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3~50화 (6/16)
  • 43.

    어어, 저거 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

    팀장이 멍하게 내뱉는 소리에 팀원이 당황했다.

    ?

    하지만 강아진데요강아지를 싫어하는 건 아니다. 외려 좋아하는 쪽에 가까웠지만, 사람도 다치는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 강아지마저 챙기긴 어려웠다. 게다가 의외라고 해야 할지. 강아지는 몬스터의 머리 위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아가며 잘 버티고 있었다.

    덕분에 몬스터는 더욱더 화가 났고 말이다.

    왜, 왜 안 떨어져처음에는 머리만 흔들던 점박이였으나 이제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리 쿵, 저리 쿵. 벽에 머리를 박고 날개까지 휘저었다. 꼬리를 휘두르기도 했으나, 뭔가 맞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너무나도 화가 났다. 반드시 죽이고 말테다점박이는 그대로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높은 데서 몸을 회전시켜 떨어트릴 셈이었다. 그러나 고도가 높아질수록 이상하게 머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했다. 열심히 날개를 파닥거려 보았지만, 등까지 묵직해지면서 점점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끼이이익!

    이러다가는 작은 생물을 죽이기 전에 자신이 다칠 것 같아서 필사적으로 버텨냈다. 하지만 바닥에 이르러서는 결국 고꾸라지고 말았다.

    뭐야뭐야점박이는 끙끙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앞을 가득 채우는 까만 벽이 보였다. 이게 뭔가 싶어 시선을 천천히 올리니 그 끝에 개 머리 세 개가 보였다.

    점박이와 눈을 마주친 개, 케로는 씨익 입을 끌어올렸다. 짐승의 형태인데도 웃는다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이어 점박이는 힘차게 몸을 튕겨 케로를 털어냈다. 이번에는 케로도 순순히 비켜 주었다.

    끼르르르륵!

    마계에서 보던, 익숙한 얼굴에 점박이가 가장 먼저 한 행동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언제나 같이 다니던 발록과 사람이 있나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암만 샅샅이 살펴봐도 둘이 보이지 않는다. 없다.

    그걸 확인하고 나자 점박이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발록과 사람은 이기기 힘들지만, 케로베로스는 이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애초에 딱히 급 차이가 크게 나는 몬스터도 아니었고.

    점박이는 눈을 가늘게 뜨며 케로베로스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다 날갯짓을 시작했다. 원래 날 수 있는 생물이 그렇지 않은 생물과 땅에서 육탄전을 벌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사람들은 골려 줄 생각에 그랬다지만, 케로베로스에게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힘차게 날아오르려 했지만, 케로베로스가 좀 더 빨랐다.

    크왕!

    달음박질쳐 순식간에 거리를 줄인 케로베로스가 날개를 물고 늘어졌다. 날개를 찢을 생각이다그 사실을 알아챈 점박이가 미친 듯이 몸부림치며 그의 머리를 때렸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쿵쿵!

    거대한 두 몬스터가 얽혀서 거리를 나뒹구니 연신 커다란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가로등이 휘어지고, 나무가 부러진다. 건물 벽에는 구멍이 뚫리고, 도로가 갈라졌다.

    일단 뒤로 물러선다!

    팀장은 다급히 외쳤다. 작고 까만 강아지가 갑자기 모습을 키우더니 블랙 드래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다음부터는 속수무책이었다.

    공격해야 하나?

    이를 악물고 고민하는데,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한국이란 작은 나라에서 나타난 1세대. 그 1세대가 몬스터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고 하였다. 다른 1세대 가족과의 대담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머리가 세 개 달린 거대한 지옥의 파수꾼.

    전설 속에 나오는 케로베로스. 그 모습과 똑같다고 하였다.

    공격할까요?

    아니, 일단 지켜본다둘이 지칠 때까지 지켜봐!

    케로베로스가 아군이건, 적군이건 그쪽이 더 나으리라 생각했다.

    팀장이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에도, 전투는 연신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우위를 점한 쪽이 어느 쪽인지 드러나기 시작했다. 점박이가 날 수 없는 시점에서, 승기는 이미 케로베로스에게 돌아갔다.

    필사적으로 애시드 브레스를 내뿜어 보았지만, 이어 터져 나오는 화염에 가로막혀 버렸다. 점박이의 속성은 독, 케로베로스의 속성은 불. 불은 독을 이긴다고 하였으니 불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아무래도 만만하다 생각했던 건 망상이었던 듯하다.

    너무 억울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막 뭔가 해 보려는데 케로베로스가 나타나다니. 해가 질 때까지 열심히 버티던 점박이는 결국 바닥에 무너져 내렸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여기던 반짝이는 비늘은 여기저기가 뜯어져 있었고, 날개에는 구멍이 뻥 뚫렸다. 그뿐이라 어찌나 얻어터졌는지,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상태로 널브러져 있자니 의기양양하게 다가온 케로베로스가 점박이를 앞발로 툭툭 쳤다.

    끼륵.”

    싫다고 고개를 내저어보았지만, 주먹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결국 점박이는 훌쩍이면서 몸을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자리에 남은 건 너덜너덜해진 날개 달린 작은 도마뱀 한 마리였다.

    !

    어느새 다시 작아진 케로베로스, 케로는 의기양양한 태도로 그런 도마뱀을 입에 물었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거리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붙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오늘따라 질문이 많았다.

    누가네가그래, 정의가 불타오르는 것 같으니 임무를 하나 맡기겠다.”

    ?

    저 몬스터가 어디 가는지 뒤를 따라가 보도록.”

    혼자서요?

    위험하면 튀어.”

    위험하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팀장은 팀원에게 일을 맡겨놓고 처참하게 망가진 거리를 돌아보았다. 이제 이걸 복구시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인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케로는 뒤에 사람이 따라오는 걸 알고 가볍게 속도를 올렸다. 작은 몸체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높이를 뛰어올라서는 그대로 건물 옥상을 밟고 점프했다. 그 모습이 마치 날아다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기를 20분,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한 케로가 가슴을 쭉 폈다.

    도마뱀을 잡아 왔어요!

    날지 못하면 할 줄 아는 게 없는 멍청한 도마뱀. 케로는 현우 앞으로 다가가 입에 문 걸 퉤 뱉어냈다

    키르르르르.”

    케로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점박이는 애처롭게 울었다. 20분이 넘게 매달려서 뛰어왔더니 죽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동정심이라도 사보고자 약한 척을 해 보았다.

    오랜만이네.”

    현우에게 인사를 받기 전까지만. 점박이는 천천히 눈을 깜박이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현우 얼굴을 한 번 보고, 하늘을 한 번 보고. 비명을 질렀다.

    키야아아아악!

    그런 점박이의 머리를 케로의 앞발이 치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바닥에 머리를 처박았으나,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놀랐다.

    왜 여기에 저 자가 있어?

    절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꿈이지?

    눈을 감았다 떠보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까 그 몬스터인가?

    응.”

    그런데 얘도 작아질 수 있네?

    마계에서도 상당한 힘을 가졌다고 알려진 몬스터들은 대부분 크기 조절이 가능했다. 그렇기에 케로도 점박이도 작아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게.”

    그래서 이제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선우가 점박이를 가리켰다.

    그러게. 어쩔까?

    이야기 하는 둘 사이로 레온이 끼어들었다.

    일단 그냥 데려가시는 건 안 됩니다.”

    왜요?

    뉴욕에 피해를 입힌 몬스터이기에 타국 사람이 데려간다면, 다른 사람들이 가만있질 않을 겁니다.”

    하지만 케로가 잡았는데요?

    상황이 복잡하게 되었다. 점박이는 그래도 몬스터 치곤 유순하게 지낸 편이었지만, 그래도 그로 인한 피해가 적지 않았다. 오는 공격까지 무시할 정도로 몬스터가 상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전투기가 몇 대 부서지고, 각성자 여럿이 다쳤다. 방금 전투 때문에 거리가 엉망이 되기도 하였고.

    죄송합니다만, 일이 복잡합니다.”

    레온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얘를 데려가면 어디 쓰실 건데요?

    살아있는 희귀한 몬스터이니 여러 연구에 쓰겠지요.”

    힘들 텐데요.”

    그거야 해 보면 알지 않겠습니까?

    물러날 생각이 없는 레온을 보며 현우는 팔짱을 꼈다. 어쩐다. 교활한 녀석이니 기회만 나면 크게 난장을 칠 것인데. 그때 선우가 현우에게 물어왔다.

    형, 이거 데려가고 싶은 거야?

    응.”

    그럼 내가 손 써 볼게.”

    선우가 자신만 믿으라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때쯤 점박이와 케로의 뒤를 따라오던 가디언 길드의 일원이 도착했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점박이와 케로, 그리고 자신의 길드장을 보더니 금방 자세를 바로잡았다.

    길드장님을 뵙습니다영광을 위하여!

    인사는 됐습니다. 그보다 몬스터 이송차를 불러오십시오.”

    !

    그렇게 점박이는 이송차에 실려 미국 내 연구실로 가게 되었다.

    그리고 선우와 현우, 도진은 뉴욕에서 좀 더 머무르며 상황을 살펴보기로 하였다.

    *

    이게 그 몬스터입니까?

    네, 그렇다고 합니다.”

    이렇게 작은데요?

    몸의 크기 조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대단하군요새로운 발견입니다.”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들뜬 표정으로 거대하고 투명한 벽 너머에 갇힌 작은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이 작은 것이 집채만 한 몬스터였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일단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으니, 조금 회복시킨 후 실험을 시작해 봅시다. 할 것이 아주 많습니다!

    내내 앞발에 머리를 묻고 있던 점박이는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며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케로가 전달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인간들을 질리게 만들어. 너를 통제할 수 없음을 알려 줘.

    그 정도야 쉽지. 점박이는 히죽 웃으며 다시 고개를 앞발에 파묻었다. 일단은 부상 회복이 먼저였다.

    44.

    교활한 점박이는 끙끙 앓는 척을 하며 죽어가는 시늉을 하였다. 마계에서는 강한 편이었지만, 그런 점박이에게도 어린 시절은 존재했다. 가끔 살아있는 먹잇감만을 선호하던 몬스터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했던 위장. 그건 사람들에게도 훌륭하게 먹혀들어 갔다.

    인간을 질리게 만들라고 했지만, 어떤 방식으로 하라고는 안 했으니까. 점박이는 몸의 상태를 조절해 나갔다.

    점점 몸이 나빠져 가나 봐요.”

    죽으면 원래대로 커지나아니라면 저 작은 도마뱀 하나 가지고 실험을 하게 생겼는데그러면 재료가 너무 부족해.”

    영양분을 조금 공급해보는 건 어떨까요죽지 않을 정도로만.”

    그건 좀 위험하지 않나그 때문에 일부러 먹이도 안 주고 있는데.”

    그래도 이대로 말라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연구소장은 잠시 고민을 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조금만. 모처럼 처음 보는 몬스터가 들어왔는데, 죽이기엔 아깝지.”

    육식이겠죠?

    아마도?

    사람들은 문을 조금 열고 고기를 밀어 넣어주었다. 그러나 점박이는 끙끙대기만 할 뿐 거기에 입을 대지 않았다.

    먹지 않는데요?

    그러면 다른 방식으로라도 주입해 보지.”

    다음엔 보호구를 입은 각성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니, 이런 건 직접 하라고.”

    이런 상황이 될 때만 각성자가 필요하지. 밀려 들어간 각성자는 투덜거리며 연구원들이 말한 걸 떠올리려 애썼다.

    몸이 작으니까 등 쪽에 주삿바늘을 꽂으면 됩니다. 너무 깊이 넣지는 말고 얕게.

    장갑을 낀 손이 축 늘어진 점박이의 몸에 닿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이 점박이가 원하던 순간이었다. 입을 쭉 찢으며 웃은 점박이는 곧바로 각성자에게 달려들었다. 거대해진 몸이 사람을 깔아 누르고 상처 입혔다.

    !

    특수 재질로 만들어진 우리에 몸이 부딪칠 때마다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졌다.

    마비, 마비 가스 넣어!

    곧바로 우리 안에 가스가 퍼져 나갔으나 이미 늦었다. 점박이가 미친 듯이 날뛰는 탓에 우리에 금이 갔기 때문이었다. 영리한 점박이는 금이 간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몸을 부딪쳤다.

    안에 들어갔던 각성자는 피투성이가 되어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위이이잉!

    사이렌이 울리고 연구소를 지키던 각성자들이 몰려왔다. 그쯤에 점박이는 깨진 우리 밖으로 기다란 목을 빼내고 있었다.

    도망치게 둬선 안 돼!

    잡아!

    소란스러운 가운데 점박이의 입이 열렸다. 그리고 입에서 모든 것을 녹이는 독이 퍼져 나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각성자 몇이 녹아내린 신체를 붙잡고 울부짖었고, 나머지는 뒤로 물러났다.

    공격이 계속 날아오는 가운데, 점박이는 틈새로 발을 빼냈다. 빠지직 소리를 내던 우리는 반쯤 무너져 내렸고 마침내 거대한 몸뚱이가 전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다음은 악몽이었다. 날개를 다친 탓에 날지는 못했지만, 지상에서 날뛴다고 하여 가진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당장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 많은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특히 미처 피하지 못한 비각성자 연구원들의 피해가 가장 심했다.

    뒤늦게 가디언 길드의 1팀이 올 때까지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자신을 희생하는 것뿐이었다.

    이런이런.”

    레온은 간신히 다시 잡아 둔 점박이를 보며 혀를 찼다. 당장 집어넣을 만한 거대 우리가 없기에 일단은 포박하여 바닥에 박아 놨는데, 그 상태에서도 교활하게 굴고 있다.

    죽은 것처럼 늘어져 있다가 제일 먼저 접근한 각성자를 물어뜯었다. 이후 그 방법이 통하지 않게 되자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묶어둔 끈이 당장이라도 풀릴 듯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저거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겁니까?

    연구소장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점박이를 바라보았다.

    지금으로서는 죽이는 게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그건, 그건 안됩니다새로운 몬스터라고요그런 몬스터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인데살아 있는 몬스터와 죽어 있는 몬스터. 당연히 살아 있는 쪽이 좀 더 많은 걸 알아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안 그래도 몬스터를 잡아 온 선현 길드쪽에서 자신들의 몫을 주장하고 있는데, 연구소장은 이기적으로 굴기만 했다.

    정말 인간은 이기적이라니까.

    하지만 그런 면이 있어서 인간이 흥미로운 것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레온은 몬스터 못지않게 번거로운 연구소장에게 좀 더 관대해지기로 했다.

    일단 테이머를 데려와 보죠”

    그렇군요. 테이머가 있었습니다잘만 하면 우리가 수리될 동안 버틸 수 있겠군요!

    연구소장은 기꺼워했다.

    다음날, 고르고 고른 테이머 몇이 연구소에 도착했다. 몬스터를 본 테이머 중 일부는 테이밍을 포기했다.

    이건, 이건 무리입니다. 괴물 아닙니까전 최대로 테이밍한 게 레드 보어 정도라고요.”

    붉은 털을 가진 멧돼지를 닮은 몬스터 레드 보어. 제법 가죽이 두껍고 속도가 빨라 테이머들이 애용하는 몬스터였지만, 그도 점박이에 비해선 작았다.

    그렇게 일부가 빠지고 나니 이제는 거대 몬스터를 테이밍해 보고 싶은 욕망을 가진 자와, 의무를 가진 자만 남았다.

    그들은 저희끼리 순서를 정하더니 한 사람씩 앞으로 나섰다.

    제가 첫 번째군요!

    제법 유명한 테이머인 닉이 양손을 비비며 나섰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손을 잃을 뻔했다. 레온이 기다리고 있다가 잡아당기지 않았으면 그대로 꿀꺽 삼켜졌을지도 몰랐다.

    다른 테이머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어느 정도 시도는 해 본 이도 있었으나, 결국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참으로 무능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어쩝니까?

    연구소장이 우는 얼굴을 하였다.

    다 늙은 중년의 우는 얼굴은 보고 싶지 않은데.

    레온은 혀를 차며 생각에 잠겼다.

    이 기회에 1세대를 실험해 볼까?

    지선우가 애지중지 감싸고 있긴 했지만, 하는 행동으로 봐선 틀림없이 여기에 관심을 가질 것 같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십시오. 다뤄볼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습니다.”

    빨리, 빨리 부탁드립니다!

    레온은 연구소장을 뒤로 하고, 연구소를 나섰다.

    *

    그날 오후, 현우는 레온의 방문을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들이 머무는 호텔로 찾아온 레온은 웃는 얼굴로 인사를 해 왔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앞으로 나선 선우가 레온을 상대하며 현우를 슬쩍 뒤로 밀자 도진이 그를 안쪽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서로 사이도 안 좋으면서 이럴 때는 죽이 잘 맞는다.

    잠시 들어가도 됩니까?

    그전에 용건을 알고 싶군요.”

    흐음. 혹시 이번에 잡힌 블랙 드래곤에게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관심은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요청을 묵살해 오지 않았습니까?

    고의는 아니었습니다. 이쪽도 이래저래 복잡해서요. 그래서 어쩌시겠습니까?

    선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들어오라는 표시였다. 레온은 태연하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건 형님도 같이 들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제가 듣고 전달하면 됩니다.”

    이런. 제 신뢰도가 이것밖에 안 됩니까?

    가디언 길드의 레온이라면 대외적인 평이 좋은 각성자였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라면 믿어도 되는 사람이었지만, 이상하게 꺼림칙했다. 그 때문에 선우는 미국을 몇 번 오가면서도 레온과는 공적인 관계만 유지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저번에 레온과 같이 다니면서도 내내 형에게 붙어 다닌 것이기도 했고.

    선우는 레온의 말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할 말이 뭡니까?

    블랙 드래곤 말입니다. 통제가 안 됩니다.”

    레온은 선뜻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냈다.

    테이머들도 불러 봤지만, 테이밍을 하지 못하더군요. 그렇다고 죽일 수도 없고. 알지 않습니까살아 있는 새로운 몬스터의 가치를 말입니다.”

    선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레온을 바라보았다.

    그런 이유로 형님을 빌릴 수 있을까요?

    테이머도 견디지 못한 몬스터입니다. 제 형이 견딜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저 몬스터도.”

    레온의 손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케로를 가리켰다.

    쉽게 다루지 않았습니까?

    케로야 사정이 있어서 다루게 된 것일 뿐입니다. 새로운 몬스터는 이야기가 다르지요.”

    아주 부정적인 반응을 아니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공격이라도 하려 들었을 테니까. 그만큼 형을 아낀다고 소문이 난 각성자니 말이다.

    원하는 게 있습니까저는 돌려 말하기는 싫어합니다.”

    실험에는 협조하겠습니다. 대신 그 몬스터를 저희가 받고 싶습니다. 받은 뒤에도 필요하다면 실험 재료를 제공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거 쉽지 않은 조건이군요. 하지만 못할 조건도 아니긴 합니다.”

    다른 이라면 몰라도 레온에게는 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는 단순한 길드의 길드장이기만 한 게 아니라, 미국 재벌가의 자식이기도 했으니까. 연구소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전부 드리기만 하는 건 조금 불공평한 것 같군요. 그러니 하나 추가합시다.”

    뭘 말입니까?

    1세대와의 대화. 저는 그걸 원합니다.”

    레온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그의 말에 선우의 표정이 굳었다.

    해를 끼칠 만한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양손을 들어 올려 보인 레온이 이어 말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그가 본 마계와 제가 본 마계가 어떻게 다른지요.”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이지요. 저는 1세대와 관련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지금보다 더 강해지고픈 욕망은 있습니다만, 그건 결국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석적인 대답이었다.

    45.

    잠시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결론을 내리셨으면 좋겠군요. 연락은 여기로 해 주시면 됩니다.”

    레온은 명함 한 장을 건네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선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명함을 내려놓았다. 일단 모든 건 원하는 대로 흘러갔다. 그가 형과의 대화를 원하는 것도 예상했던 범위 안이었다. 그렇지만 예상했던 것이라 하여 내키는 일인 건 아니었다.

    형, 꼭 가야 해?

    응.”

    현우는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놈의 몬스터, 죽건 살건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심술이 돋아났지만, 결국 선우는 현우에게 약했다.

    알았어. 대신 가거든 절대로 우리에게서 떨어지면 안 돼. 돌발행동도 하지 말고.”

    괜찮아. 여차하면 케로가 있는걸?

    현우는 케로를 두 손으로 안아서 높이 들어 올려 보였다.

    와앙.”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하는 모습에는 조금의 신뢰도 들지 않는다. 그래도 형을 잘 따르니까 괜찮겠지. 무슨 일이 생기면 형만 훌쩍 데리고 도망칠 만한 녀석이다.

    그럼 내일 연락을 넣을게.”

    상대 쪽이 좀 더 그들을 원하게끔, 시간을 끌 생각이었다.

    그런데 형.”

    ?

    밖에는 나가 보지 않아도 돼?

    첫 해외여행인데 밖이라도 구경해 보는 게 낫지 않을까그런 마음에 물었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예상과는 달랐다.

    나가지 않아도 돼. 사람 사는 곳이야 다 비슷하겠지, 뭐. 그보다 낮잠이나 좀 잘래. 선우야.”

    현우는 그렇게 말하며 침대 옆을 툭툭 쳤다. 그러자 선우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케로가 냉큼 뛰어올라 그 옆에 누웠다. 선우는 자연스럽게 그런 케로를 잡아서 치워 내고는 겉옷을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천천히 감기는 형의 눈을 보며 자신도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같은 룸 안에 도진도 있었으니까, 잠시 눈을 감아도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면서.

    *

    다음날 오후가 되자, 선우는 레온에게 연락을 넣었다.

    ─ 연락이 늦군요.

    그렇습니까전 나름 빠르게 한 것 같습니다만.”

    ─ 뭐, 현우 씨가 필요한 쪽은 저희니까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일단 헬리콥터를 보낼 테니 타십시오. 편안하게 연구소까지 모실 겁니다.

    헬리콥터는 정해진 시각에 근처 빌딩의 옥상에 내려섰다. 그걸 타고 30분 정도 이동하자 연구소가 보이기 시작했다. 특이한 재질의 돔으로 둘러싸인 고층 건물.

    헬리콥터에서 내려 입구로 다가가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레온이 그들을 맞이했다.

    어서 오십시오.”

    건물은 하늘에서 보던 것과 다르게 생각보다 규모가 컸다. 그리고 겉에선 고층으로 보이던 건물이 실상은 지상 1층인 걸 알게 되었다. 여러 개의 층 천장을 터놓았기 때문이었다.

    거대 몬스터를 수용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이쪽입니다. 들어가기 전에 번역 아이템은 반드시 착용해주십시오.”

    아이템을 착용하고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포박당한 채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점박이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 보았던 때보다 더 너덜너덜해진 점박이는 얌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얌전하네요?

    현우의 말에 어느새 옆에 따라붙은 연구원이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얌전하다고요아닙니다. 아니에요. 얼마나 교활하고 난폭한지 손을 쓰기도 어렵습니다. 저러고 있다가도 근처에 사람이 다가가면 당장 입을 벌리고 물어뜯으려 할 겁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몇 사람을 물었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묶어 놓은 것도 몇 번이나 풀었습니다. 크기 조절이 가능하니 대체 뭘로 묶어 둬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크기 조절이 가능한 구속구를 가져오기까지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럼 사람을 접근시키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이대로 계속 시간 낭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뭐라도 해 보려고 했던 거지요.”

    연구원은 어깨를 움츠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시간은 금이지요.”

    이어 중년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 연구소장 윌슨입니다.”

    안녕하세요, 윌슨입니다.”

    윌슨은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었지만, 아무도 그걸 마주 잡지 않았다. 그러자 윌슨은 미세하게 표정을 구기며 손을 회수했다. 지금 그에게 이들은 반가우면서도 반갑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게 무슨 모순이냐 할지 모르지만, 사정을 들으면 이해할 것이다.

    몬스터를 진정시키고 필요한 재료를 채취하기 위해서는 현우가 필요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몬스터를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 것이다. 재료를 제공해 주겠다고는 했지만, 옆에 두고 연구하는 것에 비할까. 자연 복잡한 감정을 품게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습니까다룰 수 있겠습니까?

    네, 될 것 같네요.”

    현우는 그렇게 대답하고 성큼 점박이를 향해 다가갔다. 주변에서 바라보는 시선에 긴장감이 담기기 시작했다.

    정말 괜찮은 거 맞을까요?

    연구원이 연구소장 윌슨에게 속삭였다.

    괜찮겠지. 본인도 장담하지 않았나.”

    어느새 점박이의 지척에 다가간 현우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이마를 슬슬 쓰다듬자 감겨있던 눈꺼풀이 열렸다. 파충류 특유의 길쭉하게 찢어진 동공이 현우를 바라보았다.

    왕왕!

    옆에서는 케로가 늠름하게 서서 점박이를 향해 짖었다.

    크르릉.”

    점박이는 목을 울리며 현우의 손바닥에 자신의 머리를 비볐다. 복종의 표시였다.

    이건 풀어 줄 수 있을까요?

    그건 안 됩니다. 그 끔찍한 몬스터를 풀어 주라고요?

    연구원이 손을 휘저으며 기겁했다.

    괜찮은데요.”

    아니, 위험합니다절대 안 됩니다.”

    둘이 실랑이를 벌이는 걸 바라보던 레온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풀어 주십시오.”

    하지만!

    무엇을 걱정하는 겁니까여기 S급 각성자가 몇이 있는데.”

    그러면서 선우와 도진을 바라보니, 그제야 연구원이 안색이 좀 나아졌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방문자 셋 중 둘이 S급 각성자라고 하였다. 미국의 자랑, 레온도 S급 각성자였으니 몬스터가 풀려난다고 해도 금방 제압당할 것이다.

    그럼, 그럼 풀겠습니다.”

    이어 몇 명의 각성자가 조심스럽게 점박이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몸을 감싸고 있는 구속구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자꾸 몸에 닿아오는 사람의 손길이 짜증 나는 지 점박이가 콧김을 내뿜었지만, 그래도 공격을 하진 않았다. 바로 앞에 현우가 있었으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야 흉포한 몬스터에 불과했지만, 현우 앞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에 불과했다. 왜냐하면 그동안 너무 많이 처맞았기 때문이었다. 그때의 아픔을 생각하면 절로 얌전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구속구가 전부 풀려나고 점박이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몸을 일으킨 채 날개를 쭉 편 점박이는 이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쪽.”

    그러다 현우가 부르자 그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어지는 현우의 질문에 레온이 대답했다.

    몬스터를 확실하게 다룰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 주시면 됩니다.”

    그러면 손!

    점박이는 커다란 손을 현우의 작은 손 위에 살포시 얹었다.

    뒤돌아굴러만세!

    무엇을 말하건 점박이는 잘 따라왔다.

    허어. 테이머가 아니라고 했습니까?

    본인은 그렇다는군요.”

    그런데 저게 가능한 겁니까?

    윌슨의 눈이 반짝 빛났다. 몬스터도 몬스터였지만, 그걸 다루는 현우도 탐나는 실험 대상이었다. 그런 그에게 레온은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하하하, 무슨 생각을 말하시는지 모르겠군요.”

    윌슨은 시치미를 뗐지만, 본래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레온은 다시 한 번 경고할 뿐이었다.

    당신은 얌전히 몬스터만 실험하면 됩니다. 아시겠지요?

    하지만 저렇게 탐나는 소재가 바로 앞에 있는데윌슨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현우의 증명은 끝났다. 그는 누구보다 훌륭하게 몬스터를 다뤘다.

    그럼 점박이는 제가 데리고 가도 되겠지요?

    그새 이름까지 지었습니까?

    네. 잘 어울리지 않나요?

    사실 이름은 마계에서 지었다. 바이크 1호겸 점박이. 문득 바이크 2호와 3호도 떠올랐지만, 걔들까지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현우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재료 채취는 언제쯤으로 잡으면 될까요?

    일단 배불리 먹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지금은 상태가 영 아닌 것 같네요.”

    그러도록 하지요. 남은 절차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갈 때도 헬리콥터로 가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윌슨이 내내 아쉬운 표정으로 몬스터와 현우를 바라보긴 했지만,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레온의 경고 때문이었다.

    그렇게 넷이서 왔던 그들은 다섯이 되어 호텔로 돌아가게 되었다. 작아져서 도마뱀의 형태로 대롱대롱 매달려 호텔방에 들어선 점박이는 작게 하품을 했다.

    이어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연구소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먹지도, 자지도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거기서 밥 못 먹었어?

    현우의 질문에 점박이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중간에 사람 몇을 꿀꺽 삼키고 싶긴 했지만 맛만 보고 뱉어 냈다. 현우도 사람이란 걸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그럼 룸서비스를 시키자.”

    현우는 선우의 도움을 받아 룸서비스로 고기류 요리 몇 가지를 시켰다. 요리가 도착하기 전까지 점박이는 깨끗하게 몸을 씻고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마계의 거친 흙과는 다르게 폭신한 침대의 감촉에 점박이는 스르르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거 생각보다 기분이 좋다. 그렇게 막 잠들려던 차에 음식이 도착했다.

    46.

    키르륵!

    레어 스테이크를 양손으로 들고 한입 베어 문 점박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이건 무슨 고기지입에서 살살 녹는다. 점박이는 누가 뺏어 먹을세라 허겁지겁 남은 스테이크를 해치웠다.

    그륵, 그릉.”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목에서 소리가 울렸다. 옆에 동그랗게 엎어진 하얀색도 퍼먹어 보았다. 고기에 비해선 못했지만, 이것도 상당히 맛있었다.

    그르륵.”

    점박이는 작은 배가 빵빵해지도록 음식을 먹어 치웠다. 대략 5~6인분쯤 시킨 것 같은데 그 많은 것이 전부 점박이 배 속으로 들어갔다.

    그륵그륵.”

    음식을 다 먹어 치운 점박이는 그대로 침대 위에 올라가 네다리를 쭉 펴고 누웠다. 그러고는 소스가 묻은 앞발을 쭉쭉 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케로가 못마땅하게 바라봤으나, 딱히 손을 쓰지는 않았다. 현우가 가만있었으니까.

    이거 이렇게 보니까 제법 귀여운데?

    현우는 빵빵해진 점박이의 배를 손가락으로 슬슬 문질렀다.

    프휴.”

    점박이는 짧은 앞발을 몇 번 파닥이더니 이내 잠들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천국과도 같은 나날이 흐르고 점박이는 다시 토실하게 살이 오르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되기까지 하루에 먹어 치우는 양이 어마어마했다. 몸이 작아져도 큰 상태에서 먹는 만큼 먹어 치우는 것 같았다. 만약 선우가 돈이 많은 게 아니었으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 해도 오싹해졌다.

    푹 쉬고 잘 먹은 점박이는 연구용 재료 채취에도 관대해졌다. 물론 살점을 과도하게 떼 가려고 했을 때는 잠시 지랄발광하려고 하긴 했지만, 그건 현우가 말렸다. 그래서 연구소도 더는 욕심부리지 못하고 적절한 재료만 가지고 돌아갔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니 이제 남은 건 레온과의 대화뿐이었다. 대화 장소는 호텔 아래층의 프라이빗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창가 자리에 레온과 현우가 자리 잡고, 조금 떨어진 곳에 선우와 도진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카페가 이렇게 넓은데 손님이 없네요.”

    그야 진작에 대관해 두었으니까요. 케로와 점박이라고 했던가요둘이 머무르면서 아래층은 만약을 위해 전부 비워 뒀습니다.”

    현우는 손해 이야기는 더 하지 않기로 했다. 혹시나 물어내라고 하면 곤란했으니까. 대신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알고 싶은 건 무엇인가요?

    그 전에 차를 마셔 보십시오. 여기는 홍차를 무척 잘합니다. 티푸드도 제법 세련됐지요.”

    확실히 레온의 말대로 차도, 곁들여 나온 티푸드도 맛있었다. 그걸 즐기고 나자, 그제야 레온은 본론을 꺼냈다.

    점박이는 마계에서 온 몬스터인 거지요?

    맞습니다.”

    그러면 마계와 지구가 연결되었단 소리군요.”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겠지요.”

    레온은 차에는 손도 대지 않고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더니 이어 물었다.

    혹시 마계에서 마족을 만나 보았습니까?

    마족이요?

    네, 마족. 요정은 몇 번이나 마족 이야기를 했지만, 저희는 직접적으로 만난 적은 없습니다.”

    그 부분에서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사실대로 말해야 할까, 아니면 숨겨야 할까. 일단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인 레온은 대외적으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앞장서는 정의로운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이번 일도 그가 해결해 주지 않을까그러자면 어느 정도의 정보공유는 필요할 터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망설임이 사라졌다.

    만난 적 있습니다.”

    어떻게 생긴 마족이었습니까?

    가장 먼저 떠오른 마족은 알베르크였다. 하지만 어쩐지 곧바로 그에 대해 말하기는 꺼려졌다. 그래서 다음으로 생각해 낸 것이 서열 9위의 마족 티아매트였다.

    보라색의 긴 머리를 가졌던 여성형 마족. 그녀는 차례로 덤비다 현우에게 깨진 다른 마족들과는 좀 달랐다. 그저 차분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 현우에게 직접적으로 손을 쓰진 않았다. 간접적으로는 손을 많이 썼지만.

    현우가 마계에서 부르던 독쟁이. 그게 바로 티아매트였다.

    독을 다루는 마족이었어요.”

    처음 독에 대한 저항력이 없을 때 제법 많이 고생했다. 그러면서 도망은 어찌나 잘 다니는지, 한번은 아예 작정하고 잡으려고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그때 크게 활약한 이들이 바이크 1, 바이크 2, 바이크 3이었다.

    아름답게 생겼던가요?

    마족은 대부분 그렇지 않던가요?

    하긴 그렇죠.”

    현우는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뺄 건 빼고 더할 건 더하면서 레온에게 정보를 전달했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었고,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계에 대해 좀 더 많은 걸 알고 싶었습니다.”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해서요?

    아무래도 그렇지요. 마계에서 저런 몬스터가 넘어왔다는 건, 다른 것도 넘어올 수 있다는 소리니까요. 요정은 마계의 생물은 절대로 지구로 올 수 없다고 했는데, 어쩌면 그게 거짓이지 않았나 싶기도 합니다.”

    거짓말. 현우는 마계에서 헤어진 요정을 떠올렸다. 자신은 절대 거짓말은 안 한다고 큰소리치곤 했는데. 정말 그 모든 게 거짓말이었을까. 딱히 요정을 믿는 건 아니었지만, 조금 위화감이 들었다.

    그럼 오늘의 티타임은 여기까지 가지지요. 이후엔 한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입니까?

    아마도요.”

    안타깝군요. 뉴욕에는 볼거리, 먹을거리가 많은데 호텔에만 있다가 가신다니.”

    지금 한창 복잡할 때인데, 그게 낫지요. 즐기는 건 다음에도 즐길 수 있잖아요?

    하긴 그렇습니다. 그럼 출발하는 날 알려 주십시오. 공항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레온은 끝까지 신사적이었다. 그랬는데도 대화의 일부분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레온은 신분이 확실한 사람이다.

    말이 헛나왔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끝났습니까?

    레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도진과 선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네, 끝났어요.”

    그럼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거지?

    물론이야.”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리고 다시 평소와 같이 게으른 생활을 이어나가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현우는 기지개를 쭉 켰다.

    레온은 점박이의 출신지를 대중에게 밝히지는 않았다. 미국에서도 세력이 제법 강한 길드의 길드장을 몇 모아 그 사실을 알렸을 뿐이다. 당장 시민들에게 알려 봤자 불안만 부추길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니 대중에게 번져 나간 것은 제한된 정보 일부분뿐이었다.

    [한국의 선현 길드 지선우의 형, 몬스터를 길들이다.]

    이런 정보 말이다.

    *

    으아!

    레온은 돌아갈 때도 자신의 개인 비행기를 빌려 주었다. 덕분에 현우는 편하게 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처음 만남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생각보다 좋은 사람 같았다. 푹 자고 싱글벙글 웃으며 비행기에서 내리는데, 이상하게 공항 쪽이 시끌벅적했다.

    무슨 일 있어?

    현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선우가 잠자코 자신의 폰을 건네주었다. 거기에는 화면 하나가 띄워져 있었다.

    「지현우, 뉴욕에서 한국인의 기상을 보여 주다.」

    내가 뉴욕에서 뭘 했는데현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쭉쭉 내려 보았다. 그리고 점점 얼굴이 구겨지기 시작했다.

    내용인즉슨, 뉴욕으로 간 선현 길드의 형제가 도심을 어지럽히는 몬스터를 잡고, 길들이기까지 했다는 것이었다.

    너무 과장이 심한데?

    실제로 점박이를 잡은 건 케로였고, 선우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현우의 옆을 지켰다. 현우도 딱히 한 게 없었고. 굳이 말하자면 호텔에서 밥 먹고 뒹굴거린 게 다였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내 도진도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하나도 없다.

    아니, 그보다 이게 어떻게 알려진 거야?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이 풀었대.”

    선우는 레온의 이름도 말하기 싫은 듯 그리 말하며 이를 으득 갈았다. 딱히 없는 사실을 푼 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곤란하다.

    현우는 선우의 폰을 도로 건네주고 공항 쪽을 다시 바라보았다. 연예인이라도 맞이하는 듯 인파가 출렁이고 있었다.

    일단 공항 관계자가 나서서 뒷문으로 빠져나가기로 했어.”

    그야 그렇겠지. 절대 정문으로는 못 빠져나간다.

    가자, 형.”

    그러나 그들은 찰거머리 같은 기자들을 너무 쉽게 생각했다. 그들은 어느새 뒷문까지 침투해서 공항 경비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고, 그 때문에 일어난 소란에 시선이 집중되었다.

    맙소사!

    질린 표정을 지은 현우를 도진에게 민 선우는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형, 먼저 돌아가.”

    선우야?

    여긴 내가 막을게.”

    그럴 거면 같이!

    현우가 그렇게 말하며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주변이 어둠으로 둘러싸였다. 그리고 다시 밝아졌을 때는 이미 공항 밖이었다.

    선우는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이 저렇게 모였는데요?

    그 말에 도진이 작게 웃었다. 현우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는 선우였지만, 그가 없는 곳에서는 달랐다. 그러니 현우만 빼내면 뒤는 문제없었다.

    지선우도 S급 각성자입니다. 믿으십시오.”

    그렇긴 하지만.”

    형제이기에 걱정이 된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봐요,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게선우는 당당하게 제 발로 걸어서 공항을 나오고 있었다. 그 뒤에는 따라붙은 기자가 하나도 없었다.

    기다렸지, 형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선우는 생긋 웃으면서 현우를 먼저 차에 태웠다. 그러고는 도진이 타기 전에 얼른 문을 닫았다.

    따로 오실 수 있지요?

    그럴 수야 있다만, 참으로 얄미운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형이 있을 때랑 없을 때랑 너무나도 다르다.

    가끔은 평소에도 형이 있을 때처럼 굴어 보는 게 어떻습니까?

    싫습니다.”

    단호히 말한 선우는 다시 문을 열어 자신도 올라탔다. 그리고 출발하는 차를 보며 도진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47.

    선현 길드 외부홍보지원과의 전화가 쉴새 없이 울렸다.

    선현 길드 외부홍부지원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네, 네. 아직 정확히 밝혀진 부분이 없어 그에 대한 안내는 힘들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좀 더 명확한 정보가 나온 뒤 다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다음 벨이 울린다.

    선현 길드 외부홍보지원과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방송 출연이요그 부분에 대해서는 답해 드릴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따르릉. 따르릉. 여기저기서 미친 듯이 전화 소리가 울렸다. 그리고 문의에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현 길드 길드장인 지선우의 형 일이 뉴스를 탄 후로 선현 길드에는 무수히 많은 전화가 쏟아지고 있었다.

    방송 출연 문의 전화, 광고 문의, 또 다른 길드의 요청 등등. 일반 전화는 따로 존재하는 콜센터로 가는데도 전화가 터져 나간다.

    으아아, 더는. 더는 무리예요이미 목이 쉬었어요!

    미친 듯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직원들은 우는 소리를 냈다.

    보너스가 지급된다니 조금만 더 버텨 봅시다.”

    보너스 받기 전에 죽겠어요!

    제발, 제발!

    이제 그만!

    부장은 어색한 표정으로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았다. 원래도 선현 길드는 대한민국에서 제일가는 길드라 문의 전화가 많은 편이었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덕분에 며칠째 칼퇴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빨리 열풍이 가라앉기를 바랐지만, 과연 그렇게 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아, 쉬고 싶은데.

    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앞에는 반질거리는 대머리를 가진 중년이 하나, 부스스한 머리를 묶어 올린 여성이 하나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먼저 입을 연 이는 여성이었다.

    『오늘도 도전 중!』의 작가 이혜미입니다!

    PD 박중수입니다. 저희 프로그램을 선택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딱히 선택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었다. 선우도 엄청 말렸다.

    형이 그런 걸 왜 해!

    방송 출연 의견을 제시한 찬영은 잽싸게 고개를 숙였다. 선우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함이었다.

    맞습니다. 굳이 방송 출연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저번처럼 대담을 한 번 가지고 언론에 손을 대 보죠.”

    도진마저 현우를 뜯어말렸다.

    하지만 필요하다며.”

    그 말에 선우의 날카로운 시선이 찬영에게 닿았다.

    하면 좋다는 거지, 필수는 아니야.”

    선우는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현우도 바보는 아니었고,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국뽕에 젖은 언론사들은 그들을 찬양하고 있었지만, 모두 그런 건 아니었다. 불순한 의도를 품은 기사들이 가끔 불쑥불쑥 올라왔다.

    「제대로 되지 않은 각성자가 몬스터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 오히려 몬스터에게 휘둘리지는 않겠는가. 특별한 제재가 없는 지금, 몬스터들이 날뛰면 어마어마한 피해가 날 것이다.」

    그런 걸 봤는데 어떻게 가만있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쉬고 싶고, 게으르다고 해도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하나뿐인 동생. 선우를 위해서라면 현우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나도 종종 보던 방송인걸.”

    『오늘도 도전 중!』. 매주 특이한 직업군의 사람이 나와 예능인 몇과 팀을 이루어 게임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보는 거랑 직접 나가는 건 다릅니다. 많이 힘들 겁니다.”

    도진이 말했다.

    잘할 수 있어.”

    잘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선우는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형, 나는 형이 원하지 않는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 쌓아 온 권력과 힘인데. 왜 전부 뜻대로 할 수는 없는 걸까. 이번 일만 해도 배후가 있는 걸 아는데도 당장 꼬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아니, 잡아내더라도 전부 몰살시킬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살인은 죄니까.

    답답한 상황에 절로 울화가 치솟았다. 선우는 자기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팬이기도 하니까.”

    물론 팬이라고 해도 찾아가서 같이 방송하고 싶을 정도는 아니었다. 자고로 방송은 누워서 볼 때 제맛이지. 현우는 선우와 도진의 말에도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 되었다.

    작가는 현우의 오른편, 왼편 책상 위에 퍼져 누운 도마뱀과 작은 강아지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같은 공간, 카메라가 닿지 않는 사각에 S급 각성자 둘이 있다는 걸 아는데도 조금은 겁난다.

    그럼 인터뷰 시작하겠습니다먼저 지현우 씨, 테이머셨나요?

    네, 테이머입니다.”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딱히 별다른 힘이 느껴지지도 않는 현우가, 특별한 계약 없이 몬스터를 다룰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불안해할 것이다. 그 점을 고려하여 테이머라고 하기로 했다.

    그러셨군요. 어쩐지. 아무리 마계에 다녀왔다고 해도 몬스터를 다루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작가가 말을 이어 나갔다. 특별히 거슬리거나, 파고드는 질문은 없었다. 미리 전해 준 질문지에 적혀 있는 것이 다였다.

    몬스터는 완벽하게 다루시는 거죠?

    모든 인터뷰가 끝난 뒤, 피디가 재차 확인하듯이 물었다.

    물론입니다.”

    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작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러면 한번 만져 봐도 되나요?

    네. 지금은 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당연히 케로를 향할 줄 알았던 손가락은 점박이를 향했다. 얌전히 엎어져 있던 점박이의 눈이 세모꼴이 되었으나, 손가락을 물지는 않았다. 옆에 무서운 사람이 앉아 있었으니까.

    으으, 너무 매끈하고 귀여워요!

    그런가요?

    제가 파충류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귀여운 아이는 처음이에요. 정말 촬영 날이 기대되네요.”

    작가가 친근감 있게 구니 피디도 긴장을 풀었는지, 분위기가 더 유해졌다. 그렇게 또다시 방송 출연이 결정되었다.

    *

    와우, 와우. 이거 눈이 호강하는데?

    『오늘도 도전 중!』의 막내 여동생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는 지수가 눈을 반짝이며 한쪽을 바라보았다. 그쪽에는 평균보다 장신인 남자 둘이 서 있었는데, 보기만 해도 눈이 절로 떠지는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쪽이 선현 길드 길드장이겠고.”

    머리를 뒤로 넘기고 반듯하게 정장을 갖춰 입은 청년. 올해 21살이라는데 가진 분위기가 진중하여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저쪽은 누구지?

    그 말에 옆에 있던 같은 막내 개그맨 덕만이 대답했다.

    저쪽도 S급 각성자라는데?

    S급 각성자?

    S급 각성자는 흔한 존재가 아니다. 각성자 강국 대한민국 내에서도 양손으로 다 꼽지 못할 정도로 적은 수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이 둘이나 있다고가슴이 절로 두근거렸다.

    야, 꿈 깨라. 저 사람들은 오늘 같이 촬영하지 않는 거 알잖아.”

    알지. 아는데, 그래도 신기하잖아!

    그보다는 처음 오는 일반인과 몬스터가 제대로 촬영을 할 수 있을지나 걱정하라고.”

    괜찮겠지. PD님과 작가님이 먼저 미팅도 했다고 했는걸.”

    그건 그렇지만, 괜찮을지 걱정된다.”

    덕만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몬스터 때문에 그러는구나테이머랑도 같이 게임해 봤는데, 새삼?

    급이 틀리잖아. 급이!

    괜찮을 거야.”

    넌 긍정적이라 좋겠다, 그래.”

    겁쟁이 같기는!

    지수는 덕만의 등을 팡팡 치며 웃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흘러, 어느새 촬영 시간이 되었다. 지수와 덕만, 지홍과 맏언니인 이영, 지능캐 제연. 그리고 메인 MC인 박수광. 6명이 모이자마자 오프닝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도전 중!

    이어 다들 박수를 치며 웃었다. 짧은 대화가 지나가고, 이윽고 오늘의 게스트 소개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이곳을 찾았는데요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분이십니다!

    나 알아요, 알아!

    지수가 손을 들고는 펄쩍펄쩍 뛰었다.

    자, 그럼 누군지 불러 볼까요?

    지현우 씨~!

    그 말과 동시에 하늘에서 거대한 몬스터가 등장했다. 까만색 몸체를 지닌 몬스터는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힐 만큼의 위압감을 지니고 있었다. 몬스터는 자신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당장이라도 비명이 터져 나오기 직전, 몬스터는 그대로 허공에서 회전을 하더니 작은 날개 달린 도마뱀의 모습이 되었다.

    크르륵?

    그러고는 짧은 앞발을 양 뺨에 대고 고개를 살짝 기울여 보였다. 순식간에 사라진 위압감 대신 귀여움이 그 자리를 가득 채웠다.

    너무 귀엽다아!

    맏언니인 이영이 제일 먼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나타난 까만색 포메라니안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한복판에 드러누웠다.

    그제야 다른 사람들도 같이 웃음을 지었다.

    소개합니다오늘의 게스트점박이와 케로입니다!

    뭐야, 하나는 점박이인데 하나는 왜 케로야너무 분위기가 다르잖아!

    제연이 치고 들어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게요그럼 왜 그런지 한번 주인에게 물어볼까요?

    왕왕!

    끼르륵!

    두 몬스터의 주인, 지현우 씨를 소개합니다!

    지현우는 카메라 밖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천천히 안쪽으로 걸어 들어왔다. 다큐멘터리를 이미 찍어 봐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긴장된다.

    48.

    5시 50분. 아윤은 시계를 확인하고는 잘 튀겨 낸 팝콘과 감자튀김, 콜라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오빠조금 있으면 시작해.”

    이어 안쪽을 향해 소리치자, 자윤이 걸어와 옆의 소파에 앉았다.

    아직 시작까지는 10분이나 남았잖아.”

    10분밖에야. 기대된다.”

    오늘도 도전 중평소에도 가끔 보던 프로그램에 오늘은 특별 게스트가 나온다. 그리고 그 특별 게스트는 아윤과 자윤도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지현우!

    점박이란 몬스터도 같이 나오겠지?

    아마도?

    흥미롭네.”

    그렇게 말한 아윤은 소리 내어 웃었다.

    진짜 흥미로워어지간한 각성자들이 전부 이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 TV 앞에 앉아 있을 거 아냐.”

    수많은 길드에서 현우가 길들인 몬스터에 관심을 보였으나, 선현 길드는 따로 공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던 차에 방송에 몬스터 둘을 데리고 나온단다. 아마 방송 원본을 구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우린 이미 방송 원본을 구했지만!

    그럼 그걸 보면 되는 거 아냐게다가 우리는 만나기로 한 횟수가 아직 3회 남아 있잖아.”

    저번의 만남은 포털 때문에 엉망이 되었으니까. 횟수는 차감하지 않기로 했다.

    아니지. 편집본을 실시간으로 달리는 재미도 있는 거라고. 오빤 그걸 왜 몰라?

    아윤은 갓 튀긴 감자튀김을 집어 먹으며 자윤을 타박했다.

    뭐, 네가 재밌다면 됐다.”

    그사이 광고가 끝나고 본격적인 방송이 시작되었다.

    『오늘도 도전 중!

    가장 먼저 이야기의 서문을 연 이는 메인 MC 박수광이었다. 여느 때와 같은 그의 멘트와 다른 사람의 동조가 끝난 뒤,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몬스터였다.

    와, 저게 블랙 드래곤.”

    덩치가 대단하다. 듣기로는 뉴욕에서 전투기를 여러 대 격추하고, 가디언 길드의 3팀과 대등하게 맞섰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알려진 것일 뿐, 무슨 능력을 더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다.

    그런 몬스터를 마음대로 다룬다고등줄기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직접 보고 싶어.”

    요청해 보지.”

    응.”

    먹던 감자튀김도 내려놓은 아윤은 화면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오늘 게임은 숨은 보물찾기지금 이 부지에는 힌트가 담긴 작은 공이 여러 군데 숨겨져 있습니다. 그걸 찾아서 힌트를 조합해 보물이 있는 곳을 알아내어 여기로 가져오시면 승리!

    박수광의 말에 제연이 물었다.

    그거야 평소 자주 하던 게임 방식이고, 중요한 건 어떻게 팀을 나누는가죠!

    그러게요사람이 일곱인데 어떻게 나눠요?

    이어 지수가 손을 번쩍 들며 그 말을 받았다.

    전 지현우 씨와 팀 하고 싶은데요!

    저도!

    저도요!

    아니, 이러면 팀을 어떻게 정합니까?

    ?

    아하하하!

    지홍이 소리 내어 웃었다.

    지현우 씨, 인기가 많네요. 하지만 오늘 팀은 그렇게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면요?

    팀은 말입니다. 이렇게 나눕니다몬스터팀 대 사람팀!

    ?

    이영이 그 말을 듣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냥 보여 주기식인 줄 알았던 몬스터가 게임에 참가한다니 놀란 것이다.

    지현우 씨와 점박이, 케로가 한 팀입니다!

    ?

    이거 불리하다고 해야 하나, 유리하다고 해야 하나다들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는 고위 몬스터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이다. 그 힘을 발휘하면 이기기는 쉽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게임, 그 힘을 잘못 발휘했다가는 청소년 관람불가 방송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힘을 발휘하지 않는 깜찍한 상태에서 싸우게 되면아무래도 사람이 여섯인 쪽이 유리하지 않을까지현우는 따로 신체 능력이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되나?

    지수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됩니다지현우 씨도 동의했습니다!

    왕왕!

    이런, 케로도 동의한 모양입니다.”

    키르륵.”

    케로가 울자 점박이도 지기 싫다는 듯이 같이 울었다.

    오, 전의가 대단합니다!

    그렇게 어느 쪽이 유리한지 모를 게임이 시작되었다.

    슬슬 어두워지는 사무실 안, 가준은 담배를 물며 픽 웃었다.

    웃기고 있네.”

    힘을 숨기고서 저런 광대 노릇을 하는 게 웃기지도 않았다.

    그나저나 몬스터라.”

    처음에는 케로 하나였던 것이 또 늘어났다. 점박이라는 이름은 촌스러웠지만,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지선우가 운이 좋은 건가.”

    아니면 자신이 운이 나쁜 건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깨갱거리며 몸을 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게임 시작합니다!

    짧고 강한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사람들은 몸을 긴장시키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찾아, 빨리 찾아!

    그래도 3 대 6이니까 유리한 거 아닌가?

    덕만이 그렇게 말하며 광장에 설치된 판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회수한 구슬의 수가 기록될 예정이었다.

    그건 모르지. 그러니 일단 빨리 찾자!

    그와 동시에 카메라가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쏜살같이 날아간 점박이가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 키보다 살짝 높은 곳에 숨겨져 있던 금색 구슬 하나를 찾아냈다.

    그걸 요령 있게 문 점박이는 꼬리를 살랑이며 현우에게로 돌아갔다.

    <1개>

    기록판에 숫자가 기록되었다. 초반에는 다들 구슬 찾기에만 몰두했다. 하지만 이 게임의 별미는 구슬을 어느 정도 모은 중반부터 시작된다.

    참가자 여러분, 이제부터는 구슬 강탈이 가능합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영과 팀을 이뤄 움직이던 지홍이 기민하게 눈을 번뜩였다.

    뺏으러 가자.”

    현우 씨한테하지만 혼자인데 너무한 거 아냐?

    어우, 말은 그러면서 입이 웃고 있지?

    흐흐흐.”

    이영과 지홍은 곧바로 현우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가장 먼저 마주친 이는 현우가 아니었다.

    와앙?

    케로였다. 본래 모습을 보여 줬던 점박이와 다르게 케로는 내내 이 모습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두려움이 덜했다. 게다가 겉모습이 포메라니안과 똑같아서야. 위기감을 가지라는 게 더 힘들지도 모르겠다.

    케로다, 케로!

    왕왕!

    이름을 부르자 다른 쪽으로 가던 케로가 이쪽으로 방향을 틀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아아, 너무 귀여워!

    정신 차려케로도 우리의 적이야!

    적, 그래, 적이지케로를 인질로 삼을까그래서 구슬과 교환하는 거지!

    멋진 방법이군.”

    둘은 음흉하게 웃으며 케로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얼마 뒤, 상황은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갔다.

    !

    !

    세상에. 손 주는 거 봤어진짜 똑똑하다!

    내가 보기엔 손을 준 건 케로가 아니라 너 같은데.”

    앞발을 들어 올린 케로가 가만히 바라보자 이영이 알아서 손을 움직여 대 주었다. 그러나 이미 케로에게 홀짝 넘어간 이영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귀여운 나를 봐라!

    케로는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온몸에서 귀여움을 뽐내며 당당하게 가슴을 펴는 모습에 반할 것만 같았다. 결국 버티던 지홍도 거기에 넘어가 헤실거리며 케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그들의 뒤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점박이였다.

    점박이는 소리 없이 바닥을 기어 이영이 허리에 찬 가방에 접근했다. 이어 이빨과 앞발을 이용해 교묘하게 가방을 풀어내고는 그걸 입에 물고 날아올랐다이영이 텅 빈 허리를 눈치챈 건 그쯤이었다.

    내 가방!

    뒤늦게 손을 휘적여 보았지만, 점박이는 이미 높이 날아오른 뒤였다.

    내려와, 내려오라고!

    한참을 허우적거리다가 뒤늦게 돌아보니 케로도 어느새 사라진 상태였다.

    이, 이런 사기꾼들!

    이영이 주먹을 휘두르며 분노했다. 진짜 어처구니없게 구슬을 전부 빼앗겼다.

    댓글

    - 점박이 너무 귀엽지 않아?

    - 케로도 너무 귀여워!

    - 2인조 사기꾼들진짜 죽이 딱딱 맞는다.

    방송 게시판에 글이 주르륵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건 다른 커뮤니티도 마찬가지였다.

    댓글

    - 무서운 몬스터라며~! 하나도 무섭지 않잖아!

    - 어쩜 저렇게 사람 말을 잘 알아듣지신기하다.

    - 그러게. 방금 봤어훔쳐온 가방 지현우에게 건네는 거?

    - 악, 방금 점박이 가방 멨다. 제작진이 특수 제작했나 봐!

    - 이번에는 케로가 사람을 삥 뜯고 있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귀엽게 쳐다보니까 지수가 슬쩍 구슬 하나 줌. 근데 나라도 줄 듯.

    - 흑흑, 방송 끝나도 케로랑 점박이를 계속 보고 싶어짹짹이나 별스타 해주세요더 많은 사진, 더 많은 영상이 보고 싶다!

    좋군, 좋아.”

    피디는 눈을 반짝이며 손을 비볐다.

    시청률이 오른다!

    오른다!

    옆에 있던 작가도 신난 표정으로 박수를 쳤다.

    외국에는 방송이 서비스되는 곳이 적다 보니, 이걸 보기 위해 사이트에 가입한 사람도 많더라고요. 세상에, 이번 방송은 박 터졌어요!

    그 때문에 다들 축배를 드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진짜 귀엽긴 하네요.”

    몬스터들이?

    네, 말도 잘 따르고, 생긴 것도 귀엽고. 트렌드가 되겠는걸요?

    확실히.”

    이제 몬스터들이 사람들에게 달리 인식되기 시작할 것 같았다.

    애초에 그걸 노린 거기도 하겠지만.

    보통은 테이밍된 몬스터도 꺼려 하는 분위기였지만, 이런 방송이 나왔으니 이제는 달라질 터였다.

    무섭다, 무서워.”

    뭐가요?

    그런 게 있어.”

    피디는 손을 휘저으며 계속 올라가는 시청률을 바라보았다.

    49.

    지수와 덕만은 케로를 쫓아 뛰어다니다가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헉헉, 안 돼. 이렇게 해서는 끝도 없어!

    애초에 인간은 달리기로는 강아지도 못 이긴다. 그런데 상대는 심지어 몬스터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면 어쩌게다른 방법이라도 있어?

    그러자 지수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인질을 잡자그리고 함정을 파는 거지.”

    몬스터는 못 이겨도 같은 인간인 현우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지수의 의견에 덕만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지현우 씨 말이지?

    그래덕만이 너도 운동 제법 했잖아. 반면 현우 씨는 호리호리해 보이고잡아서 몬스터들에게 구슬을 가져오게 하는 거야.”

    자신이 가진 능력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각성자들은 몸이 좋다. 그런데 현우는 호리호리한 편이니 좀 더 만만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좋아, 해 보자!

    둘은 팔을 내밀어 걸고 날카로운 시선을 교환했다. 결정한 이상 사람을 더 끌어모을 필요가 있었다.

    어, 그건 좀 비열한 방법 아닐까?

    언니도. 새삼 비열 따져요?

    저번 게임 때 혼자 이겨 먹겠다고 같은 팀을 밑으로 떠민 이영답지 않은 발언이었다.

    그렇지나도 그냥 해 본 소리였어.”

    이영이 비열하게 웃으며 두 손을 비볐다.

    좋아, 그럼 이영 언니와 지홍 오빠도 같이하는 거다?

    다른 두 사람은?

    두 사람은 잘 뛰니까 냅 둬. 몬스터 주의 끌 사람도 필요하잖아.”

    그도 그렇지.”

    넷은 그렇게 작당 모의를 한 채 움직였다. 나눠 가진 무전기가 있으니 먼저 현우를 발견한 쪽이 알려 주면 모이기로 하였다.

    출발!

    넷은 의욕적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홍이 언덕에서 현우를 발견했다.

    와, 여유롭네. 앉아서 햇볕 쬐고 있는걸.”

    큭, 저 여유 보소.”

    그런데 너무 트인 장소인데. 잡을 수 있을까?

    네 방향에서 다가가서 몰이하면 괜찮지 않을까?

    좋아, 오케이.”

    넷은 모이자마자 언덕을 둘러싸고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가까워질 무렵,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이동한다. 달려!

    와아아아아아!

    소리 지르면서 넷이 현우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뒤늦게야 눈치챈 듯 현우가 표정을 굳혔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곧 사로잡힐 것이고, 몬스터들은 그들에게 구슬을 상납하게 될 것이다. 넷은 그렇게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현우는 이미 그들이 접근하는 줄 알고 있었다.

    키르륵!

    열심히 달려가는 지수의 머리 위로 묵직한 것이 내려앉았다.

    !

    당황하여 그 자리에서 멈춰 서서 머리를 털었으나 꼭 매달려 떨어지질 않았다.

    뭐야, 이거 뭐야!

    이어 다른 방향에서 달려오던 덕만의 궁둥이를 무언가가 들이박았다.

    으억!

    넘어지지는 않았으나, 균형을 잡기 위해 허우적거려야 했고 그로 인해 틈이 생겼다. 그리고 현우에게는 그 정도 틈이면 도망치기에 충분했다. 물 흐르듯 지수와 덕만 사이로 빠져나간 현우가 멀리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와 동시에 지수의 머리 위에 붙어 있던 점박이와 궁둥이 어택을 날린 케로가 잽싸게 튀었다.

    아, 아앗!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 이영이 손가락질을 했지만, 이미 셋은 저 멀리 뛰어가고 있었다.

    놓쳤어!

    으윽. 괘, 괜찮아요. 기회는 더 있을 거예요.”

    지수가 엉망이 된 머리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러나 현우는 신출귀몰했다. 어쩌다 발견해도 점박이와 케로의 방해에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몬스터는 차곡차곡 구슬을 쌓아 갔고, 마침내 힌트를 알아냈다!

    두구두구두구!

    경쾌한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MC 수광이 외쳤다.

    축하합니다오늘의 승리자는 몬스터팀!

    키르륵!

    왕왕왕왕!

    점박이가 사람팀 팀원들의 머리 위를 돌면서 세리머니를 펼쳤다. 케로도 신나게 짖으며 가슴을 부풀렸다.

    졌네요, 졌어.”

    제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니, 우리 쪽이 많아서 이길 줄 알았는데!

    지홍이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몬스터들이 이렇게 똑똑해요몬스터는 다 이래요?

    아닙니다. 점박이랑 케로가 유독 똑똑한 편입니다.”

    그 말에 점박이랑 케로는 더욱더 가슴을 내밀었다.

    와, 진짜!

    그럼 이대로 끝이에요진짜 끝?

    너무 억울해요오설욕전, 설욕전 하죠!

    좋습니다. 원래라면 그냥 끝내겠지만, 이런 기회가 어디 흔하겠습니까설욕전을 하지요.”

    수광은 그렇게 말하며 상자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건 뭔가요?

    이 상자 안에는 게임이 적힌 쪽지가 여럿 들어 있습니다이 중 하나를 뽑아서 그걸로 설욕전을 하겠습니다. 뽑기는 진 쪽에서 뽑도록 하죠.”

    저요, 제가 뽑을게요!

    지수가 손을 번쩍 들었다.

    좋아, 우리 막내가 뽑아 보자. 지수가 운이 좀 좋지.”

    맞아요, 맞아!

    그럼~.”

    지수는 상자에 손을 넣고 휘적휘적 저었다. 그리고는 쪽지 하나를 꺼내 펼쳤다.

    어디 보자. 많이 먹기 대회?

    이게 뭐예요?

    말 그대로입니다많이 먹기 대회입니다각 팀에서 1인씩 나서서 먹으며, 힘들면 교체 가능합니다. 그리고 가장 많이 먹은 팀이 이기는 겁니다.”

    어어.”

    잠시 사람들의 시선이 점박이와 케로에게로 향했다.

    커져서 먹는 건 아니죠?

    아닙니다!

    그럼 해 볼 만하지 않아?

    저 작은 배에 들어가 봤자 얼마나 들어가겠는가. 사람팀 팀원들은 새로이 각오를 다졌다.

    내가 말야, 많이 먹기 대회 3등 한 적도 있다고!

    지홍이 웃으며 첫 번째로 나섰다. 제공되는 음식은 미니 햄버거. 정해진 시간은 10분현우 쪽은 케로가 첫 번째로 나섰다.

    그런데 개가 햄버거 먹어도 돼요?

    일반적인 개는 안 됩니다그러니 사람 음식을 개가 먹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케로는 어디까지나 몬스터이기에 허용됩니다.”

    아하, 그렇군요.”

    그럼 많이 먹기 대회, 시작합니다!

    종소리와 함께 지홍은 빠른 속도로 미니 햄버거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비등비등합니다!

    케로는 입을 한 번 벌릴 때마다 햄버거 하나씩을 덥석덥석 삼켰다.

    너무 잘 먹는데이미 배 터졌을 양 아냐?

    그러게. 뭔가 생각과는 다르게 돌아가는데?

    팀원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지홍이 먹은 햄버거 수가 20개를 넘겼다.

    아직, 나는 아직 할 수 있다!

    30개. 그쯤에서 지홍이 먹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다. 그러나 케로는 마치 티벳여우가 생각나는 표정으로 여전히 햄버거를 꿀꺽꿀꺽 삼키고 있었다.

    나, 난 이제 더 못해.”

    결국 지홍이 물러서고, 다음으로 제연이 나섰다. 그도 열심히 분발했지만, 케로를 이기지는 못했다. 그리고 그쯤에서 케로는 점박이와 자리를 바꾸었다.

    와웅.”

    딱히 배가 불러서라기보단, 질려서 양보한 것이었다. 자리를 바꾼 점박이는 앞발을 슬슬 비비며 기대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최근 사람이 먹는 음식에 푹 빠져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점박이는 한 번에 하나를 삼키지도 않았다. 긴 주둥이를 이용해서 세 개를 문 다음에 한 번에 씹어 삼켰다. 그런데 그 속도가 무척 빠르다.

    어쩐지 속은 기분인걸.”

    다시 교체한 이영이 우는 소리를 내며 햄버거를 먹었다. 그러나 점박이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자신의 접시를 다 비우고, 이영이 앞의 접시를 호시탐탐 노리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햄버거가 나오는 그 짧은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슬그머니 이영이 앞의 햄버거를 먹어 버렸다.

    아앗!

    뒤에서 보고 있던 지수가 소리를 내자, 점박이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접시로 얼굴을 돌리고는 태연한 척했다. 카메라가 없었다면 그냥 햄버거가 사라진 줄 알았을 것이다.

    이거 반칙반칙!

    이영이 햄버거를 문 채 말했지만, 수광이 고개를 내저었다.

    일종의 자살골이지요. 대회는 계속 진행합니다.”

    아니, 그러는 게 어딨어요!

    여기 있습니다. 대신 덜 먹어도 되지 않습니까?

    그것도 일리는 있어 이영은 다시 입을 다물고 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심히 분발했지만, 두 번째 설욕전도 몬스터팀의 승리로 돌아갔다. 현우는 나오지도 않은 채 말이다.

    으아, 그래도 재밌었습니다!

    호탕한 지홍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자, 현우도 손을 내밀며 웃었다.

    저도요.”

    다음에 또 나오실 거죠점박이랑 한번 놀아 보고 싶어요!

    지수도 신나서 말을 걸어 왔다.

    저는 케로요.”

    거기에 이영이도 끼어들고, 망설이던 덕만이도 악수를 하였다.

    오늘 정말 즐거웠습니다. 간만에 이렇게 신나게 뛰어본 것 같네요.”

    감사합니다.”

    남은 팀원도 전부 인사를 마치자 MC 수광이 마무리를 지으며 오늘도 도전 중 촬영이 끝났다.

    *

    촬영에 다녀온 뒤로 현우는 축 늘어져 뒹굴고 있었다. 곁에 있는 이는 도진과 선우, 그리고 점박이와 케로뿐. 평화로운 매일이 이어졌다.

    흐음.”

    오늘도 늦잠을 잔 현우는 휘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선우는 형이 규칙적인 생활을 하길 바랐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이던가.

    선우가 있는 동안은 간신히 버텼지만, 일하러 가자마자 다시 드러누웠다. 그리고 그런 현우를 도진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았다.

    아침은 먹고 자요.”

    축 늘어진 현우를 앉히며 앞에 식사용 트레이를 놓아 주었다. 따끈따끈한 수프에 계란, 베이컨. 한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가끔 먹는 서양식 식단도 나쁘진 않았다. 반쯤 졸면서 식사를 마치자 도진이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처음에는 이런 행동이 많이 어색했는데, 누가 그랬던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현우는 도진의 행동에 서서히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도진의 팔에 안겨 꾸벅거리다가 소화가 될 무렵, 다시 드러누워 일어난 것이 이 시간. 12시였다.

    점심은 1시쯤에 준비하겠습니다.”

    네.”

    절로 말꼬리가 길어진다.

    50.

    재차 하품을 하고 멍하니 TV를 켜자 곧바로 점박이의 모습이 비친다.

    저놈의 재방송은 대체 몇 번을 하는 거야?

    원래 재방송이란 걸 이렇게 자주 하든가모르겠다. 머리를 긁적이며 채널을 돌려 아는 몬스터와 사람이 나오지 않는 걸 찾았다. 그리고 잠도 깰 겸 방송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가끔 반겨 주는 형이 보고 싶다면서, 선우가 벨을 누르기도 하였기에 현우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화면을 보니 밖에서 기다리는 이는 선우가 맞았다.

    반갑게 문을 열어 주자 선우가 웃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형.”

    어서 와.”

    선우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고 나서야, 그 뒤에 다른 사람이 있는 걸 깨달았다. 부길드장 찬영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찬영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말씀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아직 설명도 듣지 않았는데, 선우가 선수 치듯 말했다. 찬영이 할 이야기가 못마땅한지 벌써부터 미간을 구기고 있다. 그런 선우 탓에 찬영은 다소 주눅이 든 모양새였다.

    뭔데요?

    현우의 물음에 찬영이 들고 있던 태블릿을 켜서 건넸다. 거기에는 별스타 화면이 떠 있었다.

    별스타?

    이번에 점박이와 케로의 인기가 너무 좋아서요. 따로 별스타를 운영하는 게 좋지 않나, 의견이 나왔습니다. 물론 귀찮으시다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찬영은 그렇게 말하면서 힐끔 선우의 눈치를 봤다. 사실은 현우가 별스타를 해 줬으면 좋겠다. 점박이와 케로가 방송을 탄 이후로 엄청난 전화가 들어오는 한편, 팬레터, 선물도 쏟아지고 있었다. 이때 시류만 잘 탄다면 선현 길드의 이미지를 끌어올리는 데 크게 한몫을 할 것 같았다.

    안 해도 된대.”

    그 말을 받은 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가끔 보기나 했지 해 본 적은 없는데.

    그래도 찬영이 저렇게 말한다면 하는 쪽이 좋다는 거겠지. 선우에게 약한 것 빼고 찬영은 제법 유능한 인재였다.

    그냥 가끔 사진만 올려 주시면 됩니다. 힘드시다면 댓글이나 다른 관리는 저희 쪽에서 하겠습니다!

    찬영은 열심히 별스타의 좋은 점을 어필했다. 기업 이미지가 좋아지고, 시민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

    만약에 점박이나 케로가 통제되지 않았다면 추천해 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놀라울 만큼 잘 통제되고 있으니까요. 마스코트 느낌으로 올리는 게 어떨까, 생각했습니다. 어차피 따로 전투에 나서는 일은 드물 테니까요.”

    아예 안 싸울 수도 없으니 가끔 선우를 따라 던전형 포털에 들어가겠지만, 그게 다일 것이다. 놀려 두느니 다른 역할이라도 하게 하자, 이런 취지인 듯했다.

    안 해도 돼.”

    선우가 재차 말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도진은 흥미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긴 하지만, 의견을 덧붙이진 않았다.

    할게요.”

    고작해야 사진 몇 장 찍어서 올리는데 힘들까.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말이십니까?

    찬영의 표정이 활짝 피었다.

    네.”

    안 해도 된다니까.”

    괜찮아. 뭐가 어려운 일이라고.”

    현우는 당당하게 말했다.

    그럼 저희 쪽에서 계정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계정은 저도 만들 줄 아는데요.”

    물론 직접 하셔도 됩니다.”

    찬영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올리기 전에 내용만 저희 쪽에 한 번씩 보여 주십시오. 혹시 모르니까요.”

    네, 그럴게요.”

    그렇게 현우는 별스타까지 하게 되었다.

    어디 보자.”

    현우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태블릿을 조작했다. 가입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지현우

    (까만색 덩어리가 흐릿하게 찍힌 사진).jpg
    (흐릿하지만 털뭉치가 개인걸 알아볼 수는 있는 사진
    ).jpg

    잘 부탁드립니다
    #몬스터 #점박이 #케로

    간략한 소개글을 적은 다음에 점박이와 케로의 사진을 찍었다. 딱히 꾸밀 생각도 없이 러그 위에서 뒹구는 그대로 찍어서 첫 번째 사진을 올렸다. 이건 딱히 뭔가 허락받을 만한 것도 없었기에 그냥 업로드했다.

    좀 더 소품을 쓸 걸 그랬나?

    올린 사진이 너무 단순한 것 같다. 잠시 고민하던 현우는 작은 인형을 들고 와 케로의 옆에 놓았다.

    ?

    아무것도 없을 때보단 한결 나은 것 같았다. 점박이의 곁에도 쿠션 하나를 놓아 보았다. 어색하다. 이번에는 점박이를 들어서 쿠션 위에 놓아 보았다. 이제는 제법 그럴싸해 보인다.

    좋아, 업로드.”

    현우는 히죽 웃으며 사진을 올렸다.

    직장인 A씨는 퇴근하며 인터넷 뉴스를 훑어보고 있었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싶어서 보고 있는데, 갑자기 친구에게서 톡이 왔다.

    야야, 너 그거 봤어?

    뭐?

    점박이랑 케로 별스타 생겼다!

    정말?

    화들짝 놀라 별스타를 열어 들어가 보니 밋밋하게 꾸며진 계정이 하나 보였다. 계정주의 사진도 없고 이름과 지현우와 몬스터들이란 짧은 소개만 달랑 적힌 계정.

    거기에는 사진이 몇 개 올라와 있었는데, A씨는 그걸 보자마자 곧바로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주변에서 쳐다보는 걸 느끼고 잽싸게 입을 막았지만,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가장 첫 사진에는 점박이가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봐야 알아볼 수 있지 조금만 떨어져서 보면 그냥 러그 위에 있는 까만 돌처럼 보였다. 러그 위에서 뒹구는 귀여운 모습을 찍고자 했던 것 같은데, 결과는 엉망진창이었다.

    혹시나 싶어 다음 사진을 보았는데 수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휴대폰의 기능이 발전한 시대, 굳이 사진기를 들지 않아도 훌륭한 사진을 찍어 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발사진이라니!

    안타까우면서도 너무 웃겼다. 특히 나름 노력은 한 것 같단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처음에는 러그 위에서만 찍다가 그다음엔 쿠션이 생겼고, 이어 작은 인형도 추가되었다.

    내가 사진 찍어 주고 싶네.

    A씨는 연신 키득거리며 사진을 바라보다 친구에게 톡을 보냈다.

    지현우, 사진 실력 실화냐?

    실화인 듯ㅠㅠ

    내가 사진 찍어주고 싶다.

    으앙. 내 점박이, 내 케로! 사진 보여줘어어어! 얘들은 이렇게 못나지 않았다고! 훨씬 더 귀여운데!

    다른 사람이 옆에서 사진 찍어주지 않으려나?

    그러게. 댓글 달아봐야겠다.

    친구는 울먹이며 톡을 이어나갔다.

    이거 좀 이상한데. 고작 사진 몇 장 올렸을 뿐인데 팔로워 올라가는 수가 심상치 않다. 미친 듯이 띠링거리는 폰을 지켜보던 현우는 도진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알람을 껐다. 그리고 댓글을 읽어 보다가 크나큰 문제를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사진을 못 찍었다고?

    옆에서 같이 댓글을 보던 도진의 어깨가 가늘게 떨려 왔다. 아무래도 웃는 것 같았다.

    사진을 대체 어떻게 찍은 겁니까?

    그래도 나름 잘 찍은 걸로 올린 건데.”

    현우는 투덜거리며 도진에게 사진첩을 보여 주었다. 그를 본 도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현우가 게임기를 제외한 기계와는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닌 걸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사진첩에는 돌멩이같이 보이는 점박이, 투턱으로 잡힌 케로, 심령사진처럼 흐릿해 보이는 무언가가 찍힌 게 있었다.

    아무래도 연습이 좀 필요하겠군요.”

    그 정도예요?

    일단 절 찍어 보시겠습니까?

    좋아요!

    이번에는 잘 찍어야지. 현우는 카메라를 열고 렌즈를 도진에게로 향했다. 렌즈를 통해 화면에 비친 도진은 참으로 잘난 남자였다. 시원시원한 눈매에 오뚝 선 코, 매력적인 입매. 원본이 이렇게 좋은데 망치기야 하랴. 현우는 곧바로 사진을 찍었다.

    찰칵.

    짧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도진이 다시 곁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사진첩을 열어 본 현우는 아연한 표정으로 사진과 도진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사진으로도 잘생기긴 했으나, 실물에 비하면 확실히 모자라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한 번만 더 찍어 볼게요!

    현우는 다시 도진을 향해 폰을 들이댔다.

    네.”

    도진은 여유롭게 포즈를 취해 주었다. 그러나 사진이 잘 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왜죠!

    다른 별스타의 사진들은 하나같이 예뻤는데. 왜 자신의 자신은 이렇단 말인가. 이럴 리 없었다. 현우는 입술을 앙다물고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폰을 바꿔야겠어요.”

    최신 폰 아닙니까?

    최신 폰인가요?

    그냥 동생이 사다 줘서 몰랐다.

    차라리 카메라를 사 보는 건 어떨까요?

    맞아요. 그 방법이 있었죠!

    현우는 카메라를 새로 사기로 했다. 선우가 준 용돈은 충분했으니까, 허락을 받고 도진과 같이 외출 준비를 했다. 그냥 선우에게 부탁해서 사도 되겠지만, 이왕이면 사는 김에 전문가에게 요령을 조금 배워 볼 생각이었다.

    잠시만요.”

    가볍게 옷을 입고 나온 현우를 보던 도진이 미리 준비한 듯한 모자와 선글라스를 건넸다.

    이건 뭔가요?

    지현우 씨는 인기가 많으니까요. 좀 더 가리는 쪽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인기 있는 쪽은 몬스터들이겠지. 평범한 사람인 자신에게 그렇게까지 관심을 보일까연예인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도 도진이 준비한 성의가 있으니 모자와 선글라스는 사용하기로 했다. 그렇게 준비하고 입구로 나오니 찬영이 몇몇 사람과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둘만 나가시기엔 위험하니까요. 보이지 않게 따라다닐 테니 그 부분은 안심하십시오.”

    너무 대놓고 따라다녀도 시선을 끌 테니까. 이 정도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렇게 이번에야말로 밖으로 나서려는 순간, 이번에는 선우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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