입니다.”

다행이네.”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번 작전은 무척이나 중요해서 틀어지면 안 된다. 잘못하다가는 길드장의 형을 구하기는커녕, 길드의 존속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니 실수할 수 없어.

유리는 재차 다짐했다.

*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 뒤, 레온은 기자 회견을 열었다. 가디언 길드의 수장이 아닌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으로서 연 것이었다.

오늘은 중요한 사실을 공표하고자 합니다.”

진지한 레온의 목소리에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다른 회견장에서라면 시끄럽게 떠들어 대도 여기서는 그럴 수 없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미국의 영웅, 세계의 구원자 레온이었으니까.

우로보로스와 관계가 있어 보이는 빌런을 잡아 둔 상태입니다.”

그가 대체 누구입니까?

한 기자가 조십스럽게 물어왔다.

여러분도 아시는 사람일 겁니다. 한국의 지현우.”

조용하던 회견장이 소란스러워졌다. 바로 앞에 레온이 있었지만, 지금만은 목소리를 억누를 수 없었다.

지현우라면 저번에 미국을 도운 영웅 아닙니까?

그런데 빌런이라고요?

그래, 그런 소문을 듣긴 했어. 이번에 그가 빌런 혐의로 잡혀 들어갔다는 소문.”

정말인가?

다들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와중에 레온이 재차 입을 열었다.

저도 그의 행적을 압니다. 그렇기에 믿으려고 했습니다만,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아 어쩔 수 없이 잡아 두었습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앞으로 한 달 뒤!

레온이 손가락을 세우며 말했다.

세계 각성자 협회에서 그를 재판하고자 합니다. 만약에 거기서 지현우의 범죄 사실이 뚜렷하게 밝혀지면, 그는 빌런으로서 처벌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선현 길드도 그와 관련이 있습니까?

아직 그는 알 수 없습니다.”

이상 오늘의 회견은 마치겠습니다. 질문은 더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레온은 그대로 회견장에서 물러났다. 뒤늦게야 기자들이 우르르 달려들었지만,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에게 가로막혔다.

*

죽을 것 같다. 앰버는 고개를 숙였다가 그대로 잠들 뻔했다.

허억!

도로가 울퉁불퉁해서 달리던 자동차가 튀어 오르는 바람에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괜찮으세요?

옆에 앉아 있던 레나가 물었다.

괘, 괜찮아요.”

앰버는 애써 웃으며 대답했다. 선현 길드는 지나치게 하드코어한 일정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먹는 것도 틈을 봐서 대충 욱여넣는다. 그리고는 가디언 길드 지부 중 의심되는 곳을 전부 쑤셨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가디언 길드에서도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부마다 방비가 강해져 점점 더 침투가 어렵게 되었다. 그래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그와 같이 다니는 앰버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오늘은 어디 들리기로 했지요?

여기서 30분 거리에 있는 지부에 들리기로 했어요. 지금까지 들린 곳 중 규모가 가장 작네요.”

아, 거기라면 저도 알아요.”

가디언 길드의 지부는 큰 곳에만 위치하지 않았다. 다른 이의 안전을 위한다는 이유로 작은 곳에도 간결하게 지부를 만들어두었다.

거긴 사람이 적어서 자경단처럼 운영되고 있어요.”

길드원이 마을에서 도움이 되는 사람과 힘을 합쳐 안전을 확보하고 있었다.

흐음, 그래요?

네, 여기엔 뭐가 있을 것 같진 않은데.”

너무 피곤해서 이제는 감도 죽은 모양이었다. 어딜 가도 괜찮은지, 아닌지 판단하기 힘들어졌다. 그래도 설마 여기까지 인체 실험을 하고 있을까. 앰버는 예전에 들러봤던 작은 마을을 떠올렸다.

무척이나 평화롭고 인심좋은 마을이었다.

그럼 금방 끝나겠네요. 그동안 앰버는 쉬고 있어요.”

아니에요. 저도 갈게요.”

아무리 힘들어도 인제 와서 빠질 수는 없엇다. 저들도 저렇게 열심히 움직이는데, 당사자인 자신이 빠지다니. 말도 안 된다. 앰버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때렸다. 그러니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것 같았다.

30분 뒤에 도착한 마을은 앰버가 설명한 대로 작았다.

어머, 이게 누구람?

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사람들을 경계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노부인 하나가 앰버를 발견했다.

앰버, 앰버 맞죠예전에 여기 찾아왔었던. 나 기억해요그때 라즈베리 쿠키를 구워 줬잖아요.”

당연히 기억하죠.”

앰버는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하고 있다니 기쁘네요.”

노부인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나요전부 각성자 같은데.”

그냥 지부에 잠깐 들릴 일이 있어서 그래요. 별일 없을 테니 집에 돌아가 계세요.”

아니, 그럴 수야 없죠. 가디언 길드 지부의 일은 우리 마을의 일이나 마찬가지인 걸요. 저도 같이 가요.”

부인.”

앰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원래 이렇게 겁이 없는 분이셨나아니면 자신을 지나치게 믿고 있는 걸까알 수 없었다.

노부인은 그대로 앞장서 지부로 걸어갔다.

이상하군요.”

그런 노부인을 바라보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요?

같이 있으니 각성자라 추측하는 건 이상하진 않지만, 전부 각성자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전 마을에서 전부 옷을 갈아입고 평범하게 보이도록 모습을 바꿨다. 일부는 무기를 감추기도 했다. 그랬는데 저 노부인은 전부 각성자라 하였다.

어서 오세요!

어느새 멀어진 노부인이 손을 입가에 대고 소리쳤다.

무슨 의심을 하는지 알겠는데 아닐 거예요.”

노부인은 예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앰버는 그것만은 자신할 수 있었다. 아까부터 머리가 찡 울릴 정도로 아파오긴 했지만, 그건 무리한 여파이리라.

그렇군요.”

선우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들 노부인의 뒤를 따라 지부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서 도착한 작은 건물은 가디언 길드의 지부라 불리기도 민망한 크기였다.

그 앞에서 노부인은 문을 똑똑 두드렸다.

알, 알나와 보렴. 손님이 왔단다.”

그 말과 함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끼이익.

얼마나 관리를 안했는지 열리는 소리가 거칠다. 뒤이어 그 안에서는 평범한 얼굴을 가진 남자가 하나 나왔다.

소, 손님이 오셨군요. 대, 대접해 드려야 하는데.”

알은 더듬거리며 말하고는 고개를 앞뒤로 흔들어댔다.

아이참, 정신 차리렴. 알.”

노부인은 그런 알이 이상하지도 않은지 어깨를 툭툭쳤다.

부인?

앰버는 질린 표정으로 노부인을 불렀다.

?

거기 서 있지 말고, 여기로 오세요.”

?

왜냐니요.”

알이란 남자는 평범해 보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목 위의 이야기였다. 목 아래를 보면 절대 평범하지 않았다. 몸에서 촉수가 빠져 나와 있었고, 그건 불쾌하게 구불거리고 있었다.

왜, 이상해?

노부인이 태연한 어조로 물었다. 그 말에 절로 숨이 막혀 왔다. 그 상황에서 알이 앞으로 발을 내딛고 그 뒤를 따라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작은 집에 들어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수였다.

다들 귀엽지 않니내가 힘들게 만든 아이들이란다.”

그런 그들을 보며 노부인은 뿌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으면 전부 다 바꿀 수 있었을 텐데. 앰버, 타이밍이 좋지 않았어.”

당신설마?

그래, 생각하는 게 맞을 거야.”

노부인은 알에게 다가가 그 머리를 쓰다듬었다.

122.

내가 전부 변화시켰어. 싫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결국엔 만족했을 거란다. 보렴. 다들 이렇게 강해졌잖니.”

미쳤군요.”

미치다니, 너무한 말이네. 그러면 나도 화가 난단다. 혼내 줘야겠는걸자, 알. 전부 삼켜 버리렴.”

노부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알을 비롯한 변형된 사람들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몬스터라면 죽이면 된다. 타락한 인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실험에 의해 망가진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일단은 최대한 기절시킨다. 다른 이들도 그녀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모양이었다. 몇몇이 나서서 기절시키면 뒤에 있던 이들이 그들을 포박했다. 어쩌면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세상에. 다들 상냥하구나. 하지만 소용없어. 그 아이들은 이미 되돌릴 수 없단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거든. 한 번 변형된 이상 마기를 뽑아낸다고 해도 모습은 변하지 않을 거야. 차라리 그대로 죽여 주는 건 어떨까그게 더 자비롭지 않을까?

이 와중에 노부인이 떠들어 대는 말을 들은 레나가 외쳤다.

미친 할망구사람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긴, 훌륭한 재료지. 아이나스님께서 말씀하셨단다. 열심히 하다 보면 나도 마계로 데려가 주겠다고. 거기선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고. 그러니 안타깝지만 너네는 여기서 전부 죽어 줘야 해.”

누가 죽어 준대?

몬스터들은 하나같이 모습이 괴상했지만, 생각보다 강하진 않았다.

후훗, 결국은 내 뜻대로 될 거란다. 왜냐하면 얘들은 내 실패작들이거든.”

!

땅이 커다랗게 울렸다. 이어 작은 문이 부서지며 커다란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니, 그걸 몬스터라고 불러도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가슴에 박힌 얼굴은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그런 게 셋이나 나타났다. 다들 무기를 꽉 쥐고 그를 노려보았다. 바야흐로 전투의 시작이었다. 노부인은 제법 자신만만하게 나섰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나름 강하지만 서로 협조가 안 되는 느낌이네요.”

그래, 그래도 살릴 수는 없었네.”

그도 그렇죠.”

이번에는 사정을 봐줘 가며 살릴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이쪽이 다칠 것 같았기에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고 노부인을 사로잡았다.

이럴, 이럴 수는 없어내 아이들이이아이나스 님아이나스 님!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전투였다.

너무 쉬워서 불안한데요.”

레나의 말에 선우도 동의했다.

뭔가 꿍꿍이가 있는 모양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경계했지만, 시간이 흘러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 마을을 뒤져보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망가진 지부 지하에서 드넓은 공간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의 시체를 발견했다.

살아 있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끔찍한 환경과 실험을 버텨 내지 못한 것이다.

지독하네요.”

그러게요.”

정말 이 모든 게 가디언 길드가 벌인 짓일까. 앰버는 비틀거리며 시체 앞에 무릎 꿇었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

그런 식으로 몇몇 지부를 이동한 선현 길드는 다시 추격을 뿌리치고 뉴욕으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세계 각성자 협회에서 공개적으로 현우를 재판할 것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움직인 탓에 다행히 때 맞춰 도착할 수 있었다. 재판 하루 전의 일이었다.

형은 괜찮습니까?

선우는 도착하자마자 도진에게 물었다. 그는 처음 보았을 때처럼 음울한 인상을 하고 있었다. 양 볼은 움푹 패 있었으며, 입술을 단단히 다물고 있었다.

무사합니다.”

도진이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였다. 레온은 정보를 위해 그림자를 쑤셔 넣는 족족 죽였다. 가끔 살릴 때도 있었는데, 그때는 현우를 희롱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몇 번이나 폭발하여 본부로 쳐들어갈 뻔했다.

선우는 도진의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무사하다고는 하나, 그게 온전히 건강하단 소리는 아니겠지. 그게 아니라면 도진이 저렇게 침울한 모습일 리가 없을 테니까. 그도 형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하루만 참기로 했다.

일단은 모아 둔 자료를 취합하여 내일 재판 때 반박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한 손 보태십시오.”

선우는 서류를 좀 본다 싶은 길드원들을 전부 모았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몸을 쓰는 데 익숙한 이들은 데려온 포로를 관리하게끔 했다. 살려 온 포로는 정확히 셋이었는데, 전부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족을 동경하며, 사람 알기를 우습게 알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고통에는 취약하다. 참으로 역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게 밤을 새우고 새벽이 되자 선우는 옷을 갈아입었다.

내내 입고 있던 피가 묻은 옷을 벗고, 익숙한 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는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맡겨 주세요!

서류는 유리가 맡았다. 원래도 그런 부분에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이라 하였다. 그리고 해가 하늘 높이 떠오른 정오. 그들은 세계 각성자 협회 건물 앞에 도착했다.

선현 길드의 지선우입니다.”

평화 길드의 한도진입니다.”

입구를 지키던 이는 놀란 표정을 짓긴 했지만, 둘의 출입을 막지는 않았다. 아직 한국은 세계 각성자 협회의 회원이었고, 현우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죄목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단 오늘 재판이 진행되어야 알 수 있는 사항이다.

와, 여긴 무슨 낯으로 왔대?

둘을 본 다른 나라의 길드 장들은 바쁘게 입을 놀렸다.

그러게. 형이 빌런이잖아. 그렇다면 그 동생도 뭔가 있는 거 아냐뭔 낯짝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한창 이야기를 나누는데 둘 옆을 작은 여성 하나가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잘 모르면 조용히 하지요?

그렇게 말하는 여성 옆에는 각성자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아윤과 자윤이었다.

아윤아.”

알아, 아는데 짜증 나잖아.”

아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오빠에게 대답했다.

그래도 곧이잖아.”

그래, 곧이지. 이제 판도는 뒤바뀔 거야.”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아윤은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었다.

다른 길드 사람들도 데려올 걸 그랬나?

도가준은 할 일이 있잖아.”

그래, 할 일이 있지.”

천족과 마족의 감시 말이다. 그나마 혜선은 여유가 있었지만, S급 각성자 하나는 국내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움직이지 못했다.

곧이어 재판이 시작됩니다. 각자 자기 자리를 찾아 착석 부탁드립니다.”

방송이 넓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러자 이미 와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임시 재판장이 된 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의 각성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홀은 중앙에 넓은 무대를 중심으로 의자가 그를 둘러싸고 있는 형태였다. 책상 위에는 각 나라의 국기가 작게 세워져 있고 모두 자리에 맞게 착석했다.

저건 뭘까?

무대의 중앙에는 커다란 까만 천으로 가려진 네모난 것이 있었다. 아윤은 그를 보며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쳤다.

전부 착석하셨습니까확인 후 세게 각성자 협회 최초의 빌런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무대에 있던 까만 천이 스르르 흘러내려갔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눈과 가려진채 구속당한 현우였다. 그를 본 아윤은 불안한 눈빛으로 옆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도진과 선우가 앉아 있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둘 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모양새다.

안 돼요. 안 됩니다!

그걸 옆에 서 있던 여성이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여기서 뛰쳐나가면 준비한 것들이 전부 수포가 돼 버려요!

분노에 찬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결국 둘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무대에 각성자 하나가 나타났다. 아나이스,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힐러였다.

오늘 진행은 제가 하게 되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나이스는 선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먼저 브리핑을 하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얀 벽면 위로 미리 준비된 자료가 떠올랐다. 그걸 보면서 아나이스는 차근차근 현우가 빌런으로 지목된 이유를 설명했다. 이상할 정도로 힘을 숨기고 있었던 점, 마기를 다룰 수 있는 점, 그 외에 조금 의아하다 싶은 부분은 모조리 끄집어냈다.

그것만 들으면 영락없이 현우가 빌런처럼 느껴졌다.

저렇게 작은 녀석이?

네가 큰 거고.”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하필이면 바로 옆이 일본이다. 익숙한 이와모토 준이치가 사나운 시선으로 무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끄럽습니다.”

떠들어 대던 다른 일본 길드의 사람들은 준이치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한국을 싫어하니 적극적으로 몰아갈 줄 알았는데, 일단은 지켜보겠다는 태세다. 그는 러시아를 비롯한 몇몇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가디언 길드정의를 위한 길드지. 그건 알지만 이번은 어쩐지 감이 좋지 않아.”

이반이 말했다.

길드장님께서 감만으로 추측하는 건 지양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건 그런데.”

고개를 기울인 이반은 한국 쪽을 바라보았다.

선현 길드의 움직임이 묘했단 말이지. 그러니 일단은 지켜보자고. 일이 어떻게 돌아갈지.”

그쯤 되어 아나이스의 설명이 끝났다.

그러니 우리는 지현우, 그를 빌런으로 정의하고자 합니다. 이의 있습니까?

아나이스가 물었다. 그러자 지선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지현우는 빌런이 아닙니다. 진정한 빌런은 다른 이입니다.”

그걸 증명하실 증거가 있습니까?

있습니다.”

드디어 그동안 준비해 온 것이 빛을 발할 때가 왔다.

123.

아, 슬슬 시간이 되었나?

멍하니 소파에 앉아 있던 알베르크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무슨 시간?

때마침 현우의 재판은 방송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이는 세계 각성자 협회에서 동의한 사항이었다. 그렇기에 가준은 초조한 얼굴로 재판의 시작을 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러운 알베르크의 행동에 그를 바라보았다.

내 현우를 데려갈 시간.”

알베르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처음 들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금방 깨달았다.

이번 일에 수작을 부린 건가?

수작이라기보단 약간의 협조랄까.”

그게 그거지!

가준은 소파에서 튕기듯 일어나며 품속의 병을 잡았다. 그러나 그가 미처 공격하기도 전에 알베르크가 더 빨리 움직였다.

넌 이제 필요 없어.”

날카로운 손톱이 가준의 목을 긁으려 하였다. 그걸 아슬아슬하게 막은 건 미리엘이었다.

내가 이럴 줄 알았지. 이래서 마족이란 족속은 믿을 수가 없어.”

미리엘은 무기를 꺼내 든 채 알베르크를 노려보았다. 그래도 현우를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인가 했는데, 결국은 이렇다. 마족의 진심이란 이리 덧없는가.

오늘에야말로 끝을 내주마.”

이를 악문 미리엘은 손에 든 창으로 알베르크를 찔러 들어갔다.

엿차.”

나름 회심의 공격이었으나, 알베르크는 그를 쉽게 피해 냈다.

그건 무리일 것 같은데. 넌 너무 어려.”

넌 늙었고?

뭐, 그렇다 할 수 있지?

둘의 대화 사이에 가준이 끼어들었다.

대체 왜왜 현우를 위험에 빠트린 거냐.”

알게 해 주고 싶어서.”

무엇을?

인간들이 얼마나 추악하고 쉽게 마음을 돌리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결국 내 뜻대로 됐어. 저것 봐. 자신을 도와주었던 이를 의심하는 모습을 말이야.”

뜻대로 되진 않을 거다.”

알고 있어. 지선우가 현우를 위해 뛰어다니고 있는 일쯤은. 하지만 그래서 뭐그 자료가 세상에 나오는 일이 있을 것 같아?

알베르크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허공에 문을 열었다. 그게 공간이동을 위한 문인 걸 깨달은 미리엘이 필사적으로 공격을 퍼부었으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렇게 된 거!

미리엘은 잠시 공격을 가준에게 맡기고 틈을 엿보았다. 공간의 문은 누군가 통과한 뒤에도 잠시 남아 있다. 그걸 다시 열고 따라 들어가는 건 인간에겐 힘들겠지만, 미리엘이라면 가능했다.

쉬운 일은 아니지만.

마침내, 알베르크가 문을 통과했을 때 미리엘도 따라가는 것에 성공했다하지만 다소 억지스러운 방법으로 따라온 탓인지 도착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 미리엘이 도착했을 땐, 이미 알베르크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그래도 포기할 것 같으냐!

미리엘은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했다. 가장 큰 마기를 쫓는 것이다.

미리엘, 너는 추적에 재능이 있다.

아버지는 그리 말하셨다. 그리고 미리엘은 그런 아버지를 믿었다.

찾았다.”

위치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그럴싸한 건물이었다.

*

유리는 생각했다. 하룻밤 사이 추가된 자료를 정리하느라 얼마나 고생했던가. 그걸 생각하면 절대 이 기회를 허투루 넘길 수 없었다. 위로 올라간 그녀는 앞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여기 있는 수많은 각성자를 설득할 시간이었다.

난 할 수 있어.

길드장님이 믿고 맡겨 주신 일이다. 어떻게든 훌륭하게 해낼 생각이었다.

그럼 브리핑을 시작하겠습니다.”

심호흡을 하며 입을 여는 순간, 건물이 흔들렸다.

!

무언가 무거운 것이 내려앉는 소리와 함께,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러자 앞을 향해있던 다른 각성자들의 시선이 자연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 돼!

유리는 있는 힘껏 책상을 손으로 내려쳤다.

!

비록 정신계라도 그녀도 각성자다. 아무리 단단하게 만들어진 책상이라도 아이템이 아니라면 쪼개 버릴 수 있었다. 앞에서 들려온 소리에 사람들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들어 주십시오. 저희가 조사해 온 건 지현우 님의 일만이 아닙니다. 가디언 길드의 숨겨진 비리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유리는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았다.

이때야!

이제 지금까지 알아낸 것 모두를 토해 낼 시간이었다. 그걸 듣고 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알려야 하는 일이었다.

가장 먼저 이 사진을 봐 주십시오.”

하얀 벽면에 그로테스크한 사진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인체 실험?

하나같이 눈이 좋아서 그런지 금방 알아보았다.

맞습니다. 전부 인체 실험의 피해자들입니다. 그들은 때로는 각성자이기도 했고, 때로는 아무런 능력 없는 일반인이기도 했습니다. 사진은 더 있습니다.”

실험실의 수조에 갇혀있는 기이하게 변한 사람들, 대부분은 죽어 있었지만 드물게 살아 있는 이도 있었다.

끔찍한데?

그러게. 인체 실험을 하는 미치광이들은 거의 다 잡지 않았나저게 또 어디서 나온 거지?

방금 가디언 길드를 들먹였잖아.”

가디언 길드가 저런 일을 저지른다고그럴 리가 있나그들은 미국을 살리고, 전 세계를 살렸어!

일단은 더 들어보도록 하지.”

의견이 분분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이 모든 사람들은 사람에게 마기를 접목시키고자 하는 실험의 희생자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발견된 장소는 도심 외곽에 있는 가디언 길드의 지부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같이 동행하며, 확인하신 분도 계십니다. 앰버. 이리 와 주십시오.”

유리의 말에 앰버가 차분하게 앞으로 나섰다.

앰버면 중앙본부에서 일하는 정신계 각성자 아닙니까?

공격적인 면은 약하지만, 전파에 강해서 제법 큰일을 맡고 계시는 분이지요. 그런데 그분이 왜 저기 있는 걸까요?

진정하십시오. 가디언 길드가 아닌 일부 지부의 일탈일 수도 있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가디언 길드의 지부가 얼마나 많은지. 저는 레온 님을 믿습니다.”

여기까지 해도 아직 레온을 믿는 이들은 많았다. 그러니 더 많은 자료로 저들의 머리를 깨트려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입을 여는 순간, 무언가가 닫힌 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결국엔 문을 부수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는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커다란 개였는데, 두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저, 저건?

몬스터다!

일부가 습관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지만, 무기는 이미 입구에 맡기고 온 터였다.

제길!

자연 육체를 다루는데 능한 각성자가 앞에 나섰다.

이거 지현우가 다루던 몬스터 아냐?

맞는 것 같은데?

그때 반대편에 있는 다른 문도 터져나갔다. 그리고 그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블랙 드레이크 점박이였다. 초조한 마음으로 앉아 있던 선우가 몸을 일으켰다.

케로!

케로의 이름을 불러 보았으나 반응이 돌아오지 않는다. 이제 입에서는 거품마저 질질 흘리고 있었다.

!

다시 한번 천장이 울린다. 여기 둘이 있다면 다른 하나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눈이란 이름을 가진 블랙 드래곤이 천장을 무너트리려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상해.

셋은 현우에게 충성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현우의 명령도 없이 세계 각성자 협회에 쳐들어온다고선우는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한도진.”

네, 움직여야겠군요.”

여기서 저들이 날뛰게 두었다가는 이쪽만 불리하다. 현우의 결백을 증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단 소리였다. 그러니 일단은 막아 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인, 레나. 둘은 점박이에게 붙으십시오.”

!

케로는 내가 상대하겠습니다. 남은 사람은 현우 형과, 유리. 그리고 자료를 지키십시오.”

그럼 저는 위로 가 보겠습니다.”

그림자에 휩싸인 도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선우는 케로 앞에 나섰다.

뭐야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케로를 막아서고 있던 각성자 이반이 투덜거렸다.

둘 다 같은 편 아닙니까?

지금은 아닙니다.”

선우는 손을 앞으로 내밀어 얼음 결정을 만들어 냈다.

쉽게 양보하긴 싫은데.”

이반의 말에 선우가 말했다.

그럼 저는 보조를 하겠습니다.”

탁월한 생각그럼 가 보겠습니다?

이반은 양손을 부딪치더니 케로에게 달려들었다. 목이 문에 낀 케로가 곧바로 입에서 화염을 뿜어냈지만, 제대로 통하지 않았다. 러시아의 이반은 무혁과 마찬가지로 화염 속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아아이럴 줄 알았으면 무기를 가져왔지!

레나는 투덜거리며 안쪽으로 들어온 점박이를 노려보았다.

율무가 그쪽으로 달려갔으니, 곧 무기를 가져올 거다.”

그럼 그때까지만 버티면 되는 거지?

주먹을 꽉 쥔 레나는 점박이 앞을 가로막았다.

우리 귀여운 점박이가 왜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봐줄 수는 없단다. 이 누나를 원망하지 마렴.”

순식간에 점박이에게 접근한 레나는 그대로 다리를 두꺼운 목에 휘감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힘을 주어 목을 조이기 시작했다. 점박이는 그녀를 떼어 놓으려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아인이 그걸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한편, 위로 올라간 도진은 지붕 위에서 쿵쿵거리고 있는 블랙 드래곤을 발견했다. 그 또한 다른 둘처럼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두눈.”

이름을 부르자 드래곤이 고개를 들어 도진을 바라보았다.

크르르르.”

붉은 눈에는 이성이 담겨 있지 않았다.

124.

정신 차리라고 해도 통하지 않겠군.”

도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그림자를 불러들였다. 두눈이 아무리 마법에 서툰 드래곤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능력이 인간보다 뛰어났다.. 두꺼운 비늘과 살 또한 그러했다. 그걸 뚫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힘이 아니면 힘들 것 같았다.

건물에 퍼트렸던 그림자를 모두 그러모으자 두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으로 향한다.

그래도 살기를 느낄 정도의 이성은 있는 모양이었다.

단숨에 간다.

안타깝지만, 두눈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현우는 묶여 있는데, 그 고통을 더 늘리긴 싫었으니까.

단단히 각오하고 손을 뻗는 순간, 하늘에서 떨어진 무언가가 두눈의 머리에 매달렸다.

미리엘이었다.

잡아!

갑자기 나타난 그는 도진에게 외쳤다. 그 말에 따라 그림자를 이용해 두눈을 구속하자마자 미리엘이 양 손으로 머리통을 꽉 잡았다.

머리통이 커서 손바닥을 대는 형태가 되긴 했지만, 뭔가 하긴 한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눈은 그 자리에 스르륵 쓰러져 잠들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쉬는 미리엘을 향해 도진이 물었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알베르크를 따라왔다. 그런데 소란이 일어났기에 이쪽으로 온 거지.”

알베르크?

그래, 너희 설마 그 간악한 마족을 믿고 있었던 건 아니지그가 이번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것 같다. 그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선 거고.”

미리엘은 가슴을 펴고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래,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일단은 움직이면서 이야기하죠.”

도진은 미리엘을 잡아다 잽싸게 아래로 이동했다. 그리고 선현 길드 사람들과 이반이 막고 있는 몬스터 쪽으로 그를 내던졌다.

무례해.”

미리엘은 투덜거리면서도 용케 몬스터에게 접근하여 전부 잠재워 버렸다.

와아. 감사합니다.”

힘겹게 막고 있던 레나가 미리엘에게 인사를 했다.

그런데 정말 천사같이 생기신 분이네요.”

그야 내가.”

미리엘이 사실을 말하려는 순간, 도진이 그림자로 그의 입을 막았다.

제법 재밌는 순간이었는데.”

이반은 투덜거리며 말했다. 그런 그에게로 준이치가 접근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들지. 지금 상황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면 그건 이상한 놈이겠지.”

갑자기 지현우가 테이밍한 몬스터가 난입한다니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주인을 구하려 날뛰는 걸 수도 있겠지만 몬스터를 통제하지 못하는 행위는 재판에서 불리할 뿐입니다. 선현 길드장은 이럴 빌미를 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형은 자신을 구하라고 몬스터들에게 명령한 적이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요. 보셨다시피 저희는 오늘 재판에서 현우 형이 빌런이 아니란 걸 증명할 예정이었습니다.”

준이치는 자신의 라이벌인 지선우를 우습게 보는 듯한 수작이 불쾌하다는 듯이 내뱉었다. 선우는 준이치를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건물을 지키는 각성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 정도 소란이면 사람이 더 몰려와야 하지 않나?

이반이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둘만은 아니었다. 각 나라의 각성자들도 이상함을 느끼고 저들끼리 무리 짓기 시작했다.

그때쯤. 중앙의 단에 아나이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흥분한 듯 새빨간 뺨을 가진 그녀는 양손으로 뺨을 감싸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러분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어떤 것부터 들려드릴까요?

그 말에 몇몇 각성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나이스를 바라보았다. 지금 상황이 저런 이야기를 할 때였던가.

자연스럽게 모두의 머릿속에 의문이 떠올랐다. 과연 저 앞에 서 있는 여자는 진짜 아나이스가 맞을까?

좋은 소식부터 말해 보지?

어느새 러시아의 인원들과 합류한 이반이 아나이스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은요드디어 레온 님께서 원하던 목적을 이루셨어요!

손을 앞으로 내밀며 열렬하게 외치는 모습이 광신도를 연상케 했다.

나쁜 소식은 뭡니까?

이번에는 도진이 물었다.

음, 그건 말이죠. 오늘 여기 있는 분들의 대부분이 죽을 거라는 거예요불쌍해라아.”

아나이스님?

평소 아나이스를 알고 지냈던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유리는 서류를 품에 안고서 어떻게든 떨어지기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단의 끝까지 물러나서도 내려오지 못하는 건, 아직 전하지 못한 말이 많기 때문이었다.

그럼 다들 저를 위해 죽어 주세요.”

아나이스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튼으로 가려져 있던 통로에서 무언가가 구물거리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 가장 먼저 알아본 이는 선현 길드의 사람이었다.

마기를 품고 기괴하게 변형된 각성자. 그들 중 절반 이상은 가디언 길드의 제복을 입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저들은 적입니다.”

누가 그걸 몰라그 적이 왜 가디언 길드의 제복을 입고 있느냐, 그거지.”

순식간에 내부가 소란스러워졌다. 혈기 넘치는 이가 앞서 괴이하게 변한 사람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상대가 쉽지 않았다.

원래 각성자였던 분들이거든요. 상대하기 쉽지 않을 거랍니다.”

아나이스가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웃음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곧바로 그녀를 공격해 오는 창 때문이었다.

사악한 마족!

어머, 햇병아리 천족 아니어요?

내 창 앞에 무릎 꿇어라!

그건 싫은데.”

아나이스는 웃으며 뒤로 물러나 현우 뒤로 숨었다.

가까이 다가오면 이 사람을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다가서려던 선우와 도진이 발걸음을 멈췄다. 멈추지 않는 이는 미리엘뿐이었다.

미리엘은 그대로 앞으로 나서 순식간에 창을 휘둘렀다. 그러자 축 쳐져 있던 현우의 목이 툭 떨어져 낼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

선우가 놀란 표정으로 다가서자, 미리엘이 말을 툭 내뱉었다.

가짜다.”

실제로 가까이서 보니 뼈와 살이 있어야 할 부분엔 이상한 쓰레기 같은 물질이 가득 차 있었다. 미리엘이 그를 확인시켜주자 아나이스가 혀를 찼다.

에이, 재미없게. 그렇게 금방 눈치채면 재미없답니다.”

알게 뭐냐. 가짜 인형으로는 내 눈을 속일 수 없다. 그러니 그만 목을 바쳐라.”

미리엘의 말에 아나이스가 실실 웃으며 쓰러진 현우의 인형을 일으켰다. 그걸 본 선우와 도진은 일단은 뒤로 빠지기로 했다. 선우는 차마 형의 모습을 닮은 인형을 공격할 수가 없어서. 도진은 미리엘이 했던 말을 떠올려서였다.

알베르크.

그를 찾아야 했다.

둘이 물러서자 미리엘은 다시 매섭게 아나이스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를 보는 다른 각성자들은 저 천사같이 생긴 청년을 말려야 할지, 놔둬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지금 미친 행동을 하고 있긴 해도 그동안 쌓아 온 것이 많은 아나이스였다. 그 때문에 섣불리 손을 댈 수 없었다.

세뇌당하셨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 그럴 수도 있어.”

의견을 내고 납득한 그들은 다른 이들과 손을 보태 밀려들어 오는 몬스터를 막았다. 하지만 상대하기도 까다로운 것이 수 또한 많았다.

여긴 좁아나가자!

몇몇 속성계 각성자가 나가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문밖으로 나설 수가 없었다. 허공을 두드리면 벽 같은 게 느껴졌으나, 깨지지 않았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알베르크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마계에는 제대로 된 음악이 없기에, 지상으로 내려선 뒤로 익힌 음악이었다.

지상도 좋은 건 제법 많았지.

하지만 그래도 알베르크의 고향은 마계였다. 언제까지 여기서 버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세계의 존재에게 들키면 곤란해지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이만 물러나도 되지 않을까요.”

알베르크의 의상 주머니에 야무지게 들어가 있던 요정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안 돼.”

진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요정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주머니 안에 콕 처박혔다. 길게 이어지는 복도를 걷고 있자니, 반대편에서 레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 속였더군.”

아니요. 전 속인 게 없습니다.”

없다고?

알베르크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현우를 망가트려서 내주겠다 했지요?

그랬지.”

그 약속 지켜질 겁니다. 지금 벌어지는 소란은 원래 제 계획 속에 있던 겁니다. 그러니 안심하세요. 당신을 속이고자 한 일이 아니었으니까요.”

협회 건물에 각성자들을 가둬서 죽이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고?

정확히는 좀 다릅니다. 저들 중 많은 수가 죽겠지만, 그래도 살아남는 자도 있을 겁니다. 딱 그 정도로 맞게 조정했거든요.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에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레온은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인류의 구원자, 세상을 위한 정의, 가디언 길드의 수장이 사실은 빌런이라는 것을요.”

지독한 취미군.”

알베르크 님만 할까요.”

지금 레온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냄으로서 사람들에게 불신을 심어 주고자 하고 있었다. 너희들이 절대적으로 믿어 오던 가치는 쓸모없는 것이었으며, 정의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려는 것이다. 그걸 위해 지금껏 얼마나 열심히 연기를 해 왔던가.

세상을 뒤흔들고, 사람들을 망가트린다. 그리고 그들이 한없이 연약해진 뒤에는 이 세계를 손에 넣는 것이다.

나는 그쪽에 비하면 선량한 마족이지.”

선량한 마족. 그것만큼 우스운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레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 그리고 이건 서비스입니다. 지선우와 한도진은 반드시 죽여 드리도록 하죠. 알베르크 님도 그걸 원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그랬지.”

그럼 이제 지현우에게로 가시면 되겠군요. 그를 구출하고 나면 이미 모든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된 뒤일 겁니다.”

손을 흔들어 보인 레온은 알베르크가 지나온 복도를 되짚어 걸어갔다.

안, 안돼요!

무서움에 웅크리고 있던 요정은 레온이 자취를 감추자마자 주머니에서 뛰쳐나왔다.

당장 저 마족을 말려야 해요이건 규칙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난 상관없는데.”

알베르크 님나, 나중에 현우 님이 사실을 알고 미워하면 어쩌시려고요!

그 사정을 아는 입은 여기 하나뿐인데?

알베르크가 서늘한 표정으로 요정을 바라보았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지?

요정은 식은땀을 흘리며 서서히 뒤로 물러났다.

125.

이후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레온과 알베르크는 서로를 경계하듯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 동맹은 깨졌으니 각자의 할 일을 할 때였다.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알베르크를 보며 요정은 입을 꾹 다물었다. 머리를 굴려 보아도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없었다. 천족인 미리엘이 있었지만, 그쪽은 너무 꼬맹이다. 그저 속만 터져 나갈 뿐이었다.

그런 요정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알베르크는 사뿐히 걸어 원하던 목적지에 도착했다. 세계 각성자 협회가 등급 높은 빌런을 임시로 가둬 두기 위해 만든 감옥에 말이다. 원래라면 그 앞을 지키는 각성자가 있어야겠지만, 지금은 비어 있다.

드디어 원하는 바를 손에 넣게 된 알베르크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랜만에 현우를 만나러 가는 건데 이런 모습은 좀 그런가.”

알베르크는 지금도 여전히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모습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래도 처음 현우를 만났을 때처럼 성인의 모습을 하고 싶었다. 그랬기에 그동안 조용히 모아온 힘을 발휘해 모습을 변화시켰다. 자그마하고 호리호리하던 소년의 키가 쑥쑥 자라더니, 몸에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잠깐의 시간 사이에 소년은 청년으로 거듭났다. 허리춤까지 오던 머리카락은 더 길어졌고, 부드럽던 눈매 또한 더 날카로워졌다. 겉보기에는 한창때의 청년처럼 보였으나, 그건 늙지 않는 마족의 특성일 뿐, 눈을 바라보면 거기서 세월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가볼까?

알베르크는 열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공간에 놓인 큐브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지만, 그 정도를 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엾게도.”

큐브의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안에는 전신이 속박당한 현우가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보다 더 마르고, 힘겨워 보였다.

알베르크.”

그 상황에서도 현우는 알베르크의 목소리를 한 번에 알아냈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래, 나다.”

현우는 다시 입을 열었지만, 달싹이기만 하다 다물었다. 말을 이어 나갈 힘이 없는 모양이었다.

내가 너를 구해 주러 왔어.”

알베르크의 상냥한 목소리에 요정이 괴로운 표정을 지었지만, 그게 다였다. 그는 그저 이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목소리에 마기가 담기기 시작했다. 사람을 현혹하며 마음을 바꾸게 만드는 힘. 그 힘이 현우를 어루만졌다.

원래라면 먹히지 않을 힘이었다. 현우는 마법은 잘 몰랐지만,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마기에 대한 저항력을 키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그는 지친 상태였다.

이를 악물고 있던 요정은 허공에서 힘차게 솟아올랐다. 흔히들 요정은 감정도 없는 존재라고 말했지만, 아니다. 그들도 감정이 있고, 누군가를 좋아하기도 했다.

요정 또한 그러했다.

틀렸네.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현우에게 정이 든 모양이었다. 하긴 같이 한 세월이 얼마나 길었던가. 무리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요정은 현우를 위해 알베르크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다른 곳에 연락을 넣으려 하였다.

그건 천계일 수도 있었고, 요정계일 수도 있었다. 어디든 가장 빨리 연결되는 곳으로!

하지만 막 힘을 발휘하려던 순간, 요정은 알베르크의 힘에 얻어맞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으윽!

다시 일어나려 했지만, 알베르크가 요정을 재차 걷어찼다. 어떻게든 힘을 짜내 몸을 보호했지만, 목숨만 건졌을 뿐이었다. 요정은 헐떡이며 흐려져 가는 눈으로 알베르크와 현우의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제 힘든 일이라곤 없을 거야.”

요정을 잔인하게 걷어찬 알베르크는 현우에게는 마치 솜사탕같이 굴었다.

내가 장담할 수 있어. 남은 건 행복뿐일 거야.”

네가 나와 함께 가 주기만 한다면.

같이 마계로 돌아가자.”

알베르크는 달콤하게 속삭이며 현우의 눈을 가린 천을 걷어 냈다. 이 정도면 자신의 암시에 빠져들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걷어 냈으나, 틀렸다.

현우의 눈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맑게 반짝이고 있었다.

개소리를 참신하게도 하네?

알베르크의 안색이 변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아직 현우가 구속되어 있음을 깨달은 알베르크는 재차 암시를 걸려고 했다.

시발, 내가 이거 풀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지?

현우의 팔이 불쑥 올라와 그런 알베르크의 멱살을 잡았다. 어느새 그를 묶고 있던 사슬은 풀려 있었고, 남은 건 구속복뿐이었으나 그마저도 찢어 냈다.

자유의 몸이 된 현우는 멱살을 잡고 있던 알베르크를 밀쳐 냈다.

마계는 너 혼자 가. 난 가지 않아.”

?

왜냐니.”

인간들은 이제 널 싫어할 텐데?

그렇군.”

현우는 놀라우리만치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래서다른 이유는 더 없어?

내가 널 사랑한다.”

그것도 나에겐 중요하지 않아.”

현우.”

나에게 더 중요한 건 말이지.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들었던 엿 같은 소리가 레온 혼자만의 계획이 아닌 것 같단 거지. 너도 손을 보탰지?

그랬다면?

알베르크의 대답에 현우는 한숨을 탁 쉬었다.

그럴 줄 알았다. 마족이 마족이지. 변할 리가 없지.”

날 어떻게 할 거지?

뭘 어떻게 해. 아무것도 안할 거다.”

그 말에 알베르크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널 그렇게 괴롭게 만들었는데도?

그래. 너에겐 내가 복수하는 것보다 무관심을 보이는 게 더 괴로울 거란 걸 아니까.”

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안 돼.”

돌아서는 뒷모습을 보던 알베르크가 사납게 부정의 말을 내뱉었다.

이렇게 널 놓칠 순 없어.”

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만약에 이대로 나를 두고 돌아선다면 밖으로 뛰쳐나가 인간들을 죽이겠다. 대부분의 강한 각성자는 이 건물에 걷혀 있으니, 딱히 막을 자도 없겠지.”

어떻게든 현우를 돌아보게 만들기 위해 알베르크는 닥치는 대로 말을 꺼냈다.

인간들은 현실에서 지옥을 맛볼 것이다.”

아, 진짜 귀찮네.”

현우는 손으로 머리를 긁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래, 언젠가 한 번 끝을 보긴 해야 했지. 싸우자, 시발놈아. 대신 나에게 지면 넌 더 이상 나에게 매달리지 않는 거다.”

내가 이기면?

네 맘대로 해.”

좋아,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이어 둘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진짜 끊임없이 몰려드는군.”

레나는 입을 크게 벌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대체 어디에 숨겨 두었었는지 끊임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에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벽을 두드리며 깨 보려 하던 이들도 이제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간 전부 괴물의 파도에 휩쓸릴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뒤늦게 정신 차린 켈베로스와 점박이가 합류했지만, 그래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데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건데.”

아인이 건물 위쪽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켰다.

저거 작동중인 건가?

모르겠어. 혹시 몰라서 깨 보려고 했는데 꿈쩍도 하지 않아.”

여기 상황이 외부로 나가면 큰일일 것 같다만.”

그렇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누군가 구하러 와주겠지만.”

아니라면 이 상황을 보고 되레 절망하게 되겠지.”

어지간히 강한 각성자는 전부 여기 갇혀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둘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카메라는 내부의 상황을 지상파 방송으로 송출하고 있었으며, 그 모습을 보게 된 이들은 하나같이 당황했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고 그 아래로 댓글이 주르륵 달렸다.

제목: 지금 방송을 봐!

세계 각성자 협회에 테러가 일어난 것 같아상황이 최악이라고!

댓글

-누가 공격한 건데?

-처음부터 봤는데 아나이스 님 같아.

-님은 붙이지 말라고미친 여자 아니야수많은 사람을 괴물로 만든 게 그 여자 같다고!

-구조대를 보내야 하는 거 아니야?

-누굴 보낼 건데저기엔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성자들이 있다고.

-그래도 내부에서 버티는 거랑, 외부에서 공격해서 도와주는 거랑은 다를 수도 있잖아.

-세상에, 맙소사봤어봤어지금 레온 님이 난리가 일어난 곳으로 향하고 계셔그분이 우릴 구원해 주실 거야!

-난 모르겠어. 레온 님은 아나이스 님과 사이가 좋았잖아.

-그래도 그분은 아니지그분은 우리들의 구원자시라고정의의 표본!

각성자들이 모여서 싸우는 홀 앞에 선 레온은 카메라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

레온을 구원자라고 부르던 소녀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 아닐까, 싶어 눈을 비벼 봤지만 보이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카메라를 보며 비웃고 있었다.

뭘 비웃는 거지?

이런 상황에서불길함에 심장이 뛰었다. 소녀는 저도 모르게 가슴에 손을 얹고 TV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중간에 영상이 끊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이어지고 있었다. 방송국에서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레온은 카메라를 보던 시선을 돌려 홀의 문에 손을 댔다. 그리고 흡수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쉽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 역시 외부에서 깨야 하는 거였네.”

괜히 중얼거려 보았지만, 그 말을 듣는 이는 없었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126.

내부의 사람들이 레온의 등장을 눈치챈 건 금방이었다.

레온 님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순식간에 시선이 쏠렸다. 입구에서 나타난 레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옅게 웃으며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레온 님, 도와주세요!

지쳐 뒤로 물러나 있던 각성자 하나가 그런 레온에게 다가갔다. 미국 내에서는 레온은 특별한 존재였기에, 그런 그에게 기대려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이제 웃으면서 괜찮다고, 도와주러 왔다고 하겠지. 모두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놓았다. S급 각성자 하나 더해진다고 이 상황이 얼마나 나아지겠냐마는 이상하게 그에게는 믿음이 갔다. 그러나 이어진 상황은 사람들의 상상과 달랐다.

서걱.

고기를 써는 소리와 함께 가까이 다가간 남자의 목이 날아갔다. 덕분에 가장 가까이에 서 있던 여자는 저도 모르게 그 목을 받아 냈다.

?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레온을 바라보는 여자의 목덜미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그 덕분에 그녀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레온,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내내 싸우다 잠시 숨 돌리던 선우는 여자를 뒤로 던졌다. 다행히 누군가 받아 주긴 한 것 같았지만, 이후 터져 나오는 비명은 막을 수 없었다.

꺄아아악!

그녀는 잘린 목의 남자와 아는 사이인지 그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했다.

무슨 짓이냐니요?

레온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선우를 바라보았다. 너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는냐, 는 시선이었다.

그래, 알고 있다.

알고 있기에 그의 정체를 드러내 형을 구하고자 했다. 그래서 많은 준비를 해 왔고, 아나이스의 방해에 초조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랬는데 본인이 나서서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아예 숨기지 않기로 했습니까?

선우의 말에 레온이 답했다.

그렇다면 어쩌겠습니까?

레온이 입꼬리를 길게 끌어 올렸다. 피투성이가 된 입구에 서서 기이하게 웃는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레온을 마음 속 깊이 믿고 있던 자들도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바로 뒤에는 몬스터가 드글거림을 알고 있는데도, 지금은 그가 더 무서웠다.

이봐, 무슨 일인 거야뭘 숨겼다는 거지?

둘의 대화에 이반이 끼어들었다.

저도 알려 주십시오.”

준이치 또한 그렇게 말했다.

흠, 그게 그렇게 궁금하다면 제가 직접 알려 드리죠. 당사자가 말하는 게 가장 빠르지 않겠습니까?

레온이 피에 젖은 검을 털며 말했다.

뒤늦게 말씀드리는 사실입니다만, 저 레온은.”

사람들은 숨조차 멈춘 채 레온의 입을 바라보았다.

아, 아니다. 말보다는 행동이 빠를 수도 있겠군요.”

그 말과 동시에 레온은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을 검으로 찔러 들어갔다. 황급히 선우가 얼음으로 방어를 했지만, 그마저도 뚫고서 목숨 하나를 쉽게 앗아갔다. 심지어 그는 가디언 길드의 제복을 걸친 사람이었다.

그 뒤로도 레온은 쉽게 사람들을 쓱쓱 죽여 나갔다. 다른 각성자들이 막아 보려 했지만, 그는 집요할 정도로 약한 이들부터 처리했다. 지친 몸으로는 그의 속도를 따라잡기 힘들었다.

아아, 역시 레온 님!

아나이스는 양손을 모으고 눈을 반짝였다. 처음에는 인간 같던 외양은 어느새 마족의 모습으로 변한 지 오래였다.

괴, 괴물!

누군가 아나이스를 보며 외쳤다.

저들은 괴물이야!

아이, 그러면 듣는 괴물은 기분 나쁘죠.”

아나이스가 배시시 웃으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러자 괴물이란 소리를 내뱉은 사람 쪽으로 몬스터들이 몰려갔다.

하아, 제길.”

이반은 필사적으로 레온을 따라다니며 욕을 내뱉었다. 조금이라도 느리게 움직이면 그의 검에 사람들이 희생된다. 그렇다고 맞춰서 움직이자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합을 맞춰 보도록 하죠.”

그 때문에 선우가 그리 말했을 때, 그 말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미 절반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더 죽게 내버려 두었다가는 위험하다. 외부에 포털이 열릴 때 그걸 막아 줄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줄어든다는 소리기도 했으니까.

좋습니다.”

준이치도 선우의 의견에 동의했다. 먼저 선우가 얼음을 이용해 레온을 붙든다, 그러면 이어 준이치가 덤벼들고, 마지막으로 이반이 퇴로를 막는다. 속성이 다르긴 했지만, 셋은 제법 그럴싸하게 합을 맞춰 나갔다.

덕분에 각성자의 살해 속도가 점점 늦어졌다. 거기다 어느 정도 몬스터를 처리한 미리엘이 아나이스에게 붙으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졌다.

죽어라, 마족!

진짜 싫다니까. 천사들은 왜 같은 말 밖에 못한담.”

아나이스는 투덜거리며 미리엘을 상대해 나갔다. 하지만 애초에 그는 몸을 쓰는 마족이 아니었고, 반대로 미리엘은 어리지만 전투에 능했다. 그 때문에 세월의 격차가 메꿔지고 있었다.

!

그때 바깥쪽에서 거대한 울림이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천장이 아닌 벽면에서 울린다.

어쩌면.”

상황이 긍정적으로 풀릴지도 모른다. 현우의 몬스터들은 전부 정신을 차린 뒤에 사람들을 돕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소리도 그의 몬스터가 내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다.

난 이런 상황이 좋습니다.”

그때 구석에 몰린 레온이 난데없이 입을 열었다. 작게 말하는데도 이상하게 모든 곳에서 소리가 울렸다. 그렇기에 그 소리를 듣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힘을 합쳐서 악을 물리치려는 순간, 사람들이 희망을 품은 그 순간이 말입니다.”

레온의 파란 눈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그 기대를 깨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아십니까희망 뒤에 밀려오는 절망만큼 맛있는 건 없죠. 그렇지 않습니까아이나스.”

히히힛.”

아나이스, 아니 아이나스는 싸우는 도중에도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리비 님, 제가 충성을 맹세하신 분자, 얼른 이들에게 절망을 주세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카만 연기 같은 것이 주변을 휩쓸었다.

저건 위험하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선우는 잽싸가 몸 주의를 얼음 방패로 감쌌다. 준이치는 검을 정면으로 들었고, 이반은 화염으로 주변을 덮었다.

다들 피하십시오!

그러면서 잽싸게 경고를 날리자, 나머지들도 각자 방어에 들어갔다. 여기 있는 자들은 대부분 유능한 각성자들이라 자신을 방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극히 짧았다.

그런데도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광경은 참혹했다. 가장 약한 이들부터 차례로 죽어 가고 있었다.

이걸, 이걸 어떻게 이겨?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걸 보는 미리엘의 표정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역시 마족다운 행위였다. 순식간에 사람들을 절망에 몰아넣고 그를 즐기는 모습이 끔찍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었다.

일단 결계만 걷어 낼 수 있다면.”

미리엘에게도 숨겨 둔 한 수는 있었다.

!

그 사이에도 쿵쿵거리는 소리는 지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음, 그 멍청한 드래곤이 여길 뚫는 건 불가능할 텐데.”

아이나스가 중얼거렸다. 티아매트라면 모를까, 현우의 편에 붙은 드래곤은 어려서부터 마법에 재능이 없었다. 한마디로 육체적인 힘이 전부란 소리였는데, 그것만으로도 결계를 흔드는 게 가능해지려면.

설마 피를 쓰고 있나?

아무리 마법을 못쓴다 하여도 육신은 드래곤. 피를 이용하여 결계를 두드린다면 마법보다는 못해도 어떻게든 풀 수는 있을 것이다.

슬슬 물러날 때가 되었나?

아이나스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자, 그래서 이제는 제가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피투성이 사체를 뒤로 하고 레온이 말했다.

살육의 장면을 고스란히 본 소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한 단어를 뱉어 냈다.

빌런.”

하지만 왜그는 가디언 길드의 수장인데대체 뭐가 부족해서 빌런 짓을 하는 거야그동안 평화를 위해 힘써 왔잖아.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지내는 세상이 꿈이라고 했잖아!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거짓말, 거짓말이지?

소녀는 다급히 노트북 앞으로 다가가 게시판을 열었다. 떨리는 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자 혼란에 빠진 글들이 보였다.

어느 글을 열어 보아도 다들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 본 게 혼자만의 환상이 아니란 소리였다.

말도 안 돼.”

소녀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말도 안 돼.”

그럼 이제 이 세상은 어떻게 되는 거야저기 있는 각성자들이 죄다 죽어 버리면 누가 포털을 해결하지세상의 모든 각성자들이 저기에 들어간 게 아니란 건 알지만, 절망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소녀가 느끼는 심정을 다른 이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도 움직이는 이들이 있긴 있었다. 그건 놀랍게도 남은 가디언 길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장이 빌런인 걸 알게 되었으면서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늦게나마 몸을 움직였다.

레온에게 반해 들어온 이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내심 품고 있던 감정이 있었다. 세계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그 마음. 그 마음이 그들을 움직였다.

127.

!

두눈은 다시 한번 힘차게 머리를 박았다. 어찌나 세게 박았던지 안 그래도 흐르던 피가 주변에 튀기 시작했다.

무리하고 있다.

도진도 그걸 알고 있었지만 두눈을 말리지 못했다. 지금은 이게 최선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결계를 깰 만한 이가 없었다.

어서 결계를 깨고 들어가 현우를 구해야 한다.

현우를 생각하기만 하면 절로 초조해졌다. 그렇기에 두눈의 옆에서 힘을 보태 보았지만, 결계는 흔들리기만 할 뿐 쉽사리 깨지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기에 온 힘을 다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눈이 결계를 뚫어 내는데 성공했다!

구멍을 뚫은 두눈은 그대로 그 자리에 쓰러졌고, 도진은 황급히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바로 뒤에서 폭음이 터졌다.

무심결에 돌아보자 터져 나온 벽면 너머로 주먹을 치켜드는 인영이 보였다. 인영은 누군가의 멱살을 쥔 채로 몇 번이나 주먹을 휘둘렀다. 신체적인 조건은 아래 깔린 이보다 못해 보였으나, 공격이 제법 매서워 보인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먼지 구름이 가라앉고, 도진은 두 인영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래 깔린 건장한 청년은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 위에 올라탄 이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시발 새꺄, 죽어!

욕과 함께 다시 주먹을 내려치는 현우를 보며 도진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현우야!

그제야 미친 듯이 주먹질을 하던 현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진을 바라보았다.

?

현우는 도진을 바라보다가 하늘을 한 번, 땅을 한 번 보았다. 그러더니 멱살을 잡은 사람을 질질 끌고서 자신이 터트린 벽 너머로 넘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편에서 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 너 때문이야!

단단한 가죽 주머니를 두들겨 패는 소리가 났다.

하하, 뭐 어때서 그래어차피 본성을 보일 건 각오한 거 아냐?

내 본성이 어때서!

마족하고 비슷하지.”

아니거든그래, 넌 좀 더 맞자.”

현우가 다시 주먹을 드는 순간, 도진은 벽을 넘어 그에게로 다가왔다.

현우야.”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현우는 일단 알베르크의 멱살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울망거리는 눈으로 도진을 보며 목소리를 끌었다.

혀엉!

현우야!

!

도진은 현우와 끌어안으려 했지만, 그 전에 방해가 들어왔다.

나도 여기 있거든?

그쪽은 누구십니까?

와,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못 알아보냐?

같이 지낸 시간그제야 도진은 엉망이 된 청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와 닮은 한 소년을 떠올렸다.

알베르크?

그래.”

알베르크는 히죽거리며 대답했다.

당신,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는 겁니까?

보면 몰라현우와 싸우고 있었지.”

일방적으로 처맞는 걸로 보이던데. 도진은 알베르크와 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우의 옷차림은 대체로 말끔하였지만, 알베르크는 먼지투성이였다.

내가 좀 더 더러운 건 봐줬기 때문이지.”

봐주긴 뭘 봐줘?

내가 제대로 싸웠으면 네가 멀쩡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럼 제대로 싸우던가!

현우가 욱해서 다시 주먹을 쥐고 다가서려는 걸, 도진이 막았다.

일단 진정해, 현우야.”

손목을 붙잡고 부드럽게 말하자, 현우도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그동안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홀쭉해진 몸을 보니 가슴이 아파 왔다. 역시 이 계획에 찬성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도진은 현우를 보듬었다.

그때, 알베르크가 갑자기 뾰족한 귀를 쫑긋 세웠다.

와나. 저게 미쳤나!

뭔데?

지금 결계 안에 애송이가 있는 거지?

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결계가 깨졌고?

그렇습니다.”

환장하겠네. 애송이가 같은 종족을 불렀다.”

부르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될 것 같아?

알베르크가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안에는 마족과 몬스터가 득시글하지. 사람들은 죽어 있지. 거기에 자기네 애기가 위급하다고 불러 댔으니. 결과가 어떻겠어?

개판이 되겠군요.”

그래, 그거다. 더 큰 문제는 천족의 단체적인 개입이 시작되면 마족이나 다른 종족도 같이 움직이려 들거란 말이지.”

알베르크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때쯤, 한구석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꾸에에엑.”

다 죽어가는 요정이었다. 한때는 진짜 죽을 뻔했으나 어떻게든 상처를 봉합하고 반쯤 기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래서 제가얼른 돌아가시라고그랬는데에에에!

요정이 울상을 지으며 말했으나, 알베르크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뭐, 그래도 천족이 오면 재밌는 일도 생기지.”

뭡니까?

듣지 마, 형.”

천족과 싸우는 게 또 그렇게 재밌거든. 날개를 뽑을 때마다 지르는 비명이 일품이지.”

현우는 바닥을 구르는 돌덩이를 집어 들더니 알베르크에게 던졌다.

넌 닥쳐끼어들어서 싸우면 진짜 죽인다!

너무하네.”

둘이 투닥거리는 사이, 구멍 뚫린 천장으로 하늘의 모습이 기묘하게 변하는 것이 보였다, 푸르던 하늘에 구름이 끼더니, 그 사이로 빛이 내려왔다. 그리고 그 빛 사이로 몇몇 인영이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냥 내려와도 되는 걸 꼭 저렇게 내려온다니까.”

맙소사!

요정은 절망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쳤다. 이러다가 진짜 천마전쟁이 일어나게 생겼다. 그것도 그들의 영토가 아닌 생판 다른 곳에서 말이다.

그건 안 돼!

요정은 필사적으로 채널을 열기 위해 애썼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여왕님께 전달해야 했다.

음. 그러니까.”

이반이 하늘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보는 게 잘못된 게 아니면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옆의 준이치를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저도요.”

저도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준이치의 말에 동의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틈 사이, 선우는 골치가 아픈 듯 머리를 짚었다. 미리엘이 가진 한 수가 이것이었던 모양이었다.

왜 하필?

이제는 존댓말을 쓸 기운도 없었다. 그런 선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이 다가온 미리엘이 당당하게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제 안심해라, 인간. 도와줄 이들이 왔으니 모두 무사할 것이다.”

아니, 그러니까.”

선우는 말문이 막힘을 느꼈다. 이어 그는 있는 힘을 박박 끌어 모아, 미리엘을 구석으로 끌고 들어갔다.

안 그래도 마족 때문에 힘들어 죽겠는데, 천족까지 부르면 어떡합니까!

천족은 마족과 다르다. 그들과 같이 부당하게 인간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됩니다. 돌려보내십시오!

하지만 이미 불렀는데.”

이번 일은 사람들 손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마족에 천족이 더해지면 여기서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선우가 화를 내며 말하자, 그제야 미리엘은 조금 기죽은 표정으로 변명했다.

친가 어른만 조금 불렀으니까, 괜찮을 거다.”

그럼 마족만 해치우고 돌아가는 겁니까?

아마도?

확실히 대답하십시오.”

돌려보내겠다!

그럼 됐습니다.”

미리엘에게 확답을 듣고서야 선우는 벽에 등을 기댄 채 그대로 주저앉았다. 뒤늦게야 지독한 피로가 몰려왔다.

아, 이러면 곤란한데.”

레온은 하늘의 빛을 보며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러게요. 설마 저 천족 애송이가 저 정도의 천사들을 불러 낼 줄이야. 사실 집안이 꽤 괜찮았나 봅니다?

아이나스도 레온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이제 어쩌죠철수할까요?

불리한가?

그건 아닙니다. 리비님은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강자. 저런 천족 따위 몇이 되든 쉽게 해치우실 수 있겠지요.”

그럼 죽이고 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괜히 저거 보고 희망을 가지는 인간이 나오면 안 될 것 같아서. 게다가 지금 처리 하지 않으면 더 높은 애들을 불러올 수도 있고 말이지.”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장내에 울렸다. 그러자 잠시 멍하니 배회하던 몬스터들이 다시 이빨을 세우며 그르렁대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디선가 꾸역꾸역 더 기어 나와서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일단 결계가 깨졌으니 밖으로 나가요!

레나의 외침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결계 밖으로 튀었다. 레온은 그런 사람들을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내려앉는 천사들을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미리엘.”

가장 먼저 내려선 이는 우아하게 생긴 남성 천족이었다.

아버지!

몰래 사라졌다 했더니 이런 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지내가 너한테 이렇게 멋대로 굴라고 가르쳤던가?

미리엘의 아버지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엄하게 미리엘을 나무랐다.

죄송합니다!

자자, 그만하도록 해. 하이엘. 지금은 다른 걸 먼저 해결해야 되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그렇지. 미리엘. 모든 일이 끝난 뒤에 각오하거라. 이번엔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

네, 아버지.”

하이엘은 이어 레온, 정확히는 리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간악한 마족이로구나.”

진짜 너희들은 언제나 하는 말이 똑같군요?

리비 대신 앞으로 나선 아이나스가 이죽거리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