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4~101화 (12/16)
  • 94.

    이미 좋게 좋게 이야기하기는 글렀다. 알베르크가 이쪽 편인 시점에서 미리엘이 이야기를 들어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아졌다.

    그렇다면 차라리 강경하게 나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알베르크!

    현우가 부르자 알베르크가 돌아본다. 미리엘이 공격하는 와중인데도 행동에 망설임이 없었다.

    잡아!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알베르크가 씩 웃었다.

    분부대로.”

    둘의 대화에 미리엘이 분노하기도 전에 빠르게 움직인 알베르크가 찔러오는 창을 잡아챘다. 이어 창대를 타고 올라간 손이 그대로 미리엘의 복부를 후려쳤다.

    !

    미리엘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했지만, 결국엔 목까지 내줘 버리고 말았다. 알베르크는 목을 잡았다 놓았는데 그 잠깐 사이에 목둘레에는 기이한 문신이 남았다

    잡았다.”

    허무하리만치 짧은 전투였다.

    이게 무슨!

    미리엘이 뒤늦게 목을 긁었지만 문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차피 지워지지 않으니까 괜히 긁지 마.”

    이게 대체 뭐냐!

    가벼운 구속 마법이지.”

    거짓말!

    미리엘이 이를 이득 갈았다. 문신은 그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었다.

    정말인데. 내 부탁을 조금만 들어주면 풀어 줄게.”

    마족의 말을 따를 수는 없다. 풀어라!

    풀어 주겠냐?

    알베르크는 미리엘을 한심스러운 눈으로 보다가 다가오는 현우에게 안겨 들었다.

    현우원하는 대로 잡았어!

    칭찬해 줘, 예뻐해 줘알베르크는 그런 눈빛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고마워.”

    현우는 손을 뻗어 알베르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덕분에 천족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그를 설득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일단 자리를 이동하자.”

    들었지따라와.”

    내가 왜!

    미리엘은 분한 표정을 지었다. 중간에 몇 번인가 반항했지만, 아무래도 그 고통이 심한 모양이었다. 결국은 포기하고 얌전히 현우의 뒤를 따랐다.

    좀 더 저항이 심할 줄 알았는데. 그런 현우의 생각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이 알베르크가 웃으며 답했다.

    아직 어리니까.”

    실전도 몇 번 겪어 보지 않은 것 같다고 하였다. 현우는 일단 숙소로 미리엘을 데려갔다.

    어디 다녀왔어어라뒤의 저 미인은 누구야?

    숙소에는 가준만이 남아 있었다.

    선우는?

    약 구한다고 돌아다니고 있어. 난 병원에 있다가 온 거고. 그래서 뒤는 누구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날개는 집어넣게 했지만, 생김새부터 입고 있는 옷까지 평범한 것이 없다. 심지어 한 손에는 창까지 들고 있지 않은가.

    말하자면 긴데.”

    나 시간 많아.”

    가준이 능글맞게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

    현우는 시간이 촉박한 만큼 빠르게 설명하기로 했다.

    이쪽은 미리엘. 천족이야.”

    천족이면, 천사?

    인간 기준에선 그런 셈이지.”

    호오?

    가준이 미리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봤다.

    무례하다!

    네, 네.”

    미리엘이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외쳤지만, 가준은 웃음으로 때워 넘겼다. 그리고 현우는 거실의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미리엘과 마주 앉았다. 알베르크는 태연하게 그런 현우의 옆에 앉아 그의 팔을 감싸 안았다.

    난 커피라도 내올게.”

    가준은 흥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마족과 결탁한 인간이 내주는 걸 마실 것 같으냐!

    미리엘은 신경질을 부렸지만, 가준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그저 태연하게 커피를 내릴 뿐이었다. 말을 해도 아무도 들어주지 않자, 그는 씩씩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겠다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서는 곤란하다.

    현우는 깊은 한숨을 삼키고는 말을 꺼냈다.

    미리엘.”

    내 이름 부르지 마라.”

    부탁입니다. 도와주세요.”

    내가 도와줄 이유는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전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옆에 앉은 알베르크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현우를 가로막진 않았다.

    이야기라도 들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듣고 싶지 않다.”

    그 사이 가준이 완성된 커피를 세 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현우에게 한 잔, 미리엘에게 한 잔, 나머지 한 잔은 자신의 것인 모양이었다. 알베르크만 쏙 빼놓았다.

    나는!

    알베르크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으나, 가준은 커피를 더 내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싸우다니. 현우는 일단 자신의 커피를 알베르크 앞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현재 이쪽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 그 때문에 다치게 된 소중한 사람. 혹시라도 미리엘이 마음을 바꿀 수도 있으니 신중하게 하나하나 말을 이어 나갔다.

    마족들이 일을 꾸미고 있다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미리엘이 그제야 눈을 떴다.

    그 때문에 제 소중한 사람이 다쳤죠.”

    ...그건 나에겐 중요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리 말하긴 했지만, 처음보다는 말투가 누그러졌다.

    저에겐 중요합니다.”

    현우는 애타는 목소리로 재차 부탁했다.

    도와주세요.”

    미리엘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목이 타는 듯 앞에 놓인 커피잔에 손을 가져갔다. 그를 보는 가준이 슬쩍 웃었지만, 눈치채지 못하고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와 동시에 미리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떠졌다.

    이건 무슨 차지?

    커피. 맛있지?

    가준이 대답했다. 미리엘은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가준을 바라보다가 다시 커피잔에 입술을 댔다.

    맛있나?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를 보던 알베르크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가준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가준은 커피를 잘 내리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애송이 천족이 저리 빠져들 만한 건 아니었는데. 자신의 것이 없어서 투정 부리긴 했지만, 적어도 알베르크의 입맛에 커피는 맞지 않았다.

    맛있지.”

    가준은 소파에 몸을 기대며 대답했다. 특별히 천족의 커피에는 우유와 연유를 넣었기 때문이었다. 가끔 사귀는 사람에게 해 주던 것인데, 특별히 이번에도 해 보았다. 전부 현우에게 도움이 되기 위한 행동이었다.

    미리엘은 우아한 태도로 커피 한 잔을 전부 비워 냈다. 그리고는 슬며시 입맛을 다셨다.

    더 줄까?

    작은 머리가 미세하게 앞뒤로 끄덕 움직였다. 그를 본 가준은 승리자의 태도로 주방으로 돌아갔다.

    단 것이 들어가서였을까미리엘의 태도는 한결 유해졌다. 그렇다고 해서 치료해 주겠다고 나서진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은 가서 한번 보는 건 어떨까?

    가준이 새로운 커피를 내밀며 슬쩍 말을 보탰다.

    우리야 모르지만 천족의 눈에는 뭔가 보일지도 모르잖아너도 정확히 상황을 알고 있는 게 좋지 않겠어?

    그런가?

    얌전히 커피를 받아든 미리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지. 그러니 한번 같이 가 보자.”

    가준은 미리엘을 살살 꼬셨다. 도진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동안 옆에서 현우가 괴로워하는 걸 봐 왔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현우가 망가져 가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도진은 아직 죽어서는 안 되는구나. 원래 죽은 놈이 산 놈보다 이기기 힘든 법이다. 그러니 도진은 살아야 했다.

    좋다.”

    그 결과, 가준은 미리엘의 입에서 일단 도진을 한번 보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그리 결정되었으니 이제 남은 건 움직이는 것뿐이었다.

    잠시만!

    가준은 보온병 가득 커피를 채워 넣어 챙겼다. 이후 엘리샤의 도움을 받아 헬기로 빠르게 이동했다.

    여깁니다.”

    현우는 초조한 마음으로 미리엘을 안내했다. 도진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여러 의사와 각성자들이 매달렸지만, 천천히 죽어 가고 있었다.

    일단 모두 나가라고 해.”

    미리엘의 말에 따라 병실에서 대기하던 인원들을 전부 내보냈다. 미리엘은 사람들이 전부 물러나고 나서야 도진에게 다가가 살펴보기 시작했다.

    저주 맞네. 블랙 드래곤이 건 저주라고 했지마계에 사는 블랙 드래곤은 지독하지. 이건 쉽게 풀릴 게 아냐.”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방법, 살려 낼 방법은 없나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미리엘에게 매달려 애처롭게 물었다.

    방법?

    인간이 달라붙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혐오스럽지 않았다. 미리엘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는 말했다. 마족과 결탁한 인간은 쓰레기라고. 그러나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매달리는 인간을 보고 쓰레기라고 해도 되는 걸까알 수 없었다.

    제발 부탁입니다. 뭐든 하겠습니다.”

    무엇이든 하겠다고그럼 목숨을 달라고 해도 줄 건가?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튀어 나간 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무슨 미친 소리를!

    옆에 있던 가준이 먼저 반발했다. 알베르크 또한 눈을 날카롭게 뜨며 미리엘을 노려보았다.

    애송이 천족 주제에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현우의 반응은 달랐다.

    살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드리겠습니다.”

    까만색 눈동자가 강렬한 의지를 담아 빛나고 있었다. 이건 진짜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는 소리였다. 미리엘의 마음이 흔들렸다. 그는 죽어 가는 인간을 바라보다가 재차 현우를 바라보았다.

    애송아, 헛수작 부릴 생각하지 마라.”

    알베르크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95.

    헛수작이라. 부리면 어떻게 할 건데?

    미리엘은 날카롭게 대답했다.

    역시 마족은 싫다.

    어려서부터 마족은 혐오스러운 종자들이라고 배워 왔는데 인제 와서 생각이 바뀔 리 없었다.

    끔찍한 고통을 안겨 주마.”

    흥, 고통 앞에서 무릎 꿇을 것 같더냐!

    그러자 알베르크가 주먹을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에 맞서 미리엘 또한 방어 태세를 취했다. 내내 조용하던 병실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만!

    둘 사이로 끼어든 현우가 손바닥을 들어올렸다.

    여긴 병실이야. 그만해, 알베르크.”

    하지만 저게 헛소리만 늘어놓았는걸!

    헛소리 하는 건 그쪽이겠지!

    미리엘도 그만두십시오. 여긴 환자가 있습니다.”

    미리엘은 불퉁하게 나오긴 했지만, 먼저 전투 태세를 거둬들였다. 그제야 알베르크도 주먹을 내리긴 했으나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저 애송이가 필요한 존재만 아니었으면 진작 죽였을 거다.”

    내가 할 소리를 하는 군.”

    다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리고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현우의 귀에 들려왔다.

    현우야.”

    도진의 목소리였다.

    도진 형!

    현우는 뒤돌아서 도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런 그를 본 도진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다정하고 상냥한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있자니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컥 무언가가 솟아 나왔다.

    웃긴 왜 웃어.”

    현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를 보니 좋아서.”

    이렇게 된 게 누구 때문인데. 왜 이 사람은 이리 베풀기만 하는 걸까. 현우는 눈시울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괜찮아.”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도진은 현우를 위로해주었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다 죽어가면서!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아.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가도 똑같이 행동할걸.”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둘 다 살아남을 생각을 해야지. 왜 똑같이 행동해!

    그러네.”

    거기까지 말한 도진이 기침을 했다.

    의사, 의사 부를까?

    도진은 현우가 팔을 뻗어 벨을 누르려는 걸 말렸다.

    아니.”

    하지만 이렇게 기침을 하는데!

    이 정도는 괜찮아.”

    기침은 한참 뒤에야 간신히 가라앉았다.

    현우야.”

    말하지 마. 이제 쉬어.”

    아니, 이 말은 해야 해.”

    무슨 말.”

    나에게 목숨을 걸지 마.”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단호해서 현우는 속이 뒤틀렸다. 자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목숨을 내던져놓고서. 왜 자신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싫어!

    자연 나오는 대답이 고울 리 없었다.

    현우야.”

    싫어, 싫다고!

    현우야, 들어!

    현우를 따라 도진도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너를 잃고 싶지 않아.”

    그건 나도 그래.”

    현우의 말에 도진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어쩐지 서글퍼 보이는 웃음이었다.

    죽고 싶지 않다.

    살아서 현우의 곁에 남고 싶었다. 자신이 죽은 뒤, 현우는 다른 사람을 만날지도 모른다. 다른 이와 손을 잡고, 입을 맞추고, 살갗을 맞대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도진은 그 감정을 전부 토해 낼 생각이 없었다. 왜냐하면 현우가 언제나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그러니까 너는 살아.

    현우의 목숨을 바쳐 살아남는 건 원하지 않았다. 도진은 떨리는 손을 뻗어 현우의 뺨을 쓰다듬었다. 매끄럽던 뺨이 젖어서 축축했다. 소리 없이 서럽게 우는 현우의 모습에 가슴이 아파 왔다.

    울리고 싶지 않은데 울려 버렸다.

    울지 마.”

    현우는 대답 없이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안 울어.”

    먹히지도 않을 거짓말을 하며 도진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여전히 손은 커다랬지만, 힘이 느껴지질 않았다.

    망할 천족!

    치료할 수 있다며. 그럼 치료해 주면 되잖아. 마족이건 천족이건 그게 그렇게 중요해?

    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고는 도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침대 위로 올려 주었다.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쉬고 있어.”

    그렇게 말한 현우는 미리엘에게 다가가 그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을 낚아챘다.

    따라오십시오.”

    당황한 미리엘이 손을 빼내려 했으나, 현우를 이겨낼 수는 없었다. 그야 마계에 있을 때는 알베르크와 쌈박질도 했던 몸이다. 그보다 아래 급인 미리엘 정도야 손쉽게 다룰 수 있었다.

    !

    가준이 따라가려 했지만, 몸을 찌르는 살기에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알베르크도 따라오지 마.”

    돌아보는 눈동자가 사납다. 알베르크는 어깨를 으쓱하곤 양손을 들어 보였다.

    따라가야지!

    답답한 가준이 주먹으로 가슴을 쳤으나, 알베르크는 태평스러워 보였다.

    현우가 천족한테 무슨 소리를 할 줄 알고!

    아마도 목숨을 줄 테니 한도진을 치료해 달라고 하겠지?

    그걸 알면서 왜 안 따라가?

    그야 애송이가 거기까지 원할 것 같진 않으니까.”

    원하지 않는다고대놓고 목숨을 내놓으라 했는데?

    가준의 말에 알베르크가 피식 웃었다.

    보아하니 아직은 천족의 사상에 덜 물든 것 같거든. 더 묵은 천족이었으면 나도 말렸지.”

    확실해?

    확실하다.”

    그제야 가준은 몸에서 긴장을 풀었다. 그 사이 도진은 까무룩 다시 정신을 잃었다. 아니었다면 그가 가장 먼저 일어나 현우를 따라갔겠지.

    그나저나 너에게 한도진은 경쟁자 아닌가굳이 살릴 필요가 없을 텐데?

    그러는 너야말로. 한도진을 살릴 이유가 없지 않아?

    그래, 그렇지.”

    알베르크는 손으로 턱을 쓸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군.”

    가준은 머리를 손으로 긁적였다. 이놈도 저놈도 전부 바보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내주면서 본인도 왜 내주는지 모른다.

    모르면 됐다.”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가준은 그대로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

    본의 아니게 옥상 구석으로 끌려온 미리엘이 화를 냈다. 그러자 현우가 그를 안쪽으로 밀어 넣더니 손을 들어 벽을 후려쳤다.

    !

    도무지 사람이 냈을 것 같지 않은 엄청난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옥상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미리엘.”

    ?

    현우의 박력에 미리엘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몸집도 작고 강해 보이지도 않은데, 묘하다.

    제 목숨을 준다면 그를 치료해 준다고 했지요?

    그랬었지.”

    그렇다면 지금 드리겠습니다.”

    가슴을 펴고 다가오는 모습에 미리엘은 기겁하며 몸을 젖혔으나 더 이상 뒤로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현우의 눈을 마주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 인간이 소중한가?

    네.”

    목숨을 버려도 괜찮을 정도로?

    네.”

    미리엘은 차분하게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가 말하길 인간은 나약하여 쉽게 악에 물든다고 하였다. 이 인간도 그러하다 여겼다. 마족인 알베르크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이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나약한 인간이 남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그렇기에 시험하고자 했다. 과연 그는 끝까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지.

    미리엘은 현우와 거리를 두고 창을 꺼내 들었다. 악한 것을 물리치라 말하며 선물해 주신 소중한 창. 그 창으로 그의 목을 겨눴다.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괜찮습니다.”

    미리엘은 힘을 끌어모으며 창을 내질렀다. 빠른 속도로 뻗은 창은 현우의 목을 향했다. 그리고 그의 목을 약간 파고든 채 멈춰 섰다.

    피하거나, 울거나, 떨거나, 살려 달라고 하거나. 수많은 상상 중 어떤 것도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저 웃으며 서 있을 뿐이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가?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미리엘의 물음에 현우는 눈을 데굴 굴리더니 대답했다.

    여기서 말해야 합니까?

    그래.”

    아직 도진 형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않았는데.”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다.”

    좋습니다. 말하겠습니다.”

    현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더니 말했다.

    제가 도진 형을 좋아하니까요.”

    좋아한다고?

    네, 저는 한도진을 좋아합니다!

    크게 소리친 현우는 후련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저 뒤쪽에서 그를 바라보는 다른 인간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알았으면 소리를 낮췄겠지.

    알겠다.”

    미리엘은 창을 거둬들였다. 그 와중에 현우의 목에서 피가 났지만, 그도 현우도 신경 쓰지 않았다.

    네가 원하는 사람을 치료해 주겠다.”

    정말입니까?

    진실이다.”

    그렇다면 대가는?

    목숨은 됐다. 그냥 시험해 보기 위해 한 소리니까. 대신 마족을 감시하기 위해 나도 같이 다니겠다.”

    미리엘의 말에 현우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감사합니다!

    좋아. 그러면 도로 돌아가도록 하지.”

    잠시 모습을 비췄던 다른 인간은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인간치고는 제법 대단한 실력을 가진 모양이었다. 딱히 적의를 보이는 것 같진 않았으니 적은 아닌 것 같은데.

    미리엘은 그가 사라진 자리를 힐끔 바라보다가 현우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뭐, 상관없겠지.

    지나가던 사람이었을 수도 있고.

    그럼 가죠!

    일단은 이쪽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았다. 미리엘은 다시 손을 잡는 현우를 떨쳐 내며 말했다.

    혼자서도 갈 수 있다!

    네, 알겠습니다!

    우울하던 얼굴보다는 이쪽이 훨씬 보기 좋다. 미리엘은 그런 생각을 하며 현우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96.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선우는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이미 병원은 벗어났고, 어딘지 모를 공원 한복판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형이 모르는 남자의 손을 잡고 달리기에 무슨 일인가 싶어서 따라가 보았을 뿐인데.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어 버렸다.

    저는 한도진을 좋아합니다!

    형이 그렇게 말했다. 형이 말하는 좋아가 물건을 좋아하는 의미의 좋아가 아닌 건 알고 있다.

    알고 있어.

    형은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이 영원하기 힘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상에는 단 둘뿐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이 존재했고, 그중에 형의 마음을 끄는 자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각오하고 있기로 했는데, 막상 닥치니까 가슴이 아파서 견디기 어려웠다.

    아직도 눈을 감으면 좁은 방안에서 자신을 안아 주던 형이 생각나는데. 언제나 둘이 같이 할 거라던 약속이 생각나는데.

    어떻게 그래.”

    형이 원망스러웠다.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 사이 다른 사람에게 빠졌나. 아니, 어쩌면 애초에 헤어져 있던 세월이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계속 같이 있었더라면, 그렇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지나간 과거가 아쉽다.

    형.”

    선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

    미리엘은 약속을 지켰다. 혹시라도 중간에 다른 말을 하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그는 도진에게서 저주를 거둬 냈다.

    천족은 쉽게 해 내는 걸 넌 왜 못해?

    가준의 심술이 담긴 질문에 알베르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성의 궁합 때문이지.”

    저주를 해주하거나, 독을 해독, 상처를 치유하는 방면에서는 천족이 손꼽힌다 하였다. 일단 저주에서 해방되자 도진의 숨소리가 한결 편안해졌다.

    저주에 당한 동안 깎여 나간 체력과 건강이 문제긴 했지만, 원래 바탕이 튼튼한 만큼 빨리 회복될 것이라 하였다.

    고맙습니다!

    현우는 미리엘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됐어.”

    미리엘은 손을 휘저으며 대충 인사를 받았다.

    일단 현우의 부탁을 받아서 저주를 해주하긴 했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 결과였다.

    하지만 찝찝함은 계속 남아 있었다. 상대는 무려 마족이 따라다니는 인간이었으니까. 그래서 조금 거리를 두자고 생각했다.

    재차 절이라도 할 것 같은 현우를 밀어 내며, 미리엘은 병실을 나섰다. 그러다 어두운 표정으로 이쪽을 향하는 인간 하나를 발견하였다.

    넌 누구지?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누구십니까?

    그쪽은 지선우. 현우의 동생이지.”

    어느새 뒤따라 나온 가준이 짧게 설명했다.

    동생이라고?

    저쪽이 훨씬 큰 것 같은데미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그 이상 참견하진 않았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왔냐?

    혹시나 해서 힐러들을 알아보러 다녔다.”

    아하그런데 이제 힐러는 필요 없을 것 같아. 저쪽 천족 양반이 저주를 풀어 줬거든. 의사가 다녀갔는데 이제는 자연스럽게 자가 회복을 기다리면 된대.”

    잘됐군요.”

    표정은 그렇지 않은데.”

    가준의 말에 선우가 새삼 무슨 소리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놈의 브라콤. 가준은 혀를 차고는 선우를 내버려 둔 채 멀어지는 미리엘의 뒤를 따랐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 저 천족을 감시할 사람이 그뿐이었다.

    어이, 같이 가!

    싫다내가 왜 너 같은 인간과 같이 가야 하지?

    여기 지리는 하나도 모르잖아!

    후다닥 따라잡자 미리엘이 대놓고 미간을 찌푸린다. 하지만 가준은 그에 굴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그의 곁에 붙어 섰다.

    알베르크와 적인 천족이긴 했지만, 어딘가 이용해 먹을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른다.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건 없지.

    그렇기에 가준은 친절함을 가장하며 미리엘을 병원 내 카페로 이끌었다.

    선우는 병실 문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이윽고 문을 열었다. 언제나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도진이 몸을 세우고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붙어 있던 형을 돌아보았다. 내내 어둡던 표정이 밝다.

    여어, 왔냐?

    선우를 먼저 반겨준 이는 알베르크였다. 대충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다시 형을 바라보았다.

    도진과 속살거리며 웃는 모습이 햇살 같다. 하지만 그 햇살은 지금 그를 비춰 주고 있지 않았다.

    속이 뒤틀린다. 부글부글 끓는 새카만 것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목을 긁었다. 그러나 손톱에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형.”

    뒤늦게 형을 부르자, 그가 뒤돌아보았다.

    선우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형이 그에게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그게 말이지.”

    현우는 흥분한 태도로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알베르크의 도움으로 천족이 내려온 일, 그 천족이 도진을 치료한 일 등등.

    그럼 아까 봤던 사람이 천족인가?

    미리엘맞아아마 가준이 따라갔을걸.”

    도가준이?

    !

    언제부터인가 가준과 형의 사이에 있던 벽도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면 이리 편하게 말할 리가 없었다.

    마음이 깊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알베르크가 선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 아는 눈이다.

    현우야, 한도진이 물 마시고 싶다는데?

    그럼 줘야지.”

    형은 몸을 돌려 도진에게로 걸어갔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렇기에 선우는 몸을 돌려 병실 밖으로 나섰다.

    가는 거야?

    할 일이 많아서.”

    그게 끝이었다. 형은 선우의 뒤를 따라오지 않았다. 선우는 그대로 계속 걸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차라리 죽어 버리지.

    형이 마음을 깨닫기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지.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을 차지했다.

    고층에 머문 엘리베이터는 쉽게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참다 못해 계단으로 향했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어두운 계단이 마치 제 마음 같았다.

    흐음.”

    병실을 나선 선우를 보는 알베르크의 눈이 반짝였다.

    일이 재밌게 돌아간다.

    형에 대한 독점욕이 강한 동생은 점점 어둠에 잠식되어 가고 있었다.

    천족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인간은 나약하여 쉽게 물들고 망가진다. 그건 몸이 약하단 소리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S급 각성자는 망가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들이 말하는 건 마음이었다.

    집착이 심해지더니 한계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과연 망가지기 시작한 마음은 얼마나 버틸까.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예전보다 마기를 접하기 한결 쉬워졌다. 마족의 일부가 침투하여 수시로 포털을 열어 대기 때문이었다. 마기는 약한 마음을 정말 쉽게 파고든다.

    원인은 한도진이겠지.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한도진을 살린 건 잘한 일인 모양이었다. 잘하면 한도진과 지선우를 붙여 둘 다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도덕적인 선택은 아니었지만, 어쩌랴. 마계에서 태어나 이렇게 자라난 것을. 집착할 모든 것이 사라지면, 그땐 현우도 태어난 곳을 버릴 수 있겠지.

    알베르크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

    도진이 깨어난 걸 알게 된 시점에서 선우는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급히 거래처와의 일을 해결하고, 미국이 건네준 감사의 선물을 받았다.

    그 사이, 미국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바카디가 범죄자로 낙인찍히고 불사조 길드원의 대부분이 수배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레온이 세계 각성자 협회의 협회장이 되었다. 바카디가 일을 벌인 걸 대부분 수습한 이였던 지라 별다른 반대도 나오지 않았다.

    축하드립니다.”

    협회장 선출 축하 파티는 소소하게 열렸다. 호텔의 홀을 하나 빌려 중요한 인원만을 초대하여 가볍게 식사를 했다. 원래 예정하고 있던 규모에 비해서는 초라할 지경이었다.

    감사합니다.”

    한국의 대표로 나선 선우의 인사를 받으며, 레온 또한 답례를 했다.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걸 실천할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요.”

    레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한국에 이어 미국의 뉴욕이 엉망이 되었다. 자연 다른 나라들도 각자의 일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등급이 높은 각성자를 도로 불러들였다.

    한국도 최근 선우에게 귀국할 것을 요청했다. 더는 불안해서 버티기 힘든 모양이었다. 다행히 도진도 많이 회복되었으니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언젠가 도움이 필요하면 불러 주십시오.”

    레온은 그 말을 남기고 다른 사람을 상대하러 몸을 돌렸다. 신념이 대단한 이다 보니, 자신이 한 말을 어기진 않을 것이다.

    미국에 와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수확도 많았다. 이를 바탕으로 선현 길드는 더욱 더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귀국은 전세기를 이용했다. 공항에 몰래 착륙하였는데도, 이미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잔뜩이었다. 어디서 소식이 새어 나간 모양이었다.

    지선우 씨뉴욕에 포털이 열렸는데요. 그에 대해 정확히 들을 수 있겠습니까!

    활약이 대단했다고 들었습니다알려 주십시오!

    수많은 기자부터 시작해서.

    현우야아악다치지 않았어?

    우윷빛깔 지선우국위선양!

    형제에게 붙은 팬들까지. 공항은 난리가 났다.

    97.

    미리 대기시켜 두었던 경호원들이 아니었으면 공항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예전 생각나네.”

    현우는 선우를 보며 해실 웃었다.

    그러게.”

    선우는 그리 답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요즘 동생이 멀게 느껴졌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이라도 달라붙어 무슨 일인지 캐 냈을 텐데. 하도 회피하는 통에 그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그렇게 먼저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남은 이는 현우와 그가 밀고 있던 휠체어에 탄 도진뿐이었다. 빠른 회복세를 보이긴 했지만, 아직은 불안했던지라 억지로 휠체어에 태웠다.

    괜찮아?

    표정이 가라앉은 선우를 보며 도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 왔다.

    괜찮아.”

    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도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다시 앞을 보라는 소리였다.

    인간이 많군.”

    사람이라고 해.”

    인간이건 사람이건 비슷한 뜻 아닌가?

    여기서 대놓고 천족이라고 말할 건 아니지그러면 어느 정도 말투를 고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뒤에서는 미리엘과 가준이 투닥투닥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둘이 제법 친해진 모양이었다.

    알베르크는?

    도진이 물었다.

    잠시 미국에 더 머무른대. 마족의 흔적을 잡아 보겠다고.”

    웬일로?

    그런데 신경 쓰고 움직일 위인 같지는 않았는데. 도진은 의심을 품었다. 반면 현우는 그를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부탁한 게 있거든.”

    당했으면 복수를 해야지, 얌전히 있는 건 맞지 않았다. 언제나 그쪽에서 먼저 쳐들어 왔으니 한 번은 반대로 해 줘야지.

    그 이유로 현우는 알베르크를 미국에 남겨두고 왔다. 알베르크는 싫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나중에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기로 했다.

    알베르크가 원하는 거라니 좀 불안하긴 했지만, 본인이 큰 걸 요구하지는 않을 거라 장담했다.

    무슨 부탁인데?

    그건 비밀.”

    난 알고 싶은데?

    그보다 형은 좀 더 쉬어야 해. 다른데 신경 쓰지 말고 요양에만 집중하자.”

    현우는 단호하게 말하며 이야기를 끊었다. 도진이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질 뻔했지만, 어떻게든 극복해 냈다.

    복수할 땐 혼자 간다!

    알베르크와 미리엘은 어쩔 수 없이 데려가야겠지만, 그 외의 사람은 데리고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보통 위험한 자리여야 말이지.

    같이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이제는 가준에게도 정이 들었다. 그렇다 보니 다치는 사람이 느는 건 원치 않았다.

    공항을 빠져나와 차 앞에 선 현우는 곧바로 도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이건 좀 부끄러운데.”

    도진이 부끄러워했지만, 상대는 환자다. 조금의 부담도 얹어주고 싶지 않았기에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를 차에 태우고 나서 휠체어도 정리해서 실었다.

    그런 다음에는 차를 나눠 타고 선현 길드에서 따로 준비한 안가로 향했다. 원래 지내던 곳에 돌아갈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당분간은 이러는 쪽이 나으리라 판단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기자들은 도진을 제외한 셋이 나눠서 상대하기로 했다.

    괜찮다니까.”

    도진이 끝끝내 괜찮다고 주장해 보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일단 쉬어. 다 회복된 다음에는 얼마든지 굴려 줄 테니까.”

    그건 그것 나름대로 무섭네.”

    현우의 말에 도진이 웃음 지었다.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회복에 전념한 탓에 다시 살이 좀 붙었다. 하지만 여전히 예전보단 말랐다. 저주가 몸을 좀먹었기 때문이었다.

    자.”

    현우는 가지고 있던 가방을 뒤져 에너지바를 꺼냈다.

    아까 아침 먹었잖아.”

    이건 간식.”

    도진은 저항 없이 얌전히 에너지바를 받아들어 물었다. 각성자들이 포털에 들어갈 때 식사 대용으로 가지고 들어가곤 하는 것이라 금세 포만감이 든다.

    그렇지만 현우는 손을 쉬지 않았다. 에너지바를 다 먹으면 사탕, 사탕을 다 먹으면 초콜릿. 가방에서 뭔가가 계속 튀어 나왔다.

    그 와중에 목마를까 봐 음료도 건네준다.

    이러다 살찌겠어.”

    안 쪄, 안 쪄.”

    현우는 그리 말하며 계속 도진에게 무언가를 떠넘겼다. 그러는 사이 차는 안가에 도착했다. 개인 소유의 산에 위치한 제법 규모 있는 별장이었다.

    괜찮네.”

    그리 말한 가준이 미리엘을 데리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이어 현우는 다시 휠체어를 펴고 도진을 앉혔다.

    도진은 난감해하면서도 그 모든 걸 받아들였다.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오는데 어찌 거절하랴.

    휠체어에 탄 채 안으로 들어가니 넓은 거실이 보였다. 그 사이 미리엘과 가준은 이미 방을 정한 모양이었다.

    넌 어느 방에서 지낼 거야?

    제일 큰 방.”

    현우는 그리 말하고 여기저기 문을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가장 큰 방에 도진의 휠체어를 밀어 넣고 자신도 들어왔다.

    내 방은?

    도진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답이 돌아왔다.

    환자에게 개인 방이 어딨어. 같이 써야지.”

    같이?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좀 난감한데.

    도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좋아하는 사람과 같은 방을 쓰게 되다니.

    거기다 여기는 방해할 만한 사람이 없다. 알베르크는 미국에 남았고, 선우 또한 중요한 일이 있다 하여 빠졌으니 남는 건 가준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천족인 미리엘을 쫓아다니느라 바쁘다. 미리엘은 성스러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가끔 나사 빠진 것 같은 행동을 하거나 사고를 쳤다. 자연 가준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의외로 이종족의 보모가 적성에 맞는 모양이지.

    가준이 알았더라면 분노에 차 소리를 지를 생각이었지만, 지금 그는 여기 없었다.

    현우야, 그래도 방은 따로 쓰는 게 낫지 않을까.”

    일단 도진은 이성적으로 현우를 설득해 보기로 했다.

    그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안가에서 무슨 일이 생기겠어.”

    몰라. 하여간 안 돼. 여기서 지내.”

    도진은 몇 번인가 더 현우를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그에게 졌다.

    그렇게 짐을 정리하고 일단 식사를 하자는 생각에 거실로 나서자 가준이 소리를 높였다.

    왜 둘이서 같은 방에서 나와!

    그러자 현우가 도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환자.”

    그럼 너는?

    나는 간병인.”

    뭔가 좋으면서도 싫은 느낌이다. 이왕이면 연인으로서 같은 방을 쓰면 좋겠는데. 도진은 아쉬움에 마른 입술을 핥았다.

    정말 간병만 하는 거야?

    간병 외에 뭐를 하는데?

    아니, 그럼 됐다.”

    가준은 그리 대답하며 먼저 주방으로 들어선 미리엘을 따라 움직였다. 식사는 미리 준비된 재료로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의외로 요리를 잘하는구나, 인간.”

    가준은 의외로 요리를 잘해서 거의 대부분을 그가 하였다.

    이름 말해 주지 않았던가?

    알게 뭔가. 나에겐 다 비슷해 보인다.”

    알았다, 천족. 너는 이만 먹으면 될 것 같구나.”

    접시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고 나서야 미리엘은 가준의 이름이 생각난 모양이었다.

    이제 기억났다. 도가준.”

    그래, 잘했어.”

    가준은 음식이 담긴 그릇을 도로 내려놓았다. 겉보기에는 그가 천족을 조련하는 것처럼 보였다.

    형도 많이 먹어.”

    응.”

    도진의 앞에 있는 앞 접시에 음식이 산처럼 쌓여 갔다. 현우는 도진의 배가 빵빵해질 때까지 밥을 먹였다. 만약 그가 튼튼한 S급 각성자가 아니었다면 진작에 탈이 났을지도 몰랐다.

    식사를 하고 나서는 시간이 남았다. 안가에는 딱히 준비된 놀거리가 없었다.

    난 발코니에서 경치를 즐기겠다.”

    미리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위층으로 올라갔다.

    난 그럼 쟤 감시.”

    가준은 그런 미리엘을 따라 올라갔다. 그러고 나니 아래층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뒷정리는 내가 할게.”

    나도 도울게.”

    환자는 저리 가.”

    이제 환자가 아니라니까.”

    도진은 툴툴대며 마른 행주를 집어 들었다. 현우가 설거지를 해서 그릇을 넘기면 도진이 물기를 닦았다. 그러다 보니 주방에는 물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왔다.

    설거지 끝!

    나도 끝. 그럼 이제 뭐할까?

    그러게.”

    둘은 잠시 눈을 마주치고 있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잘까?

    간만의 평화가 기꺼웠다.

    좋지.”

    둘은 다시 방으로 이동했다. 천천히 휠체어를 미는 손길에 도진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 내내 과한 보호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래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방에 도착하자 도진은 현우에 의해 얌전히 침대 위에 눕혀졌다.

    잘 자.”

    그리고 나가려는 현우를 도진이 붙잡았다.

    너는 어디서 자게?

    방이 많으니까 어디서 자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침대에 공간이 남는데?

    그렇긴 하지만.”

    현우는 눈만 깜박이며 얌전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도진이 한 번 더 잡아당기자 그대로 딸려오더니 얌전히 가에 눕는다.

    자자.”

    응.”

    빳빳하게 굳은 몸이 마치 강시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도진은 눈을 감았다. 지금은 눈을 감는 게 현우를 위하는 일일 것 같아서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현우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조금씩 다가온 현우는 어느새 도진의 바로 곁에 다가와 있었다.

    이어 무언가가 눈 위에서 왔다 갔다 움직였다. 손을 움직여서 잠든지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98.

    그런 간단한 행동마저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정말 자신이 깊이 빠지긴 빠진 모양이었다. 도진은 자꾸 실룩거리는 입꼬리에 힘을 주며 계속 잠든 척을 했다.

    현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을 흔드는 걸 멈췄다. 도진이 잠든 걸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 반대이거나.그건 다음 행동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가만있자니 팔뚝에 부드러운 무언가가 닿았다.

    무언가 했더니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심장이 크게 내려앉았다. 정말 현우가 맞나눈을 떠서 그걸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도망가리라.

    아니, 이미 도망가고 싶어 하는지도 몰랐다. 심장이 이리 격렬하게 뛰는데 그걸 눈치 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현실은 상상과 달랐다. 현우는 도망가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옆에 누울 뿐이었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른 숨소리가 들려 왔다. 잠든 모양이었다.

    도진은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그러자 이쪽을 향해 누운 현우가 보였다. 닿아 있는 곳이라고는 어색하게 내뻗은 손끝뿐이었지만, 도진을 흥분시키기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짜 자는 걸까?

    아니면 자신처럼 자는 척하는 걸까. 도진은 팔뚝에 와 닿은 현우의 손끝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그래도 감은 눈은 열리지 않았다.

    조금 욕심을 부리고 싶어졌다. 도진은 시트를 움켜쥐고 천천히 당겼다. 그러자 현우가 좀 더 가까이 끌려왔다.

    들킬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에 잠시 여유를 두자 그가 그대로 굴러와 도진의 가슴팍에 걸려서야 멈춰 섰다.

    얼결에 끌어안은 모양새가 되었다. 들어 올린 손은 허공을 헤매다 현우의 등에 내려앉았다. 사랑스러운 마음이 넘쳐흘러 밖으로 새어 왔다.

    현우야, 좋아해.”

    눈을 감은 현우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지만, 또다시 말해본다. 너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현우야, 사랑해.”

    기분 탓인가작은 몸이 움찔거린 것 같았다.

    진짜 자는 거야?

    물음에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도진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행복한 오후였다.

    으아아아!

    현우는 비명을 지르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지금 소리를 높이면 도진이 잠에서 깨게 된다.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지?

    도진이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노골적인 고백을 듣게 되니 가슴이 술렁였다. 얼굴에 열이 오르고, 심장이 터져나갈 것만 같았다.

    자신의 마음은 얼마 전에 깨달았다. 그렇기에 고백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동안 도진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랬는데, 도진은 손쉽게 사랑을 말한다.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다. 현우는 약간의 심술을 담아 단단한 가슴팍에 이마를 퍽 박았다.

    그래, 자자.”

    잠결에 물든 목소리가 현우를 토닥여 주었다.

    그게 아닌데.

    뭐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래, 일단은 쉬자. 당분간은 쉬기로 했으니 말을 꺼낼 기회가 생기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

    그 무렵, 선우는 수많은 일정을 소화해 내고 있었다. 부길드장인 찬영을 남겨 두고 갔지만, 그가 모든 일을 처리할 수는 없었다. 돌아오자마자 일거리가 넘쳐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네, 그럼 이 건은 그렇게 처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와중에 다른 길드의 길드장도 만나야 했다. 미국에서 알게 된 사실의 일부를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정보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큰 가치를 지니지만, 때로는 풀어야 할 때가 있었다. 지금이 그때였다.

    마족이라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혜선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안 놀라게 생겼어우리가 마계에서 지낸 적이 있긴 하지만, 그때 마족은 단 하나도 보지 못했잖아. 그런데 지금 지구에 마족이 있다니.”

    맞습니다. 그 건은 확실히 놀랄 만한 일입니다.”

    자윤이 혜선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보탰다.

    그럼 지금 이 난리를 치는 우로보로스가 마족이 관련된 단체라는 소리네.”

    그런 셈이죠.”

    자윤을 따라온 아윤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알베르크나 미리엘의 존재는 밝히지 않았다. 일단 아군으로 분리된 이들이지만 좀 더 감추어 둘 생각이었다. 미리 알베르크와도 이야기해 두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마족은 좀 세지 않나?

    상대가 강하건 그렇지 않건 어차피 해치워야할 적입니다. 자신 없습니까?

    아니, 그런 소리는 아니고!

    혜선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럼 상관없지 않습니까.”

    그런 셈인가.”

    그런 셈입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일어나?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하긴. 선현 길드는 지선우 위주로 돌아가는데 한참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바쁘기도 하겠지.”

    그러게요. 그런데 현우 씨는 어디 있어요?

    뒤늦게 아윤이 현우를 찾았다.

    당신이 형을 왜 찾습니까?

    그, 그야 친구니까요?

    선우의 표정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평소에도 형과 가까이 하는 사람을 싫어하긴 했지만, 오늘따라 유독 반응이 날카롭다.

    지선우.”

    자윤이 앞서 나서며 아윤을 자신의 뒤로 밀어 냈다.

    과한 대처군요. 일단 저희는 아군입니다. 저는 아군에게 해를 끼치지 않습니다.”

    그건 자윤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는 이성적이고 냉철한 사람이었고, 감정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형이 나타나고 나서 변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본성이 어디 가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이 움직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선우는 결국 현우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가 회의실을 나선 뒤에야 아윤은 자윤의 뒤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뭐 실수했나?

    아니, 내가 보기엔 실수한 거 없는데.”

    혜선이 그리 말하며 준비된 커피를 한 번에 마셨다.

    그냥 브라콤이 브라콤 한 거 아냐?

    그런가요하지만 예전보다 더 심해진 느낌인데.”

    미국에서 좀 힘들었나 보지.”

    으음.”

    아윤은 팔짱을 끼고 고민해 봤지만, 그런다고 해서 풀릴 일은 아니었다.

    불안한데.”

    지선우를 좀 더 지켜보도록 할게.”

    자윤은 아윤의 말에 냉큼 대답했다. 동생의 감이 얼마나 맞아떨어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일인가?

    여기서 그나마 태평해 보이는 이는 혜선 뿐이었다.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그렇게 해 둬. 그나저나 도가준 이 새끼는 왜 안 나온 거람.”

    그러게요이런데 빠질 사람이 아닌데. 백호 길드에도 아직 복귀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원래는 선우가 가준에 대한 이야기도 했어야 했는데, 그냥 가 버린 것이다. 그렇기에 남은 사람들은 도가준의 행방에 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

    !

    가준은 갑자기 간지러운 귀를 탁 치며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음료는 아직인가?

    내가 아주 지 하인이지.”

    틀린 말은 아니군.”

    미리엘은 그리 잡하며 가준의 손에 들린 음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의자에서 일어나 몇 발자국 걸어오는 것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으휴.”

    마음 같아서는 한 대 패 주고 싶었지만, 상대는 천족이다. 이용가치가 얼마나 많을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 호감을 사 두는 편이 나으리라. 가준은 그렇게 생각하며 오늘도 참을 인을 마음에 새겼다.

    자, 드십시오. 주인님.”

    오냐.”

    미리엘은 태연하게 음료를 마시며 발코니에서 밖을 바라보았다.

    여기 경치가 좋아.”

    그래. 참 좋지.”

    가준은 그렇게 대답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경치가 너무 좋아도 문제다. 이놈의 천족은 경치 좀 보겠다고 내내 발코니에 틀어박혀 있고, 그 때문에 뒤치다꺼리를 하는 가준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덕분에 현우가 도진과 둘이서만 다니는 걸 방치해 둬야 했다. 지금도 보라. 별장 앞의 풀밭에서 돗자리를 펼쳐 두고 둘이서 소풍을 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에게는 오라는 소리도 한 번 안했다.

    억울하다!

    지선우는 뭐하느라고 아직 별장에 코 끝도 안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만 오면 미리엘을 대신 맡겨 버리고 나가 버릴 텐데. 휴양도 좋지만, 그것도 길어지니 한계가 왔다.

    내버려 둔 길드도 걱정되었고. 가끔 별장을 벗어나 부길드장과 통화를 하곤 했지만, 그래도 불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애초에 백호 길드도 선현 길드와 다르지 않았다.

    도가준이 있어야 길드가 수월하게 돌아간다. 그걸 생각하며 한숨짓고 있는데 차가운 뭔가가 볼에 와 닿았다. 뭔가 싶어 돌아 보니 텅 빈 유리컵이었다.

    다 마셨다.”

    또 달라고?

    그래. 그리고 초조해하지 말아라. 어차피 인생은 길지 않은가. 조금 쉰다고 어떻게 되진 않아.”

    애송이 천족에게 마음이 읽힐 정도였나. 가준은 머쓱한 표정으로 볼을 문질렀다.

    그보다 염력도 쓰네?

    기본이지.”

    소리 없이 유연하게 움직이는 걸 보니 보통 실력이 아니다.

    천족의 소양이다.”

    별게 다 소양이네.”

    흥, 인간이 뭘 알까.”

    흥, 천족이 뭘 알까.”

    가준이 이죽이며 말을 따라하자 미리엘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기분 나쁜 녀석.”

    그런 기분 나쁜 녀석이 주는 음료는 잘 마시고?

    그나마 유일한 네 장점이 아닌가.”

    그리 말하며 손을 휘휘 젓는데 이게 칭찬인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가준은 다시 컵을 채우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99.

    날씨가 좋네.”

    그러게.”

    현우는 돗자리 위에 누워 기지개를 쭉 폈다. 샌드위치를 잔뜩 먹었더니 배가 부르고 나른해졌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는 도진의 시선이 어쩐지 간지럽다.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낮잠 사건 이후 둘의 사이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으니까.

    이러다 언젠가는 고백을 하게 되지 않을까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 그땐 뭐라고 대답해 줘야 할까.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이건만 상상만 해도 즐겁다.

    괜히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손으로 슬쩍 누르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주변을 둘러싼 초록빛의 나무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도진이 하는 말에 금방 답하지 못했던 것은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현우야, 좋아해.”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다 고개를 돌려 도진을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이 둥글게 접혔다. 웃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소와 다르지 않은 얼굴이라, 방금 들은 말이 진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자신이 환청을 들은 게 아닐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는데, 재차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우야, 좋아한다니까?

    도진이 손을 뻗어 현우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리고 현우의 손을 잡아당겨 자신의 가슴에 얹었다.

    쿵쿵.

    심장의 격렬한 움직임이 손바닥 아래에서 느껴진다.

    현우야. 내가 너를.”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쿡 박혀 들었다.

    사랑해.”

    얼핏 붉어진 도진의 귀가 보였다. 담담한 듯 보였지만, 그도 용기를 내고 있었다.

    너는?

    도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그 안에 담긴 불안감과 긴장감이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

    나는.”

    처음에는 동정심에서 도진을 거둬들였다. 그의 동생인 예원과의 인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같이 지내면서 점점 마음이 변해 갔다. 그가 편하게 느껴지고, 옆에 없으면 안 될 존재가 되어 갔다.

    마계에서 힘겹게 살아남으면서 느낀 게 있었다.

    앞으로 사랑은 하지 못하겠구나.

    괴로움에 마모된 감정을 앞에 두고 그렇게 생각했다. 이 가슴 속에 들어오는 건 앞으로 만날 동생이 전부일 것이라고. 다른 이를 더는 사랑하지 못할 거라고 믿었었다.

    하지만 마모된 감정은 되살아났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꽃을 피워 냈다.

    나도 좋아해.”

    도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어 그는 손을 뻗어 현우를 꽉 끌어안았다. 덕분에 돗자리에서 뒹굴게 되었지만, 어떤가. 기분이 이렇게 좋은데. 현우는 자신을 단단하게 끌어안은 도진의 등에 팔을 둘렀다.

    사랑해, 사랑해. 현우야.”

    귀에 박힐 듯이 반복하여 말하는 사랑의 말도 제법 좋았다.

    나도.”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한 날이었다. 그리고 둘은 그걸 감출 생각이 없었다.

    뭐어?

    막 저녁 준비를 하던 가준이 손에 들고 있던 칼을 떨어트렸다.

    사귀기로 했다고.”

    누구랑 누가?

    나랑 도진이 형이.”

    언제?

    오늘.”

    !

    가준이 절규하듯 물었다.

    그야 서로 좋아하니까?

    언제부터 그랬던 거야!

    그건 아까 대답했잖아?

    그 언제랑 이 언제는 다르잖아!

    아, 귀찮아.”

    현우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고는 바닥에 떨어진 칼을 주워 들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해.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그야 나도 널 좋아하니까제길. 이렇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

    이번에는 현우가 칼을 떨어트릴 뻔 했다.

    날 좋아한다고정말?

    그래아니면 내가 왜 네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고 생각한 거냐!

    그야 길드에 이득이 되니까 따라다니는 줄 알았지.”

    그 이유만으로 누군가를 따라다니진 않아. 내가 누군 줄 알아도가준이라고!

    한국 서열 2위 백호 길드의 길드장. 현우보다 힘은 약했지만, 그건 그가 규격 외라서 그렇고 부족한 거 하나 없는 몸이었다. 권력, 돈, 여자. 지금까지 부족했던 적이 없었다. 그런 모든 걸 던져 두고 따라다녔는데 돌아오는 답이 이런 거라니.

    가준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미안해?

    현우는 도마 위에 칼을 올려놓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어디 가?

    빨래라도 하려고.”

    그건 아까 내가 해 놨어.”

    그럼 빨래 널게.”

    아직 빨래 끝나려면 더 있어야 해.”

    더는 도망칠 핑계가 없었다. 그리고 가준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미리엘이 나타났다.

    저녁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리 태연자약할 수 없는 노릇일 테니 말이다.

    지금 준비 시작했어.”

    뭔데?

    된장찌개.”

    그게 뭔데?

    있어. 맛있는 거.”

    가준이 그렇게 답하자 미리엘은 당당하게 걸어와 식탁 의자에 앉았다.

    냄새는 이상한데설마 이걸로 만드는 건 아니지?

    그리고는 된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건 눈치가 없는 건지, 멍청한 건지.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말투도 너무 편해졌다. 가준은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그걸로 만드는 거야.”

    그럼 싫은데. 저번에 먹었던 스파게티를 해 주면 안 돼?

    천족은 원래 이렇게 먹성이 좋냐?

    있으니까 먹을 뿐이다.”

    아닌 걸 알고 있는데 튕기기는. 이런 상황인데도 미리엘의 행동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물론 그건 잠시였을 뿐이다.

    도망쳤네.”

    현우가 주방에서 도망친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가준은 칼을 물로 재차 씻고 야채를 썰었다. 뭐라도 하지 않으면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다.

    너 아까 걔 좋아해?

    양파에 이어 애호박을 썰고 있는데, 미리엘이 대뜸 물어왔다. 하마터면 애호박 대신 손가락을 썰 뻔했다.

    들었냐?

    들었지. 천족은 귀도 좋다고.”

    들었으면서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고?

    그러면 안 됐나?

    미리엘이 태연스럽게 물어왔다.

    안 되지!

    ?

    그야.”

    내가 끼어들지 않았어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을 것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멍청하다 한 것치곤 지나치게 예리한 말이 가슴을 찔렀다.

    넌 오늘 저녁 없다.”

    !

    스스로 생각해 봐.”

    가준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요리에 몰두했다. 그러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는데 요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완성된 된장찌개는 평소보다 짰다.

    사라졌던 현우는 저녁식사 시간에는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옆에는 도진이 함께 서 있었다.

    뻔뻔하긴.”

    대신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냐, 내가 하도록 하지.”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죽이 잘 맞는다.

    그런데 찌개가 너무 짠 것 같은데. 넌 먹지 마. 계란말이라도 할 테니까.”

    형도 먹지 마. 아직 환자인데 짠 건 몸에 안 좋아.”

    그놈의 환자, 환자이미 다 나았는데 아직도 환자라 말하는 걸 보니 속이 답답했다. 하지만 가준이 끼어들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진짜 난 안 줄 거야?

    안 줘!

    이건 화풀이 아냐?

    그리고는 뭐라 더 말하려는 미리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대로 뒀다가는 무슨 말이 나올지 모른다. 가준은 결국 미리엘에게 밥을 내줘야 했다.

    !

    불만이면 먹지 마!

    그래도 맛있어.”

    짜다며!

    그것도 그렇지.”

    미리엘은 불평불만을 내뱉으면서도 밥을 두 그릇 먹어 치웠다. 더불어 도진이 만드는 계란말이도 얻어먹었다.

    이게 천족인지 돼지인지.

    가준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거지는 너네가 한댔지?

    그래.”

    그럼 난 산책이나 다녀온다.”

    나는!

    중간에 미리엘이 끼어들었지만, 이번에는 떼어 놓았다. 잠시 혼자서 머리를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너는 하고 싶은 거 해.”

    가준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그러다 막 안으로 들어오려는 선우를 만났다.

    이제야 오냐?

    일처리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나도 할 게 많은데 말이지. 그래도 지금이라도 와서 다행이네. 이제 천족 뒤치다꺼리는 네가 해라.”

    형은 어디 있습니까?

    주방에 있을 거야.”

    곧 죽어도 자신이 천족을 보겠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그게 또 얄미웠다.

    나 이제부터는 천족 안 본다?

    마음대로 하십시오. 천족이 아이도 아닌데 자기 몸은 자기가 추스르겠지요.”

    그걸 못하니까 말이지. 일단 성인이라고는 들었는데 하는 행동이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자라 온 도련님 같다.

    냉정하긴.”

    가준은 안으로 들어가는 선우의 등을 보며 혀를 찼다.

    참, 너 그거 아냐?

    뭘 말입니까?

    길어지는 대화가 귀찮은지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너희 형, 한도진과 사귀기로 했단다.”

    “……네?

    순간 주변의 기온이 내려갔다. 영상이던 온도가 영하까지 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이어 흙바닥이 얼어붙고, 나무에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야, 야너 지금 능력 쓰고 있어!

    기겁한 가준이 선우를 말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선우의 주변에 물방울이 맺히더니, 하얗게 변해 갔다. 그리고 점점 그 범위를 넓혀 나갔다.

    각성자의 폭주 현상이었다.

    보통 각성자는 정신력과 힘이 비례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힘을 가누지 못하고 폭주할 염려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거의 없다는 거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가끔 드물게 등급이 높은 각성자가 폭주할 때가 있었다. 감정이 이성을 뛰어넘을 때. 더 이상 능력이 통제되질 않는다.

    아니, 그건 알지만.

    보통 형에게 연인이 생긴 걸로 폭주하나상대가 남자라서 그런가호모 포비아라든가.

    가준은 여러 가정을 세우다가 이내 포기했다. 이유가 뭐건 어떻단 말인가. 일단은 선우를 안정시키는 게 중요했다.

    할 수 있을까?

    가준은 단 한 번도 지선우에게 이겨 본 적이 없었다.

    100.

    소리쳐 안에 있는 사람을 부를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가는 선우를 흥분시킬 수도 있다.

    어차피 알아서 눈치채고 나올 테고.

    그보다 더한 힘을 가진 현우나 도진이 이를 눈치채지 못할 것 같진 않았다.

    그나저나 당장이 문제인데.

    폭주한 각성자는 몬스터와 다르지 않다. 좀 더 본능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을 상대로 큰 상처 없이 폭주를 가라앉혀야 한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해내고 싶었다. 가준은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건 그가 가진 수면제 중 가장 강한 것으로 살갗과 닿기만 해도 효력을 발휘한다. 그 때문에 몬스터를 생포할 때 쓰곤 했지만, 사람에게도 통한다. 써 본 적이 있기에 양을 적절히 조절하는 법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다가가냐는 건데.

    가준은 원거리 계열 각성자가 아니다. 그런 탓에 어려운 몬스터를 만날 채비를 할 때는 바람계열 각성자를 반드시 동반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없지.

    손을 우득 꺾은 가준은 선우를 노려보았다.

    선우야!

    안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선우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기회를 붙잡은 가준은 곧바로 선우에게 달려들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서 날카롭게 솟아난 얼음송곳 때문이었다.

    인정사정없네.”

    얼음송곳은 그 자리에 멈춰 서지 않고 계속해서 범위를 넓혀 나갔다.

    지선우!

    재차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송곳을 피해가며 기회를 노리는 가준과 다르게, 현우는 대놓고 박살을 내며 달려오고 있었다. 다리가 바닥을 지날 때마다 살벌한 얼음송곳이 부서져 내렸다.

    그러나 상대가 친동생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덤벼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현우를 바닥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감싸 안았다. 그러더니 바로 선우의 옆까지 날라 놓았다.

    “……형.”

    폭주로 맛이 간 상태에서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가준이 접근할 때와는 다르게 곧바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현우는 선우의 팔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울상이 된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던 현우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다 다리를 들어 올렸다. 복부를 차올려 기절시킬 생각인 모양이었다.

    아이고.

    가준은 혀를 차며 재빠르게 외쳤다.

    계속 붙잡고 있어!

    다행히 현우는 가준의 말을 그대로 따라 주었다. 그는 몸부림치는 현우를 꽉 끌어안고 버텼다. 이어 도진이 가준을 선우의 바로 옆으로 이동시켜 주었다.

    하지만 얼음송곳을 치우는 배려는 현우 한정인 모양이었다.

    정강이가 얼음송곳에 긁혔다.

    재수 없는 놈.

    가준은 이를 악물고는 선우의 드러난 목에 수면제를 뿌렸다. 그러나 순식간에 몸을 낮추고 회피한 탓에 마취제는 허공을 가로 지르는 걸로 그쳤다. 폭주한 탓에 넘쳐나는 힘으로 형인 현우까지 같이 끌어당겼다.

    더 세게 잡아!

    이번에는 도진도 선우를 묶기 위해 움직였다. 밑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슬그머니 선우의 다리를 묶기 위해 움직였다. 선우는 이번에도 현우를 안아 든 채 그를 회피했다.

    힘을 써, 쓰라고!

    어떻게 선우한테 힘을 써!

    그래도 써폭주가 더 심해지면 위험하다고!

    눈을 질끈 감았다 뜬 현우는 그대로 선우의 다리를 걸고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그 와중에 동생이 다치는 건 싫은지 본인이 아래다. 그걸 도진이 그림자로 받아 냈다.

    가준은 우박처럼 몰아치는 얼음송곳을 피해 선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드러난 목덜미에 수면제를 부었다.

    성공.”

    날아다니던 얼음송곳이 그대로 스러졌다.

    뭘 뿌린 거야?

    현우의 질문에 가준은 병을 들어 보이며 답했다.

    수면제.”

    그게 코끼리만 한 몬스터도 잠재울 양이라는 건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S급 각성자쯤 되면 어지간한 몬스터보다 강하다. 그러니 별일은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야 위층에서 미리엘이 사뿐히 날아 내려왔다.

    야만스럽긴. 이 밤에 무슨 소란인지.”

    무슨 소란은. 아니, 잠깐. 그보다 너 계속 보고 있었지그러면서 도와줄 생각이 안들던?

    내가 왜 인간을 도와야 하지?

    식사를 얻어먹었잖아밥값은 해야지!

    흠, 그런가?

    미리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돕도록 하지.”

    미리엘은 현우의 품에 쓰러져 있는 선우에게 다가가 손을 얹었다.

    뭐 하는 거야?

    폭주하는 기운을 잠재운 거다.”

    그런 재주도 있었네?

    천족은 치유 계열에는 특화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임시적인 조치에 불과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소용없을 거다.”

    근본적인 문제?

    그 말에 가준은 저도 모르게 현우와 도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문제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이걸 해결할 수 있나?

    차인 지 얼마되지도 않았는데, 연달아 사건이 일어나니 그를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일단.”

    가준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숨지었다. 별장은 이미 반파되어 멀쩡한 부분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도 안쪽을 들여다보니 주방은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안에 있다가 무너져 내린다고 도망치지 못할 위인들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밖에 있는 것보단 낫겠지. 가준의 말에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우는 내가 데려갈게.”

    현우는 자기보다 큰 덩치의 선우를 조심스럽게 안아 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공주님 같아 보여 조금은 우습다. 그래도 지금 웃으면 안 되겠지. 가준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내리누르며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현우는 그나마 멀쩡한 소파를 끌어당겨 선우를 거기 눕혔다. 워낙 장신인 탓에 다리가 삐져 나왔지만, 그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사합니다.”

    미리엘은 현우가 하는 인사를 태연하게 받아쳤다.

    밥값을 했을 뿐이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정 그렇다면 받아들이지.”

    인사가 끝난 후 남은 이들은 멀쩡한 식탁에 나눠 앉았다.

    이제야 묻는 거지만,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현우의 물음에 가준이 대답했다.

    각성자의 폭주 현상이지.”

    각성자가 폭주도 해?

    하지. 사례도 몇 되지 않고 있어도 파묻어 버린 탓에 일반인은 잘 모르지만 말야.”

    왜 폭주하는데?

    가준은 폭주의 이유를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보통 감정이 극에 치달으면 폭주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하더군.”

    감정의 문제라고.”

    짚이는 구석을 찾아보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으니까.

    지선우의 경우는 형에게 많이 집착하고 있지.”

    너 설마.”

    그래, 내가 이야기했어. 네가 한도진과 사귀게 되었다고.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야 할 일이었잖아?

    그건 그렇지만.”

    현우는 마른 세수를 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생각이지만 형에게 연인이 생기면 자신의 우선순위가 밀려날까 봐 그런 거 아닐까싶기도 해.”

    그럴 리가. 선우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야. 내가 물론 형을 좋아하긴 하지만, 선우도 그 못지않게 사랑해. 우선순위를 매길 수 없다고.”

    그럼 그걸 나 말고 지선우에게 말해 봐.”

    해야지. 해야 하는데.”

    도진이 손을 뻗어 현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괜찮아. 이야기해 보자. 이해해 줄 수도 있잖아.”

    내 생각은 다른데.”

    가준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그는 지나치게 올곧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에 헤어진 형을 위해 길드를 세우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에게 다른 사람은 중요치 않았다. 갈구하는 이는 단 하나, 형뿐인 것이다. 유일한 가족이니까.

    뭐, 알아서 해 봐. 난 딱히 지선우를 좋아하지도 않고, 도움 줄 수도 없을 테니까.”

    그리고는 도로 밖으로 나갔다. 갑자기 담배를 피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미련하긴.”

    가족이 뭐라고 저렇게 된담. 대충 멀쩡한 난간을 찾아 엉덩이를 걸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간만에 마시는 연기는 참으로 달면서도 썼다.

    내 잘못이다.

    가준에게서 폭주의 이유를 듣는 순간, 떠오른 생각이었다. 소중하고 소중한 동생인데. 불안한 마음이 들게 만들어 버리다니.

    마계에서 결심하지 않았나. 동생을 위해 돌아가겠다고. 분명 그랬는데 너무 많은 행복을 가지게 된 탓에 동생의 외로움을 읽지 못했다.

    내가 그래선 안 되는데.

    도진이 옆에서 위로해 주려 했지만, 지금은 그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현우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의 곁에 앉았다.

    선우야.”

    자고있는 모습이 참으로 예쁘다. 반듯한 이마 하며, 오똑한 코, 불그스름한 입술까지. 미인의 조건은 전부 갖췄다.

    내 귀여운 동생.”

    그러고 있자니 선우의 손끝이 작게 꿈틀거렸다.

    선우야?

    깨어나려는 모양이었다.

    ?

    응, 선우야.”

    이상한 꿈을 꿨어.”

    무슨 꿈을 꿨는데?

    선우가 인상을 찌푸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형이 한도진과 사귄다는 거야.”

    가준을 좀 때려 줄 걸 그랬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그냥 넘겼지만, 애초에 원인은 그였던 것 같았다.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싫어?

    싫어.”

    선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101.

    형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우선하는 게 싫어. 형만은 내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잖아. 무엇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고.”

    어린 자신은 너무나도 약했고, 무능력했다. 수시로 아팠기에 돈을 벌어오지도 못하고,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잘했냐면 그도 아니었다. 그래서 가끔은 무서워졌다.

    쓸모없는 자신을 형이 버릴까 봐. 형이 그러지 않으리란 걸 알면서도 불안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변의 어른들은 그랬다. 형이 고생하는 건 몸이 약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 때문이라고.

    그랬기에 죽도록 노력했다. 형이 사라진 뒤에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언젠가는 다시 돌아와서 약속을 지킬 걸 알았으니까. 선우는 그렇게 현우를 믿었다.

    형, 아니지?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 뺨에 가져다 댔다. 어느새 열이 오르기 시작했는지 뺨이 뜨끈하다.

    선우야괜찮아?

    당황한 현우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너 열나!

    이 정도는 괜찮아.”

    이보다 아프고 괴로운 일은 훨씬 많이 겪었다. 든든했던 유일한 보호자가 사라진 자리는 싸늘하고 무서웠다. 하지만 형을 믿고 있었기에 버티고 버텼다.

    그러니 형은 그를 버려선 안 된다. 그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보다 답해 줘, 형. 아니지?

    선우야.”

    현우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고민이 있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평소라면 아플 테니 입술을 깨물지 말라고 했을 테지만, 지금은 말리지 않았다. 좀 더 고민하고, 괴로워하면서 결국엔 자신을 택해야 했으니까.

    형.”

    선우는 이마에 올려진 선우의 손을 잡고 거기에 뺨을 비볐다. 어릴 적에 그랬던 것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몇 번인가 현우의 입이 벙긋거렸다.

    내가.”

    괴로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린 현우가 말을 이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버려.”

    형.”

    이겼다. 역시 형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은 핏줄을 나눈 자신뿐이다.

    약속할게. 내 최우선은 너야. 언제나 그래 왔듯이. 하지만 선우야.”

    응.”

    나는 말이지. 도진 형도 좋아해.”

    아니야. 그건 착각이야.”

    위험한 상황에서 대신 몸을 던져, 착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흔들다리 효과. 선우는 형이 가진 감정을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관련하여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아니야. 죽음의 위기가 이번만 있었을까. 마계에 있었을 때는 더 많이 죽을 뻔했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지 못하는 나날 속에서 필사적으로 버티던 시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현우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한예원과 서로 기대면서도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진 않았다.

    괴로웠던 순간을 선우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힘을 감췄다. 결국엔 모든 걸 드러내게 되었지만 아직 깊은 곳에 품고 있는 기억이 있었다.

    가끔 악몽으로 찾아오는 끔찍한 기억. 지금이 그 기억의 일부를 꺼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형, 형이 괴로웠을 걸 알아. 그렇지만 그래서나를 두고 한도진을 선택할 거야그건 아니잖아.”

    선우야.”

    나를 설득하려 하지 마. 그냥 이해해 줘.”

    선우의 볼이 축축하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설득은 요원해 보였다. 포기하고 싶었지만, 동생의 닫은 마음을 어떻게 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일단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자. 너 열이 너무 높아. 병원부터 가자.”

    알았어.”

    불만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선우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도가준!

    소리쳐 부르자 가준이 고개만 내밀어 안쪽을 들여다본다.

    담배 그만 피우고. 운전할 줄 알지?

    당연히 할 줄 알지.”

    그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자.”

    그리 말하며 선우를 안아 드는데 잠자코 지켜만 보던 도진이 말을 걸어 왔다.

    여긴 외곽이라서 내려가는 데 오래 걸릴 거야. 그보다 헬기를 부르는 쪽이 빠를 테니 조금만 기다려 봐.”

    도진은 전투 중에도 무사히 살아남은 휴대폰을 들어 어디론가 연락을 넣었다. 방금 대화를 모두 들었을 텐데도 행동이 평소와 다르지 않다.

    미안해.”

    현우는 그런 도진에게 사과를 했다.

    사과하지 마. 원래 사랑에는 고난이 있는 법이잖아처남이 방해할 건 예상했어.”

    그러면서 작게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지금은 동생을 제대로 치료하는 것만 생각하자고.”

    응.”

    도진이 부른 헬기는 오래지 않아 도착했다.

    뭐야, 헬기 불렀어?

    병원이 급해서.”

    ?

    초조한 현우 대신 도진이 가준에게 대답해 주었다.

    열이 너무 올랐어.”

    폭주 부작용인가?

    수면제 탓은 아니고?

    S급 각성자가 그 정도 수면제로 어떻게 될 리 없다는 건 알잖아. 이렇게 빨리 깨어나기도 했고.”

    몬스터도 한참은 못 깨어나는데 말이다.

    길드장님!

    헬기에서 뛰어내린 자는 몇 번이고 스치듯 본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 박현희였다.

    의료진은 준비되었습니다. 이동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대체 누가 아픈 겁니까?

    으음. 선현 길드의 길드장이요?

    도진의 말에 현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선현 길드는 국내 1위의 길드다. 헬기를 부르는 것도, 뛰어난 의료진을 준비하는 것도 그들이 하면 더 쉬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굳이 자신을 부르다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단 점수 따기 정도로 생각하십시오.”

    점수 따기요?

    무슨 오해를 한 건지는 모르지만 현희의 표정이 진지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수행하겠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일단 얼른 이동하도록 하죠.”

    먼저 도진이 올라타고, 현우의 품에서 선우를 받아들었다.

    끙끙대는 와중에도 형의 품이 아닌 걸 알아챘는지 표정이 험악해진다. 하지만 도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 선우까지 헬기에 태웠다. 그러고 나니 자리가 다 차 버렸다.

    잠깐, 나는!

    그를 눈치챈 가준이 소리를 높였지만, 도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운전하실 줄 아시지 않습니까?

    할 줄 알기야 하지만. 너, 너설마!

    그럼 뒷정리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헬기의 문이 닫혔다.

    야, 야!

    가준이 화를 내며 방방 뛰었지만, 프로펠러 돌아가는 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저래도 돼?

    돼.”

    천족이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가준이 버리고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아마 야무지게 챙겨 오겠지.

    어쩌면 독점하려 들 수도 있지만, 그것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지 않은 한은 허튼수작을 부릴 리 없었다. 이미 이쪽의 힘을 알고 있으니까.

    커다란 프로펠러 소리와 함께 헬기가 이륙했다. 헬기는 새까만 밤하늘을 날아 헬기 착륙장이 있는 제법 큰 병원에 착지했다. 규모가 있기에 각성자들을 위한 의사와 힐러도 대기하고 있었다.

    !

    B급 각성자라는 힐러는 선우를 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본래의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의사 몇이 달라붙어 검사를 시행했다.

    다행히 큰 이상은 없습니다. 그냥 열이 오른 것뿐입니다.”

    원인은 뭘까요?

    감염 쪽은 아닌 것 같고, 다른 원인도 보이지 않으니 아마도 스트레스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아침 방송에서 병의 원인을 모를 경우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들먹이는 걸 자주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현우를 위해 도진이 말을 덧붙였다.

    외곽 쪽 병원에 계시긴 하지만, 이 분야에선 유명하신 의사분이셔.”

    그제야 현우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난 진짜 스트레스가 원인 같은데.”

    선우가 가진 형에 대한 집착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긴 미국에서 돌아온 뒤에도 쉬지 못했으니.”

    그렇지.”

    과거에도 선우는 여기저기 잘 돌아다녔다. 그렇기에 그게 원인 같지는 않았지만, 그걸 굳이 들춰내지는 않았다. 일단은 동생에게 신경이 쏠린 현우를 살살 달래야 했으니까.

    그보다 너도 놀란 것 같은데 좀 쉬지그래?

    어떻게 그래.”

    일어났는데 형의 안색이 나쁘면 동생은 더 불안해하지 않을까?

    그렇게 안색이 안 좋아?

    현우가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응. 그러니까 조금 쉬자. 선우는 내가 살펴볼게.”

    선우는 그걸 더 싫어할 텐데?

    그럼 선우가 깨어나면 너도 깨워 줄게.”

    응.”

    도진은 현우를 소파에 눕히고 담요를 덮어 주었다. VIP실 소파라서 그런지 푹신함도 남다르다. 거기에 불까지 끄니 완벽한 잠자리가 되었다.

    잠이 오지 않아.

    현우는 몇 번인가 뒤적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

    잠이 오질 않아서. 그냥 선우 옆을 지킬래.”

    자리에서 일어난 현우는 선우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는 이불 밖으로 드러난 선우의 손을 꼭 쥐었다.

    지선우, 어릴 땐 어땠어?

    그런 현우에게 도진이 물음을 던졌다.

    작고 여리고 귀여웠지. 지금도 그렇지만.”

    아니, 그건 아닌데. 도진은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선우도 브라콤이 심한 편이었지만, 현우도 만만치 않았다. 저 덩치가 작고 여리고 귀엽게 보일 수 있다니.

    예원이라면 모를까.

    그 아이는 정말로 작고 여리고 귀여웠으니까. 선우와 비교 대상이 되지 않았다. 도진은 본인도 시스콤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채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래서 지켜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마계로 끌려가는 바람에 그러지 못했어.”

    그래도 돌아왔잖아.”

    그렇지. 결국은 돌아왔지.”

    현우는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웃었다. 잠든 선우의 옆에서 둘은 조곤조곤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의 반은 동생 자랑이었고, 반은 시답잖은 이야기였다. 그래도 이상하게 대화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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