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0~67화 (8/16)

60.

그럼 나는 이만 가 본다.”

벌써요?

어차피 돌아가는 걸 보니 당장 손댈 일도 아닌 것 같고, 다른 지역이나 도와주러 가야지.”

S급 각성자 하나가 뛰어다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비열한 짓도 마다치 않지만, 한편으로는 정의로운 면도 있다. 그렇기에 혜선이 자신의 길드원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리라.

그럼 나도.”

가준도 손을 들고 물러섰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달라붙어서 몬스터에 대한 지분이라도 주장하고 싶었지만, 통하지 않겠지.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저 두눈박이란 녀석도 점박이나 케로처럼 현우의 힘이 될 것이다. 뭐, 두눈박이가 마음을 바꿔 먹고 인간을 공격할 수도 있겠지만, 현우가 곁에 있으니까. 가준은 현우의 힘을 알고 있었다.

괴물 곁에는 괴물만 모여드는가.

끔찍하다. 가준은 혜선을 따라 바깥으로 몸을 움직였다. 좀 더 걸어 나가면 멀쩡한 차가 있을 테고, 그를 잡아타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같이 가도록 하죠.”

자윤도 그들에게 합류했다.

남은 이는 선우와 도진, 현우, 찬영. 그리고 외국인 세 명뿐이었다. 몬스터가 사라지자 멀리 서 있던 사람들이 서서히 접근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저희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낫겠군요.”

도진이 그리 말하며 현우를 감싸 안았다.

일단, 형은 나랑 움직이자.”

선우라고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다른 길드장들처럼 움직여야 했는데, 형을 놔두고 가기엔 너무 불안했다. 지금 당장은 가만히 있지만, 몬스터가 변심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 저도 같이 움직이겠습니다.”

선우는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두눈박이의 힘을 확실하게 느꼈으므로. 여차하면 하나보다는 둘이 나을 것이란 판단에서였다.

나도 따라가도 됩니까?

이반이 은근슬쩍 붙으려 했다.

대가 없이 말입니까?

보아하니 전국이 난리인 것 같은데 힘을 보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반이 귓가의 통역 기기를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통역 외에 통신의 기능도 있으니 여러 가지를 전해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됩니까?

안 될 건 뭡니까러시아는 한국의 친구죠.”

뻔뻔스럽다. 하지만 같이 가면 도움이 되리란 건 확실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레온도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둘이 합류하자 준이치도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물러날 것도 같았지만, 그보다는 두눈박이가 더 궁금한 모양이었다.

좋습니다.”

선우는 그들의 도움을 거절하지 않았다.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하는 게 맞았으니까.

그럼 일단 옷부터 입혀야겠는데.”

현우가 두눈박이를 보며 말했다.

옷은 못 만들어?

아직.”

그렇구나. 그럼 이거 입어.”

재킷을 벗어 주었으나 턱없이 작다. 키만 2미터가 넘어 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더 못 줄이나?

무리.”

이번에는 도진이 나서서 재킷을 벗어 주었다. 그의 옷은 덩치가 있어서인지 생각보다 잘 맞았다. 문제는 하의였는데. 그건 일단 굴러다니는 찢어진 커튼을 묶어서 가려 주었다.

이상한 모습이네.”

옷은 따로 가져오라고 할게.”

그전까지만 이런 모습으로 버티면 될 듯했다. 찬영이 다른 길드원에게 연락을 넣고, 남은 이들은 조금 걸어 차를 타고 이동했다.

차에 탄 채로 방송을 틀자 대국민방송이 흘러나왔다. 어느 채널이나 마찬가지로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재 전국적으로 게이트형 포털이 동시다발적으로 열렸습니다. 시민 여러분은 집에서 나가지 마시고 문단속을 단단히 해 주십시오. 밖에 계시는 분은 가까운 대피소로 대피해 주시길 바랍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그래도 도심에서 터진 게이트는 낫다. 길드가 도심에 몰려 있어 출동이 빠른 편이었으니까. 문제가 되는 곳은 외진 곳에 있는 지역이었다. 그런 곳은 길드와도 거리가 멀었고, 대기하고 있는 각성자가 없는 곳도 흔했다.

정부에서 헬기를 지원한답니다.”

정부에서도 발 빠르게 나서고 있었지만, 각성자들로서는 선뜻 나서기도 어려웠다. 비행형 몬스터라도 만나면 헬기에서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으니까. 헬기로 이동하려면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각성자를 반드시 태워야 했다.

긴 밤이 되겠군요.”

그 말대로였다. 그날 밤은 여기저기서 터진 게이트형 포털 때문에 모두 잠들지 못했다. 간신히 급한 게이트를 정리했을 때는 이미 하루가 꼬박 지나간 상태였다.

와나, 씨발!

이동하던 중간에 한 번 마주친 혜선은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아무리 각성자가 체력이 튼튼한 편이라고 해도 한계는 존재한다. 그런데 하루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내내 싸웠으니 지치는 것도 당연했다. 문제는 그래도 아직 끝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한국은 처음 포털이 열린 곳이라서 그런지, 좁은 땅에 비해 각성자들의 수가 많고 강하다. 그들이 전부 나서서 간신히 사태가 더 악화되는 건 막았으나, 아직도 깊은 산속에서는 풀려난 몬스터가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 모든 걸 해결할 때까지는 쪽잠을 자면서 뛰는 수밖에 없었다.

듣자 하니 외국에서는 이런 일이 없는 모양입니다.”

왜 한국만 이 지랄이냐!

그러게 말입니다. 그 때문에 외국에서는 관심이 많은 모양입니다만.”

자기네들도 같은 일 생길까 봐 지레 겁먹은 거지.”

혜선과 가준이 주거니 받거니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는 이미 선우도 아는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과의 이야기가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런 소문도 있습니다.”

그 사이에 자윤이 불쑥 끼어들었다.

뭡니까?

이번 포털이 자연발생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단 이야깁니다.”

요람 길드는 유독 정보에 밝았다. 그 말에 길드장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목격자가 몇 있습니다. 포털이 열린 자리에서 이상한 짓을 하는 사람을 봤다더군요.”

이 와중에 정보도 찾아봤어대단하네.”

혜선이 감탄사를 내뱉자, 자윤이 당연하다는 듯이 씩 웃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포털 열리는 기준을 아직도 명확히 정의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이번 일은 좀 그렇잖아요?

그렇지. 그런데 지선우 씨. 같이 다니던 외국인 3인은 어디 갔어?

근처 게이트로 보내 놨습니다.”

와우, 찰싹 달라붙어 다니지 않았어?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적당히 달래서 근처 게이트로 나눠 보냈다. 이 정도 힘을 가진 S급 각성자가 몰려다니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낭비다.

그럼 그 몬스터는?

그러자 내내 평온하던 선우의 표정에 금이 갔다. 두눈박이라고 불리던 몬스터는 어느새 형에게 두눈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 모양인데 두눈박이는 좀 그렇잖아?

그게 이유였다.

두눈 좋다.”

좋긴 뭐가 좋단 말인가. 선우는 두눈을 볼 때마다 속이 들끓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변한 뒤 내내 현우에게 붙어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우!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말이다. 몬스터 주제에. 선우의 입가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지금도 두눈은 현우와 함께 있다. 도진이 곁에 있긴 하지만 안심할 수 없었기에 오래 이야기할 틈이 없었다.

어어, 그래. 우리 힘내자!

혜선의 파이팅을 마지막으로 그들과 헤어진 선우는 가까이 설치된 막사로 돌아갔다. 그 안에는 현우가 도진의 허벅지를 베고 늘어져 있었다. 그리고 배 위에는 점박이가 찰싹 붙어 있었다.

케로는 괜찮은데 점박이는 새로 나타난 몬스터가 두려운지 유독 현우에게 더 붙어 다녔다.

어, 왔어?

응.”

다음은 어디래?

강원도 횡성.”

또 헬기?

응. 곧 보낸대.”

그럼 너도 조금 쉬어.”

현우는 일어나며 선우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는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 위에 눕혀 주려 하였다. 그 모습에 도진은 자연스럽게 옆으로 빠졌다. 선우도 도진의 허벅지를 베고 잘 생각은 없었다.

이거 맛있어!

그때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몬스터 두눈이었다. 그는 손에 커다란 과자 봉지를 들고 있었는데, 기름 범벅이 된 손으로 열심히 먹어 치우고 있었다.

보면 묘하게 순수해 보이는 구석이 있다. 그래도 마음에는 안 들었지만. 선우는 현우의 허벅지를 베고 잠시 눈을 감았다.

이마를 쓸어 주는 손에 기분이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생일을 제대로 못 치렀네.”

괜찮아.”

난 괜찮지 않아. 하필이면 이때 포털이 열려서.”

현우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형과 같이 있으면 그걸로 만족해.”

그래도.”

아니면 이번 일이 끝나면 다시 할까?

그것도 괜찮지.”

일단 자자.”

현우는 선우의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61.

오랜 시간을 자지는 못했다. 아직도 전국적으로는 도움을 요청하는 지역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선우는 눈을 뜨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과 몬스터들은 졸고 있었고, 깨어 있는 이는 도진뿐이었다.

슬슬 깨우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더 재우고 싶은데, 여건이 따라 주질 않는다. 선우는 앉아서 졸고 있는 현우의 어깨를 흔들었다.

형, 이제 일어나야 해.”

일어났어. 일어났어. 그런데 넌 좀 잤어?

현우가 하품을 하며 선우에게 물었다.

응, 잘 잤어.”

더 자야 하는데.”

아쉬운 듯 말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란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헬기가 도착했습니다!

밖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고 선우와 현우, 도진은 밖으로 나갔다. 가장 먼저 현우가 헬기에 올라타고 몬스터와 선우가 올라타자, 뒤늦게까지 남아 있던 도진이 말했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같이 안 가요?

네, 당분간은 떨어져서 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도진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 못 할 상황은 아니었다. S급 각성자는 대부분 몬스터보다 강하다. 그런 이들이 여럿 붙어 있는 것보다는 각자 떨어져서 다니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럼 나중에 다시 만나죠.”

이어 도진은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다가 말을 꺼냈다.

다음에 만날 땐 형이라 불러 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헬기의 문이 닫혔다.

어. 어?

나중에야 말의 의미를 이해한 현우의 표정이 멍해졌다.

형은 무슨 형.”

선우가 기분 나쁘다는 듯이 투덜거렸지만, 그 말이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헬기는 허공에 떴고, 강원도 횡성을 향해 날아갔다.

상황이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횡성 읍장이 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도심을 우선으로 각성자를 파견한 탓에 횡성은 엉망이 되어 있었다. 황급히 대피시켜 인명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방치된 시간만큼 몬스터가 흩어졌다. 원래 이 지역에 살던 각성자들이 샅샅이 수색하고 있긴 했지만, 원래 수가 적은 데다 팀을 이루어야 했기에 효율적이지 못했다.

그럼 우리도 흩어져야겠네.”

횡성읍 근처의 지도를 보던 현우가 말했다.

안 돼.”

곧바로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으나, 현우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상황에 S급 각성자가 자신과 붙어 다니는 것은 낭비였다. 그렇기에 처음으로 선우의 보호를 거절했다.

케로랑 점박이, 그리도 얘가 있으니까 괜찮아.”

현우는 두눈을 가리켜 보였다.

아직 안정성을 입증하지 못했어.”

괜찮다니까. 얘는 나를 해치지 못해.”

왜냐하면 현우가 더 강하기 때문이었다. 현우가 눈짓을 하자 과자 봉지를 끌어안고 있던 두눈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즈가 맞는 옷을 구해다 입혀 놓았더니 겉보기에는 멀쩡한 미청년처럼 보인다. 과자에 집착하는 면이 다소 애 같긴 했지만.

그걸 어떻게 장담해.”

지금까지 얌전했잖아.”

그렇게까지 말해도 선우는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현우도 한 고집을 하는지라, 결국은 싸움까지 번졌다. 읍장이 물러난 자리, 둘 사이로 찬바람이 감돌았다.

왜 말을 안 듣는데!

위험하니까.”

점박이랑 케로가 있다고 했잖아그리고 다른 사람이 이러는 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다른 사람의 생각은 중요치 않아.”

중요해!

선우는 지금까지 현우와 떨어져 지냈다. 그 때문에 생기는 불안감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도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아무리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는 현우라도 현재의 심각성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일손이 부족하다. 여기서는 흩어지는 게 맞는데, 문제는 동생이 현우를 놔주기 싫어하고 있었다.

흩어져!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안 돼.”

돼.”

둘은 고집스럽게 서로를 노려보았다.

형.”

선우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형이 걱정돼. 이러다 형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원망하게 될 거야.”

애처롭게 말해 오는 동생을 바라보니, 마음이 흔들려 왔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 현우는 훌륭한 전력이다. 그런 그가 같이 다니는 것이 오히려 선우의 평판에는 나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럴 일은 없어.”

또 드래곤 같은 존재가 나타나면 어떡해.”

두눈이 있잖아.”

더 강한 존재가 나타나면.”

선우야. 그럴 일 없는 거 알잖아.”

현우는 손을 뻗어 선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무사히 돌아올 거니까. 보내 줘.”

현우는 끈질기게 선우를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답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무전기 꼭 챙기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야 해. 마음 같아서는 다른 사람이라도 붙여 주고 싶은데.”

선우는 끝까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멀어지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너무 과보호가 심하다니까.”

현우는 투덜거리며 안내인 한 명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D급 각성자라는 그녀는 텔레파시 사용이 가능한 이로, 전투에는 재능이 없다 하였다. 하지만 특유의 능력을 사용하여 몬스터가 지나간 흔적은 귀신같이 찾는 사람이었다.

점박이랑 케로를 실물로 보다니 감격이네요!

더불어 점박이와 케로의 골수팬이기도 했다. 그녀는 내내 점박이와 케로를 힐끔힐끔 바라보며 깊은 산속으로 현우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일련의 몬스터 무리가 지나갔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로가 몸을 키워 나갔다. 커다래진 몸이 킁킁거리며 흔적을 따라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 맞다. 생각해 보니 케로는 개였군요!

수진은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정확히는 케로베로스가 종 이름이었지만, 겉보기엔 개랑 비슷하게 생겼으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케로는 그대로 몬스터 무리를 따라잡았고, 붉은 황소를 닮은 몬스터들을 전부 구워 버렸다.

점박이가 나서기도 전의 일이었다. 이어 흔적을 찾는 일은 수진에게서 케로에게로 넘어갔다.

너무 편하니까 어쩐지 다른 동료들에게 미안해지네요.”

수진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산길을 걷느라 본인도 고생하는데 남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니 참으로 선량한 사람인 것 같았다. 현우는 씩 웃고는 소소한 이야기를 해 가며 함께 움직였다.

그러기를 반나절쯤. 제법 깊은 어느 산속에서 현우는 익숙한 얼굴을 만났다.

어라?

당신이 왜 여기 있어현우는 눈을 깜박이며 바로 앞에 선 남자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그 사람이 맞았다. 미국 가디언 길드의 레온.

안녕하십니까?

먼저 인사를 해 온 건 레온이었다.

아직 미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나요?

네, 아직입니다. 동맹국이 피해를 입는 걸 외면할 수가 없어서요.”

말하는 것만 보면 정의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바로 옆에 서 있는 수진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슬며시 현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귓가에 속삭였다.

갑자기 텔레파시가 전해지지 않아요.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런가요?

네, 게다가 이 근방은 미리 경로가 겹치지 않도록 각성자들끼리 이야기를 끝내 놓은 상태예요. 타국의 각성자가 여기 있는 건 이상해요.”

현우는 수진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고개를 바로 세웠다. 텔레파시가 전해지지 않는 원인을 그는 알고 있었다. 레온을 만난 순간부터 텔레파시를 차단하는 기운이 산을 덮어 나가기 시작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둘이 귓속말을 하는 도중에도 레온은 웃는 낯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공격하려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현우는 일단 그냥 넘어가 보기로 하였다.

그럼 저희는 저쪽으로 가 보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동하려고 하니 레온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저쪽은 제가 해결하고 왔습니다. 그보다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저는 딱히 할 이야기가 없는데요.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선현 길드를 통해서 전해 주십시오.”

저도 그러고 싶지만, 그러면 중간에 가로막히지 않습니까?

이건 할 말이 없다. 선우라면 그러고도 남을 테니까. 현우가 잠시 입을 다물자 레온이 말을 이었다.

당신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러고는 수진에게로 손가락을 까닥 움직였다. 이어 그녀가 눈을 감으며 그 자리에서 스르르 쓰러졌다. 수작을 막을 수도 있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고 그녀가 잠드는 게 자신에게도 유리하기에 방치했다.

크르르릉.”

케로베로스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이어 점박이도 불쾌한 듯 고개를 흔들며 날개를 파닥였다.

목숨에 지장은 없습니다. 그냥 잠시 기절시킨 것뿐이니까요.”

현우는 좀 더 편안한 태도로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목적이 뭡니까?

별것 아닙니다.”

레온이 한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랑 손을 잡지 않으시겠습니까?

뭘 하는 줄 알고요?

당신에게도 나쁜 제의는 아닐 겁니다. 현우 씨. 저는 세계 평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그 일에 당신이 필요합니다.”

그런 것 치고 하는 짓은 악당 같은데요?

그 말에 레온이 처음으로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때로는 정의를 위해서 굽혀야 하는 것도 있지요.”

그게 다른 각성자를 기절시키는 일이고요?

그녀에게는 충분히 보상하겠습니다.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어디 말해 보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자, 레온이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에 한국에서 일어난 일로 미국도 포털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알게 되었죠. 인위적으로 포털을 여는 자가 있음을 말입니다.”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죠?

아직 그에 대해는 아는 게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막아서야 한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희는 인재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그 첫 번째로 현우 씨를 영입하고자 합니다.”

저는 평범한 테이머인데요?

그럴 리가요. 점박이, 케로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위대한 존재를 손에 넣지 않았습니까?

두눈박이. 레온이 접근한 건 두눈박이 때문이었다.

62.

레온의 목적을 알게 되니 마음이 편해졌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나타난 것 같긴 하지만, 애초에 자신을 이길 수 있는 자라는 생각은 안 들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만난 이 중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이는 없었다.

인간이 아닌 마족까지 가면 자신만 한 강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들은 이곳으로 넘어오질 못하니 예외다.

거절합니다.”

그렇기에 태연하게 거절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권력과 부를 가질 수 있는데도요?

딱히 필요 없어서요.”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들려오는 것이라고는 두눈이 과자를 와삭대는 소리뿐이었다. 당연히 진지한 분위기가 될 리 없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두눈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조용히 먹어!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눈의 눈이 길게 찢어지며 부들부들 떨려 왔다. 그러나 그는 현우에게 대드는 대신 과자를 더 먹는 걸 택했다. 이번에는 오물대는 소리가 나지 않는다.

뭐, 좋습니다. 싫다는 사람을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레온은 생각보다 순순히 물러났다. 대체 여기엔 왜 나타났는가 싶을 정도였다. 현우는 수진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며 계속 주변을 경계했지만, 딱히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한 사람.

싸우게 될 줄 알았는데. 현우는 입맛을 다시며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멀어져 작아진 현우를 보며 레온은 물었다.

어때?

잘 모르겠습니다.”

소리는 허공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만나기만 하면 알아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제가 아는 그와 너무 달라서요. 그라면 지금쯤 주먹을 쥐고 덤벼들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는 테이머가 아닙니다.”

흐음.”

레온은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한번 쫓아가서 감시해 볼까요?

아니, 됐다.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이건 아니건 어차피 언젠가는 만나게 될 테니까.”

레온은 그대로 등을 돌려 걸어갔다.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그를 위해 미리 준비된 헬기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다음은 그 일이군요.”

그래, 슬슬 세계 각성자 연합이 필요할 때가 되었지.”

지금까지는 각국의 이익 때문에 제대로 뭉치지 못했으니까요. 그런데 너무 뭉쳐도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다. 설사 세계 각성자 연합이 생긴다고 해도, 각자 속내가 있을 테니.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일은 없을 거야.”

그렇군요. 인간들이란 언제나 어리석습니다.”

그러니 인간이겠지.”

레온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

시간이 어느 정도 소요되자, 게이트형 포털에서 튀어나온 몬스터들도 거진 정리되었다. 사람이 드문 곳에 숨어든 몬스터들은 아직 처리하지 못했지만, 그도 열심히 찾고 있으니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대비하지 않고 있던 재난이기에 인명과 재산 피해가 제법 컸다. 각지에서 수습하기 위해 애쓰고 있긴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다른 나라는 한국을 주시하게 되었다. 갑자기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게이트형 포털이 자신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한국은 국토가 작고 그에 비해 각성자가 많기에 어떻게든 해결되었지만, 같은 일이 미국에서 일어난다면?

분명히 수습이 어려울 것이다. 그 때문에 지원을 대가로 한국에 조사원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조금이라도 아는 것이 늘어난다면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일을 막아 낼 수 있을 테니까.

더불어 새로운 조짐도 보이고 있었다.

세계 각성자 연합.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각성자를 유출하지 않으려던 움직임을 멈추고, 세계적으로 연합을 구축하자는 의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 주축은 미국의 가디언 길드. 그 길드의 길드장 레온에게서 비롯되었다.

지금이야말로 세계 각성자 연합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기자가 물었다.

굳이 세계적인 연합을 만들지 않아도 지금까지 필요에 의해서 모이지 않았습니까그걸 굳이 이름까지 걸고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요. 필요에 의해서 모일 때, 저희가 어땠는지 아십니까자국의 이익을 위해 정보를 감추고 서로의 힘을 가늠하려고 애썼습니다. 이기적이었단 소리지요.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해서는 세계의 평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과감하게 말하고자 합니다. 세계 각성자 연합은 필요합니다.”

레온은 말했다. 상대적으로 각성자가 적은 나라를 지원하며, 서로 정보를 공유한다. 이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마음을 넓게 가지고 뭉치자.

처음에 사람들은 생각했다. 아무리 강대국인 미국이 추진하는 일이라도 원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는 없을 거라고. 그러나 한국, 러시아, 일본, 영국 등 다른 나라들이 합류를 약속하면서 상상은 현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다들 감춰진 속내가 있겠지만, 표면적으로는 일이 잘 굴러가는 듯했다.

*

으아, 집이다아!

현우는 만세를 부르며 집에 들어섰다. 미친 듯이 돌아다닌 결과, 현우는 자신의 앞으로 배당된 일을 모두 해내었다. 여기까지 며칠이 걸렸는지 모른다. 마지막에는 무리하게 움직인 탓에 수진이 반쯤 시체 같은 몰골이 되었지만, 이제 쉬면 되니 괜찮을 것이다.

아직 선우와 도진이 돌아오지 않은 집은 썰렁하다. 듣기로는 새벽쯤에 돌아올 거라고 했으니까, 아직 시간은 있다. 현우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몬스터들을 밀어 넣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곁에는 마찬가지로 조금 더 일찍 들어온 찬영이 붙어 있었다.

너무 늦었나.”

헐레벌떡 가까운 제과점에 들렀으나, 이미 문을 닫았다.

가까운 호텔을 수배해 볼까요.”

그 사람들도 쉴 시간 아니에요?

그건 그렇습니다만, 돈이면 다 해결되지요.”

찬영이 속물적인 소리를 하는 사이, 현우의 눈에 가까운 편의점이 들어왔다.

저기 한번 가 볼까요?

편의점에서 조각 케이크를 팔던 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맞아떨어졌다. 냉장 코너에는 조각 케이크 두 조각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이 여럿인데 두 조각은 좀 부족하겠지.

현우는 케이크를 계산한 뒤, 다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렇게 여러 군데의 편의점을 돌길 몇 시간. 마침내 케이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조각 케이크 모음이라 크기가 제각각이긴 했지만, 들쑥날쑥해도 일단은 원형이니까!

초도 어찌어찌 구하고 나니 제법 케이크다워졌다.

선물은 준비하신 겁니까?

원래 파티장에서 주려던 게 있어요.”

그때 두눈이 등장하는 바람에 주지 못했는데, 그걸 이제 주면 될 것 같았다. 생일 선물까지 꺼냈으나, 어딘가 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제 방에 크리스마스 전구가 있습니다.”

그게 왜 길드 내 방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조금은 분위기가 화사해졌다. 그리고 그쯤에서 찬영은 빠졌다. 비록 일을 마치고 길드로 돌아왔지만, 아직 해야 하는 서류가 많이 남아 있는 탓이었다.

그리고 길드장님은 가족과 파티를 하고 싶을 것 같으니까.

나름 배려를 해 준 것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현우는 두근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케이크 앞에 앉아 동생을 기다렸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현관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선우였다.

삐리릭.

문이 열리며 익숙한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어.”

현우는 미리 준비해 둔 축하의 말을 건넸다.

생일 축하해!

그와 동시에 잽싸게 버튼을 눌러 크리스마스 전구를 반짝이게 하였다. 막 입구에 들어서던 선우는 그 모든 걸 보고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이내 활짝 웃으며 안으로 들어서 케이크 앞에 섰다.

잠시만!

초에 불을 붙이고 들어 올리자 선우의 코앞에서 불빛이 일렁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동생의 생일 축하합니다!

박수와 함께 노래가 시작되자 구석에 숨어 있던 점박이와 케로가 튀어나와 빙글빙글 돌았다. 둘 다 어설프게 만든 뾰족한 생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왕, 왕왕!

키르르륵!

다행히 두눈은 이 자리에 없었다. 과자 봉지를 쥐여 주고 다른 데 잠시 박아 두었다. 생일 파티를 시작하기도 전에 케이크를 먹으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선우는 힘차게 촛불을 껐다.

생일 축하해생일이 그렇게 끝나 버려서 이렇게라도 다시 축하해 주고 싶었어.”

고마워.”

선우의 입가에선 웃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두 형이 준비한 거야?

찬영 씨의 도움도 좀 받았고.”

현우가 배시시 웃었다. 사실 사람을 더 초대해서 그럴싸한 파티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다들 너무 바빠서 그냥 소박하게 하기로 했다. 선우도 그걸 더 좋아할 것 같았고.

그리고 이건 선물.”

현우는 선우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도진의 도움을 받아 고른 선물이었다.

하지만 그건 말하면 안 되겠지.

선우가 조심스럽게 포장을 뜯어 보니 그 사이에서 넥타이핀과 그 세트인 커프스가 나왔다. 대단한 아이템이거나 엄청 비싼 명품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우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가슴 벅찬 선물이었다.

형.”

이 모든 것을 준비해 준 사람이 형이었기에.

왕왕!

키르르륵.”

대충 분위기를 읽은 케로와 점박이가 얌전히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럼 케이크를 먹을까어느 것부터 먹을래종류별로 다 있어.”

난 그럼 생크림 케이크.”

그럼 난 초코로 먹어야지.”

현우는 미리 준비해 둔 접시 위에 케이크를 하나씩 올리고 포크를 건넸다. 비록 편의점 케이크이긴 했지만, 둘이 같이 먹어서 그런지 무척 맛있게 느껴졌다.

정말, 정말 고마워. 형.”

선우가 재차 고마움을 표시하자 현우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

그렇다 해도 기대하지 않았던 생일 파티는 즐거웠다.

다시 하기로 한 생일 파티는 건너뛰기로 하자.”

그래도 돼?

응, 난 지금으로도 만족스럽고, 다시 파티를 하느니 그 돈으로 이번에 피해 입은 분들에게 기부하는 게 나을 것 같아.”

현우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쩜, 내 동생 너무 착해!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케로가 케이크를 탐내며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지만, 감동받느라 그도 눈치채지 못했다. 결국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케이크 위로 선명하게 핥은 자국이 지나간 뒤였다.

63.

간만에 평화로운 밤이 지났다. 잠자리에서 일어난 선우는 거실에서 형이 준 선물을 내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형에게 종종 여러 가지를 받긴 했지만, 커서 생일 선물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의미가 컸다.

선우는 조심스럽게 넥타이핀과 커프스 버튼을 쓸어 보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급한 일은 해결했지만, 산적한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회의가 예정되어 있어 참여를 위한 준비를 해야 했다. 그는 옷 방으로 들어가 평소보다 신중한 태도로 정장을 골라 들었다.

넥타이와 셔츠를 고르는 과정은 더 길었다. 직접적으로 액세서리와 닿기 때문에 색의 조화에 신경 써야 했기 때문이다.

의식을 치르듯 셔츠를 걸치고, 넥타이를 맨 뒤 선물 받은 것을 착용했다.

멋지네.

또다시 웃음이 새어 나온다. 생일을 맞아 여러 곳에서 어마어마한 가격대의 선물을 잔뜩 받았지만, 그 무엇도 형이 준 걸 능가하지는 못했다.

여기엔 형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까.

고르는 내내 자신만을 생각했을 것 아닌가. 괜히 마음이 들떴다. 그래도 곧 진지한 자리에 가야 했으니 어떻게든 기분을 가라앉혀 보려 했지만, 딱히 소용은 없었다.

선우는 그런 상태로 회의실에 들어섰다.

길드장님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1팀의 팀장 아인의 말에 레나가 대답했다.

급한 일이 끝나서 어제 쉬셨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

하긴 그동안 바쁘게 돌아다니셨지.”

물론 바쁘게 돌아다닌 건 선우뿐만이 아니었다. 선현 길드 내의 모든 길드원이 잠도 자지 못하고 미친 듯이 움직였다. 그렇기에 어제 반나절 주어진 휴식은 꿀맛 같았다.

자, 그럼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찬영이 나서 외치며 가장 앞에 섰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치운 몬스터의 수와 분포도, 포털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선우를 동경해 선현 길드에 들어와 아무것도 모르던 그가 지금은 어엿한 부길드장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찬영을 동생같이 생각하는 레나는 그를 보고 있자니 괜히 뿌듯해졌다.

그런데.”

뒤에 서 있던 부팀장이 레나의 귓가에 속삭였다.

길드장님 오늘따라 평소와 좀 다르지 않으십니까?

그 말에 선우를 바라보니 확실히 평소와는 좀 달랐다. 그런데 그 다른 것이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긴가민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레나는 오기가 생겨 선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아, 한소리 듣겠네.

찔끔하며 어깨를 움츠리는데, 그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 탓에 슬쩍 내려간 소매 사이로 유독 반짝이는 커프스 버튼이 보였다.

뭔가 대단한 아이템인가 싶어 바라보았으나, 그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이왕 눈이 마주친 거 뭐라도 말해야겠다 싶어서 입을 열었다.

커프스 버튼이 멋지네요.”

그 말에 옆에 앉아 있던 아인이 이마를 찌푸렸다. 진지한 회의 시간에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선우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형이 선물해 준 겁니다. 옷에 딱 어울리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가슴을 앞으로 내미는데 넥타이핀이 눈에 들어온다. 아무리 보아도 커프스 버튼과 세트 같다.

넥타이핀도 잘 어울리네요!

대충 상황을 파악한 레나가 찬사를 퍼부었다. 어쩜 이렇게 고급스럽고 실용적인 선물을 하셨을까요. 역시 현우 님은 보는 눈이 좋으십니다. 그녀의 말이 들려올 때마다 선우의 어깨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그쯤 되니 다른 팀장들도 상황을 파악했다. 여기 모인 팀장들은 하나같이 선우에게 호감을 가지고 들어온 이들이었다. 게다가 대부분 선우가 미성년자일 때부터 함께해 오다 보니 절로 우쭈쭈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상황이었으나, 현우가 귀환하고 나서는 종종 이런 상황이 오곤 했다.

선물 받으셔서 좋았겠네요너무 부럽습니다.”

그러게요. 어떻게 고르셨는지 정말 길드장님과 딱 어울리네요!

선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니 찬영은 자신도 뭔가 말해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다른 이들이 어지간한 말은 다 한지라,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현우 님이 근처 백화점에서 도진 님과 같이 선물을 고르는 걸 봤습니다.”

뒤늦게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흘러나간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었다.

한도진과요?

선우의 어깨가 내려가고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아, 화나셨다.

팀장들이 눈치를 보는 가운데, 선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회의 마저 진행하죠.”

지옥 같은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꼼꼼하게 따지고 되묻는 선우 때문에 팀장들은 하나같이 파김치가 된 상태로 회의실을 나섰다. 그중에서도 특히 상태가 안 좋은 사람은 찬영이었다.

눈치가 있었어야죠.”

레나가 원망하듯 말하자 찬영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그때 그런 말이 튀어 나간 걸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늦었다.

*

우으으.”

잠에서 깨어난 현우는 괴상한 신음을 내며 소파에 다시 누웠다. 부엌에서는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동생이 점심을 차리고 있었다.

이게 진정한 평화지.

이제 다시 게으름을 부릴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는데 선우가 준비하던 걸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뒤에서 현우를 끌어안았다.

형.”

?

오늘따라 왜 이리 어리광이람. 실실 웃으며 대답하는데, 선우가 물었다.

내 선물 누구랑 같이 가서 샀어?

도진과 함께 선물 사러 간 이야기를 누군가에게서 들은 걸까하지만 섭섭해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아, 도진 씨.”

그러고 보니 도진 씨는 새벽에 들어온다더니, 아직 소식이 없다. 하긴 따로 길드가 있으니 바쁘기도 할 것이다.

흐음, 그렇구나.”

선우의 목소리가 기이하게 내려갔다. 그쯤 되자 현우도 선우가 기분이 좋지 않음을 눈치챘다.

?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점심 먹고 갈 데가 있어.”

어딘데?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창고.”

창고거긴 왜 가는데?

선물 확인하러.”

동생이 자기 생일 선물을 확인하는데 굳이 자신이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현우는 얌전히 따라 움직였다.

그들은 서울시 외곽의 어느 산 밑에 위치한 건물에 도착했다. 선우는 창고라고 불렀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외부에는 철책이 둘려 있고 그 주변으로 여러 경비원이 단단하게 무장한 채 개와 함께 경비를 서고 있었으며, 내부 건물도 여러 차례 인증을 하고 나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지하실에는 수많은 아이템이 전시되어 있었다. 선우는 건성건성한 태도로 아이템을 대충 둘러보고는 다시 다른 창고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우는 수많은 몬스터를 만날 수 있었다.

이건 뭐야?

몬스터 연구실인가여기저기 단단한 철창에 수많은 몬스터가 갇혀 있었다.

형 선물.”

?

다른 나라에서 형에게도 선물을 보냈어.”

나한테는 왜 보내는데?

테이머라니까 잘 보이려고 보낸 것 같아.”

곤란하다. 실제로 현우는 테이머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점박이와 케로, 두눈이까지 전부 주먹으로 굴복시킨 것에 불과했다.

?

토실토실한 토끼같이 생긴 분홍색 몬스터가 고개를 기울였다. 미치도록 귀여운 외모였다.

귀엽지?

그, 그렇긴 하지만.”

저런 애를 두들겨 패서 말을 듣게 만들 수는 없지 않은가. 케로도 점박이도 처음 만났을 때는 크고 무시무시한 몬스터였다고만약에 처음부터 저런 귀여운 모습이었으면 때리는 걸 조금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테이밍은 못 할 것 같은데.”

그래?

뜻밖에도 선우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드래곤 정도 되는 존재를 테이밍했으니, 다른 몬스터를 테이밍하는 건 더는 어려울 것 같긴 했어.”

잘은 모르지만 다른 테이머들은 한계에 따라 몬스터를 테이밍할 수 있는 수가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그럼 얘들은 어떡할 거야?

돌려보내야지. 아니면 실험실로 보내거나.”

불쌍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여기 있는 것들은 몬스터다. 작고 귀여운 모습을 가져도 사람을 해칠 수 있는 존재란 말이다. 현우도 그걸 알고 있기에 측은한 마음을 억누르며 발길을 돌렸다.

형.”

앞서가던 선우가 현우를 부르며 뒤돌아섰다.

형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줄 거지?

당연하지!

현우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어떤 일이 생겨도?

물론이야. 우리는 가족인걸.”

그렇게 말하자 그제야 선우가 웃었다.

아마 앞으로는 형을 노리는 사람이 늘어날 거야. 뭐든 해 줄 테니 자기 나라로 오라는 이들도 있겠지.”

두눈이 때문에?

두눈이는 지금 다른 몬스터 철창 앞에 서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을 잡아먹고 싶은 모양이었다.

왕왕!

케로가 그걸 말리려는 듯 짖으며 두눈의 옷을 물어 당겼다. 점박이는 그런 둘과 멀찍이 떨어져서 경계하고 있다. 겉보기에는 촌극 같아 보이지만, 하나같이 힘을 무시할 수 없는 몬스터들이다. 다른 이들이 탐내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 드래곤은 어디서건 탐내는 존재지.”

문득 중간에 나타났던 레온이 떠올랐다.

괜찮아. 내가 다른 데 갈 일은 없으니까.”

현우는 발돋움을 하여 선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러니 불안해하지 마.”

아무래도 계속 기분이 안 좋았던 건 이 때문이었던 모양이다. 오해를 한 현우는 선우를 달랬다.

계속 함께할 테니까.”

한도진이 오라고 해도?

그 말에 현란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현우의 손이 멈췄다.

64.

여기서 도진의 이름이 왜 나오는 걸까현우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도진하고는 친하다. 이 세계로 와서 이렇게 가까이 지낸 사람은 선우를 제외하고는 도진이 유일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동생보다 도진을 선택할 이유는 되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러했다.

왜 그렇게 생각해?

조심스러운 현우의 질문에 선우는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몇 번인가 입을 벙긋거리다 다물었다. 형이 자꾸 도진과 가까이 지내니까. 그러니까 속상하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현우가 다시 손을 움직여 선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까보다 손길이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하다.

우리 선우, 질투했구나?

선우는 대답 없이 형이 쓰다듬기 좋게 고개만 좀 더 숙여 주었다.

그래도 내 최우선은 선우니까.”

불안해하지 말라고 도닥여 주었다. 선우는 그제야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리 유능해도 아직 어리니까, 여러 가지가 불안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납득한 현우는 선우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현우 씨.”

돌아온 집의 문 앞에는 도진이 서 있었다. 그가 웃으며 말했다.

다녀왔습니다.”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는 모습에 절로 눈이 부셨다.

어서 오세요.”

똑같이 웃으며 답하고 나서야 옆에 선우가 서 있음을 깨달았다. 뒤늦게 당황하여 눈치를 보았으나, 선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긴 그냥 인사를 한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넘어가려는데, 도진이 현우의 앞으로 다가오며 재차 입을 열었다.

저번에 드린 말은 기억합니까?

현우의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기억하고 있었다. 도진은 다시 만날 때 자신을 형이라 불러 달라고 하였다. 하지만 도진도 아직 자신을 편하게 부르지 않는데.

기억이야 나지만 도진 씨도 절 편하게 부르진 않잖아요.”

제가 먼저 편하게 부르면 됩니까?

옆에서 하고 싶은 말이 많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선우가 결국 입을 열었다.

편하게 부르긴 뭘 편하게 부릅니까?

그 말에 현우는 선우의 손을 잡으며 달래 주었다. 이제 알게 된 지도 오래됐는데, 그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도진은 선우가 옆에서 계속 방해하는데도 꿋꿋하게 버티고 서서 현우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현우야.”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현우야.”

도진은 재차 현우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 물러날 곳은 없었다. 현우는 선우의 손을 꽉 잡은 채 그를 불렀다.

도진 형.”

도진의 표정이 환해졌다. 어쩐지 그게 보기 좋아서 현우는 잠시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선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

빛이라고는 한 점도 없는 공간, 누군가의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때가 되었지.”

각성자를 신인류라고 믿는 인간, 권력을 쥐고 싶은 인간, 인생을 바꾸고 싶어 하는 인간. 삐뚤어진 생각을 지닌 이들을 모아서 물밑으로 움직여 왔다. 그리고 얼마 전에 노력해 왔던 결과는 빛을 보았다.

마계와 인간 세상을 잇는 인공 포털을 대량으로 열 수 있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한국에 각성자들이 모이는 걸 노려 포털을 열었지만, 커다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일단 제일 신경 써서 끌어들인 드래곤이 금방 제압당했고, 국토가 적고 각성자가 많은 탓에 다른 몬스터들도 금방 제압된 탓이었다.

그래도 인공포털을 대량으로 여는 데 성공하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오늘 하는 실험. 이것만 성공한다면 앞으로 저희의 앞길은 밝을 것입니다.”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처음 목소리와는 다르게 좀 더 높고 여린 목소리였다.

이걸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지. 눈물이 앞을 가리네요.”

여성은 그렇게 말하며 바로 앞에서 점점 커지고 있는 포털을 바라보았다. 포털은 한국에서 선우의 생일 때 열렸던 것보다 더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확장을 멈췄을 때 그 사이로 새빨간 눈동자 하나가 드러났다.

아아, 드디어!

여성은 아코디언을 연주하듯 양팔을 펴고는 한쪽 팔을 접어 가슴에 올렸다.

어서 오십시오. 위대하신 마계의 용, 티아매트 님.”

용으로 태어나 최초로 마족 서열 9위에 오른 자, 미쳐 버린 블랙 드래곤.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박이던 붉은 눈동자는 이내 점점 작아졌고, 거대한 포털에서 걸어 나온 건 알몸의 여성이었다. 그녀는 번쩍이는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다 작게 하품을 하였다.

귀찮네.”

그 말을 했을 뿐인데 강력한 압력이 주변을 짓눌렀다. 환영하던 여성 또한 그 압력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이 자리에서 멀쩡히 서 있는 건 처음 목소리의 주인과 티아매트, 그리고 그녀의 뒤를 따라 나온 남성 하나뿐이었다.

넌 왜 멀쩡해?

티아매트는 어둠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러다 문득 이 어두운 공간에도 창문이 있음을 깨달았다. 창문을 내다보니 밖은 달빛으로 밝은데도 안은 이상하리만치 어둡다. 그건 밤의 어둠이 아닌 바로 앞에 선 인물이 태생적으로 가진 어둠이었다.

아, 아아.”

눈을 깜박이며 감탄사를 내뱉은 티아매트는 이내 그를 알아보았다.

당신이 왜 여기 있어?

필요하니까.”

필요하다고?

티아매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이 뒤에 있던 남자는 앞으로 슬쩍 나서며 그녀의 몸에 까만색 천을 둘러 주었다. 그 천은 꿈틀거리더니 이내 그녀의 몸에 들러붙어 까만색 드레스의 형태로 변하였다.

그래.”

그런데 나는 왜 불렀어?

너도 필요하니까.”

뭘 하려고?

뭘 하려는 것 같아?

티아매트는 볼을 부풀렸다.

넌 언제나 모든 걸 너무 어렵게 말해.”

네가 너무 단순한 거겠지, 티아매트.”

?

내 일을 도와라. 그 대가로 네가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게 해 주마.”

내가 하고 싶은 것?

붉은 눈동자가 데굴 굴러갔다. 가장 원하는 것은 파괴와 다른 생명체를 죽임으로써 얻는 쾌감.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마계에서조차 날뛸 수 없게 되었다. 서열 1위가 된 마족 알베르크가 그런 행동을 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길쭉하고 하얀 손이 어둠 속에서 바들바들 떨렸다.

주, 죽여도 돼부숴도 돼?

물론.”

아아!

하얀 얼굴이 황홀함에 젖어 갔다.

그런데 그 전에, 옆에 그건 뭐지?

아, 내 장난감카이야. 최근에 얻었어. 부숴도 부숴도 원래대로 돌아와.”

히드라로군.”

머리가 9개 달린 끈질긴 생명력을 가진 뱀. 제대로 성체로 자라나면 드래곤과 맞서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맞선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제법 대단한 몬스터란 소리였다.

카이라고 합니다.”

청발의 뱀같이 생긴 남자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일에 방해되진 않겠지?

안 될 거야. 만약에 방해되면 죽이면 돼.”

자신에게 충성하는 이에게 하는 말 치곤 너무하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럼 티아매트, 계약을 하자.”

좋아!

우로보로스에 온 걸 환영한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두 존재는 계약했다.

며칠 뒤, 전 세계에 새로운 단체가 이름을 알렸다.

우로보로스.

꼬리를 문 뱀을 상징으로 내세운 단체. 그 단체는 본인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본인들이 해 온 일들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공개했다.

미친놈들 아냐?

대놓고 신문에 실린 광고를 보던 가준이 혀를 찼다.

정말 돌았네?

최근 여러 문제로 백호 길드와 자주 만나게 된 혜선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러니까 이놈들이 지금까지 강제로 포털을 열어서 테러를 해 온 놈들이란 말이지?

자기네 말로는 위대한 대업이지만요.”

혜선의 말에 가준이 대꾸했다. 여기 실린 대로라면 우로보로스는 최악의 테러 단체다.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벌인 일을 생각하면 여기 소속된 이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지.”

미쳐 돌아가겠지요. 더불어 지금 진행되는 일은 더 빨라지겠지요.”

세계 각성자 연합 말이지.”

네.”

그 말은 맞아떨어졌다. 협회를 세우는 일에 대해 부정적으로 굴던 일부 나라도 완전한 합류 의사를 표명했고, 일은 급류를 탄 듯 더욱더 빠르게 진행되었다.

협회의 뼈대가 세워지고, 살이 덧붙여진다. 거기에 협회장으로 몇몇 인물이 추대되었다. 러시아의 각성자 이반의 아버지 표드로, 그리고 미국의 레온, 바카디가 그 주인공이었다.

바카디면 술 이름 아냐?

아윤의 말에 자윤이 답했다.

피닉스 길드 길드장의 이름이기도 하지.”

미국 내에서는 무려 2위 길드이다. 미국의 규모를 생각하면 무시할 수 없는 자이다.

일이 금방금방 진행되네. 그런데 좀 아쉽다.”

뭐가?

우리나라에서도 한 명 나섰으면 좋았을걸.”

지선우?

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선우는 너무 어리지.”

그래도 강하잖아.”

투덜거리며 입술을 쭉 내밀자, 자윤이 그를 손으로 꼬집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지 않잖아.”

!

비명을 지른 아윤은 오빠의 손을 떼어 냈다.

협회장이 되면 미친 듯이 바빠질 테니까.”

그도 그렇지.”

아윤은 입술을 매만지며 답했다.

65.

상황은 대충 알고 있지만, 역시 아쉽다. 아윤은 기괴한 소리를 내며 사무실 소파에 엎어졌다. 그리고 다음 용건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미국 갈 거야?

미국에서는 세계 각성자 연합의 장을 뽑기 위해 각국의 중요한 각성자들을 초대했다. 비용은 전부 그쪽 부담이다.

역시 스케일이 남다르네.”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지만, 지금 나라를 비우기는 찝찝하다. 막 새로이 일어선 빌런 단체 우로보로스, 그들이 열 수 있다는 인공 포털. 어느 하나 걸리지 않는 점이 없다.

미국에 각성자들이 모이면 또다시 포털 여는 거 아냐?

어디에?

나 같으면 각성자들이 빠져나간 나라에 열겠어. 그 전에 각성자들이 모인 곳에 열었을 때는 잘 안됐으니까. 생각을 바꾸겠지.”

사실 그때 현우가 드래곤을 처리하지 않았으면, 상황은 악화되었을 것이다. 그가 드래곤을 테이밍한 덕분에 상황은 훨씬 나아졌고, 그로 인해 테이머들의 인기도 올라갔다.

실제 테이머들은 한계가 명확하지만.

현우란 사람은 대체 뭘까. 아무리 테이머가 강해도 그런 몬스터를 테이밍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본인도 몬스터들을 죄다 알고 있다고 했지.

미국에서 있었던 일은 아윤의 귀에도 들어왔다.

케로는 처음부터 데리고 있었고, 점박이는 아는 몬스터. 아마도 뒤에 나타난 드래곤도 점박이와 같은 케이스겠지.

덕분에 포털의 일부가 마계와 연결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까.

그럼 이번 초대는 거절하는 게 낫겠네?

그렇지. 하지만 전부 거절할 수는 없을 거야. 일부는 가야만 해. 세계 각성자 연합은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거니까.”

각성자 연합의 목적 중에는 각 나라가 어려울 때 서로 돕자는 항목이 있었다. 그 하나 때문에 사람들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마 5위 이내 길드 중 절반 정도 보내면 되지 않을까?

흐음.”

자윤이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윤의 말은 맞아떨어졌다.

다만 아직 아윤이 모르는 문제가 하나 있었는데, 미국에서 초대한 각성자 중에 현우가 있다는 것이었다. 초대된 각성자 여럿 중에서도 굳이, 미국은 콕 집어서 그만은 반드시 보내 주길 바란다고 적었다.

안 됩니다.”

선우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야만 합니다.”

싫습니다.”

뭐라고 이야기해도 철벽같이 굳건한 선우를 상대하며, 무혁은 머리를 쓸었다. 뭘 말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다 똑같았다.

미국에서는 지현우 씨가 오기를 원합니다.”

그게 제 형을 탐내서 하는 행동임을 알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선우의 입에서 다른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각성자가 나타난 이후로 대한민국의 위상은 올랐다. 하지만 미국을 이겨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랬기에 요구를 무작정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제가 같이 가겠습니다.”

그건 곤란합니다. 아직 나라가 어수선한 걸 알지 않습니까. 우로보로스가 게이트라도 다시 연다면 큰일입니다. 적어도 지선우 씨는 남아 주셔야 합니다.”

과연 그런 목적으로 남으라 하는 것입니까?

선우의 입꼬리가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그 말에 무혁은 다시 한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도 알고 있었다. 뒤에서 오는 요청들에 담긴 의도가 순수한 것이 아니라는 걸.

무혁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김철수는 비각성자라도 인맥이 많으며 그를 자유자재로 써먹을 줄 아는 자였다. 그런 자를 끌어내리기란 쉽지 않았다.

지원해 드릴 테니 최대한 빠르게 권력을 잡으십시오.”

노력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많이 나아졌다. 헌터관리국 내에서 무혁이 내는 목소리도 점차 커져 가고 있긴 했다.

더 노력하시란 말입니다.”

무혁의 속도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여기서 예전처럼 선우와 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애써 화를 내리눌렀다.

더 노력하겠습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현우 씨를 미국으로 보내야 합니다. 정 불안하면 언제나 같이 다니는 평화 길드장을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그 말에 선우의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그게 싫어서 내내 무혁과 실랑이를 벌이는 거였으니 말이다.

한도진 씨를 두고 제가 대신 가면 안 됩니까?

확실히 요즘 떠오르는 도진의 실력을 생각하면 그게 차라리 마음 편할지도 몰랐다. 정치인들과 미국의 뒷공작만 아니라면 말이다. 다시 이야기가 처음으로 돌아간 느낌에 무혁은 뒷목을 잡았다.

기나긴 시간 선우와 대화를 마친 무혁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헌터관리국으로 돌아왔다. 슬슬 쉬고 싶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에 국장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오게.”

무혁이 들어서자 국장이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 갔던 일은 어떻게 되었나?

지선우는 형이 가지 않고 남아 있거나, 아니면 같이 가는 조건 외에는 수락할 수 없다고 합니다.”

무혁의 말에 힐끔 시계를 본 국장이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아니, 가서 몇 시간이나 있었는데 설득을 못 했나?

니가 해 보든가.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본인이 싫다는데 제가 어떻게 설득합니까?

그럴 때는 동생 말고 형에게 말해 봐야지!

선우가 쉽게 형을 만나게 해 줄 리 없었다.

그도 쉽지 않습니다.”

말세다, 말세야. 나라를 위해 뭘 좀 하라는데 다 싫다고만 하니 발전이 없어. 발전이!

국장은 불만스러운 듯 표정으로 일장 연설을 토해 냈다. 역시 이 작자는 불쾌하다. 이런 사람이 국장 자리에 앉아 있으니 헌터관리국도 발전이 없는 것이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더 설득해 보도록 해. 나도 따로 손을 더 써 볼 테니.”

국장은 혀를 차면서 무혁을 보내 주었다. 무혁은 국장 사무실을 나서 습관처럼 이마를 문지르며 한숨지었다.

피곤하군.”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무혁은 다시 몸을 세우고 복도를 걸어 나갔다.

*

도진은 손에 든 태블릿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난 기억에 작게 웃었다.

도진 형.

현우가 처음으로 그를 형이라 불러 주었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며 기분이 들떴다. 형이란 말을 현우의 목소리로 좀 더 많이 들어 보고 싶었다.

이제 끝.

빠르게 할 일을 마친 도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전에 회의도 했고, 남은 서류도 전부 봤으니 이제 현우에게로 돌아가도 될 터였다.

가볍게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부길드장 현희와 마주쳤다.

길드장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무슨 손님오늘 오기로 되어 있던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면 예고 없이 한 방문이라는 소린데, 그런 불청객을 굳이 만나야 할까답은 금방 나왔다.

예고 없는 방문자는 만나지 않습니다.”

평화 길드도 엄연히 손꼽히는 길드이다. 그런 길드에 찾아와서 꼬장을 부릴 손님은 없기에 할 수 있는 소리였다.

그건 저도 알지만, 정부 관계자입니다.”

정부 관계자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도진의 태도가 바뀌지 않자 현희가 초조함을 내비쳤다.

한 번만 만나 주시지 않겠습니까아무래도 중요한 용건인 것 같습니다.”

아는 사람입니까?

아니, 아닙니다. 그저 꼭 만나 보셔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현희의 변명에 도진은 잠시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거절하고서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다. 근처 디저트 가게에서 신상을 출시했는데, 생김새와는 다르게 너무 단 걸 싫어하는 현우에게 딱 맞았다. 씁쓸한 다크 초콜릿을 베이스로 한 미니 케이크는 출시되자마자 인기를 끌어 늦게 가면 품절이 될지도 몰랐다.

그걸 생각하면 이대로 나가는 게 맞았지만, 현희가 너무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길드를 세우고서 많이 신세 진 사람이기도 했다. 결국 도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10분만입니다.”

네, 네모시겠습니다!

현희를 따라간 곳에는 정장을 걸친 남자 하나가 서 있었다. 비각성자지만 출신은 헌터관리국이다. 남자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다. 간단한 인사를 거치고 나자 빠르게 본론에 들어갔다.

이번에 긴밀하게 부탁드릴 게 있어 방문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지현우 씨에게 저희의 말을 전해 주지 않겠습니까?

도진은 뒤늦게 후회했다.

이야기를 들을 필요도 없는 일이었군.

현우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지선우나 선현 길드를 통하면 된다. 그런데도 굳이 자신을 찾았다는 이야기는 그 둘이 차단할 만한 이야기라는 것일 테고. 그런 이야기라면 자신도 굳이 현우에게 전달할 생각이 없었다.

다시 한번 시계를 힐끔 바라보자 정부 관계자는 애가 타는 모양이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일단 들어 보기라도 해 주십시오. 이번에 미국에서 우리나라 각성자들에게 초대장을 보낸 일은 아시지요?

모를 리가 있나. 도진도 그 초대장을 받았다. 현우가 어찌할지 알 수 없기에 아직 답장은 보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네, 그렇습니다. 미국은 우방국으로서 저희에게 호의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요.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렇습니다. 타국보다 우리나라에 온 초대장이 더 많거든요.”

남자는 뿌듯하다는 듯이 가슴을 폈다.

그런데 그것과 현우는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도진의 질문에 남자는 자세를 바로잡았다.

미국이 현우 씨를 원합니다.”

스카우트입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순수한 의도로 대단한 몬스터를 테이밍한 현우 씨를 만나 보고 싶어 할 뿐입니다.”

그럼 결국 출국하게 되는 것인가. 지금 상황에서 자신과 현우 그리고 선우까지 빠져도 되는지 생각해 보았다. 다른 각성자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66.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가 끝일 리는 없겠지.

그렇다면 지선우가 가로막았을 리 없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아직 국내 상황이 여의찮다는 것입니다. 많은 각성자를 보낼 상황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테러 조직이 급부상한 이상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각성자 일부는 대기해 주셔야 하니까요.”

그리고 그 사람이 지선우 씨란 거군요.”

남자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높은 분들은 지선우 씨가 국내에 남아 주시길 원합니다. 갑자기 게이트형 포털이 다시 터지면 어떡합니까?

도진은 이유가 그것뿐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렇군요. 그럼 용건은 끝났습니까?

?

저는 대신 의사를 전달해 줄 생각이 없습니다. 직접 해 보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도진은 방 밖으로 나섰다. 문 앞에는 현희가 초조해 보이는 얼굴로 서 있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다음부터는 약속 없이 저런 사람은 들이지 마십시오.”

아마 현희도 이런 일을 아예 예측 못 한 것은 아닐 터였다. 도진의 말에 그의 어깨가 아래로 축 처졌다.

굳이 정치인과 엮이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더 애써 보겠습니다.”

예전에는 평화 길드를 떠나고 싶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그렇기에 좀 더 노력해 보고자 했다.

도진은 그 말만을 남기고 평화 길드가 위치한 건물을 나섰다. 길드를 좀 더 끌어올리기 위해 뭔가 해 보려는 건 좋다. 하지만 저런 식으로 권력자의 손을 빌리는 건 좋지 않다. 나중에는 자신들을 자기 입맛에 맞게 휘두르려 들 테니까.

도진은 무심코 구겨지는 미간을 손가락으로 누르며 디저트 가게에 들어섰다. 현우에게 줄 디저트와 내키지는 않지만 선우에게 줄 것까지 샀다.

요즘 조금 약삭빨라지는 것 같군.

현우에게만 케이크를 줘도 된다. 그래도 그는 기뻐할 테고, 즐겁게 먹을 것이다. 하지만 선우에게도 준다면선우는 탐탁지 않아 하겠지만 현우는 그도 좋아할 것이다. 사랑하는 동생이니까.

사랑하는 동생.”

작게 중얼거려 보던 도진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사실 도진도 선우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동생을 위해 살았고, 동생을 잃자 그 생을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여전히 동생을 잃은 건 슬펐지만, 따라 죽고 싶진 않았다. 동생 외에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은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럽다. 미심쩍은 부분도 존재했지만 캐내진 않기로 했다. 이대로 신뢰를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는 말해 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선현 길드의 까다로운 인증 절차를 거치고 위층에 올라가 현관문 벨을 눌렀다.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현우였다.

다녀왔어.”

도진은 빙그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디저트 박스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서 오세요!

비록 여기가 자신의 집은 아니었지만, 반겨 주는 목소리에 하루의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했다.

왜 그래요, 형?

곧바로 따라 들어가지 않고 버티고 있자 현우가 도진을 불러 왔다. 그 호칭을 듣고 나서야 도진은 느긋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 저 말이 듣고 싶었다.

디저트 박스를 여는 현우에게 조곤조곤 말을 걸었다.

초콜릿 케이크가 네 거고, 다른 건 지선우 씨 거.”

초콜릿 케이크안 달아요?

달지 않고 적당히 쌉싸름한 게 맛있대.”

와, 그럼 먹어 볼까요?

내가 차릴게.”

도진이 다시 디저트 박스를 받아 들자 현우가 그걸 도로 빼앗았다.

사 온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일까지 시켜요. 내가 차릴 테니 옷 갈아입고 와요.”

그럼 빨리 나올게.”

도진은 손님방으로 들어섰다. 처음에는 임시로 지내던 방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물품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원래 지내던 집보다 여기가 더 집 같은 느낌이었다.

준비 다 됐어요!

밖에서 외치는 소리에 나가니 식탁에 얌전히 앉아 있는 현우가 보였다. 그리고 점박이랑 케로, 사람 형태인 두눈까지 그 옆 바닥에 앉아 식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몬스터면서 사람이 먹는 음식을 참으로 잘 즐긴다. 케이크를 넉넉히 사 와서 다행이었다.

삐리릭.

형, 나 왔어!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도 도착했다. 일하던 도중에 다급히 달려온 모양이었지만, 알게 뭔가.

선우는 잔뜩 심통 난 얼굴로 식탁에 앉았다.

저는 단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래서 일부러 가장 달아 보이는 걸로 골랐다.

저런, 몰랐습니다.”

선우야, 케이크 사다 준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지.”

현우가 선우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하자,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다시 표정을 펴고는 케이크에 포크를 푹 찍었다.

그러네요.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마주 보고 웃고 있지만, 둘 다 속내는 다르다. 만약에 현우라는 접점이 없었으면, 가까이 지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간식 타임이 흘러갔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시간이 지나가고 사건이 터진 건 그로부터 며칠 뒤였다. 현우가 따로 몬스터를 물리치러 다녔던 날 이후로 선우는 예전보다 외출에 간섭을 덜 하게 되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경호원이 붙지 않는단 소리는 아니었다.

오늘 모처럼 일이 없었던 팀장 레나와 아인은 현우와 함께 외출을 했다. 외출 이유는 사소했다. 근처에 유명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고, 그를 맛보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원래는 선우가 시간이 나면 같이 가려고 했으나, 요즘 따라 일이 몰려들어 시간을 쉽게 빼지 못했다. 하지만 무려 선현 길드의 팀장 둘이 붙었다. 조만간 S급으로 올라설 거란 평가를 받고 있는 둘이었기에 선우도 안심하고 현우를 내보냈다.

안 그래도 도진을 떨어트려 놓자고 생각했으니, 다른 길드원과 좀 더 친해지게 하는 것도 괜찮을 터였다.

와아, 저 거기 꼭 가 보고 싶었어요!

네가 가 보고 싶지 않은 식당이 존재하긴 하나?

뭐래?

레나는 아인의 등을 팍 치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으로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지금 최대로 긴장하고 있는 상태였다. 바로 옆에 점박이와 케로, 두눈까지 붙어 있는 탓에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조합이면 어딜 가도 눈에 띄겠지.

그렇기에 더욱더 긴장해야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 뿐 선뜻 다가오지는 않았다. 고작해야 여고생 무리 하나가 다가와 현우의 사인을 받았을 뿐이었다.

와와, 사인이다, 사인!

케로 발 도장도 받고 싶은데요!

나 물감 있어물감!

왕왕!

키르르륵.”

여고생들은 기어코 케로와 점박이의 발 도장을 받은 뒤 손을 흔들며 멀어졌다. 그다음부터는 별일 없이 걷기만 했다. 날도 좋고, 그 때문인지 모처럼 공기도 좋았다. 좋은 날이었다.

그런데 왜 쥐새끼가 따라다닐까.”

누군가 따라오지만 않았으면 말이다. 레나는 건틀릿을 손에 끼며 뒤돌아보았다. 사람을 상대론 함부로 무기를 사용하기 어려워 가볍게 따로 챙겨 온 보조 무장이었다.

아인도 이미 준비가 됐다는 듯이 레나가 바라보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오해입니다.”

그쪽에서는 양손을 든 남자 하나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인데?

레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헌터관리국 사람입니다.”

연락 없는 약속은 받지 않습니다.”

아인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내 얌전히 현우를 따라가던 몬스터들이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었다. 그쯤 되자 남자도 긴장되는 모양인지 목소리가 떨려 왔다.

나쁜 의도는 조금도 없습니다.”

무슨 소리예요스토킹은 훌륭한 범죄인데. 안 그래요?

맞아.”

아인이 레나의 말에 맞장구쳤다.

말만, 말만 잠시 들어 주십시오현우 씨!

아니, 듣지 마세요. 무시하세요.”

남자가 처절하게 현우를 불렀으나, 레나는 깔끔하게 무시하라고 일렀다.

정부가 이렇게 나서는 것 치고 괜찮은 일인 적이 없었으니까.

오죽하면 정부를 무능이라고 부르겠는가. 레나가 손을 휘휘 젓는데 남자가 크게 외쳤다.

이번에 세계 각성자 연합에서 현우 씨를 특별히 초대했습니다초대장이 전달되었습니까?

전달되지 않았다. 간단한 회의 결과, 개소리 낭낭하다고 판단되어 현우에게는 전달하지 않았다.

미국은 현우 씨를 뵙고 싶어 합니다!

왜요?

현우가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걸 대화의 신호로 여겼는지 남자가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오려 했으나, 아인과 레나에게 가로막혔다.

더 다가오면 찌릅니다.”

저 사람도 잘 쳐요. 맞아 보실래요?

결국, 남자는 좀 떨어진 거리에서 상황을 이야기해야 했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현우는 결론을 내렸다.

안 가요.”

?

강제로 참석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저번에야 점박이 때문에 미국에 갔었지만, 한 번 여행해 보고 깨달았다. 여행은 피곤하다. 비행기 내에서 몇 시간을 보내야 했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 그야 그렇지만.”

게다가 선우도 못 간다면서요.”

그건 아직 나라가 위태롭기 때문에!

이상한 핑계네요.”

현우는 픽 웃고는 레나와 아인에게 말했다.

예약 시간 다 돼 가네요. 레스토랑에나 가죠.”

그럴까요?

레나가 실실 웃으며 손을 내리고, 아인도 이어 무기를 회수했다. 남자가 뭐라도 해 보려고 앞으로 나섰지만, 순간 노려보는 노란색 눈에 그 자리에 멈춰 서 버렸다.

방해.”

두눈이었다. 사람의 형태를 지녔음에도 가지고 있는 본성은 사라지지 않는지라, 남자는 갑자기 돋는 소름에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사이 일행 모두가 나란히 레스토랑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따라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제길.”

남자는 욕설을 내뱉으며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67.

보고를 들은 국장 김철수는 혀를 찼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된다. 아무래도 방법이 너무 온건했던 모양이었다.

전부 나라를 위한 일인데.”

못마땅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자 얼굴에 주름이 깊게 팬다. 그 상태로 국장은 정보부의 류영진을 불러들였다.

부르셨습니까?

불렀지, 불렀어. 그래, 요즘 돌아가는 일은 알고 있나?

정보부인데 모를 리가 없지요.”

그럼 지현우의 일도 알고 있겠군.”

대충은 압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좀 더 많은 것을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영진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최무혁에게 맡겨 봤는데, 제대로 처리 못 하더라고.”

그는 온건파니까요.”

그래서 이번엔 그쪽에 맡겨 보고 싶어. 비용과 인력은 지원을 해 주지.”

어떤 방식을 원하시는지 알겠군요.”

그래, 이렇게 눈치가 빨라야지!

국장은 표정을 펴고 웃었다.

그 뒤부터 선현 길드에는 집요한 간섭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감사부터 세금 문제까지 정부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선현 길드를 달달 볶았다. 평소에는 감히 발을 들이지도 못하던 이들이 이리 구니 그 이유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지간히 형과 나를 갈라놓고 싶은 모양이군.

선우는 서늘한 눈으로 파견된 정부의 인사들을 바라보았다. 옆에서는 찬영이 잔뜩 불만을 품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참고는 있지만, 곧 터질 것 같은 모양새였다.

이게 나랍니까?

결국 참지 못해 한마디를 내뱉었다.

국내의 인력을 지키지는 못할망정 내보내려고 이 난리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무리 뒤져 봐도 책잡힐 부분은 없을 테지만, 이런 행위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열받는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더 발악하는 겁니다. 일단은 두고 봅시다. 형은 잘 지키고 있지요?

네, 지금은 집에 계십니다. 그리고 문밖을 레나와 아인이 지키고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그럼 됐다. 선우에게 제일 우선인 건 형인 현우였으니까. 그렇게 감사를 하는 정부의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을 때,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헌터관리국의 사람이었다. 마른 듯한 몸매에 안경을 쓴 그는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 왔다.

안녕하십니까, 헌터관리국의 류영진입니다.”

그가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이번에 정부와 헌터관리국의 협조 아래 통과될 법안을 미리 알려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선우가 느긋하게 되묻자 영진이 징그럽게 웃으며 답했다.

몬스터 관리법이라고요. 아무리 테이머라고 하나 몬스터를 데리고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정부에서 따로 관리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만들어진 법입니다.”

찬영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소리를 삼켰다.

뭔 개소리야!

각성자에게서 무기를 뺏는 것과 다름없지 않은가!

저는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선우의 말에 영진이 능숙하게 대답했다.

정부에서 추진하는 일입니다. 관련자가 아니면 모를 수도 있지요.”

모를 도 있다고각성자를 때문에 만들어지는 법인데기가 막힌 소리였다.

선현 길드는 국내에서의 영향력이 대단하고, 그 영향력은 국회의원들한테도 통했다. 즉, 정부 소속이면서 이쪽 편을 드는 이들이 있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이런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으니, 지금 하는 말은 거짓일 확률이 높았다. 아니면 선현 길드에 호의적인 사람을 빼고 교묘히 날치기 통과를 노리고 있는 거던가.

속을 긁어내리는 솜씨가 일품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어린 소년이 선현 길드를 세우고 여기까지 왔다. 선우도 만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보다 미국의 초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려면 전부 가거나, 아니면 전부 가지 않는다.

현우 씨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텐데 아쉽군요.”

영진은 그렇게 답하고 물러섰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란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선현 길드를 압박하려 들 터였다.

그리고 한창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선현 길드의 사무실 위쪽 천장. 작은 생물체 하나가 입에 무언가를 물고 찰싹 붙어 있었다.

점박이였다.

현우의 방, 그곳에는 케로와 두눈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은 현우의 손에는 작은 기기가 들려 있었는데, 거기서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랄 염병하네.”

대화를 들은 현우의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아주 미국에 자신을 가져다 바칠 기세가 아닌가.

남의 동생은 왜 괴롭혀.”

그뿐만 아니라 선우를 지독하게 괴롭히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 참을 수 있으랴. 현우의 표정이 점차 험악해졌다.

잠시 나갔다 온다.”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적어도 열받게 하는 상대를 몇 대 패 주기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마침 그들의 일부가 밖으로 이동하는 듯했으니, 만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그런 뒤 밖으로 열리는 문을 통해 몸을 빼냈다. 사람들 몰래 건물을 타고 내려가 바닥에 발을 내디뎠다. 마침 선현 길드 빌딩 입구로 상자를 든 사람 몇이 나오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마지막에는 영진이 서 있었다.

물론 목소리만 들었기에 현우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아는 건 그들이 정부의 사람들이라는 것뿐이었다.

좋아.

현우가 근질거리는 주먹을 움켜쥐고 막 앞으로 나서려던 순간,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렇다고 놀란 건 아니었다. 그는 움켜쥔 주먹을 인기척의 주인에게 휘둘렀을 뿐이다.

잠깐!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가준, 그였다. 잽싸게 팔을 들어 올려 막았으나 주먹은 고스란히 팔 한가운데 꽂혔다. 그나마 힘을 조절했기에 뼈에 이상은 없었지만, 가준은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일반인이었으면 뼈가 쪼개졌을 거야!

괜찮아.”

난 괜찮지 않아아니, 그보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야?

아무래도 가준은 현우를 금방 알아본 모양이었다.

잠깐 볼일이 있어서.”

무슨 볼일!

너야말로 여기엔 무슨 일이야?

지선우를 만날 일이 있어서 왔지!

그 말에 현우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네가 왜?

요즘 정부 움직임이 이상해서 경고나 해 줄까 했지.”

사실 경고를 핑계로 약을 올려 주려고 왔다. 하지만 그걸 당사자 형 앞에서 고스란히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곧바로 의심스러운 시선이 돌아왔지만, 가준은 시치미를 뗐다.

자, 나는 사실대로 말했어. 그쪽은?

현우는 눈을 데굴 굴렸다.

잠시 외출.”

외출을 그렇게 살기등등하게 해?

모르겠는데.”

현우 또한 시치미를 뚝 떼었다.

모르긴. 보아하니 정부 인사들을 쥐어 팰 생각인 것 같은데.”

기절시킬까. 증거 인멸을 고민하는데 가준이 말을 이었다.

그거 재밌겠는데.”

그러면서 히죽 웃는다.

선현 길드만 감사에 들어가는 건 이상하기에 다른 길드들도 크든 작든 감사에 들어갔다. 거기에 백호 길드가 속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준도 조금은 뿔이 난 상태였다. 아니라면 굳이 이 일을 지선우에게 알려 주러 오지도 않았겠지.

같이 할까?

태연히 들어오는 제의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여기선 안 돼. 선현 길드 앞이잖아패기 시작한 지 10초도 안 돼서 경비원이 출동할 거라고.”

그럼 어디서?

집을 오래 비우는 건 곤란하다. 두눈이 침대 위에 누워 자는 척 위장하고 있지만, 선우가 이불을 들춰 보면 눈치챌 것이다.

어디 보자. 멀리 가기는 힘들지그럼 일단 이 동네만 벗어나서 습격하자.”

그래도 돼?

되게 만들면 되지.”

그러면서 품에서 눈과 코만 뚫린 모자를 꺼내서 내민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솔선수범해서 먼저 뒤집어썼다. 그런 후 대충 걸친 정장 재킷을 벗고 소매를 둘둘 만다. 그 모든 게 끝나고 나니 남은 건 훌륭한 강도 하나였다.

수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에도 빌런이 있긴 하거든.”

빌런. 각성하였으나 능력을 몬스터를 잡는 데 쓰지 않고, 범죄에 쓰는 이들. 지금 가준은 그런 이들을 흉내 내자고 한 것이다.

좋아.”

현우는 모자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0분 뒤, 헌터관리국의 차량은 생전 처음 보는 빌런 둘에게 습격당했다.

으아아아악!

그중 키가 좀 더 작은 빌런에게 잡힌 영진은 진짜 하얀 살을 찾는 게 더 힘들 정도로 처맞았다.

그러게.”

작은 주먹이 그를 야무지게 때렸다.

마음을.”

뼈가 무사한 게 다행이다.

곱게.”

이제는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썼어야지.”

조곤조곤 말하며 두들기는데 어찌나 무서운지 오금이 달달 떨렸다. 다른 빌런은 그 모습을 히죽거리면서 지켜보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맞았을까. 다른 사람이 필사적으로 누른 긴급 호출 벨 덕에 각성자들이 출동했고, 빌런은 포위당했다. 그제야 살았다고 생각했으나, 빌런은 포위망을 교묘히 피해 가며 영진을 5분여간을 더 때리고, 훌쩍 사라졌다.

으하하하!

가준이 숨넘어갈 듯 웃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현우가 으르렁거리며 묻자 가준이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넌 지금 누굴 팬지 모르지?

모른다. 그저 목소리가 익숙했기에 특별히 더 팼을 뿐이었다.

헌터관리국 정보부의 류영진이다. 능글거리는 뱀 같은 녀석이지. 아마 이번 일도 그 녀석 머리에서 나왔을 확률이 높을 거야. 나도 한 대 패 주고 싶었는데 어찌나 야무지게 때리는지.”

그러면서 다시 큭큭거리며 웃는다.

한동안 일어나지 못하겠군.”

많이 봐줬어.”

알아.”

각성자가 마음먹고 일반인을 치면 뼈를 으스러트리는 것도 가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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