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이대로 밤이 계속 이어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밖에 그림자가 어른거리기 전까지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도진이 그림자로 선우가 누워 있는 침상을 감싸고, 현우가 튀어 나갔다. 그리고 막 창문을 깨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야, 나!”
알베르크였다. 현우는 급작스럽게 멈추느라 그대로 벽을 들이받을 뻔했다.
“윽!”
어떻게 멈추긴 했으나, 조금만 더 힘을 줬으면 벽에 구멍을 뚫었을지도 모른다. 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창문을 열었다.
“알베르크?”
평소보다 몸을 조금만 키운 점박이가 알베르크를 태운 채 허공에서 파닥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도 될까? 더 있으면 누군가에게 들킬 것 같은데?”
“……들어와.”
현우가 창문에서 비켜 서자 허공에서 뛰어오른 알베르크가 자연스럽게 창문 사이로 들어왔다. 이어 몸을 작게 만든 점박이가 따라 들어 왔다. 그런 점박이의 꼬리에는 케로와 요정이 매달려 있었다.
“으아아악!”
“왕왕!”
케로는 바닥에 내려서자마자 꼬리를 맹렬하게 흔들었다. 과거의 무시무시한 몬스터 케로베로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죽을, 죽을 뻔했습니다! 현우님, 글쎄요. 알베르크 님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십니까?”
요정이 열심히 하소연을 했지만, 아무도 그걸 들어주지 않았다. 몇 번인가 더 소리쳐 보던 요정은 시무룩해진 표정을 지은 채 구석으로 향했다. 지금 그는 케로만도 못한 존재였다.
“두눈이는?”
“이야기하자면 긴데.”
“급한 일이 생긴 게 아니면 시간은 많아.”
“그럼 천천히 이야기해볼까? 어? 그런데 지선우는 왜 이 꼴이래?”
“……그럴 일이 있었어.”
손가락으로 지선우를 쿡쿡 찌르던 알베르크가 눈을 반짝 빛냈다. 하지만 그건 지나치게 짧은 순간이라 아무도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손가락 부러지고 싶지?”
“아니.”
알베르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지선우에게서 손을 뗐다. 그리고는 우아하게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목이 마른데.”
현우는 말없이 비치된 작은 냉장고를 열고 음료수 하나를 꺼내 던져 주었다.
“난 따뜻한 게 좋은데.”
“아무거나 마셔.”
“너무해. 내가 현우를 위해 중요한 정보를 알아 왔는데.”
알베르크는 투덜거리면서도 음료수의 뚜껑을 땄다.
“뭔데?”
“티아매트의 행방.”
“찾기 힘들 거라고 하지 않았어?”
“보통은 그렇지. 하지만 내가 현우를 위해서 알아내 왔지!”
그러면서 의기양양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티아매트나 리비라는 녀석, 그리고 히드라는 마계에서 오래 지낸 녀석들이라서 마기를 잘 다루더라고. 덕분에 흔적이 거의 없어서 그들을 찾는 게 어려웠어.”
“그래서?”
“하지만 그중에 그렇지 않은 이도 하나 있잖아? 바카디란 녀석이었던가. 그 녀석은 인간인 주제에 마기를 받아들여 반마족화가 되었지. 그러니 본래 마계의 주민보다는 마기를 형편없이 못 다루더라고. 티아매트가 나름 흔적을 지운다고 노력은 한 모양인데 나까지 속일 수는 없었지. 아, 이 음료수 맛있는데? 더 있어?”
“여기.”
“고마워.”
윙크를 한 알베르크는 두 번째 음료수의 뚜껑을 땄다.
“바카디의 마기는 고약하긴 해도 추적할 만하더라고. 그 뒤부터는 뭐.”
알베르크가 발을 까닥였다.
“쫓아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지.”
두눈이와 점박이를 번갈아 가며 타고서 날아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다소 혹사시키긴 했지만, 원래 몬스터는 튼튼하니까. 알베르크는 쉽게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래, 거기까진 알겠어. 그런데 왜 여기 있어?”
미국에서의 일을 끝마친 우로보로스는 이번에는 강대국의 손이 잘 닿지 않는 나라부터 망가트리고 있었다. 새로 생긴 협회에서 도와준다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지만, 쉽지 않다 들었다.
아무리 이권을 넘어 서로 돕기 위해 만들어진 기관이라도, 고국이 존재하는 한은 한계가 있으니까.
“흔적이 이어진 곳이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었거든. 그래서 그 근처를 살펴보는데, 멀지 않은 곳에서 마기가 느껴지더라고.”
정확히는 케로가 점박이를 타고 날아가다 근처를 지나간 헬기에서 냄새를 잡아낸 것이었다.
“왕왕!”
케로는 칭찬해 달라는 듯이 팔딱팔딱 뛰었다.
“그래, 그래.”
현우는 케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배를 보이며 발랑 드러눕는다. 이건 또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알베르크가 양손을 활짝 벌렸다.
“바카디는 찾아냈고, 그 근처에 다른 이들도 더 있는 것 같더라고. 일단 덜떨어진 드래곤은 감시를 위해 두고 왔어.”
두눈이 과연 제대로 감시를 할 수 있을까?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알베르크이 말에 그를 믿어보기로 했다.
“덜떨어진 드래곤이라도 존재를 감추는 건 제법 잘 해 내더라고. 어디 숨어 지낸 적이라도 있었는지. 어느 정도 거리도 있고, 조용히 있으면 들키진 않을 거야.”
“그래. 그럼 됐어. 안내해.”
“지금? 네 동생 아픈 거 아냐?”
“아픈 거 맞아. 나도 두고 가고 싶진 않지만.”
이번은 두고 가야 했다. 지금부터 이어질 건 일방적인 폭력일 테니, 아직 상태가 불안정한 선우는 데리고 갈 수 없었다.
“도진 형, 선우를 부탁해.”
“나보단 알베르크가 보살피는 게 낫지 않을까?”
선우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죽이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도진은 알고 있었다.
“선우, 알베르크도 싫어해. 둘 다 싫어한다면 믿음이 가는 쪽에 맡기는 게 낫지.”
“뭐야, 나는 못 믿는 거야? 바카디도 찾아 줬는데?”
“넌 마족이잖아.”
“종으로 차별하면 쓰나.”
그러나 현우는 콧방귀로 응수했다.
“마족을 믿느니 천족을 믿지.”
“안 돼. 천족도 마족과 다르지 않다고. 그냥 진영만 다를 뿐이야. 그들도 인간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건 마족과 다르지 않아.”
“그렇진 않던데.”
“미리엘이라는 녀석은 아직 애송이라서 그래. 좀 더 나이든 천족을 만나면 생각이 바뀔걸. 그러고 보니 그 애송이가 없네?”
“가준이 돌보고 있어.”
정확히는 떠맡긴 거지만 아무려면 어떨까. 가준은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흠. 하긴 그 녀석이 은근히 보모 재질이긴 하지. 그럼 저 녀석이 남기로 했으면 내가 안내하면 되나?”
“너도 여기 있어.”
“왜?”
“내가 사고 칠 생각이라서.”
그걸 부추길 만한 알베르크는 데려가고 싶지 않았다. 대신 현우는 구석에서 훌쩍거리고 있는 요정을 집어 들었다.
“머리, 머리 아픕니다! 끄아악! 다른 데를 잡아 주세요!”
“아무 데나 잡으면 어때.”
“머리통 떨어져요!”
“그렇게 쉽게 죽을 몸은 아니지 않아?”
“죽어요, 죽습니다!”
요정은 우는 소리를 해 가며 간신히 현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너 위치는 알고 있지?”
“알고야 있죠.”
그러면서 힐끔 알베르크의 눈치를 본다.
“그럼 네가 안내해.”
“제가요?”
알베르크 때문에 이쪽 세계로 밀려 나온 것만 해도 억울한데, 이제는 사고 칠 장소로 안내해 달란다.
현우는 인간이지만, 상대는 분명 마족과 관계된 이 일터였다. 아니, 관계만 됐으면 다행이지. 예전에 보았던 마족이나 티아매트가 모습을 드러내면 큰일이다. 싸우면서 사방팔방 마기를 뿜어 내겠지.
상상만 해도 위장이 살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흑흑. 내 팔자야.”
“네 팔자는 알고 싶지 않고. 안내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있습니다.”
요정은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트리며 발을 끌며 걸어갔다.
“제대로 날아. 불편하게 가고 싶지 않으면.”
“넵! 제대로 날겠습니다!”
요정은 다시 허공으로 떠올랐다. 창문이 열리고 먼저 밖으로 뛰쳐나간 점박이가 덩치를 키웠다. 현우는 창문을 훌쩍 넘어 점박이의 등 위에 착지했다.
“왕!”
야무지게 요정을 입에 문 케로도 창문을 넘어 점박이 등에 매달렸다.
“현우야!”
걱정하는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괜찮다는 의미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혼자 가면 위험해! 같이 가!”
“나는 괜찮으니 만약을 대비해서 선우를 지켜 줘!”
어둠 속에서도 떨리는 도진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지금 갈등하고 있었다. 선우를 지킬지, 아니면 현우를 따라올지.
“조금, 조금만 기다려. 따라갈 테니까.”
아마도 선우를 맡길 만한 다른 사람을 부르려는 모양이었다. 도진이 창문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마자, 점박이는 곧바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유선형의 아름다운 까만 몸이 어두운 밤하늘을 유영했다.
*
“와, 치사하다. 치사해!”
현우가 떠난 자리, 미리엘과 단둘이 남은 가준은 불평을 내뱉었다.
“누구는 헬기 못 부르는 줄 아나?”
그리 말하며 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상태가 이상하다. 무언가에 후려맞은 듯이 움푹 패여 있었다.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예민한 전자기기인 휴대폰을 배려하지 못했다.
가준은 멍하니 서 있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별장에 들어가 보았지만, 연락할 만한 게 없었다. 그나마 있던 전화기도 이미 파손된 모양이었다.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만져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괜히 시간만 버린 모양새가 되었다.
“되는 일이 없네.”
결국 자신이 운전을 해야 할 모양이었다. 가준은 일단 차고로 향했다. 다행히 차고는 좀 떨어져 있던지라 차는 멀쩡했다. 문제가 하나 있었지만.
103.
“차 키가 없네?”
선우가 타고 온 차였기에, 가준이 키를 가지고 있을 리가 없었다. 대신 차고 밖에 세워진 파란색의 트럭에는 키가 꽂혀 있었다. 별장을 관리하던 사람이 키를 뽑는 걸 깜박하고 가 버린 것 같았다.
“그래, 이거라도 어디냐.”
힘들 때는 이거보다 더한 차도 타봤다. 가준은 종종걸음으로 따라온 미리엘에게 손짓했다.
“타라.”
“저게 더 멋진데?”
“저건 못 타.”
“왜?”
“그런 게 있어. 자꾸 말대꾸하지 말고 빨리 타.”
그제야 미리엘은 조수석에 올라탔다. 다행히 트럭의 상태는 제법 좋았다. 평소 타고 다니던 차량에 비하면 조금 부족한 면이 있었지만, 속도도 나쁘지 않았다. 밤인 데다가 산길이라 다소 험하긴 했지만, 운전자가 S급 각성자다. 무슨 일이 생기는 쪽이 이상하다.
“날아가는 게 더 빠르겠는데.”
미리엘이 중간에 불평을 내뱉었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그는 날아간다고 치더라도 가준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마침내 산을 벗어나 아스팔트 도로 위로 접어들 수 있었다.
“어디 보자.”
일단은 가장 가까운 백호 길드 지점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가서 부길드장한테 연락을 넣고 차를 가져오라 하면 되겠지. 이 트럭만 아니라면 뭐든 괜찮을 것 같았다. 다행히 가장 가까운 지점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도착!”
번듯하게 세워진 3층 건물 앞에 선 가준은 기지개를 쭉 폈다.
“집에 도착한 건가?”
“아니, 여긴 집은 아니고.”
“그럼 여긴 어디지?”
“잠시 신세 질 곳?”
그리 말하고는 늦은 밤인데도 신경 쓰지 않고 닫힌 문을 두드렸다.
“대체 이 늦은 밤에 누구야?”
불만스러운 얼굴로 건물을 지키던 경비가 나섰고, 그는 곧바로 가준을 알아보았다. 국내의 S급 각성자들은 대부분 방송에 얼굴이 팔린지라 따로 신분을 증명하지 않아도 되었다.
“길드장님!”
기겁한 경비가 빳빳하게 굳어 있다가, 다급히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기를 10여분. 멀리서 살이 붙은 중년 남자 하나가 다급히 달려왔다.
“길드장님? 길드장님 맞으시죠?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가준을 맞이하러 나온 지점장은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무려 길드장이나 되는 존재가 이유 없이 지점을 찾을 것 같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다르게 가준은 정말 순수하게 전화를 빌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들렸다.
‘뭐, 겸사겸사 대접받는 것도 나쁘지 않고.’
그동안 다른 이들 뒤치다꺼리만 하다 보니 좀 피곤했다.
‘내가 원래 그런 성격은 아닌데 말이지.’
성격 많이 죽었다.
“일단 안으로 드십시오.”
지점장은 굽신거리며 가준과 미리엘을 접대실로 안내했다. 둘이 자리에 앉자마자 미리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것처럼, 커피 두 잔이 앞에 놓였다.
“일단 필요한 건.”
가준은 망가진 휴대폰을 탁자 위에 내려두었다.
“새 휴대폰과 차인데.”
“차라면 자동차 말입니까?”
“그럼 다른 차가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차라면 얼른 준비하겠습니다.”
“제가 주로 타는 차는 아시죠?”
그래, 이게 바로 도가준이다. 가준은 히죽 웃으며 지점장에게 이것저것을 부탁했다.
어차피 그 정도는 뜯어가도 나중에 되돌려줄 수 있다. 그렇기에 양심의 가책은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늦은 밤이라 휴대폰 가게는 닫았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알아서 해 올 것이다.
“금방, 금방 준비하겠습니다!”
지점장이 두툼한 뱃살을 흔들며 사라지자, 옆에 서 있던 다른 직원이 자연스럽게 비워진 커피잔을 채웠다.
“흐음?”
그런 가준의 모습을 미리엘은 기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는 것만 봐서는 일행 중 가장 바닥인 것 같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다른 인간들이 대하는 걸 봐서는 제법 사회적 지위가 있는 듯했다.
‘하긴. 일반적인 인간과 비교하면 강한 편이다.’
다만 더한 강자들과 함께 있었기에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벽에 걸린 시계의 분침이 천천히 움직이며 시간이 흘러갔다.
“개통하러 가서 만들어 오나.”
30분가량이 지나자 가준이 따분하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얼마 후, 밖에서 소란이 일었다.
“거긴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됩니다!”
“대체 누구십니까?”
밖에서는 막으려고 애쓰는 모양이었지만, 소용없었다. 느껴지는 힘을 봐서는 저들은 그를 막을 수 없었다.
“하아. 귀찮게 됐네.”
가준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문밖을 나섰다.
“그만해. 한도진.”
그러자 다른 사람들을 몰아치던 그림자가 잦아들었다. 그러나 그림자가 잦아들어도 거기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속이 뒤틀린다.’
그 사이 한도진은 또 발전한 모양이었다. 본인은 오지 않고 그림자만 보냈다.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림자를 이 정도 떼어서 보낼 수 있다니.
“대체 무슨 짓이지? 싸우자는 건가?”
말투가 절로 험악하게 나갔다.
“그건 아닙니다.”
중앙에서 솟아난 어린아이 크기만 한 그림자가 입을 열었다. 마치 그림자가 말하는 것 같은 기괴한 모습이다.
“그런데 왜 백호 길드에 와서 행패야?”
“지점 아닙니까?”
“지점도 백호 길드야.”
그 말에 새로 받아온 휴대폰을 들고 바들바들 떨던 지점장이 감동에 찬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준은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볼일은? 이 난리를 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잠시 이쪽으로 와 줄 수 있습니까?”
“이쪽이 어딘데?”
“한빛 종합병원입니다.”
“그게 어딘데?”
어처구니가 없어 되묻자, 지점장이 끼어들어 설명해준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병원입니다!”
“거긴 왜?”
“당신과 가장 가까운 곳 중 유일하게 헬기가 착륙 가능한 곳이라서요.”
“날 헬기에 태워서 어쩌려고.”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이야~.”
가준은 박수를 짝짝 쳤다.
“요즘은 협박을 부탁이라고 읽나?”
“협박이라뇨. 이런 작은 그림자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수 없습니다. 말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니까요.”
“좋아, 그래. 일단 그 부탁이 뭔지 들어보자.”
“지선우를 지켜 주십시오.”
이게 미쳤나. 입 밖으로 험한 소리가 튀어 나갈 뻔했다.
“나랑 지선우 사이 개판인 거 알지 않나?”
“그래도 최근엔 잘 지내지 않았습니까?”
“서로 소 닭 보듯 한 게 잘 지낸 거라고?”
“부탁입니다. 이대로라면 현우가 위험합니다.”
“현우가 왜?”
그 말이 가준의 마음을 돌렸다.
“일단 오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힘이 다한 모양이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가준의 곁에 커피잔을 든 채 다가온 미리엘이 말을 얹었다.
“가야지. 넌 현우란 인간을 좋아하지 않나?”
“그걸 알고 있었어?”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아, 그래.”
미리엘은 당당하게 말했지만, 정말 눈치가 있는 타입 같지는 않았다. 가준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좋아. 가 보자.”
한도진이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휴대폰.”
가준이 그리 말하며 손을 내밀자, 지점장이 손에 들고 있던 상자를 냉큼 얹어 주었다.
“여기 있습니다! 완벽하게 개통해서 가져왔습니다.”
제법인데? 이 시간에는 개통도 불가능할 텐데 대체 어떻게 해 왔는지 모르겠다. 하긴 뭐든 능력이 있으니 지점장 자리를 꿰찼겠지.
“차는?”
“준비해 뒀습니다! 급하게 준비하느라 국산밖에 준비 못 했지만, 상태가 좋으니 맘에 드실 겁니다.”
“뭐, 상관없나.”
가준은 차 키를 넘겨받고 건물 밖으로 걸어나갔다.
“잘 마셨다.”
커피잔을 근처에 있던 경비원에게 넘긴 미리엘이 그 뒤를 따랐다.
“아까 것보다는 낫군.”
“낡은 트럭보다야 뭐든 낫지.”
가준은 그대로 한빛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달려온 사람이 그를 옥상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이미 헬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걸 타고 목적지로 이동하고 나니 그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현우 혼자 복수한다고 갔단 말야? 그걸 왜 안 말렸어?”
환장하겠다.
“동생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아니, 멀쩡히 누워서 쉬고 있는 지선우가 위험할 일이 뭐가 있다고!”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아이고.”
머리가 아파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내가 왜! 다른 사람 불러! 요람 길드와도 사이 좋잖아.”
“하지만 요람 길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이미 마족에 관해서는 선우가 털어놓았지만, 도진과 가준은 그걸 모르는 상태였다.
“그럼 차라리 내가 갈게. 네가 지선우를 지켜.”
“그건 안 됩니다. 당신은 저보다 약하지 않습니까?”
“와, 대놓고 긁네?”
가준이 사납게 웃으며 도진을 노려보았다.
“사실이니까요.”
사실이면 다 말해도 되는 줄 아나. 처음 만났을 때는 얌전한 줄 알았는데, 그 모든 게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도진의 본성은 이쪽이다.
“시발, 그렇게 약한 나한테 믿고 맡길 수는 있냐?”
“네.”
“그건 또 왜 믿는데?”
“그동안 같이 지내는 동안, 적어도 뒤통수 칠 사람은 아니란 판단이 들었습니다.”
아닌데? 예전에도 몇 차례 지선우의 뒤통수를 치려던 가준으로서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다.
가준이란 인간이 원래 그렇다. 뒤통수 맞고 뒤통수 치는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정직과는 거리가 멀고, 비열과는 가깝다.
‘그런데 말이지.’
도진의 말을 듣다 보니 가슴이 울컥했다.
104.
‘아니, 이게 아니지.’
상대는 현우를 앗아간 라이벌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자의 말에 흔들리다니. 가준은 혀를 찼다.
“부탁드립니다.”
도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가준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지나치게 올곧고 깊어, 거부할 수가 없었다.
“손해 보는 역할은 질색인데. 그러고 보니 너 저번에 나한테 반말 쓴다며?”
“그건 관두기로 했습니다. 똑같은 인간이 될 수는 없지요.”
부탁하는 주제에 말 한 번 곱게 한다. 주먹이 절로 드릉드릉 울렸지만, 지금은 참기로 했다. 가준도 현우가 걱정되긴 했으니까.
“나중에 이 빚은 받아 낼 거야.”
“얼마든지요. 그리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도진은 가준에게 무전기를 건네주었다.
“휴대폰보다는 튼튼할 겁니다.”
“그래, 튼튼해 보이기는 하네.”
“그럼 알베르크?”
“내가 안내해 줘야 하는 건가?”
“지금 여기서 위치를 아는 건 당신뿐이지 않습니까.”
도진은 소파에 몸을 기댄채 늘어져 있는 알베르크를 재촉했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몸을 일으키려 들지 않았다.
“현우를 못 믿는 거야?”
“믿습니다. 믿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내가 보기엔 별일 없을 것 같은데.”
마계에서의 현우를 알고 있는 알베르크는 시종일관 태연했다. 저번에는 희한한 사슬에 걸려 제힘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그런 게 또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설사 있다 하더라도, 이미 당했던 것에 또 당할 현우가 아니었다.
‘상대방에겐 인질도 없고.’
현우가 날뛰기엔 딱 좋은 환경이었다.
‘날뛰어라.’
미친 듯이 날뛰다 보면 자신이 여기 어울리지 않는 인간이란 걸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마족과도 잘 어울렸다. 그러니 홀로 살아남아 모든 위험을 물리치고 살아갔겠지.
그런 이유로 알베르크는 도진을 현우에게로 안내할 생각이 없었다.
“알베르크!”
“그렇게 부르지 않아도 알베르크가 내 이름인 건 알아.”
“당신은 현우가 걱정되지도 않습니까?”
“응. 뭐가 걱정돼? 현우는 냉정하고 강해. 그리고 원래 이쪽 세상 사람이라 나와는 다르게 모든 힘을 가지고 여기로 돌아왔어. 그런 그를 위험하게 만든다고? 그게 쉬울 것 같아?”
틀렸다. 알베르크의 눈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 마족과는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
“좋습니다. 그럼 혼자 찾아가도록 하죠.”
혹시 몰라 점박이에게 그림자를 붙여 두었다. 알베르크를 데려가려던 건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선우의 곁에 없는 쪽이 더 안심되기도 했고.
“다녀와.”
알베르크는 느긋하게 소파에 누워 한들한들 손을 흔들었다. 도진은 그런 그를 노려보다 문밖으로 나섰다.
*
두눈은 수풀 속에 숨어 저 멀리 있는 건물 하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건물은 평범하게 생겼으나, 그 안에 있는 자들은 범상치 않다. 일단 얼굴을 확인한 자로는 바카디가 있었다.
그리고 후드티를 깊게 눌러쓴 여자 하나, 그 뒤를 따라다니는 모자 쓴 남자 하나. 바카디와는 다르게 얼굴을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다.
“티아매트.”
하지만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후드티를 눌러쓴 여자는 티아매트였다. 그렇다면 그 뒤를 따라다니는 남자는 히드라일 테고.
그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와서 건물에 틀어박혔는지는 모른다. 그러니 그걸 판단할 다른 사람이 오기까지 여길 지켜야 했다.
어쩌면 조금 지루하기까지한 시간이었다. 그래도 두눈은 졸지 않고 제대로 감시를 했다. 그렇게 지켜보는 동안 남자 하나가 더 안으로 들어갔다.
그 또한 누군지는 알 수 없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할까? 고민을 하는데 남자가 도로 나와 저 멀리 사라져 갔다. 아무래도 고민할 필요는 없었던 듯하다.
그 순간, 갑자기 등줄기가 시렸다.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걸 느끼자마자 두눈은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툭.
뒤돌려는 순간, 가벼운 손길이 두눈의 등을 두드렸다.
“잘했어.”
익숙한 목소리를 들으니 그제야 긴장이 사그라들었다.
“안에는 몇 명?”
“셋. 남자 둘, 여자 하나. 남자 하나가 조금 전에 밖으로 나갔어.”
“아는 얼굴이 있어?”
“바카디. 그리고 티아매트. 히드라.”
“다른 하나는?”
“모르겠어.”
두눈은 고개를 내저었다.
“뭐, 상관없겠지.”
현우는 그대로 훌쩍 뛰어 건물로 향했다. 그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몬스터를 해치울 때도 가진 힘을 전부 발휘하진 않았다. 다른 사람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 제한을 모두 벗어 던지기로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정정당당하게 1:1로 교환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현우는 그대로 문을 열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게 뭐야. 맛없어!”
티아매트는 카이가 내 온 감자튀김을 한입 베어 물고는 도로 뱉었다.
“무슨 감자가 이렇게 얇아? 뭔 맛인지도 모르겠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햄버거 껍질을 벗겼다.
“맛있다며! 맛있을 거라면서!”
“시끄러워! 그냥 먹어!”
“너야말로 시끄러워, 멧돼지!”
“지는 살찐 도마뱀이면서.”
바카디의 말에 티아매트의 눈 색이 짙어졌다. 살찐 도마뱀. 그건 오래전부터 다른 종족이 위대한 드래곤을 깎아내릴 때 쓰곤 했던 단어였다. 말이라도 그렇게 하면 드래곤이 약해지기라도 할 줄 아나. 건방지고 재수 없는 것들.
티아매트는 이를 으드득 갈며 햄버거를 바카디의 뒤통수에 집어 던졌다. 물론 바카디는 그걸 태연하게 잡아 자기 입속으로 쑤셔 넣었다.
“그래, 주제 모르는 인간은 교육이 중요하지. 슬슬 길들일 때도 되었어.”
“길들일 수는 있고?”
“리비가 조용히 지내라고 하지만 않았으면 내가 니 건방을 참아 줬을 것 같아?”
“안 참으면 어쩔 건데? 리비의 명령을 어기고 싸우려고?”
그건 안 될 말이다. 아무리 앞뒤 모르고 날뛰는 티아매트라도 리비의 말을 맘대로 어기기에는 다소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결국 티아매트는 빼내던 손톱을 도로 갈무리했다.
“정말 볼수록 맘에 안 들어. 카이!”
“네, 티아매트 님.”
“뭔가 먹을 만한 걸 가져와 봐. 이런 쓰레기 말고.”
“이 시간에는 문 연 곳이 거의 없습니다.”
“편의점이란 데는 연다면서?”
“그건 그렇습니다만.”
카이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편의점에서 티아매트가 만족할 만한 음식을 찾는건 쉽지 않은 일일 터였다. 잘못하다가는 분노만 살지도 몰랐다.
“햄버거도 못 먹으면서 편의점 음식은 어떻게 먹겠다는 거야?”
“먹을 수 있지. 왜 못 먹어?”
“닥쳐.”
“너나 닥쳐!”
둘은 계속 티격태격 싸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이대로라면 리비의 명령이라도 어기고 싸울 기세였다. 카이만이 곤란해하는 가운데, 한창 서로 비난하던 둘이 행동을 멈췄다. 그리고 동시에 1층, 건물로 들어오는 문이 있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누가 오네?”
“또 누구? 동네 주민?”
“뭐래. 이 멍청이가. 어느 동네 주민이 이런 기운을 가지고 있어?”
이리도 오싹한 기운을 말이다. 티아매트는 잔뜩 긴장한 채로 아래를 주시했다. 침입자는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발소리를 내면서 천천히 위로 향하고 있었다.
“적이야?”
바카디가 두 주먹을 마주 대면서 히죽 웃었다.
‘저 바보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살기가 티아매트를 옥죄어 왔다. 그런데 바카디는 그걸 전부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느낄 수 있었으면 저런 멍청한 행동도 하지 않았을 테니.
티아매트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발소리는 그들이 머무는 2층 방 앞에서 멈춰섰다.
“리비야?”
혹시나 싶어 아는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똑똑.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거참, 감질나네.”
바카디가 주먹을 흔들면서 문으로 다가갔다. 평소 그의 행동거지를 생각하면 저대로 문 너머의 침입자를 후려칠 생각인 듯했다.
“하지 마.”
티아매트가 경고를 했지만, 소용없었다. 바카디는 씩 웃어 보이며 그대로 문으로 주먹을 날렸다.
쾅!
주먹이 내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굉음이 들려왔다. 저 정도의 힘이면 평범한 인간은 으스러져 곤죽이 되었으리라. 벽이 무너지면서 솟아오른 먼지가 시야를 가렸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말이지.’
티아매트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일단 결계를 치겠습니다.”
그래, 그게 맞다. 리비가 어느 누구에게도 들키지 말고 여기서 대기하라고 했으니까. 그렇지만 모르겠다. 리비의 말을 따라야 하지만, 본능이 경고를 울리고 있었다.
도망가, 라고.
쿵!
재차 굉음이 들려오며 바카디가 뒤로 날아갔다. 카이가 친 결계가 아니었더라면, 벽도 뚫었을지도 모른다. 커다란 몸이 결계에 부딪쳐 바르르 떨려왔다.
“하?”
새로이 솟아오른 먼지는 약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가라앉았다. 티아매트는 그제야 침입자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현우.”
“안녕.”
까만색 장갑을 낀 현우가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다시 보네, 티아매트.”
“그러네. 딱히 다시 보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안타깝네. 난 보고 싶었는데.”
오싹. 소름이 돋았다.
도망가고 싶다. 도망가기 싫다.
싸우고 싶다. 싸우기 싫다.
상반되는 감정이 몸을 불태웠다.
“아하하.”
티아매트는 손톱으로 자신의 뺨을 긁어 내렸다.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피비린내가 느껴지자 기분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105.
“보고 싶었다니. 그래, 이제 봤으니까 뭘 할 셈이야?”
“알면서 묻는 거야?”
현우가 한 발자국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티아매트는 물러나는 대신, 자신도 똑같이 앞으로 나아갔다.
“모르니까 묻는 거지.”
“모르다니, 생각보다 머리가 나쁘나 보네.”
“지금까지 머리 나쁘단 소리는 들어본 적 없는데.”
티아매트는 웃음으로 응수했다. 두 명이 서로 상대를 향해 걸어가니, 금방 가까워졌다. 이제는 현우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웃음 뒤에 감춰진 것은 끝없는 분노였다.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손톱을 길게 빼낸 티아매트가 현우를 찔러 들어감과 동시에 그가 몸을 움직였다.
‘방심하면 안 돼.’
저번에는 사슬이 있었으니 대등할 수 있었던 거다. 지금은 그 사슬이 없으니 더욱더 집요하게 조심해서 공격해야 했다.
순식간에 몇 번이 공격이 오가고, 티아매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뒤로 물러났다. 너무 신경을 곤두세워서 그런가, 얼마 싸우지도 않았는데 지치는 느낌이었다.
그때 뒤에서 거친 목소리가 욕설을 내뱉었다. 잠시 정신을 잃었던 바카디가 깨어난 것이다.
“또 처맞았네.”
목을 우두둑 소리 나게 꺾은 바카디는 몸을 튕기며 일어났다. 그리고는 노골적으로 마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가 말야, 지고는 못 살거든.”
“저런. 그러면 이제 못 살겠네.”
현우는 안타깝다는 듯이 혀를 찼다.
“시발, 그게 아니지!”
말려든 바카디가 화를 내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지지 않는다.”
“오늘은 사슬이 없지 않아?”
“그딴 거 없어도 괜찮아!”
“그럴 리가. 도구 없으면 넌 그냥 나약한 인간일 뿐인데?”
“개소리!”
바카디는 스탭을 밟으며 대차 현우에게 돌진했다. 그 틈에 티아매트는 바카디의 그림자에 몸을 숨겼다. 그리고는 예전처럼 현우를 공격할 기회를 노렸다.
“정말 지겨울 정도로 똑같은 행동이네.”
현우는 손을 털고는 정면에서 바카디의 주먹을 받아쳤다.
“맞아도 학습 능력이 없으니 어쩔까.”
상대적으로 작은 주먹이 후려치는데도 몸이 울릴 정도로 아프다. 이를 악물고 덤벼 보아도 유효타는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바타디가 신나게 처맞기만 하다 보니 티아매트 또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하필이면 이때!’
예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지금 티아매트는 다른 인간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그러니 본체로 돌아갈 수도, 이 이상 힘을 발휘할 수도 없었다.
“죽어!”
필사적으로 덤벼 보아도 제자리걸음일 뿐이었다. 아니, 제자리걸음이 아니다. 탱커의 역할을 하는 바카디가 사라지면 오롯이 혼자 현우를 상대해야 했다. 마계에서도 손꼽히는 마족인 알베르크와 수시로 싸우던 그와!
‘리비!’
지금은 잠시 자리를 비운 리비가 다시 돌아오길 기다리며 시간을 버는 수밖에 없었다.
“악!”
먼저 바카디의 다리가 부러졌다. 그는 기어서라도 공격하려고 했지만, 걷지 못하는 맷돼지는 쓸모가 없었다. 이어 팔이 부러지고 사지를 쓰지 못하게 되었다.
티아매트는 자랑하던 손톱을 생으로 뽑혔다. 고통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덤벼 보았지만, 손끝도 닿지 않았다. 그저 농락당할 뿐이었다.
“아직 부족해.”
“뭐가!”
“알잖아.”
이럴 줄 알았으면 지선우에게 저주를 걸지 말걸 그랬나. 그런 멍청한 생각까지 들었다. 아무래도 바카디랑 같이 다니면서 멍청함이 옮은 것 같았다.
“카이, 카이이!”
티아매트는 카이를 소리쳐 불렀다. 결계를 칠 때는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 맞아. 카이. 너도 있었지. 너는 조금 더 기다려.”
현우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얀 피부에 튄 피가 유독 붉어 보였다.
“다음은 어디가 좋을까? 네가 말해 볼래? 티아매트.”
“알게 뭐야! 맘대로 해 보라고!”
“그래, 그럼 손가락부터 갈까.”
고통은 제법 겪었다고 생각하는데도 두려웠다. 왜냐하면 이 끝에 다가올 게 뭔지 알고 있었으니까.
“너. 날 살려 둘 생각이 없지?”
현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과연 리비가 돌아올 때까지 자신은 버틸 수 있을까? 미친 드래곤이라 불리던 티아매트였지만, 죽기는 싫었다. 그렇기에 더욱 악을 쓰고 버텼다. 그렇게 한 손이 끝났을 때, 그토록 원하던 이가 돌아왔다.
리비가.
“리, 리비.”
티아매트는 리비의 이름을 불렀다.
“아, 저런.”
리비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티아매트를 내려다보았다.
“도와줘.”
“잠깐 사이에 이게 무슨 일입니까?”
“도와줘.”
“대체 사고 치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겁니까?”
“도와 달라고!”
티아매트가 소리를 높이자 리비는 손가락을 들어 입가에 가져다 댔다.
“쉿.”
그제야 티아매트는 입을 다물었다.
“지현우였던가요?”
“넌 리비고.”
현우는 볼에 묻은 피를 문질러 닦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제법 즐거운 시간을 보내셨던 것 같군요. 하지만 그들은 제 동료들이니 이만 놓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동료들이라. 그럼 너도 이들과 같은 쓰레기란 소리네?”
저번 싸움 때 현우는 리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찌 보면 오늘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끄럽게 생긴 남자의 얼굴은 조각상 같았으나 보고 있자니 구역질이 났다.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이번은 그냥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만날 텐데요.”
“아니, 다음은 없어.”
현우는 그대로 리비를 공격했다. 리비는 그를 흘려내며 뒤로 훌쩍 물러났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나뒹구는 소파 위에 고이 올려놨다.
“알베르크와 몇 번이고 싸웠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신은 그보다 강합니까? 아니면 약합니까?”
“그게 중요해?”
“나름 중요하지 않을까요?”
리비는 바닥을 쓸어오는 다리를 피해 몸을 띄웠다. 하지만 그건 현우가 그를 좀 더 편하게 공격하기 위해 했던 행동에 불과했다. 곧바로 허공에서 날아온 주먹이 리비를 후려쳤다.
“큰일날 뻔했습니다.”
리비는 그를 손바닥으로 막아냈지만, 제법 얼얼한 모양이었다.
“그냥 큰일 나지 그랬어.”
“그건 안 됩니다. 저에게는 아직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딴 사명 알게 뭐야.”
“저에게는 소중합니다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을 텐데? 마계로 꺼져!”
현우는 연신 리비를 공격해 나갔다. 카이의 결계 안이라 그도 힘을 조절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티아매트보다 싸움에 능숙하다.
천년을 넘게 살아온 드래곤보다 싸움에 능숙하다니. 그게 가능한 이야기인가?
마족이라면 가능하다. 그들은 드래곤 못지않게 긴 삶을 살며, 전투를 사랑하는 종족이었으니까. 그러니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이 정도로는 리비란 마족을 쓰러트릴 수 없었다.
“좀 시끄러워지겠네.”
현우는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리비를 바라보았다.
“그게 내키지 않으면 조용하게 끝낼 기회도 있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요.”
“늦었다니까.”
힘과 힘이 오가면서 커져 나갈수록 카이의 결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위험합니다.”
카이의 말에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티아매트가 물었다.
“뭐가?”
“결계를 더 유지하는 게 힘들 것 같습니다.”
“어차피 죽지 않는 한 버틸 수 있잖아? 더 버텨.”
조금의 온정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그렇지만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이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텨도 누군가에게는 들킬 겁니다. 본체로 돌아가면 더 오래 제대로 버틸 수 있습니다.”
“안 돼. 커다란 몸체가 드러나면 들켜.”
“하지만 티아매트 님.”
티아매트는 카이의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았다. 원하는 바가 있어 모시는 주인이었지만, 이럴 때면 가슴이 아파 왔다.
왜 자신은 어느 곳에 있어도 존중받을 수 없는 걸까. 카이는 울컥 솟아오르는 피를 삼키며 온 힘을 다해 버텼다.
“흠, 알베르크와 싸웠다고 해서 좀 더 기대했는데. 생각보다는 강해 보이지 않는군요.”
“그야 힘을 전부 쓰지 않았으니까. 너도 그렇잖아?”
“그렇습니까.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카이!”
“네.”
“결계를 거둬라.”
뜻밖의 명령이었다.
“무슨 소리야!”
티아매트도 그 명령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어차피 더는 결계가 못 버텨. 이대로면 들킨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화려하게 저지르고 달아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실수하면 천족에게 들킨다고 했잖아!”
그래서 저번에 알베르크와의 전투도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어차피 시간만 끌면 이 세상은 자신들의 손아귀에 들어올 테니까. 진지하게 알베르크를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알베르크도 그걸 알고 적당히 놀아 줬던 것 같았다.
“잠깐이면 괜찮을 겁니다.”
“그럴 리가 있나!”
티아매트는 어떻게든 리비를 말리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106.
“티아매트.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결계를 거두고 당신도 날뛰어 보는 겁니다. 저번에 그러지 않았습니까. 직접 많은 인간을 죽여 보고 싶다고요.”
그 말에 내내 반대하던 티아매트가 멈칫했다.
“……그래도 돼?”
“안 될 건 뭡니까?”
“티아매트 님!”
당황한 카이가 티아매트의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그녀는 거의 넘어간 것 같았다. 너덜해진 손을 가지고도 눈은 반짝 빛나고 있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더는 말릴 수 없다. 카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지랄 났네.”
그 사이로 험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내가 그걸 보고만 있을 것 같냐?”
현우는 삐딱하게 서서는 리비를 노려보았다.
“물론 그러지야 않으시겠죠. 하지만 이쪽은 하나가 아닙니다. 조금 궁금해지는군요. 과연 당신이 어떻게 우리 둘을 막을지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카이의 결계가 걷혔다.
“크르르륵!”
내내 인간의 모습을 유지하던 티아매트는 그 즉시 본체로 돌아갔다. 그 과정에서 건물이 무너지긴 했지만, 기절해있는 바카디를 제외하곤 그에 영향을 받은 이는 없었다.
“의리가 없네.”
빠져나온 형우가 그렇게 말하자 리비가 웃으며 답했다.
“저 정도로 죽으면 쓸모가 없지요. 쓸모없는 인간은 필요 없습니다.”
“푸하! 뭐야, 뭐야!”
바카디는 쓸모없는 인간은 아니었는지 자력으로 건물 잔해에서 기어 나왔다. 부러진 사지도 어느 정도 회복된 모양이었다. 비틀거리긴 하지만, 몸을 세우고 있었다. 이어 카이도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거대한 덩치 둘이 앞을 가로막으니 위압감이 대단하다.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 사이로 리비가 걸어 나왔다.
“자, 그럼 싸워 봅시다.”
자신이 유리한 걸 안다는 듯 느긋한 태도였다. 현우는 그걸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물었다.
“넌 가진 힘을 전부 가지고 넘어왔냐?”
“그게 궁금합니까?”
“그래.”
“굳이 말해 줘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겠는데요.”
“다 못 가지고 왔네.”
현우는 단정 지었다. 중간에 생겨난 포털을 이용해서 넘어온 알베르크는 많은 힘을 두고 이곳에 넘어왔다. 그에 비해 준비를 철저히 했을 리비는 더한 힘을 가지고 왔겠지만, 두렵지 않았다.
“일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우, 자신은 마족인 저들과는 달리 힘을 온전하게 보존한 채 이리로 넘어왔으니까. 마족 중에는 그가 알베르크와 싸운 걸 믿지 않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들에게 최고는 알베르크였으니까. 하지만 실제로 현우는 싸웠고, 지지 않았다.
“그래, 싸워 보자.”
가장 먼저 움직인 이는 티아매트였다. 그녀는 커다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려 하였다. 날개를 공격당하면 소용없을 일이나 아래에선 히드라인 카이가 지키고 있었다.
현우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마계에서의 나날들을 떠올려 보자. 끔찍했던 투쟁의 시간을 거쳐 그는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바카디가 가진 힘과 다를바가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바카디는 노력 없이 얻었고, 현우는 노력하여 얻었다는 정도였다.
현우의 그림자가 흔들거리며 부피를 키워 나갔다. 아니, 자세히 보면 그건 그림자가 아니었다.
“호오?”
리비가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마기입니까? 결국 당신도 바카디와 비슷한 종류의 인간이었던 겁니까?”
“마음대로 생각해.”
어느새 새까만 연기에 전신이 가려진 현우가 대답했다.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는 마계에서 살아남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살기 위해 받아들였다. 그리고 싸우면서 마기의 양을 점점 늘려나가는 요령을 배웠다. 방향성을 정하고 마기를 다듬어 나갔다. 그리하여 마침내 알베르크와 싸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손에 넣었다.
“크르르릉.”
부피를 늘려나간 연기 속에서 짐승의 울음이 들려왔다.
“아하하하!”
누군가의 웃음이 들려왔다.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발소리가, 금속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이내 모든 소리가 뚝 그쳤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티아매트는 자신이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침묵을 틈타 하늘로 날아올랐다. 거대한 몸체가 빠른 속도로 허공으로 떠올라 갔다.
그때였다. 연기 속에서 무언가가 뻗어 나오더니 티아매트를 향해 날아왔다. 가장 먼저 그걸 눈치채고 앞에 나선 이는 카이였다. 그는 자신의 목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내고자 했다.
히트라는 특성상 튼튼하고 재생력도 빠르다. 그렇기에 그걸 믿고 막아섰으나 결과는 처참했다. 히드라의 목을 뚫고 지나간 기다란 까만 창은 티아매트를 꿰뚫었다. 마지막 순간에 몸을 뒤틀어서 몸에는 맞지 않았지만, 날개의 피막에 구멍이 뚫렸다.
시작은 크지 않은 구멍이었지만, 날개짓을 할수록 상처는 더 커져 갔다.
“크르륵!”
티아매트는 그 자리에서 땅으로 추락했다.
쿵! 어떻게 착지는 제대로 했지만, 땅이 흔들리며 커다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익!”
몸을 바로 세운 티아매트가 이를 갈았다. 그러나 공격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현우가 팔을 휘두르자 재차 새카만 창이 날아들었다.
“막아!”
티아매트의 외침에 또다시 카이가 나섰다. 그래 봤자 공격의 속도를 늦추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티아매트가 피할 시간은 충분했다. 처음에는 몰라서 맞아 주었지만, 알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다.
“하나는 잘 피하네? 그럼 이건 어떨까?”
허공에 수십 개의 창이 생겨났다. 그를 본 카이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하나를 막는데 목 하나씩을 희생했다. 그런데 그런 창이 수십이다. 막을 수 있을까?
아니, 막지 못한다. 어쩌면 오늘 이 자리가 무덤이 될지도 모른다. 카이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에 대한 공포를 이겨 내고자 티아매트에게 붙었는데, 결국은 어느 것도 극복해 내지 못했다.
수십의 창이 날아오고, 카이는 죽음을 예상한 채 눈을 꾹 감았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새로운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눈을 떠보니 리비가 앞에 서 있었다.
“아직 필요한 존재들인데 죽이면 안 되지요.”
리비는 어느새 커다란 방패를 꺼내 들고 있었다. 마계의 신물로 그가 애용하는 무기였다.
“그나저나 이런 공격을 본 적 있습니다. 서열 12위인 이프리콧. 그의 기술 아닙니까? 그는 창술의 천재였습니다. 창도 잘 다뤘지만, 마기를 이용한 원거리 공격이 일품이었지요.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는다 했는데 그에게서 뭔가 배운 겁니까?”
“배웠다고 해야 하나?”
현우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리고 물었다.
“내가 그걸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
“없지요.”
리비는 방패를 내려놓으며 답했다.
“하지만 궁금하긴 합니다.”
“그러면 궁금한 채로 죽어.”
현우는 재차 공격을 시작했다. 리비는 그런 현우의 공격을 능숙하게 받아쳤다. 강하긴 했지만, 막아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창은 계속 현우의 근처에서만 생성되고 있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티아매트는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가려고 했다.
“안 됩니다!”
이상함을 느낀 카이가 뒤늦게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처음으로 창이 현우의 근처가 아닌 다른 곳에 생성되었다. 티아매트의 머리 뒤.
“뒤!”
카이의 외침에 티아매트는 얼른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창은 그녀의 머리 위를 허무하게 지나갔다.
“뭐야.”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으며,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조금만 변신이 늦었어도 죽을 뻔했다. 그 뒤부터 창은 이곳저곳에서 생성되며 그들의 목숨을 노렸다.
‘속였어!’
대부분의 공격은 리비가 막아 주었지만, 일부 공격이 그들에게도 떨어졌다. 모든 게 악몽 같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내내 공격을 막기만 하던 리비가 방패를 내렸다.
“계속 막기만 하자니 지루하군요. 이 외에 다른 공격은 없는 겁니까?”
“다른 걸 원해?”
“그렇다면요?”
“그럼 보여 주지, 뭐.”
갑자기 발밑이 서늘하다. 티아매트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히드라인 카이의 몸통 위로 올라갔다. 감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어느 순간, 피어난 새카만 가시덩쿨이 티아매트의 발을 잡아채려 했다.
창을 피하는 와중에 발목을 잡히면 끝장이다.
“오호, 이건 또.”
리비가 발목을 파고드는 넝쿨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마이아.”
티아매트는 잇새로 신음을 흘렸다. 마계 서열 18위였던가? 식물을 자유롭게 다루는 능력을 지닌 마족이 있었다. 이프리콧과는 다르게 그녀와는 약간의 교류를 하고 있었다.
‘최근에 그녀를 본 적 있던가.’
그렇게 묻는다면 아니요, 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마이아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마이아? 아는 마족입니까?”
“식물을 다루는 능력을 지닌 마족이야.”
단순히 식물을 다룬다, 로 정의하기에는 다재다능하긴 했다. 넝쿨을 이용하여 상대를 포박하는 건 물론이고, 식물의 독을 사용하여 중독시키기도 했다. 그래서 마찬가지로 독을 사용하는 티아매트와 교류했던 것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마이아의 힘까지 사용하다니. 뭔가 이상했다.
107.
“당신, 그들을 삼켰군요.”
리비의 말에 현우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최악의 맛이었지.”
살기 위해서 마족의 기운을 삼켰다. 그 맛이 얼마나 역겨웠던지 토할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래야 힘을 얻어 살아남을 수 있을 테니까.
‘특이한 재능이네요.’
요정도 그렇게 말했었다. 다른 이의 힘을 삼켜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니. 괴물 같은 능력이 아닌가.
“상대하기 까다롭겠는데요.”
“까다롭기만 해?”
티아매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리비를 바라보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했다. 믿고 있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힘일 수도 있고, 또는 다른 조력자일 수도 있다. 아니면 도망가려는 것일지도 모르지.
‘어느 것이든 가만 놔두지 않을 거지만.’
일단은 티아매트부터 조지고 생각하자. 현우는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쉽게 당할 줄 알고!”
앙칼지게 소리친 티아매트가 다시 몸을 원래대로 돌렸다. 리비가 공격에 익숙해진 것 같으니, 그가 막는 동안 마법이라도 날릴 셈이었다.
“으아.”
남자는 작게 소리를 냈다가, 기겁하곤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의 이름은 이한일. 요람 길드의 최정예 중 하나로 추적, 은신에 특화된 능력을 지닌 정보 요원이었다.
‘미치겠네.’
처음부터 지현우를 쫓은 건 아니었다. 원래의 목표는 지선우였다. 하지만 그는 모종의 이유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였고, 그래서 그의 추적도 잠시 멈췄다. 그 상황에서 지현우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건 뭔가 있다!’
그런 생각에 한일은 지현우의 뒤를 따랐다. 그쪽은 하늘을 날아가는 터라 따라잡기 무척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뒤를 쫓는 데 성공했다! 성공이야 했는데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저 거대한 드래곤은 본 적 있다.’
뉴욕의 무작위 포털 사건 때 모습을 드러냈던 드래곤이었다. 워낙 덩치가 큰 탓에 생존자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인류의 적. 당연히 흥미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길드장인 자윤도 여차하면 스스로 판단해서 움직이라 했으니, 한일은 여기 남아서 저들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랬는데 이게 무슨 일이람.’
드래곤은 포효하고, 히드라가 울부짖는다. 그리고 처음 보는 인간이 방패를 들어 지현우의 공격을 막고 있었다.
‘단순한 테이머는 아닐 거라고 판단했지만.’
테이밍 된 몬스터 없이도 강하다. 거리가 어느 정도 있음에도 느껴지는 힘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사용하는 힘도 범상치 않다.
‘우리 편 맞겠지?’
그런 의문이 들 정도였다.
‘가만있어선 안 된다.’
지금은 지현우가 우위에 있었지만, 상대는 여럿이다. 하나라도 빠져나갔다가는 큰일이 생긴다. 여기서 전속력으로 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심이다.
생각을 정리한 한일은 허리춤에 찬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요람 길드에 도움을 요청했다.
*
도진이 병실을 떠나고, 가준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을 맞이했다. 선우가 눈을 떠 버린 것이었다. 눈을 뜬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 없었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선우는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여기 있냐니. 병실에 있으면 당연히 그거지.”
대충 둘러대려고 했지만, 닿아오는 시선이 따갑다.
“그게 뭡니까?”
“간호.”
순간 병실에 정적이 흘렀다.
“풉.”
이어 알베르크가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그리 웃긴지 연신 큭큭거린다. 그에 비해 미리엘은 상황 파악이 안 되는지 뚱한 얼굴로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당신이 제 간호를요?”
“왜 할 수도 있지!”
“헛소리 말고 형은 어디 있습니까?”
“잠시 화장실 갔어.”
“화장실요?”
선우의 시선이 병실 내부의 화장실로 향했다. S급 각성자인 그는 그 안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감방 알아차렸다.
“아니, 외부의 화장실. 부끄럽다나, 뭐라나.”
시선의 온도가 점점 더 내려갔다. 이제는 실제로 추운 것 같기도 했다. 가준은 어색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빙빙 돌렸다.
“그러니까 말이지.”
“알베르크.”
가준이 제대로 답을 하지 않자 선우가 이번에는 알베르크에게 물었다.
“현우는 티아매트를 잡으러 갔어.”
알베르크는 선뜻 진실을 알려 주었다.
“야!”
가준이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알베르크는 태연했다.
“그걸 왜 말해!”
“비밀로 해 달라는 소린 안 했잖아?”
“안 해도 척하면 척이지!”
저놈의 마족. 틀림없이 일부러 말했다.
“에이, 어떻게 거짓말을 해? 마족은 진실된 종족이라고.”
알베르크의 말에 이번에는 미리엘이 기가 차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헛소리!”
“정말인데.”
“네가 거짓말을 잘하건 말건 상관없어. 그보다 형은 어디로 간 거지?”
선우는 서슴없이 링겔 바늘을 뽑아 내고는 침상에서 내려섰다.
“야, 너 아직 환자야!”‘
가준이 외쳤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전 멀쩡합니다.”
“폭주한 지 얼마나 됐다고 멀쩡하대! 미리엘, 너도 말해 봐.”
그러자 미리엘이 귀찮다는 듯이 말을 내뱉었다.
“당분간은 쉬는 게 좋을 거다. 임시로 눌러 놓은 거니 언제 또 폭주할지 몰라.”
“들었지? 널 치료한 사람이 한 말이다. 들어, 좀!”
“난 사람이 아닌데?”
“적당히 넘어가!”
“그걸 어떻게 적당히 넘어가? 천족 보고 인간이라고 하는데.”
“아오, 융통성 없긴.”
가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 와중에 선우는 환자복 차림새로 창문에 다가갔다.
“이리로 나갔군.”
“그래, 그건 맞는데. 어디 있는지도 모르잖아. 한도진이 데리러 갔으니 일단 넌 쉬어.”
“한도진?”
뒤늦게야 가준은 아차 싶었다. 안 그래도 한도진 때문에 폭주했는데, 다시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실수했다.
“어디야.”
“내가 알려 주지.”
아까는 귀찮다며 뒹굴던 녀석이 갑자기 생각을 바꿨다. 아마 흥미를 느꼈기 때문일 테지. 가준은 머리가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알베르크와 지선우만 보낸다고?’
그런 끔찍한 일은 두고 볼 수 없었다. 분명히 큰 사고를 칠 게 틀림없었다. 가준도 종종 사고를 치곤 했지만, 저들은 그 정도로 멈출 리 없었다. 처음으로 사고를 치는 입장에서 말리는 입장이 되니 너무 힘들다.
과거에 부길드장이 말릴 때 좀 더 얌전히 말을 들을 걸 그랬다. 새삼 부길드장에게 미안함을 느끼며 가준은 손을 들었다.
“그래, 갈 거면 차라리 다 같이 가자.”
그게 나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지금 출발해 볼까?”
느긋하게 누워있던 알베르크가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그리고는 열린 창문 너머로 훌쩍 뛰어내렸다. 이어서 선우가 뛰어내리고, 미리엘이 그 뒤를 따랐다.
“시발, 문이 있는데 왜 다 창문으로 나가고 지랄이야.”
가준은 욕을 하면서 창문을 넘었다. 바닥에 내려서니 이미 셋은 저 멀리 이동하고 있었다.
“차, 차가 있잖아!”
욕을 하면서도 가준도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S급 각성자쯤 되면 자동차보다 빨리 달리는 것도 가능했다. 장시간 달리기엔 수지타산이 안 맞아서 그렇지.
‘그러니까 차를 타지!’
왜 다들 달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분위기상 같이 달리고 있었지만, 절로 한숨이 나왔다.
*
그렇게 넷이 병원을 출발할 무렵, 도진은 현장에 도착했다. 어두웠던 밤은 하늘에 뜬 헬기의 빛으로 밝아져 있었고, 주변에는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주민분들은 대피하시길 바랍니다! 위험하니까 그리로 들어가지 마세요!”
대피하는 와중에도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들이 들러붙었으나, 경찰은 단 한 명도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각성자는 들여보내 주는 모양이었지만, 확인에 시간이 걸린다.
그걸 확인한 도진은 그림자를 타고 바리케이트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좀 더 달리자 거대한 몬스터가 보였다. 그 앞에서 몬스터와 마족을 막아서는 현우도!
당장이라도 이름을 소리쳐 부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다가 외려 다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대신 도진은 현우를 보조하는 걸 택했다.
밤이라 더욱더 강해진 그림자가 주변을 물들이며 번져나갔다. 무시무시하게 크기를 부풀린 그림자는 곧바로 티아매트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거대한 드래곤을 묶어 두기는 쉽지 않을 일이었지만, 그래도 해내야 했다.
‘하나씩 수를 줄여야 해.’
“크르르륵!”
열심히 공격을 피하며 마법을 날리던 티아매트가 멈칫했다. 그리고 하필 리비와 카이가 막지 못한 공격이 그녀의 목덜미를 스쳐 지나갔다.
“캬아악!”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허공에 피가 튀었다. 이어진 공격은 히드라가 자신의 머리를 희생해서 막았다. 이미 너덜너덜해진 히드라는 머리가 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와오.”
어둠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을 뻔했네.”
내내 쓰러져 있다가 이제야 몸을 전부 회복한 바카디였다.
“오랜만이야?”
바카디가 도진에게 손을 들어 보이곤 돌진했다. 지금 상황을 보니 도진이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았기에, 그를 막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도진은 바카디의 공격을 피하면서 집요하게 티아매트만을 노렸다.
아무리 강해도 바카디는 인간이다. 그들 선에서 정리를 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티아매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걸어 다니는 재앙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도심에서 구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현우가 티아매트를 죽이길 바라는 것도 있었으니.
도진은 그에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108.
‘죽는다.’
이대로라면 죽는다. 티아매트는 생전 처음, 죽음의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현우의 공격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버거운데 중간부터 다른 이의 방해가 들어오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시로 몸이 덜컥덜컥 멈춰 섰다.
히드라인 카이가 방어해 주는 것도 이제 한계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위기에 처한 건 티아매트뿐만이 아니었다. 내내 여유롭던 리비의 태도도 변했다.
“이거 생각보다.”
리비가 혀를 찼다. 그는 방패를 내려놓더니 자리를 이탈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멀리 떨어진 수풀을 향해 달려갔다.
“설마!”
도망치는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그걸 깨닫는 순간, 현우는 잽싸게 그의 뒤를 따랐다. 다리에 마기를 두르고 속도를 높여 간신히 따라잡을 수는 있었으나, 리비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잡았다.”
리디는 숨어 있는 사람을 그대로 공격했다. 내내 가만 놔두길래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현우는 필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여기서도 마기를 쓰면 행동은 좀 더 쉬워지겠지만, 잘못하다가는 사람이 다친다. 그렇기에 힘을 억누르고 몸으로 때웠다.
그 탓에 팔꿈치에 길게 그인 상처가 생겼다. 그래도 사람은 살렸으니 다행이다. 물론 그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리비의 공격이 현우를 스치고 그에게도 닿았기 때문이었다.
현우는 정신을 잃은 사람을 뒤에 두고 숨을 몰아쉬었다.
‘곤란하네.’
현우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뭐, 상관없나.’
마계에 있을 때도 방해라면 질릴 정도로 받았다. 이정도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다시 티아매트를 공격하려 했지만, 하지 못했다. 갑자기 리비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능글맞은 얼굴이 흘러내리듯 사라지고, 단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반짝이는 금발에 깊은 파란색의 눈동자, 조각상 같은 얼굴은 무척이나 익숙했다.
“레온!”
“기왕이면 계속 리비로 상대하고 싶었지만, 변장한 상태로는 조금 버거워서요.”
레온은 가볍게 숨을 내뱉고는 웃어 보였다.
“이제 편하네요.”
그리 말하며 다시 방패를 집어 들었다. 하지만 현우는 그처럼 태연할 수가 없었다.
레온, 그는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으로 현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혼란의 시대, 그는 인류의 희망이라고. 그가 정의를 내세웠기에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를 수 있었던 거라고 하였다.
그런 이가 어째서?
“어째서?”
의문이 소리가 되어 나갔다.
“그렇게 물으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째서, 어째서냐. 그건 제가 처음부터 마족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 레온은 가상의 인물에 불과한 것이죠.”
“일부러 레온으로 변장해서 인간들 틈에 혼란을 일으키려는 속셈일 수도 있잖아. 내가 널 어떻게 믿지?”
“진실입니다. 이런 걸로 거짓말을 하진 않습니다.”
그러면서 어디선가 검을 꺼내 들었다. 그것은 레온이 주로 사용하는 무기였다.
“믿지 못하겠다면 레온의 기술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검이 빙그르르 돌더니 환한 빛을 뿌렸다. 거기까지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리비는 레온이다.
“그래, 그렇다 치자. 이제 와서 정체를 밝히는 건가?”
“아까도 말했지 않았습니까? 싸우는데 버거워졌다고요. 리비라는 껍질은 단순히 외모만 바꾸는 게 아니거든요. 힘의 파장까지 바꾸기에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닙니다.”
“아니,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그런 게 아냐.”
현우는 레온을 가리켰다.
“내가 네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건 어떻게 수습할 셈이지?”
“그 문제는 간단합니다. 자, 반대로 묻겠습니다. 당신이 제 정체를 알았습니다. 정확히는 저기 있는 한도진도 알아차렸겠군요. 그래서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사실을 협회에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 있겠지.”
“다른 사람들이 믿어 줄 것 같습니까?”
그제야 레온의 뜻을 알아차린 현우는 이를 아득 물었다. 지금까지 세상의 평화와 정의를 위해 앞장서 온 레온이 마족이라니. 대부분은 듣자마자 농담하지 말라고 웃어넘길 것이다. 어쩌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제가 쌓아 온 신뢰는 대단히 두텁습니다. 그게 겨우 인간 둘의 증명으로 깨질 것 같습니까?”
레온도 믿는 바가 있으니 본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말싸움만 하고 있을 겁니까? 2차전을 시작해야죠.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모습의 레온이 앞으로 나섰다.
“그건 이쪽이 할 말이야.”
정체를 증명할 수 없다면 이 자리에서 그대로 죽여 버리는 게 낫다. 그렇게 생각한 현우 또한 사나운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
“진짜 여기까지 달렸네, 미친놈들.”
가준은 바리케이트 앞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미친놈들은 이미 바리케이트를 넘어 안쪽으로 달려갔다. 남은 건 도가준과 당황한 경비원뿐이었다.
‘이미 주변 통제는 들어갔고.’
바리케이트 안쪽에서 각성자들이 모이고 있었다.
‘저기 있는 드래곤을 죽이기 위함이겠지.’
하지만 저기엔 이미 현우가 버티고 있을 것이다.
‘보자,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좋은가.’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현우는 그들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 거기에 알베르크, 천족인 미리엘, 조금은 못미덥지만 지선우가 있다. 여기서 사람이 더 붙는 건 오히려 방해만 된다.
‘만약 그때 봤던 마족이 있다면 알베르크가 상대할 테니까.’
다른 이들이 현장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게 나을 것이다. 그렇기에 가준은 경비대에게 물었다.
“여기 책임자가 누구지?”
“누구십니까?”
“나 몰라?”
가준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 가준 님!”
“그래, 도가준이다. 그래서 여기 책임자가 누구라고?”
“접니다.”
지키고 서 있던 사람의 뒤쪽에서 자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언제나 같이 다니는 아윤을 제외하고도 한 명이 더 있었다.
“최무혁.”
“오랜만입니다.”
헌터관리국의 최무혁이었다.
“정부에서 여긴 무슨 일이실까?”
“시민의 안위를 위협하는 일이니 당연히 정부가 나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드래곤의 시체가 탐난 건 아니고?”
그 말에 무혁은 가준을 불쾌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답이 없는 걸 보니 그 비슷한 명령을 받고 여기 있는 모양이었다.
“일단 자윤. 나랑 잠시 이야기 좀 하자.”
“네.”
가준은 사람이 드문 곳으로 자윤을 이끌었다. 아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뒤를 따랐다.
“상황이 어떻게 된 거냐?”
“그걸 제가 굳이 알려 줘야 합니까?”
“그 정도는 알려 줄 수도 있지! 어차피 지금 드래곤과 싸우는 사람이 너네 길드 사람은 아니잖아.”
“알고 계셨습니까?”
“뻔하지, 너네 길드 사람이었으면 이렇게 돌입 시간을 길게 잡을 리가 없지. 너네 누군지도 알고 있지?”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 녀석들 지금 드래곤과 싸우는 사람이 현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은 사람 하나를 보내서 지켜보는 중이에요.”
아윤이 말했다.
“어떻게 돼 가고 있대?”
“격렬하게 전투 중이랍니다. 그런데 저희 쪽 사람도 중간부터 연락이 끊겨서 타이밍을 보던 차였습니다.”
“돌입은 됐어.”
“네?”
“이미 그쪽으로 지선우가 갔다. 더 사람을 붙였다가는 되레 방해만 될 거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지선우는 병원에 입원했다고 들었는데, 지금 그런 사람이 간다고 크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건 또 언제 조사했대?”
기가 차다는 듯이 묻자 자윤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흰 요람 길드입니다.”
“누가 몰라?”
상황이 골치 아프게 돌아간다. 자윤의 얼굴을 보니 쉽게 설득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시간이라도 끌어 볼까? 아니면 전부 재워 버릴까? 고민하는데 갑자기 귀가 아플 정도로 커다란 비명이 들려왔다.
“뭐야!”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니 드래곤이 몸부림치고 있는 게 보였다.
“가 봐야겠습니다!”
가준이 미처 잡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오.”
앞서 달려 나간 자윤을 잡기 위해 가준도 달려 나갔다. 이런 역할은 정말 싫지만, 그래도 현우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그러자면 지금 다른 각성자들의 돌입을 막아야 했다.
“내가 미쳤지.”
사람에 빠져 이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일단은 시간을 벌자.’
가준은 달리는 속도를 좀 더 높였다.
*
헌터 관리국과 요람 길드는 상황이 급박함을 깨닫고 힘을 합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여 모인 각성자들을 이끌고 자윤과 무혁은 드래곤이 보이는 방향으로 향했다.
“난 최선을 다했다.”
너덜너덜해진 가준은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사이에 다른 이들이 현우를 도와 상황을 해결했으면 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드래곤은 사라진 상태였다. 대신 그 자리에는 바카디의 시체와 죽어가는 히드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드래곤은 깊은 상처를 입긴 했지만, 살아서 도망갔다 하였다.
자윤은 안도인지, 아쉬움인지 모를 숨을 내뱉고는 현장에 남은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대단하십니다. 겨우 네 명이서 드래곤을 상대하셨으니까요.”
지현우와 지선우, 한도진 그리고 한 사람이 더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레온.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어째서 이 시간에 한국에 와 있느냐는 의문은 남아 있었지만, 그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그만큼 레온은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으니까.
109.
바카디의 시체를 수습하고, 빈사 상태에 빠진 히드라를 구속했다. 거대한 몬스터를 구속할 만한 도구가 없기에 일단은 각성자 여럿이 지키고 있기로 했다. 그 사이 관련 아이템을 날라 올 생각이었다.
다행히 상황을 전해 들은 헌터 관리국은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거기에 요람 길드의 길드원들이 더해지니 상황은 빠르게 수습되었다. 그러나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게 느껴졌다.
지현우, 지선우, 한도진, 레온. 같이 힘을 합쳐 적을 상대했다고 보기에는 특유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그보다는 무리가 나뉜 느낌이었다. 지현우와 한도진, 지선우가 뭉쳐 레온과 대치하는 듯 보였다.
그걸 알아본 이는 무혁뿐만은 아닌 듯했다.
“하, 씨발.”
현우는 평소와 다르게 사나운 표정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도진은 담요를 받아가 그런 현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리고는 달래듯 등을 토닥인다. 그래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지 간간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선우는 그런 둘을 보며 기이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그가 가진 형제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면 그 또한 이상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둘을 갈라 놓을 줄 알았는데.
“제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자윤과 이야기 중이던 레온이 무혁에게 물어왔다.
“배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지요.”
레온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무혁이라고 방금 전투를 마친 사람들을 붙잡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도망친 적이 있는 이상 이야기는 미리 들어 둬야 했다.
그렇기에 현장에 급하게 세워진 천막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각자의 이야기를 듣고 대조해 볼 생각이었다.
먼저 지현우. 그는 이제야 좀 안정이 됐는지 차분해 보였다. 이야기를 못할 상태는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도진이 앞서 그를 가로막았다.
“현우는 아직 여파가 남은 듯하니, 대신 제가 이야기 하겠습니다.”
그 말에 무혁은 저도 모르게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현우의 이야기는 건너뛰게 되었다. 도진은 차분하게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한밤중에 바카디가 그들을 불러냈다. 그를 알게 된 현우가 가장 먼저 현장으로 달려왔고, 이어 도진이 도착했다.
적은 넷. 바카디와 히드라, 그리고 드래곤. 거기에 한명이 더 있었다고 한다.
“하나 더 있었다고요?”
“네.”
“인간 형태였습니까?”
“네.”
“누군지 짐작 가는 게 있습니까?”
그 부분에서 도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짐작 가는 부분은 있지만, 말할 수 없습니다.”
이후 나온 답은 그게 끝이었다. 그 사이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뭔가 싶어 살펴보려는 순간, 도진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따라 나가니 레온의 멱살을 잡고 있는 현우가 보였다.
“현우야!”
도진이 급히 달려가 현우와 레온을 떼어 놓았다.
“이런다고 언제까지 감춰질 것 같아?”
현우의 말에 레온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사라고 불리곤 하는 그답지 않은 웃음이었다. 그 외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너!”
다시 튀어 나가려는 현우를 한도진이 붙잡았다.
“무슨 일입니까?”
“아무 것도 아닙니다.”
레온은 옷깃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아직 전투의 흥분이 덜 가라앉으신 모양입니다. 곧 괜찮아지시겠지요.”
그 말에 현우가 발을 굴렀다.
쿵.
커다란 소리와 함께 바닥이 울렸다.
“두고 봐.”
그 말을 끝으로 현우는 돌아섰다.
“영문을 모르겠네.”
가까이에 서 있던 자윤이 말했다.
“뭔가 있는 것 같은데 입을 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무혁이 도진과 이야기 하는 사이, 그도 나름대로 움직였나 보다.
“손댈 수 있는 상대도 아니고. 난처하군요.”
“그래도 동맹 상태 아닙니까? 저보단 알아보기 편하시겠지요.”
“그럴까요?”
자윤이 사람 좋은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어 부른 사람은 선우였다. 그는 평소보다 굳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을 던져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게 다였다.
“지선우 씨. 나름 손을 잡은 사이 아닙니까? 일부라도 말씀해 주실 수는 없습니까?”
그제야 선우의 입이 다시 열렸다.
“보이는 것과 진실은 다릅니다.”
“다르다고요?”
지금 이 상황이 보이는 것과 다르다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다른가. 그게 궁금했지만, 선우는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대화 중 가장 많이 말한 건 레온 정도였다.
“뭐든 물어 보십시오.”
그는 넷 중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네, 일단 처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레온은 차분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사라진 바카디를 쫓아서 한국으로 온 일, 한국에서 그의 흔적을 찾았으나 혼자라 난처해하던 상황에서 현우가 난입한 일 등을 듣기 좋은 목소리로 풀어나갔다.
“상대가 여럿이라 곤란했는데, 지현우 씨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상했던 이야기, 그 이상은 없었다.
‘정말로 우연히 만나서 도움을 받은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맞았지만,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적은 몇 명이었습니까?”
“셋.”
순간 무혁은 표정이 변하는 걸 막지 못했다.
“아니, 넷입니다.”
“어떤 적이었는지 설명이 가능하십니까?”
“바카디와 히드라, 드래곤. 그리고 사람 형태의 적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그렇군요. 협조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여기까지 이야기는 일치했다. 미심쩍은 부분은 있었지만, 그것 가지고 레온을 심문할 순 없었다. 그의 국적 때문이었다. 이후는 자력으로 알아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천막 밖으로 나온 무혁은 자윤을 찾았다.
“누구 찾아요?”
그런 무혁에게 아윤이 스스럼없이 다가왔다.
“이자윤 씨는 어디 계십니까?”
“응급으로 실려 간 한일 씨를 보러 갔어요. 마침 백호 길드원들도 하나둘씩 도착하니 잠시 자리를 비워도 괜찮다고 판단하신 것 같아요.”
분홍빛 입술이 종알종알 떠들어댄다.
“한일 씨라면?”
“현장에서 지켜보던 저희 길드원이요. 목을 졸린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 외의 상처는 없는데 이상하게 눈을 뜨질 않는대요.”
“그걸 저에게 말해 줘도 됩니까?”
“그야 그쪽도 저희 편이잖아요?”
마지막 말은 고의적으로 작게 말했다.
‘더 조심해야겠군.’
정확히는 지선우의 편이다. 그에게 도움을 받고 있단 걸 요람 길드가 알아낸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혁은 그 말에 섣불리 긍정하지 않았다.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요람 길드가 자력으로 알아낸 정보로 일부러 친근하게 접근하는 거일 수도 있었으니까.
무혁은 눈을 반짝이는 아윤을 무시했다.
‘뻔뻔한 녀석.’
현우는 이를 으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레온의 머리통을 부숴 버리고 싶었지만, 그래선 안 된다. 오랜만에 힘을 쓴 탓인지 술렁이는 마음을 가라앉히기는 쉽지 않았다.
‘설마 그 상황에서 자기편을 죽일 줄이야.’
레온은 누군가가 접근 하는 걸 알자마자 히죽거리며 물었다.
“다 죽일까요? 아니면 넘어가 볼까요?”
“그렇게 놔둘 것 같아?”
“물론 그렇게 놔두진 않겠지만, 다 막지도 못하겠죠.”
레온은 평소 쓰는 정중한 말투로 현우를 조롱했다. 그러더니 바카디를 죽이고, 티아매트를 도망시켰다. 그런 뒤, 태연하게 닥치는 다른 각성자들을 맞이했다.
다른 이들은 그런 레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을 생각해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늘의 일이 아니었으면, 현우도 그렇게 생각했을 테니까.
“후우.”
분노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레온에게 부상을 입은 사람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레온이 현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중간에 끼어든 벌레 하나가 있었죠.”
“벌레는 너고.”
“지금 병원에 실려 갔다는데 일어나지 못하고 있다더군요.”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냥 머리에 마기를 조금 심었을 뿐입니다. 약하기도 하지.”
말 하나하나가 짜증났다. 현우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당신이 머리에 스민 마기를 빼낸다면 다시 일어날 수 있겠지만요. 그러진 않겠지요?”
“어째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지?”
“그야 그는 많은 걸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제 정체도, 당신의 힘도.”
그가 깨어나면 곤란해지는 건 자기뿐만은 아닐 거란 소리였다.
“그리 쉽게 알아차릴 수는 없어.”
“알아요. 그러니 지켜보는 눈이 있단 걸 알면서도 가만 뒀던 거겠지요. 하지만 의심이란 건 조금만 불을 붙이면 커지는 것도 순식간이랍니다.”
레온은 그 말을 남기고는 정부에서 나온 사람을 따라 장소를 이동했다. 이제 그는 국빈 취급을 받으며 고급호텔에서 편하게 쉴 것이다. 실상 이 일을 벌인 사람은 그인데도.
속이 답답했다.
“현우야.”
“알아, 형. 아는데.”
현우는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그리고 저 멀리서 서 있는 동생을 바라보았다.
‘선우에게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분노가 앞을 가리는 바람에 늦게 알아차렸다. 현우는 나눠 주는 담요를 하나 더 받아들고 선우에게로 다가갔다.
“선우야.”
“형.”
돌아보는 얼굴이 창백하다.
“더 쉬어야 하는데 왜 나왔어.”
“쉬라고?”
선우의 목소리가 날카롭다.
“형이 이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쉬어?”
“선우야?”
“형은 언제나 그래. 내가 형에게 소중한 존재가 맞긴 해?”
“당연히 소중하지. 너는 내 하나뿐인 가족인 걸.”
“그러면 이래선 안 되지.”
단정하던 얼굴이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를 보는 현우의 가슴도 같이 무너져 내렸다.
110.
선우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급히 달려오느라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무리를 해서 그런가 가슴이 조여 왔다.
“내가 잘못했어.”
떨리는 목소리로 현우가 잘못을 빌었다.
“형이 뭘 잘못했는데.”
“네 곁을 떠나선 안 되는 거였는데.”
“그거뿐이라고 생각해?”
그러자 현우는 입술을 꾹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선우는 방법을 조금 달리하기로 했다.
“형.”
선우는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자신의 가슴에 댔다.
“나 아파.”
“많이, 많이 아파?”
당황한 현우가 조심스럽게 선우의 가슴을 더듬었다.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려는 것처럼 섬세한 손놀림이다. 선우는 그게 기꺼웠다. 다른 이들 앞에서는 무너져 내릴 수 없었지만, 형 앞에서는 가능했다. 그 모습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건 상관없었다.
‘나는 이렇게 형을 생각하는데.’
형은 왜 그러지 못하는 걸까.
동그란 머리를 내려다보는 선우의 시선이 들끓었다.
“내가 살펴볼게.”
그러기를 잠시, 조금 떨어져 있던 도진이 끼어들었다. 선우는 표정으로 그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꺼져.’
더는 형과 자신의 사이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도진은 꿋꿋하게 접근해 왔다.
“이런 쪽은 내가 더 잘 알아.”
“정말?”
“부모님이 의사셨거든.”
부모님이 의사지, 당사자가 의사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뻔한 이야기인데도 현우는 뒤로 물러났다. 도진을 믿어도 단단히 믿는 것 같았다.
“난 형이 봐 줬으면 좋겠는데.”
“제가 더 잘 볼 겁니다.”
“의사 면허도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차라리 진짜 의사에게 보이고 말지요.”
둘 사이에 불꽃이 튀었다. 도진은 어떻게든 성질을 억누르려는 게 보였지만, 선우는 자신의 감정을 망설임 없이 표현했다.
“선우야, 그럼 의사 선생님 불러올까?”
이런 사고가 벌어지면, 가장 가까운 병원에서 구급차와 의사가 차출된다. 그 의사가 마침 현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아니, 오시게 만드는 건 좀 그렇지. 나랑 같이 가자, 형.”
“그래.”
현우는 선우가 내민 손을 덥석 잡았다. 순순히 의사에게 가서 진료를 받으려는 동생이 기특한 것이었다. 보지 않아도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이렇게나 날 소중히 여기면서.’
왜 저런 이상한 남자와 사귀기 시작했는지 모르겠다.
‘떼어놓아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데, 레온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선우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어딘지 음험한 기색이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수상한 작자.’
뒤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상황을 제대로 알지는 못했지만, 현우의 행동으로 인해 레온이 수상하단 건 알고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다른 사람의 멱살을 잡을 그가 아니었으니까.
레온에게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그건 형에게 물어보면 되니까.’
일단은 형이 다른데 신경을 돌리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현우는 선우를 의사 앞으로 데리고 갔다. 각성자가 많아서 그런지 의사 또한 각성자 전문 의사였다.
“피로하신 것 같습니다. 큰 이상은 없어 보이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의사의 진단은 그러했다.
“가까운 병원에 자리가 있을 겁니다. 미리 연락해 둘까요?”
“이미 머무르고 있는 병원이 있습니다. 혹시 전화를 빌려도 될까요?”
현우의 폰은 싸움 통에 부서졌다. 그래서 빌린 전화로 원래 있던 병원에 연락을 넣었다. 그쪽에선 갑자기 사라진 환자 때문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일단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돌아가겠노라 이야기했다. 가는 길에는 구급차를 탈 예정이었다.
“형, 먼저 타.”
현우가 타자마자 선우가 이어 탔다. 그러고는 그대로 구급차 문을 닫아 버렸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할 일이 있을 거야. 지금은 우리끼리 가는 게 나아.”
그러고 보니 가준도, 도진도 각 길드의 길드장이다. 선우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선우를 침상에 눕혔다. 미리엘이 걱정되긴 했지만, 알베르크가 알아서 데리고 다닐 것이다. 그 정도 눈치는 있을 테지.
현우는 선우와 함께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의사와 간호사가 사나운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환자가 뛰쳐나가면 어쩝니까?”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중간에 뛰쳐나가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원래 있던 병실로 둘을 안내했다. 다시 선우가 자리에 눕고, 링거를 꽂았다.
“형, 손잡아 줘.”
선우는 서슴없이 어리광을 부렸다. 그리고 현우는 그를 전부 받아들여 주었다. 동생을 속상하게 한 만큼 애정을 쏟아부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되었다.
“와, 우리 버리고 가니 좋았어?”
알베르크가 심술궂은 얼굴로 현우의 볼을 찔렀다.
“손가락 부러지고 싶지?”
“그건 아니고.”
손가락을 회수한 알베르크는 소파에 늘어졌다. 이어 창문으로 들어온 미리엘은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쪽 소파에 앉았다.
“내가 저 멍청한 천족을 데리고 다니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누가 멍청하다는 건가! 멍청한 건 그쪽이겠지!”
미리엘은 사납게 눈을 치뜨고는 알베르크를 타박했다.
“여전히 시끄럽구만.”
마지막으로 가준이 합류했다. 그는 둘과는 다르게 제대로 문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오나?”
“그럼?”
현우의 단호한 태도에 가준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상처 받겠네.”
“도진 형은?”
“아직 현장 마무리 중. 그보다 TV를 틀어 봐. 지금 한창 뉴스를 할 시간이니까.”
그러면서 본인이 리모컨을 사용해 TV를 튼다.
『속보입니다! 어젯밤 12시경, 드래곤으로 분류된 몬스터가 도심에 나타났습니다. 몬스터는 미국에서 지명 수배된 바카디와 함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채널로 돌려보아도 똑같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현재 바카디는 사망한 상태이며, 히드라는 사로잡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드래곤의 행방은 아직 묘연합니다.]
『대한민국도 더는 빌런의 공격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관련 논술을 쓰신 박사님과 이야기 나눠 보겠습니다.』
『드래곤은 사라졌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찾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그 커다란 드래곤을 어째서 아직 찾지 못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난리가 났다.
TV, 신문, 인터넷. 모든 곳에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떠들고 있었다.
“원래 이렇게 소식이 빨리 퍼지던가?”
“외곽이라도 일단은 도심이었으니까. 게다가 공로를 세우신 레온 님께서 여기저기 인터뷰를 해 대고 계셔서 말이지.”
가준이 현우의 물음에 답했다.
“레온이?”
“그래, 그러고 보니 묻고 싶었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바카디는 죽어 있지, 히드라는 반 죽어 가지, 드래곤은 사라졌지. 그런 상황에서 적도 하나 더 있다며. 누구야?”
“리비.”
“저번에 만났던 마족?”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다친 데는 없어?”
“인제 와서? 염려 마. 다치진 않았으니까.”
문제는 부상 여부가 아니었다. 레온의 정체였다.
“만약에 말이지.”
“만약에?”
“레온이 적이라면 어떻게 할래?”
“그 레온이 적이라고?”
가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건 좀 곤란한데? 일단 적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적은 거지?”
“손에 꼽을 만큼.”
“그러면 대적하기 힘들어. 그동안 레온이 쌓아 온 일을 생각하면 그를 빌런으로 몰기만 해도 공격당할 거다.”
정의를 내세운 가디언 길드를 세우기까지, 레온은 사회에 수많은 공헌을 했다. 그 때문에 그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 받은 상만 해도 수십 개. 그만큼 그에 대해 호의를 가진 사람이 많다는 소리였다.
“그렇겠지?”
“그렇지. 이거 큰일이네.”
“넌 이런 말을 믿는 거야?”
“네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까. 아, 한도진이 왜 현장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했는지 이제 이해되네.”
가준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레온의 곁에 붙어 있으려는 거다.”
그 말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까, 감시하려는 거지.”
“위험한데.”
“위험하지. 일단은 나도 뭔가 해 봐야겠네.”
“뭘 하려고?”
“대한민국은 대한민국대로 뭉쳐야 하지 않겠어? 일단 지선우는 아직 환자인 것 같으니 다른 길드라도 모아 봐야지.”
가준이 대답했다.
“말하려고?”
“아니, 그건 아직 말하지 말아야지. 괜히 말했다가는 역효과만 일어나. 그럼 난 나가 본다.”
가준은 그말만을 남기고 바람같이 사라졌다. 현우는 선우의 손을 잡은 채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은 현장 인터뷰를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터뷰 대상 중에는 도진도 있었다.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모습이 피곤해 보인다. 그도 쉬게 해 줘야 하는데. 안타까움에 가슴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