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1~59화 (7/16)

51.

외출한다고뭐 필요한 거 있어?

카메라를 사려고.”

현우의 대답에 선우는 잠시 고민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제일 좋은 걸로 카메라를 사 올 테니 나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아니면 자신의 일이 끝난 뒤에 같이 가자고 하거나.

하지만 그건 이기심이겠지.

형에 한해서는 한없이 욕심이 생겨난다. 아무래도 보지 못했던 세월이 너무 길었던 탓인 듯했다. 선우는 치밀어 오르는 욕심을 꾹꾹 누르며 말했다.

조심해서 다녀와.”

그러면서 건네주려는 카드를 현우가 거절했다.

돈은 충분해. 저번에도 줬잖아.”

하지만 혹시 모르잖아. 이건 한도가 높은 거라서 사고 싶은 건 다 살 수 있어.”

모르긴 몰라도 외제차도 쉽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선우의 손을 살며시 밀었다.

지금도 충분하거든?

현우는 카드를 쥔 선우의 손을 꽉 잡았다 놓으며 웃었다. 그러고 보니 10살 이후로는 선우와 함께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사진을 찍을 만한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삶이 너무 힘들었다. 사는 것만으로도 바빠서 사진을 찍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 이번에 카메라를 사 오면 선우랑 사진을 찍어 보고 싶었다.

다녀올게.”

현우는 손을 휘저으며 도진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케로는 강아지용 목줄을 차고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걸었고, 점박이는 등에 멘 가방 속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두고 가려 했으나, 선우는 둘을 반드시 데리고 나가라 하였다. 여차하면 크게 도움이 될 만한 몬스터들이었으니까.

그렇게 해서 도진과 나온 현우가 향한 곳은 커다란 카메라 매장이었다.

가지각색의 카메라들이 줄줄이 늘어선 매장 중심에서 현우는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뭘 사면 좋을지 모르겠다!

어서 오십시오. 찾으시는 게 있습니까?

초보자도 잘 찍을 수 있는 카메라요!

대뜸 돌아오는 대답에 직원이 웃으면서 안내를 시작했다.

이제 막 시작하시는 거라면 디지털카메라는 어떠십니까쉽게 찍을 수 있고, 찍은 사진을 카메라나 폰으로 옮기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한번 찍어 봐도 되나요?

그럼요.”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디지털카메라를 들어 케로를 찍었다.

개가 귀엽네요.”

다행히 직원은 케로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냥 보기엔 여느 개랑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으니까.

한번 찍은 사진을 볼까요?

상냥하게 웃은 직원이 사진을 가까이 있는 노트북으로 옮기더니 열어서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새까만 그림자 덩어리가 있었다.

?

직원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카메라를 재차 확인해 보았다. 그러고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게 조명은 나쁘지 않았고, 개도 귀여웠는데 왜 이런 사진이 나온 걸까. 손 떨림 보정 기능도 들어가 있는데.

혹시나 싶어 다른 카메라로도 찍어 보게 했는데, 나오는 사진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아직 사진에 매우 서투르신 모양입니다.”

잘 찍을 방법은 없을까요더 비싼 카메라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모든 길에 지름길은 없지요. 연습, 연습이 중요합니다.”

가끔 이런 사람이 있다.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쥐여 줘도 사진을 못 찍는 사람. 이런 경우에는 연습만이 살길이었다. 직원은 적당한 가격의 디지털카메라를 추천해 주며, 꼭 연습을 하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했다.

결국 현우는 카메라 상자 하나를 들고 시무룩해진 채 가게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선우가 봤다면 당장 유명 사진작가를 선생님으로 붙여 주었겠지만, 지금 여기에 그는 없었다. 대신 도진이 있었다.

카메라를 샀으니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갈까요?

주변을요?

연습이 중요하다고 했으니 이거저거 찍다 보면 좀 괜찮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죠, 연습!

현우는 다시 씩씩한 자세로 돌아왔다. 그리고 둘이서 한강으로 향했다. 다행히 카메라는 어느 정도 충전이 되어 있었다.

찰칵.

현우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 멀리 보이는 빌딩, 가까이서 돌아다니는 비둘기, 그리고 그런 비둘기 사이로 뛰어드는 케로. 신나게 사진을 찍다 보니 금방 100장을 넘겼다. 그러다 문득 옆을 돌아보니 도진이 저 먼 하늘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게 보였다.

찰칵.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이 움직였다. 뒤늦게 도진이 돌아보았으나, 그땐 이미 다른 걸 찍고 있었다.

뭐지, 굳이 숨길 일도 아닌데.

왜 다른 걸 찍으며 모르는 척한 걸까. 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딱히 짚이는 부분이 없었다. 그렇게 몇 시간을 여유롭게 보낸 그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늦었네.”

소파에 앉아서 다리를 꼬고 있던 선우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 찍는 연습 좀 하느라.”

그래?

내 동생은 삐진 모습도 귀엽지. 현우는 슬며시 카메라를 꺼내 선우에게 초점을 맞췄다.

찰칵.

?

아니, 귀여워서.”

현우가 웃으며 말하자 선우가 와락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왜 하필이면 지금표정도 별로일 텐데.

잠시만 기다려.”

선우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그러더니 다시 소파에 앉아 자세를 잡았다. 그 모습이 마치 화보 속 모델 같았다. 누구 동생이 저렇게 잘생겼담현우는 히죽 웃었다.

이제 찍어도 돼.”

그래, 그래.”

현우는 또다시 사진 수십 장을 찍었다. 그렇게 신나게 사진을 찍고 카메라를 내리려는데, 도진이 손을 내밀어 왔다. 별생각 없이 카메라를 쥐여 주자 현우의 등을 부드럽게 떠민다.

옆에 앉으십시오. 같이 찍어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선우와도 같이 사진을 찍고 싶었더랬다. 현우는 잽싸게 선우의 옆에 가서 앉았다. 그런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케로가 폴짝 뛰어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고, 점박이도 가방에서 빠져나와 어깨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선우는 못마땅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몬스터들을 밀어 내진 않았다.

웃으십시오.”

이어 사진 찍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떻게 찍혔어요?

사진을 찍자마자 현우는 튀어 오르듯 일어나 곧바로 도진에게 다가갔다. 선우도 사진이 궁금했는지, 그 뒤를 따랐다.

작은 화면 속에는 선우와 현우가 같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가슴 속이 울컥거렸다.

이거 뽑을 수 있죠?

가능합니다.”

그럼 뽑아서 간직할래요.”

어렸던 동생은 이미 커져 버렸고,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둘은 여전히 가족이라는 것.

그럼 저도 부탁드립니다.”

도진에게 부탁하는 선우를 보며, 현우는 손을 뻗어 커다란 손을 꼭 움켜쥐었다.

사랑하는 내 동생.

둘은 마주 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마음이 통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런 둘을 바라보고 있던 도진이 잠시 씁쓸하게 웃었지만, 워낙 순간이라 둘 다 알아차리지 못했다.

찰칵.

그 뒤로 현우는 사진 찍는 데 취미를 붙이는가 싶었지만, 잠시였을 뿐이다.

사진 찍는 것도 쉽지 않다.

엄연히 노동력이 들어가는 취미였다. 포즈를 궁리하고 사진을 찍은 뒤, 그걸 보정하고 프린트한다. 그 과정이 너무나도 귀찮았다. 게다가 이놈의 사진 실력은 도통 늘질 않아 하나같이 심령사진을 연상케 했다.

그러다 보니 현우 대신 도진이 카메라를 드는 날이 많아졌고, 도진이 찍은 사진이 별스타에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현우

(하품하는 케로).jpg
(밥먹는 점박이
).jpg

아는 형이 찍어준 사진.
#몬스터 #점박이 #케로 #별스타그램

갑자기 사진 실력이 확 늘어난 것 같지 않아?

저번 글에서 카메라 샀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해도 딱히 실력이 늘어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게? 무슨 일이지?

아, 오늘 사진에 이유가 적혀있어. 아는 형이 찍어줬대.

아는 형이라면 누구지?

평화길드의 길드장 아냐? 소문으로는 지현우에게 거의 붙어 다닌다던데?

그건 그냥 소문 아냐? 붙어다닐 이유가 뭐가 있어?

나야 모르지

그나저나 애들 귀엽긴 하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계속 사진 찍어주세요! 댓글 달아야겠다!

 앞으로도 계속 귀여운 사진 부탁드립니다!

별스타를 살펴보던 현우가 댓글을 소리 내어 읽었다.

앞으로도 계속 사진 부탁드린대요.”

저 말입니까?

네, 내 사진은 어떤지 알잖아요.”

아무리 찍어도 늘어나지 않는 저주받을 실력.

그래도 조금은 늘던걸요.”

조금이죠, 조금.”

과학이 발전한 시대라서 다행이었다. 옛날이었으면 사진이 더 처참했겠지. 현우는 누워서 뒹굴며 도진을 올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TV에서는 이제 다가오는 11월을 맞이하여 특집 방송을 하고 있었다. 단풍이 내려앉은 산이며, 노랗게 물든 가로수가 참 예쁘다.

아, 이제 곧 그때네.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매년 이맘때면 현우는 마계에서 미쳐 날뛰곤 했다.

네 생일은 언제나 내가 챙겨 줄게.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줄 수 없는 생일 선물을 마련하곤 했다. 지금은 전부 마계에 두고 와서 아무것도 없지만 지금도 기억난다.

레드 드레이크의 이를 뽑아 만든 목걸이, 마족을 족쳐서 받아 낸 마정석, 발록의 날개 뼈로 만든 윷놀이 세트 등등. 그렇게 모아 둔 게 수십 개였다.

만약 요정이 조금만 더 시간을 줬으면 어떻게든 들고 오는 건데. 그러질 못했다.

그랬다. 돌아오는 11월 15일.

그날은 하나뿐인 동생 지선우의 22살 생일이었다.

52.

어릴 때는 생일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했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남들만큼 해 주고 싶었는데, 그도 어려웠다. 먹고사는 것도 어려워서, 케이크는 사지도 못했다. 간신히 빵 하나 사서 초 꽂는 게 전부였다. 선물은 공책이나 연필이었다.

선우는 그것도 좋다고 웃어 줬지만, 현우의 기억에는 서럽게 남아 있었다.

그러니 이번 생일은 제대로 챙겨 주고 싶다.

남들 하는 것처럼 빵집에서 예쁜 케이크도 사 놓고, 고기도 구워 주고, 제대로 된 선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네.

돈이 없었다. 선우가 준 카드 안에는 돈이 많았지만, 이걸 쓰는 순간 생일을 준비한다는 걸 들켜 버릴 것이다. 게다가 생일 선물을 당사자의 돈으로 준비한다는 것도 좀 그런 느낌이었고.

돈, 돈이 필요해.

현우는 눈을 부릅뜨고 구인 어플을 설치하여 죽죽 내려 보았다. 며칠씩 단기로 하는 알바가 있다고 했는데. 선우가 혼자 나가는 걸 싫어하긴 하지만, 하루 정도라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그런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돈 필요합니까?

그 말에 현우는 화들짝 놀랐다. 선우의 생일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도진이 접근하는 걸 눈치채지도 못했다. 아니, 마계에서는 안 이랬는데. 케로가 접근을 해도 금방 눈치챘었다. 아무래도 여기 와서 많이 해이해진 것 같았다.

현우는 자기반성을 마치고, 도진에게 대답했다.

네, 필요해요.”

혹시 지선우 씨 생일 선물 때문입니까?

어떻게 알았어요?

현우는 저도 모르게 도진을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미 돈이 있는데,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까요. 그리고 이쯤이 선현 길드 길드장의 생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네, 맞아요. 선우에게는 비밀이에요?

네, 쉿.”

도진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런데 알바는 힘들 것 같습니다만.”

왜요?

이미 얼굴이 많이 알려져서.”

마스크랑 모자 쓰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허락받고 나가더라도 경호원이 붙으니까, 알바하는 건 금방 들킬 텐데요?

가지고 싶은 게 생겨서 알바한다고 속이면 되죠.”

그걸로는 속지 않을 것 같은데. 하나뿐인 형이라고 어화둥둥하면서 모든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들키지 않을 리가.

그보다는 다른 방법으로 돈을 버는 게 어떻습니까?

어떤 방법이요?

CF를 하나 찍는다거나.”

밖에 나가는 건 위험하다. 내부에 있는 게 현우의 안전에는 좋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얼마 전에 카메라를 사면서 보였던 표정을 생각하면, 가끔은 나가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지켜 줄 테니. 현우는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했으면 좋겠다.

그건 너무 거창하지 않아요?

그쪽이 생일 준비 감추기엔 더 나을 것 같습니다.”

현우는 도진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CF를 찍기로 한 것이다. 그 소식은 가장 먼저 선우에게로 들어갔다.

갑자기 CF는 왜저번엔 귀찮다면서.”

그냥 조금 관심이 생겨서.”

갑자기?

처음엔 귀찮긴 했는데, 막상 방송 찍어 보니 재밌더라고.”

아무래도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는 모양이었다. 특히 동생에게 사실을 감추는 건 상당히 힘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선우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아 주었다.

알았어. 그럼 부길드장에게 말해 놓을게. 형이 하고 싶은 대로 해.”

고마워!

현우는 선우를 뒤로하고 냉큼 찬영을 찾았다.

최대한 큰돈이 되는 CF 말입니까?

!

돈 필요한 일이 있습니까?

찬영은 떨떠름한 얼굴로 되물었다.

참고로 선우의 돈은 안 됩니다.”

단호한 현우의 말에 찬영이 말했다.

지난번에 나가신 예능 방송 출연료를 대신 보관하고 있는데, 카드만 발급해서 드릴까요?

얼마 정도인데요?

이 정도입니다.”

찬영은 순순히 금액을 적어 보여 주었고, 그를 본 현우는 활짝 웃을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케이크, 고기, 생일 선물을 사고도 충분할 것 같았다. 방송 출연 한 번에 이 금액을 주다니, 방송사는 돈이 많은가?

그럼 CF는 안 찍으실 거죠?

!

그런데 그 돈이 왜 필요한 겁니까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현우는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부길드장인 그는 선우의 생일을 알고 있을 거란 데 생각이 미쳤다. 보니까 다른 길드의 길드장들도 생일마다 거하게 파티를 한다는데 선우도 그러겠지. 그러면 따로 미리 말해 놓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개인적으로 챙겨 주고 싶지만, 길드 차원에서 준비하는 것도 있을 테니까 겹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곧 선우 생일이잖아요.”

네, 맞습니다. 곧 길드장님 생일이죠.”

길드에서도 준비하는 게 있겠죠?

아니요. 길드에서는 따로 준비하는 게 없습니다.”

왜요?

현우가 기겁하며 되물었다.

왜 준비 안 해요다른 길드는 거창하게 파티까지 열던데!

외곽의 건물을 빌리거나, 크루즈를 빌리거나. 어디든 넓은 장소를 빌려서 사람을 초대하고, 생일 파티를 열었다. 그런데 선우의 길드는 그런 걸 준비 안 한다고?

길드장님이 싫어해서요.”

싫어한다고선우가 생일을 얼마나 좋아했는데. 생일이 오기 며칠 전부터 열심히 생일을 챙겼었다. 형이 잊기라도 했을까 봐, 달력의 15일에 빨간색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쳐 놓고 하루에 몇 번씩 생일 이야기를 했다.

말도 안 됩니다.”

정말입니다. 그 때문에 길드에서는 생일을 따로 챙기지 않습니다.”

이유는 모르나요?

예전에 기자가 인터뷰할 때 그걸 물어본 적이 있긴 합니다. 잠시만요.”

찬영은 자신의 사무실 한편의 책장을 뒤져 잡지 하나를 빼 주었다. 패션 잡지인 듯 세련된 옷을 입은 여성이 표지를 장식하고 있었다.

현우는 곧바로 그 자리에서 인터뷰 부분을 찾아 넘겨 보았다.

Q. 이제 가을의 중심인데요. 곧 생일 아니신가요?

A. 맞습니다.

Q. 11월 15일. 이 날이죠자, 여기서 독자분들의 궁금증을 조금 해소해 보고자 질문드리겠습니다. 어째서 매년 생일을 챙기지 않으시나요사소한 선물 하나 받지 않으신다고 했는데, 이유가 있을까요?

A. 저에게 생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그날만은 매일 바쁘던 형이 일찍 돌아와서 생일을 축하해 주었거든요.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형이 생일을 잊을까 봐 계속 그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Q. 어릴 땐 귀여우셨군요!

A. 귀여운가요. 그건 모르겠습니다.

Q. 그러면 지금 생일을 챙기지 않는 이유는 형 되시는 분이 없어서인가요?

A. (지선우 씨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 웃음에는 슬픔이 담겨 있어 보는 기자도 그 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잡지를 쥔 현우의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마계에서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동생이 제가 없어도 행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자신을 잊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그게 선우의 괴로움이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기심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지금 선우가 생일을 챙기지 않는 이유를 보는 순간, 가슴 아픈 와중에도 기뻤다.

이러면 안 되는데.

현우는 잡지를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거 구기지 마십시오. 저도 간신히 구한 잡지란 말입니다.”

찬영이 초조해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배려를 해 줄 수 없었다. 현우는 간신히 표정을 수습하고 나서야, 잡지를 내렸다.

생일 파티 해요.”

?

제가 선우에게 말할게요. 다른 길드보다 더 커다랗게 파티하죠돈이 모자라면 제가 CF를 찍을게요!

그 정도로 돈이 모자랄 선현이 아닙니다. 그보다 생일 파티를 하자고요기간이 이제 2주도 안 남았는데요?

그래서 못 합니까?

그 말에 찬영이 피식 웃었다.

못 하다니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허락만 받아 오십시오.”

돈과 사람을 갈아 넣으면 된다. 그리고 선현은 그 모든 것이 풍부한 길드였다. 초대하는 손님들이 시간이 될까,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찬영도 그동안 선우의 생일을 다른 길드처럼 챙겨 주고 싶었다. 그렇기에 현우의 말에 금방 넘어갔다.

그럼 제가 선우에게 허락받고 올게요!

이미 몰래 생일을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은 홀랑 날아갔다. 현우는 부길드장 사무실을 나와 선우에게로 향했다. 그리고 힘차게 문을 열어젖히며 말했다.

생일 파티 하자!

?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선우를 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생일 파티 하자!

무슨 생일 파티?

네 생일 파티!

현우의 말에 선우가 부드럽게 웃었다.

나야 해 주면 좋지.”

그렇지그러면 어디서 할까선상 파티외곽의 호텔아니면 아예 그냥 건물 하나 빌려서 처음부터 준비를 해?

부드럽게 웃던 선우의 표정에 슬며시 금이 갔다. 하지만 흥분한 현우는 미처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꼭 그렇게 해야 해?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생일 파티 안 했다면서. 남들 다 하는 건데!

그래, 남들 다 하는 거. 그 부분이 현우의 행동을 부추겼다. 이거도 하고, 저거도 하고. TV에서 보던 대로 화려한 생일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해 주고 싶었다.

나는 작게 해도 되는데.”

어떻게 그래. 지금까지 내가 생일을 제대로 챙겨 주지도 못했는데.”

나는 그래도 괜찮았어.”

거짓말.”

정말인데.”

정말이었다. 형은 생일을 잘 챙겨 주지 못했다고 자책했지만, 선우에게는 그 모든 것이 행복이었다. 그랬기에 현우가 사라지고 나서는 더 이상 생일을 챙기지 않았다. 하지만 현우는 다시 돌아왔고, 11월이 되었다.

다시 예전과 같은 생일을 보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형은 그걸로는 만족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형은 내가 남들처럼 크게 생일 파티를 했으면 좋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현우를 보며, 선우는 자신이 원했던 생일을 조용히 묻어 두었다.

좋아. 그러면 이번에는 크게 하자.”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하자 현우의 얼굴에도 웃음이 떠올랐다. 그래, 형이 웃으면 됐다. 앞으로도 남은 생일은 많으니까. 이번 생일만큼은 형이 원하는 대로 하기로 하였다.

53.

화려한 생일 파티를 만들려면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넓은 장소, 그 장소를 꾸밀 수많은 물건, 맛있는 음식 등등 많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걸 꼽으라고 한다면 입을 모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손님.

격이 다른 손님. 그것이 파티의 질을 결정한다. 그렇기에 찬영은 초대장을 보낼 사람을 신중히 골랐다.

일단 국내 5위권 내의 길드에는 전부 초대장을 보내고.

그 아래는 좀 더 신중하게 고른다. 이번은 생일 파티를 연다는 소문을 슬며시 흘린 덕인지, 수많은 초대장 요청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전부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시간이 촉박하긴 하지만 이미 해외에도 초대장을 돌렸다.

될 수 있으면 대부분이 와 줬으면 좋겠는데.

슬슬 초대장에 대한 답이 돌아오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찬영은 그를 확인하며 분주하게 움직였다.

뭐야. 생일 파티 초대장?

가준은 자신에게 도착한 초대장을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까지 생일 파티라고는 한 번을 하지 않더니 무슨 바람인지. 형을 찾아서 그런가가준은 초대장을 꺼내 안을 들여다보았다.

장소는 도심 외곽의 한 건물.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곳이지만, 주최자가 선현이라면 제법 기대해도 될 것이다.

갈까, 말까?

평소 지선우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려 국내 1위,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선현 길드에서 여는 파티다. 유력한 사람은 대부분이 모일 것이 분명했다. 그런 자리에 혼자 빠진다고단순히 울분이 터진다고 해서 놓치기에는 아쉬운 자리였다.

가야겠지.

혜선 누님은 당연히 갈 테고, 아윤과 자윤 꼬맹이들도 갈 것이다. 한도진이야 아예 붙어 사니 말할 것도 없고. 백호 길드만 빠지긴 좀 그렇다.

간다고 전해.”

고민은 짧았다. 가준은 초대장을 들고 온 비서에게 그렇게 전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럼 이제 생일 선물을 골라야 할 차례다.

이건 진짜 내키지 않는군.”

생각해 보니 지선우는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온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든다.

제기랄.”

입 밖으로 절로 욕이 튀어 나갔다.

일본의 모처, 수련관에서 수련하던 준이치는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눈을 떴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온 보좌관에게 초대장 하나를 받았다.

지선우의 첫 생일 파티입니까?

네, 듣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가 봐야지요. 간다고 전하십시오.”

네, 명을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초대 명단을 구해 보십시오. 누가 오는지.”

일단 러시아의 이반, 미국의 레온은 승낙 의사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외의 명단은 최대한 빠르게 구해 오겠습니다.”

알았습니다. 이만 나가 보십시오.”

네.”

보좌관이 나가자 준이치는 다시 눈을 감았다. 어쩌면 이번에 한국으로 간다면 대련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대부분의 나라는 국력 유출을 이유로 각성자가 대련하는 걸 싫어했지만, 준이치는 그를 상관하지 않았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만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물론 대련을 신청한다고 전부 승낙하는 것도 아니긴 했지만, 지선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철저히 준비를 해야 했다.

반드시 지선우를 이기고 싶었다. 아니, 이기고 싶은 자는 지선우뿐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이반, 미국의 레온. 그 외에 각국의 쟁쟁한 각성자들. 그들을 전부 이겨 내고 가장 위에 서고 싶었다.

그러기 위한 수련이다. 준이치는 마침내 잡념을 지워 내고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생일 파티?

하얀 손이 초대장을 꺼내 보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파티가 열리는 곳은 작은 나라였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곳이었다. 가장 먼저 포털이 열린 만큼 강한 각성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그렇다면 가야겠네.”

좋은 기회였다. 하얀 손이 까만색의 수정을 쓰다듬었다.

자, 성과를 확인할 시간이다.”

그동안 마계와의 통로를 조금씩 열어 왔다. 그리고 최근에는 블랙 드레이크를 통과시키는 데 성공했으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더 크게 포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더 강한 마계의 생물을 불러올 수 있단 소리였다.

그래 봤자 파티에 모일 면면을 살펴보면 금방 잡히겠지만, 노리는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이건 미끼에 불과했다. 더 큰 혼란을 위한 미끼.

생일 파티의 규모가 커지면서 대부분을 찬영이 떠맡아 현우가 할 일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여유로운 것도 아니었다. 아직 선우의 생일 선물을 고르지 못했으니까.

으아아!

한참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현우가 소파에서 흘러내려 러그 위를 뒹굴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에게 줄 생일 선물인데 뭘 줘야 할지 모르겠다. 출연료를 넘겨받긴 했지만, 액수가 애매하다. 평범한 선물을 사기에는 차고 넘치는 액수였으나, 각성자 전용 물건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직 고민 중입니까?

네, 뭘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마계에 있을 때는 환경이 그러함에도 어떻게든 선물을 준비했는데. 환경은 지금이 더 좋은데 왜 이리 어려울까. 현우는 손을 뻗어 케로를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 보니 케로베로스의 이빨이 제법 튼튼했는데. 아니면 드레이크의 이빨도 괜찮고.

깨개갱!

생각과 동시에 손이 움직여 버렸다. 그 때문에 강제로 입이 벌려진 케로가 기겁을 하며 뒤로 펄쩍 뛰었다. 점박이는 이미 도진의 뒤쪽에 숨은 지 오래였다.

지선우 씨는 뭘 사서 주건 기뻐할 것 같습니다만.”

그건 그렇다. 착하고 순한 동생은 형이 주는 것이라면 뭐든 웃으며 받을 것이다. 그렇지만 더 좋은 것을 주고 싶은 게 형의 마음인지라. 갑자기 손에 쥔 액수가 커지니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졌다. 원래라면 소박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이제는 아니니까.

도와드릴까요?

뭘요?

지선우 씨가 무엇을 원하는지 한번 알아봐 주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건 조금 솔깃하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도진이 웃으며 답했다.

그리고 고민과는 별개로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외곽의 낡은 건물이 모던한 분위기의 건물로 변신하고, 거칠던 땅이 바르게 정돈되었다. 내부는 파티장에 걸맞게 꾸며졌고, 선우의 생일을 위해 입국한 각성자들 때문에 연일 공항이 소란스러웠다.

백호 길드장이 파티를 열었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무혁을 따라 공항을 정리하러 나온 부하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1위와 2위 길드라지만 그 격차가 크니까. 그리고 지선우는 아직 어리지.”

각성자는 어린 나이에 각성할수록 유리하다. 왜냐하면 각성한 순간부터 노력 여하에 따라 성장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치면 언젠가 지선우는 정말로 세계 1위로 우뚝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렇게 많은 각성자들이 입국하는 거군요.”

그렇지.”

그런데 몬스터는 왜 데리고 들어오는 걸까요?

그건 형 쪽이 테이머라서 그런 듯하군.”

몬스터로 환심을 사 볼 속셈인 걸까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실상 현우는 테이머도 아니고, 주먹으로 길들인 것에 불과했지만 아무도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보다 집중하도록. 이제 러시아와 일본, 미국의 각성자들이 입국한다.”

그 말에 부하도 침을 삼키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아아, 귀찮아.”

붉은 머리를 가진 호남형의 청년이 가장 먼저 모습을 보였다. 러시아의 이반. 무혁과 똑같이 불꽃을 다루는 각성자다. 그 때문인지 어쩐지 가슴 한쪽이 두근거렸다. 싸워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어 선현 길드에서 보낸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 선현 길드?

네, 한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쯤부터 이반은 뒤로 물러서고, 다른 이가 선현 길드의 사람을 상대했다. 이반은 내내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다 무혁을 발견하고는 발걸음을 멈춰 섰다.

무혁이 그를 알아보았듯이 이반도 무혁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똑같은 불이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싶어 긴장했지만, 그게 다였다. 이반은 그대로 선현 길드의 안내를 따라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어 일본의 준이치가 도착했다. 그는 내내 단정한 태도를 보이며 순탄하게 공항을 나섰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각성자는 레온.

지금까지의 조용함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트린 금발에 가디언 길드 특유의 제복. 마치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모습에 일부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나마 한국이라서 덜한 거지, 일본을 방문했을 때는 난리도 아니었다고 들었다.

여기, 여길 봐 주세요!

아아아악!

사람들이 열심히 손을 흔들어 댔다. 그리고 레온은 경호원들이 열심히 터놓은 길 사이로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몰래 뒤로 빠져나가도 됐을 텐데, 저러는 걸 보니 쇼맨십이 대단하다 느껴졌다. 그렇게 셋이 지나고 나니 그다음은 통제가 좀 수월해졌다.

하지만 문제는 이다음이겠지.

지선우의 생일이 지나는 날까지, 이들을 내내 주시해야 했다. 선현 길드가 알아서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명색이 헌터관리국인데 한 발 뒤로 물러서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무혁은 남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54.

수도에 타국의 각성자가 여럿 들어와 있다. 선현 길드가 모든 걸 책임진다고는 했지만, 그 때문에 도심에는 기묘한 긴장감이 돌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는 동안 딱히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몇몇 각성자가 부딪치긴 했지만, 발 빠르게 나선 선현 길드와 헌터관리국 덕분에 금방 해결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당일이 되었다.

현우는 몸에 딱 맞는 정장을 입은 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살짝 자줏빛이 도는 정장은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다. 장인이 만들었다더니, 그만큼의 값어치는 하는 모양이었다.

잘 어울려, 형.”

옆에서는 색만 다른 비슷한 모양새의 정장을 입은 선우가 웃고 있었다.

도진은 어디 있느냐고지금 여기엔 없었다. 평소 경호원처럼 현우에게 붙어 다니긴 했지만, 그도 엄연히 한 길드의 길드장. 파티가 열리기 전에 다급히 달려온 부길드장에게 끌려 사라졌다.

그 때문에 선우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언제나 붙어 다니던 도진도 없고, 형과 비슷하게 맞춘 정장을 입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너도 잘 어울려.”

빈말이 아니라 정말로 그러했다. 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겼으니 뭘 입어도 어울린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딱 맞는 정장을 입혀 놨으니 무슨 말을 더하랴. 현우가 뿌듯하게 웃으며 선우를 칭찬하자 아래에 있던 케로가 왕왕 짖었다.

그래, 너도 귀엽다.”

그러자 현우와 똑같은 색깔의 케이프를 걸친 케로가 가슴을 쑥 내밀었다. 본래 케로베로스는 난폭한 마수인데. 요즘 따라 왜 이리 귀엽다는 말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케로가 나서면 점박이도 나선다. 꼬리에 리본을 두른 점박이가 괜히 몸을 돌려 본다.

너도 귀여워.”

똑같은 칭찬을 듣고 나서야 점박이는 빙글빙글 도는 걸 멈췄다.

형, 곧 파티가 시작돼.”

수많은 각성자와 정·재계의 인사들이 모였겠지. 현우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준비는 됐어?

선우는 눈을 접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물론이지.”

현우 또한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막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전면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사람을 발견했다.

도진은 차 안에서 파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우 2주 만에 그럴싸하게 탈바꿈한 모습이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일반인으로는 시간을 맞추기 힘드니 각성자들까지 고용해서 해결했다지.

준비는 끝났습니다.”

옆에서 부길드장인 현희가 말을 걸어 왔다. 그 말에 도진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생전 차 본 적 없던 값비싼 시계에 반듯한 정장. 정확히 말하자면 정장은 현우와 백화점에 갔을 때 입어 보았기에 처음은 아니지만, 여전히 조금은 어색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습니까?

있지요. 평소에는 공개된 곳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으니까요. 이 기회에 제대로 깊은 인상을 심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현희는 제법 들뜬 모양이었다.

몇 번인가 길드를 그에게 넘기고 편하게 지내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현희는 도진에게 끈덕지게 들러붙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길드의 힘이 필요할 거라고 그를 설득했다. 그 말이 틀린 것 같진 않아 여기까지 왔지만, 모르겠다. 이게 맞는 길인지.

그럼 들어갑시다.”

도진은 차에서 내려 파티장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자 멀찍이서 주변을 맴돌던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초대받지 못한 사람이나 기자로,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었다.

누구지?

기자 하나가 말을 꺼내자 다른 기자가 그 말을 받았다.

모르겠는데. 하지만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면 대단한 사람이겠지.”

그건 당연한 소리고. 봐 봐. 거리가 이렇게 먼데도 눈에 확 들어와.”

각성 등급이 뭘까키도 크고 몸도 좋고 외모도 완벽하군.”

그건 모르겠는데, 일단 사진 찍어 둬 볼까?

아서라, 참아. 들키면 여기서도 쫓겨난다.”

뭐라도 건져 먹을 게 있나 싶어 여기 왔는데, 이런 거라도 건져야지.”

기자는 투덜거리면서 카메라를 내리지 않았다.

몰래몰래 조금씩 찍으면 될 거야.”

하여간 사람하고는.”

미리 조작해 두었기에 셔터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사진 몇 개를 찍어 낸 기자는 희희낙락하며 들고 온 노트북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각성자는 사진 찍히는 걸 진작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굳이 다가가 카메라를 뺏는 이는 드물었다. 이미 선현 길드에서 순찰을 돌고 있기도 했고, 거기서 막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딱히 손해 볼 일은 아니었으니까.

알려지면 더 좋지요.”

현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여기 왔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 알려진 각성자라는 증명이었으니, 평화 길드로서는 나쁘지 않았다.

그렇습니까.”

그 때문에 도진은 불쾌감을 느끼면서도 꾹 참고 있었다. 현우가 카메라를 들이댔을 때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직 타인의 시선은 조금 불편하다.

평화 길드에서 왔습니다.”

입구로 가서 초대장을 건네주자 가드들이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다. 겉면과 마찬가지로 안도 대단하게 꾸며져 있었다.

역시 선현 길드의 재력이란.”

절로 눈이 돌아가는 광경에 현희가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도진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 있지.

현우를 찾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파티의 주인공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쉬움에 작게 숨을 내쉬며 돌아서는데, 어떤 여성이 그에게 부딪혀 왔다.

앗, 죄송합니다!

독특한 파란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은 금방 사과를 해 왔다.

그런데 익숙하지 않은 분이시네요. 국내의 각성자분들은 거의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소개 부탁드려도 될까요저는 백호 길드의 린이라고 해요. 힐러죠.”

평화 길드의 한도진입니다.”

한도진, 한도진이라면.”

린이 눈을 반짝였다. 얼굴은 자세히 모르지만 이름이라면 알고 있었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이잖아?

멀리서 보기에도 괜찮아 보이는 사람이라 일부러 접근했는데, 대박을 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이는 린뿐만이 아니었다.

새로이 등장한 강자를 멍하니 쳐다보던 이들 중, 그의 정체를 눈치챈 이들이 슬슬 접근하기 시작했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은 무려 S급 각성자. 게다가 길드장이라는 위치를 떼어 놓고 봐도 도진은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지선우와는 다른 매력이 있네.

지선우보다는 좀 더 키가 크고 덩치가 있다. 게다가 외모도 뒤지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강하다. 이 어찌 매력적이지 않으랴.

이런 사람이 지금까지 어디 숨어 있었담.

자연 도진의 주변으로 사람이 몰리기 시작했다. 도진은 난감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몰려드는 사람을 피하지는 않았다.

어머나?

도진보다 먼저 도착해 있던 아윤은 그런 도진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화 길드 길드장 인기 많네. 봐 봐, 오빠.”

오빠인 자윤의 옆구리를 찌르자 그가 잠시 도진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금방 관심을 지우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가준과 이야기를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순수하게 파티를 즐기고 싶었는데 역시 무리였나. 아윤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던 도중 저 멀리서 터프하게 술잔을 갈아 치우는 혜선을 발견했다.

안녕~!

얼마 지나지 않아 혜선도 그들 사이로 합류했다.

여기는 유독 외국인이 많네.”

무려 지선우의 첫 생일 파티잖아요.”

그래서 그런가?

혜선은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새 잔을 들었다.

술이 맛있긴 하네.”

다 고급으로 채웠겠죠.”

돈이 많다더니. 술이나 실컷 마시고 가야겠네.”

각성자가 생긴 지 10년. 외국과 교류를 게을리하지는 않았지만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없었다. 각국에서 각성자 유출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뜻을 다 따르지는 않는지라, 몇몇은 외국과 접촉하고 있긴 했다. 그리고 여기 모여든 한국인 상위권 길드의 길드장들도 그런 부분을 상세히 살피고 있었다.

일본에 러시아에 미국, 다른 나라 사람도 제법 많네.

자, 오늘 뭔가를 더 얻을 수 있을까. 혜선은 술을 마시면서도 머리를 팽팽 굴렸다.

위층에 마련된 대기실. 그 안에서 현우는 아래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면 유리창은 안에서 밖을 볼 수는 있지만, 밖에서 안을 볼 수는 없는 구조였다. 그렇기에 더욱 편히 아래층을 관찰할 수 있었다.

저거, 뭐야?

평소와는 다르게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도진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각성자 몇몇이 도진에게 실수인 척 몸을 들이밀었다. 이해 못 할 행동은 아니었다.

도진은 유능한 각성자였고, 평소에 입고 다니는 게 그래서 그렇지 잘 꾸미면 선우 못지않은 미남자였다.

그래, 그렇지.

이제 그도 여동생을 벗어나, 다른 사람과 만날 때가 되었다. 지금까지 현우에게 붙어 있던 것도 여동생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런 거였으니까.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달라질지 모른다. 그러니까 저런 모습을 응원해 줘야 하는데, 기분이 이상하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긁다가 깨달았다.

나 지금 기분이 나쁘네?

왜 나쁘지이유를 알 수 없었다.

?

뒤에서 선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손을 내밀어 잠시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생각해 본 결과, 기분이 나쁜 이유를 알아냈다.

평소에는 안 저랬잖아. 낡은 옷을 입고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다닐 때는 접근도 안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겉모습이 말끔해졌다고 저렇게 들러붙다니. 저런 사람들이 도진을 행복하게 해 줄 리 없었다. 나중에 도진이 다시 원래 모습대로 돌아가면 그땐 어떻게 굴겠는가.

같이 지낸 시간이 제법 길었지.

가끔이지만 도진이 형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만큼 가까워진 사람인데, 다시 힘들어지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빠르게 자기 합리화를 마친 현우는 몸을 바로 세웠다.

가자!

인파 속에 파묻힌 도진을 구해 주러그를 구해 주고 나면 이 불쾌한 기분도 사라질 것이다. 현우는 선우가 내민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섰다. 케로와 점박이는 그 뒤를 쫄랑쫄랑 따라갔다.

55.

이런 관심은 낯설다. 어렸을 적에는 말을 더듬어서, 커서는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아서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이렇게 몰려들어 친근하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한도진 씨, 오늘 입은 옷이 정말 잘 어울리시네요.”

예쁘게 생긴 여성이 웃는다.

평화 길드장님. 처음 뵙는데 이리 훤칠한 분이실 줄이야.”

다들 숨긴 속셈은 있겠지만, 그래도 표면상으로 친절하게 다가오는 이들을 물리치기는 쉽지 않다.

문득 현우가 생각나긴 했지만, 오늘은 지선우의 생일이다. 현우는 아마 그에게 붙어 다닐 것이다. 핏줄을 나눈 가족이니까.

아무런 관계도 아닌 자신과는 다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모르는 사이, 이렇게 정이 깊어졌나 보다.

하긴 동생 같긴 하지.

저번에 환상에 걸렸던 이후로 동생같이 대해 왔다. 그러니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도진 씨!

재차 불러오는 여성의 부름에 답하며 도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쪽 발코니에서 보니까 풍경이 좋더라고요. 같이 가서 보지 않을래요?

수줍게 웃으며 하는 말에 깨달았다. 이거 유혹이었구나. 그동안은 그럴 만한 일이 없어서 뒤늦게야 눈치챘다.

일단은 거절하도록 할까.

충분히 매력적인 사람이었지만, 마음이 동하질 않는다. 도진이 막 거절을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아챘다.

무의식중에 힘이 들어가려던 팔이 순간 힘을 잃고 늘어졌다. 상대의 정체를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도진 씨!

현우였다. 평소에는 대충 집히는 옷을 주워 입곤 하던 현우였으나, 오늘은 날이 날이니만큼 제대로 된 정장을 갖춰 입었다. 유독 잘록하게 허리가 들어간 세미 정장이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내내 어색하게 굳어 있던 얼굴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오셨습니까?

오기야 진즉에 왔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

뭔가 잊은 일이 있던가. 기억을 되짚어 보는데 현우가 좀 더 힘을 주어 도진을 잡아당겼다. 현우보다 훨씬 큰 몸이 슬슬 끌려가기 시작했다.

같이 있어야죠. 그래야 절 지켜 줄 수 있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현우의 표정에는 심술이 떠올라 있었다.

뭐에 이리 심통이 난 걸까.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부드럽게 뺨을 쓸어내렸다.

그동안 종종 접촉을 해 오긴 했지만, 이렇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현우는 난데없는 행동에 놀란 모양이었다. 하지만 팔을 잡은 손을 떼지는 않았다.

지현우 씨로군요. 그런데 도진 씨는 왜 데려가시는 거예요?

그 말에 현우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제 경호원이니까요.”

경호원이요?

무려 한 길드의 길드장에게 경호원이라니.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도진이 현우를 지켜 주는 걸 알고 있는 이는 5위 이내 길드의 길드장, 그리고 선현 길드 사람들 정도였다. 그러니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신데 경호원이라뇨.”

누군가의 말에 도진이 대답했다.

맞습니다. 경호원.”

본인이 인정했다. 그러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입을 딱 다물었다.

그럼 가죠!

현우는 도진을 데리고 사람들 사이를 벗어났다. 그러고는 가까운 발코니로 쏙 들어가 버렸다. 미련이 남은 몇몇이 힐끔거리긴 했지만, 따라붙지는 않았다. 끌려가는 도진이 날 선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다.

허어, 대체 무슨 관계인 건지.”

사람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발코니 안, 거기서는 현우가 도진에게 나무라듯 말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거예요?

?

도진은 이번에도 멍하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게 무방비해요?

제가 무방비했습니까?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은데. 언제나 무슨 일이 생겨도 빠르게 대처할 수 있도록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아 왔다. 그랬는데 현우가 이렇게 말하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요. 아까 그 여자가 팔을 더듬어도 가만있었잖아요. 그뿐인가요다른 사람이 허리에도 손을 대려고 했는데 눈치 못 챘죠?

아니다. 그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다만 하나같이 호의적인 스킨십이라 어찌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을 뿐이다.

그건 엄연한 성희롱이라고요. 단호하게 안 된다 말하고 피했어야죠!

성희롱입니까?

!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느 미친놈이 평화 길드의 길드장을 가지고 성희롱을 하려고 한단 말인가.

봐요. 팔을 이렇게 만지고!

가느다랗고 하얀 손이 근육으로 뒤덮인 탄탄한 도진의 팔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러더니 그대로 가슴을 지나 허리에 머물렀다. 조몰락거리는 손길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렇게 허리도 만지려고 했을 테고!

좀 더 만져 줬으면 좋겠다. 그 생각에 허리춤에서 떠나가는 손을 저도 모르게 잡아챘다.

맞아요이렇게 해야죠!

도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우가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된다. 현우는 그저 자신을 걱정해서 충고의 말을 했을 뿐이다. 그걸 알면서도 절로 손이 움직였다.

도진의 커다란 손이 현우의 팔을 붙잡았다.

이렇게 하는 걸.”

이어 스르륵 내려간 손이 그의 허리춤을 잡아채 가까이 끌어당겼다.

조심해야 된단 말이죠?

도진의 가슴팍에 안기게 된 현우가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아래서 흔들리는 정수리를 보고 있자니 어떤 충동이 치솟았다.

입 맞추고 싶다.

난데없이 치솟은 충동에 도진은 놀라움을 느꼈다. 여동생한테도 이런 생각을 가진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자유로운 한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문질렀다.

지금 내 상태가 어떻지?

정신은 멀쩡하다. 스킬이나 다른 약물로 인한 중독 상태도 아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리니 밤하늘을 비추는 달이 보였다.

모르겠다.

그만큼 현우가 귀여워서 그런가. 하긴 여동생인 예원이도 발랄하고 사랑스러웠지만, 현우도 그에 뒤지지 않았다. 다 큰 남자를 보고 이런 말을 하긴 좀 그렇지만, 보고 있자면 그 귀여움에 가끔 가슴이 뛰곤 했다.

귀엽습니다.”

불쑥 나간 말은 실수였다.

눈이 어떻게 되신 거 아닐까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현우가 신랄한 대답을 되돌렸다.

전 멋진 거라고요.”

그건 아닌 것 같지만,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가슴팍에 묻힌 채 뭐라고 자꾸 이야기를 해 대니 셔츠 위로 그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간지럽지만 싫지는 않다.

그때, 밖에서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커다란 종소리가 울려 왔다.

가 봐야 해요!

현우가 화들짝 놀라며 도진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형.”

돌아보니 파티의 주인공인 선우가 발코니 입구에 몸을 기댄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선우야!

시간 다 됐는데 여기서 뭐 해.”

날카로운 시선이 도진을 찔러 왔다.

잠시 이야기 중이었어.”

그 이야기가 내 생일보다 중요해?

선우가 그러면서 시무룩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현우가 금방 그쪽으로 달려든다. 비어 버린 품속이 허전하다. 역시 아무리 그래도 한 핏줄은 이기지 못하는 것인가. 도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지. 아니, 아닌 게 아니라. 중요한 이야기였지만, 나한테 네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러면 가자, 형. 곧 파티가 시작될 시간이야.”

알았어. 도진 씨도 빨리 나와요!

저는 잠시 있다 나가겠습니다.”

현우는 잠시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이곤 선우를 따라 나갔다. 그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도진은 발코니 난간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뒤로 젖히니 여전히 빛나는 달이 보였다.

동생, 맞겠지?

작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았다. 그냥 평소와는 다른 모습을 보아서, 괜히 몸을 더듬는 바람에 다른 생각이 든 것뿐일 터였다.

도진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몸을 바로 세웠다. 안으로 들어가 현우가 원하던 경호원 일을 이어 할 생각이었다.

선우는 시간이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는 형의 모습에 그를 찾아 나섰다. 형을 찾아낸 건 금방이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만 봐도 알 수 있었으니까. 그러다 보고 싶지 않은 걸 봐 버렸다. 형이 발코니에서 도진에게 안겨 있는 모습을 말이다.

도진은 가끔 말하곤 했다. 현우가 마치 동생처럼 느껴진다고. 저번 포털 사건에서 정신 공격을 당한 뒤로 예원이의 대체재로 자신의 형을 택한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 마음을 놓은 것도 있었다.

남매는 절대로 이어질 수 없는 사이였으니까. 괜찮은 전력인 그를 형을 지키는 데 이용하면 되었다. 그러다 필요 없어지면 내쫓으면 되는 일이고.

그랬는데 저건 뭐야?

어느 오빠가 여동생을 저렇게 안을까.

그동안 가끔 불안을 느끼곤 했다. 여동생에게 대하는 것 치고는 너무 친밀하게 군다. 자신도 브라콤이 대단한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과는 결이 좀 다른 것 같았다.

불안감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형이 언제나 자신의 곁에 있어 줬으면 좋겠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세계는 형이 전부라서. 이대로 죽을 때까지 같이 지냈으면 했다. 하지만 만약에 형에게 다른 상대가 생긴다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어린애 같은 사고방식이라고 비난받아도 좋았다. 형의 곁에는 자신만 있었으면 했다. 그러니 결론은 금방 나왔다.

슬슬 도진을 밀어내자. 이제는 예전보다는 상황이 좀 더 나아졌다. 곁에서 계속 지켜 줄 이라면 굳이 도진이 아니라도 나을 것 같았다. 점박이와 케로도 있었고, 선현 길드에도 실력자는 무수히 많았다.

그래도 도진의 실력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시간은 벌어 줄 수 있을 테니까.

56.

외부에서 폭죽이 터짐과 동시에 나타난 지선우의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발코니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에서 당당함이 느껴진다.

영웅을 조명하다.

방송에서 그랬던 것처럼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느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의외였던 건, 형인 현우의 존재감도 그런 동생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형제라더니. 어느 하나 모자람이 없군요.”

그러네요.”

그동안 방송에서 비친 모습만 보고서 현우를 우습게 여겼던 사람들은 생각을 달리하기로 했다.

지선우는 사자와 같은 존재다. 짐승의 왕인 사자의 형제가 고양이일 리는 없지.”

좀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겠군.”

수군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친 선우는 현우와 함께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갔다. 그를 확인한 찬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외쳤다.

오늘 선현 길드에서 주최하는 파티에 와 주신 귀빈들을 환영합니다. 부디 마음껏 즐기고 가셨으면 합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홀에 잔잔한 음악이 깔리고, 생일 파티가 시작되었다. 거창한 인사나 환영식은 없었지만, 이리저리 섬세하게 신경을 써 놓았기에 원하는 대로 즐기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단순히 즐기기만 하면 여기 온 목적을 이룰 수 없다. 그렇기에 몇몇 사람들은 슬며시 자리를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선우가 사람들로 둘러싸였고, 이어 현우의 주변에도 몰리기 시작했다.

귀찮아지겠는데.

빠져나가려고 틈을 봤지만, 그보다 약하다 해도 전부 각성자다. 이렇게 넓고 트인 공간에서 대놓고 빠져나가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어쩌나 싶어 괜히 끌어안은 케로를 간질거리고 있자니 누군가가 등 뒤에 툭 부딪혀 왔다.

도진이었다. 그가 뒤를 받쳐 주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다소 귀찮은 일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지현우 씨.”

가장 먼저 말을 걸어온 이는 붉은 머리의 외국인이었다.

러시아의 이반이라고 합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직접 만날 수 있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부드럽게 입술을 휘는데 불쾌하기만 할 뿐이었다.

눈이 웃고 있지 않았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가까이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곳은 선우의 생일 파티였다. 여기서 나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적어도 미리 준비한 선우의 생일 케이크를 자를 때까지는 평탄하게 버텼으면 했기에 현우는 마주 웃어 주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멀리서 오신 분이셨군요.”

미국만 할까요.”

그러면서 저쪽에서 선우 못지않게 사람을 몰고 다니는 레온을 바라보았다. 미국의 유명 길드라서 그런지, 본인의 파티가 아닌데도 인기가 대단하다. 하지만 그건 이쪽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이야 현우에게 붙어 있지만, 방금까지만 해도 레온과 별다르지 않은 처지였다. 왜냐하면 이 남자는 러시아 최고 길드 길드장의 아들이었으니까.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각성자가 된 드문 케이스로, 그 힘은 러시아의 불곰이라 불리는 아버지를 능가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아, 음악이 바뀌었군요. 이건 저도 아는 거네요.”

이반은 여전히 능글맞은 태도로 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이 춤추시지 않겠습니까?

순간 표정이 일그러질 뻔했다. 이반도 남자, 자신도 남자. 그런데 같이 춤을 추자고안 그래도 눈에 띄는 두 사람인데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모든 시선이 이쪽으로 쏠릴 것 같았다.

그래서 거절하려고 하는 순간, 뒤에서 손이 뻗어 나왔다.

크고 단단한 손은 그대로 현우의 손을 잡고 자신을 향해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얼결에 끌려가 도진의 가슴에 몸을 기대게 되었다.

저랑 먼저 선약이 있습니다.”

도진은 조용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그렇다면 저는 그다음이어도 괜찮습니다.”

그다음에도 선약이 있습니다.”

그럼 그다음.”

이제 어떤 대답이 돌아갈지 아실 것 같습니다만.”

이반은 웃는 얼굴 그대로 굳었다.

화났네.

현우는 도진의 품에 안긴 채, 이반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보니 조금 재밌는 것 같기도 하다.

재밌는 분이시군요.”

그쪽도 충분히 재밌습니다.”

도진이 이렇게까지 단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하는 건 처음 봤다. 혹시나 무슨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싶었지만 이반은 의외로 조용히 물러났다.

이런 좋은 날 굳이 열을 낼 필요는 없지요. 다음을 기약하겠습니다.”

이반이 멀어지고 나자 도진이 자연스럽게 현우를 돌려세우며 다시 손을 잡았다.

그럼 춤추러 가 볼까요?

?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그건 이반을 막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나이해가 되지 않아 멍하니 서 있자, 도진이 손을 놓고 바로 앞에 서서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저와 춤추지 않으시겠습니까?

으으.”

마계에서 서열 1위인 마족과 싸울 때도 이렇게까지 힘들진 않았던 것 같았다.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에 호기심이 잔뜩 담겨 있다.

정말 이러기예요?

현우가 이를 꽉 물고 말했으나, 도진은 웃기만 할 뿐 물러나지 않았다. 그 속에 담긴 것은 약간의 심술과 장난, 그리고 진심. 더 이상 물러날 곳은 없었다.

두고 보자!

현우는 앞으로 내민 도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기꺼이.”

둘은 홀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곳에는 흥에 겨운 사람들 몇이 춤을 추고 있었는데, 그 사이로 들어갔다.

그런데 저 춤 못 춰요. 춰 본 적이 없어요.”

현우는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이 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음, 생각해 보니 저도 딱히 춰 본 적이 없군요.”

?

그럼 어쩌자고당황하자 절로 몸이 힘이 들어갔다. 분명 음악이 연주되고 있을 텐데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었어요!

주먹으로 도진의 팔을 퍽퍽 치자 그의 몸이 조금씩 밀려났다.

보기보다 힘이 세네요.”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뭐, 일단 대충 음악에 맞추면 되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도진이 다른 손을 현우의 허리춤에 얹었다. 이어 굳은 몸을 이끌며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천히 따라오세요.”

춤은 모른다더니, 도진은 너무나도 편안한 태도로 몸을 움직이며 능숙하게 현우를 리드했다. 중간에 몇 번인가 발을 밟았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다정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자니, 점점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내딛는 걸음이 점차 자연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춤은 모른다더니.”

어디 봐서 이게 춤을 모르는 사람인가. 아무래도 괜히 현우를 놀리려 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좀 더 유연하게 대처했을 텐데.

나도 긴장했었나.

자신이 사라진 후, 처음 하는 동생의 생일 파티라고 해서 알게 모르게 잘해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던 듯했다. 긴장이 풀리자마자 홀을 가득 채우는 음악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곡명은 모르지만, 참으로 듣기 좋았다.

이제는 제법 리듬을 맞출 줄도 안다. 몇 번인가 발을 놀리다가 도진의 리드대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돌자,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음악이 이어지는 동안 제법 즐거웠다.

음악 하나가 끝나고 다음 곡이 흘러나올 무렵, 도진과 현우의 춤은 끝났다.

생각보다 재밌다.

현우는 시작할 때와는 다른 표정으로 웃었다. 한 번 더 추자고 할까. 다음 음악도 아는 건 아니었지만, 도진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며 재차 손을 내밀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현우를 잡아당겼다.

선우야?

다음은 나랑.”

귀여운 동생은 왜 또 이리 심술이 났을까. 선우는 자연스럽게 현우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나아갔다.

홀로 남은 도진이 무엇을 하나 뒤돌아보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든 도진은 현우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 옆에는 점박이와 케로가 붙어 있었다.

선우는 도진보다 좀 더 능숙했다. 춤도 리드도 능숙해서 도진과 출 때보다 한결 편안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자꾸 생각나는 건 도진의 얼굴이다.

형, 무슨 생각 해?

우리 선우. 춤을 참 잘 추는구나, 하는 생각배운 거야?

조금.”

조금이 아닌데?

칭찬을 쏟아붓자 불퉁하던 선우의 얼굴이 평소대로 돌아왔다.

형도 잘하는데?

난 그냥 널 따라가는 거고.”

현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한 곡이 끝나도 선우는 만족할 줄 몰랐다. 어리광 많은 동생은 무려 세 곡을 추고 나서야 형을 놓아주었다.

슬슬 케이크를 자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음악 소리가 다시 나지막해지고, 홀의 불이 꺼졌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순서를 알고 있기도 했거니와 대부분이 각성자다. 이 정도로는 동요할 리가 없었다.

다음은 케이크 커팅식이 있겠습니다!

이어 홀의 중앙에 선 둘의 위로 조명이 떨어져 내렸다.

가자, 형.”

현우는 동생의 생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57.

파티를 즐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왜, 왜 하필이면 가위바위보에 져서어!

파티를 진행하는 중에도 포털은 열리고, 몬스터는 쏟아진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 길드 내에 남아 있어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는 2팀과 6팀으로 결정되었다.

상위권 팀에서 1팀, 그 아래 중간권에서 1팀을 뽑아낸 것이다.

울지 마세요, 팀장님.”

하지만 왜 하필원래 가위바위보 잘하는데이럴 때 져서!

운명이죠.”

부팀장은 허탈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파티장은 한창 즐겁겠지.

선우 니이임!

부팀장의 행동에 팀장은 다시 울부짖었다.

기본적으로 선현 길드에 들어온 이들은 비슷했다. 누구보다 강한 지선우를 동경했다. 물론 대기업에 입사하고 싶단 생각으로 들어온 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생각을 달리하게 된다.

단 한 번이라도 지선우가 싸우는 모습을 보면 매료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2팀의 팀장인 레나가 우는 것도 부팀장은 충분히 이해했다.

오늘 열리는 포털도 없을 거라고 했는데. 에효. 그냥 파티장에 달려가고 싶다.”

레나가 책상에 뺨을 대고 중얼거리는데, 갑자기 날카로운 알림이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레나는 벌떡 몸을 세웠고, 부팀장은 빠르게 가까운 데 위치한 버튼을 눌렀다.

─ 명동에서 거대한 포털이 열릴 조짐이 보입니다계측 결과, 방출형 게이트일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선현 길드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레나는 빠르게 일어서며 말했다.

가자!

언제 늘어져 있었냐는 듯 무기를 챙기고 입고 있는 방어구를 점검한다. 그리고 막 나서려는 순간, 또다시 알림이 들려왔다.

─ 게이트가 열렸습니다현재 몬스터가 쏟아져 나오는 중입니다. 위치는 강남빠른 도움 요청합니다!

갑작스러운 요청에도 레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대기하고 있는 팀은 더 있었으니까. 하지만 알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 게이트가 열릴 기미를 보입니다. 위치는 은평아니, 은평뿐만이 아닙니다지금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만 열 군데, 지방까지 합하면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하나같이 방출형인 게이트였다. 레나와 부팀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길드장님께 연락 넣어나는 일단 가까운 곳부터 가 본다!

요청이 들어온 곳은 선현 길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길드들도 미친 듯이 울리는 요청에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충분했을 수였지만, 갑자기 다발적으로 열린 게이트, 그리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 여러모로 최악의 조건이 되어 가고 있었다.

*

저거 뭐야?

갑자기 강남 한복판에 모습을 드러낸 괴이쩍은 원형의 입구에 사람들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포털 아닌가?

그게 왜 여기 열려오늘은 경고도 없었잖아.”

보기 드물게 포털 경고가 없는 날이었다.

그러게?

만약에 포털이 열린다면 미리 공지하고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했을 텐데. 포털 주위를 지키는 각성자도 보이지 않는다. 철없는 몇몇은 이미 그 주위에 서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5분 뒤, 시내 한복판에 지옥이 열렸다.

크르르륵.

입구에서 가장 먼저 튀어나온 것은 검붉은색의 늑대였다. 송아지만 한 크기의 늑대가 튀어나오자 근처에서 동영상을 찍던 사람이 굳어 버렸다. 늑대는 그런 좋은 기회를 마다하지 않고 곧바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악!

비명을 지르는 남자의 목덜미를 누군가 잡아당겼다. 마침 근처에서 데이트를 하던 각성자였다. 남자에게는 운이 좋았지만, 각성자에게는 나빴다. 각성 등급이 높지 않았던 탓이었다.

빨리 도망치세요!

그런데도 그는 도망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도망치면 대부분의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사람은 늑대의 달리는 속도를 이겨 내지 못한다.

하필 무기도 없는데.

그는 한숨을 내쉬며 늑대 앞을 가로막았다.

빨리, 빨리 511에 전화하세요!

포털, 몬스터가 나타날 시 긴급으로 신고하는 번호였다. 그제야 사람들이 허둥지둥 휴대폰을 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버티자.”

가장 가까운 길드는 선현 길드다. 빠르게 이동하면 금방 도착할 것이다. 각성자는 새하얘진 얼굴로 포털을 바라보았다.

*

케이크는 현우가 고르고 골라 준비한 것이었다. 어떻게든 기억에 남는 생일을 치러 주고 싶어서 고른 하얗고 커다란 케이크는 조명 아래 빛났다.

초에 불을 붙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현우는 초 하나하나에 불을 붙여 나갔다. 이제 겨우 22살. 지나온 세월보다 남은 세월이 많은 동생이 앞으로 계속 행복했으면 했다.

이제 마지막 초만 남았네.

여기에만 불을 붙이면, 끝이다. 시큰해져 오는 눈가를 꾹 누르고 마지막 초를 향해 라이터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파티장을 내리누르는 거대한 힘이 느껴졌다.

쿵.

어디선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장의 샹들리에가 미친 듯이 흔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몇몇 사람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고, 이어 다른 이들도 그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마찬가지로 찬영 또한 휴대폰을 받더니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게이트가 열렸다고 합니다.”

그 말이면 충분했다. 선우는 앞으로 나서 말했다.

오늘 파티는 취소합니다.”

아, 젠장.”

혜선이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다들 같은 소식을 받은 모양이네.”

그 말에 가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대기팀이 전부 출동했다는군요.”

우리도. 그쪽은 어때?

혜선의 물음에 자윤이 답했다.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도 전력이 부족하다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일단 호위 인력은 전부 돌려보내야겠네.”

저도 그래야겠습니다.”

혜선의 옆에 선 가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재킷에 손을 넣어 독이 든 병을 꺼냈다.

야, 너는 파티에 뭔 독을 그렇게 많이 들고 왔어?

혹시나 지선우와 싸울지도 모르는 노릇 아닙니까?

남 생일에 깽판 치려고독사 같은 놈일세.”

뭘 새삼스럽게. 그래도 다행 아닙니까제가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어서.”

그도 그렇지.”

혜선이 자신의 공간 팔찌에서 방패를 꺼내 들었다. 이어 자윤도 전투 준비를 하며 자신의 여동생에게 말했다.

아윤아, 너도 다른 사람들 따라서 나가. 최대한 여기서 멀리 떨어져.”

아윤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일반인인 그녀도, 이건 알 수 있었다. 곧 여기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지금 밖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루어 보면 아마 여기도 게이트가 열리려는 거겠지.

많이, 많이 위험한 거야?

조금.”

자윤은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조금이 아니다. 느껴지는 기운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이 힘은 어디까지 올라가려는 건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랬기에 파티장에서 상대적으로 급이 낮은 각성자들은 죄다 밖으로 내보냈다.

저는 남겠습니다!

몇몇 사람이 남겠다고 했지만, 길드장들이 거절했다.

지금 밖도 심각해. 조금이라도 전력이 필요하다. 여기는 우리들에게 맡겨.”

그렇게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나니, 텅 빈 파티장에 남은 사람은 채 열이 되지 않았다. 국내 5위권 이내 길드의 길드장들, 그리고 러시아의 이반, 일본의 준이치, 미국의 레온.

그쪽도 나가도 될 것 같은데.”

가준이 이죽거렸으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지켜보면 안 됩니까?

준이치가 담담하게 물었다.

안 되지. 재수 없게 어디서 보고 있으려고. 딱히 도울 생각도 없잖아?

그야 그렇습니다만.”

도우려고 해도 나라 간의 여러 가지 일 때문에 걸리는 게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을 나가고 싶진 않았다. 무언가 굉장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그런 예감이 들었으니까.

나도 안 나갈 건데.”

옆에서 감시하던 눈길이 사라지자, 이반은 태연하게 반말을 내뱉으며 준이치의 말에 동의했다.

후, 재수 없는 놈들. 그럼 그쪽은?

가준은 애써 욕을 참으며 레온에게도 물었다.

한국과 미국은 오랜 동맹국입니다. 도울 수 있으면 돕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레온은 그나마 낫다. 하지만 다른 둘의 대답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라 혜선이 미간을 구기며 투덜거렸다.

우리가 구경거리인가?

그런데 누님, 일단 여기에 S급 각성자만 다섯 아닙니까?

외국인들은 빼고 계산했다.

그렇지.”

그런데 저희가 여기 다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알면서 왜 이래?

혜선이 가준의 등을 툭 쳤다.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S급 각성자인 그들의 등에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야 그렇지만.”

그럼 얌전히 기다려. 봐, 게이트가 열린다.”

허공에 작게 생겨난 균열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사람 머리만 균열이 순식간에 자동차가 통과할 만한 크기가 되고, 그로도 모자라서 덩치를 더욱더 불려 나갔다.

형. 형도 나가.”

선우는 아직 남아 있던 찬영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찬영은 서슴없이 나서 현우를 쌀 포대처럼 안아 들었다.

잠깐!

현우가 몸을 빼려고 했지만, 찬영이 단단히 틀어잡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키르륵!

포털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내내 목을 울리던 점박이와 케로가 그 뒤를 따르려 했으나, 현우가 손을 내저었다.

너넨 거기 있어선우, 선우를 지켜!

순식간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크게만 보이던 파티장이 점점 작아졌다. 먼저 떠났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지만, 찬영은 멈추지 않았다.

58.

계속 달리던 찬영이 멈춘 것은 앞서 나간 일행 중에 아윤과 선현 길드 사람들을 발견한 뒤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현우를 내팽개치듯 내려놓은 찬영이 뒤돌아섰다. 본인은 다시 파티장으로 돌아갈 셈인 듯했다. 바닥에 내려선 현우가 그에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는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일이 어떻게 되어 가는 거지.

현우는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헝클어트리며 왔던 방향을 바라보았다. 지금 저기에 지구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강렬한 힘이 도래하고 있었다.

돌아가야 해.

동생만 저런 곳에 남겨 둘 수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현우에게는 그저 하나뿐인 동생이다. 그 생각을 하며 발을 앞으로 내딛는데 누군가가 그의 팔을 잡아 왔다.

안 돼요.”

아윤이었다.

저희는 물러서 있는 게 도와주는 거예요.”

아니다. 힘만 제대로 발휘한다면 현우가 곁에 있는 게 훨씬 도움이 된다. 그동안 여러 이유로 힘을 내보이지 않았지만, 이제는 됐다. 동생이 더 중요하니까.

현우는 아윤의 손을 떼어 놓고 성큼성큼 앞으로 향했다.

안 됩니다!

선현 길드의 사람들이 앞을 가로막았으나, 현우를 잡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빠른 것 같지도 않은데 교묘하게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간다. 다른 각성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체력이 달리는 테이머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돌아와요!

뒤에서 아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하고 달렸다. 한동안 사용하지 않아 무겁던 몸이 점차 가벼워졌다. 되돌아가던 찬영을 따라잡는 것도 금방이었다.

인기척에 뒤돌아본 찬영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 따라옵니까!

동생을 어떻게 혼자 둬요!

혼자가 아닙니다돌아가세요.”

찬영이 멈춰 서서는 다시 한번 현우를 가로막았다.

당신이 있으면 길드장님도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싸우지 못합니다!

이 사람은 왜 제대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할까. 찬영은 솟아오르는 화를 내리누르며 파티장과 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길드장을 도와야 하는데, 되돌아오다니.

도로 보내고 오면 시간을 맞출 수 있을까. 이를 악물고 고민하던 찬영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아니, 다시 떼어 놓고 오기엔 시간이 촉박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그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벽 뒤로 현우를 밀어 넣으며 말했다.

죽기 싫으면 여기서 움직이지 마십시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현우가 피닉스의 수호를 가지고 있는 건 찬영도 알고 있었다. 그 아이템은 상대방의 공격의 크기와 상관없이 무조건 3회를 막는다. 그거라면 현우를 혼자 둬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그렇게 말한 찬영은 몸을 돌렸다.

그 사이 파티장을 한계까지 내리누르던 힘이 개화했다. 무시무시한 크기로 불어난 균열은 파티장을 거의 다 무너트리고 나서야 확장을 멈췄다.

그리고 지금까지 느껴지던 힘의 주인, 그 주인이 균열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크르릉.

짐승이 목을 울렸다. 그저 그뿐이었는데도 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는다.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길쭉한 주둥이였다. 반짝이는 까만 비늘로 덮인 입이 벌어지자 보기에도 괴악한 이빨이 드러났다. 이어 기다란 혀가 날름 허공을 훑고 들어가더니 포효하기 시작한다.

크롸롸롸롸!

그 소리에 점박이는 긴장한 듯, 꼬리를 바짝 세웠다. 얼핏 보면 점박이의 원래 모습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저건 자신과 종이 다르다. 절로 몸이 굽어 가며 식은땀이 흘렀다.

그나마 나은 건 케로였다. 케로는 어느새 본 모습으로 돌아가 네 다리로 단단히 땅을 디디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상대였다. 케로나 점박이가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걸 느낀 건 여기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내내 멀쩡한 기둥에 몸을 기대고 바라보기만 하던 준이치가 검을 잡았다. 이반의 손에서도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으며, 레온 또한 전투 준비에 나섰다.

와아, 미치겠네.”

탱커인 혜선이 방패를 가지고 가장 앞에 나서자, 자윤이 바람을 조종하기 시작했다. 가준은 거기다 독을 풀어 버렸다.

네 쫄따구는?

가준이 물어보기 무섭게 찬영이 안으로 뛰어들어 와 선우의 옆에 섰다.

뭐, 대충 준비된 것 같네.”

준비된 건 그들만이 아닌 것 같았지만. 긴장을 풀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짐승의 머리가 게이트 바깥으로 나왔다. 이어 목이, 단단한 가슴팍이, 날카로운 발톱이 달린 앞발이 나왔다.

진짜 드래곤인가?

가준의 말에 다른 이들이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점박이에게 블랙 드래곤이라는 개체명이 붙긴 했지만, 아무래도 진짜 드래곤은 저쪽인 것 같았다.

끔찍하네.”

혜선은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잘하면 여기가 무덤이 되겠는데.

갑자기 저런 끔찍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낼 게 뭐람. 여기 있는 인원들의 면면을 보면 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자신은 어찌 될지 몰랐다. 일단 방패를 든 그녀가 가장 앞에 나설 게 뻔했으니까.

그렇다고 도망갈 순 없지.

주먹을 쥐고 방패를 두드렸다. 혜선의 능력은 받는 데미지 감소, 그리고 근력 강화다. 따로 도발 능력은 없었지만, 소란으로 주의를 끄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자, 여길 봐라.

커다란 노란 눈이 혜선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씨익 웃는다. 파충류의 얼굴인데도 그를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느릿하게 빠져나오던 몸이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끝이 없을 것 같이 빠져나오던 몸체가 마침내 모습을 다 드러냈다.

저 크기는 사기 아닙니까?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던 자윤이 말했다.

사기네.”

사기지.”

가준과 혜선이 대답했다.

반면 선우는 침착하게 허공에 물방울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무기였으나, 옆의 찬영이 힘을 불어넣는다면 더 무시무시해질 것이다.

키륵키륵키륵.

몸을 전부 빼낸 드래곤이 기이한 소리를 냈다. 웃음소리인 것 같았다. 점박이는 더욱더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케로는 그쯤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여전히 드래곤은 그보다 강하게 느껴지고, 무섭다. 그런데 어쩐지 낯이 익다.

크릉?

왜 낯이 익을까. 케로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드래곤이 먼저 공격을 해 왔다. 단독주택만 한 크기의 몸을 돌리며 꼬리를 휘두르자,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났다. 가장 먼저 혜선이 그를 막아 내고, 이어 공격이 가해졌다.

전격을 머금은 물의 채찍이 몸을 휘감고, 바람에 섞인 독이 주변을 맴돌았다.

질 수 없지.”

이반이 손에서 피워 올린 불꽃을 드래곤에게 쏟아내고, 준이치와 레온이 검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덩치가 너무 크고 단단해서 비늘을 뚫기는 쉽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전격이 튀고, 얼음이 폭파하며, 그 자리에 떨어진 불꽃이 모든 것을 태울 듯 날름거렸다. 보기에 장관인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 모든 걸 드래곤은 움직이지도 않고서 고스란히 맞았다. 무사할 것 같지 않았다.

해치웠나?

가준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런 말을 내뱉자, 혜선이 눈을 세모꼴로 뜨며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왜요?

그건 필패하는 마법의 단어라고!

그런 게 어딨습니까?

여기 있지!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드래곤은 멀쩡하게 몸을 일으켰다.

너 때문이야!

혜선은 그렇게 말하며 재차 떨어지는 드래곤의 꼬리를 막아 냈다. 어찌나 묵직한지 절로 몸이 뒤로 밀린다. 그렇게 공격을 쏟아 부었는데 비늘만 좀 그슬렸을 뿐 큰 상처가 없다.

공략법이라도 있으면 좋은데, 생전 처음 보는 몬스터였다.

건물이 무너진 공터 위로 수많은 힘이 쏟아져 내렸다. 그중 단연 눈에 띄는 건 선우의 능력이었고, 그다음은 케로였다. 세 개의 머리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염은 이반의 능력에 조금도 뒤지지 않았다.

크르륵.

처음에는 귀찮다는 듯이 대응하던 드래곤의 동작이 서서히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보아하니 전투에는 그리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패턴이 단순하다.

캬오오오!

그쯤 되니 점박이도 용기가 생겼는지, 공격을 보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게 드래곤의 화를 돋우었다.

감히, 감히!

마계에서는 피해 다니기만 하던 드레이크가 덤벼드니 부아가 치민다. 드래곤의 속이 부글부글 끓으며 입이 벌어졌다. 브레스를 쏠 셈이었다. 그러나 그걸 가만 보고 있을 이들이 아니었다.

공격이 쏟아지며, 혜선이 위치를 바꾸었다. 점박이가 머리에 달라붙었으며, 케로가 혼신의 몸통 박치기를 하여 브레스의 방향을 바꾸어 냈다. 조마조마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좀 떨어진 곳에서 끼어들 틈만을 노리며 그걸 보고 있던 현우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저 드래곤 낯이 익은데?

과거 현우가 마계에 살 적에 바이크가 셋 있었더랬다. 그중 1호가 처음 굴복시킨 점박이요, 2호는 마계에만 서식하는 거대한 뱀이었으며, 3호는 그중에서 가장 큰 드래곤이었다. 그래 봤자 어린놈이라서 다른 드래곤에 비하면 작은 편이었지만.

현우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그때 보았던 그 어린 드래곤의 크기를 좀 더 키워 보았다. 보통 해츨링 시기를 지나면 한 번에 확 자란다고 했지긴가민가하긴 하지만, 많이 닮기도 했고.

사실 블랙 드래곤은 그놈이 그놈 같았지만, 시도해 봐서 나쁠 건 없을 테니까. 현우는 슬금슬금 앞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싸우느라 바빠 그런 현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했다.

바이크 3호의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났다.”

두눈박이.

점박이와 달리 딱히 생각나는 이름이 없어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을 잡아 이름을 지어 주었다. 물론 대부분의 생물체가 눈이 두 개이긴 했지만, 걔가 유독 크긴 했으니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다른 이가 그를 눈치챘다. 레온은 현우를 바라보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가 눈치채자 다른 이들도 현우를 알아차리는 덴 오래 걸리지 않았다.

59.

각성자들이 눈치챈 것을 몬스터라고 모를 리 없었다. 내내 적들을 바라보던 커다란 눈동자가 데굴 굴러 새로 등장한 인간에게로 향했다.

샛노란 파충류의 눈이 길게 찢어졌다. 이어 거대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익숙한 얼굴이다.

과거 그의 어린 시절은 완벽했다. 그는 누구보다 강했으며,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 어떤 몬스터라도 감히 덤벼들지 못했고, 덤벼들더라도 한 끼 식사가 되었을 뿐이다.

부모님은 세상에는 조심해야 할 존재란 게 있다고 했지만, 아직 그를 만나 본 적이 없던 어린 드래곤은 의기양양하게 주변을 누볐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보다 유독 멀리 외출을 한 날이었다.

그는 희멀겋고 약해 보이는 특이한 생물을 발견했다.

아아, 저게 마족이란 것인가.

단 한 번도 마족을 보지 못했기에 호기심이 들었다.

마족은 조심해야 한단다. 대부분은 우리보다 약하지만, 손가락 하나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는 자도 있단다.

그런 말을 들었지만, 눈앞의 존재는 손가락 하나로 드래곤을 굴복시킬 것처럼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태연하게 접근했다. 잡아다가 마족에 대해 연구도 좀 하고 놀려 먹을 생각이었다.

그게 실수였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그를 본 마족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건 또 뭐야.

끼에에엑!

뭐긴, 위대한 드래곤이시다크게 소리친 그는 당당하게 마족에게 덤벼들었고, 이후 고통이란 단어를 이해했다. 죽도록 처맞았다는 소리였다. 평소에 자랑하던 강인한 비늘도, 끈질긴 생명력도 그저 더 맞을 수 있도록 해 주는 비료에 불과했다.

좋아, 넌 이제부터 바이크 3호. 이름은 두눈박이다.

그렇게 위대한 블랙 드래곤 족의 하르모니아는 두눈박이가 되었다. 얻어맞고 너무 분해서 부모님께 도움을 요청하기도 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대는 마계의 서열 1위와도 쌈박질을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가 마족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도 그때 알았다.

그 뒤로 한동안 지옥이었다. 부르면 부르는 대로 달려가 바이크가 되었다. 바이크가 대체 뭐길래심지어 1호도, 2호도 아닌 3호였다!

내가 누군데!

두눈박이는 분노에 떨었지만, 한번 잡힌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앞으로도 인생은 이렇겠구나. 내키는 대로 몬스터들을 패고 다니던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할 때, 그가 사라졌다.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해도 그를 제지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행복뿐이다, 그렇게 생각할 때 또 다른 존재를 만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마족이었다. 두눈박이는 치열하게 싸웠지만, 그 마족을 이길 수는 없었다. 부모님은 드래곤이 위대한 존재라고 말했는데, 왜 여기저기서 터지기만 하는가.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여기로 들어가라.

승자인 마족이 원하는 것은 정체 모를 입구로 두눈박이가 들어가는 것이었다. 입구는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포털이었지만, 다소 마법적 소양이 떨어지는 두눈박이는 그걸 알 수 없었다. 그저 밀리듯 그 안으로 들어설 수밖에.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포털을 통과하니 다른 세상이 나왔다. 심지어 그곳에는 사람이 많았다. 마족보다 강하던 무시무시한 사람 말이다!

두눈박이는 잠시 눈치를 봤다. 그러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예전에 만난 사람에 비해 약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 정도는 이길 만하다. 절로 히죽 웃음이 지어졌다.

사람들이 공격을 퍼붓긴 했지만, 화려한 효과에 비해 크게 아프지도 않다.

좋아, 내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 주도록 할까.

두눈박이는 슬슬 포털에서 몸을 더 빼내었다. 되돌아가 봤자 만나는 건 그 마족일 테니, 당분간은 여기 머무르는 것도 괜찮겠지.

그 생각이 깨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새로 나타난 사람의 얼굴이 이상하도록 눈에 익었다. 드래곤은 머리가 좋은 종족으로, 한 번 본 것은 쉽사리 잊지 않는다.

왜 당신이 여기 있어!

두눈박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나 보이는 것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눈앞에 서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두눈박이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슬슬 고개를 낮췄다. 그리고 바닥에 머리를 딱 붙이고 나서야 다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

그사이 싸우던 놈들 중에 제법 괜찮았던 놈 둘, 더 약한 놈 하나가 그에게 달라붙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몸을 의탁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매달리는 모양이었다.

재수도 없지.

두눈박이는 그대로 얌전하게 눈을 깜박였다. 복종의 표시였다.

형, 왜 돌아온 거야미쳤어?

선우가 무섭도록 화를 냈다.

당장 나가십시오.”

도진은 현우의 손을 잡아당기며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리고 당장 이동하려 하기에 현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기다리긴 뭘 기다립니까!

도진도 평소와 다르게 잔뜩 긴장한 채 현우를 나무랐다.

겁이 없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러면 안 됩니다.”

저길, 저길 보세요!

현우는 잽싸게 드래곤을 가리켜 보였다. 당당하게 몸을 들고 오만하게 주변을 내려다보던 드래곤이 얌전한 강아지처럼 몸을 낮추고 있었다. 그리고 커다란 노란 눈을 굴리는데 그 모습이 기묘하게 순해 보인다. 공격 의사가 없어 보였다.

쟤 왜 저러는데?

잔뜩 긴장한 채 혜선이 말을 내뱉자, 가준이 받았다.

모르겠습니다. 왜 저럴까요?

제 눈이 잘못된 게 아니라면, 싸울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자윤이 말에 사람들도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을 찢어발길 듯이 노려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뭘까고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새로 나타난 현우에게로 향했다.

형.”

선우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그러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점박이와 비슷한 경우야?

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

그 말은 다른 각성자들 귀에도 들어갔다. 이반과 준이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고, 레온은 팔짱을 낀 채 몬스터와 현우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테이밍이 가능한 겁니까?

실상은 테이밍이 아니었지만, 현우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섰다. 그 옆을 선우와 도진이 지켰다.

두눈박이?

이름을 부르자 몬스터가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일단 나올 수 있나?

그렇게 말하자 두눈박이가 슬며시 앞으로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기다란 목, 단단한 가슴팍, 이어 몸통이 이어지는데 상당히 길고 크다. 점박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덩치였다. 온전히 밖으로 빠져나온 몸에 파티장이 흔들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곧 무너질 것만 같았다.

밖으로 나갈까요?

현우의 말에 다들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파티장 밖으로 모두 나가자 두눈박이가 몸을 쭉 폈다. 부서진 파티장과 조명을 배경으로 서 있는 그 모습은 마치 일본 전대물의 괴물같이 보였다.

고질라 같네.”

이반이 휘파람을 불며 하는 말에 준이치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긴 게 똑같단 소리는 아니고.”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두눈박이는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몸을 낮췄다. 하는 행동이 잘 길든 개 같았다.

몸 작게 할 수 있어?

현우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빛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빛이 사라졌을 때 그 자리에 나타난 것은 흑발에 노란 눈을 가진 미청년 한 명이었다.

이건 또 뜻밖의 일인지라. 현우는 멍하니 미청년을 바라보았다.

아니, 드래곤인 건 알고 있었지만.

드래곤이면 성인이 된 뒤에 폴리모프가 가능하다. 다른 블랙 드래곤에 비해 몸집도 작고 애가 덜 떨어져서 몰랐는데, 이제 성인이 되었구나. 현우는 나름 감탄하며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두눈박이?

네.”

말도 할 줄 안다.

몬스터가 사람이 됐네?

혜선은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두눈박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만 보십시오, 누님.”

보다 못한 가준이 혜선의 눈을 가렸다.

아, 왜몬스터잖아!

제 눈엔 벌거벗은 청년으로 보입니다. 우리 체통은 지킵시다.”

제기랄.”

혜선은 투덜거리면서도 얌전히 눈을 가렸다.

그나저나 이번 일은 특이한 케이스로 남겠군요.”

자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하더니, 이젠 사람으로 변했다. 지금이야 현우 덕분에 전투가 중단되었지만, 만약에 계속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특이한 케이스기만 하겠냐.”

혜선은 한숨을 폭 내쉬더니 뒤돌아섰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