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76화 (9/16)

68.

복면을 벗고 다시 본래 차림을 한 가준은 현우에게 말했다.

야, 타!

날렵한 표범처럼 잘 빠진 까만 바이크가 제법 멋지다.

바이크도 몰 줄 알아?

가끔 하는 취미지.”

가준은 히죽 웃으며 현우의 머리에 헬멧을 씌웠다. 하지만 자신은 쓰지 않는다.

너는 왜 안 써?

S급 각성자가 헬멧이 무슨 필요야. 차랑 부딪쳐도 나보단 바이크가 망가질걸.”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치면 현우도 S급 각성자 수준을 넘어서니 헬멧이 필요 없다. 도로 벗으려는 걸 가준이 말렸다.

넌 써.”

?

빤히 바라보니 가준이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게 안전하니까?

뭐라는지 모르겠다. 예전에 맞아 봤으니 자신의 실력도 알 텐데. 현우가 기가 막혀 그를 바라보았지만, 가준은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렇게 바이크를 타고 다시 선현 길드로 돌아왔다.

갑자기 나타난 빌런 때문에 중간중간 경찰차가 서 있었지만, 아무도 가준을 잡지 않았다. 그가 얼굴이 알려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의심을 안 하네?

그 말에 가준이 악동같이 킬킬 웃으며 대답했다.

어느 미친 길드장이 정부 인사를 공격해.”

여기, 여기 이 미친놈이요.

그래도 덕분에 편하게 돌아왔다. 선현 길드 빌딩 뒤쪽, 잘 안 보이는 곳에 바이크를 댄 가준이 현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나온 거야?

평소 지선우가 하는 꼴을 보면 정상적인 방법으로 나오긴 힘들었을 것 같은데. 가준의 말에 현우가 픽 웃더니 벽에 한쪽 다리를 올렸다. 그러고는 조금씩 돌출되어 있는 벽을 타고 순식간에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가준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그도 하자고 마음먹으면 할 수 있는 재주였으니 현우도 할 수 있는 게 당연하다. 그걸 알고 있음에도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에 가슴이 콩닥거렸다. 그리고 그때, 선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긴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아무래도 근처를 순찰하던 경비원이 가준을 발견하고 알려 준 모양이었다. 평소라면 굳이 나와 보지 않았을 텐데. 왜 하필 이럴 때 나오는지 모르겠다.

현우는 아직 벽을 타고 있었고, 바로 앞에는 그런 형을 아끼는 동생인 선우가 서 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가준은 자꾸 위로 올라가려는 시선을 내리며 답했다.

그냥 산책 겸 돌아다닌 거지.”

그게 왜 저희 길드 빌딩인 겁니까?

근처를 지날 수도 있지.”

다 올라갔나아니면 시간을 더 끌어야 하나자신은 남이니 현우가 들키건 말건 상관도 없을 텐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그렇습니까?

선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가 돌아서자마자 잽싸게 위를 확인해 본 가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벽에 붙어선 현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사히 안으로 들어간 듯했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가준은 다시 바이크를 출발시켰다.

왔어?

침대에 누워 속 편히 자고 있던 두눈이 물어왔다.

응.”

현우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간만에 주먹을 휘두르니 속이 시원했다.

재밌었어?

여기 살면서 두눈도 빠르게 말이 늘고 있었다.

나름?

옷을 갈아입은 현우는 작게 하품을 하고는 두눈을 밀치고 침대에 누웠다. 슬쩍 TV를 틀어 보니 곧 미국에서 열릴 협회장 선거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었다. 과연 어떤 각성자가 남고, 어떤 각성자가 갈 것인가. 누가 뽑힐 것인가. 우리나라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몇몇 전문가들이 격렬하게 토론했다.

혹시나 싶어 다른 채널도 돌려 보았지만, 어디에도 긴급 뉴스는 없었다. 빌런이 나타나 정부 쪽 인사를 두들겼다는 소식을 전하는 방송은 존재하지 않았다.

굳이 알릴 생각이 없나?

그럼 몇 번 더 패 줄 수 있는 걸까. 현우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후로도 가준은 몇 번인가 더 현우를 호출했다. 호출 방법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두 번째는 외부에서 힘을 조금씩 방출하여 현우를 불러냈고, 그다음부터는 건네준 호출기로 불러냈다.

매번 야근을 하는 동생이 애처로웠던 현우는 얌전히 불러내는 대로 나가 빌런 역할을 했다. 그 와중에 다른 각성자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이쪽이 누구던가.

하나는 S급 각성자요, 다른 하나는 그 S급 각성자를 쥐어 팬 사람이었다. 회피를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문제는 다섯 번째쯤에서 일어났다.

이만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들을 막을 사람으로 도진이 나타났다!

형이 여기서 왜 나와?

현우는 처음으로 당황하며 멱살을 잡고 있던 정부 인사를 떨어트렸다.

괜찮아.”

옆에서 지켜보던 가준이 말했다. 복면은 완벽했다. 이걸 뒤집어쓰고 있는 한 얼굴을 들킬 일은 없었다.

[대도의 복면(엘리트)]

과거 대도가 썼다던 복면. 어떤 수단을 써도 얼굴을 인식할 수 없다.

도진이 손을 뻗자 그림자들이 넘실거리며 정부 사람들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일단 인질부터 치우고 싸울 셈인 듯했다. 그걸 막고자 현우가 가장 가까운 정부 사람을 덥석 잡았다.

그림자가 몇 번 용을 쓰긴 했지만, 더 잡아당겼다가는 사람의 몸이 분리될 것 같았던 모양이다. 포기는 제법 빨랐다.

인질을 잡는 겁니까?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의 얼굴 위에는 귀찮음이 떠올라 있었다. 그도 내켜서 나온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정부가 달달 볶는 게 어디 선현 길드뿐일까. 그러고 보면 도진도 최근에는 얼굴을 거의 보지 못했다.

도진은 내내 미적지근하게 대처했고, 덕분에 눈치를 보던 현우와 가준은 무사히 몸을 빼낼 수 있었다.

잡아, 저놈들을 잡으라고!

아직 정신을 차리고 있던 정부 쪽 사람이 도망가는 두 사람을 보고 악을 썼으나, 도진은 여전히 느릿하게 움직였다.

왜 빨리 쫓아가지 않는 건가!

도진을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현우가 외려 더 욱했다. 하지만 도진은 시선을 돌려 천연덕스럽게 대답할 뿐이었다.

정말 가도 됩니까그러면 당신들을 지켜 줄 사람이 없는데요?

그 말에 사람들이 얌전해졌다. 그런 그들을 뒤로하고, 가준은 현우를 집어 들고 날았다.

들키지 않은 건가.

현우는 뒤늦게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하지만 무심결에 돌아봤다가 본 도진의 눈빛이 묘하다.

설마.

눈치챈 건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와, 이거도 슬슬 그만둬야겠는데이제 S급 각성자를 동원하네?

안전한 곳까지 와서 투덜거리던 가준이 여전히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 현우를 툭 쳤다.

왜 그래?

아니, 아니야.”

들킨 것 같다는 소리는 할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갔다. 가준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리고 빌런 짓을 그만두기로 한 지 며칠 뒤, 정부와 헌터관리국이 반응을 보였다.

*

정부는 끈질기게 선현 길드를 압박했지만,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다.

결국 지선우도 같이 보내야 하는 건가.”

국장은 골치 아프다는 듯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의 충실한 손발이 되었던 류영진은 입원한 상태였고, 다른 이들도 정상은 아니었다. 빌런의 습격이 몇 차례 더 이루어졌던 탓이다.

빌런은 무슨!

세간에서는 우로보로스 탓이라고들 했다. 그들이 새로운 이들을 받아들이겠다면서, 또다시 신문 광고를 실었기 때문이었다. 신문사를 추궁해 보았지만, 자기네들은 모르는 이야기라고 했다. 뒤늦게 신문을 회수해 보았지만, 이미 늦었다.

신문에 실린 내용은 이러했다. 자기네와 이상이 맞는 이들을 가벼운 테스트 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빌런이 날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니 이번 일도 그들 때문이 아니냐는 것이었는데, 국장은 그렇게 믿지 않고 있었다.

제길.”

보나 마나 길드에서 벌인 일이 틀림없을 텐데 증거가 없다. 증거 없이 몰아가면 외려 역풍을 맞을 수 있기에 선뜻 나설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망설이는 사이, 다른 이들도 당했고 남은 이는 최무혁이 속한 관리부뿐이었다.

그쪽 부서는 전원 각성자잖아. 그러니 빌런도 손을 못 대는 거 아닐까?

누군가는 그렇게 말했지만, 국장은 달리 생각했다. 최무혁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행동할 리 없다. 편협한 마음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떠올리게 했다.

나를 몰아내려는 거지.”

절로 이가 갈렸다. 국장은 절대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다.

이번만 넘어가는 것이다.

다음에는 절대 이리 쉽게 넘어가지 않으리라. 국장은 그렇게 생각하며 선현 길드에 답을 했다.

지현우의 미국행에 지선우가 동행해도 상관없다고 말이다.

생각보다 오래 못 버텼네?

가준은 피식 웃었다. 선현 길드에 시비를 걸던 깡이라면 더 버틸 줄 알았는데, 빌런에게 습격 몇 번 당했다고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이번 미국행은 지선우, 지현우, 그리고 한도진, 도가준이 가게 되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한도진이라도 붙잡아 두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그쪽도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원하는 건 하나도 못 해내고, 각성자들의 미움만 산 셈이었다.

얘네는 머리가 없나?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치 다툼하느라 바빠서 정상적으로 사고할 뇌가 없나, 하는 생각 말이다.

뭐, 그래도 즐거웠지.”

자신을 죽어라 팼던 사람과 함께 하는 일이었는데도 제법 즐거웠다. 정부 인사를 골탕 먹인 것 때문인지, 아니면 의외로 마음이 맞아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69.

처음 만났을 때 두들겨 맞은 일을 잊은 건 아니다. 내내 앙심으로 품고 있었고, 기회만 된다면 갚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하고 살기 싫다. 당하느니 먼저 치겠다. 그것이 도가준, 그란 사람을 이루는 원동력이었다.

그랬는데 말이지.

슬슬 마음이 바뀌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시하다가 나중에는 슬며시 올라와 하이파이브 하던 손을 기억한다. 정부 인사들을 패며 열심히 들썩이던 작은 머리통도 제법 귀여웠다. 실상은 흉악한 존재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인간은 보이는 걸 무시하지 못하니까.

같은 핏줄인 지선우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가까워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강한 위인이었으니까.

좋아.”

어느 정도 결론을 내린 가준은 다가올 여행을 위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

좋은 아침!

선글라스를 쓴 가준은 느긋하게 걸어오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를 본 선우는 딱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내뱉었다.

저 사람도 같이 가는 겁니까?

저 사람도 같이 가냐니. 내가 가는 건 이미 알지 않았어아니면 선현 길드의 소식이 느린 건가?

가준이 대놓고 긁어내리자 점점 주변 온도가 내려갔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듯 분위기가 경직되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까맣고 작은 강아지가 우렁차게 짖으며 나타났다.

왕왕!

케로였다. 케로가 짖으면서 끼어들자 이어 점박이가 날개를 파닥이며 둘 사이를 가로질렀고, 마지막으로 두눈이 떡하니 사이에 자리 잡았다.

아침 무엇?

두눈이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아, 이게 그거?

처음 인간의 형태가 되었을 때와는 달리 많이 세련되어졌다. 깔끔한 니트와 바지를 걸쳤으며, 머리도 다듬은 상태라 그냥 보기엔 잘생긴 남자 같았다. 실상은 어마어마한 덩치를 가진 드래곤인데도 말이다.

두눈입니다.”

어느새 나타난 현우가 이름을 말해 주고는 선우에게로 걸어갔다. 기막힐 정도로 얌전한 얼굴이다. 실제로는 좀 더 얼굴을 구기고, 욕설도 내뱉을 수 있으면서. 존대보다는 반말이 훨씬 잘 어울린다.

어쩐지 아쉽네.

가준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마지막 탑승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도진이었다. 그 또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구부정하게 몸을 구부리고 낡은 옷만 걸치고 다니더니, 지금은 완전 다른 모습이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냐. 늦지 않았어요, 형.”

그사이 호칭도 변화한 모양이었다. 자신도 나이로 치면 형인데누구는 형이고, 누구는 호칭도 안 부르나. 괜히 심술이 돋아났다.

그렇게 넷은 정부 관계자와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가는 도중에는 딱히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 두눈이 기내식을 혼자 거덜 내려 해서 현우가 혼낸 일 외에는 말이다.

도착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어서 오십시오. 제시카라고 합니다.”

미국 측에서 붙여 준 안내인은 한국말에 무척 능숙했다.

지나치게 친절한데?

중요한 손님이라고 하셨으니까요.”

가준의 도발에도 제시카는 시종일관 웃었다.

관광을 하고 싶으시면, 따로 안내인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물론 안내인이 필요 없으시다면 일행끼리 편히 다니셔도 됩니다.”

제시카는 딱히 뭔가를 하려는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여느 여행의 길잡이가 그렇듯이 그들의 편의만을 위해 움직일 뿐이었다.

이상한데.”

가준이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뭐가요?

너무 친절하잖아.”

친절할 수도 있지요.”

그렇지. 그건 그런데 예감이 안 좋아.”

선우는 자연스럽게 둘 사이에 다가와 붙어 선 가준을 밀어 냈다. 그러자 가준은 히죽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국에서 싸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 가준을 도진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한때 현우를 납치하려고 했던 가준이기에 경계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기묘한 점이 하나 있었다.

지나치게 친근하게 군다.

현우를 몇 번이나 봤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가준이 현우에게 다가갈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르니까.

도진은 현우에게 가까이 붙었다.

숙소에 도착하고 현우가 짐을 풀고 뒹굴려던 순간, 누군가 방문을 쿵쿵 두드렸다.

관광지에 왔으면 둘러봐야지!

방문자는 가준이었다. 현우가 어처구니없단 표정으로 거절하려 했지만, 가준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어 찾아온 것이었다. 현재 현우의 비밀을 알고 있는 이는 그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을 텐데?

능글맞게 웃으며 해 오는 말에 현우는 더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휘둘리는 것 또한 적성은 아니다.

이번 한 번만. 다음에도 이러면 알죠?

까맣게 반들거리는 눈동자에 가준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을 뿐이다. 그는 곧 평소대로 돌아왔다.

참, 당연히 너도 갈 거지?

도발로 선우를 끌어내고, 이어 방에서 나온 도진도 합류했다. 이렇게 넷이 모이니 분위기가 좋아지려야 좋아질 수가 없다. 신나는 건 가준뿐인 듯했다.

심심한 사람들 같으니. 모처럼 외국에 왔는데 즐겨야지!

난 침대 위가 제일 좋은데요.”

나도 침대 위는 좋아해.”

그러면서 가준이 윙크를 하자, 선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붙어 보시겠습니까?

내가 뭘 했다고?

저질스러운 말을 내뱉지 않았습니까?

그냥 침대가 좋다는 말이었는데.”

가준은 능구렁이처럼 슥 피해 갔지만 선우는 참을 생각이 없었다. 곧바로 손을 들어 올리려던 순간, 현우가 선우를 말렸다.

여기서는 말고.”

다른 데서는 괜찮단 소리였다.

와, 너무하다.”

그 말을 엿들은 가준이 투덜거렸지만, 현우는 그보다 선우가 훨씬 더 소중했다. 그랬기에 가준의 말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디 나중에 좀 맞아 보라지.

물론 그게 가준의 기를 꺾지는 못했다.

어디부터 가 볼까식사아니면 쇼핑?

어디든.”

현우가 발을 질질 끌면서 걸어가는데, 반대편에서 키가 큰 여성 한 명이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두눈이 걷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는데, 딱히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쿵.

그러니 둘이 부딪히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뭐야, 왜 안 비켜!

고혹적으로 생긴 여성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뜻밖에도 어설픈 한국어였다.

나, 피했다. 너도 피했어야지.”

만만치 않게 서투른 한국어로 두눈이 화를 냈다.

뭐야지금 화내는 거야?

독특한 색의 눈동자가 사나워졌다. 두눈과 여성은 본격적으로 서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만해.”

뒤늦게야 그를 눈치챈 현우가 두눈을 말리기 시작했고, 여성 쪽에서도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그녀를 말렸다. 장신인데다 힐까지 신고 있는 여성에 못지않은 키를 가진 남자였는데, 묘하게 인상이 뱀 같다.

아가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너도 봤지, 카이!

도심에서 소란은 피우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알 게 뭐야!

아가씨라 불리는 여성은 참으로 천방지축인 모양이었다. 카이란 청년이 달래는데도 화를 가라앉힐 생각을 하지 않는다. 반면 두눈은 현우가 건네주는 과자에 이미 차분해져 있었다.

똥 밟았네.”

가준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자.”

도진 또한 의견을 내었다. 그렇게 넷은 슬며시 아가씨를 피해 자리를 옮겼다.

그래서 말야!

한창 폭주하던 아가씨는 이제 카이의 머리털을 쥐어뜯고 있었다. 그러다 뒤늦게야 시비가 걸렸던 이가 사라진 걸 깨닫고 발을 쾅쾅 굴렀다.

뭐야, 얘네들 어디 갔어!

진작에 사라졌습니다.”

그걸 왜 말하지 않았어!

그야 상대 쪽이 하나같이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으니까. 아니, 정확히는 그 안에 괴물도 하나 끼어 있었다. 지현우.

과거 카이도 현우에게 당해서, 끌려다니던 적이 있었다. 작고 야들야들해 보이는 몸이 먹음직스러워 덤벼들었다가 실컷 두들겨 맞고 바이크 2호가 되었다. 이후 무슨 일만 있으면 끌려가서 그를 태우고 다녀야 했다.

그러던 현우가 어느 날인가부터 자취를 감췄다. 처음에는 좋아했으나, 그도 얼마 가지 못했다. 언제 그가 다시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두려움을 극복해야 해.

그때쯤 만난 드래곤이 티아매트였다. 과거 함께했던 드래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던 티아매트. 그런 그녀와 함께라면 모든 걸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언젠가 마계의 1위, 알베르크도 뛰어넘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때까지 곁에서 모시게 해 주십시오.”

다른 강한 존재의 비호 아래 있으면 현우가 나타나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다. 그랬는데 아니었다.

카이는 벌벌 떨리는 손을 꾹 쥐었다 폈다.

무서워.

여전히 무섭고 가슴이 뛴다. 티아매트가 과연 지현우를 이길 수 있을까티아매트의 무섭도록 빠른 성장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좀 더 강한 상대에게 붙었어야 했나. 하지만 당시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알베르크는 만나기도 힘든 자였고, 다른 마족들은 몬스터를 우습게 여긴다. 그나마 나은 건 같은 몬스터 계열인 티아매트뿐이었다.

뭐야, 왜 그래?

카이의 이상한 상태를 눈치챘는지 티아매트가 물어왔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닌 것 같은데?

둔한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눈치가 빠르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지금 쇼핑을 서두르지 않으면, 저녁 약속에 맞추기 어려울 겁니다.”

맞다.”

티아매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당당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두눈 같은 특이 케이스가 아닌 한 그 위엄 있고 당당한 걸음에 알아서 전부 길을 비켜 주었다.

카이도 그런 티아매트의 뒤를 따랐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그를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이겨 낸다.

그리고 그를 넘어선다. 그게 카이의 목표였다.

70.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인상은 여자 쪽이 더 강했으나, 현우의 시선은 그녀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로 향했다. 그런 얼굴을 본 적이 없는데 어쩐지 낯설지 않다. 그 생각은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핫도그 트럭 앞에 설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뭐 먹을래?

여전히 가준은 친근한 척 붙어 다니고 있었다. 현우는 메뉴판을 가리키며 말을 잇는 그를 바라보다가 발을 콱 밟았다.

!

여기서 뼈를 부러트리면 곤란하니 세게는 밟지 않았다.

시끄럽습니다.”

가준의 비명에 도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타박을 했다. 원래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제법 심각해 보인다.

내 입으로 내가 비명도 못 지르나?

쓸데없이 지르니 문제인 겁니다.”

쓸데없는지 아닌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보다 몇 번이나 봤다고 반말입니까?

내가 연장자잖아. 억울하면 너도 말 놔!

그러지.”

대체 왜 저리 사이가 나쁜 걸까. 이유를 생각해 보고 있자니, 어느새 옆에 선우가 섰다. 현우를 빼면 유일하게 둘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이나,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선우도 피곤할 테니까.

형은 뭐 먹을래?

난 기본으로 먹을래.”

나는 이거.”

그 사이로 두눈이 끼어들어 가장 두툼해 보이는 핫도그 사진을 가리킨다.

그럼 주문할게.”

선우가 핫도그를 주문하는 사이에도 가준과 도진은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과열되기 직전, 현우가 그들을 불렀다.

안 먹어요?

먹어!

갈게.”

먼저 이쪽으로 걸어오던 가준이 갑자기 비틀거렸다. 그 틈을 치고 나선 도진이 빠르게 걸어와 현우의 옆에 자리 잡았다.

치사하게!

나름 몰래 한다고 한 모양이긴 했지만, 현우는 전부 봤다. 도진이 그림자로 가준의 발을 건 걸 말이다. 그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양념이 묻은 현우의 뺨을 닦아 주며 말했다.

저런 위험한 사람과는 어울리지 마.”

누가 위험해!

당신.”

너도 처음엔 나랑 같이 손잡았었잖아!

억울한 가준이 그리 외쳤지만, 도진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가는 끝도 없이 싸울 것 같았다.

싸우려면 나 없는 데서 해요.”

싸우는 거 아냐.”

싸우는 거 아니다.”

둘은 금방 부정하고는 뒤늦게 핫도그를 주문해서 먹기 시작했다. 며칠간은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도진과 가준이 수시로 싸우고, 가끔 선우도 참전한다. 그걸 현우가 말리면 다시 얌전해지는가 싶었지만, 틈만 생기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차라리 한국에 있을 때가 더 편했던 것 같았다.

*

현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무렵, 미국 내에 들어온 각성자들도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멀리서 눈치만 보던 이들이 슬슬 그에게 접근해 왔다.

안녕하십니까현우 씨.”

제일 먼저 접근한 이는 러시아 사람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멍하니 차를 마시고 있던 현우에게 다가온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했다.

러시아 각성자 관리국의 미샤라고 합니다.”

각성자치고는 작은 체구에 여린 인상을 지닌 여자는 제법 미인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무슨 일이냐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미샤가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뉴욕은 전부 즐기셨나요?

네.”

가준은 작정하고 여행을 온 사람같이 굴었다. 덕분에 현우는 끌려다니고 있었고, 본의 아니게 대부분 유명한 곳은 전부 돌아보았다.

미국도 볼 곳이 많지만, 러시아도 그래요. 모두들 러시아를 추운 나라로만 생각하지만, 실상 볼만한 게 얼마나 많은데요.”

미샤는 자연스럽게 말하며 현우의 곁에 앉았다.

그리고 능력자에 대한 대우도 대단하답니다.”

?

현우 씨, 지금의 대한민국에 만족하시나요?

그럴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스카우트였다.

딱히 다른 나라에 갈 생각은 없는데요.”

조건이 월등히 좋아도요?

네.”

지금 나라에는 동생인 선우가 있다. 현우는 선우를 버리고 다른 나라로 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미샤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럼 동생분과 같이 오시는 건 어떠세요지금의 선현 길드, 이 이상으로 키울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사실상 더 자랄 수 있는 한국의 길드들이 이 정도에서 멈춰 선 건 한국의 정부 때문이에요. 그들은 각성자들을 자신 멋대로 휘두르기를 원하죠. 하지만 러시아를 보세요. 저희는 그러지 않습니다. ”

미샤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떠한 정치적 압박도, 불리함도 없을 거예요.”

그런 후, 자신들이 줄 수 있는 걸 제시했다.

던전 클리어 시 내야 하는 세금을 10%까지 줄여 드리겠습니다. 몬스터 부산물은 정부가 우선 구입하며 반드시 정가 이상으로 구매하겠습니다. 그 외 따로 한국 돈 수백억에 달하는 영토와 건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현우가 아니라면 제법 끌릴 만한 조건이었다. 그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다른 일행들이 돌아왔다. 가준은 투덜거리며 옷깃을 털고 있었고, 도진은 태연한 표정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온다. 그 뒤에서 선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만 싸우라고 했더니 어디서 서열 정리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뭐야?

미샤를 발견한 가준이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러시아 각성자 관리국의 미샤라고 합니다.”

그에 비해 미샤는 여전히 느긋하다. 하지만 이어지는 행동에는 표정이 미묘해질 수밖에 없었다. 도진이 현우를 들어다가 다른 자리에 앉히고 선우가 그사이에 앉았다.

선우의 브라콤이야 유명하다지만, 다른 이들은 왜 저런담미샤는 살살 눈치를 보았다. 그리고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건 성별을 가리지 않지.

의무 때문에 나온 일에 재미가 붙었다.

제가 여기 온 건 스카우트 때문입니다. 그 외의 나쁜 목적은 없어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하자 기세가 조금 누그러든다.

오늘은 이만 물러갈게요. 그래도 생각은 한번 해 보세요. 좋은 조건이잖아요?

미샤는 윙크를 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는 선우 씨도 같이 이야기했으면 좋겠네요.”

그런 뒤 미련 없이 떠나갔다.

무슨 이야기 했어?

선우의 물음에 현우는 들었던 걸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휘유. 조건 좋은데?

전부 들은 가준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작정하고 밀어주겠단 소리 아냐. 하긴 나 같아도 그러겠다. 이런 테이머가 어디 또 있나.”

무려 드래곤을 테이밍했다. 심지어 그 드래곤은 S급 각성자 여럿을 상대한 전적도 있었다. 이 정도면 탐이 날 만도 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나라는 러시아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를 시작으로 여러 나라가 조건을 제시하며 현우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아무 말 없이 지켜보던 도진은 어느 날 현우에게 불쑥 물었다.

다른 나라로 갈 거야?

아니요.”

오늘따라 둘 다 왜 이런담. 현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해 주었다.

난 아무래도 괜찮아.”

그런 현우에게 도진이 의외의 답을 돌려주었다.

뭐가요?

네가 한국에 있건 어디에 있건 따라갈 거니까. 원하는 대로 해.”

?

왜 따라와요현우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형 길드는 어떻게 하고요요즘 한창 규모 키우는 중 아니었어요?

그건 그런데. 나는 네가 더 소중해.”

도진의 말에 가슴이 간질간질해져 왔다.

그러니까 어딜 가던 날 떼어 놓고 가지 마.”

뭐라 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가슴을 긁어내려 보았다. 그래도 간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진은 그런 현우를 바라보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 커다란 손이 기분 좋다.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도 어느새 문을 열고 내 안으로 들어왔구나. 지금까지는 선우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도진 또한 그 범주에 들어가게 되었다.

어디 갈 땐 반드시 이야기할게요.”

그래.”

부드럽게 웃은 도진이 더 가까이 다가왔다. 점점 커지는 심장의 울림이 그에게도 들릴 것 같았다.

쿵쿵쿵.

격렬한 심장의 울림에 저도 모르게 눈을 감은 순간,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해?

가준이었다.

오후에는 미술관 가기로 했잖아.”

저놈의 여행광. 저도 모르게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어쩐지 좋은 기회를 놓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선우는?

안에 있어요.”

그래얼른 데려와. 두고 가면 삐질라.”

애초에 미술관 정도는 혼자 다녀오지. 꼭 다 같이 가려고 든다. 현우는 투덜거리며 선우를 부르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눈치가 없네.”

도진이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가준에게 말했다.

내가 뭘?

가준은 히죽거리며 답했다.

눈치가 없다니. 눈치 하면 난데.”

알고 망쳤단 소리였다.

아직 덜 맞았나 보군.”

어쩌다 이긴 걸로 의기양양하기는.”

가준이 고개를 들고 도진을 마주 보았다. 도진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일렁이기 시작했고, 가준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다시 싸워 보면 알겠지.”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텐데.”

해 봐야 알 거 아냐?

가준은 끝까지 지지 않으려 들었다.

둘 다 꺼져 버렸으면 좋겠군요.”

어느새 객실 밖으로 나온 선우가 그사이에 끼어들었다. 현우는 몬스터를 챙기느라 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71.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제일 먼저 타깃이 된 이는 가준이었다. 원래도 사이가 나빴기에 선우는 더욱더 그를 경계했다. 자신을 이길 수 없으니 형을 노리는 건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뭘 어쨌다고?

가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되물었다.

자꾸 형에게 접근하지 않습니까. 그런다고 형이 백호 길드에 갈 것 같습니까?

그 말에 가준은 선우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가준이 현우의 능력을 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뭐, 이전이라면 그랬겠지만.

지금 그를 움직이는 건 현우에 대한 호기심과 같이 돌아다니면서 생긴 호감, 그게 다였다. 선우의 생각처럼 드래곤을 테이밍하는 능력을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보다 이거 재밌는데?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하나만 물어보자.”

뭡니까?

저쪽은 형님을 왜 따라다니는 건데?

가준의 물음에 선우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예전에 빚진 걸 갚는 겁니다.”

우리랑 편 먹고 형님을 납치하려 든 거?

노골적인 말에 도진과 선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래도 가준의 말은 거침없었다. 애초에 이런 성격이다. 앞에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바꿀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니, 그건 이상하잖아. 딱 한 번 그런 걸로 누가 지금까지 봉사해?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저는 큰 빚을 졌습니다. 그걸 모두 갚기 전에는 떠날 수 없습니다.”

이번에는 도진이 묵직한 목소리로 반발했다.

알았어. 그러니까 지금 그쪽은 과거 빚을 갚기 위해 옆에 있다는 거지그래서 지선우, 너도 가만있는 거고?

사실 선우도 가만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 가준이 알 수는 없었다.

어느 호구가 빚진 걸 갚으려고 지금까지 쫓아다닌단 말인가게다가 도진은 누구한테든 호구처럼 휘둘릴 사람이 아니었다. 같이 납치를 계획해 놓고 양해도 없이 멋대로 뛰쳐나간 놈 아니던가.

이걸 모를 리가 없을 지선우가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그보다 더 숨기고 싶은 것이 있는 거다.

지금까지 파악한 사실을 조합해 보면 어떤 상황인지는 명백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가 다르지.

일단 나는 능력을 탐내서 쫓아다니는 게 아냐.”

그럼 뭡니까?

가준은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형님바라기인 지선우를 좀 놀려 줘 볼까 싶은 마음도 있었다.

좋아해서.”

“……어떤 의미로 말입니까?

몰라서 묻는 거야?

말을 내뱉고 얼마나 지났을까. 굳어 있던 선우의 손이 움직이며 그 위로 얼음 창이 떠올랐다. 이어 인정사정없이 가준을 공격했다.

공격할 것 같아서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득달같이 덤벼드는 사나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진정해. 진정하라고여긴 호텔 안이야.”

다른 곳이라면 가준도 신나서 맞섰겠지만, 그들은 외국에 초대받은 손님인데다 이곳에는 다른 유력 인사들도 머물고 있을 터였다. 그래서 선우를 설득해 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어느새 복도는 얼음 창으로 가득 채워졌다.

죽어 버리십시오.”

아니,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죽을 일이야?

당신은 죽어도 됩니다.”

가준은 필사적으로 얼음 창을 피해 몸을 굴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회전하는 물방울이 총탄처럼 쏟아졌다. 대충 복도에 놓여 있던 화분을 던져 급소 부위는 막았으나, 문제는 이후로도 쏟아지는 물방울의 양이었다. 여기서 버틴다면 일부는 고스란히 맞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제기랄!

결국 어쩔 수 없이 벽에 주먹을 내질러 무너트린 뒤, 옆 공간으로 피했다. 그렇게 공간이 트이자 회피는 좀 더 수월해졌지만, 그게 다였다. 눈이 돌아간 채 덤비는 선우에게서 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거기 좀 말려 보라고!

이러다가는 위층을 전부 무너트릴 것 같아서 도진에게 소리쳐 보았지만, 고민하는 표정으로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환장할 상황이었다. 원거리 공격이 잘 먹히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선우는 그대로 돌진해 와 가준의 멱살을 잡았다.

평소에 이런 건 내 역할인데!

사고 치는 역할 말이다. 가준은 한탄을 하며 미친 듯이 덤벼 오는 선우를 막아 냈다. 그리고 마침 그때, 현우가 방 안에서 나왔다.

뭐 해?

케로를 안고 나온 현우는 바닥을 뒹구는 가준을 한 번, 그 위에 올라타서 주먹질을 하는 선우를 한 번 바라보고는 눈을 깜박였다.

싸워?

호텔 벽은 무너져 있고, 어느새 나타난 직원이 안절부절못하며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선우는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았다.

형, 잠시만 기다려. 곧 처리할게.”

뭘 처리하는데?

개새끼 하나.”

아무래도 선우가 말하는 개새끼는 가준 같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케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단은 동생부터 말려 봐야겠다. 선우가 괜한 짓을 저질렀을 것 같지는 않지만, 장소가 건물 내부다. 자칫 잘못하다가 무너지기라도 하면 인명 피해가 적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싸우면 안 돼. 싸우려면 나가서 싸워.”

차분하게 달래자 선우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나가서 죽일게.”

그러더니 가준의 멱살을 잡고 호텔 창문가로 다가간다. 그대로 밖으로 뛰어내릴 셈인 듯했다. S급 각성자라 그래도 죽지는 않을 테니.

잠깐어이, 지금 나를 죽인다잖아왜 안 말려!

말렸는데요.”

그게 말린 거야?

나름?

가준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쳐서 선우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선우가 다시 그의 멱살을 잡아채려고 했으나, 현우의 옆으로 물러서는 가준이 좀 더 빨랐다.

들어 봐. 난 억울하다고!

형, 듣지 마.”

아니, 그러니까!

가준이 하소연을 하려는 순간, 뒤에서 까만 것이 뻗어 나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읍!

입술이 붙었으니 말을 할 수가 없다. 가준이 답답함에 몸부림치다가 몸을 돌려 입을 막은 당사자를 후려쳤다. 하지만 당사자인 도진은 여유롭게 공격을 피하고, 그대로 가준을 붙잡더니 호텔 창문을 깨고서 밖으로 훌쩍 뛰쳐나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미처 손을 써 볼 틈도 없었다.

뭔데?

현우가 멍하니 서 있다 선우에게 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형은 몰라도 돼.”

그와 동시에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직원이 비명을 질렀다.

!

아무래도 오후에 관광을 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며 돌아서 잔뜩 겁을 먹은 직원을 달래기 시작했다.

쿨럭쿨럭!

그림자에 의해 폐허로 끌려온 가준은 미친 듯이 기침을 했다. 어찌나 꽉 묶어서 끌고 오는지 미처 반항할 틈도 없었다.

아니, 진짜 이 미친 새끼들이.”

아무래도 이들은 자신을 동네북으로 아는 게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바꿔 줘야겠지. 안주머니에 있는 독병을 쥔 가준은 침을 퉤 뱉고는 몸을 일으켰다.

지선우야 그렇다 치자, 넌 또 왜 이 지랄이십니까?

독병을 저글링하며 묻자 도진이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준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입을 열었다.

현우를 좋아하십니까?

그렇다면?

좋아한다는 의미가 제가 생각하는 의미가 맞습니까?

연애의 의미라면 맞지.”

실상은 아직 그 정돈 아니었지만, 이왕 저지른 거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말하다 보니 나쁜 생각도 아닌 것 같았고 말이다. 여자를 더 좋아하긴 하지만, 현우라면 남자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도진이 그에 대해 물어왔다.

둘 다 남자 아닙니까.”

가준은 여기서 명대사를 내뱉었다.

나는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마침 남자였을 뿐이지.”

소설에 흔히 나오는 대사였다. 하지만 그걸 들은 도진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한참을 가만있으니 공격할 의욕도 사라졌다. 가준은 더러워진 옷을 탈탈 털며 한숨을 쉬었다. 뭔가 찝찝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다.

계속 생각할 거면 나 먼저 간다.”

그러고 나가려는데, 무언가가 덜컥 발을 붙잡았다.

아씨!

도진의 그림자였다.

또 왜!

좋아한다는 건 뭡니까?

좋아하는 게 좋아하는 거지뭘 그런 걸 물어.”

누군가를 계속 보고 싶고, 가슴이 뛰고. 그런 감정이 좋아하는 겁니까?

알고 있네!

알면서 왜 물어가준이 신경질을 내며 답하자, 도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런 거였습니다.”

뭔가를 납득한 듯한 표정이다.

됐지그럼 놔.”

아뇨. 그럴 순 없습니다.”

?

아무래도 저도 현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좋아합니다.”

그걸 이제 안 게 더 신기하다.

그래서?

경쟁자는 적은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도진은 빙긋 웃었다. 어딘가 찝찝하다 했더니 이걸 예고한 모양이었다.

시발.”

가준의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주변에 왜 이리 미친놈이 많은지 모르겠다. 그는 다시 작은 독병을 손가락 사이에 쥐었고, 물밀듯이 밀려오는 도진의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상성이 나쁜데.

원거리 공격이 잦은 선우보다 도진과의 상성이 더 나빴다. 그림자는 이쪽을 공격할 수 있는데, 이쪽은 그림자를 공격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저번에도 허무하게 졌는데, 또 이렇게 되어 버리다니.

가준은 이를 악물고 도진을 노려보았다.

72.

도진은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뒤늦게 알게 된 감정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동안은 동생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 왔다. 무슨 행동을 하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여겼었다.

가준이 거슬리는 건 동생에게 해충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떼어 놓기 위해 애썼는데 모두 아니었다.

왜 몰랐을까.

깨닫고 나니 몰랐던 게 신기할 정도로 세상이 달리 보인다. 폐허의 구멍 뚫린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유독 맑아 보였고,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마저 감미롭다.

그래, 사랑이었구나.

이걸 왜 이제야 알았을까. 도진은 웃으며 자유로운 손을 휘둘렀다.

악, 저 미친 새끼!

가준이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굴렸다. 하지만 그림자는 끈덕지게 그에게 달라붙으며 공격을 가했다. 필사적으로 피하면서 맞서 공격을 날리긴 했지만, 그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결국 먼저 손을 든 건 가준이었다.

포기, 포기!

악을 쓰는 가준에게 도진이 부드럽게 물었다.

뭘 포기하는 겁니까?

지현우!

그제야 도진은 그림자를 거둬들였다.

그 말 지키는 겁니다?

내가 진짜 더러워서누가 경쟁자를 이렇게 죽이려 들어!

저요.”

미치겠네.”

가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을 털었다. 시계를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럼 저는 돌아가 보겠습니다.”

외출하기로 했으니, 현우가 아직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잔뜩 심통이 났을 테고, 가서 얼른 달래 줘야 할 것 같았다.

참, 도가준. 당신은 오지 마십시오.”

그럼 나는 어디서 지내?

명색이 백호 길드의 길드장 아닙니까호텔 하나 못 구합니까?

!

뒤에서 뭐라고 외치는 가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진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왔어요가준 씨는요?

다른 호텔에서 묵겠대.”

어디요?

그건 듣지 못했어.”

도진은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선우에게 기대 소파에 늘어져 있던 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호텔 옮기래요. 그래서 다른 데 가야 하는데.”

이제 절대 싸우지 않겠다고 했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 있다. 그 때문에 호텔 관계자는 불안해했고, 결국 숙소를 옮기게 되었다.

귀찮게 됐네요.”

현우가 투덜거리자 도진은 그를 달래 주었다.

도가준이 다른 데로 갔으니 이제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거야.”

정말요?

의심하는 듯한 시선이 와 닿았지만, 도진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당연하지.”

일단 믿어 볼게요.”

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날의 일은 그렇게 해프닝으로 지나가는 듯했다. 다음 날, 다시 도가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

세계 각성자 연합의 장을 뽑는 자리. 그 자리는 뉴욕 외곽의 거대한 건물에서 진행하기로 하였다. 그 때문에 현우와 선우 그리고 도진은 정장을 차려입고 그 건물로 향했다.

정식 명칭은 세계 각성자 협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뽑히는 분이 협회장이 되시는 거죠.”

안내인으로 붙은 여성이 능숙한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투표는 각 나라에 배정된 표를 함에 넣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혹시 모를 부정을 방지하기 위해 각 함은 각성자들이 지키고 있고, 함 자체도 몬스터 부산물을 이용해 만들었습니다.”

그럼 한국에는 몇 표가 배정된 겁니까?

세 표입니다. 표는 직접 가서 받으셔야 합니다. 혹시 더 질문이 있으신가요?

없습니다.”

그걸 끝으로 안내인은 새로운 사람을 안내하기 위해 사라졌다.

세 표면 인원수가 딱 맞네.”

선우의 말에 현우가 되물었다.

우리 쪽에 1명 더 있지 않아?

그쪽은 덤인가 보지.”

말투가 신랄하다. 어제 그 일 이후로 가준에 대한 선우의 평가가 확 내려간 모양이었다. 욕설은 하지 않았지만, 그게 다였다.

누가 덤이야?

거기에 익숙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도가준이었다.

선우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개를 돌렸고, 도진 또한 표정을 굳혔다.

나도 여기 초대받은 몸이라고.”

가준이 비아냥거리며 초대장을 흔들어 보였다.

약속은 지키지 않는 겁니까?

도진의 말에 가준이 이죽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다른 호텔에서 묵었잖아?

그런 의미가 아닌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니, 포기해도 친구로는 남을 수 있지.”

그걸 또 능글맞게 받아넘긴다. 이대로면 여기서도 뭔 일을 벌일 것 같은지라 현우가 피곤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여기서는 싸우지 말죠.”

말은 바로 해야지. 내가 먼저 싸움 걸었나?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제도 먼저 죽이려고 덤빈 건 선우였으니까.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현우는 선우의 편이었다.

화나게 했으니까 그랬겠죠.”

와, 와!

가준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를 높였다. 그래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선뜻 손을 쓰려 들지는 않았다. 쓴다고 해도 선우와 도진을 이길 수 없기도 했고 말이다. 그렇게 넷이서 투덕거리는데 갑자기 거구의 남자 하나가 접근해 왔다.

여어, 한국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존재감이 대단한 남자인지라 자연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피닉스 길드의 바카디다.”

야, 네 친구냐좀 더 제대로 불러.”

몇몇이 그를 알아보고 숙덕거리다 몸을 움츠렸다. 그 덕분에 현우도 그의 정체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미국 2위 길드인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 바카디. 성격이 거칠고 난폭한 남자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 내 평판은 좋은 편이 아니다. 정의를 앞세우며 일을 가려 하는 가디언 길드와는 다르게 더러운 일도 마다하지 않는 탓에 이미지가 나쁘기 때문이었다.

레온이 정의를 위해 길드를 세웠다면, 바카디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길드를 굴린다.

바카디가 눈동자를 굴리다가 현우를 바라보았다. 어딘가 끈적하고 집착이 느껴지는 눈동자에 기분이 더러워졌지만, 애써 내리눌렀다.

이쪽이 지현우?

네.”

와우, 반갑습니다드래곤을 길들인 테이머라고 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카디는 태연하게 손을 내밀며 웃었다. 악수하자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망설이는 사이, 가준이 앞으로 나서서 그 손을 대신 잡았다.

와우저도 피닉스 길드에는 관심이 많았습니다. 반갑습니다!

어찌나 너스레를 떠는지 바카디가 불쾌함을 표시할 틈도 없었다.

당신은 백호 길드의 도가준이지요?

네, 맞습니다.”

가준이 맞잡은 손에서 점점 힘이 느껴졌다.

내가 동네북인가. 개나 소나 만만하게 보네.

바카디의 손을 잡은 가준의 손에도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돌아오는 힘이 점점 더 커졌다. 힘 하나는 미국 최고라더니, 무식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가준도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는 한국의 각성자였고, 그중에서도 무려 2위인 백호 길드의 길드장이었다. 여기서 물러났다가는 한국과 백호 길드가 웃음거리만 될 뿐이었다.

씨발, 그런데 버티기 쉽지 않네.

서서히 웃는 낯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선우와 도진도 그걸 눈치챘지만, 끼어들 수가 없었다. 인제 와서 사람을 교체하자고 하기도 우스운 꼴이니까. 절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무리 밉상이라도 같은 나라 사람이니까.

분위기가 험악해져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쯤, 현우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태연하게 바카디와 가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며 말했다.

계속 악수하실 겁니까저랑도 하시죠?

그러면서 눈웃음을 쳤다.

와왕.”

끼르륵.”

그 눈웃음을 본 케로와 점박이가 남들 몰래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두눈박이 또한 둘을 따라 몸을 움직였다.

화났네.

화났다.

화났어.

지금 이 순간, 세 몬스터의 마음은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좀 더 거리를 벌렸다.

쪼그만 게.

바카디는 말린답시고 눈웃음치며 끼어든 현우를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즐거워지려는 참인데 방해라니. 아무래도 쓴맛을 보지 못하고 자란 모양이었다. 급 흥미의 대상이 바뀌었다.

도가준보다는 이 쪼그만 녀석을 혼내 주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마음을 정한 이후 가준의 손을 놓으려 했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다음에 일어날 일을 그도 예측한 모양이었다.

그래 봤자지.

한 번 더 힘을 주자 가준이 밀려났다.

저야 좋지요. 악수할까요?

바카디는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작고 가느다란 손이다. 야들야들해 보이는 것이 힘을 조금만 줘도 부서질 것 같았다.

비열한 웃음이 바카디의 입가에 떠올랐다.

!

지선우가 다급히 말리려 들었고, 그 옆에 있던 한도진도 가만있지 않았다. 어느새 자신의 주특기인 그림자를 불러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날 바카디도 아니었다. 그는 힘으로 그 모든 걸 받아치고, 현우의 손을 잡았다.

역시 부드럽고 연약한 손이다. 이런 고생도 해 보지 않은 손은 짜증 난다. 저지르고 나서 수습이 귀찮아지겠지만, 어떠랴. 마음대로 움직여라그게 바카디였다. 그걸 위해 쌓아온 권력, 힘인데 새삼 피하고 싶지 않았다.

울부짖으며 괴로워해라. 바카디는 맞잡은 손에 인정사정없이 힘을 주었다.

우드득.

꽉 잡힌 여린 손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일 것이다. 바카디의 입이 쭉 찢어졌다.

73.

이 새끼가 미쳤나?

자기 손이 으스러지고 있는데 왜 쪼개는지 모르겠다. 혹시 변태인가현우는 기겁한 표정으로 슬슬 손을 뺐다. 그리고 그쯤 바카디가 자신의 손을 바라보며 고함을 내질렀다.

아악!

변태가 아니라 이제야 자기 손이 망가진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이어 살의가 담긴 난폭한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건 들키겠는데?

한국으로 돌아온 김에 쉬고 싶었고, 동생도 뭐라 하지 않았기에 힘을 쓰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들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그 오해를 지키고자 맞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기에 태연히 그 자리에 있었으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게 무척 위태로워 보인 모양이었다.

말려!

기겁하며 몇몇 각성자들이 둘에게 달려왔다. 그리고 그중 가장 빨랐던 사람은 선우와 도진, 그리고 바로 옆에 있던 가준이었다.

와악!

가준이 소리를 지르며 현우를 낚아챘고, 선우가 현우의 앞에 얼음으로 장벽을 만들었으며, 도진의 그림자가 바카디의 주먹을 막아 냈다.

그리고 그게 바카디의 화를 돋웠다.

죽어!

특유의 초재생 능력으로 순식간에 주먹을 회복시킨 바카디는 현우에게로 돌진했다.

물론 선우나 도진이 그를 가만둘 리가 없었다. 바카디가 쿵쿵거리며 달려오는 길목에 그림자가 깔려 그를 붙잡았다. 이어 곧바로 회전하는 물방울이 탄환처럼 바카디에게로 쏟아 내렸다.

와오.”

서로 싫어하면서 궁합 하나는 찰떡이다.

도진이 묶으면 선우가 공격하고, 선우가 묶으면 도진이 공격한다. 바카디는 그 자리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실컷 공격을 처맞았다.

언제 이런 모습을 또 보겠는가. 달려오던 각성자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멍하니 그를 구경하였다. 그러다 몇몇은 박수를 치기도 했다.

쟤 더 빡치겠는데?

어찌나 환상적으로 쥐어 패는지 보고 있는 가준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바카디는 점점 더 얼굴이 빨갛게 물들어 갔다.

이제 더 못 참겠다!

언제는 참았다고?

가준이 무심결에 내뱉은 말을 들은 바카디가 눈을 사납게 떴다. 이어 근육을 불끈거리며 키워 가기 시작했다.

야야저거 봐!

미쳤어여긴 건물 안이라고!

바카디는 초재생으로 몸을 회복시켜 가며 힘으로 몬스터를 굴복시키는 각성자였다. 거대한 몬스터도 쉽게 이겨 내는 그 힘을 여기에 퍼부으면 건물이 멀쩡하게 버틸 리 없었다.

다 뒈져 버려!

뒈지는 건 그쪽이겠지요.”

선우는 모처럼 험악한 말을 쓰며 허공에 거대한 얼음 창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모양을 갖춘 거대한 얼음 창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거대 몬스터를 상대할 때 주로 쓰는 기술인데, 지금 그걸 바카디에게 쏟아부을 속셈이었다.

그걸 깨달은 도진은 곧바로 그림자로 주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물론 그러면서 바카디를 그 자리에 못 박아 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이 바카디가이 정도도 못 이겨 낼 것 같은가!

상황이 개판이 되었다.

야, 저거 어떻게 해?

가준이 질린 표정으로 셋을 바라보며 물었다.

뭘 어떻게 해?

현우가 하품을 하며 되물었다.

진짜 죽일 것 같은데오늘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 잊었어그리고 바카디가 아무리 개차반이라도 일단은 미국놈에 협회장 후보다?

알 게 뭐람.”

아니그러면 안 되지!

가준은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렸다. 하지만 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동생과 도진이 바카디를 죽이느냐 마느냐가 아니었다.

저거 좀 이상한데?

바카디에게서 익숙한 느낌이 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금방 떠오르질 않았다.

현우는 팔짱을 낀 채 손가락으로 팔을 툭툭 두드렸다. 점차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래, 난 저 힘을 어디선가 봤어. 잊었을 리가 있나.

마계. 그곳의 마족들이 저런 힘을 썼었다. 그를 떠올린 현우의 눈이 반짝였다. 아무래도 바카디는 여기서 죽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케로.”

이름을 부르자마자 찰떡같이 뜻을 알아들은 케로가 몸을 크게 부풀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바카디와 선우 사이로 뛰어 들어가 바카디를 왕 물었다.

이런 지저분한 근육질 아저씨 물고 싶지 않아!

그렇지만 주인이 시켰으니까케로는 그대로 바카디를 그림자에게서 뜯어내 선우의 공격 범위에서 벗어났다. 물론 계속 물고 있는 건 찝찝하니까 곧바로 뱉어 냈다. 침도 뱉었다.

이 개새끼는 뭐야!

바카디가 길길이 날뛰고, 선우는 잠시 공격을 멈춘 채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케로는 절대로 혼자서 움직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건 현우가 명령했다는 소리였다.

선우는 미친 듯이 회전하던 얼음 창을 손을 휘저어 부숴 버리고는 현우의 곁으로 다가갔다.

형, 괜찮아?

혹시라도 다쳤을까 손을 잡고 꼼꼼하게 살펴보았지만, 멀쩡하다.

응, 괜찮아.”

현우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자신의 무사함을 증명해 보였다.

형 상처부터 봤어야 하는 건데.”

순간 분노로 앞이 보이지 않았다. 선우는 반성하는 태도로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고개를 숙였다.

괜찮다니까.”

현우는 아직 어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사이 바카디를 다시 묶어 둔 도진이 가까이 다가와 재차 현우의 손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슬금슬금 움직여 서로 얽혀 들었다. 그저 상처를 걱정하는 행동일 터인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손에 땀이 차는 것 같기도 했다.

다친 데는 없어?

네, 없어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선우는 자신이 어떠한 존재라도 사랑해 줄 사람인 걸 알고 있다. 세상에 단 둘뿐인 가족이니까. 하지만 도진은다른 사람에게는 태연히 본색을 드러내면서도 그에게는 저도 모르게 감추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이런 좋은 사람을 속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쿡쿡 아파 왔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도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놀랐을 현우를 보듬어 주고자 했다.

많이 놀랐을 거야. 오늘은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게 어떨까?

걱정이 담긴 표정으로 부드럽게 달래 주는 모습이 달콤하다.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절로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 하고 대답할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아니지.

아직 할 일이 많은데 벌써 돌아가서는 안 된다.

쉬어야지.”

안 되는데 몸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럼요. 쉬어야죠.”

현우가 헤실거리면서 대답하자 옆에서 가준이 기가 찬 표정으로 태클을 걸어 왔다.

다들 정신 차려쉬러 가긴 뭘 쉬러 가지선우, 우리가 나라 대표로 온 거 잊었어한도진, 이 난장을 쳐 놓고 뭘 쉬러 가!

저는 충분히 제정신입니다.”

현우는 좀 쉬어야 합니다. 얼마나 놀랐을까.”

아니, 아니지금 일부터 해결해 놓고 가야지그리고 지현우는 멀쩡하거든엄청 멀쩡하거든?

몸만 멀쩡하지, 마음은 그렇지 않을 겁니다.”

다들 말이 통하질 않는다.

나만 여기서 정상인인 거야?

언제나 미친놈이라는 소릴 들었는데, 이들 사이에 끼니 자신이 정상같이 느껴졌다. 가준은 침착하려고 애쓰며 그들을 설득했다.

일단 조금만 기다려 보자. 곧 책임자가 나올 테니까 사정을 설명하고오오어디 가!

돌아갑니다. 애초에 외국에서 초대한 손님에게 이리 무례하게 군 건 이쪽이니까 저희가 이렇게 나와도 할 말은 없을 겁니다. 목격자도 많으니까요.”

선우는 그 말을 끝으로 현우의 앞에 등을 돌리고 앉았다.

형, 업히자.”

그 정돈 아닌데걸을 수 있어.”

현우가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는 틈을 타 도진도 슬쩍 그 옆에 앉으며 등을 내보였다.

내 등이 더 편할 거야.”

결국 가준은 그들을 설득하는 걸 포기했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 굳이 외국까지 나와서 숙이고 들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가준은 슬슬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쯤 저 멀리서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다.

평소와는 다르게 냉엄한 표정을 지은 금발의 남자, 그는 레온이었다. 몇몇 사람을 거느린 채 이쪽으로 다가온 그는 케로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바카디와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현우를 보더니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카디, 자네 미쳤나?

누가 미쳤다고?

자네 말이야, 바카디.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

미친 건 저쪽이겠지감히 날 이 꼴로 만들어?

이미 말은 다 전해 들었어. 먼저 시비를 건 쪽도, 그런 주제에 바닥을 추하게 나뒹구는 것도 그대라고.”

레온은 싸늘한 표정으로 인정사정없이 바카디를 비난했다.

이 일은 이대로 넘어갈 순 없어. 그 정돈 알겠지?

하, 넘어가지 않으면 어쩔 건데?

일단 협회장 후보 자리 박탈 건을 회의에 올릴 거야.”

누구 맘대로!

바카디는 어느새 풀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협회를 만들려는 의의가 전 세계가 공조하여 세계 평화를 지키기 위함인데, 자네는 그와 맞지 않아 보이는군. 그리고 벌은 협회장 후보 박탈로만 끝나지도 않을 거야. 무고한 사람을 난데없이 공격한 것도 대가를 받아야 하지.”

내가 왜!

애인가떼쓴다고 모든 게 해결될 줄 아나?

난 억울하다고손이 으스러진 건 내 쪽이거든?

그 말에 주변 각성자들의 표정이 똑같이 일그러졌다.

그를 상대하던 이는 작고 여려 보이는 테이머 계열 각성자다. 테이머 계열은 다루는 몬스터의 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당사자는 힘이 약한 경우가 많았다. 힘으로 몬스터를 두들겨 패는 바카디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단 소리였다.

일부는 바카디의 말을 듣고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확인해 봤지만, 무척이나 멀쩡해 보였다.

와, 양심도 없어.”

원래 없었잖아.”

자연 나오는 소리가 곱지 않았다.

74.

바카디로서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공간에 그의 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인 레온까지 있었으니. 아무리 미친 멧돼지라 불리는 막 나가는 그라도 더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두고 봐라. 다음에는 이렇게 끝내지 않을 거다.”

악당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바카디가 끌려가자 레온은 그를 보며 혀를 찼다. 협회장 후보에 오르기 위해 그리 애를 쓰더니, 결국 자기 손으로 모든 걸 망치지 않았는가.

불쾌함이 치솟았지만, 레온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는 현우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잘못은 다른 사람이 했는걸요.”

현우는 손을 내저어 보이며 웃었으나, 레온은 쉽게 고개를 들지 않았다.

힘들게 오셨는데 불쾌한 일을 겪으셨지 않습니까. 거기에는 제 책임도 있습니다.”

반듯한 레온의 모습에 주변의 사람들은 감탄했다.

그렇지, 저게 정상이지. 역시 가디언 길드의 레온님.”

자연스럽게 찬사가 나온다. 이미 알고 있긴 했지만, 대단히 평판이 좋은 남자였다. 이런 사람이 몰래 찾아와 자신을 꼬셨단 말이지. 그만큼 드래곤의 가치가 큰 모양이었다.

이런 걸로 보상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보상안을 준비하겠습니다. 보시고 원하시는 걸 고르십시오. 아니면 먼저 제시해 주셔도 됩니다. 기다릴 수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죄송스럽지만, 피해자 쪽의 증언도 필요하므로 한 분은 남아 주셨으면 합니다.”

현우는 당연히 제외되었고, 남은 이는 선우와 도진, 가준이었다. 하지만 선우와 도진은 아직도 등을 보인 채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 가준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남겠습니다.”

가기 싫다고 더 버텼다가는 나라 망신만 될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지현우, 다녀올 테니 그 전에 저거부터 해결해.”

가준은 고집스럽게 버티는 두 남자를 가리키곤 레온과 함께 자리를 떴다. 그렇게 일은 거진 다 해결되었지만, 주변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또 다른 구경거리가 있었으니까.

테이머는 누굴 선택할까?

그야 오른쪽이지. 더 듬직하게 생기지 않았나?

하지만 왼쪽도 만만치 않아. 별 차이가 안 난다고. 무엇보다 왼쪽은 친형제잖아?

형제라고맙소사. 지금 동생이 형을 업어 주겠다고 버티고 있는 거야그런 형제가 존재하긴 해?

구경하던 이가 놀란 눈으로 외쳤다.

내 동생은 내가 업어 달라고 하면 날 죽이려 들 거야!

너 같은 돼지는 나라도 업어 주기 싫을 것 같은데.”

아니야, 아니라고그게 바로 형제라고!

그 소란 속에서도 선우는 차분하게 현우를 불렀다.

형. 현우 형.”

그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절로 몸이 선우 쪽으로 기울었다. 이렇게 귀여운 어리광을 어찌 외면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업혀 줘야지. 부끄러움은 현우의 몫이었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그렇게 현우의 몸이 자신 쪽으로 기우는 게 느껴지자, 선우의 입가가 위로 올라갔다.

이겼다!

그리 생각하며 도진을 비웃는 얼굴로 바라보았으나, 그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현우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문을 연 도진은 현우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지선우 씨는 방금 전까지 싸웠잖아. 피곤하시지 않을까?

선우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도진을 쏘아보았다. 같이 싸워 놓고서 자기만 쏙 빠져나가려는 모습이 기가 차다. 처음에는 이런 위인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갈수록 능글맞아진다.

그러네요.”

선우 쪽으로 향하던 현우의 몸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난 멀쩡해. 별로 힘도 안 썼는걸.”

아니지요. 다리가 떨리고 있지 않습니까?

도진은 멀쩡한 다리를 보며 진지하게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현우의 몸이 도진에게로 기울었다.

저 여우 새끼!

절로 이가 으득 갈렸다. 형이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이용하다니. 속에서 천불이 치솟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일어나서 도진과 싸우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형이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우야.”

!

둘은 간절히 현우를 불렀다. 이쯤 되자 현우도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뭐든 선택을 해야겠다는 위기감이 들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싸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현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선우의 등을 살짝 두드렸다.

!

자신을 선택했나 싶어 좋아하는 순간, 앞으로 돌아온 현우가 선우의 손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런 후에 도진에게도 가서 똑같은 행동을 했다.

난 걸을 수 있으니 그냥 가죠.”

하지만!

하지만.”

자꾸 이러면 혼자 갈 거예요.”

그게 현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애초에 다치지도 않았으니 굳이 업힐 필요도 없었다. 그런 현우를 보며 선우와 도진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잠깐이었지만,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번갈아 가면서 업을게.”

그게 좋겠어.”

이어 현우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선우가 그를 들어서 덥석 업었다.

선우야!

당황해서 이름을 불렀지만, 못 들은 척하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그 뒤를 도진과 다시 작아진 케로, 점박이, 두눈박이가 쫄래쫄래 따라갔다.

이것도 부끄러워!

둘은 자신들이 한 말을 착실하게 지켰다. 숙소로 돌아가기까지 번갈아 가며 현우를 업고 걸은 것이다. 그나마 선우에게 업혔을 때는 괜찮았지만, 도진에게 업혔을 때는 동요를 감추느라 힘들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자꾸 뛰어서, 얼굴이 붉어져서 괴로웠다. 그 모든 것이 말하는 건 단 하나였으나, 마계에서 오랜 시간을 지내 온 현우는 그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

바카디가 협회장 후보자 자리를 박탈당했다. 그 때문에 투표 날짜가 새로 잡히고, 미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연장되었다.

이게 다 나의 현란한 말발 덕분이지.”

뒤늦게 돌아온 가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나저나 미국도 생각보다 나쁘진 않더라바카디한테 제대로 벌을 줄까?’ 싶었는데 주더라고.”

그 점은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가준은 선우의 말에 대답하며 슬그머니 소파에 앉았다. 그런 그에게 도진의 시선이 와 닿았다.

?

따로 숙소가 있지 않습니까?

아, 거긴 불편해서 여기로 옮기려고.”

가준이 시선을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런 면에서 둔한 현우는 왜 그러냐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괜한 기대를 한 모양이었다. 가준은 한숨을 푹 쉬고는 선우와 도진에게 말했다.

좀 봐주라. 내가 대신 이번 일 다 처리했잖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하고 산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그게 안 된다.

도가준 가오 다 죽었네.

슬슬 비비댄 결과, 같은 숙소에 머무르는 걸 허락받았다. 이걸 허락까지 받아야 하나 자괴감이 들었지만, 어쩌랴.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것을.

그나저나 레온. 실제로 이야기해 보니 사람이 참 괜찮더라.”

그렇기에 그를 뽑기로 했던 것 아닙니까?

동맹국인 미국 사람인데다가, 본인도 정의를 내세우고 있었다. 투표 전에 발표한 공약도 나쁘지 않았고, 인물도 번듯하다. 러시아의 표드로도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레온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야 그렇지.”

가준은 순순히 수긍했다.

그나저나 저녁은 뭐 먹을래나가서 먹을까안에서 먹을까?

같이 저녁 먹을 예정이 없습니다만.”

냉정해!

시답잖은 말을 떠드는 가준을 선우가 상대하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익!

도심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음색에 넷은 벌떡 일어났다.

포털이 열렸다.”

이 소리는 대비하지 못한 포털이 열릴 시, 시민들의 대피를 재촉하는 소리였다.

우로보로스인가?

그럴 수도 있습니다.”

와, 진짜 그렇다면 놀랍겠는데. 협회장 투표로 각성자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포털을 연다고?

저번에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커튼을 걷고 창밖을 바라보니 거리가 소란스럽다.

끼어들 거야?

도움 요청이 들어오면 움직여야지요.”

마음 같아서는 당장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이곳은 타국이었다. 먼저 마음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단은 대기입니다.”

알았어. 그럼 TV라도 좀 볼까.”

포털이 열리는 순간, 방송은 모두 재난방송으로 바뀐다. 그래서 상황이라도 파악하고자 켠 것이었는데, 뭔가 이상하다.

뉴스가 방송되어야 할 화면이 새까맣다. 그리고 그 새까만 화면 중심에는 은색으로 원이 그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뱀의 머리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우로보로스입니다.』

로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명랑한 목소리가 인사를 했다.

방송을 탈취당한 모양인데?

가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 와중에도 명랑한 목소리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신문이 아닌 방송으로 데뷔를 했는데요.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우로보로스의 취지를 설명해 주고자 합니다.』

내용은 이러했다.

세상은 변했다. 몬스터들이 등장하게 되었고, 그를 막기 위해서 각성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몬스터를 막아 내며, 사람들을 지켜 주었다. 하지만 그래서돌아오는 대가는 합당한 것인가?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는 각성자면 돈도 많이 벌고, 권력도 쥘 수 있지 않느냐?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건 각성자가 가져야 할 것의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명랑한 목소리는 말했다.

『각성자는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75.

각성자 우월주의자로군.”

먼저 입을 연 이는 가준이었다.

그게 뭔데?

현우가 묻자 가준이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말 그대로야. 각성자들이 일반적인 사람보다 우월한 신인류라고 여기는 이들이지.”

각성자들이 나타나면서 시대가 변했다. 강한 힘을 가진 그들은 세상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일조하며, 서서히 권력을 손에 넣어갔다.

하지만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은 자신이 손에 쥔 걸 넘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법으로 각성자들을 제재하며 그들에게 일정 이상의 권력을 넘기지 않으려 했다.

그런 상황을 참고 넘어가는 이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많은 걸 가져야 한다고 여겼으며, 시대가 각성자에게 발맞춰 바뀌어야 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회는 각성자들을 대놓고 견제하고 있어. 선현 길드를 봐도 알 수 있지. 정부와 기업이 하는 게 다 그렇지만, 나라에서 제일가는 길드의 권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아헌터 관리국이 수시로 태클 거는 것도 그렇고. 이번만 해도 포털이 예고 없이 터지지 않았으면 협회는 훨씬 더 늦게 생겼을 거야.”

그런 상황 때문인지 각성자 우월주의자 중에는 유독 빌런이 많았다.

그래도 이렇게 크게 일을 저지르며 등장한 이들은 우로보로스가 처음이다.”

이걸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우로보로스가 이런 식으로 세상을 흔들면 그에 넘어가는 각성자나 빌런이 늘어날 것이다.

혼란스러워지겠네.”

가준이 귀찮다는 듯이 혀를 찼다.

자리만 제대로 지킨다면 혼란스러울 일은 없을 겁니다.”

도진이 단호하게 말하며 가준의 말을 막았다.

글쎄, 과연 그럴까. 이런 상황에서는 끼어들고 싶지 않아도 휘말리게 된다고.”

잠시 방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고 그 침묵을 깨트린 건 급히 달려온 가디언 길드의 사람이었다.

도와주십시오.”

청년은 숨을 헐떡이며 도움을 요청했다.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형 포털이 터져서 각성자가 부족합니다!

저번에는 한국의 전역에서 포털이 터졌다. 그 때문에 이리저리 흩어져서 그를 수습하기 위해 애썼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작정하고 뉴욕에만 집중해서 포털을 열었습니다. 대피하지 못한 사람도 많은데 몬스터가 쏟아져 내리니 수습이 안 됩니다.”

청년은 이를 악물었다. 그 때문에 미리 단단히 대기하고 있던 미국 쪽 각성자들도 당황했다. 멀리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으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도와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진 빚은 갚아야지요.”

선우와 도진이 앞으로 나서자 가준도 합류했다.

나도!

거기에 현우도 끼어들었다.

그래, 형도 가자.”

선우는 창밖을 힐끔 보면서 대답했다. 이미 도심이 엉망이 된 상황이라 현우를 두고 가기보다는 옆에 두는 게 더 안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셋은 청년의 말을 듣고 뉴욕 한편에 자리 잡았다. 멀지 않은 곳에는 다른 나라의 각성자들도 보였다.

여어, 안녕?

포털이 열리는 걸 기다리고 있자니, 까무잡잡한 피부의 남자 하나가 손을 들어 올리며 다가왔다. 가슴에는 화려하게 비상하는 붉은 새가 그려진 배지를 달고 있었다.

피닉스 길드.”

그 때문에 정체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 맞아피닉스 길드지. 다른 나라 사람에게 부탁만 하는 건 좀 그래서 도우미로 길드원들을 붙이기로 했거든. 저기 저 애송이랑 같은 역할이란 말이지.”

애송이가 아니라 가디언 길드의 존입니다.”

그래, 그래. 존. 나는 애쉬라고 불러 줘.”

애쉬가 히죽거리며 말했다.

자, 그럼 뉴욕을 지켜 보자고!

기이하리만치 높은 텐션으로 말하며 애쉬는 존의 옆에 섰다.

어쩐지 기분 나쁜 남잔데?

가준이 툭 뱉어 내듯 말하자, 선우와 도진도 동의하는 표정을 지었다. 똑같이 도우미 역할을 자처하는 존과는 느낌이 상당히 달랐다.

아무래도 조심해야겠어.”

가준이 그렇게 말하자 도진이 뒤로 살짝 물러나며 현우의 옆에 섰다. 지금 셋이 생각하는 건 같았다.

피닉스 길드의 길드장 바카디.

그가 뭔가 손을 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아, 터진다.”

애쉬가 눈가에 손을 대고 외치자마자 포털이 열리며 수많은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자마자 흩어지려는 몬스터를 도진이 붙잡고, 선우가 공격했다. 선우가 몬스터들의 발을 얼리고, 가준이 독살시키기도 했다. 그 사이로 몸집을 키운 케로와 점박이가 날뛰었으며, 두눈도 끼어들었다.

방해되게!

같은 편에게 독이 미칠 수도 있어 가준이 발을 동동 구르다 결국 머리를 쓸어 올리며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육박전으로 싸울 셈인 모양이었다. 애송이라고 불린 존도 검을 들고 몬스터를 베어 갔다.

죽이고, 또 죽이고. 죽여도 끊임없이 밀려 나오는 몬스터는 마치 개미 떼 같았다.

장관이네.”

애쉬는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하게 싸워 나갔다. 그가 손을 뻗을 때마다 몬스터가 죽어 나갔다. 그럼에도 주변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고조되어 갔다.

크아아앙!

몬스터를 상대하기 위해 케로와 점박이가 더 멀어졌다. 도진은 여전히 현우의 곁에 있었지만, 여기저기 능력을 펼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 손이 근질거리네.

현우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고민에 잠겨 있었다. 처음에는 게으르게 지내고 싶어서 능력을 말하지 않았다. 이후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중간에 밝히기 애매해져서 미루게 되었고.

그 결과, 선우는 아직도 현우가 연약한 줄 안다. 도진은 저번에 무언가를 눈치챈 것 같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아마 현우가 직접 말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어쩔까?

현우가 직접 끼어들면 몬스터들은 금방 쓸어 버릴 수 있었다. 아무리 훼까닥 돌아서 인간을 공격하는 몬스터라도, 절대적인 힘과 공포 앞에서는 얌전해지기 마련이었으니까.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근방은 그래도 몬스터를 잘 막아 낸 탓에 사람들이 거의 대피를 한 상태였다. 하지만 조금만 더 움직이면 도망치지 못해 공포에 울부짖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그래, 움직이자.

선우에게는 차근차근 사정을 설명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그리 생각하며 움직이려는 순간, 무언가가 현우의 뒤쪽에서 날아왔다. 빠르게 손으로 쳐내려는데, 도진이 좀 더 빨랐다.

보이지 않는 공격을 쳐낸 도진이 애쉬에게 이를 드러내며 물었다.

무슨 짓이지?

무슨 짓이긴.”

애쉬가 혀를 날름 내밀었다.

이런 짓이지.”

그가 품에서 꺼낸 유리병을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유리병이 깨지면서 그 안에서 까만 연기가 솟아오르더니, 이내 새로운 포털이 생겨났다.

하나 더?

히죽거리는 애쉬를 곁에 서 있던 존이 막으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안 돼!

발악하는 존을 밀어 찬 애쉬는 기어코 포털을 하나 더 열었다.

이쪽은 지금보다 좀 더 귀찮을 거야.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거면 시작도 안 했지. 카이 님~! 나와 주세요!

그러면서 뒤로 물러나는 순간, 허공에서 인영 하나가 뚝 떨어져 내렸다.

장신에 호리호리하며, 뱀같이 생긴 인상의 남자였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

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번에 본 적 있던 남자였다. 그때는 예쁘게 생긴 다른 여성을 에스코트하고 있었더랬지.

오랜만입니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 안에 담긴 것은 두려움과 공포였다. 가진 힘은 상당한 것 같은데 저리 무서워하다니. 더욱더 의아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만큼 당신은 두려운 존재니까요. 하지만 언제까지 피하기만 할 수도 없단 걸 깨달았습니다. 아직 인력이 부족해서 저라도 와야 하더군요.”

남자는 현우를 똑바로 보며 말을 이었다.

날 알아?

이런 순간에도 당신은 절 알아보지 못하시는군요.”

남자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제 이름은 카이.”

이름을 다시 들어도 모르겠다. 그런 현우에게 도움의 말을 건넨 건 두눈이었다.

현우, 쟤 두 번째 바이크.”

?

바이크.”

아니, 그건 알아들었는데.”

그러니까 저 앞의 훤칠한 청년이 두 번째 바이크였던 징징이라고따로 이름이 있었어아니, 그 전에 말을 할 수가 있었다고?

현우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어, 그러니까 징징이?

제 이름은 카이입니다.”

카이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물러나 있던 애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카이 님, 아는 사람입니까?

오만하게 인간 따위에겐 관심도 없다던 마계의 주민이 갑자기 수줍은 신부처럼 몸을 사리니 이상했다.

그래.”

그래도 죽일 순 있지요?

애쉬가 되묻자 카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미쳤냐?

?

저 사람을 어떻게 죽여.”

카이가 여기 온 목적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보고자 한 것이었다. 그가 아는 현우라면 자신들이 벌이려는 계획을 중간에 방해할 수도 있으니까.

뉴욕에 포털을 열긴 했지만, 그들의 목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더 원대한 목표가 있기에, 몇몇 위험한 각성자들에게는 실력자를 붙여 그 자리에 묶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여기가 가장 위험한 자리였다.

76.

카이는 애쉬를 상대하는 걸 그만두고 손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바닥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히드라 종족의 주특기로 일정 지역을 늪지대로 만드는 기술이었다. 바닥을 딛지 못하게 하고, 특유의 끈질긴 재생력으로 상대를 농락해 왔다.

이 능력이 처음 깨진 게 저 괴물을 상대할 때였지.

그때 카이는 처음으로 처절한 패배감을 맛보았다.

괜찮아.

현우를 이기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시간만 끌면 된다. 그러니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이는 스스로 마음을 다지며 인간의 모습을 벗어던졌다.

고오오오!

머리가 아홉 달린 괴물 히드라가 울부짖었다.

와우.”

가준이 휘파람을 불었다. 바닥이 늪같이 변했지만, 곤란해하는 이는 없었다. 선우는 특유의 능력으로 바닥을 얼렸으며, 도진은 현우를 끌어안은 채 그림자를 밟고 섰다.

외려 곤란한 쪽은 몬스터들이었다. 날지 못하는 일부 몬스터들이 그대로 늪에 끌려가듯 가라앉으며 울부짖었으나, 카이는 그를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건 나만 불리하잖아?

기울어져 가는 가로등 끝에 선 가준이 투덜거렸지만, 그게 다였다. 그도 이런 상황을 대비할 만한 능력은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늪과 같이 가라앉으려는 존까지 낚아채서 구해 준 상태였다.

문제는 바로 앞의 몬스터가 만만치 않다는 건데. 그도 금방 해결되었다.

내가 할게. 괜찮지?

두눈은 앞으로 나서며 현우에게 동의를 구했다. 그리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다.

목이 길어지며, 기둥 같은 다리가 뻗어 나왔다. 활짝 펼친 날개는 몸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해 순간 일대를 어둡게 만들었다.

거대한 드래곤이 기지개를 켜자, 까만 비늘이 반짝 빛났다. 덩치만 봐서는 히드라보다 드래곤 쪽이 좀 더 컸다.

그래, 한 번쯤은 너를 이겨 보고 싶었지.”

카이는 크게 소리치며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원래 늪지대에 사는 몬스터답게 움직임이 자연스럽다. 반면 두눈은 거치적거린다는 듯 발을 흔들고 있었다. 처음부터 날아올랐어야 했는데, 미처 그걸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뭐, 상관없어.”

두눈이 씨익 웃으며 돌진하는 카이에게 맞섰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커다란 울음과 함께 거대한 몸이 격렬하게 엮여 들어갔다. 날카로운 이로 물어뜯고, 단단한 꼬리로 내려친다. 그때마다 굉음과 함께 피가 튀어 올랐다.

비현실적이군.”

마치 과거 유행하던 거대 괴수 시리즈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저거 괜찮은 거야?

거대한 몸 두 개가 서로 맞부딪치니 근처 건물도 같이 파괴되고 있다. 철저히 교육받은 적이 있는 두눈은 그래도 좀 조심하는 모양이었지만, 카이는 인정사정없었다.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선우가 그리 말하며 시선을 멀찍이 떨어진 애쉬에게로 옮겼다. 그도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어.”

당신은 피닉스 길드가 아닙니까길드 차원에서의 배신입니까?

그걸 내 입으로 말할 순 없지.”

그럼 입을 열게 만들어야겠군요.”

꽝꽝 얼어 버린 늪지대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인 선우가 곧바로 애쉬에게 접근했다.

좋지. 나도 너와 싸워 보고 싶었다고!

애쉬는 양손을 들어 올리며 웃었다. 이어 보이지 않는 압력이 선우의 몸을 짓눌렀다.

중력계 특성!

몸을 일으켜 세우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빠르게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본 사람들 중에 중력을 가장 잘 다루는 것 같았다. 기이할 정도의 강함이었다.

강하군.”

강해야지그걸 위해 희생한 게 얼만데!

애쉬가 피식 웃으며 다음 공격을 위해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선우는 딱히 긴장하지 않았다. 강하긴 하지만 상대하지 못할 강함은 아니었다. 게다가 이쪽은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어느새 뒤로 돌아간 가준이 독으로 물든 손을 뻗어 애쉬의 등을 눌렀다. 간발의 차로 피해 내긴 했지만, 그로 인해 생긴 틈을 선우가 파고들었다. 얼음 송곳이 회전하며 애쉬의 주변을 에워싸고, 어느새 생겨난 그림자가 그의 발을 묶었다.

와, 치사하게!

원래 악당을 상대할 때는 정의롭게 다굴 치는 거야!

가준이 이죽거리며 필사적으로 얼음 송곳을 막아 내는 애쉬의 팔을 잡았다. 일단 살갗이 닿으면 독에 중독되는 건 금방이다.

비열하다!

애쉬는 화가 난 사람처럼 머리를 흔들더니, 고개를 들었다. 잠깐 사이에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도 숨겨 둔 수 정도는 있었다.

갑자기 애쉬를 붙잡아 둔 그림자에 강한 압박이 느껴졌다. 그의 몸이 점점 부풀더니 두 배도 넘게 커지며 피부가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어 반들거리던 이마가 갈라지며 그 틈 사이로 뿔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얘도 인간이 아니었나 본데?

뒤로 물러난 가준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심각한 문제로군요.”

몬스터들이 카이나 애쉬처럼 형태를 바꿀 수 있다면, 도심에 몰래 숨어드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위험한 소식이었다.

일단 잡고 보자.”

그러는 게 낫겠습니다.”

선우와 가준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다 죽여 주마!

그건 제가 할 소립니다.”

선우는 다시 애쉬와 격돌하였고, 가준은 틈을 엿보기 시작했다.

돕지 않아도 돼요?

그 상황을 지켜보던 현우가 도진에게 물었다.

둘이면 충분히 이길 것 같은데.”

정확한 예측이었다.

그래도 셋이면 더 빨리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겠지.”

그럼 가세요.”

널 두고?

도진의 말에 현우는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사실 알잖아요.”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모르긴요. 내가 약하지만은 않다는 걸 알잖아요.”

현우는 그냥 대놓고 말했다.

숨기고 싶던 거 아니었어?

반쯤은 그랬죠.”

그래야 편하게 게으름 부리며 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걸 어쩌겠는가.

그럼 더 숨겨. 도와줄게.”

나한테 왜 이리 잘해 줘요?

그 말에 도진이 눈을 접으며 웃어 보였다.

왜일까?

내내 얌전하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맞춰 봐.”

도진은 그대로 고개를 숙여 현우의 뺨에 입을 맞췄다.

이건 힌트.”

그런 다음 곧바로 앞으로 나서 애쉬와 싸우는 이들과 합류했다. 뒤에 남아 있던 현우는 뺨에 손을 대 보았다. 순식간에 열이 오른 뺨은 뜨끈뜨끈했다.

뜨거워.”

기분이 이상하다. 이런 감정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현우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도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아, 준비 끝!

티아매트는 거대한 마법진 앞에 서서 이마를 훔쳤다. 땀은 나지도 않았지만, 요근래 보고 배워 온 사람의 행동을 흉내 내 보았다. 하지만 표정이 적절하지 않아 어색하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 다음은!

티아매트는 명랑하게 웃으며 뒤돌아보았다가 손으로 자신이 이마를 탁 쳤다.

맞다. 도와줄 사람이 없네.”

티아매트가 이 공간에 들어서며 전부 죽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그중에는 아군도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사람은 그 정도의 가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혼자 해야겠다.”

다시 앞을 바라본 티아매트의 앞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포털의 소환을 위한 제물이 존재했다.

정말 재밌다니까.”

자신을 여기 불러낸 존재는 마족, 그리고 지금 불러낼 존재도 마족이다. 소환에 성공만 하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고위 마족이 둘이 되는 것이다. 티아매트까지 포함한다면 셋이고.

딱히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마족의 꿈이라니. 뻔하지, 뭐. 강자가 되어 약자를 짓누르거나, 세계 정복을 한다거나, 피에 젖고 싶다든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마족들을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지.

뭐 하러?

진짜 의외의 답에 티아매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글쎄. 그저 하고 싶어서. 그런 이유는 안 되나?

이상한 녀석이다. 티아매트는 그렇게 생각했다.

마계는 메마른 나무와도 같지. 솔직히 생명체가 살 만한 환경은 아니야. 그렇기에 지구가 탐나.

그는 그렇게 말했다.

진짜 별난 녀석이지.”

모든 준비를 마친 티아매트는 마법진에 마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태어날 때부터 어마어마한 마력을 품고 태어나는 드래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력이 스며든 마법진이 빛나며 허공에 작은 점이 생겨났다. 그 점은 회오리치며 점점 커져 갔고, 마침내 거대한 공동을 가득 메웠다.

자, 그럼 넘어오라고.”

티아매트는 포털에 대고 속삭였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포털의 중앙에서 하얀색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오래도 걸리네.

투덜거리면서도 마력을 퍼부었다. 그 노력 덕분인지 몸은 느리지만 꾸준히 포털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누구길래 이리 오래 걸려?

미치지만 않았다면 티아매트도 서열이 더 높았을 것이다. 그런 그녀이기에 은근히 자신의 위에 있는 다른 마족을 우습게 보는 마음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존재감을 가진 마족이 누구인가, 궁금증이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마족이 머리를 밖으로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티아매트는 일이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설마.”

빠르게 마법진의 마력을 끊었지만 포털은 금방 닫히지 않았다. 여는 데 걸린 시간만큼 느리게 닫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에도 마족의 몸은 꾸준히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안 돼!

부르려던 마족이 아니었다.

티아매트는 황급히 본체로 돌아와 브레스를 내뿜을 준비를 하였다. 이렇게 된 이상 포털을 파괴하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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