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93화 (11/16)

85.

왔다.

내내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던 티아매트는 그대로 솟구쳐 올랐다. 목표는 바로 위에 존재하는 배 한 척. 그녀의 존재를 느낀 건지 다급히 회피 기동을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굉음과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다.

이어 반대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카이가 몸을 한 번 더 부딪치며 시선을 끌었다.

몬스터다!

고함이 들려오며 사람들의 시선이 그리로 몰렸다. 그 틈에 티아매트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해 배 위에 올랐다.

어디 보자, 위치가.”

그냥 배를 가라앉히고 전부 죽이면 해결될걸, 이리 복잡하게 해야 하나 싶기도 했지만 어쩌랴. 필요한 걸 얻기 전까지는 얌전하게 굴 필요가 있었다.

뉴욕의 소요가 가라앉고, 각성자들이 다시 모여든 이상 바다 한가운데라도 상대쪽 인원이 충원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일단 아이템부터 손에 넣자.

지금 바카디를 구속하고 있는 아이템.

[용사의 사슬 (유니크)]

목표로 한 대상 하나를 구속하여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다. 언젠가 드래곤을 잡는데 쓰였다.

그게 필요했다. 겸사겸사 같은 편인 바카디도 구하고 말이다. 약해빠진 인간을 구해서 어디다 쓰냐 싶기도 했지만.

미리 전달받은 장소에 티아매트가 도착하자 커다란 문이 보였다. 더불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인간이 그녀를 반겨 줬다.

역시나 침입자로군.”

작은 책을 읽고 있던 남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티아매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구속구로 묶어 두었다 하더라도 상대는 인간 축에서는 강자인 바카디다. 감시인이 없을 수가 없었다.

뭐, 그런 셈 치지.”

티아매트는 손톱을 빼내 들고 감시인에게 덤벼들었다. 그는 무기를 꺼내 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그녀를 이겨 낼 수 없었다. 결국엔 무기를 든 팔을 잘린 채 정신을 잃었다.

아차!

피에 심취해 있던 티아매트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봉인되어 있는 문을 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에도 아이템이 사용되었지만 급이 낮다. 우악스럽게 뜯어내고 들어서니 사슬에 묶인 바카디가 보였다.

구하러 왔나?

바카디가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래.”

그럼 빨리 사슬을 풀어 줘. 거슬린다고.”

약해서 붙잡힌 주제에 입만 살았네. 티아매트는 짜증을 내며 손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손톱이 살을 가르고 파고든 사슬을 떼어 낸다.

그 탓에 약해진 몸에는 피가 줄줄 흘렀지만, 바카디도 티아매트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바카디가 벌떡 일어나 외쳤다.

이번에는 지지 않는다복수할 것이다!

그 사이 사슬을 챙긴 티아매트는 바카디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현우한테 일방적으로 맞았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복수를 할 셈인가그 시선을 느낀 듯 바카디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난 힘이 좋다. 약한 것들을 억누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힘만이 능사가 아닐 때도 있지.”

오호?

겉보기엔 무식하게 생겼는데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 모양이다.

지선우, 그를 노린다.”

그도 강한데?

그래도 지현우, 그 녀석만큼은 아니겠지.”

제대로 된 판단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재밌게 돌아가겠는데티아매트는 혀로 입술을 날름 핥았다.

!

그때 또다시 배가 흔들렸다.

이제 나가야겠네.”

사람들은?

간판 위에.”

내가 다 죽여도 되나?

필요한 건 챙겼으니까.”

이제는 죽여도 된다. 다른 인원이 충원된다고 하더라도 그 전에 튈 시간도 충분했다. 티아매트가 어깨를 으쓱하자 바카디가 광소를 터트렸다.

그럼 먼저 가 보지.”

바카디가 천장을 뚫고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닷바람 소리 대신 비명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인간치곤 별나다니까.”

보통 인간은 같은 동족을 아끼지 않던가. 그런데 그러지 않는 걸 보니 자신과 비슷한 과인가 싶었다. 그나저나 비명을 듣다 보니 피가 고파졌다. 티아매트는 정신을 잃은 채 쓰러져 있는 감시인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

큰일 났습니다바카디, 그가 탈출했습니다!

바카디의 탈출 소식은 오래지 않아 레온에게도 흘러들었다.

탈출이요?

주기적으로 배에서 오던 연락이 오지 않아 출동했으나 이미 늦은 상태였습니다.”

그 자리에 남은 건 바다 위에 떠다니는 파손된 배의 파편과 시체뿐이었다.

레온은 손으로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제 실수입니다. 호위인력을 더 보냈어야 했는데.”

남들 모르게 움직인다고 배 한 척만을 보낸 게 후회되었다.

하지만 후회하고 있을 시간은 없겠지요.”

그보다 다른 문제를 생각해야 했다. 몰래 띄워 보낸 배 한 척이 습격을 당했다. 그 말은 어디선가 내밀한 정보가 새어 나갔다는 뜻이었고, 어쩌면 배신자가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를 눈치챈 건 레온뿐만이 아니었다. 정보를 들고 온 앰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어째서!

앰버는 울분을 토해 냈다.

같은 인류를 배신하는 거지요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국에 이런 끔찍한 짓을!

앰버.”

레온님,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저희는 움직여야 합니다. 아직 남아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네, 그렇지요. 제가 너무 흥분했습니다.”

입술을 깨문 앰버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괜찮습니다.”

바카디의 탈출 사실은 어떻게 할까요?

몇몇 사람들에게는 알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바카디라면 위험한 일을 저지를 테니까요.”

당한 만큼 갚는다. 바카디는 그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만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자들을 찾아가 보복할 위험이 높았다.

지현우에게도 알려야 할까요?

네, 알려 주십시오.”

레온은 단호하게 말했다.

*

얼마 뒤, 아직 뉴욕내의 호텔에 머물고 있던 현우는 익숙한 손님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앰버는 선우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앰버여기까진 무슨 일입니까?

급히 알려드려야 할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습니다.”

일단 들어오세요.”

선우는 앰버를 안으로 들였다. 꼭대기 층을 차지한 일행은 하나같이 느른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현우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도진과 알베르크라는 소년이 찰싹 붙어 있었다. 사실 앰버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녀가 찾아오기 전엔 그사이에 선우도 끼어 있었다.

가준은 왼편의 다른 소파에 앉아 있었는데, 테이블 위에 태블릿과 서류를 늘어놓은 채 손을 바삐 움직였다.

앰버?

안녕하세요, 지현우 씨.”

무슨 일로 찾아오셨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오는 현우의 모습에 앰버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렇게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은인을 위험하게 만들다니. 좀 더 주의했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앰버는 허리를 굽혔다.

앰버?

바카디가 탈출했습니다.”

?

?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게 저희 잘못입니다. 일단 바카디의 행적을 추척하고 있지만, 사건이 벌어진 곳이 바다라서 조사가 늦어지고 있습니다. 중간에 다른 이의 개입을 발견했습니다만, 누구인지도 알 수 없는 상태입니다.”

앰버는 숨을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바카디는 사악한 사람이에요. 지현우 씨에게도 보복을 하려 들지 모릅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책은 있습니까?

선우가 물어오자 앰버는 미리 생각해 두었던 걸 차근차근 풀어놓았다.

일단 호위 인력을 붙여 드릴 생각입니다. 마침 대부분의 각성자가 돌아오기도 했고, 이제는 뉴욕도 정리에 들어갔으니까요.”

사실 아직 사람이 모자라다. 그렇지만 자신들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이들에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엠버는 인력을 어떻게든 차출해 내 이들을 지킬 생각이었다.

당장은 많이 붙여드리긴 힘들겠지만, 서서히 늘려나가겠습니다.”

그럴 인력이 됩니까?

됩니다.”

앰버는 속내를 감춘 채 대답했다.

거짓말.”

그런 앰버에게 알베르크가 한마디를 툭 던졌다.

저 인간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거짓말이라는데요?

?

엠버로서는 황당한 상황이었다. 거짓말인 건 사실이었지만, 그걸 지적한 이가 어린 소년이다.

테이머 계열 능력자로 알고 있었는데, 정신계 능력도 가지고 있었던가그렇다고 하더라도 앰버는 정신방벽이 강한 편이었다. 어지간한 초능력자는 앰버의 생각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현우가 말을 꺼냈다.

호위 인력을 많이 붙여 주기 어려운 거지요?

그, 그게.”

앰버는 처음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면 최소로 붙여 주셔도 괜찮습니다.”

다소 귀찮아지긴 했지만, 위험할 리가 없었다. 일단 이중에 힘이 제일 약한 가준만 해도 한국에서 손꼽히는 각성자였다. 거기에 도진, 선우는 두말할 것도 없고. 알베르크도 약해지긴 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점박이나 케로, 두눈은 또 어떻고. 지고 싶어도 질 수 없는 구성원인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요. 저희 때문에 피해를 입으셨는데.”

피해라니요. 당연히 도와야 할 일이었을 뿐인걸요.”

지현우 씨.”

앰버의 눈동자가 글썽거렸다. 어쩜 이리 좋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

86.

앰버가 돌아가고 일행에게는 각성자 몇이 붙었다. 그중에는 텔레파시 사용 가능한 각성자도 있었는데, 만약에 바카디가 나타나면 빠르게 본부로 연락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뛰어난 이가 A급 각성자인 엘리샤였다. 그녀는 땅에 관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 흙이 있는 곳에서 강해지는 특성이 있다 하였다.

음,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처음에는 문 밖에서 지키고 서 있던 그녀였으나, 중간부터는 안쪽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게 되었다.

계속 지키고 있으면 힘드시잖아요.”

지현우의 권유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몇 번이나 거절했지만, 잠시 차라도 한 잔 하라는 말에 결국은 들어오고 말았다.

저쪽은 지선우.

지현우와의 동생인 지선우는 원래도 유명한 각성자였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미국에 있는 각성자들만큼 강한 힘을 손에 넣은 사람. 성인이 된 지는 오래되지 않았다는데 겉보기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대단한 사람이다.

저리 비켜.”

엘리샤에게 정중하게 찻잔을 건넨 지선우는 반대편 소파에 늘어져 있던 소년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왜?

원래 내가 앉았던 자리잖아.”

자리에 임자가 어디 있나.”

여기 있지.”

상대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년, 알베르크였다. 알베르크는 지현우의 곁에 찰싹 붙어서 그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었다.

그래도 또래라 그런가, 반말도 하네?

대부분의 사람에게 존댓말만 한다고 들었는데, 예외는 있는가 보다. 엘리샤는 찻잔을 비스듬히 들고 그들을 몰래 힐끔거렸다.

처음에는 말로 하던 지선우는 이제 아예 알베르크의 머리카락을 움켜쥔 채 잡아당기고 있었다.

너무 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 상황에서도 알베르크는 꿋꿋하게 자리에 누워 버티고 있었다. 게다가 동요하는 이가 하나도 없는 걸 보니 수시로 이랬던 모양이다.

그냥 비켜 줘.”

지현우가 알베르크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싫다왜 매번 나만 비켜 줘야 하지?

그야 네가 매번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저쪽 소파도 비어 있다!

거기엔 형이 없잖아.”

지선우는 태연한 얼굴로 그리 말하더니 알베르크의 머리카락을 다시 잡아당겼다.

그래 봤자 소용없다. 내 몸에서 난 건 털 하나도 강인할지니.”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그래,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지선우도 아직 어리구나. 그러니 저렇게 싸우는 거겠지.

엘리샤가 웃음을 꾹 억누르고 있자니 옆의 다른 소파에 앉아 있던 도가준이 말을 걸어왔다.

웃기죠?

아니, 아니에요.”

아니긴요.”

도가준이 피식 웃으며 소파에 몸을 기댔다.

빨리 비켜!

싫다니까소파 팔걸이에 앉던가!

지선우의 얼굴에 심술이 걸렸다. 그리고 막 무언가를 더 하려던 찰나, 외부로 통하는 문이 열리며 한도진이 안으로 들어섰다.

잠시 뭔가를 사러 나갔는지 팔에는 커다란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와 함께 다녀온 각성자는 문밖에서 헤어진 모양이었다.

현우야, 떡볶이 사 왔어.”

!

지현우는 실랑이를 벌이는 알베르크와 지선우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닭 쫓던 개가 되었네.

유일하게 알고 있던 동양 속담을 떠올리며 엘리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어떻게 사 온 거야?

한인 타운에 다녀왔지. 아직 따뜻해. 지금 먹을래?

!

알았어. 그럼 상 차릴게. 그런데 손님이 와 계시네?

아, 앰버가 보내 준다고 하던 각성자분이셔.”

엘리샤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저야말로요.”

지선우도 그렇지만 이쪽도 제법 근사하다. 아니, 오히려 어린 느낌이 나지 않는 것까지 치면 이쪽이 더 취향이다. 동양인임에도 불구하고 쭉 뻗은 키에 군더더기 없이 붙은 근육질의 몸매. 까만색 눈동자가 매력적이다.

하지만 듣기론 그도 지현우에게 푹 빠져 있다지.

저리 잘난 남자들이 그에게 목을 매는 걸 보면 불가사의한 매력이 있는 모양이었다.

같이 드시겠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저는 차로도 충분해요.”

알겠습니다.”

한도진은 두 번 권하진 않았다. 그는 곧바로 테이블 위에 떡볶이와 순대라는 걸 차려 냈고, 일행들은 모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매워!

알베르크가 짜증을 내자 지현우가 그 앞에 물 컵을 내려놓았다.

먹여 줘.”

보라색 눈을 반짝이며 애교를 부려 봤지만, 그는 곧 지선우에게 차단되었다.

내가 먹여 주지.”

됐거든!

둘이 또다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한도진은 떡볶이를 포크로 찍어서 지현우의 입에 넣어 주고 있었다.

어때맛있어?

맛있어요.”

다행이다.”

하는 행동만 봐서는 이미 연인이다. 참으로 재밌는 일행이었다. 적어도 여기서 있는 동안은 심심하지 않을 것 같았다.

식사가 끝난 뒤, 엘리샤는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게 주변을 둘러보는 데 더 편하단 이유에서였다. 이후 선우도 나갈 준비를 하였다.

어디가?

길드 일. 이제 여유가 좀 생겼으니 원래 뉴욕에 오면 하려고 했던 일을 마무리 해야지.”

나도 같이 갈까?

그럴까?

선우는 순간 혹했지만, 마음을 바로잡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괜찮을 것 같아. 금방 다녀올 테니 형은 여기서 기다려.”

여기저기 다녀야 하는 일이라서 제법 힘들 것 같았다. 이미 현우가 강하다는 건 밝혀졌지만, 아직도 선우는 예전의 감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 탓에 힘든 일에는 현우를 움직이게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럼 조심해서 다녀와.”

응, 다녀올게. 형.”

선우는 알베르크를 한 번 노려보고는 방밖으로 나섰다. 밖에는 뉴욕으로 파견되어 온 선현 길드의 길드원 몇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그중 2팀 팀장인 레나가 발랄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찬영도 무척 오고 싶어 했지만, 길드장이 없는데 부길드장마저 자리를 비울 수는 없었기에 레나가 오게 되었다.

그녀도 각성하기 전에는 제법 공부를 했던 터라, 다른 길드와의 일을 조율하는 자리에서는 자기 역할을 훌륭히 해내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게요. 뉴욕에서 사건 터진 거 듣고 저희도 같이 움직일걸, 하고 후회했다니까요. 그래도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다행이네요.”

그럼 갈까요?

!

기다리고 있던 엘리샤가 다른 정신계 각성자 하나를 붙여 주었다.

만약을 대비해서요.”

그렇게 선현 길드 사람은 호텔을 나서 바빠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 할 일이 많네요. 일단 가디언 길드를 들렸다가 미국 내 대장장이 길드에도 들릴 거예요. 최근 몬스터의 재료를 이용해서 새로운 무기 제작에 성공했다는데. 기대가 무척 큽니다.”

레나는 옆에서 재잘거리며 해야 할 일에 대한 브리핑을 이어나갔다. 할 일을 다 끝내고 나서야 그녀는 따라붙은 각성자에 대해 물어 왔다.

그런데 따라붙은 저 사람은 누구예요?

안전을 위해 미국에서 붙여 준 사람입니다.”

딱히 강해 보이지는 않는데.”

정신계 각성자라 그렇습니다.”

아아.”

그래도 무성의하다. 호위 인력이라면서 저런 사람 하나 붙여 주는 게 다라니. 아무리 인력이 부족해도 이건 아니지. 한국에서 선우 일행의 활약상을 들어 온 레나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었다.

포털은 정리되었다고 들었는데, 저희 위험한가요?

피닉스 길드의 배신과 바카디가 잡힌 건 알음알음 알려지고 있긴 했으나, 바카디가 탈출한 건 아직 미공개 정보였다. 그런 이유로 레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그렇진 않습니다.”

전부 설명하고 싶지만, 지금은 미국 쪽 사람이 붙어있었다. 엘리샤나 앰버는 호위 인력이라고 했지만, 선우는 그 말을 전부 믿지 않았다.

당장 말하지 못할 이야기군요?

레나는 눈치가 빨랐다.

네.”

그럼 이야기 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일단 레나는 넘어가기로 했다. 이후 그들은 가디언 길드에 들러 레온을 만나 길드 간의 협약에 대해 공고히 하고, 그 다음은 외곽에 위치한 대장장이 길드로 향했다.

그래도 그 난리가 난 것치곤 양호하네요.”

레나는 창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노력을 많이 했으니까요.”

그렇군요. 진짜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걱정되네요.”

그 말을 끝으로 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자동차는 한참을 달렸다.

대체 대장장이 길드는 왜 이리 외곽에 자리 잡은 건지 모르겠네요.”

길도 험해서 차가 흔들렸다. 그렇게 한참을 내달리고 나서야 저 멀리 대장장이 길드의 건물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착했어요!

사람이 드나들기 힘든 곳에 지어진 건물치고는 규모가 무척 크다. 그리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 때문에 레나는 앞서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안내 창구에 있던 여성이 웃으며 레나를 반겼다. 어디로 보나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머쓱함에 머리를 긁은 레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선현 길드인데요.”

확인되었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세요.”

확인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그래도 명색이 대장장이 길드 본부인데 이렇게 확인이 간단하게 이루어져도 되나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레나는 허리춤에 참 무기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러고 보니 무기도 내버려두네?

가디언 길드야 신뢰가 있어 내버려 두었다지만, 여기는 다르다. 오늘 처음 만나는 자리인 데다가 상대는 다른 나라의 길드원이다. 그런데 이렇게 무방비하다고?

미국의 대장장이 길드는 정부와도 끈이 닿아 있다.

그 말은 이곳을 지키는 이 중에는 정부 관련 각성자도 있단 소린데. 레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뒤돌아섰다.

길드장님~.”

아무래도 이야기를 좀 더 해 봐야겠다.

87.

조심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리 생각하며 로비를 가로지르는 레나의 등 뒤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르네.”

여성은 천천히 창구에서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모습이 기이하다. 상반신은 인간이었으나, 하반신이 짐승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몬스터?

레나가 묻자 여성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아니거든?

아무리 봐도 몬스터인데?

닥쳐!

염소를 닮은 두 다리가 땅을 박차며 레나에게 달려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나타난 해머가 레나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지만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대비를 하고 있기에 첫 공격을 피하는 건 수월했다.

틀린 말도 아닌데.”

레나는 여성을 비웃으며 자신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혹시나 싶어 바깥을 살펴보니 그쪽에서도 이미 전투가 시작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되는군.

바깥에선 길드장인 선우가 있었다. 레나는 그를 절대적으로 믿고 있기에, 당장 눈앞의 전투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 덤벼 보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도발하자 다시 한번 짐승의 다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다.

!

건물 로비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난다고 느낀 직후, 차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별다른 조치를 해 두지 않은 일반적인 차는 금방 그 자리에서 주저앉았고, 제 기능을 잃었다.

제법 깊숙한 숲속인데 귀찮게 되었다.

선우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바카디.”

바카디 님이라고 불러라. 어디 애송이가!

그와 동시에 단단하던 바닥이 녹아내리며 익숙한 결계가 주변을 둘러쌌다.

혼자가 아니군.”

싸우는 건 혼자다. 이건 네가 도망칠까 봐 대처한 것뿐이고.”

바카디가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바깥과 연락이 되지 않아요!

미국에서 붙여 준 각성자가 외쳤다. 정말 애송이를 붙여 준 모양인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에 비해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이상함을 느끼자마자 대열을 맞춰 싸울 준비를 끝마친 뒤였다.

오, 대단히 큰 사람인걸.”

그런데 저 사람 어딘지 낯익지 않아방금 이름이 뭐라고 했지바카디?

그 사람이라면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이잖아!

긴장으로 온몸이 조여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채 상황을 대비했다. 상대가 바카디라지만, 이쪽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각성자 지선우가 있다. 그들은 선우가 바카디에게 질 거라고 생각지 않았다.

귀여운 부하들이네?

듬직한 부하들입니다.”

듬직하다고?

바카디가 킬킬 거리며 발을 굴렀다.

손가락 까닥하면 죽을 것 같은데?

해 보십시오.”

아니, 됐다. 오늘 내 목표는 너니까. 쟤들은 다른 애들이 상대할 거야.”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갑자기 몇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 모습이 기괴하다. 마치 사람과 몬스터를 섞어 두기라도 한 모양이다.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곧바로 그들과 전투를 시작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여유로운 건 바카디와 선우뿐이었다.

목표가 저란 말입니까?

그래, 지현우의 동생 지선우.”

선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이내 지금 상황을 전부 이해했다. 바카디는 일대일로 형을 이기지 못하니까, 자신을 인질로 잡으려고 일을 꾸민 것이다.

흠.”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강한 형으로 인해 이런 취급을 받아 볼 줄이야. 형을 높이 평가하는 건 기분이 좋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낮은 평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럼 싸워 보자!

바카디가 차 위에서 뛰어내려 불붙은 멧돼지처럼 선우에게 돌진했다. 바닥이 늪처럼 변했음에도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

손가락을 튕기자 늪이 얼어붙으며 바카디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정도쯤이야!

우드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깨져 나갔다. 하지만 이미 선우는 다음 공격을 준비한 상태였다.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들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바카디의 몸으로 쏘아져 갔다.

가죽 북을 망치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바카디의 살이 여기저기 움푹 패였지만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선우가 방향을 틀어 피했으나, 바카디는 그 커다란 몸집을 가지고도 수월하게 따라붙었다. 공격을 퍼붓고, 피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둘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라면 언제 전투가 끝날지 알 수 없다. 둘의 실력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미친 듯이 주먹으로 얼음벽을 두드리던 바카디는 어느 순간, 제자리에 멈춰 섰다.

날카로운 얼음 때문에 피투성이가 되었던 손은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뭐, 이 정도는 예측했지. 의외긴 하지만 인정할 건 해야지. 넌 강하다. 지현우란 놈보단 못하지만.”

비열한 수를 쓰려는 자에게 칭찬받아 봤자 기쁘지 않습니다.”

비열하다니.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리고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바카디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꿀꺽 삼켰다. 얼핏 봐서는 알약같이 보였다.

으아아아아!

고함과 함께 바카디의 몸이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그러면서 구리빛의 피부가 점점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붉고 파란 혈관이 두꺼워지며 피부 위로 뱀이 기어간 흔적처럼 도드라졌고, 머리 위에는 뿔이 여럿 돋아났다.

괴물이군.”

괴물이라니이하하, 이거 기분 좋은걸.”

기괴한 몰골이 된 바카디는 히히 웃으며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커다랗게 부푼 몸은 더 빨라졌다.

그럼 이제 2차전이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카디의 모습이 사라졌다. 갑자기 능력이 더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빨라졌을 뿐이었다.

그걸 깨닫자마자 선우는 물방울을 주위에 좌르륵 깔아 놓았다. 그리고 물방울의 떨림을 통해 바카디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지금, 그는 바로 선우 뒤에 있었다.

길드장님!

떨어진 채 싸우고 있던 길드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외쳤다.

선우는 곧바로 얼음을 사용해 등 뒤에 벽을 세우고 바카디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그러나 공격을 맞아야할 그는 어느새 다른 곳으로 이동한 상태였다.

좋아, 좋아. 바로 이거지!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바카디는 손을 뻗었다.

!

그 손에 잡힌 이는 레나였다. 로비에서 여성을 상대로 싸운 끝에 승리한 그녀는 바카디의 뒤를 노렸다.

싸우는데 방해는 하지 말아야지, 응모처럼 딱 맞는 상대를 줬는데 말이야.”

선우는 회피하던 걸 멈추고 곧바로 바카디에게 공격을 쏟아부었다. 수없이 많은 물방울과 얼음 조각이 허공에 떠올라 바카디를 노렸으나,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가 레나를 앞세웠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재미없는데.”

바카디는 투덜거리며 레나를 집어 던졌다.

그녀는 곧바로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내 그 자리에서 굳을 수밖에 없었다. 그 앞을 가로막는 다른 이 때문이었다.

자자, 너도 여기서 나랑 같이 구경하자고?

어느새 나타난 까만 머리의 여성이 레나를 내려다보며 히죽거렸다.

끼어들지 마라.”

봐서. 너무 오래 걸리면 끼어들 수도 있고.”

티아매트는 긴 머리를 손가락으로 돌돌 감았다. 사실 너무나도 끼어들고 싶다. 그리고 지선우의 사지를 찢어 놓고, 고문하며 피를 보고 싶었다. 아니, 그게 안 된다면 다른 이들이라도.

날카로운 동공의 눈동자가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피를 보고 싶어.

실컷 피를 볼 수 있다는 말에 이쪽에 붙었는데, 생각보다 많이 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화풀이로 아랫사람을 잔뜩 갈아 버렸지만, 그 정도로는 만족이 되지 않는다. 좀 더 강한 인간과 싸우고 싶다.

정작 현우에게는 덤빌 생각도 못하면서, 강자를 갈구한다. 지나치게 모순적인 모습이었다.

지현우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은 제외하고.

티아매트 님.”

카이가 티아매트의 이름을 불렀다.

알아, 알아. 나도 참을 땐 참을 줄 안다고.”

티아매트는 침을 삼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사이 바카디는 지선우를 구석에 몰아넣고 있었다. 꾸준히 마기를 받아들이고, 그를 촉진하는 약까지 먹은 바카디는 본래의 힘의 두 배가 넘는 괴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니 지선우가 이길 리 없다.

어차피 끝이 정해져 있다면 그냥 빨리 해치우고 데려가는 편이 낫지 않나.

왜 굳이 자기가 싸운다고 나서서는. 티아매트는 밀려오는 욕망에 입술을 깨물었다.

!

지선우는 강한 각성자지만, 그래도 힘에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한계가 다가오는 것 같았다. 끊임없이 쏟아져 내려던 물과 얼음의 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그 사이 선현 길드의 다른 길드원들은 전부 쓰러진 상태였다.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크게 다쳤다. 그리고 슬슬 전투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

소리 없이 움직이는 시계 바늘을 보며 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선우가 늦네.”

일이 바쁜 거 아닐까?

그래도 저녁엔 들어오겠다고 했잖아요.”

이제 6시인데?

가준이 어처구니없다는 말투로 대답했다.

6시나 된 거지요.”

지선우만 브라콤인 줄 알았는데, 이쪽도 만만치 않구먼.”

그리 말하는 가준을 흘겨본 현우는 다리를 끌어당겨 팔로 끌어안았다. 그 탓에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우려던 알베르크가 밀려났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초조한가?

응. 예감이 안 좋네.”

흐음.”

일단 도진 형이 엘리샤한테 물어본다고 하긴 했는데.”

그때, 문가에서 인기척을 느낀 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진 형!

현우야.”

물어봤어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물어보니 도진이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어보긴 했는데.”

뭐래요?

30분 전부터 연락이 끊겼대. 지금 상황을 알아보고 있는 모양인데, 전화나 무전기도 되지 않는 다나 봐.”

도진의 말을 들으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88.

마지막 일정이 어디라고 했었죠?

대장장이 길드에 들린다고 했던 것 같은데.”

확인해 보니 도진의 말이 맞았다.

그럼 거기로 가요.”

마침 연락이 끊어진 곳도 그쯤이라 하였다. 현우가 나서자 계속 누워 있던 알베르크도 슬그머니 일어나 붙었다.

나도 같이 가지.”

상황의 심각성을 알기에 이번에는 도진도 가만히 있었다. 겉보기엔 저래도 강하다 했으니 무슨 일이 생기면 제법 도움은 될 터였다.

나도 갈게.”

거기에 가준도 합류했다. 매번 붙어 다니다보니 이제는 떨어져 있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그렇게 넷은 엘리샤 일행과 함께 대장장이 길드로 향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차로 올라가는 내내 현우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건 엘리샤와 그 일행뿐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대장장이 길드에 연락을 넣고, 주변 길드에 도움을 청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럴수가!

엘리샤는 차 문을 열자마자 밀려오는 비릿한 냄새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틀림없는 피냄새였다. 아니나 다를까. 차가 멈춰 선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체가 몇 널브러져 있었다.

선현 길드.”

입고 있는 옷에 새겨진 로고를 봐선 선현 길드의 길드원인 것 같았다. 이어 구르듯이 차에서 내려선 현우가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손에 피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적어.”

분명 현우가 보았던 길드원들은 이것보다 많았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샤는 그런 현우를 말리려는 듯이 손을 뻗었지만, 그는 도진에게 제지당했다.

그래, 저들은 피해자야. 나는 말릴 권한이 없어.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저들의 입장도 생각해 주어야 했다. 엘리샤는 도로 손을 내리며 깊은 한숨을 삼켰다.

레나.”

현우는 로비를 훑어보았다. 있는 거라곤 바닥에 쓰러진 기괴한 모양새의 시체 하나, 그리고 엉망이 된 자재들뿐이었다. 하지만 남은 흔적만으로도 누가 싸웠는지 알 수 있었다.

여기서는 레나가 싸웠다.

편히 말을 놓으라고 말하던 발랄한 성격의 여성. 그 흔적을 쓸어보던 현우는 이번에는 계단 쪽을 바라보았다.

저 위로 가진 않았어.

레나는 이곳에서 기괴한 인물을 죽이고 도로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따라나서니 다른 곳과 색이 다른 흙이 보였다. 발로 밟아 보니 쑥쑥 잘도 들어간다.

그를 보자 떠오르는 건 히드라의 결계였다. 주변을 늪지대로 바꾸고 결계를 치는 능력이라면 저번에도 보았다. 여기서도 그것과 같은 능력이 사용된 것이다.

그 흔적을 더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거대한 천이 나무에 매달려 흩날리고 있었다. 이런 걸 왜 이제야 발견했을까.

현우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천을 낚아챘다. 천에는 붉은 피로 글자가 쓰여 있었는데, 제대로 읽기 어려웠다.

알베르크.”

현우는 곧바로 알베르크를 불렀다. 그라면 이걸 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알베르크는 군말 없이 다가와 천에 적힌 글씨를 읽어 내려갔다. 그렇다. 이 글씨는 마계에서 쓰이는 언어였다.

그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 아래의 장소로 혼자 와라.”

그만.”

현우는 일단 알베르크의 말을 막았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가준과 도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도진은 현우 자신을 무척이나 아껴 주고, 사랑해 주었다. 그라면 위험한 장소에 현우를 혼자 보내려 할 리 없었다.

정도가 다르지만 가준도 마찬가지였고.

나중에 나한테만 알려 줘.”

알았다.”

알베르크도 현우를 사랑했지만, 그라면 가겠다는 걸 막지 않을 것이다. 그는 현우의 힘을 믿고 있었으니까.

뭔가 찾았어이건 뭐야이상한 글자네?

가준이 알베르크에게서 천을 건네받아 펼쳐보곤 혀를 찼다.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그쪽은 알아?

저도 모릅니다.”

도진 또한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샤와 그녀의 일행 또한 이런 글자는 본 적이 없다 하였다.

본부에 보내서 분석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천을 받아 든 엘리샤는 그를 뒤따라 온 차량에 실어 본부로 보냈다.

하지만 거기 적힌 것은 마계의 언어인지라 언제 해석이 될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건 현우에게 시간을 벌어 줄 것이다.

일단 근처 길드의 도움을 받아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있습니다. 지선우 님을 발견하면 최우선으로 알려 드릴 테니 잠시 쉬시는 게 어떠실까요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그럼 잠시만 쉴게요.”

현우는 느릿한 발걸음으로 근처에 설치된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에 도진이 따라 들어가려고 했지만, 알베르크가 앞을 가로막았다.

잠시 혼자 두는 게 낫지 않을까?

도진은 알베르크를 노려보긴 했지만, 얌전히 물러났다. 그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충격을 크게 받았으니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

저쪽 천막도 비어 있어요.”

엘리샤가 다른 천막을 가리켰지만, 그는 거절했다.

아뇨, 저는 여기 있겠습니다.”

그럼 의자를 가져다 드릴게요.”

감사합니다.”

도진은 현우의 천막 앞에 의자를 놓고 앉았다. 그는 가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알베르크는 돌아서 근처를 배회하던 두눈을 붙잡아 그 귓가에 속삭였다. 이후 두눈은 케로를 붙잡고 같은 행동을 하였고, 이후 케로는 종종걸음으로 현우의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도진도 그걸 보았지만, 케로는 평소에도 현우가 자주 끌어안고 있던 터라 막지 않았다.

아르르르르.”

안에 들어선 케로는 작게 울더니 몇몇 단어를 뱉어냈다. 원래 이 상태로는 말을 못하지만, 알베르크에게 그걸 가능케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

현우는 말을 전부 전해 들은 뒤, 평소대로 돌아온 케로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는 의자 위에 케로를 올려놓고 뒤쪽 문을 통해 천막을 나섰다. 이후엔 존재감과 기척을 죽이고 산길을 내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내달렸을까. 산길을 벗어난 현우는 케로에게 들었던 장소에 도착했다.

키륵?

그곳에는 작은 몬스터 하나가 풀숲에 숨어 있었다. 몬스터는 현우를 보자마자 꼬리를 살랑이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한참을 달리고, 또 달렸다.

!

그렇게 해서 도착한 곳은 외진 곳에 있는 낡고 커다란 창고 앞이었다.

*

촤르륵.

무언가가 쏟아져 내린다. 소리를 들어봐선 금속인 것 같았다. 선우는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깼어?

바로 앞에는 다리를 꼬고 의자에 앉은 여성 하나가 있었다.

마족.”

메마른 목소리로 말을 내뱉자 그녀가 나지막이 웃으며 손에 든 걸 다시 한번 쓸어내렸다. 그건 금색의 사슬이었는데 길이가 무척이나 긴지 의자 아래에 몸을 꼰 거대한 뱀처럼 쌓여있었다.

티아매트. 티아매트라고 불러 줘.”

나에겐 마족일 뿐이다.”

굳이 이름을 불러 주고 싶진 않았다.

뭐, 마음대로 하던가.”

티아매트는 다시 사슬을 좌르륵 떨어트리고는 바닥에 닿기 전에 낚아챘다. 그러고 보니 사슬의 모양새가 어딘지 낯이 익었다.

용사의 사슬?

딩동댕동!

그건 미국 소유일 텐데.”

우리가 손에 넣었지!

티아매트가 뿌듯하게 웃으며 자랑하듯 사슬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용사의 사슬은 1인에게만 사용가능한 단점이 있었지만, 그걸 무시할 수 있을 만큼 효용성이 큰 아이템이었다. 각성자의 힘을 전부 봉인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누구의 힘을 봉인할 셈이지?

마족으로서 우리 편을 들고 있는 알베르크아니면 도진가준은 아닌 것 같고. 가준이 들었으면 억울해할 생각을 하며 선우는 멍한 머리를 굴리려 애썼다.

그도 아니면.

지현우. 선우의 하나뿐인 형.

형은 아니겠지?

지현우빙고맞췄습니다!

어째서 봉인 대상이 형인가. 힘이라면 마족인 알베르크가 더 강할 텐데.

생각을 정리해 보자. 먼저 저들이 알베르크가 이쪽에 합류한 걸 아직 모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그 가능성은 높지 않다. 피닉스 길드조차 배신한 상황이었다. 아직 찾진 못했지만 선우, 레온을 비롯한 길드 수뇌부들은 다른 스파이도 있을 거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알베르크의 존재를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 알베르크는 여기 오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가는 강자는 형이다.

하지만 왜?

자신을 사로잡았음을 형에게만 알렸으니까. 어떤 수단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형은 무조건 이곳으로 올 것이다.

안 돼.”

선우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흘렸다. 형이 여기 와선 안 된다. 용사의 사슬에 걸리면 아무리 형이라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거구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깼나?

그래. 좀 자니까 훨씬 낫군.”

바카디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본래 능력이 초재생인만큼 선우가 입혔던 상처는 모조리 사라져있었다.

형은 안 돼.”

선우는 이를 악물고 재차 말했지만, 바카디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 생각보다 멀쩡해 보이는데.”

그야 이쪽을 묶고 있는 건 용의 사슬 하위 호환 아이템이니까. 이것만큼의 효과는 없다고. 그나마 이렇게 늘어져 있는 것도 약물을 사용한 덕이고.”

그렇군.”

관심 좀 가져. 이 멧돼지!

티아매트가 악담을 퍼부었지만, 바카디는 귀를 긁적이며 무시했다.

89.

그 모습에 약이 올랐지만, 지금 티아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거슬린다고 죽이기엔 강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대로라면 저번 포털로 고위 마족이 하나 더 건너 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그렇기에 저런 무식한 멧돼지라도 나름 소중한 전력인 것이다.

아니었다면 진작에 죽였다.

언제나 멋대로 살던 티아매트로서는 이리 자제하는 게 낯선 일이긴 했다. 하지만 그가 약속했다. 나중에는 실컷 날뛰며 피를 보게 해 주겠다고 말이다. 그러니 지금은 참아 본다.

그래서 지현우는?

여기로 오고 있어.”

그 말에 선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형에게 무슨 짓을 할 셈이지.”

간단해. 복수지.”

바카디는 킬킬거리며 선우의 앞에 주저앉았다.

너도 잘 보고 있으라고. 지현우가 망가지는 모습을 말이야.”

이를 악물어 보아도 지금 당장 선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

창고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있는 인기척을 느끼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걸 알면서도 현우는 망설임 없이 문에 손을 댔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기에 수월하게 열렸다.

지현우!

커다란 목소리에 잠시 신경이 쏠린 사이, 금빛으로 빛나는 쇠사슬이 살아 있는 것처럼 뛰쳐나와 현우에게 쏟아졌다.

이것이 저들이 파놓은 함정인 모양이었다. 잽싸게 몸을 뒤로 뺐지만, 사슬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뱀처럼 미끄러지는 사슬을 후려쳐 보았지만, 되레 역효과였다. 몸에 닿자마자 찰싹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으며 그대로 손목을 조여 왔기 때문이었다.

손목에 사슬이 닿는 순간, 덜컥 힘이 빠졌다. 사슬의 효과를 눈치채는 건 금방이었다.

디버프!

사슬은 힘을 깎아 내리며 봉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저 손목을 잡혔을 뿐인데도 이런데, 전신을 구속당하면 어떤 상황이 될지 뻔했다. 그렇기에 몸을 빼려고 했지만, 갑자기 뛰쳐나온 바카디가 그를 방해했다.

오랜만이군!

바카디가 공격을 쏟아붓자 사슬을 피하기 어려워졌다. 이내 다른 손목마저 봉인되고 다리까지 붙잡혔다. 전신이 전부 묶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힘이 빠져나간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싸워볼 만한 상태가 되었겠는데?

히죽거리는 바카디의 뒤로 티아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죽이지는 마,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으니까.”

노력은 해 보지.”

말을 하면 좀 들으라고이 멧돼지야!

도움닫기를 한 바카디가 커다란 주먹을 휘둘러 현우를 쳐냈다. 양팔을 가로질러 막기는 했지만, 몸이 버티질 못했다. 그에 비해 작은 몸이 뒤로 붕 날아가 나무에 부딪쳤다.

!

오랜만에 느껴지는 통증은 생소했다.

호, 이걸 버티네?

네가 약하니까.”

약하다는 말에 바카디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이어 달라붙은 그가 주먹과 다리를 휘두르며 연신 공격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을 피하고, 막았으나 몸에는 차근차근 피해가 쌓여 갔다.

마치 마계에 끌려간 지 얼마 안 됐을 때 느낌인데.

몸이 물을 먹은 듯 무거워졌다. 그래도 그 와중에도 선우의 안전은 확인했으니 되었다.

이제 누가 약할까?

시퍼렇게 멍이 든 팔을 보며 바카디가 조롱했다.

아이템을 쓴 주제에 말이 많네.”

!

바카디의 뒤쪽에서 선우의 애절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 맞다. 이런 방법도 있었지.”

바카디가 창고 안으로 들어가 선우를 끌고 나왔다.

동생이 죽는 걸 보기 싫으면 그대로 맞아라.”

와우!

그 모습을 보던 티아매트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쩜 저렇게 더러울 수가같은 편이지만 부끄러울 정도였다.

헛소리하지 마!

선우가 이를 으드득 갈며 외쳤지만, 바카디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쩔 거야?

현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그는 더 이상 도망치기를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바카디의 입꼬리가 길게 찢어졌다.

그럼 먼저 한 대!

아무런 방어도 하고 있지 않은 현우에게로 주먹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막 그에게 닿으려는 순간, 땅에서 솟아난 그림자가 주먹을 집어 삼켰다. 뒤늦게 그걸 깨달은 바카디가 방향을 바꾸려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그림자는 인정사정없이 주먹을 삼켰고, 억지로 빼냈을 때는 살갗이 너덜너덜해진 뒤였다. 그나마 뼈는 보이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시발, 내가 혼자 오라고 했지.”

혼자 왔잖아.”

현우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이게 혼자라고?

사슬에 묶인 현우의 오른쪽 옆에 도진이 내려앉았다.

혼자 온 건 맞잖아그 뒤에 누가 따라오는지는 나도 모르는 일이었어.”

사실 아주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도진이라면 빠르든 늦든 자신의 부재를 눈치 채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알베르크가 자신을 몰래 빠져나가게 도와준 것도 알아냈겠지. 이후는 도진의 몫이었다.

현우는 도진이 추적술에 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알베르크가 장소를 가르쳐 주지 않아도 결국은 도우러 나타날 것이다. 현우가 함정에 걸리면 이후는 누가 쫓아오건 감시가 느슨해질 것도 예측했다.

그래도 타이밍이 좋았다.

현우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험이 성공했다.

이제 문제는 잡혀 있는 선우를 구해 내는 것이었는데, 그것도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바카디의 뒤쪽에서부터 바닥이 새카맣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새카맣게 물든 바닥은 선우를 집어삼켰다.

지선우!

당황한 도진이 외쳤지만, 현우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공간의 일부를 마기로 물들여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건 현우도 익히 아는 자의 기술이었다.

알베르크!

티아매트가 기겁한 표정으로 훌쩍 뛰어 까맣게 물든 공간을 벗어났다. 바카디 또한 간발의 차로 발을 빼는데 성공했다.

제길. 복수 좀 해 보나 했더니.”

그들에게는 놀랄 만한 상황인데도 바카디는 조금의 동요도 내비치지 않았다. 그는 기겁해서 비켜난 티아매트도 마찬가지였다. 알베르크를 보면 도망칠 줄 알았는데,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기회는 사라지지 않았잖아어차피 넌 저들을 상대해야 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팰 수는 없잖아.”

기회가 생긴 것만으로도 고마워 해야지.”

티아매트는 혀를 차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어느새 그녀의 옆에는 히드라인 카이가 자리 잡고 있었다.

티아매트, 티아매트. 제법 간이 커졌는걸?

까맣게 물든 공간 사이로 알베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베르크 님이야말로 많이 변하셨군요. 설마 인간을 위해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는데요.”

모든 게 사랑 탓이지.”

로맨틱한 이야기를 하시는군요. 하지만 어쩌면 그 사랑 때문에 여기가 알베르크 님의 무덤이 될지도 모 르겠는데요?

티아매트는 고혹적으로 웃으며 손에 들린 작은 용기를 깨트렸다. 이후 허공에 점이 생겨나더니 이내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게 사람 크기만 해졌을 무렵, 그 안에서 장신의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하얀색 정장을 입고 반들거리는 가면을 쓴 남자였다.

그가 모습을 드러내자 예의라고는 모를 것 같던 바카디가 고개를 숙였다. 티아매트는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자세가 좀 더 공손해졌다.

안녕하십니까?

남자에게서 변조된 듯한 기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로보로스의 수장을 맡고 있는 리비라고 합니다.”

우로보로스?

알베르트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현우가 간단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이 세계의 빌런 단체야.”

현우와 같이 머무르는 동안 알베르트도 나름 이 동네의 소식은 챙겨보았다. 그래서 그를 떠올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빌런이라. 그런데 너 마족이잖아?

마족은 빌런 일을 하면 안 됩니까?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규칙이란 게 있잖아. 다른 세계에서 지나치게 분탕을 치면 안 된다. 그러면 귀찮은 존재들이 참견하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천족 말입니까괜찮습니다. 모종의 방법으로 그들의 눈과 귀를 막고 있으니까요. 나중에 눈치채더라도 그때는 이미 저희가 이 세계를 정복한 뒤 일겁니다.”

알베르크가 혀를 찼다.

인간 세상을 먹어서 무엇하게?

무엇하다니요. 아시지 않습니까. 이곳은 무척이나 살기 편합니다. 오염이 어느 정도 진행되어 있기는 하지만, 마계보다는 낫지요. 탐나지 않습니까?

별로.”

당신이라면 그렇게 말하겠지요. 그래서 저는 당신이 싫습니다. 마계의 서열 1위. 그건 마왕이 사라진 세계에서는 왕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그 왕은 아래를 살피지 않지요. 제멋대로 살아가고 움직입니다. 저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말이 길다.”

알베르크의 손 위로 까만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록 이곳에 넘어오면서 힘이 줄어들었다고 하나, 그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대다수의 마족에게 그는 여전히 강자였다.

역시 당신은 저의 생각을 이해해 주지 않는군요.”

이해를 바라면 정체부터 제대로 밝히고 다시 이야기 하던가.”

그건 싫습니다. 아직 정체를 감출 필요가 있거든요.”

리비는 허공에서 거대한 검을 꺼내 들었다. 흔히 투 핸드 소드라고 부르는 검이었으나, 그는 그걸 한 손으로 들고 있었다.

티아매트, 알베르크는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애초에 그걸 상정하고 계획을 짰다.

좋아. 그럼 나는 남은 이들을 상대하지!

티아매트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90.

그럼 넌 잠시 피해 있어.”

알베르크는 빼돌렸던 선우를 밀어 냈다. 묶여 있던 사슬은 어느새 풀려 있었기에 선우는 비틀거리면서도 그 자리를 벗어났다.

그런 그를 따라 티아매트가 몸을 날렸다. 이어 바닥이 늪처럼 변하며 결계가 나타났다. 카이는 티아매트를 따라가는 대신, 결계를 치는 걸 택했다.

천족이 두려운 모양이군.”

그들이 끼어들면 귀찮아지니까요.”

리비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앞세웠다.

그건 그렇지. 좋아, 이 정도는 맞춰 주지.”

천족은 알베르크에게도 귀찮은 존재였다. 적어도 현우를 마계로 다시 데려가기 전까지는 그들이 모르는 게 좋았다.

감사합니다.”

그럼 싸워 볼까?

알베르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러죠.”

먼저 공격을 시작한 이는 리비였다. 그는 거대한 검을 능숙하게 휘두르며 알베르크의 급소를 노렸다. 그러나 검은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알베르크가 손을 뻗어 검을 잡아챘기 때문이었다.

날카로운 검날을 잡았는데도 하얀 손에는 조금의 상처도 없다.

만만치 않으시군요.”

가진 힘을 모두 가지고 오지 못했는데도 강하다.

그래, 이러니까 마계에서 최강이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승산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렇기에 리비는 전력을 다해 부딪쳤다. 카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이 보였지만, 재생력이 강한 히드라니 제법 오랜 시간 결계를 유지하며 버틸 것이다. 그 안에 알베르크와 결판을 내야 했다.

선우야!

현우는 달려오는 선우를 와락 끌어안았다. 헤어진 지 하루도 되지 않았건만 얼마나 힘들었는지 마른 것 같았다.

저 망할 놈들!

이를 아드득 갈아보지만, 당장은 보복할 방법이 없다. 일단은 몸을 감싼 사슬부터 뜯어내야 했다. 하지만 뜯어내려고 손을 대면 극심한 고통이 몸을 관통했다. 살을 같이 떼어 내지 않는 이상은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형.”

선우가 현우를 마주 안으며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왜 사과해?

다쳤잖아.”

힘이 봉인된 상태로 바카디를 상대하다 멍이 좀 들긴 했다. 그래도 그건 선우의 잘못이 아니다.

왜 피해자가 사과해. 사과해야 할 놈은 저기 있는데.”

그런 현우의 말을 들었는지 바카디가 피식 웃었다.

뭐야, 사과를 원해?

현우는 잠자코 중지를 들어서 보여 주었다. 평소라면 좀 더 이미지 관리를 했겠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웃어 제끼는 바카디의 옆에 티아매트가 내려섰다.

뭘 처웃고 있어?

티아매트는 바카디에게 핀잔을 주며 손톱을 길게 뽑아냈다. 그와 동시에 바카디의 몸이 시커멓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그 말에 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도진이 혼자서 둘을 상대할 수 있을까. 가준이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며 이럴 때 없다.

실상은 만약을 대비해 몬스터들과 후방에 남았다가 갑자기 나타난 다른 적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현우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

도진은 그런 현우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앞으로 나섰다. 먼저 나선 건 바카디였다. 쿵쿵거리며 돌진한 그가 그대로 도진을 들이박았다. 그러나 정직한 공격은 먹히지 않는 법이다. 도진은 맞서는 것보단 힘을 흘리는 걸 택했다.

그림자에 비스듬히 튕겨져나간 바카디가 나무를 꺾으며 저 멀리 나동그라졌다. 이어 카라를 역수로 쥔 도진이 그에게 다가서려 했으나, 티아매트의 공격에 물러서야 했다.

바카디가 정직하게 도진을 노린다면, 티아매트는 좀 더 지능적으로 공격했다. 도진보다 무기력해진 현우와 선우를 집요하게 노렸다.

하하하, 나랑 싸우자!

바카디는 미친 멧돼지처럼 연신 들이박고, 주먹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땅이 패이고, 나무가 부러졌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티아매트는 그 뒤에 숨어 손톱을 휘둘렀다.

도진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티아매트는 만만한 적이 아니었다. 지금도 본인의 힘을 전부 쓰지 않으며 틈을 노리고 있었다.

뭔가 해야 해.

선우는 어떻게든 형을 지키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지금은 현우가 나서는 게 나았다. 힘은 사라졌어도 싸움의 기술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현우는 선우를 뒤쪽으로 밀면서 숨어서 공격해 오는 티아매트의 손톱을 팔뚝으로 막아 냈다. 몸이 뒤로 쭉 밀리기는 했지만, 팔에 휘감긴 사슬 덕에 구멍이 뚫리는 건 피했다.

형, 형!

도진이 뒤늦게 티아매트를 공격해서 떼어 놓았지만, 한순간일 뿐이었다. 그녀는 답지 않게 끈질기고 기민하게 현우만을 노렸다. 그러다 현우가 멀어지면 선우를 공격하는 척해서 다시 끌어들이곤 했다.

그런 공격이 반복되니 현우도 점점 지쳐 갔다.

오랜만이네.

마계에서 힘을 얻게 된 뒤로는 이런 무기력함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상처를 입어 가며 막아 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진저리치도록 싫었다.

그래도.

자신은 처음부터 강하게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기억해라. 힘을 가지기 전, 악만 가지고서 마계의 몬스터를 상대하던 때를. 현우는 도진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윽.”

선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주먹으로 다리를 내려쳤다.

움직여라, 움직여!

아이템은 떼어냈으니, 약 기운만 풀리면 싸울 수 있다. 하지만 포션을 써 보아도 별다른 변화가 느껴지지 않는다. 절망이 몸을 잠식했다.

형이 돌아오기만 하면, 뭐든 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현실은 냉정하기만 했다.

형.”

선우는 이로 입 안을 물어뜯었다. 조금이라도 정신을 맑게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몸이 좀 더 잘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때, 뒤쪽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힘겹게 고개를 돌려보니 처음 보는 몬스터가 이쪽을 향해 느릿하게 기어 오고 있었다. 선우는 힘겹게 손을 뻗으며 능력을 끌어올렸다. 그러나 몬스터가 좀 더 빨랐다. 갑자기 튀어오른 몬스터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선우에게 달려들었다.

선우야!

그걸 발견한 현우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티아매트는 그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날카로운 손톱이 단단한 몸을 꿰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현우도, 선우도 아니었다.

현우가 위험한 걸 보고 서슴없이 몸을 날린 도진이었다. 길고 단단한 손톱이 뱃속을 휘젓고 빠져나갔다. 티아매트는 몸을 절단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도진의 맹공에 다시 몸을 물려야 했다.

흐응.”

티아매트는 손톱에 맺힌 핏방울을 혀로 핥았다. 신선한 인간의 피는 참으로 달았다.

현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선우는 무사했다. 뒤늦게 나타난 케로가 선우에게 달려들던 몬스터의 목덜미를 물어 챈 덕분이었다.

워, 괜찮아?

이어 가준과 점박이, 두눈도 모습을 드러냈다.

참 빨리 온다?

존대를 하는 것도 잊은 현우가 이죽이며 말하자, 가준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몬스터를 상대하다 왔다고지금 뒤쪽도 난리야. 포털이 열려서 엘리샤와 파격된 각성자들도 싸우고 있더라고.”

정말 단단히 작정하고 온 모양이었다. 현우는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넘기고는 명령했다.

당장 저걸 치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로와 점박이 두눈이 적에게로 달려갔다.

쉽지 않아 보이는데?

가준의 말에 현우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케로가 바카디를, 점박이와 두눈이 티아매트를 상대하며 접근을 막고 있었다.

아악!

짜증을 낸 티아매트가 변신을 풀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거대한 드래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에 질새라 두눈도 원래의 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드래곤의 힘 싸움이 시작되었다.

두눈은 필사적으로 덤비고 있었지만, 보기에도 티아매트가 더 크고 강해 보인다.

크르르르!

계속 밀리던 두눈이 티아매트에게 목을 물렸다. 점박이가 그런 티아매트를 떼 내기 위해 돌진했지만, 큰 효과는 없어 보였다.

저리 꺼져!

바카디는 케로의 세 개의 목 중 하나를 잡아 졸랐다.

케겡!

다른 두 개의 목이 인정사정없이 바카디를 물어뜯으며 버둥거렸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람.”

가준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금 넌 못 싸우는 거지?

사슬 때문에.”

봉인 계열이냐.”

가준이 현우에게 얽힌 사슬을 뜯어내려 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됐어. 나보단 도진 형을 봐 줘.”

누군 형이고 누군 아니고.”

가준은 투덜거리면서도 포션을 꺼내 들어 도진에게로 향했다. 현우는 잠시 선우의 상태를 확인한 후 그 뒤를 따랐다.

형.”

현우야.”

도진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속상하게 웃긴 왜 웃어. 현우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들어 올렸다. 관통상을 입은 배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포션!

나에게 포션 맡겨 놨냐?

가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가지고 있던 포션을 건네주었다. 현우는 선우의 곁에 도진을 앉히고서는 포션을 상처에 들이부었다.

아파도 참아요.”

응.”

포션을 붓자 흘러내리는 피는 줄어들었으나, 상처는 여전히 벌어져 있었다. 혹시나 싶어 하나를 더 부어도 그 이상 아물지는 않았다.

포션이 만능은 아니지. 괜히 힐러가 있는 게 아니라니까.”

그럼 힐러를 불러와.”

그쪽도 전투 중이라 정리되어야 데려올 수 있을 텐데. 우리 쪽에서 가는 게 빠를 거다.”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91.

현우는 눈앞이 까마득해짐을 느꼈다. 어떻게든 상황을 벗어나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티아매트와 바카디는 지독하리만치 집요했다. 전투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알베르크가 있는 쪽에서 카이의 커다란 울음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티아매트는 그 자리에서 멈칫했다.

기회다!

기회를 잡은 두눈이 티아매트의 목을 물고 늘어졌다. 그녀는 몸부림쳐서 두눈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점박이의 방해가 더해져 쉽지 않았다.

티아매트가 간신히 그들을 떼어 냈을 때는 목에 커다란 상처를 입은 뒤였다. 그녀는 몸을 다시 인간의 형태로 되돌렸다. 줄줄 흘러내리는 피에 목을 손으로 막아 보았지만, 지혈이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색이 창백하다.

후퇴 신호가 올 걸 알고 있었는데도.

순간 방심한 탓에 상처를 입었다.

이를 아드득 갈던 티아매트는 바카디에게 외쳤다.

후퇴다, 멍청한 멧돼지 새끼야!

하하지금 한창 재밌는데?

그럼 혼자 남던가!

작은 구를 깨트리자, 허공에 작은 점이 나타나 점점 덩치를 키워 나갔다. 그리고 그게 사람 크기가 되자마자 티아매트는 안으로 몸을 날렸다. 케로의 목을 조르던 바카디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결국엔 티아매트의 말을 따랐다.

다음에 보자고!

꺼져다음에 보긴 뭘 봐!

가준이 몸서리를 치며 외치고, 그렇게 현장이 정리되었다. 현우의 사슬이 남아 있긴 했지만, 그는 그걸 지금 당장 푸는 것보단 도진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렇기에 도망치는 이들을 쫓지 않았다.

점박아!

적이 사라지자마자 현우는 점박이를 불렀다. 이어 가준에게 말했다.

선우 좀 챙겨 줘.”

어, 음.”

가준은 못마땅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선우에게 다가서 그를 안아 들려고 했다. 물론 선우는 질겁하며 그를 거부하려 했다.

선우야, 이번만.”

하지만 애처로운 형의 부탁을 어찌 거절할 수 있으랴. 결국 선우는 가준의 도움을 받아 점박이에게 올라탔다.

아직 알베르크가 남아 있었지만, 어차피 여기 있는 이들은 전력이 되지 않는다. 자리를 비워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두눈과 케로는 그 자리에 남겨두었다.

*

힐러힐러를 부탁드립니다!

빠르게 중독을 해결한 선우와는 다르게, 도진은 결과가 좋지 않았다.

저주와 독이 상처 회복을 막고 있어요. 포션도 잘 통하지 않았죠?

네.”

현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일단 제가 할 수 있는 처치는 다 했어요. 이 이상은 다른 분께 보여야 할 것 같습니다. 미리 본부에 연락을 넣어 뒀으니 산하 병원에 가면 치료를 받으실 수 있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병원의 이동은 걱정 마세요. 헬리콥터가 준비되었어요. 그리고 제가 곁에서 계속 회복을 돕겠습니다.”

도진은 지속적인 치유를 받으며 빠르게 병원으로 이동했다. 거기에는 좀 더 등급이 높은 힐러가 기다리고 있었다.

A급 각성자, 힐러 안나. 전투 능력은 거의 없지만, 회복 능력만큼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여성이었다.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의를 보인 것이다. 그 때문에 희망을 가졌으나, 그 희망은 오래지 않아 꺾였다.

죄송해요.”

병실에서 나온 안나가 한 첫말이었다.

독은 어느 정도 해독했으나, 저주가 지독해요. 이건 제 힘으로는 풀 수 없어요. 혹시 몰라 해주가 가능한 각성자를 불러 봤지만, 그도 힘들다 하더군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현우의 질문에 안나는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되는대로 힐러를 불러 보았지만, 전부 다 고개를 내저었다. 힐을 쏟아부어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라 하였다. 아무리 주렁주렁 링겔을 달고 수혈을 해 보아도, 지혈을 해 보아도 피가 지속적으로 새어 나온다.

새하얘진 도진의 얼굴은 마치 석고 같아 보였다. 그 앞에서 현우는 가학적으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너덜너덜해진 입술에서는 피가 흘러내렸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선우는 이미 회복되어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현우의 사슬도 미국 정부가 도움을 주어 제거하였다. 하지만 도진만은 어떻게 하지 못하고, 죽어 가는 걸 바라보고만 있다.

가까이 다가가 떨리는 손으로 도진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도진이 눈을 천천히 떴다.

현우야?

까슬한 목소리가 현우를 불러 왔다.

형.”

묻고 싶은 건 많았다. 하지만 물을 수 없었다.

괜찮아입술이 엉망이네.”

본인은 더 아프면서, 왜 이런 사소한데 신경을 쓴단 말인가.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랐다. 현우는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트리고는 도진의 옆에 앉았다.

형, 지금 환자는 형이야.”

지금 이 순간은 존대를 하는 것도 잊었다.

이제야 말을 놓네기쁘다.”

현우는 입술을 달싹이다 다물었다. 그리고 늘어져 있던 도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기다려. 어떻게든 살릴 거니까.”

기다릴게.”

도진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는 지친 듯 다시 눈을 감았다.

어느덧 어둠이 내린 병실, 등을 켜지 않아 사방이 어둡다. 그 속에서 알베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있다 이제 와?

어디 있다 이제 오냐니. 날 잊고 있었으면서.”

알베르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됐어. 그보다 형의 상태를 좀 봐줘.”

봤어.”

저주와 독을 풀 방법이 있을까?

없진 않지.”

그 말에 현우의 시선이 알베르크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그걸 왜 내가 알려 줘야 해?

알베르크가 뽀로통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베르크.”

내가 널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모든 걸 양보해 주겠단 소리는 아냐.”

알고 있어.”

알면 대가를 제시해.”

어떤 대가를 제시하건 현우는 도진을 살리고 싶었다.

뭘 원해?

너라면 알 것 같은데.”

알고 있다. 현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의사와 힐러가 말하길 이대로라면 도진은 일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하였다. 그나마 그 정도 버티는 것도 S급 각성자이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몸의 관계 같은 걸 원하는 건 아니지?

그런 걸로 만족할 수 있을까.”

알베르크는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꼬며 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네가 내 반려가 되는 거야.”

그래, 그런 걸 원할 줄 알았다. 마족은 이런 때를 놓칠 종족이 아니었으니까. 현우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에게 도진은 어떤 사람일까현우는 마음을 더듬어 보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오고 심장이 뛴다. 은근히 애정을 표현해 오는 행동이 좋았다.

좋아해.

그래, 자신은 도진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직 사랑이 뭔지는 모르지만, 세간에서는 이걸 사랑이라 부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게 사랑이 맞을까?

사랑이라 하기엔 걸리는 게 너무 많다.

선우야.

하나뿐인 동생. 형을 기다리며 힘든 세월을 기다려온 그 아이를 생각하면, 쉽게 입을 열기 어려웠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겠군.”

그 말과 함께 인기척이 사라졌다.

이어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선우였다. 현우는 다시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자 선우가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게 보였다.

형.”

걱정 어린 표정으로 선우가 말했다.

간호도 좋지만, 형도 좀 쉬어. 잠도 안 잤지?

난 괜찮아.”

괜찮긴. 이러다 환자보다 형이 먼저 쓰러지겠어.”

“……그건 안 되지.”

그럼 조금만 쉬자. 한도진은 내가 대신 살펴보고 있을게.”

옆에 서 있던 가준이 선우의 말을 거들었다.

그래, 좀 쉬어. 내가 또 환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보잖아. 지선우를 못 믿으면 나를 믿어!

가준이 가슴을 탕탕 쳤다. 그리고는 현우를 슬쩍 끌어다 등을 떠밀었다. 평소라면 못마땅해할 선우도 그런 가준을 말리지 않았다. 그저 현우 대신 도진을 간호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을 뿐이었다.

일단 뭐 좀 먹자.”

어디서 구했는지 컵에 담긴 수프를 내민다. 그걸 받아들자 그제야 안심한 표정을 짓는다.

그거 꼭 다 마셔라.”

응.”

현우는 따끈한 컵을 양손으로 감싸고 조금씩 수프를 삼켰다. 빈속에 먹을 게 들어가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 봐. 배고팠네. 더 있으니까 마음껏 마셔.”

가준은 눈치를 보며 현우의 옆에 앉았다.

혹시 몰라서 한국 내의 힐러들도 불렀어. 곧 도착할 거야.”

고마워.”

고맙긴. 한도진이 일어나면 힐러 소환 비용 전부 받아먹을 거다.”

툴툴대긴 해도 도움이 되고자 움직인 건 사실이었다. 선우라면 몰라도 가준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현우는 수프를 마시다 말고 가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좋아하는 건 아니지.”

그런데 왜 도와?

내가 착해서.”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현우는 가준에게 의심의 시선을 보냈다. 하지만 가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그 시선을 흘렸다. 사실은 달랐지만, 그걸 전부 밝히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이대로 한도진이 죽으면 그나마 있던 기회도 사라질 것 같으니 그렇지.

때로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보다 많은 걸 쥐고 있기도 한다. 그렇기에 도진은 아직 죽어선 안 됐다.

참, 알베르크는 돌아왔어?

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크한테도 한번 보일 거라고 했잖아. 뭐래?

방법은 있대.”

그럼 다행이네그래서 그 방법이 뭐래?

알려 줄 수 없대.”

!

가준은 저도 모르게 소리를 높였다.

알베르크는 사람이 아냐.”

동정심 같은 걸로 움직이진 않는단 소리군.”

그래, 그는 지금 대가를 바라고 있어.”

더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냥 봐도 알베르크는 현우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러니 원하는 대가도 그쪽일 것이다.

92.

뭔지 물어봐도 돼?

가준의 물음에 현우가 대답했다.

반려가 되어 달라는 거지.”

그래, 그러고 보니 그게 궁금했어. 반려가 뭐야결혼해 달라는 거야?

대략적으로는. 다만 반려는 일반적인 부부관계랑은 좀 달라. 좀 더 깊게 얽어매는 거지. 반려가 되면 수명을 나누거든. 그래서 비슷한 때에 죽게 돼.”

그런 게 가능하다니. 신기하네. 그래도 할 건 아니지?

모르지.”

현우는 남은 수프를 단숨에 마시고, 입을 다물었다.

*

!

요정은 비명을 지르며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넘었다.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를 돌아도 마음이 안정되질 않았다.

미친 짓 그만하고 임무나 받아.”

옆에서 그걸 지켜보고 있던 다른 요정이 한심하단 표정으로 잔소리를 뱉었지만, 그도 들리지 않았다.

대체 왜뭐가 부족해서마계 서열 1위가 인간계로 간 거야!

인간을 사랑해서 간 거라며.”

그래, 그게 이상해왜 인간을 사랑해?

내가 알 바냐빨리 임무나 받고 꺼져.”

흑흑, 내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났는데.”

요정은 눈물을 흘리며 임무가 적힌 종이를 받아들었다.

「인간계로 가서 알베르크를 마계로 돌려보낼 것.」

무슨 임무가 이래. 내가 마계로 가란다고 가겠냐고!

안 가겠지. 힘내라.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아니면 천계에서 난리 칠 거야. 그쪽도 슬슬 인간계에 범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깨닫고 있거든.”

다른 요정은 혹시라도 얽힐까 봐 임무를 넘겨주자마자 빠르게 튀었다.

남은 요정은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허공에 손을 내저어 포털을 생성했다. 요정은 세계를 넘나드는 자, 타 차원으로의 이동이 제법 수월한 편이었다.

그래, 가자. 가서 해결하자.”

요정은 굳은 표정을 짓고 포털 너머로 몸을 던졌다. 인간계는 넓지만, 알베르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가장 강한 마족의 기운을 찾으면 되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알베르크 외에도 그를 찾아 낼 수 있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이었다.

덥석.

가늘고 하얀 손이 허공에서 뛰쳐나온 요정을 붙잡았다.

갸악!

당황한 요정이 뒤를 돌아본 순간,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니가 왜 여기서 나오세요?

지현우, 요정이 인간계로 보낸 괴물이 그를 붙잡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미간을 구긴 현우가 험악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아무래도 좋은 시기를 함께 한 게 아니다 보니,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많은 배려를 했는데!

억울해해도 현우는 그걸 알아주지 않았다.

또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간다.

터져요, 터져내 몸이 터진다아아아!

터지라지.”

이 잔인한 사람!

됐고. 여긴 무슨 일이야?

임무예요, 임무. 이건 현우 님에게도 좋은 소식일걸요!

그제야 손아귀에 들어간 힘이 조금 빠진다.

무슨 임무인데?

알베르크 님을 마계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그게 나에게 왜 좋은데?

그야 현우 님은 알베르크 님의 반려가 될 생각이 없으시잖아요?

그건 그렇지.”

현우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러고 보니 네가 그랬었지. 요정은 그 누구보다 깊고 넓은 지식을 가졌다고.”

그, 그랬었던가요?

요정은 괜히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현우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는 그대로 요정을 손에 쥔 채 발걸음을 옮겼다.

불안함에 작고 작은 요정의 심장이 콩닥거렸다. 그러나 이후 벌어진 일은 생각과는 좀 달랐다.

이 사람을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현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런 풀죽은 목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일단 저는 인간 세상에 함부로 참견해서는 안 되는데요.”

치료할 방법이 있을까?

다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요정은 현우의 손등을 필사적으로 탁탁 쳤다.

있어요, 있어!

일단 사는 게 더 중요했다.

뭔데?

물어오는 목소리가 다급하다.

그게.”

요정이 막 말하려는 순간,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게 뭐?

알베르크였다.

알베르크.”

응, 현우야.”

현우는 손에 쥔 요정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와 동시에 요정의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분명 알베르크는 웃고 있는데, 분위기가 살벌하다.

손에 쥔 건 뭐야?

너도 알지 않나?

그래, 알지. 요정이지?

요정은 손으로 목덜미를 쓸었다. 하필이면 괴물 사이에 낄 게 뭐람.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슬펐다.

요정은 변덕스러운 존재지. 저 존재가 진실을 말할 거라고 믿어?

믿어. 그러니 이번은 네가 물러나.”

현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내내 날카롭던 분위기가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어 알베르크의 표정도 바뀌었다. 똑같은 웃는 얼굴이지만,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아, 진짜. 이번엔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나 싶었더니 요정이 나타나다니. 운이 나빴네. 그래, 내가 졌어. 치료 방법을 알려 줄게.”

요정에게 물어보면 돼.”

그래도 나한테도 듣는 게 낫지 않아?

그렇긴 하지.”

마찬가지로 날카롭던 현우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요정은 다시 달랑 들려 알베르크와 함께 휴게실로 돌아갔다.

자, 이제 말해.”

저주를 건 자는 드래곤이죠?

그래.”

마법에 능숙한 드래곤의 저주를 풀 만한 존재는 딱 둘이죠. 비슷한 능력을 지닌 드래곤이거나 천족.”

맞아?

현우가 알베르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맞아.”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있습니다.”

요정의 말을 알베르크가 이었다.

드래곤이나 천족이 보기 드문 종족이라는데 있지. 보아하니 티아매트가 상처 입힌 것 같은데, 그녀는 미치긴 했어도 상당히 강한 드래곤이거든.”

두눈이로는 안되나?

힘들지. 걔는 같은 드래곤이라도 덜떨어졌다고 소문났다고. 특히 마법적 소양이 형편없어. 암만 애를 써도 안 될걸.”

그 말에 현우는 엉망이 된 입술을 다시 잘근 깨물었다.

그래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요정이 말했다.

사실 인간계에는 몇몇 이종족이 숨어 삽니다. 들키면 원래 세계로 끌려가기에 힘을 감추고 살긴 합니다만, 그런 이들을 찾아서 도움을 요청하면 될 겁니다.”

숨어 사는데 어떻게 찾아.”

그건 알아서 생각하셔야죠.”

아니면 다른 방법도 있어.”

알베르크가 웃으며 말하자, 요정이 발발 떨며 물었다.

그 방법이 제가 생각하는 방법은 아니겠죠?

내가 힘을 터트리면 돼.”

괜히 리비가 카이를 이용해서 결계를 친 게 아니었다. 일정 이상의 힘을 발휘하면 천계에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안 됩니다아악지금도 간신히 천계에게 감추고 있는데, 그러면 틀림없이 들킵니다천계에서 난리 칠 거라고요지상으로 내려온다고요천계와 마계 사이에 전쟁이라도 일으킬 생각입니까?

그 말에 현우가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아까는 조건을 들어주기 전까진 도와주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는지 모르겠다.

왜 도와주냐는 표정인데염려 마. 이번엔 순수한 의도에서 도와주려는 거니까.”

정말이야?

마족은 거짓말을 안 해.”

하지만 감추거나 돌려 말하긴 하잖아.”

뭐. 그렇긴 하지. 하지만 지금은 정말이야.”

어차피 감추려고 해도 요정이 있으니 소용없다. 요정이란 놈들은 자기 입이 무겁다 떠들어 대지만, 목숨 앞에서는 뭐든 술술 불어 댄다.

알베르크도 그걸 알기에 먼저 털어 놓는 걸 택했다. 어차피 알게 될 거라면 자신이 알려 주는 게 호감을 사기엔 좋을 테니까.

안 됩니다안 돼요!

요정은 엉엉 울며 외쳤다.

제발 그만두세요그런다고 천족이 인간을 돕겠습니까?

내가 도와 달라고 한다면?

마족으로서 자존심도 없습니까?

사랑 앞에서는 자존심도 굽히는 게 마족인걸.”

저 미친 종족요정은 얼굴을 일그러트리고 버둥댔으나, 현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럼 할까?

적어도 장소라도 바꿔 주십시오어디 한적한 곳에서!

그래, 여긴 병원이니까.”

알았어.”

알베르크는 창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현우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마침 가준이 잠시 자리를 비웠으니, 그사이에 해결하고 오면 될듯했다.

알베르크와 현우가 작정하고 달리니 시가지를 벗어나는 건 금방이었다.

우에에엑!

억지로 끌려 온 요정이 토악질을 했지만, 둘 다 요정의 인권은 배려하지 않았다.

그럼 한다?

알베르크는 작은 몸에 가두어 두었던 마기의 통제를 놓아 버렸다. 순식간에 퍼져 나간 마기는 주변을 둘러싼 생명체들을 죽여 나갔다.

미쳤어, 미쳤다고!

마기를 퍼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고작해야 30초 정도. 하지만 그 짧은 시간만으로도 제법 커다란 공원이 전부 망가졌다.

이제 끝!

알베르크는 마기를 도로 거둬들였다. 주변을 바라보았지만, 공원이 망가진 것 외에 다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걸로 된 거야?

응.”

흑흑, 난 이제 글렀어.”

요정은 축 늘어진 채 울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하늘 저편에 빛이 떠올랐다. 벌써 날이 밝은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나 별의 빛도 아니었다.

하늘의 일부가 열렸다. 빛은 거기서 새어 나온 것이었다. 빛은 허공에서 땅으로 천천히 내려앉으며 크기를 줄여 나갔다. 그리고 인간 정도의 크기가 되어서야 멈췄다.

93.

빛이 사그라지고 나서야 현우는 하늘에서 내려온 존재를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등 뒤에서 펄럭이는 커다랗고 새하얀 날개 두 쌍, 바람에 흩날리는 은발의 머리카락 뒤로는 후광이 비친다.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천사의 모습이었다.

자애롭게 웃던 미청년이 이내 입을 열었다.

고개를 조아려 경배하라!

맑고 청량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어깨를 내리눌렀으나, 그도 잠시였다. 어깨를 터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멀쩡해졌다.

그나마 인간인 현우는 잠깐 영향이라도 받았지, 알베르크는 평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모습에 천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확실하게 들렸다.

건방진 인간이로군.”

콧방귀를 뀐 천사는 날개를 펄럭여 아래로 내려섰다. 그리고는 현우와 알베르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마도 마기를 분출한 상대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현우가 야무지게 쥐고 있는 요정을 발견했다.

요정이 왜 여기 있지?

경계를 하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제야 요정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들었다.

왜 여기 있냐고요?

요정은 간신히 빼낸 한 손으로 자신 이마를 콩콩 쥐어박았다. 마음 같아서는 가슴을 두드리고 싶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후우.”

깊게 한숨을 쉰 요정은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두 분 다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세요마계도 천계도 다른 세계에 함부로 간섭해선 안 됩니다.”

마계?

깊게 한숨을 쉰 요정은 알베르크를 자그마한 손으로 콕 집어 가리켰다.

천사가 못마땅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는 다시 한 번 알베르크를 보더니 손가락으로 턱을 쓸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

뒤로 훌쩍 물러난 천사는 등에 차고 있던 걸 꺼내 양손으로 조립했다. 장난감을 조립하는 것 같이 보였는데, 완성되어 나온 건 멋들어진 창이었다.

저도 모르게 신기함에 박수를 치니 쑥스러운 듯 웃어 보인다. 그러나 그도 잠시, 시선이 알베르크에게로 향했다.

네가 바로 마기를 퍼뜨린 원흉이로구나!

그렇다면?

네 녀석을 물리치겠다!

할 수 있으면 해 보던가. 애송이가 제법 용감하네.”

누가 애송이라는 거냐!

알베르크가 천족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나는 애송이가 아니다!

그걸 지켜보고 있던 현우가 슬쩍 요정에게 물었다.

저 천족 아직 어려?

갓 성인된 정도입니다.”

겉보기에는 성숙해 보이는데 요정과 알베르크의 눈에는 그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럼 덤벼라, 애송이.”

알베르크의 도발에 천족의 창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여기서 싸우면 안 됩니다!

요정은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둘을 말리려 들었다. 하지만 몸이 구속되어 있으니 쉽지 않다.

현우 님, 이제 놓아주시면 안 됩니까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요정은 현우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현우가 요정에게 가지는 신뢰도는 워낙 바닥인지라 주먹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티그리스 여왕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결국 요정은 울면서 하나뿐인 여왕님까지 걸었다.

믿어도 돼?

현우의 표정에는 여전히 의심이 서려 있었지만, 알베르크가 어쩐 일로 요정을 도왔다.

요정들은 전부 여왕의 자식 같은 존재라서, 그 이름을 건 거라면 믿어도 돼.”

흐음.”

그제야 현우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졌다. 요정은 내내 잡혀있어 저릿한 몸을 주무르며 재차 한숨을 쉬었다.

마족, 너를 처단해 주겠다!

그 사이 천사는 격분한 채 알베르크에게 창을 겨누고 있었다.

날개가 두 쌍, 거기다 저정도의 힘이라면 천계에서도 유망한 앞날을 가진 천족일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계에서 서열 1위를 찍으신 분이라. 천사장이 오지 않는 이상, 상대도 되지 않을게 뻔했다.

죽이시면 안 됩니다.”

일단은 그나마 말이 통해 보이는 알베르크에게 애원해 보았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서글플 정도로 처참했다.

?

상대는 아직 어리지 않습니까. 그런 천족을 죽였다가는 천계에서 난리가 날 것입니다.”

딱히 상관없는데.”

아니요, 상관있지요!

요정은 기겁하여 외쳤다. 그리고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천계에서 난리가 나면 다른 세계가 끼어들 빌미가 생긴다. 뿐이랴, 원래 천계와 마계는 지독히도 사이가 나쁜 종족. 수습을 잘못하면 제1356회 천마 전쟁이 일어날지도 몰랐다. 요정으로서는 기겁하며 말려야 할 일이었다.

현우 니이임어떻게든 해 보세요!

결국 요정은 현우에게 매달리기까지 이르렀다.

알베르크.”

현우는 망설임 없이 알베르크의 이름을 불렀다.

도와주겠다고 천족을 불렀으면서,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아까는 자신을 위해선 천족에게 부탁도 하겠다고 했으면서.

그런 의미를 담아 바라보자 알베르크의 기세가 수그러들었다.

미안, 워낙 천족과는 사이가 나쁘다 보니까.”

알베르크는 얌전히 사과했다. 그리고 천족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마계의 알베르크다.”

알베르크익숙한 이름이도다.”

그 옆으로 날아간 요정이 약간의 도움을 주었다.

마계 서열 1위요!

천족이 몸을 움찔하더니 뒤로 한발자국 물러섰다.

마계에서 가장 강한 자가 어째서 여기 있는 거지무슨 음모를 꾸미는 거냐, 마족!

딱히 음모는 없고, 반려를 찾으러 온 것뿐이다.”

마족의 반려를 왜 여기서 찾는가!

반려가 인간이거든.”

천족의 하늘색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고약한 취향이로다.”

쉿쉿!

요정이 기겁하여 천족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찰싹찰싹 쳤다.

마족이 반려에 미치는 거 알잖아요!

지금 둘 중 더 강한 건 알베르크였다. 요정으로서는 아직 어린 천족이 나대다 죽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야 그렇지만.”

천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알베르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그는 딱히 화가 나보이진 않았다.

괜찮다. 아직 어린 아이가 헛소리 좀 할 수 있지.”

알베르크가 관대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네 이름은?

나는 천계의 미리엘이다.”

좋아. 미리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마족이 천족에게 부탁이 있다고?

미리엘은 뚱한 표정으로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인간 하나를 치료해 줬으면 한다.”

내가 왜?

천사는 인간을 자애롭게 보듬어 주는 존재 아니던가.”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마족에게 붙는 걸 막기 위해, 꾸민 대외적인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기엔 여기에도 인간이 있었으니.

미리엘은 몇 번인가 입술을 달싹이다 입을 다물었다.

부탁드립니다. 도와주세요.”

현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현우 님!

요정이 놀란 표정으로 현우를 쳐다봤다.

현우도 이게 자기답지 않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도진을 낫게 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었다.

부탁합니다!

미리엘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아직 무슨 상황인지 전부 이해하지도 못했다. 다른 세계를 지켜보다 마기를 느꼈고, 그 때문에 이쪽으로 넘어왔다. 그런데 여기 있는 마족은 무려 서열 1위의 알베르크였다. 거기다 중립인 요정도 하나 있고, 인간도 있다.

어느 쪽도 딱히 적의는 보이지 않는다. 희한한 상황이었다.

어쩌지.

다른 천족이 내려오는 걸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일단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나을까. 하지만 상대는 마족과 그와 관련되어 보이는 인간인데?

마족은 무조건 죽여야 한다고 배웠다. 마족에 홀린 인간도 살려 둬서는 안 된다. 속이 복잡했다.

미리엘은 잠시 자신이 든 창을 바라보았다. 아버지인 천사장으로부터 받은 창은, 마족을 상대하기에 최적화되어 있는 무기였다.

생각하지 마라.

과거 아버지가 말했다.

마족은 적이다.

그러니 이유를 찾으려 들지 말라 일렀다. 미리엘은 그걸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그는 다시 창을 치켜세웠다.

마족은 처단해야 함이 옳다.”

처단할 실력은 있고?

알베르크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실력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나는 물러나지 않는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졌다. 그 사이에서 요정이 안절부절못하며 둘을 말려보려 했다.

안 됩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안 돼요다른 세계에서 사고를 일으키는 건 정해진 규칙을 어기는 것입니다!

싸우고 싶은 건 나보다 저 애송이 같은데.”

미리엘 님!

요정의 말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로 앞에 있는 마족을 두고 무기를 내리는 건 해선 안 되는 행동이다.”

차라리 나이 든 천족이 내려왔으면 말이라도 통했을 텐데. 요정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요정이 그러고 있는 사이, 창을 든 미리엘이 알베르크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어린 나이에도 날개를 두 쌍 만든 천족답게 몸놀림이 범상치 않다. 비슷한 나이대의 마족과 싸웠으면 당연히 그가 승리했을 것이다.

상대가 저 알베르크만 아니었다면!

알베르크는 히죽거리며 미리엘의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였다. 파괴되는 건 인간들의 공원뿐이었다.

말려야해요오.”

요정을 울면서 현우에게 매달렸다. 현우 또한 굳은 표정으로 그들이 싸우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알베르크는 당장 천족을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보였지만, 그렇다고 내내 공격을 피하기만 할 수도 없었다.

천족을 설득시켜야 했다.

현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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