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
그르르륵.
단단한 뼈로 감싸인 가슴이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이어 깊이 머금은 숨이 가득 차올랐을 때, 티아매트는 서슴없이 브레스를 내뱉었다.
초록색의 브레스가 스치는 자리에 있던 것은 지독한 독성에 모두 녹아내렸다. 상대적으로 작아 보이는 하얀 팔 또한 녹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야.’
물론 모든 건 망상에 불과했다. 하얀 팔의 주인은 지독하리만치 강한 마족인지라, 이 정도는 쉽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브레스는 느릿하게 움직이는 하얀 팔에 닿은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무리해서 브레스를 내뱉은 몸에 통증이 밀려왔다.
“큭!”
티아매트는 신음을 내뱉으며 그대로 앞으로 돌진했다. 브레스로 안 된다면 몸으로라도 마법진을 깔아뭉개서 지울 생각이었다.
“꺼져 버려!”
쿵쿵! 거대한 몸이 돌진하자, 반쯤 녹아내린 주변 건물이 형편없이 흔들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마법진을 지우고 포털을 닫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티아매트는 이를 악물었다. 그렇지만 다시 한번 하얀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순간, 잠시 기억이 끊겼다.
“으, 으으.”
티아매트는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마지막에 공격을 당한 것 같은데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리만치 무거운 고개를 간신히 들어 올려 포털을 바라보았다.
“어?”
포털은 이미 닫혀 있었고, 그곳에 하얀 손의 주인은 없었다.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처참하게 녹아내린 인간의 시체와 건물의 잔해뿐이었다. 티아매트는 일단 몸 크기를 다시 줄이기로 했다. 인간의 형태로 변한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쳤다.
일어나니 머리가 울려 왔다. 몸에서 멀쩡한 부분이 별로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소환이 성공했는가, 실패했는가. 당장 몸의 상처보다 중요한 건 그것이었다.
“제기랄!”
안 된다. 이 일을 시킨 ‘그’가 그랬다. 다른 마족은 몰라도 하얀 팔의 주인, 마계 서열 1위 알베르크만은 이 세계로 넘어와선 안 된다고!
대부분이 미쳐 돌아 버린 강한 괴물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그는 규격 외의 괴물이었다.
‘그런 괴물이 지구로 넘어오면, 지금까지 가만있던 놈들도 움직이게 될 거야.’
그렇게 되면 일이 복잡해진다. 더는 지구와 마계와의 일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천계가 움직일 수도 있고, 그에 더해 세계의 균형을 담당하는 요정들도 움직일 수 있었다.
“아아, 미치겠네!”
그뿐만이 아니다. 알베르크가 마계에 떨어진 인간 하나를 유독 아꼈다는 걸 티아매트는 알고 있었다. 그가 혹시라도 인간 편을 들면 곤란하다. 힘의 추가 기울어지는 것이다.
“어쩌지. 어쩌지.”
티아매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생각해 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내!
“일단 알베르크를 찾는다.”
그런 후 돌려보낸다.
“돌려보낼 방법은?”
한 번 부르는 데도 엄청난 마력이 필요한 마족이다. 게다가 지금 이 마법진에 들어간 재료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당장 다시 마련하기 힘들 것이란 소리도 들었다.
“잠깐만.”
티아매트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대었다. 그 속에는 드래곤에게만 존재하는 마나의 결정체, 드래곤 하트가 존재했다. 드래곤 하트 하나가 있으면, 그 외의 필요재료가 대폭 줄어든다. 원래 중간계에는 드래곤이 없지만, 지금은 다르다.
“덜떨어진 녀석 하나가 있잖아?”
인간에게 들러붙은 멍청한 드래곤.
“이름이 뭐였더라. 하르모니아였나?”
그래, 그 드래곤의 드래곤 하트를 뽑아내자. 그리고 알베르크를 찾아서 최대한 빠르게 돌려보내는 것이다. 그러면 된다. 티아매트는 정신을 집중하여 카이의 위치를 찾았다. 어쩌면 아직 카이가 그 녀석을 상대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으윽!”
몸 상태는 엉망이었지만, 이 정도는 마법을 쓰면 해결된다. 블랙 드래곤은 치유 마법에는 약한 편이었지만, 움직이는 데 필요한 부분만 대충 기워 두면 된다.
티아매트는 맨발로 훌쩍 자리에서 뛰어올랐다. 거의 무너져 내린 건축물을 밟고 툭툭 뛰어 그 장소를 벗어난 그녀는 곧이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뛸 때마다 아픔이 느껴졌지만, 그 정도는 무시했다.
다행히 카이가 전투하는 장소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
하늘 위로는 비행형 몬스터들이 날아가며 빌딩을 공격하고, 땅에선 지상형 몬스터들이 사람을 짓밟는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까지 동원했음에도, 거대한 도시를 전부 커버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살려, 살려 줘요!”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고 살기 위해 도움을 구했다. 일부 사람들은 발악하며 총을 들었으나, 몬스터에게는 먹혀들지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진 전투기가 터져 나가며 폭발을 일으켰다. 아수라장이었다.
그 사이를 기묘한 분위기를 가진 미형의 소년이 걷고 있었다.
“하아.”
소년은 양팔을 벌리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매캐한 공기가 코끝을 찔러 왔다. 그가 아는 마계의 공기와 크게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래, 여기가 현우의 고향이구나.”
보랏빛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우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말했다. 그곳은 평화로운 곳이라 마계처럼 매일 싸우지 않아도 되고,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기만 하면 끝없는 게으름을 부리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잠만 잘 거라고 야무지게 다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딱히 마계랑 달라 보이지 않는데?”
소년, 알베르크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이런 곳이 고향이라면 마계도 괜찮지 않았을까. 그리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미친 듯이 날뛰고 있던 몬스터 하나가 그를 발견했다.
레드 보어. 빳빳한 붉은 털을 가진 멧돼지를 닮은 거대한 몬스터. 그 몬스터가 알베르크를 보며 콧김을 씩씩 뿜었다. 앞발을 땅에 긁어 대는 것이 당장이라도 돌진하려는 모양새다.
“도망쳐요!”
누군가의 외침이 들리고, 그와 동시에 레드 보어가 알베르크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막 머리를 들이박으려는 순간, 오싹한 공포가 레드 보어를 감쌌다. 들이박으면 죽는다. 그걸 깨달은 레드 보어가 방향을 틀어 빌딩에 머리를 처박았다.
“걸어가기도 귀찮은데 잘됐네.”
알베르크는 빌딩 벽에 머리를 처박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 레드 보어에게 손가락을 까닥였다.
“뀌, 뀌이익.”
트럭만 한 크기의 레드 보어는 얌전하게 알베르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는 뻣뻣하게 세우고 다니던 털도 전부 누운 상태였다.
알베르크는 레드 보어의 머리를 밟고 올라서 등 뒤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자리를 잡자마자 머리를 든 레드 보어가 조심스럽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 어?”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지만, 보이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테이머인가?”
“그럼 각성자란 소리잖아? 그럼 잡아야지!”
기겁한 몇이 살려 달라고 달려왔지만, 알베르크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
‘버겁다.’
히드라의 재생력은 무시무시하지만, 그도 한계가 있다. 이 정도로 상처를 입으면 재생력도 느려지기 마련이었다. 하늘에서는 점박이가 머리를 노렸고, 케로는 껑충거리며 발목을 물어뜯었다. 거기에 정면에서는 드래곤인 두눈박이까지 덤비고 있었으니 버티기 힘든 것도 당연했다.
“개새끼들이!”
혹시나 싶어 애쉬 쪽을 힐끔 보았지만, 곤란에 처한 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힘을 받았어도 본래는 사람인지라 마족만큼의 능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도 나쁘다.
‘슬슬 물러나야겠는데.’
이쯤이면 마족 소환 의식도 거의 끝났을 것이다. 카이는 공격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며, 도망칠 틈을 엿보았다.
그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두눈박이가 더욱더 집요하게 붙어 왔다. 하지만 카이에겐 아직 감춰 둔 한 수가 남아 있었고, 그를 이용하여 몸을 빼낼 생각이었다. 아직 싸우지 않고 한편에 서 있는 현우가 걱정되었지만, 살펴보니 끼어들 것 같진 않았다.
‘그래, 당신은 언제나 그랬지.’
카이는 이를 갈았다. 그리고 슬슬 도망을 위해 늪지대를 폭파하려는데,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더 버텨.】
한창 마족을 소환하고 있을 티아매트였다.
【드래곤이 다른 곳을 보지 못하게 만들어!】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카이는 고통을 감수하고 앞으로 뛰어들며 아홉 개의 목을 휘둘렀다.
“크롸롸롸!”
그에 맞서 두눈박이가 피어를 내질렀다. 마력이 담긴 목소리에 모든 생물체가 움찔하는 순간, 헐벗은 여자 하나가 빠르게 뛰어들었다.
‘티아매트!’
티아매트는 빠른 속도로 두눈박이의 가슴팍에 들러붙어 살을 후벼 파며 팔뚝을 밀어 넣었다.
“캬아악!”
두눈박이가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으나, 티아매트는 떨어지지 않고 버텼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녀는 상처를 벌리며 상반신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몸이 피범벅이 되었지만, 그에는 익숙했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덤벼든 결과, 마침내 드래곤 하트를 발견했다!
“미안, 원한은 없어.”
티아매트는 가벼운 사과를 하고 하트를 후벼 파내기 위해 몸을 더 밀어 넣었다. 하지만 몸은 더 나아가지 않고 덜컥 멈춰 섰다. 무언가가 발목을 잡고 더 나아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로도 모자라 무시무시한 힘으로 그녀를 끌어당겼다.
“악!”
순식간에 도로 끌려 나온 티아매트는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워낙 세게 던져진 탓에 몸을 바로 하지도 못했다.
“넌 뭐야?”
두눈박이의 비늘에 매달려 있던 현우가 티아매트에게 물었다.
“아하하.”
일이 이렇게 된다고? 드래곤 하트만 빼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티아매트는 이를 악물며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78.
“어디서 봤나 했더니. 그때 봤던 그 여자네? 너도 마계의 주민이냐?”
“뭐야.”
이어 현우를 확인한 티아매트는 입을 벌렸다.
“왜 네가 여기 있어?”
아니, 현우가 여기 있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의 고향이었으니까. 그보다 현우는 자신의 본체밖에 보지 못했을 텐데 언제 봤다는 거지? 고개를 기울이고 있자니 어느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카이가 설명을 덧붙였다.
“저번에 시비가 일어났을 때 보지 않았습니까.”
“난 못 봤는데?”
“그때는 시비 걸린 다른 사람만 보고 계셨으니까요.”
“그랬나?”
“그랬습니다.”
티아매트는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 내며, 이를 드러냈다.
“그럼 자기소개를 해야겠네.”
무릎을 살짝 굽힌 티아매트가 한 손을 우아하게 펼치며 말했다.
“안녕? 내 이름은 티아매트.”
인사를 듣던 현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독쟁이.”
마계 서열 9위의 미친 드래곤, 티아매트. 싸움과 피에 미친 마계에서 서열 9위란 건 대단한 강자란 소리였다. 더한 강자도 이겨 본 현우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힘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었다.
“차암. 독쟁이는 아닌데.”
주 능력이 독이긴 했지만, 그 외에도 쓸 수 있는 능력은 많았으니까.
“나에겐 독쟁이야. 그런데 마족이 중간계에는 무슨 일이지?”
티아매트의 등장 이후로 모두 싸움을 멈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현우의 말을 선명하게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들 굳은 표정으로 티아매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그걸 말해 줄 의무는 없지 않아?”
티아매트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대답했다.
“그래, 대답해 줄 의무는 없지.”
현우는 두눈박이의 비늘을 놓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 모습에 기겁한 선우가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형!”
걱정이 담긴 외침이 무색할 정도로 현우는 가뿐하게 바닥에 착지했다. 그는 자신을 부른 선우를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속여서 미안해, 선우야.”
좀 더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서. 더는 싸우기 지겨워서. 평화롭게 살고 싶어서 자신의 힘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않았다.
“알아, 알고 있었어.”
선우는 그런 현우의 사과에 씁쓸하게 웃었다. 내내 곁에 붙어 있는데, 뭔가 감추고 있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그걸 캐내려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전부 알아내려 들면 형이 자신을 옆을 떠날까 봐, 그를 싫어하게 될까 봐. 이유는 많았다.
“형. 나는 형이 어떤 사람이건 상관없어. 그냥 내 곁에 있어 준다고, 그것만 약속해 주면 돼.”
그제야 현우는 표정을 풀고 마주 웃어 주었다.
“뭐야, 그건 어려운 것도 아니네. 난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내 사랑스러운 동생 옆에.”
잠시지만 분위기가 훈훈해졌다.
“악!”
그걸 망친 건 말라붙은 핏자국을 손으로 벅벅 긁어 내던 티아매트였다.
“이런 분위기는 질색이야!”
“맞다. 할 일이 있었지?”
현우는 시선을 돌려 티아매트를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담긴 살의가 그녀를 따갑게 찔러 왔다. 몸이 오싹거리며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녀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드래곤 하트!’
그게 필요했으니까. 지금 놓치면 언제 다시 기회를 잡을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이곳으로 넘어온 알베르크가 깽판이라도 치면 모든 게 엉망이 된다. 그러니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지금은 덤비는 게 맞았다.
‘딱히 전력이 밀리는 건 아냐.’
현우를 뺀다면 말이다.
‘내가 얼마나 붙잡아 둘 수 있을까.’
살아오면서 이런 고민을 몇 번이나 해 봤던가. 기가 막혔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티아매트 님.”
티아매트는 가장 먼저 카이에게 명령했다.
“카이, 너의 의무를 다해.”
“힘을 많이 소진했습니다.”
“그래도 할 수 있잖아?”
“해야만 하는 일입니까?”
“그래.”
그 말에 카이는 한숨을 쉬며 다시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멀쩡한 머리로 아직 상처가 덜 회복된 머리를 물어뜯었다.
우적우적.
커다란 입이 물어뜯은 자신의 머리를 씹어 삼키기 시작했다.
“으엑!”
지쳐서 바닥에 퍼져 있던 존이 기괴한 소리를 냈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아는 건 단 하나, 어떻게든 저들을 막아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와오! 내가 이래서 몬스터들이 좋다니까. 화끈하잖아!”
애쉬가 킬킬거리며 근처에 흩어진 몬스터의 심장을 후벼 파내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아직도 녹색 피가 주르륵 떨어지는 심장을 입 안에 욱여넣었다.
“미, 미쳤습니까?”
“미치긴 진작 미쳤지.”
존의 말에 웃으며 대답한 애쉬가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2차전인가?”
가준이 질렸다는 표정으로 애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야말로 결판을 내 보자고?”
그런 상황에서 한편에 얌전히 서서 뚫어져라 현우만 바라보던 도진이 입을 열었다.
“이쪽은 한 명만 있는 게 낫겠습니다.”
“제가 형에게로 가죠.”
“보조는 제가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저도 보조는 잘합니다.”
선우도, 도진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둘은 누가 현우에게로 가느냐를 두고,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고 있던 현우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였다.
‘사실 아무도 안 와도 되는데.’
심지어 다른 몬스터들을 저쪽으로 붙여도 된다. 그러나 그 사실을 말하기엔 저쪽에 과하게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지금!’
티아매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순식간에 몸을 부풀린 그녀가 곧바로 숨을 들이켰다. 처음부터 브레스를 날려 약한 것들을 싹 치워 버릴 생각이었다.
“허튼짓!”
어느새 달려온 케로를 발판 삼아 뛰어오른 현우가 티아매트의 주둥이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가죽 주머니를 주먹으로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티아매트는 브레스를 도로 삼켰다.
“켁켁!”
독성이 담긴 브레스가 속을 뒤집어 놓았다. 본래 독에 강한 몸체라 그 이상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괴로웠다.
“죽어!”
티아매트의 눈에 독기가 올랐다. 다시 몸을 작게 만든 그녀는 손톱을 길게 세우고 현우에게 달려들었다.
원래부터 브레스를 뿜은 후에는 작은 몸으로 싸울 예정이었다. 드래곤의 몸은 튼튼하긴 했지만, 피격 면적이 넓다. 자신보다 빠르고 강한 존재와의 싸움에선 차라리 몸을 줄이는 게 낫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티아매트가 다리를 내려찍었다. 현우를 향한 공격이었으나, 그를 막은 이는 다른 사람이었다.
“형?”
현우의 앞을 가로막은 도진은 저릿하게 울려오는 팔을 털어 냈다. 쉽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보조할게.”
도진은 그리 말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괜찮겠어?”
“물론이지.”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곤 앞으로 나서며 티아매트에게 달려들었다. 도진이 그림자로 마법과 독을 막아 내며 그녀의 움직임을 방해하면, 현우가 주먹을 휘둘렀다.
‘몸이 흉기!’
막아 내도 아프고, 막아 내지 못하면 끝장이다. 티아매트는 이를 득득 갈며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다가올 결과는 뻔했다.
‘적어도 저 인간만이라도 치웠으면 좋겠는데.’
티아매트는 짜증 나는 표정으로 도진을 노려보았다. 처음에는 다소 힘들게 막아 내더니, 이제는 마법이 발동하기도 전에 방해를 하고 있다. 싸움 중에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래서 인간이 싫어!’
가진 것도 없이 태어난 미약한 존재 주제에 드래곤만큼 강해지기도 한다.
‘더 능숙해지기 전에 죽이자.’
티아매트는 공격의 주체를 현우가 아닌 도진으로 바꿨다. 현우가 형이라 부른 걸 보니 친밀한 관계 같은데, 죽이면 동요는 줄 수 있겠지. 현우의 공격을 몸으로 막아 낸 티아매트는 처음으로 도진에게 몸을 날렸다.
검처럼 날카롭게 솟아오른 손톱이 도진의 급소를 향해 돌진했다. 현우가 깜짝 놀라 대응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난 만만한가 보네.”
도진은 잽싸게 카라를 꺼내 티아매트의 공격을 막아 냈다. 무지막지한 힘에 몸이 뒤로 밀리긴 했지만, 공격은 어찌어찌 막아 냈다.
“쳇.”
공격이 막힌 걸 확인하자마자 티아매트는 몸을 뒤로 날렸다. 아니나 다를까. 피하자마자 그 자리에 현우의 다리가 떨어져 내렸다.
‘생각했던 건 이게 아닌데.’
상황이 꼬여 가고 있었다. 케로베로스와 블랙 드레이크가 제법 잘 싸우고 있었다. 그 때문에 카이는 움직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다른 쪽은 어떤가 싶어 봤는데, 그쪽도 막막하다.
도진에게 밀린 선우가 가준과 함께 애쉬를 압박하고 있었다. 화가 난 선우는 평소보다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애쉬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상처 입은 상태에서도 미친 듯이 날뛰고 있긴 했지만, 밀리고 있는 게 확연히 보였다. 게다가 상처 입은 하르모니아는 보이지도 않았다. 잠시 신경이 다른 데 쏠린 사이 숨어 버린 모양이었다. 덜떨어진 녀석이라도 마력을 감추는 방법은 익혔는지 위치를 찾을 수도 없었다.
‘쓸모 있는 녀석들이 없네!’
티아매트는 계획을 수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물러나자.】
카이에게는 그 의사를 전달했다.
‘다른 녀석은 뭐, 알아서 하겠지.’
마족이 아닌 녀석은 전부 소모품이다. 어찌 되건 알 게 뭔가. 사로잡힌다고 해도 그에 대한 장치는 해 뒀으니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금!”
티아매트는 시간을 끌며 모은 마력을 이용해 마법을 퍼붓고 뒤로 몸을 뺐다. 이제 여기서 현우가 자신을 따라오느냐, 아니면 남아서 마법을 막느냐에 따라 다음 대응이 결정된다.
다행히 현우는 마법을 막는 쪽을 택했다.
“다음에 또 봐~!”
티아매트는 손을 흔들며 작아진 카이의 목덜미를 잡고 냅다 뛰었다.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으나 깔끔하게 무시했다. 일단 살아 있어야 뭐라도 할 게 아닌가.
79.
냅다 튀어 버린 두 몬스터 때문에 졸지에 혼자 남아 버린 애쉬는 손쉽게 붙잡혔다. 이어 주변 몬스터들까지 죄다 정리하고 나니 좀 여유가 생겼다.
“하아, 다행입니다.”
가슴을 쓸어내린 존은 곧바로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갑자기 나타난 마족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피닉스 길드 소속인 애쉬가 그들의 편을 들었다는 것. 이게 그만의 일탈이라면 다행이지만, 아니라면 큰일이다.
무려 미국 내 2위 길드인 피닉스 길드가 인류를 배신했다는 소리였으니까. 최대한 빨리 그 소식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해야 했다. 그렇기에 빠르게 움직였지만, 아무리 불러도 상대 쪽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연락이 안 됩니까?”
선우가 존에게 물었다.
“네? 네. 안 됩니다. 아무래도 전파 방해인 것 같습니다.”
“다른 연락 수단은 없습니까?”
그 말에 존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있습니다. 저에게는 없지만 몇몇 중요 인물들에게는 전파 방해가 통하지 않는 무전기를 나눠 주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 중요 인물은 미국 전역에 흩어져 있고, 그 때문에 뉴욕에는 해당 무전기가 몇 개 없다는 것이다.
“그럼 본부 위치는 아십니까?”
“압니다.”
이런 일이 생길 걸 대비해서 가디언 길드는 미리 길드원들을 교육해 놓았다. 그 때문에 존도 뉴욕 지리는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혹시 하늘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까요?”
중간에 불쑥 끼어든 현우가 점박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굳이 걸어갈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요.”
점박이는 두눈박이에 비해서는 한참 작았지만, 성인 남성 여섯은 충분히 태울 수 있었다.
“왜 여섯이야? 저 녀석도 태우게?”
가준이 애쉬를 가리키자 현우는 방긋 웃으며 냉정하게 말했다.
“아니, 인질을 뭣 하러 곱게 대해 줘. 타는 건 두눈박이야. 상처 입었잖아. 회복까지 좀 걸릴걸.”
“그럼 쟤는?”
“점박이가 발로 잡으면 돼.”
대우가 너무하다. 하지만 애쉬가 저지른 죄가 있기에 모두 그 의견에 동의했다.
“그럼 가 볼까?”
현우가 점박이의 등에 올라타자마자 선우가 잽싸게 먼저 몸을 날렸다. 하지만 도진이 치사하게 그림자를 써서 선수를 쳐 버렸다. 평소 써먹던 대로 그림자를 통해 순간이동을 해 버린 것이다.
“한도진 씨.”
“왜 그러십니까? 지선우 씨.”
선우는 이를 갈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는 다투지 못하고 포기했다. 그렇게 6명이 다 타자마자 점박이는 곧바로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뀌이이익!”
현우가 떠난 자리, 거대한 레드 보어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늦었네.”
레드 보어를 최대한 재촉했지만, 결국 원하는 이를 따라잡지 못했다. 돌진할 때를 제외하고는 느릿한 레드 보어 탓이었다.
“갈아타야겠네.”
하지만 주변은 이미 정리된 터라 다른 몬스터가 보이지 않는다. 될 수 있으면 날아다닐 줄 아는 녀석이 좋겠는데. 알베르크는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얼마간은 더 레드 보어를 타고 다녀야 할 모양이었다.
“가자.”
알베르크는 다시 레드 보어를 출발시켰다.
“음?”
허공을 날던 현우는 이상한 느낌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엉망이 된 거리에서 몬스터를 상대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착각인가.’
현우는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몬스터가 몇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점박이를 보고 알아서 몸을 사렸기에 이동 속도는 빨랐다. 가끔 덤벼드는 몬스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정도는 위에 탄 사람들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정도였다.
“곧 본부입니다!”
존이 외쳤다.
본부는 도심 중앙에 있는 가디언 길드의 건물 중 하나였다. 보통은 정부 건물을 사용할 텐데, 여기서 가디언 길드의 힘을 엿볼 수 있었다.
“여기예요!”
점박이는 지정한 위치에 조심스럽게 착지했다. 주변이 엉망이긴 하지만 열린 포털도, 싸우는 사람과 몬스터도 없다. 이미 정리를 한 다음인 것 같았다.
“들어가지.”
점박이의 꼬리 쪽에 매달려 타고 있던 가준이 먼저 미끄러지듯 내려섰다. 이어 차례로 존, 선우가 내리자 도진 또한 현우를 끌어안고 내렸다.
“혼자 내릴 수 있는데.”
현우가 불만을 표시했지만, 도진은 웃음으로 때울 뿐이었다.
“그런데 분위기 이상하지 않아요?”
한창 바쁘게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어야 할 텐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안으로 들어서자 로비는 폭풍이 지나간 듯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사람은 전부 쓰러져 있었다.
“유리!”
경악한 표정으로 로비를 둘러보던 존이 갑자기 쓰러진 사람에게 달려갔다. 까만 머리를 가진 여성은 천천히 눈을 깜박이더니, 그를 바라보았다.
“존?”
당장이라도 꺼질 것 같은 희미하고 작은 목소리였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유리가 몸을 작게 들썩일 때마다 입에서 튀어나온 피가 옷을 적셨다.
“피닉스… 피닉스 길드가 배신했어.”
그런 상황에서도 유리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 상황을 전달했다.
“마, 말하지 마!”
존이 말렸지만, 말을 멈추지 않았다.
“바카디가, 그가 여길 습격, 쿨럭.”
또다시 붉은 피가 새어 나왔다. 상처 입은 사람을 응급조치하는 법은 기본적으로 길드에서 가르치는 것이었지만, 동료가 이런 모습이 되니 몸이 굳어 버렸다.
“휴우.”
그 모습을 보던 가준이 앞으로 나서 유리의 상태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리가 부러진 상태에서 배를 강하게 맞았다. 그 때문에 내장이 상한 모양이었다.
“병원이나 힐러가 필요해. 여기서는 해결 못 해.”
일단 가지고 있는 포션을 부어 보긴 했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유리, 그녀는 죽어 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끝끝내 상황을 전부 설명해 주었다.
“아직, 여기 있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야 해. 무전기는 상황실에 하나.”
“그만, 그만하라니까!”
내내 멍한 눈으로 상황을 말하던 유리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정의를 위하여.”
그 말을 들은 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가디언 길드는 정의를 지키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졌다. 그리고 유리 또한 그런 사람 중 하나가 되고 싶어 했다.
“유리, 넌 정의로워.”
약한 자를 보호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라면 강자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다.
“고마워.”
내내 끊어질 듯 이어지던 목소리가 처음으로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어 숨소리가 점점 작아지더니 눈이 스르르 감겼다. 그게 유리의 끝이었다.
“유리, 유리!”
이름을 불러도 유리는 더 이상 눈을 뜨지 않았다.
“죽었어.”
가준이 현실을 말해 주자, 존은 이를 악물었다.
“위로 갑시다. 그녀의 말이 맞다면 거기에 아직 범인이 있겠지요.”
“네.”
존은 유리를 똑바로 눕히고, 움직이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엘리베이터는 망가져 있었기에 직접 걸어 올라가야 했다. 바로 위층도 로비와 상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몇몇이 바카디를 막으려고 한 모양이었지만, 실패한 듯했다.
“7층. 거기에 상황실이 있을 겁니다.”
한 층씩 오를수록 분노만 더해졌다.
“대체 같은 인간이 왜!”
존은 울분을 토했다.
“기분이 나쁘네.”
가준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사람이 죽는 모습은 수없이 많이 봐 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동감.”
현우도 가준의 말에 동감했다. 바카디란 녀석은 그냥 사람을 죽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 사람들을 농락하듯 가지고 놀았다.
절로 쥐어진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현우야.”
도진은 그런 현우를 걱정했다. 마음 같아서는 현우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기 싫었다. 언제나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렇지만 이렇게 분노한 현우를 막을 수도 없었다. 도진은 그 사실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현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형, 괜찮아?”
“응.”
벌써 10번도 넘게 같은 것을 물었지만, 현우는 얌전히 대답해 주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동생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
바카디는 도심 여러 곳을 비추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비치는 모습은 하나같이 끔찍해서 마치 세상의 종말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흐흐흐.”
그게 좋았다. 이제 각성자들을 묶어 두고 싶어 하던 어리석은 사람들도 깨닫는 게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 그리고 강자의 힘을 말이다.
“이해가 안 된단 말이지. 왜 각성자가 아무런 힘도 없는 버러지 같은 인간들을 지켜야 하는 거지? 스스로 몸을 낮춰 가면서?”
바카디는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앰버. 상황실의 수장이었다. 각성을 하긴 했으나 관련 능력은 텔레파시. 다른 이에게 말을 전하는 데 특성화된 능력으로 그 외의 힘은 약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걸 모르는 한은 당신은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앰버는 싸늘한 목소리로 답했다.
“짐승. 짐승이라.”
킬킬대며 웃은 바카디는 앰버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그래, 짐승 한번 해 보지, 뭐.”
혐오스럽다는 듯 일그러진 얼굴이 보기 좋았다. 평소에는 단정하던 앰버였기에 더 그랬다.
“자, 앰버.”
“제 이름 부르지 마십시오.”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
“싫습니다.”
“그러면 네 소중한 부하들이 죽어 갈 텐데?”
바카디는 한구석에 모아 둔 다른 직원들을 가리켰다.
80.
앰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녀가 상황실을 맡게 되면서부터 함께한 이들이었다. 같이 하는 동안 쌓이고 쌓인 정은 가족이 없는 그녀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었다. 저들은 단순한 부하가 아니었다.
바카디가 원하는 걸 들어주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당분간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그러면 밖의 사람들은? 죄 없이 죽어갈 시민들은 어쩐단 말인가.
기로에 선 앰버가 괴로워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앰버! 저희는 괜찮습니다!”
“옳은 선택을 하세요!”
“앰버는 틀리지 않았어요!”
그 목소리가, 앰버의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아 주었다.
“바카디. 저는 당신의 말을 듣지 않겠습니다.”
앰버의 말에 바카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하하, 다들 목숨이 여러 개라도 되나 봐?”
“아니요. 목숨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하나지요.”
“그런데 왜 이래? 죽인다니까?”
바카디가 제일 어려 보이는 여성 하나를 끌어내 목을 잡아 들어 올렸다.
“끄윽!”
여성은 바카디의 손을 긁으며 괴로움에 버둥거렸다.
“리사!”
“당장 그만둬!”
다른 사람들이 바카디에게 덤벼들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다른 손을 휘두른 것만으로도 밀려나 도로 구석에 처박혔다.
그를 바라보던 리사는 버둥거림을 멈추고 앰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눈을 보는 순간, 앰버는 깨달았다. 리사는 지금 자신의 목숨을 포기했다. 앰버를 위해서, 얼굴도 모르는 다른 시민들을 위해서. 가만히 죽음을 맞이하려는 것이다.
앰버는 심장이 찢기는 것 같은 괴로움에 헐떡였다.
‘다 내가 부족해서.’
조금만 더 강했더라면. 적어도 다른 직원들이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만큼만 강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리사의 숨소리가 잦아들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약함이 원망스러웠다.
“미안해.”
할 수 있는 것은 사과뿐이었다.
【괜찮아요.】
머릿속에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또한 각성자. 그중에서도 앰버와 같은 계열로 텔레파시를 사용할 수 있었다.
【앰버는 최선을 다했어요.】
최선. 그 말을 듣자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자신은 정말 최선을 다했는가? 아니, 아니다. 시민들을 위한다는 핑계로 바카디와 싸워 보지도 않고 굴복했다. 여기 프로그램을 누구보다 잘 다루는 건 자신뿐이었으니까.
합리적인 선택이나 최선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고 싶어졌다. 앰버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정신계 능력으로 남을 공격했다. 그 대상은 바카디였다.
“하하하, 이게 뭐야. 간지럽지도 않다고!”
리사를 내팽개친 바카디가 시선을 앰버에게로 돌렸다. 그러나 엠버는 눈에 핏줄이 서고 코피가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공격하는 걸 멈추지 않았다.
“현명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멍청하네.”
공격에도 불구하고 바카디는 태연하게 앰버에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에게로 향하는 순간, 열렸던 문 사이로 무언가가 뛰쳐 들어왔고 바카디는 바닥에 처박혔다.
쿠궁.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앰버는 흘러내리는 피를 훔치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괜찮아요?”
무언가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예쁘장하게 생긴 어려보이는 동양계 청년. 그 청년은 엎어진 바카디를 두고 앰버에게 괜찮느냐고 물었다.
“괜찮아요. 그보다 당신은 누구.”
앰버의 질문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바카디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리 없이 청년의 뒤에 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뒤!”
놀라 소리치자 청년이 웃으며 돌아섰다. 그리고는 빠른 속도로 공격하는 바카디의 주먹을 맞받아쳤다.
‘소용없어!’
바카디는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정면으로 상대하다니. 이후 일어날 일은 뻔했다. 청년은 바카디에게 쓰러지겠지. 도와주러 온 사람인데 그렇게 놔둘 수는 없었다.
앰버가 어떻게든 돕기 위해 다시 정신을 집중하려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 어?”
바카디의 주먹이 청년의 손바닥에 가로막혀 있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어떻게든 주먹을 내지르려는 모양이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밀리고 있었다.
이어 청년이 여유로운 다른 손을 들어 바카디를 후려쳤다. 가벼워 보이는 공격인데도 어마무시한 소리가 났다.
퍽!
물이 가득 찬 가죽 주머니를 몽둥이로 후려치는 듯한 묵직한 소리였다.
“씨발.”
바카디가 갑자기 주먹을 떼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하지만 청년은 그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그대로 그를 따라잡아서는 다리를 휘둘렀고, 그에 맞은 바카디는 처음처럼 바닥을 굴렀다.
“지현우!”
분노에 찬 바카디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청년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이번에 한국에서 온 테이머 지현우. 그가 청년의 정체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럼 이야기가 이상한데?’
지선우의 강함은 널리 알려져 있었지만, 형인 지현우는 그렇지 않았다. 몬스터를 다룰 줄만 알지 본신은 약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왜 불러, 미친 새끼야.”
예쁘장한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바닥에 쓰려진 바카디를 향해 인정사정없이 다리를 내리찍었다. 굴러서 피한 바카디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때마다 방해받았다.
“이리 오십시오.”
구석에서 눈치를 살피던 직원들은 어느새 나타난 다른 사람들에 의해 방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건 바카디와 지현우, 앰버뿐이었다.
“그쪽도 이리 오십시오.”
밖에서 지현우와 마찬가지로 동양계로 보이는 남자가 손짓했다. 하지만 앰버는 쉽사리 물러날 수 없었다.
“밖에서.”
아직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싸워야 해요! 여기는 전자 기기가 많아요!”
앰버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지현우는 바카디의 머리채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벽을 부수고 사라졌다. 이어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따라가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창밖으로 바카디를 끌고 뛰어내린 모양이었다. 이어 훤칠해 보이는 남자 둘이 나타나 태연하게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지현우를 뒤따라가는 모양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멍하니 뚫린 창문을 바라보고 있자니, 처음 앰버에게 손짓한 남자가 다가왔다.
“그런데 저거 죽여야 해요? 아니면 살리는 게 낫나?”
“네?”
상대는 무려 그 바카디인데. 생사여부를 결정하라는 소리를 너무나도 쉽게 한다.
“빨리빨리. 그 전에 패 죽이겠네.”
그 말에 슬쩍 벽을 잡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카디가 신나게 처맞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찌나 터프하게 두들겨 패는지 보기만 해도 속이 시원했다. 바카디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씨이바아아알!”
바카디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살리는 게 낫겠네요. 알아야 할 정보가 많아요.”
“오케이. 현우야! 살리란다!”
옆에 있던 남자는 크게 소리를 지르고 뒤로 물러났다.
“이젠 죽이지 않을 겁니다.”
“네.”
머리가 멍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앰버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몸을 물렸다. 그리고 또다른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미국뉴스에서도 가끔 나오던 인물, 지선우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앰버는 먼저 몸을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남자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겉보기에는 안 그래 보였는데, 정의로운 사람인 모양이었다.
“앰버님!”
이어 존도 만났다. 존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앰버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모든 걸 듣고 나니 머리가 아찔해졌다. 바카디를 봐서 짐작하긴 했지만, 피닉스 길드가 인류에게서 등을 돌렸다니.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정보 전달 감사합니다.”
앰버는 황급히 상황실로 돌아와 기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얼른 다른 이들에게도 알려야 했다.
“여기는 상황 본부. 경보 발령. 갱신된 정보를 전달합니다. 피닉스 길드가 배신했습니다.”
이로써 지금 뉴욕에 없는 자들도 피닉스 길드의 배신을 알게 되었다. 가장 급한 일을 마치고 나자, 저절로 몸에 힘이 빠졌다.
그렇지만 아직 쓰러져서는 안 된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시작이었으니까.
현우는 묵묵히 바카디를 뭉개 나갔다. 손가락을 부러트리고, 팔을 부러트렸다. 혹시나 도망갈까 봐 나뒹구는 무기를 집어 들어 다리를 땅에 박아 넣었다. 그냥 깔끔하게 자를까도 생각했지만, 포기했다.
남들 보기에 좋지 않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여기는 마계가 아니었으니까.
“흐익. 차라리 죽이지 그래?”
몸이 차근차근 망가져 가는 와중에도 바카디는 입 놀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건 안 되지. 넌 살아서 더 고통받아야 해.”
“고통을 줄 수는 있고?”
바카디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저러는 걸 보니 자진할 가능성은 없을 듯했다. 현우는 손바닥을 쫙 펴서 그의 뺨을 후려쳤다.
한 대, 두 대, 세 대. 횟수가 수십 번을 넘어가니 그제야 좀 조용해진다. 원래 몸이 튼튼한데다가 재생력이 대단하니 때리는 맛이 제법 괜찮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바카디는 답 없이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아직도 눈에 시퍼런 불꽃이 타오르는 게 의지는 꺾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도 시간 문제였다.
“현재 여기 와 있는 마족은 누구누구지?”
“몰라.”
아직 덜 맞았네.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바카디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본인도 그런 자신을 깨달은 듯 버릇처럼 또다시 욕설을 내뱉었다.
역시 말 안 듣는 미친놈에게는 폭력이 효과적이다. 현우가 뒤로 물러서 손의 피를 털어 내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도진이 달려와 물었다.
“힘들지 않아? 힘들면 교대해 줄까?”
“아니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현우가 대답하자 선우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형, 나도 잘 때리는데.”
“괜찮아. 나도 여기까지만 할 거야.”
이미 바카디는 곤죽이 된 상태였다. 재생력이 발휘되고는 있었지만, 한계를 넘어선 모양인지 속도가 느려졌다.
81.
바카디를 제압하긴 했지만, 이후도 문제였다.
“가둬 둘 장소요?”
앰버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하층에 관련 장소가 있긴 하지만, 힘들지 않을까요.”
상대는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강자였다. 임시로 만들어 둔 감옥 따위 소용없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지키는 사람이 필요한데, 여기서 그럴 수 있으신 분은 몇 없으니까요.”
여차했을 때 바카디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셋뿐이었다. 게다가 셋 다 미국 시민이 아니다. 차후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 팔다리를 뜯어 버릴까요? 그러면 회복 시간이 좀 늦어지겠지요.”
먼저 현우가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잘못하다가 쇼크사 할 수 있다하여 그 의견은 기각되었다.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데, 위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적의는 없는 것 같은데.”
“그러게.”
이윽고 인기척은 문 앞까지 당도했다. 혹시 모르니 다들 싸울 준비를 하는 순간,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레온 님!”
앰버가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앰버.”
안을 둘러보던 레온의 시선이 바닥에 널브러진 바카디에게로 향했다. 일순 표정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인류를 배신한 건가.”
“배신했다니. 애초에 왜 인류를 편들어야 하는 거지?”
레온의 질문에 바카디는 되레 반문했다.
“우리의 뿌리가 그곳에 있으니까.”
“개소리!”
바카디가 몸을 뒤틀며 웃었다.
“나약하고 시끄럽고 주제도 모르는 버러지랑 내가 동급이라고? 아니지, 아니야.”
“자네 정말 미쳤나?”
“미쳤다면 미친 거겠지.”
그걸 끝으로 바카디는 입을 다물었다. 레온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현우에게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반드시 기억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지만, 레온은 꿋꿋하게 모인 인원 전부에게 허리를 굽혀 가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정의를 추구하는 가디언 길드의 수장다운 행동이었다.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조금 더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레온의 말에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가 그러니 선우는 당연히 찬성이었고,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빚을 지워 두는 것도 나쁘진 않지.”
거기에 가준까지 합류했다.
“앰버, 계속할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거기에 앰버와 직원들도 분주하게 움직여 자리를 잡았다.
“바카디는 제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사태가 가라앉는 대로 그는 빌런들을 수감하는 감옥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레온은 단호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이후는 앰버가 통신방해를 해결하고 나자, 예전 한국에서와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앰버가 위급한 장소를 알려주면 현우의 일행들이 쪼개져서 그쪽으로 달려가 도움을 주었다. 듣기로는 일본과 러시아, 영국 등등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도 발 빠르게 움직이며 손을 보탰다고 한다.
빌런이 되어 버린 피닉스 길드의 길드원들은 대부분 사로잡혔다. 그들도 죽음은 두려운 모양인지 조금만 불리하다 싶으면 항복을 외쳐 댔다. 그런 이를 죽이는 건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물론 현우는 항복을 외쳐도 죽어라 패 주긴 했다.
“항복했잖아!”
“그래서 죽이진 않잖아?”
현우는 항의하는 빌런들에게 콧방귀를 뀌었다. 그리고 그쯤 바쁘게 뛰어다니는 각성자들 사이로 소문 하나가 돌기 시작했다.
레드 보어를 타고 다니는 까만 머리의 소년.
빌런인 것 같지는 않지만, 아군인 것 같지도 않다. 어느 쪽도 돕지 않고, 그냥 질문만 던진 후 이동한다. 그리고 그 질문 때문에 그 소식은 현우에게 전달되었다.
‘지현우라는 사람을 아나?’
그게 소년이 한 질문이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안내를 위해 다시 이쪽에 붙은 존이 물어 왔다.
“아니, 모르는데.”
현우는 손가락으로 볼을 긁적이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이가 하나 있긴 했지만, 그는 마계 서열 1위의 마족이다.
예전에 호기심에 물어봤을 때, 요정이 그랬다. 그는 다른 세계로 쉽게 넘어갈 수 없다고 말이다.
‘너무 강하니까요. 세계의 균형을 위해 강자들은 다른 영역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현우 님은 원래 지구 태생이라 상관없지만, 알베르크 님은 온전한 마족이시니까요. 넘어가면 큰일납니다.’
그랬으니 알베르크는 아니지 않을까?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또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중간계의 시간으로 10년을 마계에서 보냈다. 상대가 소년이라는 건 과거에는 어린애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아는 어린애는 없었는데.’
중학생 때는 학교와 알바, 집만 오갔다. 아는 어린아이가 있을 턱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은 만나보는 게 좋겠군요.”
“그럼 또 만나면 붙들어 두라고 할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만나 보면 누군지 알 수 있을 터였다.
*
“우유라도 마실래요?”
미사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소년을 보고 상냥하게 물었다.
“아니면 주스도 있어요.”
“주스 쪽이 낫겠군.”
소년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보통은 기분이 나빠야 정상이나, 압도적인 미모가 그런 생각을 싹 지워 주었다.
“네, 곧 가져다 드릴게요.”
미사는 날 듯한 발걸음으로 문밖을 나섰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고 있던 소년, 알베르크는 작게 하품을 했다.
현우를 만나게 해 준다, 하여 얌전히 따라오긴 했지만, 수틀리면 전부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헤실거리는 걸 보고 있자니, 기분이 이상했다.
“인간은 다 저런가?”
하나같이 헤벌죽 웃으며 어떻게든 잘해 주려고 애를 쓴다.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약하면 약한 만큼 몸을 사려야 하는 것 아닌가?
아름다울수록, 상냥할수록 독을 품고 있는 마계에서는 그게 당연한 법칙이었다.
“사과 주스예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알베르크의 앞에는 사과 주스가 놓였다.
“마시면서 들어 주세요.”
“그러지.”
“혹시 현우 님과는 무슨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관계?”
현우와 자신의 관계라. 깊이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곧 반려가 될 사이지.”
내내 웃고 있던 미사의 얼굴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반려요?”
“그래.”
“어, 그러니까.”
미사가 말을 더듬었다.
“반려가 제가 알고 있는 그 뜻은 아니겠지요?”
알베르크가 더 말해 보라는 듯 쳐다보자 망설이며 입을 연다.
“제가 아는 반려는 평생을 같이 할 배우자를 말하는 거라서요. 아무래도 단어의 뜻을 착각한 모양이에요.”
“맞는데?”
“네?”
“맞다고.”
이어지는 답에 미사는 저도 모르게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다시 소년을 힐끔 바라보았다.
겉보기에는 10대 중후반으로 보였는데 사실 나이가 더 많았던 걸까? 하지만 그렇다 쳐도 20대 초반이다.
그리고 문제는 하나 더 있었는데.
“남자 아닌가요?”
“성별이 중요한가?”
중요하다. 물론 소년의 나이에 비하면 덜 중요하긴 하다.
“혹시 나이 물어봐도 되나요?”
“음, 1000살을 넘어가면서부턴 세지 않았다.”
“네에.”
아무래도 소년은 정신에 조금 문제가 있는 모양이었다.
‘사람은 1000살이나 못 살아!’
미사는 그렇게 외치고 싶은걸 꾹 눌러 참았다. 괜히 잘못해서 소년이 충격받을까, 싶어서였다.
“그럼 이름은요?”
“알베르크.”
이번에는 정상적인 대답이 나왔다. 미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름을 칭찬했다.
“멋진 이름이네요.”
“그래, 내가 지었지. 원래 내 아버지는 내 이름을 알로하로 지으려고 했다는군.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를 죽이고 내가 새로 지었다.”
틀렸다. 미사는 다시 터져 나오려는 한숨을 삼키며 애써 미소 지었다.
알베르크가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으나, 미사에겐 황당한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이제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현우 님, 오셨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미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냥 들어오게 하는 것보단 미리 소년의 상태를 알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현우 님을 모시고 올게요!”
그러고 방 밖으로 뛰쳐나오자마자 현우와 그의 일행이 보였다.
“오셨어요?”
“네, 그런데 그 소년은요?”
“안에서 기다려요. 그런데 말이죠.”
미사는 목소리를 낮췄다.
“아무래도 조금 정신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에요. 이상한 소리를 늘어놓거든요. 혹시 모르니 조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어떤 소리요?”
“나이가 1000살이 넘었다거나, 아버지를 죽이고 이름을 자신이 새로 지었다거나 하는 이야기요.”
그 말을 듣고 있던 현우의 표정이 굳었다.
‘요정 새끼, 알베르크는 이 세계로 못 넘어올 거라더니.’
순 거짓말이었던 모양이다. 이제 어찌해야 하나, 생각하는데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는 기다란 까만 머리의 미소년 하나가 뛰쳐나와 현우에게 안겼다.
“현우!”
영롱한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아니었으면 했는데, 진짜 알베르크였다.
82.
“현우, 현우!”
황홀한 외모의 미소년, 알베르크가 현우를 꼭 끌어안고 가슴팍에 얼굴을 비볐다. 그 모습이 무척 사랑스러웠으나, 상대의 실체를 알고 있기에 슬며시 밀어 냈다.
“일단 좀 떨어지지?”
“싫다!”
알베르크가 현우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떨어질 기색이 아니었다.
“와우, 미인인걸. 자라면 더 예뻐지겠는데.”
옆에서는 가준이 남의 속도 모르고 휘파람을 분다.
‘낯설다.’
유독 자신을 쫓아다니긴 했지만, 이런 식의 스킨십을 하려 든 적은 거의 없었는데. 만나지 못한 시간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걸까? 현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떨어져, 떨어져서 말하자.”
“나는 이대로도 말할 수 있는데?”
“내가 불편해.”
“그래? 그러면 자세를 바꿔 볼까?”
알베르크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에서 현우를 끌어안았다. 지금은 키가 그보다 작은 탓에 자세가 미묘하다.
‘앞이나 뒤나 불편해!’
마족이란 존재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에 도발하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지만, 점점 본래 성격이 비집고 나오려 한다.
현우는 길게 흘러내린 알베르크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지?”
“못 들었다.”
못 듣긴 뭘 못 들어. 멀리서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도 들을 놈이.
현우는 자신의 배 앞에서 깍지 낀 가늘고 하얀 손가락을 하나씩 힘주어 떼어 냈다. 알베르크는 그것이 장난같이 느껴지는지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그게 내내 지켜보고 있던 다른 이들의 질투심을 폭발시켰다.
“꼬마 도련님.”
먼저 나선 이는 선우였다. 호칭에서부터 상대의 속을 긁으려는 의지가 느껴졌다. 원래 10대 소년들은 어리게 보이는 걸 싫어하는 법이었으니까.
“상대가 싫어하는 행동은 하면 안 된다고 배우지 않았습니까?”
“배우지 못했는데.”
알베르크는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다시 현우와 손가락 놀이를 하는 데 집중했다.
“그럼 지금 배우십시오.”
선우가 알베르크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겉보기에는 호리호리해 보였는데, 실제로 만지니 몸이 묵직하다.
게다가 목덜미를 잡는 순간 느껴진 살기는, 오랜 시간 몬스터를 상대로 싸워 온 선우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퍽!
순간 현우가 몸을 돌리며 알베르크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왜, 왜 때리나!”
“몰라서 물어? 내 동생 건드리지 마. 건드리면 죽여 버릴 거야.”
현우가 으르렁거리며 알베르크에게 경고했다.
“먼저 건드린 건 저쪽이다!”
“알 게 뭐야. 내 동생 건드리는 순간,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허어.”
알베르크도 현우에게 동생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족과 달리 인간에게 핏줄은 애틋한 존재라는 것도 알았다.
그렇기에 현우의 동생이라는 걸 아는 순간, 선우를 해칠 마음은 접었지만 억울함은 별개였다. 절로 시무룩해질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그렇게 소중해?”
“당연하지.”
“나보다 더?”
“당연한 소리를.”
알베르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서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강한 마족의 자식으로 태어나 부모를 삼키고, 강한 힘을 손에 넣었다. 그렇기에 그를 무시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는데, 현우는 달랐다.
“알았어. 동생은 건드리지 않도록 하지.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그러면서 슬쩍 손을 잡으니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가만히 있는다. 동생을 해치지 않는 대가로 이 정도는 허용해 주겠단 소리였다.
혹시나 싶어 아까처럼 다시 안기려 했지만, 그건 몸을 움직여서 피한다.
무려 이름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허용된 건 손 하나다. 알베르크는 고개를 숙인 채 현우의 손을 조물조물 만졌다.
“또!”
이번에도 선우가 끼어들려고 했지만, 현우가 말렸다.
“그냥 둬.”
“하지만 형.”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베르크를 노려보았다.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현우야.”
그런 상황에서 도진의 침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는 사이야?”
“네.”
“여기? 아니면 다른 곳?”
이번 질문은 목소리가 작아 현우만 알아들었다. 아무래도 도진은 알베르크가 인간이 아니란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는 행동도 이상하고, 10대 소년치고는 힘이 너무 강하니 의심할 만도 하다. 게다가 이번 일로 마족이 이세계로 넘어올 수 있음을 알게 되었으니까.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그 행동만으로도 도진은 모든 걸 이해했다.
“둘이 아는 사이가 맞나보네요.”
둘의 조우를 바라보고 있던 미사가 손뼉을 치며 끼어들었다.
“네, 아는 사이입니다.”
“그럼.”
미사가 슬쩍 알베르크의 눈치를 보며 현우에게 물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아무래도 정상이 아닌 것 같으니까.
현우의 일행은 타국의 각성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렇기에 이쪽에서도 할 수 있는 한 보답을 해 주고 싶었다. 지금 상황에서 정신과 의사를 데려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필요하다면야.
“아니요. 괜찮습니다. 조금 공상이 많은 아이라 그래요.”
조금이 아닌데요. 미사는 목구멍까지 치솟아 오른 말을 도로 삼켰다.
“나중에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꼭 알려 주세요.”
“물론입니다. 배려 감사합니다.”
“아니요. 저희 쪽이 더 감사하죠. 제가 너무 붙잡아 두었네요. 그럼 쉬세요.”
미사는 웃으며 물러났다.
“일단 장소를 옮기죠.”
멀어지는 미사를 확인하자마자 현우가 말을 꺼냈다.
“어디로?”
“외곽, 될 수 있으면 사람이 없는 곳이 좋겠네요.”
“얼마 전에 그런 곳을 보긴 했어. 위치는 내가 기억하니까 가자. 이동은 뭘로 할 거야?”
“점박이요.”
도진과 현우 사이에 빠르게 대화가 오갔다. 그쯤 되니 선우와 가준도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가준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하여간 하루라도 평온하게 넘어가질 않지.”
“형, 나도 갈 거야.”
“그래. 너도 같이 가자.”
“나는?”
이어 가준이 물었다.
“따라오려면 오던가요.”
“가야지.”
이리저리 돌아다닌 몸은 휴식을 요구했지만,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넷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점박이가 그들을 발견하고 몸을 일으켰다.
“키르르륵.”
“반갑네. 블랙 드레이크. 네가 데리고 다니던 애지?”
“그래.”
현우는 짧게 대답하고 알베르크를 드레이크의 등에 태웠다. 그러자 그의 정체를 눈치챈 점박이가 짧게 몸을 떨었다.
“괜찮아. 해치지 않는다.”
“키륵.”
이어 현우가 그의 뒤에 올라탔다. 선우나 도진이 못마땅하게 바라보긴 했지만, 이게 제일 안전했다.
그렇게 알베르크 포함 다섯을 태운 점박이는 도심 외곽의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날아갔다.
“이쯤이 좋겠네.”
점박이를 착지시킨 현우가 아래로 뛰어내렸다.
“너도 내려와, 알베르크.”
“알베르크? 이름이 알베르크야? 특이하네.”
가준이 말하자 알베르크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본명은 더 길다.”
“뭔데?”
“아무에게나 알려 줄 수 없는 이름이다.”
알베르크는 오만한 표정으로 가준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현우, 그립고 그리웠다. 너는 그립지 않았는가?”
“아니, 나는 그립지 않았어.”
마계의 생활을 생각하면 이곳은 천국이다. 끔찍한 기억만 남아 있는 곳이 그리워질 리가 없었다.
“그런가. 아쉽군.”
알베르크는 현우와 함께한 나날이 즐거웠기에, 지나간 나날이 그리웠다.
“그보다 알베르크.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지?”
현우가 물었다.
“흠. 궁금한가?”
“궁금해. 요정은 네가 이쪽 세계로 오지 못할 거라고 했거든.”
“요정이 그랬나.”
“그래.”
알베르크는 눈을 접으며 웃었다.
“솔직하군. 나는 그래서 네가 좋아.”
숨 쉬듯이 플러팅을 하고 있다. 그를 모르는 건 이 자리에선 현우뿐이었다.
“맘에 들지 않아.”
“동감입니다.”
간만에 선우와 도진의 마음이 맞았다.
“그럼 일단 날 모르는 이도 있을 테니, 내 소개부터 다시 하지. 내 이름은 알베르크. 마계의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마족이로다.”
“마족이 넘어온 거였다고?”
가준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찼다.
“그렇다. 나는 마족. 원래라면 너희 같은 것들은 감히 말을 놓을 수도 없는 존재지만, 기뻐하라. 너는 특별히 허용해 주마.”
그러면서 가리키는 사람은 선우였다.
“특별한 존재가 되었네?”
가준이 놀리듯 말하니 선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나도 기쁘지 않습니다.”
마족이 저렇게 나오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었다.
“형과는 무슨 사이지?”
선우의 물음에 도진이 귀를 기울였다.
“미래에 반려가 될 사이지.”
알베르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냐!”
현우가 다급히 끼어들며 알베르크의 답을 부정했다.
“우리가 언제 그런 사이였어!”
그냥 마주치면 치고 박고 가끔 소식이나 주고받는 사이가 아니었던가. 왜 반려라는 단어가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제부터 그런 사이가 될 거다. 네가 없는 동안, 나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렇다. 나는 널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착각이야!”
“아니다. 착각 일수가 없다. 왜냐하면 너를 만난 지금, 내내 죽어 있던 심장이 격렬하게 뛰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알베르크는 현우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격렬한 심장의 두근거림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놀라 손을 떼어 냈다.
“원래 이렇게 뛰는 건 아니고?”
마족은 인간과 다를지도 모르니까.
“아니다.”
돌아 버리겠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니, 머리가 아파왔다.
“누가 반려입니까!”
참고 참던 선우가 다시 폭발했다.
“현우, 네 동생은 성격이 이상한 것 같구나.”
“이상한 건 그쪽입니다. 제 형은 그 누구의 반려도 아닙니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마계에서의 형은 모르지 않는가.”
알베르크는 약 올리듯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83.
“아니면 들은 이야기라도 있던가?”
들은 이야기는 없다. 마계에서 돌아온 형은 선우에게 아무것도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선우 또한 형에게 묻지 않았다.
자신도 마계의 혹독함을 겪어 보았기에 형의 지나간 고통을 되살리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고 귀를 막았다. 그리고 형에게 있어 괴로웠던 나날을 있게 해 주기 위해 애썼다.
당연히 했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후회가 되기도 했다. 사실은 캐내서라도 더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했던 것 아닐까.
그렇기에 알베르크의 말은 선우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선우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그만해.”
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앞으로 나섰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알베르크가 그리 말했지만,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내 동생을 도발했잖아.”
“조금 심술이 나서. 고작 한 핏줄이라는 이유로 뭐라도 된 것처럼 굴지 않나.”
“고작이 아니야. 내 소중한 동생이야.”
“알아. 그러니까 심술 정도로 그치는 거잖나”
정말이지 마족은 심보가 고약하다. 그는 알베르크도 다르지 않았다.
“심술도 안 돼.”
“좋아. 참아 보지.”
현우의 단호한 말에 알베르크는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모처럼 그를 만나러 다른 세계까지 왔건만, 거슬리는 게 옆에 붙어 있으니 기분이 나쁘다. 인간 사이에서는 한 핏줄끼리 반려가 되는게 불가능하니, 동생이야 그렇다 치지만.
어느새 현우의 옆에 붙어서 경계하듯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는 또 뭐란 말인가.
“저쪽도 네 핏줄인가?”
“누구? 도진 형? 아니, 이쪽은 아니야.”
“그러면.”
“안 돼. 도진 형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이야.”
현우의 말에 알베르크가 투덜거렸다.
“넌 소중한 사람이 너무 많다.”
“몇 안 되는 데.”
“둘이나 되지 않는가.”
“그건 보통 적다고 하는 거야.”
둘이 그렇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니 가준이 슬쩍 끼어들었다.
“소중한 사람에 나는 미포함인거냐?”
“포함되길 바라는 겁니까?”
현우가 혐오를 담은 눈으로 가준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처맞고도 이러는 걸 보면 그도 보통은 아니다.
“포함되면 좋긴 하지.”
“꿈 깨십시오.”
“아하, 그럼 이쪽은 아무것도 아니란 소리군.”
알베르크가 가늘게 눈을 뜨고 가준을 바라보았다.
“화풀이는 안 돼. 내가 아는 사람은 죽이지 마. 아니, 그냥 사람은 전부 건드리지 마.”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은데.”
“싫으면 말든가.”
대신 자신도 더는 알베르크를 상대하지 않겠다. 현우는 팔짱을 낀 채 그를 바라보았다.
“알았다. 결국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거로군.”
“아니, 그거 말인데.”
현우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네가 날 좋아했다고?”
“그래. 그러니 그렇게 자주 찾아갔지.”
“올 때마다 싸웠잖아.”
“가벼운 인사였다.”
“그게?”
기가 차지만 알베르크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약 본격적으로 싸우려고 들었으면 현우도 매번 멀쩡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어느 정도 힘을 조절했기에 멀쩡할 수 있었다.
“알았어.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고 치자니. 중요한 이야기인데.”
“난 반려가 될 생각이 조금도 없으니까 중요하지 않아.”
“왜!”
알베르크가 실망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반대로 왜 반려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데?”
“맞습니다. 상대의 동의를 구하지 않는 구애는 폭력일 뿐입니다.”
도진이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우린 잘 맞았잖아.”
“아니거든? 난 싸우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그럼 뭐가 좋은데?”
“평화롭게 낮잠 자는 거.”
“그건 나도 좋아한다.”
알베르크의 말에 도진 또한 입을 열었다.
“나도 좋아해.”
“형, 나도 낮잠은 좋아.”
“낮잠? 그거 좋지.”
거기에 선우와 가준까지 말을 보탠다. 선우야 그렇다치지만 가준은 또 왜 끼어든단 말인가. 현우는 그에게 손을 휙휙 휘저어 보였다.
“그쪽은 좀 조용히 하고.”
“나만 구박하는 거야?”
가준이 시답잖은 소리를 내뱉었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반려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어떻게 이쪽으로 오게 되었는지나 털어 놔 봐.”
“네가 원한다면야.”
알베르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아까 하던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현우가 사라진 마계. 그리움에 미친 알베르크는 미친 마족처럼 날뛰었다. 마족의 특성상 미친놈이 한둘이겠냐마는 날뛰는 이가 마계 서열 1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상황이 그러하니 요정도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다. 마지막 남은 사람인 현우도 원래 세계로 돌려보냈고, 마계와의 계약도 마무리 지었으니 환상계로 돌아간 것이다.
“하아.”
그렇게 세계와 세계를 잇는 재능을 지닌 요정마저 사라졌으니, 남은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제물과 마력을 이용해서 포털을 여는 것.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알베르크는 현우가 있는 세계의 좌표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알베르크는 시름에 찬 매일을 보냈다.
“거기까진 쓸데없는 이야기 같은데.”
이야기를 듣던 현우가 혀를 찼다.
“더 들어봐라.”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날뛰던 알베르크는 어둠의 숲 깊숙한 곳에 위치한 고목 아래 열린 포털을 발견했다.
“알베르크 님?”
그 앞에는 서열 8위의 마족, 카니아가 서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포털 앞을 막은 카니아는 어떻게든 알베르크의 접근을 막아보려고 몸부림쳤지만, 가능할 리 없었다. 결국 그녀는 다리가 부러진 채 내팽개쳐졌고, 알베르크는 포털 앞에 섰다.
“이건 어디와 통하는 포털이지?”
카니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좋다. 어차피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까.”
알베르크는 그 자리에서 카니아를 고문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고위 마족이기에 어려서부터 강했던 그녀는 고통에 내성이 없었다. 그 덕분에 얼마 지나지 않아 포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지구, 지구와 통하는 포털입니다!”
“지구.”
현우가 살던 세계. 그는 종종 지구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다.
곧바로 그는 포털로 몸을 밀어 넣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포털이 허용하는 힘이 너무 작았던 것이다. 카니아라면 아슬아슬하게 통과할 수 있겠지만, 알베르크는 불가능했다.
강하기에 원하는 이를 만나러 갈 수 없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도 알베르크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뒤늦은 깨달음을 얻었다.
‘힘이 넘치면 줄이면 되잖아?’
지금이야 다른 세계와의 통로가 막혔지만, 예전에는 출입이 자유로웠던 시기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 마족들은 다른 세계로 가기 위해 자신의 힘을 나눠서 마계에 두고 떠났다.
일종의 분신인 것이다.
“그래도 되나?”
기이한 이야기였다.
“보통은 나눈 힘을 숨겨 두고 이동하지. 하지만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눠도 어지간해서는 다른 마족에게 지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이렇게 힘을 나누면 중간계 외의 세계 주민에게 존재를 들키지 않을 수 있다.”
요정이나 천족이 이 사실을 알고 따지면 골치 아플 테니까. 알베르크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일단은.”
현우의 말을 도진이 이었다.
“누군가 지구에서 포털을 열었단 소리네.”
그 말을 다시 현우가 받았다.
“원래 넘어오려던 마족 대신 알베르크가 넘어왔고.”
“어쩐지 기분이 나쁘다.”
알베르크가 그 모습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포털을 여는 게 쉽나?”
“넘어갈 존재에 따라 다르지. 내가 본체 그대로 넘어갈 포털을 만드는 건 어렵다.”
“아니, 지구에서.”
“인간 좀 죽이면 될걸?”
“몇 명 정도?”
손가락을 든 알베르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최소 만 단위.”
“포털 여는 자의 마력이 강하다면? 그러니까 드래곤 정도?”
“그럼 천까지 떨어지지.”
골치가 아프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티아매트가 또 언제 마족을 불러내려 들지 몰랐다. 물론 도심에서 사람을 천 단위 죽이는 게 쉽지 않음을 안다. 마력 또한 무한정으로 끌어다 쓸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렇지만 만약 도심이 아닌 전쟁 중인 다른 나라에서 학살을 시작한다면? 그걸로 새로운 포털을 만든다면. 그걸 막을 수 있는가?
“네가 막을 순 없어?”
“포털을 여는 자를 죽여서?”
“아니. 일단 마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잖아.”
“말하면 좀 듣기야 하겠지만, 글쎄. 신념이 다르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게다가 카니아가 주동자는 아닌 것 같거든. 그럼 더 높은 마족이라는 건데. 마계에는 능력이 있음에도 나서지 않고 사는 마족들도 있어.”
예전엔 마계에는 마신이 지정한 마왕이 있었다. 마족들은 신의 뜻을 받들어 그를 모시고 따랐다. 하지만 천계와의 전쟁 중에 마왕과 천왕이 둘 다 죽게 되었고, 그에 따라 신들도 잠들면서 더 이상 왕이 탄생하지 않았다.
새로운 질서가 생긴 것이다.
“맞아. 요정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었었지.”
다급해지니 금방 생각나지도 않았다.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야, 나는 뭐든 할 수 있다.”
알베르크가 현우에게 다가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가 방심한 사이 그 위에 입술을 댔다. 도진이 기겁하며 현우의 손을 잡아 뺐지만, 이미 늦었다.
알베르크는 그런 도진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하지만 곱게 접힌 보라색 눈에 담긴 것은 명백한 살의였다.
‘거슬리는데 죽일 수가 없네.’
현우가 안 된다고 했으니까. 그게 불만이었지만, 당장은 그의 말을 어길 생각이 없었다.
‘일단 반려가 되는 것이 우선이니까.’
그렇기에 그저 웃었다.
84.
알베르크의 무해함을 확인한 그들은 다시 본부로 돌아왔다. 레온이 그들을 호출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가 직접 찾아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요.”
“그래도 은혜를 입은 분들을 왔다 갔다 하게 하는 건 아니지요.”
레온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바카디가 빠져 나간 자리를 메우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노력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그가 세운 길드에서 내세우는 정의, 그를 지키고자 하는 모습이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괜찮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입니까?”
선우의 물음에 레온이 태블릿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영상입니다.”
시작은 부서진 건물 사이에서 시작된다. 기기를 들고 있는 주인이 겁에 질렸는지 화면도 흔들렸다. 이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착했어. 이 근처는 가디언 길드의 빌딩이 있으니까 안전할 거야.』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들리며 화면이 휙 돌아간다.
『봤어?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렸어! 맙소사!』
이후 화면은 고정된 채 빌딩에서 뛰어내린 남자 둘을 담기 시작했다.
한 명은 확실히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피닉스 길드의 바카디잖아.』
또다시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런데 상대는 누구지?』
얼굴이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는 바카디보다 강하다. 왜냐하면 시종일관 바카디가 두들겨 맞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상은 거기서 끊어졌다.
선우는 영상을 보는 내내 굳게 다물고 있던 입술을 벌렸다.
“바카디와 형이군요.”
“네, 아직 피닉스 길드의 배신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더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영상이 풀리면서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레온의 입가에 씁쓸함이 감돌았다.
“피닉스 길드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게다가 지현우 씨의 얼굴은 흐릿하긴 하지만, 일부 알아보는 사람이 나오고 있습니다.”
현우에게는 여러모로 곤란한 이야기였다.
“지선우 씨. 저는 지현우 씨가 왜 힘을 감추려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힘에 대한 것이 알려지면 그가 곤란해질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도 미국도 힘든 일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은 강한 힘을 지닌 각성자였으니. 현우의 힘에 대해 밝혀지면 어째서 그동안은 전력을 다해 나서지 않았는지에 대해 비난이 나올 수도 있었다.
“형은 언제나 최선을 다해 몬스터를 사냥했습니다.”
선우가 말리는데도, 떨어져 쉬지 않고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런데 힘을 감췄다는 이유로 비난받을지도 모른다니.
“저희도 최선을 다해 영상을 회수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회수에 성공했습니다만, 이미 너무 퍼졌더군요.”
아무리 미국 최고인 가디언 길드라고 해도 이미 퍼진 영상을 전부 막아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일단은 바카디에 대한 건 며칠 뒤에 정식으로 발표할 예정입니다.”
“그렇습니까.”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적극적으로 나서겠습니다. 지현우 씨는 우리 나라의 영웅이니까요.”
“감사합니다.”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
“인간이란 참으로 알 수 없구나.”
선우의 말을 모두 들은 알베르크가 말했다.
“힘을 숨기고 있었다. 그게 뭐가 문제란 말이지? 그렇다고 해서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한 것도 아니지 않은가. 이 세계는 숨어 지내는 실력자가 없는가?”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그들은 외부의 관심이 싫어서 숨어든 만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현우랑은 상황이 다른 거지.”
가준이 알베르크의 말에 답을 해주었다.
“복잡하군.”
“아무래도. 그래서 이제 어쩔 거야?”
“방법은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지요.”
선우와 도진, 현우는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딱히 괜찮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시간만 흐를 뿐이었다.
“이런 건 어떠냐?”
그런 그들 사이로 과자를 다 먹어치운 알베르크가 쑥 끼어들었다.
“무엇 말입니까?”
선우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진도 다르지 않았다.
“마계에서는 가끔 있는 일인데. 원래 힘이 없던 이나, 또는 봉인되어 있던 이가 각성하여 힘을 발휘하는 일이 있다.”
“아하! 알 것 같은데.”
“현우 또한 그런 상황이라고 말하면 되지 않는가.”
“그건 그럴듯한 이야기군요.”
그동안 선우는 밖에서도 알 수 있게 현우를 감싸고 돌았다. 나갈 때마다 호위 인력을 붙이는 건 이미 국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이야기였다.
“미국에 와서 본격적으로 힘을 각성한 걸로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머리가 모여 이야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멋진데? 영웅 기믹 같아.”
가준까지 거기 끼어들어 신나게 이야기의 비어 있는 부분을 채워 나갔다.
문제가 해결되고 있는 건 참으로 기쁜 일이었으나, 갑작스런 힘의 각성이라니. 현우는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하였다.
“위기의 순간, 마계에서 얻은 힘이 다시 튀어 나온 거지!”
“좋습니다. 나쁘지 않은 의견입니다.”
“확실히 현우에게도 어울립니다.”
부끄럽다. 부끄러워 미치겠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몸을 뒤틀고 있자니, 소파 맞은편에 앉아있던 알베르크가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현우의 옆에 자리 잡았다.
“현우, 이 모든 건 내가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러면서 반짝이는 눈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뭔가를 원하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뭘 원하는 건데?”
“입맞춤은 어떤가?”
워낙 미형의 얼굴인지라 입 맞추는데 거부감은 생기지 않을 것 같았지만, 싫었다.
“싫거든?”
“왜?”
“왜냐니.”
“나는 제법 아름답게 생기지 않았나?”
마계에서는 알베르크를 보고 상사병을 앓다 죽는 마족도 있었다.
“그걸 보통 자기 입으로 말하나.”
“자신의 장점인데. 말하지 못할 건 뭐지?”
알베르크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모습이 어려지니 행동마저 따라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선우와 도진이 발견했다.
“무슨 짓입니까?”
“현우야, 이리 와.”
도진은 현우에게 다가와 그를 들어다가 다른데 앉혔다. 그러자 알베르크도 일어나서 현우를 따라 이동했다.
“현우가 싫다하지 않았습니까?”
“현우가 싫다고 한 건 입맞춤이다. 다른 건 싫다고 한 적이 없어.”
날 선 말에도 알베르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얄미운 말을 하면서 참으로 당당하다.
“그리고 그대야말로 선을 넘는 건 아닌가? 현우의 반려도 아니지 않은가. 참견이 지나쳐.”
“참견이라니요. 현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둘은 잠시 싸늘한 시선을 나누었다. 당장이라도 칼부림을 할 듯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나는 처음 볼 때부터 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생각이시군요.”
“마음 같아서는 죽이고 싶다만.”
“죽일 수는 있습니까?”
“있다마다. 하지만 현우가 싫어하니까 참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선우는 도진을 응원했다. 도진도 딱히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아예 통제가 되지 않는 알베르크보단 나았다.
‘싸우다가 둘 다 죽어 버리면 좋을 텐데.’
험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현우가 끼어들어 둘을 말렸다.
“그만해!”
말리는 얼굴이 빨갛다.
“어, 그러고 보니.”
가준이 손바닥을 주먹으로 탁 내려쳤다. 지금 도진은 대놓고 현우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 때문에 현우도 저러는 것이었고.
‘어쩐지 현우에게 많이 집착하더라.’
대충 짐작을 했지만, 직접 들으니 또 색달랐다. 그리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들 어디에 그렇게 끌려서 부족한 것 없는 놈들이 목을 매는 걸까.
생각해 보면 가준도 처음부터 그에게 눈이 갔다. 같이 있으면 재미있었고, 안 보이면 몸이 근질근질해서 과보호를 뚫고 쫓아오곤 했다. 이 정도로 수고를 들여 본 상대가 없었다.
‘내 취향은 부드럽고 풍만한 여성인데.’
가준은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작은 키에 몸도 말랐다. 얼굴은 제법 예쁘장하게 생겼지만, 저 정도 예쁜 여성은 생각보다 많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말은 결국…….
‘취향을 따질 정도는 이미 지나쳤다는 거 아닌가?’
애초에 현우에게 붙어 있고자 도진과 싸울 때부터 이런 마음이었던 거다.
가준은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내뱉었다.
“나도 현우, 너를 좋아한다.”
나름 결심하고 내뱉은 말이었으나, 돌아오는 건 살벌한 시선 여럿이었다.
“하하, 도가준 씨, 미쳤습니까?”
존대를 쓰는데 말투가 살벌하다. 그리고 실내의 기온이 점점 내려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시 정신이 이상해진 모양입니다.”
발밑의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아니, 고백은 다 똑같이 했는데 왜 자신한테만 이러는지 모르겠다.
“난 멀쩡한데!”
“아니요. 과로로 미친 것 같습니다.”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현우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싶어 바라보았지만, 그 기대는 곧 깨졌다.
“장난은 그만해.”
그러면서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가준을 바라보고 있는데, 방금 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기색이 아니다.
“왜, 왜 안 믿는데!”
“본인의 신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도진이 단정한 말투로 가슴을 찔렀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제법 알아주는 백호 길드의 길드장인데 대우가 너무하다.
가준은 구석에 틀어박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
그 시각, 바카디는 엄중한 감시 아래 육지를 떠나고 있었다. 바다 저편에 존재하는 작은 섬, 각성자들의 전용 감옥에 갇히기 위해서 말이다.
“날씨가 심상치 않은데?”
“일기 예보는 좋았는데 말이지.”
배에 올라탄 선원 몇이 대화를 나누다가 힐끔 간판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그 바카디가 감옥이라니.”
“그러게 말이지. 그 많은 권력과 재산을 마다하고 뭘 원했기에 미국을 배신했던 걸까?”
의아함이 담긴 말에 금방 답이 돌아왔다.
“힘 아닐까?”
“이미 충분히 세잖아?”
“욕망은 원래 커지기만 할 뿐이지, 줄어들진 않아.”
“철학적인 말이군.”
그사이에도 배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한 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