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1~118화 (14/16)

111.

레온은 호텔의 최고층 방을 통째로 차지하고서 느긋하게 움직였다. 그 과정에서 그가 홀로 있음을 확인한 헌터관리국에서 경호원을 붙여 주겠다 했으나 거절했다.

제 한 몸 추스르긴 어렵지 않습니다.”

그건 압니다만, 경호원이 있는 편이 움직이기 편하실 겁니다.”

이미 레온의 일은 뉴스를 탔다. 그 때문에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기자들이 호텔 밖에서 카메라를 쥔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한번 들러붙으면 얼마나 거머리 같은지 무혁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레온은 그 호의를 끝끝내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한국에 있는 동안엔 평화 길드에 도움을 받기로 했거든요.”

그러면서 태연하게 저 멀리 서 있는 도진을 가리켰다.

그렇습니까?

네, 미국에서 인연이 있었으니 저도 이쪽이 편할 것 같습니다.”

레온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말을 전부 듣고 있던 도진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약속은 한 적 없었다. 모든 것은 레온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들어 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도진은 레온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건 어떻게 보면 기회였다. 레온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기회 말이다. 도진은 표정을 바꾸고 레온에게 다가가 옆에 섰다. 입매를 느슨하게 하고 순하게 눈을 뜬다. 예전의 그처럼 말이다.

레온 씨의 말이 맞습니다. 모든 건 평화 길드가 책임지기로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대답은 그리 했지만, 무혁도 쉽게 물러날 수는 없었다. 원래라면 레온의 경호는 선현 길드가 맡았어야 했다. 그래야 물밑에서 지선우와 손을 잡기로 한 무혁에게도 이득이 생긴다. 그런데 지선우가 입원하면서 일이 꼬였다.

무혁은 도진과는 아무런 선이 없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없으리란 법도 없지.

요즘 정보부의 영진과 국장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그렇기에 아군은 많을수록 좋았다.

무혁은 부드럽게 웃고 있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그와 대화할 틈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무혁은 잠시 외부를 정리한다며 나갔다. 그러자 1층의 넓은 홀에는 레온과 도진, 그리고 일을 위해 간간이 돌아다니는 직원만 존재하게 되었다.

무슨 속셈이지.”

도진은 웃는 얼굴 그대로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뭘 말입니까?

날 가까이 두는 이유.”

아하, 그게 궁금했습니까?

레온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마 눈치 챘을 것 같지만 애매하게 위협적인 적은 옆에 두는 편이 나으니까요.”

옆에 두고 살펴보겠단 소리였다. 불쾌한 소리였지만, 도진이 여기 있는 이유도 레온과 같았다.

발과 연결된 그림자가 스물스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빠른 속도로 레온의 그림자로 넘어갔다. 지금 레온의 몸을 여기에 묶어 둔 것이다.

이러면 그쪽도 곤란해지지 않습니까?

레온은 이런 상황에서도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그렇지.”

도진은 그림자를 다시 거둬들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는 노골적으로 남겨 두었다. 레온에게 자신이 지켜보고 있음을 잊지 말라고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럼 저는 슬슬 자야겠군요. 인터뷰는 날이 밝으면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레온이 방으로 돌아가고, 도진은 아래층을 빌렸다. 더불어 평화 길드의 길드원 중 일부도 오라고 일렀다. 이번에도 현희가 길드원을 이끌고 바람같이 달려왔다.

레온 씨의 경호를 하게 되었단 말입니까?

네.”

세상에. 이건 좋은 소식이군요.”

현희는 무척이나 기뻐했다. 당연히 선현 길드가 나설 것으로 생각했는데 자신들이 맡게 되었으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평화 길드가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인 레온을 경호하게 된다면 국내외적으로 더욱 입지를 다질 수 있을 것이다.

실상은 저리 기뻐할 일이 아니지만.

현희에게도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욕심이 많다, 그러니 비밀을 제대로 지킬지 장담할 수 없었다.

경호 인력의 배치를 끝낸 도진은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게 되어서야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그림자는 여전히 레온에게 붙어 있었다. 떼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다.

자만심인가, 자신감인가.

아마 자신감 쪽이겠지.

더 강해져야 한다.

조금이라도 더 강해져야 현우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도진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쪽 편도 더 늘려야 한다.

국내의 5위권 내 길드가 모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많은 힘과 결속력이 필요하다. 적어도 국내의 사람들은 하나로 뭉쳐야 했다.

5위권까지의 길드야 이미 안면이 있으니 뭉치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문제는 그 아래의 길드들이었다. 평소 그들은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높은 길드들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어떻게 설득시켜 합류시킬 것인가.

뿐만 아니다. 헌터 관리국도 이대로 놔둬선 안 돼.

현재 국장은 욕심이 많다. 그러면서 각성자와 포털에 대해 더 알아볼 생각은 하지 않는다. 현상유지를 하며 각 길드들을 갈라놓는 게 그로서는 이득이 더 크기 때문이었다.

국장을 바꿔야 한다.

마땅한 인물은 생각나지 않았다.

최무혁을 설득해 볼까.

내부의 사정은 그가 더 잘 알 것이다. 선현 길드와 손을 잡은 것 같긴 했지만, 잘 설득하면 이쪽에도 손을 내밀지 않을까.

고민이 많은 밤이었다.

*

어디 가는 거지?

깊은 밤, 밖으로 나서는 알베르크에게 미리엘이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질문을 들은 알베르크가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내가 어디 가는지도 네게 보고 해야 하나?

미리엘에게 가까이 다가간 알베르크가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동안 내가 너무 상냥했지그러니 이렇게 기어오르는 것이겠지.”

헛소리.”

미리엘은 인상을 찌푸리며 알베르크의 손을 뿌리쳤다. 태연하려 애쓰고는 있었지만, 지금 알베르크는 평소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외양은 같았지만, 이상하게 무섭게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하건 신경 쓰지 마. 너는 그냥 평소처럼 잠드는 거다.”

속삭이는 목소리에 정신이 몽롱해졌다. 머리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자, 이제 잠들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미리엘은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알베르크는 그런 미리엘을 잡아서 복도의 의자에 앉혔다.

간단한 암시였다. 만약에 미리엘이 조금만 더 강하거나, 나이가 많았으면 통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이제 그는 적당히 자고 일어나면 병실로 돌아갈 터였다.

그럼 나는 내 일을 해 볼까?

알베르크는 복도에 난 창문을 열었다. 몸이 하나 빠져나갈 정도의 크기는 된다. 거기로 몸을 꺼내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가준이 봤다면, 또 문을 두고 창문을 쓴다고 뭐라고 했을 모습이었다.

사뿐히 바닥에 내려앉은 알베르크는 그대로 느긋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목적지는 여기서 멀지 않았다.

목적지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났다.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모양의 호텔이었다. 외부에는 내부에도 사람이 많았으나, 그를 피해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알베르크는 호텔 최고층에 도달했다.

어서 오십시오. 환영합니다.”

어두운 방 안에 서 있던 남자가 친근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하지만 알베르크는 그에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용건.”

그러자 남자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달빛이 흘러들어오는 창가에 섰다. 그 모습은 여러 번 봐서 익숙했다.

레온, 그였다.

성미도 급하십니다. 천천히 이야기해도 좋지 않습니까?

아하, 그럼 정말로 느긋하게 이야기해 볼까?

알베르크는 레온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그에게 익숙한 녀석의 그림자가 붙어 있음을 말이다. 더불어 그 그림자가 엿듣는 걸 막기 위해 결계도 쳐져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천천히 이야기하자니. 농담도 정도가 있는 것이다.

저런.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럼 용건만 빠르게 이야기하지요. 알베르크 님. 저희와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미쳤냐?

알베르크는 기가 찬 표정으로 레온을 쳐다보았다. 공원에서 그가 숨어 있던 곳을 지나치며 나중에 한번 만나자고 하여 호기심에 찾아왔다. 그런데 괜히 찾아온 모양이었다.

아니요. 저는 정상입니다.”

아니, 아무래도 미친 모양이다. 인간 세상을 정복하자 할 때부터 알아봤다.”

알베르크의 말에 레온은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말을 돌렸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말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알베르크 님은 지현우란 인간을 사랑하시지요?

그래서?

알베르크는 삐딱하게 서서 레온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방해되는 인물이 많지 않습니까저희가 방해되는 이들을 전부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알베르크 님은 저희에게 조금의 도움만 주시면 됩니다.”

싫다면?

하하, 그럴 리가요. 비록 별종이라는 소리를 들어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족의 심리를 모르진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할 수 있는 게 마족이지만, 반대로 모든 것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도 마족이 아닙니까?

천천히 작은 머리가 기울었다.

인간은 오래 살지 못합니다. 마계에서야 마기 때문에 늙지 않았다고 해도, 여기는 인간 세상입니다. 함부로 마기를 꺼내서 사용할 수 없지요. 그는 금방 늙어갈 테고, 젊음을 사라질 겁니다.”

늙어도 현우는 귀여울 거다.”

그래도 이왕이면 한창 때 데려가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제가 세상이 그를 미워하게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모두가 그를 경원시하고 싫어하게끔요. 이 세상에 어떤 미련도 남지 않게.”

말이 길다. 그렇지만 그 말을 들은 알베르크는 평소와 다르게 망설였다.

112.

레온의 말에 끌리는 자신을 느낀다. 확실히 그가 제시한 방법은 효율적이다. 지금 이대로 현우를 설득하여 마계로 데리고 가기엔 얼마만큼의 시간이 소모될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도 망설여진다.

어째서?

그는 알 수 없었다.

뭘 망설이시는 겁니까?

그러게 말이다. 지금 뭘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지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왔는데 말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인간만큼 설득하기 좋은 존재는 없다. 그건 현우도 다르지 않으리라.

처음에는 원래 살던 세상과 사람들을 그리워하겠지만, 그도 잠시일 것이다. 알베르크는 마계에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아낌없이 쏟아부을 생각이었다.

좋아. 그렇다면 이름을 걸고 맹세하도록 하지.”

이름을 건다는 건, 목숨을 건다는 것과 같다. 절대로 어길 수 없는 계약이 되는 것이다. 아직 레온에 대한 신뢰가 없으니 이 정도는 해야 할 것 같았다.

기꺼이.”

그걸 알면서도 레온은 웃으며 그를 받아들였다. 족쇄는 자신만 차는 것이 아니기에.

*

요람 길드와 협력 관계인 병원. 그 가장 위층의 병실에는 한일이 묵고 있었다. 외상은 별로 없는데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걸 보니 무언가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어느 의사도 헌터도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일 씨는 어때?

아윤이 병실에서 나오는 자윤에게 물었다.

여전해. 혹시 몰라 치유 계열, 저주 계열 힐러를 전부 불렀지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아.”

유능한 사람이었는데, 안타깝다.”

그러게.”

한일은 요람 길드에서 밀어주던 신예였다. 그만큼 추적과 은신에 특출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지현우를 만나 봐야 할 것 같은데.”

이미 진술은 헌터관리국과 협상해서 전해 받았잖아. 혹시 뭔가 더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나만은 아니지 않아?

자윤은 새침을 떠는 동생의 코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아프다고!

살살했어.”

그래도 아파하여간 지 씨 형제를 만나야 하는 건 맞아. 난 그들이 헌터관리국에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을 거라고 믿지 않아.”

그럼 그렇지.”

아윤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만 믿을 것 같진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너무 궁금하네.”

하지만 그쪽 병원은 지선우가 출입을 막아 놨어. 가도 만날 수 없을 거다.”

어휴. 우리 동맹 같은 거 아니었나어째 매번 모르고 넘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네.”

아윤의 투덜거림에 자윤도 동의했다. 그렇게 둘이서 조곤조곤 의견을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길드원 한 명이 다급히 달려왔다.

무슨 일 있습니까?

자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어보니 길드원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레온, 레온 님이 병원에 방문하셨습니다!

설마 가디언 길드의 레온이요?

지금 입원해 있는 한일 씨를 만나고 싶으시답니다.”

자윤과 아윤은 순간 서로 마주 보았다. 접근이 어려워서 포기하긴 했지만, 현장에 있었던 건 지현우와 지선우뿐만이 아니었다. 레온도 있었다.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아니다. 제가 모시러 갈게요.”

아윤이 잽싸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찌 보면 이건 기회였다. 새로운 정보를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기회 말이다.

둘은 빠르게 움직여 레온을 마중 나갔다.

안녕하십니까?

하얀색 제복을 걸친 금발의 청년은 무척이나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때맞춰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 그의 모습은 마치 마왕을 물리치러 가는 용사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정중하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레온은 본론을 이야기했다.

여기 이한일 씨가 입원해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일 씨를 아시나요?

아윤의 질문에 레온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압니다. 누군가를 추적하길래 잠시 대화를 나눴거든요. 그 과정에서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아윤은 레온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어떻게 하면 그에게서 정보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그런데 입원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겁니까?

헌터관리국에서 들었습니다.”

최무혁인가아니, 그는 아니다. 그는 헌터관리국의 정보를 함부로 밖에 내돌릴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답은 뻔했다.

국장.

그가 강대국의 헌터에게 잘 보이기 위해 모든 걸 내주었겠지. 하여간 쓸모없는 작자다.

지금 그는 어떻습니까?

사실을 말할까감출까자윤이 고민하는 사이, 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원인 불명의 이유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아윤은 레온의 명성을 생각해 보았을 때, 돌려 묻는 건 효과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직설적으로 말을 꺼냈다.

혹시 짚이는 부분이 없으신가요?

으음.”

레온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없지는 않습니다만, 일단 그건 이한일 씨가 일어나야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역시나레온은 뭔가 알고 있었다. 아윤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이제 문제는 한일을 어떻게 깨우느냐인데. 다른 길드에도 도움을 요청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안타깝네요.”

그렇지요. 그래서 말인데, 혹시 괜찮다면 제가 그 부분을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마침 제 친우인 아나이스가 일본에 있다는군요. 일본에서 비행기를 타면 한국은 가깝지 않습니까?

아나이스. 백의의 천사. 세계에서 손꼽히는 힐러로 다소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좀 더 많은 사람을 제대로 치료하고 싶다는 이유로 각성 후 의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그 능력을 가지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돕고 있었다.

더불어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이기도 하다.

그녀를 불러오겠습니다.”

지나칠 정도의 호의였다. 수상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죠!

아닙니다. 이 정도쯤이야.”

레온은 태연한 표정으로 겸양을 표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나이스가 한국에 도착했다.

안녕하세요오!

아나이스는 말끝을 늘어트리며 인사를 했다. 곱슬곱슬한 적색의 머리카락에 얼굴에 콕콕 박힌 주근깨가 인상적이다. 외모만 봐서는 백의의 천사라기보단 말괄량이처럼 보였다.

여기 환자가 있다면서요?

그래요, 아나이스. 다른 의사와 힐러가 치료를 해 보았지만, 차도가 없다고 합니다.”

레온의 말에 아나이스가 소매를 돌돌 걷어붙이며 주먹을 쥐었다.

염려 마세요제가 치료할 테니까요!

그리고 레온과 아나이스는 한일의 병실로 들어갔다. 혹시 몰라 자윤이 따라 들어갔지만, 아나이스는 착실하게 치료를 할 뿐이었다.

휴우. 나쁜 기운이 머리에 침투해 있었어요. 그걸 몰아냈으니 곧 깨어날 거예요.”

아나이스의 말대로 한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그녀가 물러난 자리를 메운 의사들이 그에게 달려들어 상태를 확인했다.

더 이상 손댈 필요 없이 완벽한 상태입니다.”

입원도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역시 아나이스!

뒤늦게 합류한 아윤이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멍하니 눈을 깜박거리던 한일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말, 말해야 하는 게 있습니다.”

완치됐다지만, 혹시 모르니 조금 더 쉬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한일은 메마른 입술을 축이고서는 말을 이었다.

그날 밤.”

그날 밤 뭔가를 보았나요?

제가 본 걸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는 진중한 태도로 몸을 바로 세웠다.

지금?

아윤은 곤란해졌다. 왜냐하면 지금 이 병실에 있는 건 아윤과 자윤뿐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저희는 돌아갈까요?

아나이스가 레온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도와준 사람에게 이리 대하면 섭섭할 만도 한데 여전히 말투가 발랄하다.

다른 길드의 일을 엿들을 수는 없지요.”

그래요. 그게 맞는 거죠.”

너무나도 산뜻한 태도였다. 그 때문에 외려 아윤이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그,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아요.”

아무런 대가 없이 도와주고 돌아선다. 그러고도 아쉬워하지 않는다. 아윤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사람들이 아나이스를 백의의 천사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니, 저는 제 이야기를 전부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막 돌아서려는 레온과 아나이스를 한일이 잡았다. 평소 그라면 생각지도 못할 행동이었다. 요람을 위해 만들어져, 요람을 위해 일하던 그가 아니었던가.

이건 모두 알아야 하는 이야깁니다.”

한일은 단호하게 말했다.

모두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고요?

네.”

그렇게 대답한 한일은 자윤이 말리기도 전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날 밤, 저는 지선우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일은 현우가 병원에서 빠져나가는 걸 보았고, 그를 따라가다가 레온과 만나 합류하게 되었다. 둘은 드래곤 가까이 접근하는 데 성공했고, 또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사람은 지현우였다.

드래곤 쪽의 일행은 넷이었습니다. 바카디, 히드라, 드래곤, 그리고 정체 모를 사람 하나. 반면 반대편에는 지현우 씨 혼자뿐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지현우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주는 공포에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 레온이 나서서 바카디를 다른 곳으로 유인했다.

그래도 남은 적은 셋이다. 게다가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존재였다. 한일은 어떻게 해야 할까 망설였다. 전투 쪽에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지현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테이밍한 몬스터는 없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현우는 지지 않았다. 외려 이상한 힘을 사용해 가며 적을 압박해 나갔다.

이상한 힘이요?

네, 무척이나 이상했습니다. 그걸 보고 있자면 마치 누군가가 영혼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느낌이 났습니다. 공포에 잡아먹히는 기분.”

한일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레온 씨는 그걸 목격하지 못했습니까?

저는 떨어진 곳에서 바카디와 싸우느라 보지 못했습니다.”

그건, 그건 정말 이상한 힘이었습니다. 마치. 마치!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한일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람보다는 몬스터에 가까워 보였어요. 뭐라고 해야 하나.”

마족처럼.”

레온이 속삭이듯 말했다.

맞습니다. 마족처럼!

허황된 이야기였다.

113.

마족이라니. 지현우를 만난 시간이 길진 않았지만,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한일이 뭔가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자윤과 아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어쩌지?

당장은 묻어 두는 게 나을 것 같아.

눈빛만으로도 뜻은 통했다. 적어도 지현우와 만나 사실을 확인하기 전까지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가선 안 됐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은 게 그들뿐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먼저 입은 연 이는 자윤이었다.

아무래도 사건 직후라 한일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치료까지 해 주셨는데 이런 말은 죄송스럽습니다만.”

한일 씨는 좀 쉬어야 할 것 같아요. 저희는 나가서 이야기할까요?

자윤의 말을 아윤이 이으며 자연스럽게 아나이스와 레온을 밖으로 밀어 냈다. 하지만 레온과는 달리 아나이스는 그 자리에서 버티고 서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한일 씨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고 싶은데요.”

아나이스 님.”

자윤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건 내부 사정입니다.”

내부 사정인 건 알고 있지만, 때로는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는 일도 있답니다. 그리고 한일 씨의 지금 상태는 완벽해요. 저는 제가 치료한 환자의 상태를 명확히 알 수 있어요.”

아나이스의 주장에 레온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이런. 아나이스가 그렇다고 이야기한다면 저도 물러날 수는 없겠군요.”

처음 둘이 선뜻 물러나려고 했을 때, 한일의 입을 막았어야 했다. 자윤과 아윤이 난처해하는 상황에서도 한일은 끝도 없이 떠들어 댔다. 흥분한 듯 두서없었으나 중요한 내용만은 명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는 마족의 힘을 사용합니다!

현우는 마족의 힘을 사용한다. 마치 바카디처럼 말이다. 모든 이야기를 들은 레온은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거 심각한 이야기군요. 일단은 현우님 에게도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레온 또한 자윤들이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결론을 내렸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걸 아는데도 왜 불안한 거지?

아윤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손으로 누르며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는 정의로운 사람이다. 현우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합당하면 그에 맞게 행동할 것이다. 그걸 아는데도 불안함을 감출 수 없었다.

*

늦은 아침, 현우는 보호자 침대에서 눈을 떴다. 선우는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래도 얌전히 쉬어서 그런지 어제보다는 안색이 나아졌다.

현우는 잠든 선우의 뺨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최근 이런저런 일에 치이면서 동생에게 많은 관심을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이해심 많고 착한 아이였는데.

도진과의 관계를 납득시키려면 좀 더 천천히 접근해야 할 것 같았다.

당분간은 좀 쉴까.”

의사가 말하길 폭주의 후유증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한동안은 요양을 해야 된다고 했으니, 이번 일만 수습하고 동생과 쉬러 가자.

다른 사람은 전부 떼어 놓고 둘이서만 편안하게 지내는 것이다. 커다란 별장도 필요 없다. 자그마한 펜션이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선우의 얼굴을 매만지고 있자니, 그가 눈을 떴다.

형.”

그래, 선우야.”

옆에 있었구나.”

아픈데 옆에 있어야지. 어디 불편한 데는 없어먹고 싶은 건?

황도 캔.”

선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선우가 더 작을 때 가끔 열이 많이 오르면 슈퍼에서 황도 캔을 사 와서 따 주곤 했다. 예전에 부모님이 그러했듯이.

현우는 추억을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사 올게.”

황도 캔이라면 병원 내 편의점에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둘 사이에 추억이 많은데 어째서 선우는 불안해하는 걸까.

현우는 황도 캔을 사서 병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병실에 딸린 작은 주방에서 캔을 따고 그릇을 꺼냈다.

형.”

먹기 편하게 백도를 조각내고 있자니, 선우가 현우를 불렀다.

?

다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내미니 선우가 TV를 가리켰다.

뉴스.”

뉴스?

현우는 잠시 그릇을 내려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계속 같은 소식만 반복하기에 꺼 뒀는데, 선우가 다시 켠 모양이었다.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습니다곧바로 현장과 연결하겠습니다.』

이어 화면이 바뀌고 기자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여러분, 얼마 전에 있었던 드래곤과의 전투 목격자가 나타났습니다그의 이름은 이한일. 요람 길드의 길드원이라고 합니다. 지금 인터뷰를 위해 나와 계시는데요.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환자복을 입고 선 남자에게 마이크를 들이댔다.

『안 됩니다지금은 인터뷰를 할 수 없습니다!

몇몇 사람이 나와 기자들을 막아섰지만, 그들은 절대 비켜서지 않았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피라냐처럼 환자복을 입은 남자만을 노리고 뛰어들었다.

『그만!

그 소란 속에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그만하십시오.』

잠시 현장이 조용해졌다.

『모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리 말하는 남자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퀭했다. 그리고 그쯤 되어서 현우는 깨달았다. 저 남자는 그날 밤, 레온에게 공격당했던 그 남자였다. 이름이 한일이라고 했던가.

깨어났구나.

그를 돕기 위해 나서려 했는데, 스스로 일어나다니. 어지간해서는 마기를 제거하는 게 힘들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현우는 TV 화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는, 저는 진실을 알았습니다!

『무슨 진실 말입니까?

『지현우그에 대한 진실이요!

자신에 대한 진실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

뒤에서 선우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돌아볼 수 없었다.

『그는 마기를 다루고 있습니다타락한 다른 각성자처럼 말입니다겉으로는 정의로운 척하지만 실상은 우로보로스의 일원이었던 겁니다!

무슨 개소리람?

어처구니가 없는 소리였다.

『그는 빌런입니다!

한일은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내용은 고스란히 방송을 타고 전국에 퍼져 나갔다. 뒤늦게 나온 자윤이 기자들을 물리고, 한일을 끌고 들어갔지만 이미 늦었다.

?

선우가 재차 현우를 불렀다. 그제야 현우는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선우야.”

형, 저게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또 내가 모르는 이야기야?

일단 진정해 봐. 내가 말하지 않으려고 한 건 아냐.”

현우는 선우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그럼?

그냥.”

알리기 싫었다. 마기를 사용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 기간 동안 현우는 고통받았고, 그만큼 괴로워했다. 그걸 선우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그뿐이었다.

그냥형은 내가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애로 보여?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왜 이렇게 감추는 게 많아왜 내가 모르는 게 이렇게 많아처음에는 형이 온 것만으로 만족해서 모르는 척하려고 했어.”

알아.”

그런데 갈수록 나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되어 가.”

그런 게 아닌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둘이 실랑이를 벌일 때였다. 멀리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누군가 오는군.”

선우의 표정이 싸늘해졌다. 간호사나 의사의 발소리가 이럴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들은 누구란 말인가. 추측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헌터관리국.

매번 길드에 트집을 잡지 못해 안달이던 그들이 이제야 기회를 잡았다. 선우는 링거를 뽑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다행히 알베르크와 미리엘은 여기 있지 않았다.

중간부터 거슬렸던 터라 길드원을 시켜 다른 곳으로 이동시켜 놨다.

형.”

선우는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드드드득.

그와 동시에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휴대폰이 떨리기 시작했다. 누군가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이다. 현우가 그를 보며 망설이자, 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폰은 버려.”

현우는 망설이다 선우의 손을 잡았다.

돌입합니다. 하나, 둘, 셋!

숫자세기가 끝나자마자 헌터관리국의 각성자들은 병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이닥쳤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를 본 무혁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좀 더 상황을 두고 보자던 무혁의 말은 국장에게 막혔다.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현우를 잡아들이자 하였고, 그 때문에 각성자들은 뉴스가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달려와야 했다.

자리를 떠난 지 얼마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침대를 손으로 쓸어 본 각성자가 보고를 올렸다.

그래, 그럼 추척해 보도록 하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선우가 잡히질 않길 바랐다. 아직 제대로 받은 것도 없는데 잡혀선 곤란하다. 게다가 새로 손잡기로 한 평화 길드의 도진도 둘을 보호해 주길 원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지금은 수색을 질질 끄는 수밖에 없었다. 많이 끌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끌어도 둘은 알아서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곳이다.

무혁은 그리 생각했다.

114.

푸른 나뭇가지 위에서는 작은 새가 지저귀고, 창으로는 햇살이 스며든다. 집은 작았지만, 필요한 물건은 전부 있었기에 딱히 문제는 없었다.

아니, 문제는 그게 아니지!

현우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엉겁결에 선우에게 끌려와 이 작은 집에 갇히게 된 지 이틀. 여기엔 TV도 라디오도 폰도 없어 바깥의 소식을 알 수 없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책을 읽거나 뒹구는 것뿐이었다. 새삼 마음 편하게 봐 왔던 막장 드라마가 그리워졌다. 그동안 몸이 자극에 길들여진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머리를 엉망으로 만들다가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침대 위에서 떨어졌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완전히 굴러떨어지기 전에 선우가 붙잡아 주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형?

여기 오고부터 선우는 다시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

선우야.”

?

그게 그러니까.”

아, 점심점심은 고구마 그라탱이야. 형이 좋아했잖아.”

그래, 고구마 그라탱. 좋아하긴 했지.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우리 여기 이렇게 있어도 돼?

안 될 건 뭐람?

바깥은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차라리 튀지 말고 만나서 해명을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난리가 났겠지. 하지만 괜찮아, 형. 형한테는 내가 있잖아.”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빙그레 웃었다.

웃는 모습이 귀엽긴 하다만.

지나친 현실 도피`는 좋지 못하다. 이쯤 되어 현우는 슬슬 바깥일을 알아봐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선우야, 혹시 폰 있어?

있어.”

있구나. 그럼 형이 그걸 잠시만 봐도 괜찮겠니?

싫은데?

싫구나.”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을 뿐이다. 이내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는 작게 달린 주방으로 들어갔다.

고구마 그라탱의 마무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선우가 만든 고구마 그라탱은 무척이나 맛있었다. 원래도 맛있는 고구마에 치즈를 얹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문제는 지금 상황이지.

선우는 보란 듯이 폰을 꺼내 식탁 위에 두었다. 그러니 고구마 그라탱을 먹으면서도 자꾸 시선이 그리로 향한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낚아채서 인터넷 뉴스를 보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선우가 가만있지 않을 테지. 현우는 한숨을 삼켰다.

그때부터였다. 선우는 현우를 시험하기라도 하려는 듯, 종종 폰을 잊고 다녔다. 때로는 소파에, 때로는 식탁 위에, 화장실에 두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외출까지 하기 시작했다.

만지고 싶다.

손이 근질근질했다. 한일이 그 후 뭐라 더 말했는지도 궁금하고, 도진이 뭘 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심지어 가준의 일까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또다시 며칠이 지나고, 현우는 외출에서 돌아온 선우의 손을 꾹 붙잡았다.

잠시 이야기 좀 해.”

“……좋아.”

둘은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선우야. 이렇게 있어도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거 알지?

현우의 말에 선우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아니, 모든 건 내가 해결할 거야. 형은 여기서 편히 쉬고 있으면 돼. 이제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내가 가져다줄게.”

뭐든?

뭐든.”

노트북도?

어렵지 않지.”

선우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인터넷이 되는 노트북도?

그건 조금 어렵네.”

그럼 인터넷이 되는 휴대폰.”

그것도.”

인터넷이 되는 패드.”

이번에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은 대충 짐작이 갔다.

안 된다는 거겠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머리를 굴리는데 선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형은 나에게 할 말이 그런 거뿐이야나는 형에게 듣고 싶은 게 많은데.”

어떤 거?

정말 마기를 다룰 수 있어?

“……응. 하지만 그걸로 사람을 해쳐 본 적은 없어. 그건 그저 마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야.”

그리고?

가만히 듣고 있던 선우가 또 물어 왔다.

그리고?

그거 외에 또 감추는 건 없어?

감추고 있는 거라면 잔뜩 있다. 하지만 그걸 선우에게 전부 말하고 싶진 않았다. 마음이 여린 동생이 자신이 겪은 고통에 슬퍼할까 봐, 언제까지고 감추어 두고 싶었다.

말해 줘.”

그렇지만 지금 현우는 깨달았다. 선우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형, 감추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야.”

알고 있다. 그럼에도 감추고 싶었다.

그러니 이야기해 줘.”

어리기만 하던 동생은 이제 자라서 현우의 벽을 두드려 부수려 하고 있었다.

알았어. 대신 너도 이야기해 줘.”

나도?

그래.”

현우도 선우가 겪어 왔던 모든 이야기를 알고 싶었다. 남에게 듣는 이야기가 아닌 본인이 직접 하는 이야기를. 형제는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짧지 않은 밤을 이야기로 지새웠다.

힘들었겠다.”

형이야말로.”

아니, 네가 더.”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이야기하다 웃음을 터트렸다.

둘 다 힘들었구나.”

그러게.”

그런데 선우야. 정말 도진 형은 안 돼?

안 돼. 그런 사람에게 형을 맡길 순 없어.”

도진 형이 어때서?

현우가 입술을 삐죽 내밀자 선우가 그 입술을 자연스럽게 꼬집었다.

몰라서 물어형에 비해 많이 부족하잖아.”

형에 대한 평가가 너무 높은 거 아냐?

아니거든난 냉정하게 판단한 거야.”

아닌 것 같은데. 현우는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선우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 내가 어떤 사람을 사귀길 원하는데?

아름답고 우아하고 예쁘고 현명하고 상냥하면서도 따뜻한 사람.”

도진 형이네.”

아니거든?

둘은 잠시 투닥거리다 다시 늘어졌다.

그보다 형의 이야기대로라면 레온이 마족이라는 건데.”

선우는 잠시 레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어려운 일이네.”

그렇지. 그래도 어떻게든 해 봐야지. 외부에서 내 평은 어때?

그럴 리 없다는 의견이 반, 수상하다는 의견이 반. 그런데 날이 갈수록 수상하다는 의견 쪽에 힘이 쏠리고 있어. 일단 한일이라는 사람이 너무 떠들어 대고 있고, 거기에 레온도 은근슬쩍 거들고 있으니까.”

절로 주먹이 쥐어지는 소리였다.

어떻게 해결할 순 없을까?

이쪽에서도 나름 언론을 끌어들이고는 있는데, 상대가 상대라 쉽진 않지.”

자윤과 아윤, 가준이 이쪽 편을 들어 주고 있으나 미국의 레온을 상대로 하는 건 무리였다. 국내의 의견은 어떻게 바꾼다 치더라도 외국이 남아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형의 신변 양도를 요청했어.”

미국에서?

바카디와 같은 부류라면 우로보로스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히드라가 잡혀 있긴 하지만 그쪽은 어떻게 해도 입을 열지 않고 있거든. 정신 방벽도 높아서 정신 공격도 통하지 않아.”

그렇단 말이지.”

역시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움직여 보자!

형이 직접 움직이려고?

응. 왜안 돼?

난 말리고 싶은데.”

선우는 현우가 듣게 될 나쁜 이야기들을 경계했다. 형은 스스로를 강하다 여겼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노릇이니까.

괜찮아, 선우야.”

아니, 그런 말로 넘어갈 일이 아니야. 이것만은 계속 반대할 거야.”

난 그렇게 나약하지 않아.”

그래도 안 돼.”

선우는 고집을 부렸다. 현우는 어떻게든 그 고집을 꺾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익숙한 얼굴이 집을 찾아왔다.

좁군.”

미리엘이 말했다.

네 날개를 접으면 되지 않을까?

알베르크가 태클을 걸었지만, 미리엘은 꿋꿋했다.

내가 왜 굳이 날개를 접어야 하지?

그러면서 보란 듯이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나중에 현우한테 혼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두눈이도 왔네점박이도, 케로도.”

현우는 오랜만에 보는 몬스터들도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한 명 더 손님이 존재했다.

점박이에게 붙어 있던 그림자가 스르륵 커지더니 사람의 모습이 되었다.

현우야.”

도진이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선우는 냅다 공격을 날렸으나, 도진에게 명중하지는 못했다. 그가 그림자로 얼음덩어리를 삼켜 버렸기 때문이었다.

쥐새끼가 붙어 왔었군요.”

쥐새끼는 저보단 훨씬 작습니다만.”

장신의 남자 둘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그사이 알베르크는 총총걸음으로 다가와 현우의 팔을 끌어안았다.

둘 다 시끄럽지?

아니, 전혀.”

시끄럽기는커녕 제법 보기 좋았다. 저기서 살기만 빠진다면 더 좋을 텐데. 아쉬운 일이었다.

떨어지십시오.”

떨어져!

싸우다 알베르크를 발견한 도진과 선우가 이번에는 타깃을 돌렸다.

싫다면?

그런 둘을 약 올리려 한 알베르크였으나, 현우가 나서서 말렸다.

그만해. 여기서는 싸움 금지!

그제야 시끄럽던 방이 조용해졌다.

알던 사람 셋과 천족 하나, 마족 하나, 몬스터 셋은 원을 그리며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좁다니까!

미리엘이 다시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다들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115.

이야기의 주제는 금방 정해졌다.

어떻게 하면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도진이 입을 열자 미리엘이 손을 들어 올렸다.

마족은 천족으로 막아야 하는 법. 내가 천족을 부르겠다.”

기각!

어째서?

마족과 천족은 사이가 나쁘잖아. 괜히 불러왔다가 이곳에서 전쟁을 벌이면 힘들다.”

현우의 말에 미리엘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마족이 활개치고 있지 않은가.”

천족도 마족과 크게 다르지 않은 종족이라고 들었거든?

그건 오해다. 음흉하고 사악한 마족과 천족을 비교하지 마라.”

미리엘은 한참 동안 천족의 장점에 대해 열변을 토해 냈다. 하지만 그를 진지하게 듣는 이는 없었다.

다른 의견!

이번에는 알베르크가 툭 끼어들었다.

지금 잡혀 있는 히드라 말이야. 걔를 확보하는 건 어때?

색다른 의견이었다.

내가 레온이라는 녀석이라면 히드라를 죽이려 들 거다. 당장이야 입을 열지 않은 채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죽은 자만큼 입이 무거운 자는 없다.”

그러니 먼저 빼돌려서 자백을 받아 내자는 거야?

그래,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그 자백이라도 있는 게 낫겠지.”

나쁜 의견은 아니군. 히드라가 과연 쉽게 입을 열까싶긴 하지만.”

현우의 말에 알베르크가 씩 웃었다.

데리고만 오면 입을 열게 만들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지.”

자신만만한 태도였다.

그러면 최대한 빨리 움직여야 해. 지금 히드라는 미국으로의 이송이 결정된 상태야.”

도진의 말에 선우가 이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송을 책임지는 길드는 가디언 길드지.”

이송 수단은?

가디언 길드의 전세기를 사용한다고 해. 특성상 빌런의 이송을 자주 했기에 관련 시설도 설치되어 있다는군.”

선우와 도진의 입에서 번갈아 가며 정보가 나왔다.

그럼 히드라를 탈취한다, 로 결정된 거로군?

마지막은 알베르크가 마무리를 지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외부의 도움을 요청할 수 없기에 여기 있는 사람들만으로 계획을 진행하기로 했다.

그 와중에 미리엘은 참여하지 않겠다고 빠졌다. 반면 알베르크는 제법 적극적으로 참여를 주장했다.

너무 적극적이니까 의심스러운데.”

너무해, 현우. 날 못 믿는 거야?

알베르크는 두 손을 턱밑에 대고 초롱초롱한 시선으로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원래 모습이라면 끔찍했을 터이나, 지금은 미소년의 모습이다. 그렇다 보니 저런 행동도 제법 잘 어울렸다.

차마 손을 대기도 어려울 사랑스러움이었으나, 현우는 가차 없었다. 손날을 세워 그대로 머리를 내려친 것이었다.

히잉.”

뭐가 히잉이야제대로 말해!

현우는 냉정하군.”

알베르크가 투덜거리며 머리를 매만졌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그도 그렇지만.”

냉큼 손을 내리며 말하는 모습이 가증스럽다.

좀 더 자세한 일정과 내부 지도는 내가 알아볼게.”

그럼 나는 형과 같이 움직일래.”

도진과 선우는 경쟁적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도진 형, 고마워. 그리고 선우야, 넌 같이 갈 수 없어.”

?

네 능력은 알아보기 쉽잖아.”

능력을 안 쓰면 되지.”

그 자리에는 레온도 있을지 몰라. 그런데 능력을 안 쓰고 해결이 될까?

그렇다고 형을 혼자 보낼 순 없어.”

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혼자는 아닙니다. 제가 같이 갈 겁니다.”

아니, 그냥 나 혼자 갈게.”

그건 안 돼!

절대로 안 돼!

처음으로 둘의 의견이 맞아떨어졌다. 그렇지만 현우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둘 다 사회적인 지휘가 있는 사람이다. 혹시라도 들키게 되면 보통 문제가 아닌 것이다.

적어도 히드라를 이용해 레온의 정체를 밝혀내기 전까지, 둘은 끼지 않는 게 낫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기에 그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그리고 알베르크도 있으니까.”

겉모습은 저래도 엄연히 마계 서열 1위의 마족이다. 작정하고 나서면 사람으로서는 막아 낼 수 없었다.

하지만 알베르크도 마기를 쓰잖아. 잘못하다가 형의 정체가 드러나면 또다시 마족으로 몰릴 거야. 이번에 몰리면 더는 돌이킬 수 없다고.”

주먹만 쓰게 하지, 뭐. 그럴 거지?

알베르크는 생글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맹세하지.”

이후 도진과 선우는 현우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별 소용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흘러 히드라 이송 날이 되었다.

텅 빈 공항 안쪽의 화장실. 현우는 마스크를 쓰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폰을 툭툭 건드렸다.

연락용으로 받은 거지만, 인터넷도 된다.

제목: 정말 지현우가 마족과 손을 잡은 걸까?

제법 인기 있는 게시판에서는 현우에 대한 이야기로 한창 타오르고 있었다.

댓글

- 난 믿지 않아. 지현우가 뭣 하러 마족과 손을 잡겠어그리고 그는 테이머라고!

- 테이머치고는 너무 잘 싸우지 않아이번에 바카디를 잡는 영상을 봤잖아.

-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마족과 연관 짓는다고?

- 그건 아니지. 드래곤과 싸울 때 마기를 사용했다잖아.

- 그걸 주장하는 건 한일이란 사람 하나뿐이잖아. 그걸 완전히 믿어도 돼?

- 하지만 그 일 이후 지현우는 모습을 감췄는걸결백하다면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거 아닐까?

- 그냥 형을 아끼는 지선우가 숨겨 둔 거 아닐까형제애가 보통이 아니던데.

- 앗, 그거 가능할지도 모르겠다그런데 다른 길드들은 뭐 하는 거야한국의 각성자가 위기에 처했는데 가만있는 거야?

- 그건 아냐. 내가 요람 길드의 사무원인데 여기도 요즘 한창 바빠.

- 가만있는 게 어때서애초에 마기를 사용한다면 빌런인 셈이잖아?

-아니라니까!

게시판은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선우는 폰을 건네주면서 절대 다른 건 보지 말라고 했지만, 호기심이 당부를 이겼다.

음, 그래도 이 정도면 무난한걸?

딱히 상처받을 정도는 아니다. 의견을 나누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온건하다.

일단은 오늘 일부터 해결하자.

히드라, 카이를 빼돌린다. 이제 와서 예전의 이름은 잘 생각나지 않는다. 나름 예뻐하며 지어 주었던 이름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러니 이름도 바꾸고 적이 된 것이리라.

[곧 가디언 길드의 전세기가 도착.]

화면에 떠오르는 문자를 확인한 뒤, 폰을 안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그런 뒤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끼우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소리 들려?

도진이었다. 선우는 지금쯤 다른 길드의 길드장들을 만나고 있을 것이다.

히드라의 탈취, 그리고 국내 길드장들의 설득. 그게 이번 목표였다.

현우는 깊게 숨을 쉬고는 변기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미리 뜯어 둔 천장으로 들어갔다. 길은 이미 알고 있기에 천천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히드라가 있는 방 옆까지 접근했다.

문 앞에는 헌터관리국에서 파견된 사람 몇이 서 있었다. 그중에는 무혁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과는 싸워 보지 못했네.

현우는 입술을 축이고 발아래 있는 천장을 슬며시 뜯어냈다. 그러고는 그대로 몸을 아래로 떨어트렸다.

침입자를 눈치챈 각성자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현우에게 닿아 온 건 무혁의 공격이었다.

뜨거운 불꽃이 현우에게 쏟아졌다. 그걸 손을 휘둘러 날려 버리고, 무혁에게 주먹을 내뻗었다. 진심으로 내뻗은 주먹이었으나, 무혁은 그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냈다. 그리고 재차 공격하려 했으나, 현우는 그의 겨드랑이 밑으로 몸을 빼 뒤로 이동한 뒤였다.

현우는 무혁이 돌아보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려는 다른 각성자를 후려쳤다. 한 명이 기절. 이어 무전기를 들고 있는 두 번째 각성자의 목을 졸랐다.

숨이 통하지 않으니 곧 정신을 잃는다. 그사이 무혁이 다시 접근해 왔지만, 이 정도쯤이야. 현우는 연신 쏟아지는 공격을 팔다리만으로 막아 냈다.

이쯤 되면 소리를 지를 만도 한데.

무혁은 아까부터 입을 다물고 있다. 그리고 현우를 문가로 몰아가고 있었다.

미리 선우에게 들었던 대로다.

밀리듯 움직인 현우는 마지막으로 무혁의 턱에 주먹을 날리고는 문 안으로 뛰쳐 들었다. 다행히도 레온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얼굴에 주근깨가 박힌 여성 하나가 히드라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아나이스!

힐러면서 무슨 배짱으로 앞을 가로막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그대로 아나이스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치워 내고자 했다. 하지만 아나이스는 손에 든 지팡이로 공격을 전부 막아 냈다.

아무리 가볍게 공격했어도 공격을 한 상대가 현우였다. 그런데 이리 쉽게 막아 내다니. 뭔가 이상하다.

드디어 왔군요.”

아나이스가 상냥하게 말했다.

올 것 같았답니다.”

그러고는 입을 벌렸다. 기이할 정도로 늘어난 입꼬리가 귀 아래 걸렸다. 그 사이로 드러난 이빨은 몬스터의 것이 생각날 정도로 날카롭고 뾰족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그제야 현우는 뒤로 물러나며 아나이스를 노려보았다.

넌 누구지?

아, 잊으셨겠군요. 하긴, 저 같은 존재를 기억하실 리가요!

아나이스는 손을 입가에 대고 요조숙녀처럼 웃어 보였다.

제 본명은 아이나스. 마계에서 소박하게 치료사 일을 하고 있던 마족이랍니다. 딱히 서열에는 관심이 없어서 서열은 없습니다만.”

마계의 치료사 아이나스. 그녀는 다른 존재를 치료하는 데 관심이 많으나, 그 누구도 그녀에게 치료받기를 원하지 않았다.

치료의 방식이 괴팍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뛰고 싶어요.

그러면 다리를 두 개 더 달아 주겠습니다. 더 빨리 뛸 수 있을 겁니다.

대충 요약하자면 매드 닥터다.

116.

공항의 경비를 맡게 된 지헌은 내부를 누비는 소년 하나를 발견했다. 너무 당당하게 누비고 있는 탓에, 다른 이들도 멀뚱히 쳐다만 보고 있었다.

누구야?

관련자인가?

외양만 봐도 각성자 같아 보였다. 각성하면 대부분 외모도 더 나아지니까 말이다. 아니라면 저런 외모가 나올 리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누군지는 물어봐야겠지?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헌은 동료 경비원과 소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지금 공항은 통제 중입니다. 신분은 알려 주십시오.”

지헌의 말에 소년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뭐지?

옆을 보니 이상한 방향으로 꺾인 팔 하나가 보인다. 그건 자신의 팔이었다.

아, 아아.”

지헌은 비명을 지르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곧바로 명치를 걷어차이며 정신을 잃었다. 이후 다른 경비원들도 소년, 알베르크에게 달려들었다.

알베르크는 그런 사람들을 날파리라도 쳐내는 것처럼 휙휙 던져 버렸다. 그렇게 던져진 사람들은 몸의 한 부분이 부러져 있었다.

이 정도면 되려나.

적어도 놀지 않았단 증거는 될 것이다. 알베르크는 이쯤에서 손을 털었다. 제일 뒤쪽에 있던 경비원이 도망치는 걸 보았지만, 쫓지 않았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알려 줘야 할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 부분은 현우와 얘기했던 사항이 아니다. 알베르크가 멋대로 굴고 있는 것이다.

슬슬 시간이 되었군.”

저 멀리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진다. 아마 레온과 그 일행일 터였다. 이제 알베르크의 역할은 끝났다. 그는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현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전부 필요한 일이었다.

아이나스는 강한 마족은 아니었지만, 상대하기 까다로운 축에 속했다. 게다가 싸우기보다는 도망만 다녔다. 그러다 히드라에게 다가가면 공격을 한다. 척 봐도 시간을 끌려는 행동으로 보였다. 자연 초조해지는 건 현우였다.

안 되겠다.

현우는 다시 마기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방 안을 빙글빙글 돌던 아이나스를 붙잡았다. 그런 후 히드라에게 다가가 그의 결박을 풀어냈다.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따라와.”

의외로 히드라는 반항 없이 얌전히 움직였다. 그렇게 모든 일이 조용히 해결되는가 싶었다. 그때, 내내 조용하던 히드라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멍청하긴.”

?

함정에 뛰어든 게 멍청하다 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외부에서 수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현우는 아이나스를 상대하면서도 외부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거기다 도진도 주변을 살피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상대 쪽에서 무슨 수를 쓴 모양이었다.

꺄아악!

아이나스는 어느새 아나이스의 모습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창문의 블라인드를 걷자 저 아래 우글우글 모인 사람들이 보였다.

대부분이 각성자였지만, 일반인들도 끼어 있었는데 카메라를 들고 있는 걸 보니 기자 같았다.

─ 현우야!

도진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됐다. 모든 것은 계획대로다.

일단 마기를 거둬들인 현우는 아나이스를 놓아주었다.

!

바닥에 떨어진 아나이스가 엄살을 부렸다. 그 엄살이 끝나기도 전에 단단히 닫혀 있던 문이 열리며, 레온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뒤에는 가디언 길드와 헌터관리국의 각성자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레온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까요지현우 씨.”

역겨우니까 내 이름 부르지 마.”

역겨운 건 그쪽이죠. 바카디와 마찬가지로 마기를 사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같은 마기라도 사용 용도에 따라 다르지.”

그렇다 해도 그 힘이 마족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달라지는 건 아닙니다.”

레온이 옆으로 살짝 비켜서며 말했다. 그 자리에는 처음 보는 남자 하나가 섰다. 안경을 쓴 지적인 외모의 남자는 헌터관리국 정보부의 이영진이었다.

실망이군요. 지현우 씨. 그런 힘에 손을 뻗다니요. 그건 용납될 수 없는 힘입니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못 믿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영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우리 대한민국은 지현우 씨의 신변을 미국에 양도하는 데 동의합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행태였다. 현우는 오늘 잡힌 셈이었는데, 당일 미국에 넘기는 데 동의하다니. 이건 미리 말이 되어 있다는 소리 아닌가.

보통은 국내에서 먼저 취조를 할 텐데. 고국의 인물을 믿기보다 미국에 기대는 걸 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래 계획은 이대로 얌전히 잡혀가는 거였지만, 어쩐지 심술이 돋았다. 현우는 주먹을 손으로 덮고 우득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당당하게 개소리를 지껄이던 영진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싸울 생각입니까?

그렇다면?

상대해 드려야죠.”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현우는 손에 잡히는 책상을 레온에게로 던졌다. 그리고 잠시 시야가 가려진 사이, 레온에게 가까이 접근하여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레온은 그리 쉽게 맞아 줄 이가 아니었다.

레온이 뒤로 물러나자마자 밖에 있던 각성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그리고 현우를 제압하기 위해 나섰으나, 미친 듯이 날뛰는 그를 쉽게 잡아 낼 수는 없었다.

으아아악!

그래도 손속은 조정했기에, 화려하게 날뛴 것치곤 심한 부상자는 없었다. 나중에는 무혁과 레온, 아나이스가 힘을 합쳐서야 간신히 현우를 붙들어 둘 수 있었다.

그사이 히드라는 다시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그날, 미국으로 향하는 전세기에 올라탄 사람은 현우 하나뿐이었다.

*

말렸어야 했는데.”

선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이 걱정돼서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미국으로 건너가 형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참으십시오.”

그런 선우를 도진이 말렸다.

당신은 왜 그리 태연한 겁니까?

날이 선 말이 도진을 찔러 댔다.

“……그래 보입니까?

사실 초조하고 불안한 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현우가 괜찮다고 우기고, 우겨서 실행한 계획이었지만 걱정되지 않을 리 없었다. 무려 적의 내부로 들어갔으니 말이다.

그렇습니다.”

도진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저는.”

거기서 도진은 말을 끊었다. 그리고 다시 말을 이으려는 순간,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안으로 들어왔다.

어때요, 계획대로 진행 중인가요?

아윤이었다.

네, 지금까지는 계획대로입니다.”

그럼 저희도 빠르게 움직이죠. 미국행 비행기를 수배해 놨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어떻습니까?

한일 씨요?

네.”

아윤의 표정에 난처함을 담았다.

어떻게든 데려와야 하겠는데, 문제는 주변에 기자와 각성자가 너무 많아요. 지금 실종되면 여러모로 문제가 될 거예요. 그래서 상황이 좀 더 진행된 다음, 설득해서 데려오기로 했어요.”

설득이 될까요?

안 되면 조금 난폭하게 나가야죠.”

한일의 이상은 자윤과 아윤도 알아차렸다. 하지만 레온이 비호하는 탓에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그러던 차에 도진과 선우에게 이번 일의 진상에 대해 듣게 되었다.

처음에는 믿지 못해 망설였지만, 이제는 그게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안다. 레온의 행동에 이상한 점이 있음을 그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요람 길드 내에만 존재하는 특이한 각성자를 통해 검증을 마쳤다.

진실의 저울. 그 각성자가 가진 능력이었다. 상대가 거짓을 말하면 저울이 기울면서 타격을 입힌다. 하지만 도진도 선우도 멀쩡했다.

문제는 그것만으로는 레온이 나쁜 존재라는 걸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많은 공적을 세워 왔기에 이 정도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일단 일어나요. 비행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저희가 준 폰은 단단히 챙기시고요. 모든 정보는 그리로 보낼 거예요.”

외부로 정보가 샐 염려는 없습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 만든 기계랍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아뇨. 지구를 위한 건데요. 이렇게 말하니 무척 닭살스럽고 어색하지만요. 지구방위대가 된 느낌인걸요?

아윤이 작게 웃으며 답했다. 둘의 부담감을 덜어 주려는 생각에서 농담을 한 듯했다.

둘이 방을 나서자 밖에서는 가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미리 말하지.”

가준이 서운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보다 미리엘과 알베르크는 어디 있습니까?

백호 길드의 안가에 모셔 놓았지. 그런데 이번엔 그 둘은 빼고 가려고데려가는 게 도움 되지 않나?

믿을 수가 없습니다.”

현우는 알베르크를 믿지 않았다. 그동안 말을 잘 따라 주긴 했지만, 본질이 마족인 터라 온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최근 이유 없는 외출이 몇 차례 있었다. 그렇기에 표면적인 정보만 알려 주고, 그 뒤에는 안가에 박아 두라 일렀다. 더불어 미리엘을 붙여 놓으라 하였다.

아직 애송이이긴 하지만, 마족의 기척을 읽어 내는 건 인간보다 능숙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서는 알베르크보다 미리엘이 더 믿을 만했다.

알았어. 그럼 나는 알베르크와 미리엘만 감시하면 되는 거지?

네.”

따라가고 싶었는데.”

하지만 미리엘이 당신을 더 잘 따르지 않습니까?

그 무슨 소름 끼치는 소리를!

가준이 손으로 팔뚝을 긁어내렸다. 하지만 도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동안 계속 가준이 돌봐 줘서 그런지 미리엘은 그와 있을 때 마음을 더 잘 열었다.

117.

영웅의 사슬. 한때 현우를 괴롭혔던 아이템이 다시 그를 속박했다. 그 상태로 네모난 큐브 형태의 방에 갇혔다. 하지만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사방을 각성자가 지키고 섰다.

아주 작정했군.

현우는 혀를 찼다. 그래도 이 안의 상황을 선우나 도진이 알 수 없어 다행이다. 둘 다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알기에 이런 모습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후회할 거야.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릴없이 멍하게 졸고 있자니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하니 보기 좋군요.”

레온의 목소리였다. 현우는 눈꺼풀을 들어 올려 그를 노려보았다. 레온은 구속당한 현우의 맞은편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디서 내려다봐!

몸만 자유로웠으면 두들겨 팼다.

참 우습지 않습니까자신들의 적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당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당신의 고국은 당신을 버렸습니다.”

그게 뭐?

그렇게 추켜세우다가 순식간에 마음을 바꾼 겁니다.”

속살거리는 소리가 마음을 흔들려고 했다. 그 때문에 현우는 레이의 왜 저러는지 알게 되었다. 그는 현우가 같은 인간을 증오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서 말입니다.”

알고 있다. 알고 있음에도 현우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애초에 현우는 사람에게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마계에서 상황에 따라 비열해지는 사람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나약하다. 위기에 처하면 다른 사람을 희생양으로 던지는 걸 서슴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소수에 불과했다.

그걸 알면서도 레온의 정체를 밝히고 세상을 구하려고 하는 건 모두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선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도진의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 가준에 이르러서는 조금 고민했지만, 그가 불행하기를 원치 않았다.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 두들겨 패긴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어떻게 보면 인간이 마족보다 더 사악한 것 같습니다.”

레온이 뱀같이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현우는 다시 눈을 감았다. 들어서 좋은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

갑자기 들어온 소식에 앰버는 마시던 차를 도로 내뱉었다.

풉, 지금 뭐라고요?

지현우가 빌런으로 밝혀져 미국으로 이송되고 있다 했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남자가 불쾌한 얼굴로 얼굴을 닦았다. 그러나 앰버는 사과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뭔가 잘못 안 것 아닌가요지현우 씨는 그럴 사람이 아닙니다.”

만약 그날 현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사람이 바카디의 손에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중앙 본부가 제 역할을 못 하게 되었으면, 다른 지역에서 싸우는 각성자들도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그런데 그렇게 도와준 사람이 빌런이라고?

앰버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믿으셔야 합니다. 레온 님이 직접 목격하셨다 하셨습니다.”

레온 님이요?

그렇습니다.”

남자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레온 님이 뭔가 잘못 아신 게 아닐까요.”

지금까지 현우가 해 온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남자의 대답은 차가웠다.

지금 레온 님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그렇지 않다. 자신은 레온 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다. 그렇게 말해야 함을 아는데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한때 아는 사이라서 흔들리는 건 이해합니다. 그래도 공과 사는 확실히 나누십시오, 앰버.”

네.”

남자는 그 말만을 남기고 되돌아섰다. 뒤에 남은 앰버는 손으로 머리카락을 헝클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럴 리 없어.

뭔가 잘못됐다. 앰버는 상황을 좀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했다. 그리고 현우가 잡힌 이유가 마기를 사용했기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그건 마치 바카디와 같았다.

하지만 피해를 입힌 거라고는 공항에서 사람들을 밀쳐낸 것뿐이잖아?

그 난리를 쳤음에도 크게 부상입은 사람은 없다고 하였다.

앰버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어릴 적에 가졌던 버릇으로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위급하니까 다시 튀어나온다.

앰버는 레온을 믿고 있었다. 그가 이뤄 온 업적 덕분에 사람들은 몬스터의 위협을 피해 좀 더 편안히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정의로운 사람이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현우가 생각이 났다. 망설이던 앰버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신청을 했다. 그리고 다급히 차를 몰아 가디언 길드 본부를 벗어났다.

그 상태로 외곽에 위치한 한적한 마을에 도착한 앰버는 한 집의 벨을 눌렀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온화한 인상의 노인이 밖으로 나왔다.

오오, 앰버. 이게 얼마 만이니?

잘 지내셨어요, 할머니?

2세대 실종자 이후 간헐적으로 자연 각성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리고 앰버의 할머니는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각성이라니. 농담도.”

물론 앰버의 할머니는 그걸 농담으로 취급했다. 몸이 좀 더 건강해진 건 맞으나, 흔히 보는 각성자처럼 대단한 일을 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였다.

할머니, 부탁이 하나 있어요. 이 사람 사진 좀 봐 주실래요?

YES or NO.

그녀는 원래도 가지고 있던 감이 강해졌다. 그 정도로는 대단한 건 할 수 없었으나, 일상에는 제법 큰 도움이 되었다.

앰버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현우의 사진을 할머니에게 보여 주었다.

오, 예쁘장하게 생긴 소년이구나.”

청년이에요.”

이런, 아시아 사람은 젊어 보여서 나이 가늠이 힘들다니까.”

할머니는 안경을 고쳐 쓰며 사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앰버는 물었다.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요?

나쁜 사람이냐고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빌런일까요?

빌런이면 사회를 망치는 나쁜 사람들 말이지아니란다.”

모든 사람이 할머니의 능력을 의심할 때, 앰버만은 확신했다. 할머니는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특히 각성 이후엔 더 명확해졌다. 그런 이유로 확신했다.

지현우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는 것이다. 앰버는 이 사실을 레온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레온은 공정한 사람이니까 앰버의 말을 들으면 현우에 대해 다시 생각해 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할머니의 집을 나섰다. 그리고 다시 차에 타려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앰버는 조심스럽게 차에서 손을 떼고 뒤로 물러났다. 할머니처럼은 아니지만, 강한 정신계 각성자인 앰버 또한 가끔 감이 오곤 했다.

누가 차에 손을 댔다.

슬며시 물러나 몸을 숙여 차 아래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엔 멀쩡해 보이나 머리가 찡할 정도로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몸을 세운 앰버는 일단 차와 떨어졌다.

이제 어떻게 돌아가지?

고민하다가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디언 길드 본부를 떠올렸다. 일단은 그곳으로 찾아가야 할 것 같았다. 걸어가기엔 다소 거리가 있는지라, 이동 수단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가로등 아래 널브러져 있는 낡은 자전거를 보았다.

자전거를 타 보긴 오랜만인데.”

앰버는 자전거에 몸을 싣고 힘차게 페달을 밟았다. 다행히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

가디언 길드의 전세기가 떠나자마자 선우와 도진도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과 같이 전세기가 아니기에 시간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지나가는 시간이 초조해 비행기 안에서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도착이군요.”

일단 미국에는 도착했다.

선우와 도진은 요람 길드가 건네준 자료를 살펴보았다. 자료에는 그동안 레온의 행적이 적혀 있었다. 둘은 그중에서도 특히 자주 들르던 곳 위주로 조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일단 역할을 반으로 나눕시다. 한 명은 서류에 적힌 장소를 확인하고, 다른 한 명은 가디언 길드를 감시하기로 하죠.”

그럼 제가 가디언 길드로 가겠습니다.”

도진이 나서자, 선우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디언 길드로는 제가 가겠습니다.”

숨어서 지켜보는 건 제가 전문입니다.”

참으로 음흉한 능력이군요.”

이런 상황에서도 둘의 사이는 좋아질 수 없었다. 그래도 거기에 달린 것이 현우의 안위인지라 결국 선우가 뒤로 물러났다.

최대한 빠르게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리 말하며 선우는 조심스럽게 동행한 선현 길드의 길드원 일부와 함께 이동했다. 선현 길드의 길드원은 대부분 선우만을 보고 가입한지라, 충성도가 무척 높았다. 사전 설명이 부실함에도 그를 돕기 위해 나서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반면 평화 길드는.

그들 또한 도진을 보고 모여든 사람이었지만,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원래 힘들게 살았던 사람이 많다 보니, 같이 나아가기보단 외려 도진에게 기대려는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대신 아윤이 요람 길드에서도 은신 능력이 뛰어난 사람 몇을 붙여 주었다.

이제는 움직일 시간이었다.

118.

잡혀 들어온 현우를 감시하는 이들은 매일 바뀌었다. 하지만 심문을 하는 이들은 고정되어 있었는데, 볼수록 기분이 나쁘기만 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인간이기를 거부하며 마기를 받아들인 빌런이기 때문이었다.

용케 감추고 사네?

비아냥거리는 현우의 말에 심문을 위해 들어온 여성이 방긋 웃었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난 적어도 남에게 피해를 준 적 없어.”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저런, 그런 바른 사람이 여기 잡혀 와 있으니 답답하겠군요?

놀리냐?

어머, 전혀요?

여성은 진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고는 레온이 그러했듯이 밖의 소식을 알려 주었다.

당신의 인생은 끝났어요. 이미 빌런으로 찍혔으니 말이죠. 빌런을 옹호하는 선현 길드 건물 앞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고 있어요. 선현 길드의 길드원은 더 이상 부러운 자리가 아니죠. 시민들에게 테러를 당하거든요. 듣기로는 길드장과 부길드장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던데.”

현우에게 처참한 진실을 알려 주었다.

믿지 않는다.”

세상은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죠. 그러고 보니 한도진과도 친한 사이였죠평화 길드 길드도 파탄 난 거 아세요?

여성은 끊임없이 현우의 귀에 나쁜 소식을 속살거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계속 듣고 있으면 마음이 울렁였다.

어떻습니까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되어 가는 것 같습니까?

레온의 말에 휴대폰 너머에서 답이 돌아왔다.

─ 그래.

이미 세상은 지현우를 버렸습니다. 죄도 없는데 별별 루머가 다 돌고 있지요. 대부분은 저희가 작업한 것이긴 합니다만.”

─ ……현우의 상태는 어떻지?

괴롭지 않을까요. 인간들이란 혼자서는 살아가지 못하는 존재니까요. 곧 세상에 대해 증오를 품게 될 겁니다.”

─ 과연 그럴까?

그럴 겁니다. 저는 약속은 꼭 지키는 마족이니까요. 그보다 그쪽도 슬슬 움직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지현우에게는 아직 이 세상에 남은 미련이 있지 않습니까.”

─ 그건 아직 생각 중이다.

사랑 앞에서는 위대한 분도 별수 없군요.”

레온은 입꼬리를 올리며 히죽 웃었다.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하지만 이렇게 대답해도 결국엔 알베르크도 움직이게 될 터였다. 마족이란 결국 그런 존재니까.

미리엘은 오늘따라 따뜻한 핫초코가 먹고 싶었다. 하지만 평소에 핫초코를 만들어 주는 가준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가준이 했으니 자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미리엘은 그렇게 생각하며 부엌에 들어서다 통화 내용의 일부를 엿들었다.

휴대폰?

가준은 미리엘에게도 알베르크에도 휴대폰을 주지 않았다. 급한 연락이 있으면 누르라며 작은 리모콘 같은 기계를 건네준 게 다였다. 물론 본인이 흥미가 있다면 휴대폰을 구해서 사용할 수 있겠지만, 뭔가 의심스럽다.

상대는 마족이니까.

미리엘은 핫초코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존재감을 흐리게 만들었다.

지현우란 인간의 상태를 물었어.

현재 미국에 가 있는 사람은 지선우와 한도진이다. 그럼 알베르크는 그 둘 중 한 사람과 통화한 것일까정석적으로 생각하면 그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이건 천족으로서의 감이었다. 미리엘은 끝까지 대화를 엿듣고서야 기척을 되돌렸다.

미리엘?

비켜라, 마족.”

부엌에는 무슨 일이지?

핫초코를 만들어 먹을 것이다.”

그 말에 예리하던 알베르크의 기세가 줄어들었다.

만들 수는 있고?

만드는 건 많이 봤다.”

그래, 알아서 해 먹어라.”

그 말과 함께 알베르크는 부엌을 떠났다. 남은 미리엘은 말한 것이 있으니, 시늉이라도 내기 위해 핫초코 가루를 꺼내 들었다.

우유를 데워서 타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

하지만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니 제대로 될 리 만무했다. 결국 핫초코를 완성하긴 했으나, 맛이 미묘하게 씁쓸했다. 게다가 부엌은 엉망이 되었으니 가준이 돌아와 머리를 짚을 건 정해진 미래였다.

자, 이제 이걸 어쩐다.

가준에게 말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잘못하다간 대화를 엿들었던 걸 들킬 수도 있었다. 알베르크는 마계에서도 알아주게 강한 마족이었으니까. 미리엘은 엉망이 된 핫초코를 마시면서 고민에 빠졌다.

*

와아, 와아!

앰버는 숨을 몰아쉬며 가디언 지부 근처에 자전거를 세웠다. 오래된 자전거라 그런지 삐걱거리는 통에 제대로 몰기도 힘들었다. 차라리 달릴까도 싶었지만, 정신계 능력을 가진 그녀는 다른 각성자에 비해 체력이 뛰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도착했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지부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췄다. 감이 좋지 않았다. 예전에 바카디가 중앙 지부로 쳐들어왔을 때야 아무리 감이 안 좋아도 버텨야 했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위험하면 가지 않는 게 맞았다.

하지만 왜?

고작해야 변두리의 작은 지부일 뿐이다. 그런데 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까. 앰버는 침을 꿀꺽 삼켰다.

어떻게 해야 하지?

가서 정보를 알아봐야 할까, 도망쳐야 할까. 망설이는데 갑자기 지부의 문이 열리며 사람 하나가 뛰쳐나왔다.

그는 입을 열고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그 비명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졌다. 안에서 튀어나온 무언가가 남자의 목을 잡아채 도로 안으로 끌고 들어간 것이다.

지부에 누군가 침입했다!

전화, 전화가 필요했다. 앰버는 천천히 발걸음을 뒤로 물렸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렇게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이어 다시 뛰쳐나온 인영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

앰버는 필사적으로 바닥을 굴러 공격을 피해 냈다.

어머, 새로운 손님이네?

눈앞에는 기다랗고 까만 머리카락의 여성 하나가 서 있었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다.

어디서 봤더라?

그러나 생각을 지속할 시간이 없었다. 여성은 곧바로 다음 공격을 퍼부었고 앰버는 필사적으로 피했다. 그러면서 필사적으로 공격을 했다. 정신계 능력자이기에 할 수 있는 건 상대의 뇌를 헤집는 것뿐이었지만, 통하기만 하면 그 무엇보다 효과적이다.

통하기만 한다면 말이지.

앰버는 이를 악물었다.

재밌네. 하지만 이런 건 통하지 않아.”

여성의 손이 앰버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이대로 죽는 걸까.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리고 막 기다란 손톱이 앰버의 이마에 박히려는 순간,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운이 좋네.”

여성, 티아매트는 앰버를 두고 뒤돌아섰다.

오랜만이야?

그곳에는 몇 번인가 얼굴을 맞댔던 선우가 있었다.

여긴 어떻게 왔대.”

우연히.”

우연히?

선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외곽에 위치한 작은 지부치고 레온의 출입이 잦았다. 그렇기에 첫 번째로 여길 들르기로 했던 것뿐이었다.

낡은 자전거 때문에 앰버의 이동은 느렸고, 선우의 이동은 빨랐다. 그렇기에 이뤄진 기적이었다.

지선우조심해요. 이 여자, 강해요!

압니다.”

선우는 즉각 주변을 얼리며, 물방울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물방울은 금방 얼어 얼음 조각이 되었고, 그 자리에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다들 방심하지 마십시오.”

!

레나와 묵현이 무기를 꺼내 들며 선우의 뒤편에 섰다. 그 모습을 본 티아매트는 작게 웃었다.

나도 쉽게 보인 모양이네.”

이어 손톱을 뽑아낸 채 선우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티아매트가 간과한 게 있었다. 그동안 선우는 그녀에게 이긴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땐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은 혼자가 아니라 다른 길드원을 데리고 있었다.

1팀장인 아인, 2팀장인 레나. 둘은 선우를 동경하여 길드에 들어와 그 누구보다 많이 던전을 격파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들의 연계는 더욱 섬세해져 갔고, 여기서 그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티아매트가 선우의 공격을 피해 뒤로 움직이면 그 자리에는 레나가 있었다. 그마저 피하려 들면 아인이 압박을 한다. 그 외에 동원된 길드원들은 멀리서 지원사격을 했다. 지금 그들은 레이드를 하고 있었다.

쳇.”

혀를 차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결국 티아매트는 몸을 원상태로 돌렸다.

그래, 이래야 싸울 맛이 나지!

레나가 외치며 힘차게 무기를 들었다.

거대 몬스터는 내 전문이다!

아인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을 보며 티아매트는 오랜만에 위기감을 느꼈다.

괜찮으세요?

길드원 중 하나가 앰버에게 다가와 물었다.

네, 괜찮아요.”

그냥 몇 차례 굴렀을 뿐이다. 앰버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전한 곳으로 위치를 옮겼다.

그러고 보니 저들은 왜 여기 있을까?

지금쯤 현우를 빼내려 애쓰고 있어야 하지 않나. 어째서 여기서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걸까. 앰버는 생각을 더듬어 정리했다. 그 결과, 결론이 나왔다.

현우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기기 위한 무언가가 여기 있구나.

그래, 지부에서 몬스터가 뛰쳐나왔을 때부터 뭔가 이상했다. 앰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저들이 싸우는 걸 도와줄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걸 해야 했다.

저는 지부를 조사할게요.”

위험할 수도 있으니 같이 가겠습니다.”

감사해요.”

하지만 이 난리가 나고도 아무도 나오지 않는 걸 보니 더 이상 적이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앰버는 확신하며 지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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