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도진 씨 먼저 했으면 좋겠습니다!”
“도진 씨? 그러네요. 확실히 옷이 너무 별로네요.”
암만 유행을 타지 않는 기본이라지만 너무 오래된 느낌이었다.
“……동생이 사 준 옷입니다.”
“동생이라면… 아! 제가 잘못 봤나 봐요. 다시 보니까 무척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
아윤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바꿨다.
“괜찮습니다.”
“네, 음. 그럼 옷을 골라 볼까요?”
“제가 직접 골라 보고 싶습니다!”
이번에도 현우가 나섰다. 저번에 점퍼를 빌려준 보답을 할 겸, 새로 옷을 맞춰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동생이 준 용돈이었지만, 돈도 있었으니까. 한두 벌쯤이야 사 줘도 괜찮겠지. 그런 생각이었다.
“전 괜찮습니다.”
물러나려는 도진을 현우가 잡았다.
“입을 거죠?”
이어 물어오는 말에 도진은 더 물러나지 못했다. 가끔 현우는 선이 없는 것처럼 접근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도진은 난감해하면서도 그에 맞춰 주었다. 혹시나 동생의 이야기를 더 들려줄까 봐, 그리고 이러는 모습에 동생이 생각나서.
“네.”
도진의 대답에 현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온 옷을 둘러보았다. 어떤 옷이 어울릴까? 패션 쪽으로는 조예가 없다. 마계에서야 거적때기만 걸치고 있어도 되었고, 현대로 돌아와서는 선우가 옷을 골라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단은 적당히 눈에 들어오는 옷을 꺼내 들었다. 가을에 입기 좋은 가벼운 스웨터였다.
“이거 입어 볼래요?”
도진은 얌전히 스웨터를 받아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갈아입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충 고른 스웨터였지만, 몸이 좋아서 그런지 생각보다 무척 잘 어울렸다.
‘아니, 저런 몸은 어떻게 하면 가질 수 있지?’
현우는 저도 모르게 가까이 다가가 도진의 상체를 만져 보았다. 허벅지가 단단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전신이 흉기와도 같다. 그런데 그게 딱히 싫지는 않았다. 그저 부러울 뿐이었다.
‘나는 왜 이런 근육이 안 생기는데!’
잔근육이 있긴 했지만, 저런 몸과는 거리가 멀었다. 괜히 심술이 돋아 손가락을 세워 몸을 찌르자 도진이 움찔거렸다.
“와우.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요. 그런데 뭐랄까.”
어느새 옆에 다가온 아윤이 도진의 덥수룩한 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손질하면 훨씬 더 나을 것 같은데요. 오늘 머리도 하러 가 볼까요?”
“그거 좋네요!”
현우는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저는 이대로가 좋습니다. 지금이 편합니다.”
“하지만 불편할 것 같은데.”
얼굴이 못난 것도 아니니 눈을 가리는 머리카락만 치워 내도 훨씬 나을 텐데. 본인이 저렇게까지 싫다면야. 현우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옷이나 좀 더 입혀 봐야겠다. 스웨터, 패셔너블한 티셔츠, 세미 정장까지. 도진은 주는 대로 입고 나왔고, 그때마다 현우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패션에 정통한 사람처럼 그를 살펴보았다.
뭘 입혀도 어울리니 어느 걸 사야 할지 고민이 됐다. 다 사도 될 만큼의 돈은 있었지만, 동생이 힘들게 번 돈을 전부 쓸 수는 없었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자니 내내 소파에 앉아 지켜보던 선우가 다가와 등 뒤에 매달렸다.
“형.”
나도 옷 잘 입을 수 있는데. 왜 도진에게만 신경 쓰는지 모르겠다. 선우는 떠오르려는 불쾌감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애쓰며 현우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그 모습을 본 아윤과 자윤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지만, 조금도 상관하지 않았다.
선우에게 중요한 것은 타인의 시선이 아니었다.
“아, 선우도 옷 입어 볼래?”
현우의 말에 선우는 배시시 웃으며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도진이 입은 것과 똑같은 스웨터를 가리켰다.
“저거 입어 볼래.”
어색한 태도를 보였던 도진과 달리, 선우는 남의 시선을 사로잡는 법을 알고 있었다. 옷을 갈아입고 나와서 한 바퀴 도니 절로 눈이 거기로 향했다. 현우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그렇게 선우는 도진이 입었던 걸 고스란히 다시 걸쳤다. 마치 시위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으나, 현우만 그걸 몰랐다. 그저 동생도 옷을 입어 보고 싶어 했는데, 자신이 배려하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조금 미안해졌을 뿐이었다.
선우 다음에는 현우가, 다음에는 아윤이 옷을 입어 보았다. 그런 후, 옷을 사서 서로 선물했다. 아윤은 현우에게, 현우는 도진과 선우에게, 선우는 현우에게.
“잘 입겠습니다.”
“고마워, 형.”
“아니, 고맙긴.”
선물이라고 사 주긴 했지만, 그 돈은 선우의 것이었다. 현우는 그게 어색해서 볼을 긁적였다. 그렇게 선물하는 절차가 끝나자 다시 아윤이 나섰다.
“자, 그럼 쇼핑도 했으니 다음은 맛있는 걸 먹으러 가죠! 식당은 제가 예약해 뒀어요.”
아윤이 예약해 둔 식당은 외진 곳에 있는 한정식 식당이었다. 간판을 달고 있지 않아 얼핏 보면 그냥 한옥 같아 보이는데, 식당이라니. 이런 곳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직접 와 보니 호기심이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부드러운 인상의 주인은 그들을 안쪽의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방에 앉아 문을 여니 잘 정돈된 정원이 한눈에 보였다. 각자 자리를 잡고 앉으니 금방 따뜻한 물수건과 차가 나왔다.
“저는 잠시만 나갔다 올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아윤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잠시 화장실에 들를 생각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와 봤던 곳이라 발걸음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제 경계심은 많이 풀린 것 같고. 이대로 가면서 슬슬 질문을 던져 보는 게 좋겠다. 뭐부터 물어볼까?’
머리를 팽팽 굴리고 있는데,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본 아윤은 직원복을 걸친 한 남자를 보았다. 그는 아윤에게 인사를 하였고, 아윤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지나치려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이 있었다.
‘어?’
변한 세상에서 새로이 두각을 드러낸 각성자는 몬스터를 잡음으로써 세계에 평화를 가져왔다. 일종의 영웅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어디 전부 선량하기만 하겠는가. 선과 악의 중간에 선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자도 있었다.
몬스터를 없애기보단 같은 사람을 해치며, 사회에 혼란을 가져오는 존재. 그들을 모두 이렇게 불렀다.
빌런.
사회의 악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의 목에는 현상금이 걸리는 일이 종종 있었으며, 일부에게는 이명이 붙기도 했다. 저자의 이명은.
‘폭탄마.’
능력은 사람에게 손을 대서 터트리는 기폭. 사람을 수십이나 죽이고 현상금이 붙은 자로 악독하기 이를 데 없는 자였다. 기민하게 움직여서 아직 거처가 파악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가 왜 여기 있어?’
물론 폭탄마가 대놓고 얼굴을 드러낸 건 아니었다. 얼굴이 다르게 생겼으니까. 아마 아이템을 사용한 것이겠지. 보통이라면 못 알아보고 지나쳤을 것이다. 보통이라면. 하지만 아윤은 보통이 아니었다.
길드의 두뇌 역할을 하는 어린 여동생이 걱정되었던 자윤은, 아윤에게 여러 아이템을 건네주었다.
아이템을 다는 데 거부감을 표시하던 현우와 달리, 아윤은 그걸 모조리 달았다. 귀걸이, 반지, 목걸이, 팔찌. 보이지 않는 데 있는 다른 아이템까지. 그중에는 다른 아이템의 부정적인 효과를 해주하거나, 정신저항력을 높이는 것도 있었다.
그게 폭탄마의 아이템 효과를 뚫은 것이다!
‘침착하자.’
폭탄마가 등급이 높은 빌런이긴 하지만, S급 각성자 셋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대놓고 말하자면 100퍼센트 진다. 아무리 빌런이 미친놈이라지만 죽을 자리에 스스로 기어들어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노리는 게 우리가 아닐 수도 있어.’
하필 노리는 사람과 일정이 겹쳤다던가.
‘와, 재수도 없지.’
아윤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돌아섰다. 여기서 소리를 쳐도 안쪽에는 들리겠지만, 자신이 인질로 잡힐 수도 있었다. 그러므로 되돌아가서 폭탄마의 존재를 다른 이들에게 알릴 생각이었다.
이 정도 연기는 어렵지 않았다.
‘좋아.’
돌아서는 아윤을 빌런은 잡지 않았다. 그래, 그렇다고 생각했다.
파직!
팔찌가 진동하며 몸으로 침투하려는 무언가를 막아 냈다. 이어 귀걸이가 후속타를 날렸으나, 폭탄마는 손쉽게 그를 막아 냈다.
“이야, 이런 데서 들킬 줄이야. 재수도 없지.”
들켰다! 아윤은 들고 있던 작은 핸드백을 그에게 던졌다. 그와 동시에 핸드백이 터져 나갔다. 강한 충격을 주면 타격을 주는 아이템이 부착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폭탄마는 그마저도 수월하게 넘겼다.
“오빠!”
아윤은 잠시 생긴 틈을 타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반지를 빼내서 바닥에 던졌다.
[샌더맨의 반지(엘리트)]
충격을 받으면 수면 연기를 한 방향으로 분출. 상대를 잠재운다. 소문으로는 거대한 몬스터도 순간적으로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
동시에 뒤돌아서 달렸다. 신고 있는 신발도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기에 느린 속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폭탄마는 수면 연기를 헤치고 나와 아윤에게 손을 뻗었다. 이어 몸을 보호하던 방어막 여러 겹이 차례로 깨졌다.
‘등급이 틀렸던 건가!’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커다란 손이 비명을 지르려는 아윤의 입을 막고 다른 손이 목을 감싸 안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아윤은 폭탄마에게 인질로 잡혀 있었고, 앞에는 자윤을 포함한 S급 각성자들이 서 있었다.
“오, 오빠.”
“아윤아!”
자윤이 분노한 표정으로 폭탄마를 노려보았다.
“아, 그러게 소리는 왜 질러선.”
폭탄마는 투덜거리며 아윤의 목을 감싼 팔에 힘을 주었다.
“가까이 오면 터집니다, 터져요~! 진짜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한숨을 내쉰 폭탄마는 눈알을 굴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35.
“시발!”
선현 길드의 길드장, 요람 길드의 길드장, 다른 하나는 좀 헷갈리는데. 일단 느껴지는 힘으로 보아 자신의 아래는 아닌 것 같았다.
‘오늘이 죽을 날인가.’
목표에는 접근도 하지 못했는데. 폭탄마는 혀를 찼다. 원래도 높은 사람들이 잘 찾는 곳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S급 각성자들이 모여 있을 건 뭐람.
폭탄마는 아윤을 붙잡은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인질을 잡고 있으니 함부로 덤비지는 않겠지만, 도망칠 길도 없었다. 끝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여기서 죽거나, 도망치다가 죽거나.
상대가 그만큼 최악이었다. 그렇지만 얌전히 죽어 줄 생각은 없었다. 죽을 땐 죽더라도 확실하게 타격은 주고 갈 생각이었다.
아윤을 잡은 폭탄마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가 능력을 발휘하려는 순간, 기이한 소리가 장내에 울려 퍼졌다.
─ 삐이이익!
지독하게 불쾌한 소리, 그 소리는 각성자들에게는 제법 익숙한 소리였다. 포털이 열리는 소리였으니까!
“하하하, 하늘이 내 편인 모양이군.”
물론 포털이 열린다고 무조건 살아남는 건 아니겠지만, 내부가 어떤 모양이냐에 따라 도망칠 방도가 생길지도 몰랐다. 폭탄마는 소리와 함께 현실을 뒤덮는 포털에 기꺼이 휩쓸렸다.
“아윤아!”
“형!”
그리고 그 포털은 근처에 있던 현우까지 삼켜 버렸다.
선우가 포털에 뛰어들고, 이어 자윤이 뛰쳐 들어갔다. 사람 몇을 삼키고도 포털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주변이 소란해지며 비명이 들려왔다. 일렁이던 포털은 한옥의 절반을 넘게 삼키고 나서야 확장을 멈췄다. 그리고 이내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거미덫. 사람을 삼키고 문이 닫히는 던전형 포털을 이르는 말이었다. 이 경우 포털은 안의 사람이 다 죽거나 공략이 끝나기까지 다시 열리지 않는다.
도진은 새까만 포털을 바라보다 문득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날, 1만의 사람이 사라지던 날. 도진은 예원과 같이 있었다. 그리고 예원이 포털에 잡아먹혀 사라지는 걸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절규하며 달려들었으나, 포털은 그를 삼키지 않았다. 누군가는 운 좋게 살아남았다고 했지만, 도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라지던 여동생의 겁먹은 표정, 그 표정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지독한 자책감이 가슴을 두드렸다.
그랬는데, 이번에도 구하지 못했다. 도진은 현우가 마지막으로 사라지던 순간의 표정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사이에도 포털의 문은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도진은 이를 악물고 달려갔다.
‘이번에는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아!’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포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입구에 선 도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먼저 들어간 사람들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앞에 여러 갈래로 갈라진 길이 보였다.
길은 전부 높은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어디서 들어오는지 모를 희미한 빛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던전 중에서도 최악이라 일컫는 미로형이었다. 이런 경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거점을 마련하고, 주변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런 후에 길을 하나하나 표시해 가면서 뒤져야 했다.
그래, 그랬다.
“오빠.”
어디선가 예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예원이는 죽었는데? 현우가 그렇게 말했으니 이건 예원의 목소리가 아니다.
“오빠.”
아니, 이건 예원의 목소리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졌다.
“오빠.”
끊임없이 불러오는 목소리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예원이가 아니다.
예원이가 맞다.
아니다.
맞다.
그래, 어쩌면 현우가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예원이는 아직 살아 있는데. 살아서 이렇게 자신을 부르고 있는데 말이다. 도진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 뒤에 찬 그의 검이 우웅거리며 울었지만, 도진에게는 어떤 영향도 주지 못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동생이 예원이뿐이었다.
“도와줘, 오빠.”
분명 예원의 목소리가 들리는 대로 움직였는데,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모자란 오빠가 지켜 주지 못해서.’
심술이 나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걸까. 안 되는데. 혼자 돌아다니기에 여긴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그러니 빨리 찾아야 해.’
빨리, 빨리, 빨리.
도진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도진은 마침내 그의 동생을 발견했다.
“미로네?”
현우는 갈라진 길을 보며 벽을 손으로 콩콩 두드렸다. 미로에서 길을 찾는 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왼쪽 벽면을 짚고 따라가는 거였나? 아니면 오른쪽? 분명 TV에서 본 것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으음.”
팔짱을 끼고 벽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벽을 향해 힘차게 휘둘렀다.
콰앙!
커다란 소리와 함께 벽이 부스스 무너져 내렸다. 사람의 주먹으로 내려쳤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일직선으로 가다 보면 길이 나오겠지!”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할 터였다. 현우는 구멍을 통과해서 다음 벽을 후려쳤다. 다음, 또 다음. 계속 그러다가 공터를 발견했다. 미로 중간중간에 존재하는 쉼터 같은 곳인 모양이었다.
‘배려도 깊지.’
혀를 차다가 잠시 바닥에 앉아 쉬었다. 바닥이 차가워서 기분이 나빴다. 이럴 때 담요가 있으면 좋을 텐데 아쉽다. 차가워진 엉덩이를 털어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음 벽을 만날 무렵,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도진이었다.
현우는 막 벽을 부수려던 손을 거두고 어설프게 웃어 보였다.
‘설마 본 건 아니겠지?’
긴가민가해서 눈치를 보고 있자니,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그동안 옆에서 그를 봐 왔지만, 이렇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드디어 찾았네.”
그러더니 이번에는 성큼 다가와 현우를 꽉 끌어안았다.
“걱정했어.”
걱정했다는 부분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현우는 표면적으로는 힘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다음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왜 갑자기 끌어안는 거지? 게다가 왜 반말이야? 딱히 기분 나쁜 건 아니었지만, 얼떨떨했다.
“다친 데는 없지?”
“네, 없어요.”
“다행이다.”
현우를 품에서 떼어낸 도진이 이번에는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원래 이렇게 스킨십이 많은 사람이었던가?
대체 무슨 일이람? 현우는 당황하여 도진을 바라보았다. 웃느라 접힌 눈동자는 도통 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 괜찮아요.”
“왜 존댓말 해?”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 존댓말을 하냐니. 그 말을 듣고 도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나서야 정상적인 상태가 아님을 깨달았다.
‘대체 누구를 나에게 비춰 보는 거지?’
답은 금방 나왔다.
한예원.
지금 도진은 현우를 예원처럼 대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지켜 줄 테니까.”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 온다. 당황하여 손을 뿌리치려고 했지만, 이내 다시 붙잡혔다. 그 뒤로도 빼낼 때마다 웃으며 다시 잡는 걸 보니 장난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을 보니 예원과는 진짜 친밀한 남매 사이였던 모양이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긴 해야 하는데. 대체 어디서 어떻게 현혹에 걸린 건지 모르겠다.
‘마법적인 부분은 약하다고.’
대부분의 저주는 기합으로 해결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일단은 도진의 곁에서 그를 지켜보면서 차근차근 해결해 보기로 하였다.
‘그랬는데 말이지.’
해결은 하지 못하고, 시간만 흘러갔다.
“다리 아프지 않아? 업어 줄까?”
“괜찮아요.”
“괜찮긴.”
도진은 그대로 현우를 안아 올려 등에 업었다.
“괜찮다니까! 내려 줘요!”
당장이라도 뛰쳐 내리려는데, 갑자기 도진이 고개를 숙이며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싫어?”
“싫어요. 대체 왜 업으려는 거예요?”
“내가 업어 주고 싶어서. 예전에는 업어 주는 거 좋아했잖아.”
그건 예원 누나고. 현우는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내리누르며 널찍한 등판에 몸을 기댔다. 그래, 확실히 편하긴 했다. 도진은 현우의 발이 땅에 닿지 않게 하려는 듯 어화둥둥 모시고 다녔다. 그뿐이랴. 식사 시간이 되자 꼭꼭 식사를 챙겨 먹이고, 간식까지 줬다.
“좀 더 먹어야지. 많이 먹어야 건강해진다고.”
그러면서 입가에 대 주는데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고 지내다 보니 위기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글러 먹은 인간이 될 것 같아!’
던전 속인데도 말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도진의 손길이 어색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는 현우의 뜻대로 따라주더라도 그 안에 별다른 감정이 담기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애정이 넘쳐난다.
그걸 한몸에 받고 있다 보니 가끔 죄책감이 들었다. 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 기분이 안 좋아?”
도진의 질문에 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왜 기분이 안 좋을까.”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다가 불쑥 말을 이었다.
“내가 너무 장난쳐서 그래? 하긴 원래는 이런 장난은 안 치긴 했지.”
“그랬어요?”
“응. 하지만 내가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래. 조금만 이해해 줄 수는 없을까? 네가 사라지고 나서 많이 후회했어. 물러나 있지 말고 좀 더 제대로 오빠 노릇을 할걸. 좀 더 많은 걸 같이 해 볼걸. 생각할수록 안타깝더라.”
현우는 입을 열려다가 도로 다물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 달라붙은 것 같아. 하지만 만약에 네가 싫다면, 안 그럴게.”
그러면서 잡고 가던 손에서 힘을 뺐다. 이대로라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게 내키지 않았다.
36.
동생을 둔 사람으로서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이번에는 빠져나가려는 손을 현우가 먼저 잡았다. 얽힌 손이 가볍게 떨려왔다.
“고마워.”
이런 걸로 고마워하지 말라고! 현우는 그리 외치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다른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도진에게 맞춰 주자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결심하자마자 곧바로 다른 사람을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쿵!
여느 때처럼 갑자기 나타난 미노타우루스가 해머를 풍차처럼 돌리며 도진에게 달려들었다.
“움머어어어어어!”
무시무시한 힘으로 해머를 휘두르는 탓에 바람소리까지 났지만, 도진이나 현우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았다. 둘 다 미노타우루스에게 당할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우는 앞으로 나서지 않았다. 조금만 움직이면 도진이 기겁하며 만류했으니까. 도진이 손가락을 몇 번 까닥하자 바닥에서 솟아오른 그림자가 미노타우루스를 꿰뚫었다.
“움머어어!”
고통에 찬 비명이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노타우루스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쓰러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지만, 도진은 달리 손을 쓰지 않았다. 소리를 듣고 다른 몬스터가 몰려와도 해치울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이는 평소와 같은 몬스터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유독 새까만 흑발을 가진 실눈의 일본인 각성자. 이와모토 준이치였다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준이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도진과 현우를 바라보다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딱히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다. 던전에서는 소수로 다니는 것보다는 여럿이 다니는 편이 더 안전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몇 걸음을 채 걷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멈춰서야 했다.
갑자기 솟아난 그림자가 창살처럼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짓입니까!」
“다가오지 마.”
도진이 싸늘한 표정으로 준이치를 막아섰다. 그 태도에 준이치는 양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던전 안에서까지 부딪힐 생각은 없습니다. 지금은 협력해야 할 때라고 보지 않습니까?」
나름 이성적으로 설득하려 했으나, 도진은 더 들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준이치가 뭔가를 더 말하기 전에 그는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렇게 나오면 저도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그에 맞서 준이치도 무기를 꺼내 들었다. 서슬 퍼런 윤기가 흐르는 가늘고 얇은 도였다.
“적은 아닌 것 같아요.”
현우가 도진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준이치는 자신의 하나뿐인 동생을 위협하는 적으로 보였다.
“그만하세요.”
현우의 목소리 사이로 다른 목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도진이 던전에 들어와서 처음에 들었던 목소리였다.
“적이야.”
적이라고?
“그래, 저것 봐. 동생이 위험하잖아. 지켜 줘야지.”
목소리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속닥속닥.
끊임없이 귓가에 속삭인다.
모처럼 예원이를 찾았잖아. 저 사람은 예원이를 위협하는 사람이야. 예원이를 지켜주 기로 했잖아. 그러면 위협하는 사람을 죽여야지. 그는 적이야. 그를 죽이지 않으면 예원이가 죽을 거야. 또 동생을 잃어버릴 셈이야? 정말 그럴 거야?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할 텐데?
‘그래, 이번에는 동생을 지켜야 해.’
덥수룩한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눈동자가 새카맣게 물들며, 전신에 그림자가 일렁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발악하며 우는 단검을 잡았다.
발을 앞으로 딛는 순간,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리고 단검으로 적의 목을 노렸다. 예원이를 위협하던 적이 그를 받아치며 뒤로 물러났다.
적이 뭐라 외치는 듯했지만, 소리는 명확히 인식되지 않았다. 아니, 인식할 필요가 있을까? 상대는 적인데. 그냥 죽이면 그만이다. 도진은 예원을 등 뒤로 두고 다시 한번 그에게 달려들었다.
준이치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받아넘겼다. 한국 소속의 평화 길드, 그곳의 길드장 한도진. 이번에 제주도에서 제법 활약했다고는 들었으나,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최고는 그의 라이벌인 지선우였으니까. 그랬는데 이 힘은 뭐란 말인가!
검술과 속도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는데, 도무지 이겨낼 수가 없었다.
‘제기랄!’
피해야 하는 건 단검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자 또한 까다로웠다. 상대는 그림자를 수족같이 휘둘러 댔는데, 그 때문인지 여럿을 상대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한계까지 가속한 검은 가늘게 떨려오고 있는데, 공격은 조금도 빈틈을 보이지 않았다.
‘위험해.’
마치 높은 줄 위에서 곡예를 부리는 기분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슬아슬하게 막 아내고는 있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머릿속에서 적색경보가 울렸다. 안 된다. 이런 데서 죽을 수는 없었다. 준이치는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몸이 덜컥 멈춰 섰다. 그제야 발밑을 내려다보니 그림자가 그를 붙들고 있었다.
그 한 번으로 죽을 뻔했다. 간신히 위기는 벗어났지만 긴 검상을 입었다. 그때부터 몸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젠 저주까지!’
휘두르는 단검 자체의 능력인 듯했다.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었다.
“형!”
선우는 형의 이름을 부르며 미로를 헤맸다.
“여기! 여기예요!”
그러나 가장 먼저 마주친 이는 형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인질로 잡혀갔던 아윤이었다.
“다행이다.”
손에 액세서리를 주렁주렁 들고 있던 아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시 형은 못 봤습니까?”
“못 봤어요. 현우 씨도 같이 휘말렸나요?”
아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그, 그럼 빨리 찾으러 가요!”
“서두를 예정입니다만, 따라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제가 누군지 아시잖아요.”
선우의 질문에 아윤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형도 좀 더 적극적으로 아이템을 착용했다면 좋았을 텐데. 선우는 아이템으로 도배를 한 아윤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이어 선우는 아윤을 쌀 포대 메는 양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빠르게 내달렸다.
아윤은 터져 나오려는 소리를 간신히 삼키고, 휙휙 지나가는 미로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중간중간 몬스터가 나오긴 했지만, 그는 선우가 순식간에 죽여 버렸다. 손을 뻗어 얼리고 타격을 가한다. 그 과정에서 아윤에게는 조금의 피해도 오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강한 거야?’
이런 작자가 위에서 버티고 있으니 요람 길드가 더 올라가기 힘든 거지. 아윤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렇게 얼마나 더 이동했을까.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이다!’
선우는 아윤을 내려놓고, 곧바로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미로의 작은 공동, 그곳에서 도진과 준이치가 싸우고 있었다. 선우의 눈이 빠르게 두 사람을 훑었다.
‘어느 쪽?’
도진은 당연히 아군이다. 그렇다면 준이치가 적이라는 소리였는데, 느낌이 묘했다. 거슬리고 짜증 나긴 했어도 무모한 짓을 저지를 만한 사람은 아니었는데. 의문을 가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야!”
“형!”
찾았다. 선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우에게 다가가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앞으로 몇 발자국 나가기도 전에, 다시 뒤로 물러나야 했다. 도진이 그를 향해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뭐하긴.”
도진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몰라서 묻는 건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가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너희는 적이잖아. 그러니 죽여야지.”
그러자 도진이 잠시 손을 뗀 사이에 몸을 빼낸 준이치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 거 아닙니까!」
“한도진.”
선우가 부르자 도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얼핏 보기엔 정상 같아 보였으나,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선우는 곧바로 얼음꽃을 피워 내며 준이치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모른다. 갑자기 공격해 왔습니다.”
상황이 급박하니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준이치는 엉망진창인 한국어로 간략한 상황을 설명했다.
“정신계 몬스터군요.”
“몬스터? S급 아닙니까?”
S급 각성자는 기본적으로 저항력이 높다. 그 말은 정신공격을 받아도 어지간한 건 버텨낸단 소리였다. 그런데 저렇게 완벽하게 지배당한다고? 그 소리는 이 던전의 등급이 S급, 그 이상일 가능성도 있단 소리였다.
“일단은 제압해 둡시다.”
선우의 말에 준이치가 다시 검을 들었다.
「빚으로 달아 두겠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둘이서 도진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선우와 준이치는 차륜전으로 도진을 상대했다. 어떻게든 힘을 빼서 제압할 목적인 게 보였다. 현우는 한창 싸우는 중인 그들을 바라보다가 미로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위에는 상반신이 사람의 형태인 거대한 거미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그 거미는 소름이 끼치는 낮은 목소리로 연신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자세히 들어보니 내용이 가관이다.
“적이야. 다 죽여야 해. 그래야 동생을 지키지. 그래, 잘하고 있어. 죽여, 다 죽여. 죽고 죽이는 거야. 안 그러면 동생이 죽어.”
험악하고 괴이쩍은 모양새와는 달리, 정신계 몬스터인 모양이었다.
‘이상해.’
그렇다 쳐도 이상하다. 제법 강한 축에 속하기는 하지만, 도진을 지배할 정도는 아닌 것 같았는데. 동생 때문인 건가. 그 존재가 도진을 한없이 약하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쳐다봐서였을까. 천장에 매달려 있던 몬스터가 현우를 인식했다. 기이하게 찢어진 눈이 현우를 보며 가늘게 접혔다. 이어 중얼거림이 멈췄다.
37.
“맛있겠다.”
그러고는 키득키득 웃다가 서서히 벽을 타고 기어 내려오기 시작했다. 존재감을 죽이는데 익숙한 건지, 아직 그를 눈치챈 이는 현우밖에 없었다.
‘어쩔까.’
현우는 아까 주워서 주머니 안에 넣어 두었던 돌멩이를 어루만졌다.
‘이대로 죽여 버릴까.’
선우도 지금은 이쪽을 보지 않고 있었으니, 몰래 죽일 수 있을 것 같았다. 돌맹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때, 현우의 뒤쪽에서 까만 털뭉치가 느긋하게 걸어왔다.
케로였다.
“왕?”
케로는 현우를 발견하자마자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달려왔다. 마침 좋은 타이밍이었다. 현우는 그대로 손을 들어 천장을 가리켰다. 자연 케로의 시선이 손가락을 따라 움직였고, 몬스터를 발견하는 건 금방이었다.
“왕왕!”
“잡아.”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케로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케로?”
그걸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물러나 있던 아윤이었다. 그 목소리에 다른 이들의 시선도 케로에게로 향했다. 이어 도진이 싸우던 이들을 내팽개치고 현우에게로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르르릉.”
케로는 완전한 모습이 되자마자 벽을 박차고 올라 천장을 향해 뛰어올랐다. 그런 후 서슴없이 몬스터에게 이를 박아넣었다.
“끼이이이익!”
기겁한 몬스터가 회피하려고 했지만, 케로가 좀 더 빨랐다. 둥그렇게 부풀어 오른 배에 이가 박히고 녹색의 점액질이 튀어 올랐다. 그로 인한 지독한 통증에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고, 선우와 준이치의 공격이 그리로 향했다.
중간에 끼어든 도진이 막으려 들었으나, 전부 막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고통에 몸부림치던 몬스터는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끼이익!”
바닥에 떨어져 다리를 버둥거리던 몬스터가 재빨리 몸을 도로 뒤집었다. 현우는 그 틈을 타서 잽싸게 움직여 뒤에서 도진을 끌어안았다.
“형!”
그를 발견한 선우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으나, 현우는 못 들은 척 도진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두 팔에 힘을 주어 그를 잡아당겼다.
“그만해요.”
“예원, 예원이를 지켜야 해.”
“예원이는 여기 없어요!”
“아냐, 있어!”
“어디에요!”
“여기, 여기 있는데.”
도진은 현우를 봤다가 이어 몬스터를 바라보았다.
“오빠, 나야. 예원이.”
몬스터가 그런 도진을 불렀다. 지금까지는 현우를 예원으로 설정하고, 도진을 이용하여 다른 각성자를 죽이려 들었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어 급해지니 이번에는 자신이 예원의 역할을 하려 들었다.
“아닌데. 예원이는 여기 있는데.”
“아니야, 오빠. 나 여기 있어.”
몬스터의 말이 이어질수록 다른 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징그럽습니다.」
“역겹군요.”
아윤은 진즉 입가를 가리고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혐오스러운 모습에 토할 것 같았다.
“저런, 저런 몬스터가 존재한다고?”
비록 던전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수많은 몬스터의 자료를 봐 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저런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몬스터야!’
갑자기 예고 없이 열린 포털, 새로 나타난 몬스터, 또다시 변화가 시작되려는가. 소름이 돋았다.
그때 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새까맣고 커다란 짐승이 곧바로 몬스터에게로 달려들었다.
“오빠!”
새된 목소리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그러고는 이어 달려든 케로에게 맞서기 시작했다. 커다란 통나무 같은 다리가 벽을 찍으며 파쿠르를 하듯 사방을 누볐다. 그러면서 수시로 하얀색의 연기 덩어리를 뱉어냈다.
그게 닿자 기세등등하게 덤비던 케로가 깨갱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잠시의 틈은 몬스터에겐 기회나 다름없었다. 그대로 케로의 등에 떨어진 몬스터가 앞다리로 목을 졸라댔다.
3개의 머리 중 둘이 으르렁대며 날뛰었으나, 등에 올라탄 거미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거기에 선우가 합류했다. 미친 듯이 움직이던 거미의 다리가 얼어가면서 점차 움직임이 느려졌다.
그와 동시에 준이치가 움직였다.
서걱.
“꺄아아아!”
날카로운 검에 반쯤 베인 다리가 덜렁거렸다. 안그래도 보기 싫던 몬스터의 얼굴이 더욱더 괴상하게 변했다.
“죽어! 죽어! 오빠, 죽여!”
그 말에 도진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잡아야 하나.’
현우는 잠시 망설였다. 그리고 그 틈에 도진은 그의 손을 벗어나 앞으로 내달렸다.
“이와모토!”
선우가 다급히 준이치를 부르고, 그는 잽싸게 몸을 피했다. 남은 건 몬스터와 얽혀 있는 케로뿐이었다.
“크와앙!”
케로는 미친 듯이 날뛰며 등에 올라탄 몬스터를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케로의 등 뒤로 그림자를 밟고 선 도진이 올라탔다.
“아하하하!”
그를 발견한 몬스터가 웃어 재꼈다. 징그러운 얼굴 위로 기쁨이 떠올랐다.
“죽여! 죽여!”
“으르르릉!”
케로의 등 뒤에서 뜨거운 핏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죽여!”
도진은 단검을 쥔 채로 몸을 움직였다.
예원이가 애처롭게 외쳤다.
“오빠, 구해 줘!”
약간의 방해는 있었지만, 도진은 예원이가 죽기 전에 지척에 다다를 수 있었다.
“오빠!”
예원이가 환하게 웃었다. 도진은 그 웃음이 기꺼웠다. 그래, 나는 너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그게 누구든 전부 치워 줄게. 단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걸 죽여.”
까맣고 커다란 짐승이 날뛰고 있었다.
“얼른 죽여.”
도진은 예원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단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하나는 단검으로 튕겼고, 다른 하나는 손으로 잡았다.
‘돌멩이.’
날아온 물체는 별다른 게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돌멩이였다. 그런데 왜 자신은 고작 돌멩이에 위협을 느꼈을까. 도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죽여!”
다시 예원이 말을 걸어왔다.
‘재촉하지 않아도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정신 차려요!”
“죽여!”
“예원 누나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아요!”
“죽여!”
예원의 목소리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몇 번인가 더 들은 결과 알 수 있었다.
예원이가 누군가를 죽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생명은 소중하다고 말하며, 꽃을 꺾는 것도 하지 않으려 한 아이가 그런 말을 한다고?
“오빠, 왜 내 말을 안 들어? 죽이라고. 죽여! 죽여!”
“아냐.”
도진이 아는 예원이는 누군가를 죽이라고 할 만한 아이가 아니었다. 지독한 두통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도진은 계속 뭐라고 중얼거리는 예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데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지지직.
망가진 TV의 화면처럼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그리고 작게 들리던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죽여!”
칠판을 손톱으로 긁는듯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도진의 귓가에 속삭였다. 예원의 목소리는 이렇지 않았다.
“죽여!”
도진은 단검을 든 손을 들어 올려 손잡이로 있는 힘껏 이마를 찍었다. 지독한 통증과 함께 두통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한 번 더.’
어찌나 세게 내려쳤는지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르륵 떨어진 피는 그대로 얼굴을 타고 흘러 입술에 와 닿았다. 벌린 입술 사이로 비릿한 쇠맛이 느껴졌다. 선명해진 시야로 뭉개진 것처럼 징그러운 사람의 얼굴이 들어왔다.
아니다, 이건 사람이 아니다. 상반신은 사람이었으나 하반신은 거미의 몸을 가진 몬스터였다. 그 순간 머릿속이 맑게 갰다.
도진은 곧바로 단검을 쥐고 눈앞의 몬스터를 향해 휘둘렀다. 새까만 단검이 시체와도 같은 색을 가진 피부로 파고들어 뼈를 끊어냈다.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리를 끊어 내고, 팔을 끊어 내고, 살을 후벼팠다.
몬스터는 버둥거리며 도망치려고 했지만, 어느새 불어난 그림자가 몸을 붙잡았다.
“오빠!”
뭉개져 가는 발음으로 필사적으로 외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도진은 붙잡혀서 꿈쩍도 못하는 몬스터를 계속 공격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건 공격이라기보단 도축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히이이이.”
공동이 몬스터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아윤은 귀를 틀어막고 웅크린 지 오래였고, 선우와 준이치는 굳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나마 멀쩡한 건 케로 뿐이었다. 케로는 몸을 푸르르 털고는 뒷발로 귀를 긁었다. 그리고는 다시 몸을 작게 만든 뒤, 현우에게로 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케로만큼 커다랗던 몬스터의 덩치는 무척이나 작아졌다. 그런데도 몬스터는 아직 살아 있었다.
“죽여.”
몬스터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도진에게 애원했다. 그러나 그는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단검을 휘둘러 녹색의 피를 털어내고 수납한 도진은 그대로 선우에게로 걸어갔다.
“윽!”
가까이 다가오는 도진의 모습에 아윤은 저도 모르게 억눌린 신음을 내다 벽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도진은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담담하게 말했다.
“처음 보는 몬스터입니다. 연구에 필요할 것 같아서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거의 시체 아닌가요.”
용기를 내어 말하던 아윤은 도진의 시선이 불에 덴 듯 팔짝 뛰었다.
“살아 있습니다.”
“그야 그렇지만.”
아윤은 슬슬 움직여 준이치의 뒤로 위치를 바꿨다. 벽보다는 S급 각성자 옆에 붙어있는 쪽이 나으리란 계산에서였다.
그쯤 선우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제정신입니까?”
“네, 폐를 끼쳤습니다.”
“안다니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있었지만, 선우의 눈에는 아직 경계가 어려 있었다. 도진은 그걸 감수했다. 이해 못할 행동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지금 그의 모습은 미친놈 같았으니까.
38.
‘너무 흥분했다.’
동생에 대한 기억을 이용했다는 생각에 과도하게 손이 나갔다.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외려 속이 시원했다. 그때 도진의 눈에 한구석에 서 있는 현우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보자 입가에 절로 쓴웃음이 떠올랐다.
아윤이 그랬던 것처럼, 현우도 자신을 피할 것 같았다. 아마 이제 더는 그를 지켜 줄 수 없을 테지. 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포자기하여 나선 일이지만, 나름 보람찼는데 말이다.
도진은 답답해져 오는 가슴께를 손으로 더듬었다.
오랫동안 같이 지낸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인연이라고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고 고개를 드는데 바로 앞에 예원의 얼굴이 보였다.
‘아직 현혹이 풀리지 않았나!’
당황해서 눈을 감았다 뜨니 예원의 얼굴은 사라져 있고, 그 자리에는 현우가 있었다.
“괜찮아요?”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괜찮습니까?”
“뭐가요?”
“제가 하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아아.”
도진의 말에 현우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웃었다.
“뭐, 사람한테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사람한테도 그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한테 그럴 건가요?”
“그건 절대 아닙니다.”
“그러면 됐어요.”
그거면 된 건가? 도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재차 물었다.
“무섭지 않습니까?”
“뭐가요?”
몬스터를 찢어발기던 것이요. 아윤은 아직도 떨면서 도진을 피하고 있는데, 그에 비해 현우는 너무 태연했다.
‘뭐, 나도 깨끗하진 않으니까.’
현우가 마계에 있던 기간은 짧지 않았다. 수십 년. 한 명의 인간이 태어나고 죽기까지의 기간. 그 기간을 홀로 살아남아 버티면서 미친 짓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그땐 도진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러니 괜찮았다. 하지만 도진이 그걸 알 리가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보스 몬스터 같은데요.”
좀 떨어진 곳에서 준이치를 호위로 두고 몬스터를 살피던 아윤이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여기는 보스방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죠. 보통 보스는 보스방 밖으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래서 사실 저도 조금 긴가민가해요.”
“보스라면 죽여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대부분 던전형 포털의 클리어 조건은 보스를 죽이는 거니까요. 산 채로 들고 가서 연구하지는 못하겠네요.”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는 곧바로 커다란 얼음 조각을 몬스터의 머리에 내다 꽂았다. 가늘게 내쉬던 숨이 멎고 죽음을 맞이하자, 던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혀있던 미로가 사라지고 길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보스방, 외부로 통하는 포털이 열리는 곳을 향해서.
“이제 탈출만 하면 되겠네요. 가면서 겸사겸사 다른 사람들도 찾아보고요.”
“이동합시다.”
얼마 이동하지 않아 가장 먼저 만난 이는 자윤이었다. 그는 비각성자 몇과 같이 있었는데, 움직이면서 구해 준 사람인 듯했다.
“아윤아!”
자윤은 다급히 아윤에게 다가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난 괜찮아. 하나도 안 다쳤어. 진짜야.”
아윤은 자꾸 살펴보려는 오빠를 말리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자윤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들은 보스방으로 향하면서 익숙한 사람의 시체를 발견했다.
“폭탄마네.”
“몬스터에게 죽은 것 같진 않습니다.”
던전에서 만난 몬스터가 폭탄마를 죽였다면, 시체가 이런 모양으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오빠야?”
아윤이 미심쩍은 눈으로 자윤을 바라보자 그가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아니야!”
차례로 선우, 도진, 준이치도 부정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폭탄마를 죽인 것일까. 의문을 가지고 살펴보는데 저편에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오면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 샅샅이 살펴본 것 같은데. 어디서 나타난 걸까?
자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있던 준이치가 미간을 찌푸리며 이름 하나를 내뱉었다.
“지크프리트.”
“아핫, 다들 여기 모여 있었습니까? 그리고 준이치. 될 수 있으면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지 않았나. 레온이라고.”
그 말에 준이치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도 여기 있었습니까?”
“어쩌다 보니. 유명한 식당에서 접대를 해 주겠다고 해서 왔는데 던전에 휘말렸지 않겠나.”
레온은 태연하게 설명했지만, 준이치는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그러면 저 빌런은 당신이 죽였습니까?”
“누구? 빌런? 그런 작자가 있었나? 봤다면 당연히 죽였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내가 아니야.”
전부 자신은 빌런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빌런이 혼자 죽었을 리는 없었다.
“어디 보자. 이 사람인 모양이군. 날카로운 것으로 단번에 목을 끊어냈는데. 제법 대단한 솜씨야. 하지만 이걸로는 누군지 알아낼 수 없겠군. 딱히 특성이라고 할만한 게 보이지 않으니까. 흥미로운데.”
레온은 시체를 뒤적이며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S급 각성자. 그 말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물론 현우의 귀에도 그랬다.
‘겉보기에는 태연해 보인다만.’
현우는 예전에 몰래 나왔을 때, 준이치와 레온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의심스러웠다.
한 장소에 너무 많은 S급 각성자가 모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야 아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곳을 찾았다지만, 준이치와 레온은 왜 거기 있었던 걸까. 진짜 약속이 있었던 게 맞을까?
누군가를 노리고 숨어든 폭탄마도 그렇고 수많은 의혹이 생겨났다. 무엇보다 S급 각성자인 도진이 쉽게 현혹된 것도 걸렸다.
‘몬스터는 확실히 위험했지만, 도진을 이길 정도는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돌아보다 도진과 눈을 마주쳤다. 경직되어 있는 눈가가 그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 알리는 것 같았다.
그 사이, 레온은 시체에서 손을 뗐다.
“뭐, 일단은 이 정도군. 더 알아보고 싶은 건 있지만, 그 전에 선량한 일반인들부터 대피시키는 게 좋겠지.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이들도 레온의 말에는 동의했다. 그리하여 폭탄마의 시체를 뒤로하고 다시 이동한 결과, 보스방에 도착했다.
당연히 닫혀 있어야 할 거대한 문은 양쪽으로 활짝 열려 있었으며, 안에는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그 거대한 거미 몬스터가 보스는 맞았던 모양이었다.
밖으로 통하는 포털을 가장 먼저 통과한 이는 자윤, 이어서 아윤과 현우, 일반인들이 밖으로 나갔다. 각성자들은 그다음이었다.
포털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보인 사람은 무혁이었다. 아마도 갑작스레 발생한 포털 때문에 출동한 것 같은데,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길드와 헌터관리국의 사이는 물과 기름 같은지라, 그를 반기는 건 비각성자인 일반인들 정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자윤은 마지 못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고, 이어 나오는 아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어라?”
아윤 또한 무혁을 발견하고 미세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헌터관리국에서 여기는 무슨 일이래요?”
“비징후 포털 발생 신고를 받고 찾아온 겁니다.”
“아아, 그렇구나. 참 빨리 오셨네요. 그래, 포털 문제는 해결되었나요?”
“안타깝게도 방금 해결된 것 같군요.”
무혁은 아윤의 빈정거리는 말을 담담하게 받아넘겼다. 이어 현우와 다른 사람들이 나오자, 헌터관리국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슬그머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로 열린 포털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일반인들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마음 같아서는 각성자들을 붙잡아 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하나같이 쟁쟁한 길드의 길드장이나 부길드장. 헌터관리국의 명령에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잠깐, 잠깐. 그분들은 어디로 데려가시는 거예요?”
하지만 그걸 아윤이 가만 보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요!”
마침 현장에는 각 길드에서 파견된 길드원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귀신같이 요람 길드원을 발견한 아윤은 그들을 소리쳐 불렀다.
‘어디 한 것도 없이 숟가락을 얻으려고 한담?’
아윤은 엉망이 된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막 나온 다른 이들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그건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요람 길드가 움직이자, 다른 길드들도 함께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길드장님!”
선우가 모습을 드러내자 현장에 나와 있던 찬영이 다급히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방금 탈출해서 힘드신 분을 어디로 데려가려 하십니까?”
웃는 낯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뒤에는 칼이 숨겨져 있음을 안다. 그렇기에 헌터관리국의 직원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글렀군.’
무혁은 뒤로 몸을 빼는 헌터관리국의 직원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누군가가 그를 믿어 주던 부하 직원들을 빼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갓 관리국에 들어온 파릇파릇한 신입을 떠맡기는 통에 일의 진행이 어렵게 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 놓고서 시키는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트집을 잡는다. 무혁을 길들이려는 의도가 선명하게 보였다. 길들인다고 길들여질 무혁은 아니었지만, 계속 그러다 보니 피곤이 쌓였다.
“이 부분은 저희가 포기하겠습니다. 대신 나중에 정보 공유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무혁과 눈을 맞췄다. 입으로는 거절을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무혁과는 합의가 된 상황이기 때문에 따로 정보를 넘길 셈이었다. 무혁도 그를 깨닫고 그쯤에서 뒤로 물러났다.
39.
헌터 관리국이 물러나자 길드들이 나서 금방 현장을 정리했다. 포털 주변에 바리케이트를 쌓아 다른 사람의 출입을 막고, 막 나온 이들은 길드와 협력관계인 병원으로 이송했다.
“난 다친 데 없다니까!”
그중에는 현우도 있었다. 괜찮다고 몇 번이나 말해도 선우는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는 거니까.”
외려 다가와 현우의 손을 잡으며 설득하려 들었다.
“형, 나는 형이 병원에 가봤으면 좋겠어. 응?”
“으으.”
동생이 눈을 반짝이며 부탁하니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각자 동생과 오빠에게 설득된 현우와 아윤은 길드원 몇과 함께 병원으로 향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진료 결과는 현우가 예상했던 대로였다.
“놀라울 정도로 건강하십니다.”
의사는 안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던전에서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고생하셨을 텐데 대단하십니다.”
그야 고생을 안했으니까! 아윤은 몰라도 현우는 무척 편하게 던전을 돌아다녔다.
“현우님은 퇴원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반면 아윤은 좀 더 입원해 있기로 하였다. 증상은 가벼운 피로에 불과했으나, 자윤의 만류로 퇴원을 하지 못했다.
“나도 나가고 싶은데!”
아윤이 발을 동동 굴러보았지만, 자윤은 들어주지 않았다.
“다음에, 다음에 꼭 다시 봐요!”
병원을 나가는 현우를 붙잡으며 아윤은 몇 번이나 강조했다.
“네.”
“정말 만나는 거예요?”
“네.”
답을 해 주자 신나서 웃는 모습이 보기 좋다. 그렇게 이번 포털 사건은 끝나는가 싶었다.
*
귀찮았던 일이 끝났으니, 이제 다시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던전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핑계로 늘어지도록 잠을 자고 일어난 날이었다. 선우는 시무룩한 상태로 일하러 갔고, 케로는 옆에서 뒹굴다가 같이 일어났다.
잠옷을 걸친 채로 휘적휘적 걸어 거실의 소파에 안착한 현우는 크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는 자연스럽게 리모컨을 들어 TV를 켜는데, 도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귓가를 간질이듯 부드럽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흘렀다.
“점심은 무엇으로 할까요?”
사소한 질문 하나하나에도 다정함이 묻어났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포털에서 나온 이후 도진은 변했다.
겉모습은 예전과 다르지 않은지라 다른 사람이라면 어디가 달라졌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까이서 지내는 현우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예전에도 도진은 현우에게 상냥한 편이었지만,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본인의 감정을 담아 대하기보단, 선우를 흉내 내는 것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접촉을 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었다. 외려 그걸 이용해서 놀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하루아침에 변해 버리니 쉽게 적응이 되지 않는다.
‘으으.’
현우는 옆에서 뒹구는 케로를 끌어안고 다시 소파에 몸을 눕혔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도진이 자연스럽게 담요를 덮어 주고, 가슴을 토닥였다. 그게 너무나도 어색해서 발가락이 곱아들어 갔다.
‘안 돼! 이렇게는 못 버틴다.’
현우는 태블릿을 이용해 인터넷의 바다를 헤엄쳤다.
「상대가 저에게 가진 호감이 부담스럽습니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침 비슷한 고민을 가진 이가 있어, 쭉 아래로 내려보니 가장 위에 달린 댓글 하나가 보였다.
「그게 너무 부담스러우면 호감을 깎아보는 건 어떠실까요? 무리한 요구를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에요.」
무리한 요구! 현우는 그게 무엇일지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 답을 찾아냈다! 마침 TV에는 써먹기 좋은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요즘 영화 ‘블랙 아웃’으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배우, 송현 씨를 모셔보았습니다!』
이어 카메라가 움직이며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잘생긴 남자를 비췄다. 세미 정장에 깔끔하게 정돈된 머리는 그의 매력을 더욱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일부러 TV 소리를 높이자, 주방에 있던 도진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저 배우 멋있네요. 맞다. 도진 씨도 이 기회에 머리를 다듬어 보는 건 어떨까요?”
“머리를요?”
“지금은 덥수룩해서 눈을 가리잖아요. 불편할 것 같은데.”
“불편하지는 않습니다만.”
역시 저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백화점에서 선물해 준 옷도 아예 입지를 않는데, 머리를 자르라고 한다고 듣겠는가.
“그래도요.”
현우는 그 부분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저런 머리는 어떤가요? 멋있지 않나요?”
“멋있습니까?”
“멋있죠!”
사실 남자 배우에게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여자 배우에게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달리느라 지쳤는데, 인제 와서 연애까지 하면 피곤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다.
“멋있다고요.”
도진은 TV 화면의 배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흥미가 사라졌는지 다시 식사 준비를 이어 하기 시작했다.
‘좋아, 잘하고 있어.’
이대로 가면서 호감을 깎고, 자신과 예원이 다름을 인식시켜주면 될 것 같았다.
그랬는데.
“오늘은 잠시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도진은 반나절 정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돌아왔을 때는 저도 모르게 입에서 이런 소리가 나왔다.
“누구세요?”
자세히 보면 뭔가 대단할 걸 한 건 아니었다. 그저 등을 쭉 펴고, 새로운 옷을 입고 길게 내려와 있던 머리카락을 손질했을 뿐이었다. 그저 그뿐인데도 사람이 확 달라 보였다.
“이상합니까?”
도진이 자신이 입은 스웨터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저 스웨터, 현우가 예전에 선물해 준 것이었다.
“아니, 이상하진 않은데요.”
“그럼 됐습니다. 그냥 한 번쯤 이래 보고 싶었습니다. 예원이라면 제가 이러는 걸 바라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다행이다. 자신의 말을 듣고 그에 따른 건 아닌 것 같았다. 현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게요. 제가 아는 예원 누나라면 그랬을 거예요.”
동조해 주자 도진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평소 잘 웃지 않았던 사람이, 그것도 꾸미고 와서 웃으니 파급력이 대단했다.
고작 외모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고개를 끄덕이다가 뒤늦게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도진이 그렇게 생각하는 줄도 모르고 괜히 헛짓을 한 것 같았다.
부끄러움에 저도 모르게 담요를 걷어차자 졸지에 굴러떨어진 케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처음 포털을 빠져나왔을 때는 지독하리만치 불쾌했다. 죽은 예원을 다른 사람과 착각했다는 것에 죄책감이 느껴졌다. 비록 몬스터의 현혹에 넘어가서 그랬다고는 하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현우를 멀리하려고도 했다. 이미 현혹은 풀렸는데, 같이 있으면 스르르 마음이 풀어졌다. 예전에는 살아가는 데 급급하여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소파에 앉아 있기보다는 기대 눕기를 즐겼다. 가끔은 그 상태에서 쿠션이나 케로를 끌어안고 있곤 했다. TV는 아무거나 다 잘 본다. 저번에는 희한한 막장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먹는 걸 좋아한다. 하지만 너무 쓴맛은 싫어해서, 커피 종류는 마시지 않는다.
수많은 정보가 떠올랐고, 그만큼 현우가 친밀하게 느껴졌다.
‘그래, 마치 동생처럼.’
사실 동생이 맞긴 했다. 현우는 이제 스물다섯이었고, 도진은 스물여덟이었다. 세 살 차이로 도진이 형이다.
마음이 바뀌니 태도도 바뀌었다. 현우는 그게 아직 어색한 모양이었지만. 도진은 이런 생활도 나쁘지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예원아.’
처음으로 예원이 골라 준 옷이 아닌 다른 옷을 입고, 머리를 잘랐다. 좀 더 사람답게 살아 보자고 생각했다.
“누구십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선현 길드의 로비에 들어서자, 경비원이 미심쩍은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한도진입니다.”
이미 얼굴도 알고 있으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네? 정말입니까?”
경비원은 그 말을 듣자마자 입을 떡 벌렸다. 뿐만이 아니었다. 지나가며 마주치는 이마다 도진을 한 번씩 돌아보았다. 간만의 일탈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무슨 바람입니까?”
중간에 마주친 선우도 그러했다. 그는 불쾌한 얼굴로 도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물어왔다.
“그걸 굳이 말해야 합니까?”
“그럴 의무는 없긴 합니다만 형에게도 그러고 갈 생각입니까?”
“네.”
“예전 모습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선우는 그렇게 말했지만, 정작 이걸 권유해 준 이는 현우였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말하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아니까 입을 다물었다.
“동생이 골라 준 옷이었다면서요.”
남의 아픈 곳을 찌르면서 인정사정도 없다. 맞다. 전의 옷은 예원이가 골라 준 옷이었고, 그래서 그것만 입고 다녔다.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생을 잊지 않기 위해서. 하지만 옷을 갈아입었다고 해서 동생을 잊은 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동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죄책감이 느껴진다. 다른 모든 사람이 잊어도 자신만은 동생을 계속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만 동생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 더 늘었을 뿐이다.
“길드장님!”
마침 뒤에서 찬영이 선우를 불렀다. 선우의 시선이 잠시 돌아간 틈을 타서 도진은 그 자리를 벗어났다. 과연 현우는 바뀐 모습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렀다.
치이익.
계란후라이를 부치는데 뒤통수에 시선이 느껴진다. 하지만 도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현우가 다시 시선을 돌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다 큰 성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이상했지만.
‘귀엽다.’
바뀐 모습에 신경 쓰더니 내내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는 기분이 제법 괜찮은지라. 당분간은 이렇게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40.
그는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화려한 불빛에 휩싸인 도시가 보였다. 그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터였다. 자신들이 언제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었다. 그러기에 밟아 주는 재미가 있는 거지만. 이어 그는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책상 위에 놓였던 기계가 움직이며 먼 곳의 소리를 전달하기 시작했다.
─ 최근 비징후 포털이 늘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몬스터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직은 거대 길드와 연합하여 이 소식을 통제하고 있지만, 이게 언제 새어 나갈지 모릅니다.
─ 그걸 최대한 막는 게 임무 아닌가. 그런 불길한 소식을 곧바로 풀어놓는 건 옳지 않아. 시민들이 불안해할걸세.
─ 그러다 큰 사고가 나면 어찌합니까!
─ 안 나게 해야지.
소리치는 남자의 말에 대꾸하는 이는 계속 회피적인 발언만 해 댔다. 그에게 있어 시민은 지켜 줘야 할 대상이 아닌, 금전을 뽑아낼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 국장님!
─ 그렇게 소리치지 않아도 들리네.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니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인간은 여전하다. 이기적이고 자신밖에 모르는 이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그런 인간이야말로 그에게는 가장 필요한 존재였다.
그는 웃으며 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와인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과연 인간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
드넓게 펼쳐진 황폐한 대지. 그 대지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키르륵!”
그림자의 주인은 자르르 윤기가 흐르는 비늘로 뒤덮인 몸을 가진 블랙 드레이크였다. 이 근처에는 그보다 강한 몬스터는 없기에 발걸음이 위풍당당하다.
“키륵!”
게다가 요즘은 수시로 그를 불러 대던 인간도 보이지 않는다. 어찌 즐겁지 않으랴. 드레이크는 힘차게 달리며 오늘의 식사 거리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저 멀리 옹기종기 보여 도망치는 레드 보어 무리를 발견했다. 겉면이 다소 질기긴 하지만, 덩치가 커서 고기양이 제법 많이 나온다.
드레이크는 콧바람을 훙훙 불고는 그대로 날아올랐다. 위에서 내리꽂으며 사냥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드레이크의 눈에 처음 보는 기이한 구멍이 나타났다.
불길한 느낌에 잽싸게 방향을 틀려고 했지만, 날아오던 속도 때문에 그대로 구멍에 몸을 처박았다. 어둡고 울렁거린다. 기분이 나쁘다. 몇 번이나 몸부림치던 드레이크는 저 멀리 보이는 빛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그 빛의 통과한 순간, 생전 처음 보는 풍경이 펼쳐졌다.
“끼륵?”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데 그 옆을 다른 몬스터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악! 게이트다! 도망쳐!”
“어째서 여기에! 살려 줘!”
인간이 공포에 몸을 떨며 울부짖고 있었다. 다른 몬스터들은 그걸 조미료 삼아 날뛰고 있었지만, 드레이크는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가 아는 인간은 훨씬 무서운 존재였으니까.
드레이크는 그대로 몸을 띄워 하늘로 날아올랐다.
*
흔들리는 작은 화면, 그곳에는 끔찍한 영상이 담겨있었다.
『꺄악! 싫어. 죽기 싫어!』
『누가 도와줘!』
필사적으로 울부짖었지만, 몬스터에게 잡힌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다. 현장에도 각성자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같이 등급이 낮았다. 그렇기에 전부를 지킬 수는 없었고, 그 때문에 많은 인명 피해가 일어났다.
평화롭던 거리가 피로 물들고, 절규로 가득 찼다. 처음에는 작게 흔들리던 화면이 점점 크게 떨리기 시작했다. 캠코더를 든 사람이 공포에 떨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쯤,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다.
길드와 정부가 파견한 각성자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가장 먼저 방패를 든 탱커들이 몬스터를 막고 딜러들이 공격을 가했다. 보조 능력을 지닌 각성자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생존자를 구했다.
『여기, 여기요!』
캠코더가 그대로 떨어지며 땅바닥을 비췄다. 화면은 거기서 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레드튜브에 올라온 영상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규정에 어긋난다고 삭제를 반복하던 레드튜브도 어느 순간부터는 손을 놨다. 영상이 번지는 속도가 무시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 영상을 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여겨질 때쯤, 뉴스에서도 이를 다루기 시작했다.
모자이크로 반쯤 가린 화면을 보여 주며, 아나운서가 말을 덧붙였다.
『이번 뉴욕에서 터진 게이트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포털이 열리기 전 아무런 징조가 없는 상태로 터졌기 때문입니다.』
틱. 화면을 돌려도 비슷한 영상이 나왔다.
『비징후 포털이 열리는 것은 비단 뉴욕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희는 당시 피해자를 찾아보았으며, 힘겹게 한 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틱. 어디를 돌려도 비징후 포털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쯧.”
옆에서 같이 TV를 보던 선우가 혀를 찼다. 혹시 몰라 어마어마한 돈으로 입막음을 시켜놨는데, 계약을 어긴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건가? 걸고 넘어지면 물어낼 돈이 적지 않을 텐데.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몬스터들도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번에는 그중에 하나, 블랙 드래곤이라는 이름이 붙은 몬스터의 영상을 입수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뉴욕의 소란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지만, 아직은 불안이 전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제일 위험해 보이는 몬스터 하나가 살아남은 탓이었다.
『보이십니까? 저 멀리 블랙 드래곤이 있습니다!』
뉴욕으로 파견된 앵커가 흥분된 목소리로 외쳤다. 유독 높은 빌딩의 꼭대기, 그곳에 커다란 덩치를 가진 몬스터 하나가 매달려 있었다. 기둥에 꼬리를 감아 고정하고서는 졸고 있다.
『몇 번이나 각성자들을 파견했지만, 아직 잡지 못했습니다.』
그건 몬스터가 지나치게 영리한 탓이었다. 누군가가 가까이 접근하기만 하면 높이 날아올랐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쉽게 손을 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행 능력이 있는 헌터도 동원해 보았지만, 공중전에서는 몬스터 쪽이 더 우월했다. 그래서 미국은 다른 방법을 쓰기로 했다.
전투기를 동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속도가 무척 빠른 데다가 도망다닐 때, 일부러 사람이 있는 곳으로만 이동했다. 함부로 공격을 날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각성자들을 피해 다니는 것과는 다르게 전투기에는 공격을 퍼부었다.
모든 것을 녹이는 애시드 브레스를 맞은 전투기는 아래로 추락했고 도심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사람을 전부 옮겨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지만, 반대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을 언제 다 옮깁니까!”
“그러면 저대로 둡니까? 몬스터가 언제 공격해 들어올 줄 알고! 반대하려면 더 좋은 의견이나 들고 오십시오!”
그런 이유로 뉴욕의 빌딩 위에는 아직도 몬스터가 매달려 있었다.
“블랙 드래곤이라.”
선우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저번의 거미 몬스터도 그렇고, 이번도 그렇고 새로 나타난 몬스터들은 생전 처음 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미 존재하는 몬스터만으로도 힘든데, 더 강한 몬스터들이 연이어 나오고 있으니 세상이 어찌 돌아가려는지 모르겠다.
“드래곤이라.”
눈을 가늘게 뜬 현우는 화면을 노려보았다.
‘이상하다. 왜 이리 낯이 익지.’
몬스터가 꿈지럭거리며 몸의 위치를 바꿨다. 그러자 등에 난 하얀색 큰 점이 보였다.
‘응? 점박이?’
마계에 두고 온 바이크 1호. 현우를 잡아먹으려 달려드는 걸 작신작신 패서 길들였던 블랙 드레이크. 그 점박이와 너무나도 닮았다.
‘하지만 점박이가 왜 여기 있겠어.’
요정이 그랬다. 기본적으로 마계의 생물은 지구로 올 수 없다고. 이 끔찍한 것들이 지구로 가서 선우를 해치게 되면 어쩔까, 걱정하는 현우에게 장담하듯 말했다.
‘그게 규칙입니다. 마계와 천계의 생물은 기본적으로 타차원 출입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 세계를 망가트릴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마계의 몬스터가 지구에 나타날 일은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진실이고 다른 일이 생겨 버린 것인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 있었다.
“선우야, 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부탁?”
처음으로 하는 부탁에 선우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먼저 부탁한 일이 없었는데, 이제는 자신을 좀 더 믿어 주는 걸까? 가슴이 두근거렸다.
“저기.”
현우의 손이 TV 화면을 가리켰다.
“저기 가 보고 싶어.”
선우의 시선이 화면에 닿았다가 현우에게로 향했다.
“어디, 미국? 갈 수야 있긴 하지. 뉴욕은 위험하니까 그 주변만 피하면 괜찮지 않을까.”
“아니, 저기.”
“형.”
“뉴욕에 가서 몬스터를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안 돼. 너무 위험해. 아직까지는 제대로 싸우지 않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같은 존재야.”
그 말에 현우가 가만히 선우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지켜 주면 되잖아.”
“난 비행 능력이 없어. 공중전으로 들어가면 형을 지킬 수 있을지, 없을지 장담할 수 없다고.”
그러자 현우의 시선이 이번에는 다른 소파에 얌전히 앉아있는 도진에게 닿았다. 선우가 현우의 곁에 붙어 있을 때뿐이었지만, 요즘 그는 종종 자리를 비웠다.
명색이 길드장이니까 길드 관리 때문에 다니는 거겠지. 어렴풋이 그렇게 추측하고 있었다.
41.
“그림자를 통해 이동해서 등에 올라타면 될 것 같습니다만, 아무래도 쉽지는 않겠지요.”
도진의 답에 선우가 그것 보라는 얼굴로 현우를 바라보았다. 절대 허락할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하지만 현우는 그를 설득해야 했다.
“대신 멀리서 보기만 할게.”
“그건 당연한 거고! 그래도 안 돼.”
“아직 커다란 인명 피해는 없었잖아. 잘 공격하지 않는다면서.”
“주변을 파악하느라 얌전할 것일 수도 있어.”
파악이 끝나고 나서 만만하다 싶으면 나서는 몬스터도 있었다. 몬스터라고 해서 전부 지능이 낮은 건 아니었으니까.
선우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굳이 갈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만약에 정말 저 몬스터가 점박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마계가 지구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었다는 소리였으니까.
마계의 끔찍함을 오랫동안 충분히 겪었던 현우로서는 꺼림칙한 이야기였다. 던전 몬스터까지는 괜찮다. 지구에도 강자는 있을 테니까. 하지만 마수, 그 위의 마족까지 올라가게 되면 곤란해진다.
‘그것만은 절대 안 돼!’
현우는 절박했다. 생각해 보라. 갑자기 나타난 인간을 배척하는 강한 적들, 그들을 상대할 인재풀이 모자란 지구. 인류가 밀리면 지금껏 쌓아 온 사회가 무너지게 된다.
사회가 무너지면 어찌 되겠는가! 사람들은 직장에 나가지 못할 것이고, 가게들은 문을 닫겠지. 그 지경까지 가면 현우도 더는 가만있지 못하게 될 터였다.
‘사실 나 강해!’
동생에게 모든 것을 고백하고, 앞으로 나서서 열심히 싸워 평화를 쟁취해야 할 것이다.
현우는 마족들의 숫자를 생각해 보았다. 죽여도 메쳐도 바퀴처럼 끊임없이 몰려오던 녀석들을! 그나마 가장 강한 힘을 지닌 마족인 알베르크와 맞짱 뜨게 되면서 자잘한 녀석들은 덤비지 않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많이 괴로웠었다.
그걸 다시 반복하라고?
절대 싫다. 게다가 마계에서는 마족들이 직접 찾아왔지만, 지구에서도 그러란 법이 없었다. 어쩌면 전 세계를 돌아다녀야 할 수도 있었다.
역시 안 된다. 현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어떻게든 선우를 설득해야 했다.
“정말, 너무, 너무 가고 싶은데!”
현우는 선우의 손을 꽉 잡고 눈을 마주했다.
“안 돼.”
“정말로 안 돼?”
“정말로 안 돼.”
이렇게 되면 신파극으로 나간다.
“사실 말이야. 저 몬스터 내가 아는 몬스터랑 닮았어. 점박이라고. 내가 힘들 때 많은 도움이 되었었지.”
거짓말은 안 했다. 먼 거리를 달리기 힘들 때 점박이를 타고 이동하곤 했으니까.
“케로 같은 존재야?”
“그래.”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마계와 지구는 막혀 있다고 들었는데.”
선우도 마계로 가서 힘을 얻고 돌아온 만큼,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형의 만류하고자 했다. 닮았지만, 다른 몬스터일 확률이 더 높았으니까.
“그건 나도 아는데. 정말 닮았다니까?”
“몸통의 점 말고 다른 특징은 없어?”
“앞 발가락 발톱 중 하나가 하얀색일 거야.”
뽑았다가 다시 나니 하얀색으로 나더라.
“알았어. 그럼 내가 알아볼게.”
“고마워!”
“아니면 안 가는 거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현우는 냉큼 대답했다. 선우는 이미 외국에 파견 나가 있는 선현 길드원에게 연락을 넣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답이 돌아왔다.
[앞발 왼쪽 4번째 발톱이 하얀색.]
선우는 답을 듣고 이마를 짚었다. 확실히 예전에 비해 1세대를 노리는 사람은 줄어들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중이떠중이들이 포기한 거고, 그 외의 사람들은 아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럴 때 해외로 나간다고?
거짓말을 할까. 그러면 형은 알았다고 하며 가지 않을 것이다. 더 안전한 선현 길드 안에 둘 수 있게 된다.
‘아냐. 이건 내 욕심이다.’
형을 좀 더 자유롭게 해 주자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의 시선은 TV에 고정되어 있었다. 뉴스가 끝나고 드라마로 넘어간 참이었다. 최근 현우가 흥미진진하게 보는 막장 드라마였는데, 도진은 딱히 좋아하지 않았다. 애초에 TV 보기를 즐기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매번 보는 이유는 현우 때문이었다. 평소에는 얌전하던 얼굴이 드라마를 볼 때면 여러 표정을 담는다. 지금도 그러했다.
“아니, 저걸 참아?”
현우가 씩씩거리며 감자칩 봉지를 뜯었다. 그리고 감자칩을 먹으며 화면에 몰두한다. 그 모습이 어쩐지 보기 좋았다.
이어 도진은 아래로 내려 보냈던 그림자를 거둬들였다. 그는 그림자를 이용해서 다른 곳의 상황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림자가 보고 들은 것을 고스란히 정보화해서 넘겨주기 때문이었다.
동생에 대한 정보를 알기 위해서 꾸준히 써 오던 능력이었다. 아직 누군가에게 들킨 적도 없었고. 선현 길드에 와서는 내내 봉인해 두었던 능력이었지만, 최근에는 다시 조금씩 사용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지선우는 거짓말을 할까?’
새로 들어온 정보에 망설이고 있다고 하였다.
‘확실히 지금 나가는 건 위험하지.’
그나마 국내는 선현 길드의 영향이 크다지만, 외국은 다르다. 특히 미국은 가디언 길드, 피닉스 길드가 거의 꽉 잡고 있어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최대한 은밀하게 출국한다고 하더라도, 들킬 위험은 존재했다. 그러니 제일 안전한 건 국내의 선현 길드에 머무르는 것이었다.
도진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현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다 비운 감자칩 봉지에 손을 넣고 휘적거리고 있었다. 잠시 일어나 새로운 과자 봉지를 열어서 빈 봉지와 교환했다. 그러자 현우는 자연스럽게 새로운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그때쯤, 선우가 되돌아왔다. 내내 드라마를 보던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 선우에게 다가갔다. 마침 제일 중요한 장면이 이어지고 있었으나, 저쪽이 더 급한 모양이었다.
“그래, 형. 미국에 가자.”
결국 선우는 진실을 택했다.
갑작스레 결정된 미국행에 현우를 제외한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그 상황에서 현우가 한 것이라고는 한 가지뿐이었다. 뉴욕 여행 가이드 숙지하기. 당장 위험한 몬스터를 보러 가는 사람답지 않은 태도였다.
“참, 형 이거.”
선우는 그런 현우에게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아이템을 건넸다.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금속 팔찌였다.
[피닉스의 수호(유니크)]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공격을 3회 완벽하게 방어한다.
시동어 : 피닉스여, 영원하라!
“3회 공격을 막아줄 수 있을 거야.”
고작해야 3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횟수보다는 뒤의 문구가 더 중요하다. 완벽한 방어.
공격이라고 해도 뒷골목 불량배가 몽둥이를 내려치는 것과, 드래곤이 브레스를 내뿜는 건 크나큰 차이가 있다. 몽둥이는 사람 몇을 해치는 것이 다지만, 브레스는 다르다. 잘하면 도시 하나쯤은 쉽사리 날려 버릴 수도 있다.
그런 공격도 방어 가능한 것이다.
“그런 걸 나한테 줘도 돼?”
“나한테는 형이 제일 중요하니까.”
선우는 팔찌를 채워 주며 자연스럽게 답했다.
“그리고 팔찌 아깝다고 아끼지 말고 조금이라도 위험할 것 같으면 그냥 써 버려.”
다른 사람이 들으면 기겁할 소리를 태연하게 내뱉는다.
“응.”
그걸 알면서도 현우는 얌전히 대답했다. 어차피 쓸 만한 일이 생길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였다. 곁에는 언제나 선우와 도진이 있었고, 그들이 없더라도 뭐든 막아 낼 자신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번역 아이템도 하나 가져다줄게.”
“그건 하나 있는데?”
“있다고?”
준 적이 없는 번역 아이템이 있다는 말에 선우는 의문을 가졌다.
“그 일본 사람이 줬어. 준이치라고 하던가?”
“이와모토 준이치?”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보자.”
현우는 방 한구석에 던져두었던 번역 아이템을 가져와 선우에게 보여 주었다. 혹시나 해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공방에서 제작된 최고급 번역 아이템일 뿐이었다. 뭔가 특별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른 사람이 준 걸 형이 가지고 다니는 건 내키지 않았다. 그랬기에 선우는 실수인 척 준이치가 준 번역 아이템을 부쉈다.
“아, 실수. 부실한 걸 줬나 보다. 내가 더 좋은 걸로 새로 가져다줄게.”
그러고선 부숴 버린 아이템은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 넣었다. 현우는 선우가 일부러 부순 걸 알고 있었지만, 그저 작게 웃으며 넘어갔다. 질투하는 동생이 귀여웠으니까. 동생이란 존재는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비행기를 타는 당일이 되었다.
“비행기는 처음 타 보는데.”
현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공항에 들어섰다.
포털이 열린 이후, 여행객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래도 갈 사람은 간다. 그렇기에 오늘도 공항은 붐비고 있었다.
“우리도 저기 줄서면 되나?”
“아니, S급 이상 각성자들은 따로 수속하도록 되어 있어. 여러 의미로 위험하니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들에게 공항 직원 중 하나가 붙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 수속을 도와드릴 박현철이라고 합니다.”
그는 친절하게 그들을 VIP실까지 안내했다.
“여기는 S급 각성자분들만 쓸 수 있는 특별실입니다. 편히 쉬고 계시면 수속 절차를 전부 마치겠습니다.”
그리고는 뒷걸음질 쳐 밖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현우는 내부를 훑어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한쪽에는 바가 있었고, 그 옆에는 핑거 푸드 몇 가지가 예쁘게 놓여 있었다. 거기서 좀 더 들어가면 편히 쉴 수 있는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비싸 보였다.
“대단하네.”
“형,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원래 이런 데는 뷔페식 아냐?”
“핑거 푸드만. 그 외 음식은 주문하면 직접 만들어 줘. 안쪽에는 침대방도 있으니 혹시 피곤하면 잠시 쉬어.”
그러면서 현우에게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42.
과연. 메뉴판에는 레스토랑 뺨치는 여러 가지 메뉴가 적혀 있었다.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는걸?’
현우가 진지하게 메뉴판을 탐독하고 있는데,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그러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십니까? 여기서 다시 뵙는군요.”
미국 가디언 길드의 길드장, 레온이었다. 밝은 색의 정장을 걸친 그는 부드러운 금발을 반쯤 뒤로 넘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가 길드 특유의 제복을 걸치고 있으니 만화 속에서 튀어나온 사람 같아 보였다.
“여긴 무슨 일이십니까?”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선우가 레온을 상대했다.
“그냥 아는 사람이 있길래 반가워서 찾아와봤습니다.”
“저희가 반가워할 사이였던가요?”
“여러 번 봤으니 그래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한쪽은 웃으면서, 다른 한쪽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현우는 곧 하나의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어 잘하시네요?”
지금 그는 번역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레온의 말이 제대로 된 한국어처럼 들렸다! 저번에 만났을 때만 해도 영어로만 말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국에 관심이 많아서요. 공부는 진즉 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본국의 말을 더 많이 사용하긴 하지만요.”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는 외국인은 처음 봤다. 누가 보면 한국에 몇 년 산 사람인 줄 알겠다.
“그러고 보니 미국으로 가신다면서요?”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딱히 비밀은 아니시지 않습니까?”
“소문내려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 말에 레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는 걸로 압니다만, 제가 그 쪽으로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가없는 호의는 없지요.”
“대가라. 그럼 1세대 분과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시겠습니까?”
“거절합니다.”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쩔 수 없지요. 대가를 거절하시니 호의만 베풀겠습니다.”
무슨 수작인지 모르겠다. 선우는 여전히 웃는 낯인 레온을 싸늘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강대국인 미국에서도 1, 2위를 다투는 길드의 길드장. 그런 그가 굳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 필요가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그러니 경계를 하는 것도 당연했다.
“개인 비행기를 끌고 왔거든요. 자리는 넉넉하니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듣기로는 거대 기업의 후계자였다고 했던가. 그 때문인지 엄청난 재력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라 지금의 자리를 만든 선우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선우는 이번에도 필요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이나 도진은 힘들지 않겠지만, 형은 다르지 않겠는가. 아무리 좋은 자리에 앉아서 간다고 해도 개인 비행기가 더 편할 건 뻔한 이야기였다.
“잘 모시겠습니다.”
레온은 승리한 사람처럼 웃어 보였다.
개인 비행기는 상상했던 것보다 안락했다. 내부만 봐서는 비행기라기보단 어느 집의 거실 같았다. 소파는 크고 멋졌고, 심심한 시간을 보낼 만한 게임도 여럿 있었다. 뿐이랴. 개인 요리사까지 타고 있었다.
‘그나저나 신기하네.’
포털이 열린 시간이 길지 않아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만난 길드장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는 가준 정도였다. 그런 그도 20대였고.
“형, 왜 그래?”
생각에 빠진 사이, 선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왔다.
“아니, 길드장이 다들 젊다 싶어서.”
그 말을 레온도 들은 모양이었다. 그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그렇게 젊어 보입니까?”
“네? 네.”
“몇 살쯤 돼 보이나요?”
“20대 중반 정도요?”
“틀렸습니다.”
“20대 후반인가요?”
아니면 더 올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레온이 말을 이었다.
“30대 중반입니다.”
“동안이시네요?”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감탄사를 내뱉는데, 옆에 있던 선우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네.”
선우는 나이는 21살. 열 살 넘게 많은 사람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직접 내뱉는 건 실례지. 현우는 선우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러나 선우는 내뱉은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레온도 딱히 뭐라고 하지는 않긴 했다.
“지선우 씨는 어리군요.”
다만 가소롭다는 얼굴로 그런 말을 내뱉긴 했다. 덕분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거기에 도진이 한 술 더 떠 읊조렸다.
“한쪽은 어리고, 다른 쪽은 많으니 저는 적절한 것이겠군요.”
선량해 보이는 표정으로 한 말이었으나, 그 여파는 대단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종종 이런 식으로 폭탄을 던지곤 했다.
그런 사소한 문제가 생기긴 했지만, 비행은 편안했다. 타고 있던 직원들도 하나같이 친절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침대도 푹신했다. 진짜 호텔에서 푹 쉰 기분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미국, 레온의 호의는 끝나지 않았다.
“몬스터를 보러 왔다고요? 저도 마침 그곳으로 가려던 참인데 같이 가시지 않겠습니까? 더 빨리 보실 수 있을 겁니다.”
선우는 이번에도 거절하고 싶은 걸 참았다. 그리고 레온은 자신이 말한 대로 빠르게 몬스터를 볼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비록 먼 거리에서였지만 말이다.
‘점박이 맞는 것 같은데.’
멀리서 망원경을 만지작거리던 현우는 선우 몰래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아무래도 점박이 같았다.
“더 가까이서 볼 수는 없죠?”
“위험하니까요. 저 근처는 사람들도 전부 대피했습니다. 당장 얌전하다고 해서 방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현우는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케로를 툭툭 쳤다. 그리고 높은 빌딩 위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점박이를 가리키고, 자신의 옆자리를 찍었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케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금방 알아듣고는 토실한 엉덩이를 쫄랑쫄랑 흔들며 밖으로 몰래 나갔다.
점박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높고 파란 하늘에 기분도 들떴다. 그는 기지개를 쭉 펴고 이어 빌딩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라졌지만, 아직 남아있는 이들이 있었다.
소위 말하는 각성자들.
사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기에 지금까지 간만 봤지만, 이제 점박이는 확신했다. 사람은 자신보다 약하다. 마계에서 보았던 사람이 특이했던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움츠릴 필요가 있는가? 아니다.
점박이의 입이 쭉 찢어지며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오늘은 근처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동을 해서 다른 사람을 찾아봐야지.
마계의 생물은 기본적으로 어둠이 바탕이 되는 생물. 그런 이유로 언제나 난폭하며, 다른 이들을 해치고자 한다. 좀 더 강해지기 위해서, 어둠을 쌓기 위해서!
그런 이유로 점박이는 낮게 웃으며 날개를 펼쳤다. 이제 사냥의 시간이다.
“어, 팀장님. 블랙 드래곤이 움직입니다!”
빌딩 아래에서 점박이를 올려다보던 각성자가 말했다.
“어디로?”
“어디, 그러니까. 여기, 여기입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커다란 몸체가 바닥에 내리박혔다.
쿵!
각성자는 점박이가 착지하는 범위에서 아슬하게 벗어났다. 그 덕분에 온몸이 욱신거렸지만, 죽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다들 전투 준비해! 그리고 지원요청도 한다!”
팀장이 외치고 각성자들이 점박이를 둘러쌌다.
“레이드 시작!”
초반에는 당황했지만, 이들은 가디언 길드의 길드원들이었다. 미국 최고의 길드, 그 길드의 일원이라는 자부심은 언제나 가슴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그러니 점박이를 정면에서 마주치고도 도망치지 않았다.
탱커가 앞으로 나서고, 딜러진들이 공격을 퍼부었다. 화려한 능력이 허공을 수놓으며 점박이에게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점박이는 코웃음을 치며 몸으로 그 모든 것을 받아냈다.
블랙 드레이크, 그는 마법 저항력이 높으며 두꺼운 거죽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였다. 어지간한 공격은 버텨낼 정도가 되었다. 포화를 이겨낸 점박이는 이어 묵직한 꼬리를 휘둘렀다.
그에 가장 앞에 있던 탱커가 막아섰으나,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그만큼 타격이 강했다.
“키르르륵.”
점박이는 키들대면서 날뛰었다. 당장 죽일 수도 있으면서, 그러지 않고 그들을 농락했다. 그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잘 몰아넣고 있다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됐다, 됐어. 점박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앞으로 다가올 살육의 시간에 기대감을 가졌다. 그리고 가장 앞에 선 사람의 방패 아래에 발톱을 걸어서 위로 걷어냈다. 방패에 가려져 있던 사람의 표정에 당혹이 떠올랐다.
이어 점박이가 막 입을 벌리려는 순간, 무언가가 그의 머리 위로 가뿐히 착지했다.
“왕왕!”
조그맣고 작은 강아지 한 마리였다.
점박이가 멈칫한 틈을 타서 잡혀있던 탱커는 뒤로 물러났지만, 놀라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아지?”
“포메라니안?”
“왜 여기에 강아지가?”
그런 사람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아지가 앞발로 점박이의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왕왕! 아르르르륵.”
케로로서는 나름 경고를 한 것이었으나, 아직 정체를 모르는 점박이는 분노했다. 그래서 머리를 흔들었다. 이 발칙한 생물을 떨어트려 밟아 죽인 다음 꿀꺽 삼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