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33화 (4/16)
  • 26.

    드디어 오늘이군요.”

    박덕수를 비롯한 실종자 가족들은 바로 앞에 서 있는 커다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여기서 사라진 가족들의 행방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들어갑시다.”

    그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대담이 이루어지는 곳은 대강당이었다. 안내대로 자리에 착석하고 나니 어느새 약속한 시간 1시가 되었다. 시간이 되자마자 앞의 문이 열리며 청년 몇이 들어섰다.

    지선우다.”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지선우였다. 그리고 다음은 그의 형인 지현우, 부길드장인 서찬영, 그리고 마지막 청년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지금부터 대담을 시작하겠습니다.”

    마이크는 서찬영이 잡았다. 대담이라고 하나 전부 질문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기에 실종자 가족 중 대표를 뽑아 앞자리에 배치했다. 일단 그들에게서만 질문을 받고, 차후 전체 질문 시간을 정해진 시간 동안 가질 예정이었다.

    박덕수는 대표이기에 앞에 앉았다. 이제 사라진 가족의 행방을 알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지현우를 바라보았다.

    그 옆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키가 크고 덩치가 있어서 그런가, 유독 여려 보였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그곳에서 살아 돌아왔는가. 과거 자신의 아들보다 작은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내 아들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희미한 희망을 가졌다.

    안녕하세요. 지현우입니다. 1세대이기도 합니다.”

    순해 보이는 얼굴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건네받은 마이크를 쥔 채 잠시 망설였다. 이어 질문 시간이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질문의 물꼬를 튼 사람은 덕수였다.

    다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같이 사라진 인원이 1만 명. 그 많은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질문을 하고 답이 돌아오기까지의 빈 시간, 미친 듯이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전부, 전부 죽었습니다.”

    철렁, 가슴이 내려앉았다.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 많은 사람이 전부 죽었다고믿고 싶지 않았다.

    강당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럴 리가 없다고 외치는 사람, 울기 시작하는 사람, 그 속에서 덕수는 멍하니 있었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렸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여기서 무너지면 그동안 아들을 찾아다닌 게 허송세월이 된다.

    그게 저, 정말입니까?

    더듬더듬 묻자 답이 돌아왔다.

    네.”

    그걸 어떻게 압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만약에 살아 있었으면, 이번에 돌아왔을 겁니다. 하지만 중간에 요정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살아남은 인간은 저 하나뿐이라고요.”

    요정. 다른 세계로 끌려가 각성한 이들이 말하곤 했던 존재였다. 조율자, 각성을 도와주는 도우미. 여러 가지로 불리곤 했지만, 마냥 선한 존재는 아니라 하였다.

    거짓말거짓말이야당신 같은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내 아들이 죽었다고?

    덕수는 어느 순간부터 울부짖기 시작했다.

    사실을 말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석에 있던 까만 털뭉치가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부피를 불려 나갔다.

    크르릉!

    머리를 세 개 가진 거대한 짐승이 울부짖었다. 소란스럽던 대강당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도망쳐야 하나눈치를 보던 사람 중 하나가 움직이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케로는 안전해요. 도망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이 몬스터는 뭡니까!

    마계에서 저를 도와준 친구입니다. 케로, 다시 원래대로.”

    현우가 짐승을 툭툭 치니 다시 빠르게 줄어들어 작아졌다. 그래, 그렇지. 아무런 능력도 없는데 그곳에서 살아남았을 리 없다. 무언가가 있었으니 살아남았겠지. 덕수는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납득했다. 그리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제 아이는. 다른 사람들은 정말 전부 죽은 겁니까?

    네.”

    어째서어째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이어 눈물이 주르륵 흐르기 시작했다. 10년 전 자식이 사라지고 나서 내내 참아 왔던 눈물이었다.

    죄송합니다.”

    현우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사실 알고 있었다. 사과해야 하는 건 그가 아니라는 걸. 그가 다른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니고, 그저 운이 좋아 혼자 살아남았을 뿐이다. 원망해야 하는 사람은 그가 아니었다.

    아는데, 아는데도 원망스러웠다. 덕수가 우는 사이, 옆에 있던 중년의 여성이 다급히 말을 꺼냈다.

    제, 제 아이의 이름을 아시나요예나, 박예나예요나이는 21살이고요. 대학생이었어요. 그날, 친구랑 놀러 간다는 걸 말리는 건데. 그런 일이 일어날 줄 알았으면!

    그러며 가슴을 두드린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저 평소와 같이 놀러 나가는 걸 배웅했을 뿐인데, 그게 어째서 잘못이 된단 말인가.

    사람들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내 아이를, 내 남편을, 내 부인을 아시나요. 통곡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담담하게 그들을 대하던 현우의 표정이 점점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그저 몸만 강해진 것인가.’

    작게 한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머리 위에 떨어져 시야를 가렸다. 누군가가 접근하는지 알아채지도 못했다. 얼떨떨한 기분에 머리를 덮은 걸 걷어 내려 했으나, 큰 손이 그걸 막았다.

    선우는 아니었다. 그는 지금 유족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건 누구지?

    가만히 계십시오.”

    익숙한 목소리, 도진이었다. 그제야 머리를 덮은 것이 도진의 겉옷임을 깨달았다. 낯선 체향이 훅하고 풍겨 왔다. 그러나 딱히 거슬리거나 기분 나쁜 향은 아니었다. 외려 기분 좋은 향이었다. 시원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도진은 점퍼를 덮어준 걸로도 모자랐는지, 살며시 현우를 껴안았다. 그 손길이 너무나도 조심스러워 마치 유리 세공품을 대하는 것 같았다.

    가족인 선우도 아니고, 타인에게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가기분이 묘해졌다. 내내 꾹꾹 누르고 있던 오래된 기억이 현우를 자극했다.

    으.”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괜찮습니다.”

    다정한 목소리가 달래 주었지만, 그걸 듣고 있자니 외려 더 서러워졌다. 현우는 잠자코 도진에게 몸을 맡겼다. 어차피 점퍼에 가려져 아무도 그를 볼 수 없다. 그러니 잠시, 그에게 의지하기로 했다.

    잠시, 아주 잠시만.

    장내의 소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

    선우는 내내 걱정하던 형을 돌아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버텼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는 형을 감싸 안은 도진에게 다가갔다.

    이제 괜찮습니다.”

    뭐라 한마디 해 주고 싶었지만, 그가 없었다면 형은 더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선우는 그에게 뭐라 하는 대신, 형을 넘겨받는 걸 택했다. 도진은 순순하게 현우의 곁에서 물러났다.

    이것도 가져가십시오.”

    그러면서 점퍼를 걷어 내려 했으나, 현우가 그 끝을 꾹 잡았다.

    미안, 잠시만 더 이대로 있을게.”

    그 모습이 어찌나 힘들어 보이던지. 유족들의 반발을 무시할 걸 그랬다,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들어가서 쉴래?

    아냐, 아직 괜찮아.”

    점퍼 사이로 고개를 내민 현우가 대답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손을 잡았다. 그로부터 30분, 다시 대담이 진행되었다. 질문은 아윤이 뽑아 왔던 예상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이후는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앞으로 선현 길드는 혹시나 모를 일에 대비하여 1세대 실종자 유족 연합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생각입니다. 재단을 통한 생계지원 및 1세대 실종자 유해를 찾는 일까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그렇게 기나긴 대담이 끝났다.

    대담이 끝나자마자 선우는 곧바로 현우를 안아 들고 거처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눕히고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쥐여 주었다.

    이제 괜찮다니까.”

    그래도 쉬어. 많이 힘들었잖아.”

    그래. 알았어.”

    선우는 현우의 머리를 넘겨 주고는 이불을 곱게 덮어 주었다. 그런 후, 방 밖으로 나갔다. 현우가 혼자서 감정을 토해 낼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현우는 향기롭고 달달한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이제 큰 고비는 넘긴 셈이었다. 여전히 자신을 노리는 사람은 있겠지만, 예전보다는 덜할 거라 하였다.

    조건이 붙긴 했지만, 약간의 자유가 생긴 셈이었다. 그럼 이제 뭘 하면 좋을까?

    쉬고 싶다.

    그 생각은 마계에서부터 지금까지 바뀌지 않았다. 게으름을 피우면서 뒹굴고 싶다. 평화로운 세상에서 평화를 즐기고 싶었다. 이제는 그게 가능할 것이다.

    한 번 더 차를 홀짝이며 멍하니 있다가 문득 침대 옆에 내팽개쳐진 점퍼를 발견했다. 현우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점퍼를 털어 내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미처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했다. 다시 만나면 고맙다는 말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크흥!

    바닥에서 쭉 몸을 펴던 케로가 침대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그래, 너도 오늘 잘했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신나서 몸을 발라당 뒤집는다. 그러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고롱고롱 잠들었다.

    정말 팔자 편한 녀석이라니까.

    현우는 피식 웃고는 그 옆에 몸을 눕혔다. 케로를 따라 잠시 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27.

    푹 자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형, 밥 먹어.”

    마침 선우가 부르러 와서 일어서려던 현우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점퍼에 닿았다.

    돌려줘야지.

    잠바를 들고 밖으로 나가자, 식탁을 차리는 선우와 도진이 보였다. 처음에 선우는 도진과 같이 식탁을 쓰기도 싫어했지만, 현우의 말에 결국 함께 식사하게 되었다. 물론 언제나 같이 먹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은 도진이 회피했으니까. 본인은 일이 있어 그러는 거라는데, 아니라는 게 너무 티가 났다.

    점퍼, 고마워요.”

    현우가 도진에게 다가가 점퍼를 건네자 그가 얌전히 받아들었다. 그런데 점퍼도 안에 입고 다니는 옷처럼 미묘하게 낡았다.

    옷, 선물 받은 거예요?

    아무리 꾸미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다. 그런 도진이 이렇게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물어봤는데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동생이 골라 준 옷입니다.”

    그래서 그렇구나. 도진의 말에 납득하는데 뒤에서 선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나도 형이 사 준 옷들 아직 가지고 있어!

    그걸 왜 가지고 있어.”

    지금은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 그때보다 많이 자랐으니 입으려면 찢어야 할 것이다.

    형이 사 준 거니까.”

    선우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현우는 선우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자신은 선우가 준 물건을 지키지 못했는데. 가방에 매달려 있던 작은 인형은 생일에 선우가 준 것이었다. 그러나 마계에서 지내는 동안 잃어버렸다.

    이후 위험을 무릅쓰고 다시 찾으러 가 봤을 때는 아무것도 없었다.

    고마워.”

    내가 사 준 것들을 잘 간직하고 있어서. 현우는 부드럽게 웃었다.

    고맙긴. 참, 얼른 앉아. 밥 먹자.”

    선우는 현우의 의자를 빼 주며 재촉했다. 도진과 선우가 같이 만들었다는 식사는 무척이나 맛있었다. 형이 돼서 얻어먹기만 하는 건 미안했지만, 자신의 요리는 딱히 맛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조금은 연습해야겠다.

    여기는 마계가 아니고 이런 나날이 흘러갈 것이다. 그러니 뭐든 조금 배워 두는 게 좋겠지.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모든 것이 엉망이로군.”

    헌터관리국 국장 김철수는 얼굴을 구긴 채 신문을 넘겨 보았다. 대부분 1세대의 이야기가 지면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부정적인 이야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나름 손을 써 보았지만, 요람 길드의 언론조작은 이기지 못했다.

    요즘 젊은이들은 정신이 글러 먹었어!

    국가에 기여하여 발전을 도모한다. 그게 얼마나 훌륭한 이야기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이런 행태를 보이는 것이다.

    류영진.”

    네.”

    다소 마른 듯한 몸에 안경을 쓴 남자가 대답했다.

    이거 어떻게 안 되겠나?

    힘들죠. 예산과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놈의 예산과 시간!

    김철수는 분노하며 신문을 구기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드러난 것이 다는 아닐 텐데. 무려 마계에서 10년 동안 지낸 사람이다. 뭔가 더 알고 있는 게 틀림없어.”

    그야 그렇지만, 지금 국가에서 소환하면 욕이란 욕은 다 먹을걸요.”

    욕을 먹더라도 소환이 가능하면 다행이지.”

    선현 길드는 지현우의 소환을 거부할 것이다. 그리고 되레 국가를 협박할 가능성도 있었다. 실제 그런 경우가 제법 많았으니까.

    이렇게 압박하는데 뭘 믿고 국가에 봉사합니까나라가 여기뿐이랍니까?

    그렇게 말하고 해외로 뜬 각성자도 있었다. 일단 미국에라도 건너가면 더는 건드릴 수 없다. 그게 지금의 한국이니까.

    되는 일이 없어.”

    그야 그렇죠. 그래서 정보부에는 다른 이야기도 나오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

    이럴 바엔 차라리.”

    차라리?

    영진은 김철수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처음에는 못마땅하던 얼굴이 이내 점점 펴지기 시작했다.

    나쁜 계획은 아니군. 하지만 그게 드러날 경우 일어날 일은 알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진행해 봐.”

    그러겠습니다.”

    영진은 김철수에게 인사를 하고 국장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침 지나던 무혁과 마주쳤다.

    오랜만입니다.”

    본 지 며칠 안 되지 않았습니까?

    정보부에서 야근만 하다 보니 날짜 개념이 희박해진 모양입니다.”

    영진의 말을 잠자코 듣던 무혁이 국장실을 바라보았다. 요즘 영진의 국장실 출입이 잦다. 이유야 알고 있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예감만 가지고서 뭐라 할 수도 없으니.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네.”

    무혁은 멀어지는 영진을 보며, 다시 몸을 움직였다. 그도 더는 가만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

    현우는 넓은 바닥에 앉아 멍하니 유리창의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푸른 하늘,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이 어여쁘다. 저건 양 구름, 저건 나비구름. 저건…….

    구름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찬가지로 옆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케로가 꼼질꼼질 거리며 현우의 품에 파고들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행동인데, 이제는 곧잘 한다. 이래도 현우가 자신을 내치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었다.

    좋다.”

    이 조용한 시간이 너무 좋았다. 투쟁하지 않아도 되는 삶, 이런 걸 원했다. 현우는 그대로 케로를 끌어안고 스르르 옆으로 누웠다. 바닥에 깔린 러그의 촉감이 부드럽다.

    평온하네.

    게으름의 극치였다.

    선우는 빠르게 손을 놀리고 있었다. 선현 길드의 본거지, 게다가 옆에는 도진과 케로가 있다. 그 외에도 길드원 중 뛰어난 이들이 그를 지키고 있으며, 선우도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안전하다.

    그걸 알면서도 형의 곁에 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오랜 시간 품어 온 불안감은 형을 되찾고 나서도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길드장님.”

    그런 선우에게 찬영이 찾아왔다.

    뭡니까?

    해외에서 던전형 포털이 열렸습니다.”

    포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게이트형과 던전형. 가끔 열리는 게이트형은 몬스터를 방출한다. 그 때문에 시간에 맞춰 토벌하지 못하면 주변이 엉망이 된다. 그리고 던전형, 이 경우는 당장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진 않는다. 대신 안에서 점점 수를 불려 나간다. 그러다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나 위험하다. 그렇기에 각 나라는 가능한 몬스터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포털을 해결하길 원한다. 게이트형은 몬스터 전멸, 던전형은 던전 보스 사망. 그게 포털이 닫히는 조건이었다.

    둘 다 전조 증상이 있으나, 운 나쁘게 인적이 드문 곳에서 발생하면 막기도 전에 터져 나가기도 했다.

    어디입니까?

    아프리카 쪽입니다. 규모가 S급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S급 각성자가 필요해 여기저기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쪽은 S급 각성자가 무척이나 드물었다. 그나마 있는 S급 각성자도 강대국이 좋은 조건을 내밀고 빼갔기 때문이었다.

    그럼 굳이 제가 갈 필요는 없겠군요.”

    네, 굳이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조건을 후하게 걸었으니, 아마 다른 나라에서 먼저 나설 것 같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선우는 다시 살펴보던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지만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포털 측정 결과 S급을 넘어서는 것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위험하단 소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가고자 하는 각성자는 있을 것이다. 더 위험한 던전일수록 주어지는 아이템의 가치도 높아졌으니까. 그래, 그래야 맞는 말인데.

    이상하게 모이는 S급 각성자가 없다고 합니다.”

    동시다발적으로 던전이 터지기라도 했답니까?

    네, 그런 모양입니다.”

    신기한 일이군요.”

    그 때문에 그쪽에서도 매달리고 있습니다. 대가도 올라가고 있고요.”

    평소라면 선우도 가 봤을지 모른다. 하지만 무려 다른 나라, 단순 왕복만 하는 데도 얼마가 걸리던가. 그동안 형을 혼자 둔다고상상도 하기 싫었다.

    그랬는데 말이지.

    다시 살펴본 조건이 너무 좋았다.

    피닉스의 수호.

    착용한 대상자를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아이템. 기간에 따른 횟수 제한이 있긴 하지만 그로도 훌륭하다. S급 각성자의 공격도 막아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선우는 형이 착용하고 있는 아이템을 떠올렸다. 괜찮은 것만 모아서 주었다고 해도 아직 부족한 감이 있었다. S급 각성자가 작정하고 공격이라도 하면 제대로 막지 못할 게 뻔했다.

    이건 탐나는데.

    선우는 고민했다. 이것도 현우를 탐내는 다른 이들의 음모는 아닌지 이리저리 들춰 보았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자리를 잠시 비워도 괜찮겠습니까?

    고민하다가 꺼낸 말에 찬영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언제나와 같이 선현 길드는 제가 지키겠습니다.”

    전 그보다 형이 걱정됩니다.”

    그분도 제가 지키겠습니다무슨 일이 있어도 말입니다.”

    저렇게 보여도 찬영은 엄연한 부길드장으로, 가진 힘이 약한 건 아니었다. 선우는 잠시 계산을 해 보다 대답했다.

    좋습니다. 이번 요청 승낙한다고 보내십시오.”

    알겠습니다. 같이 가는 팀은 몇 팀으로 할까요?

    1팀만 데려가겠습니다.”

    더 데려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선우가 대부분 처리하고, 1팀은 보조하는 역할만 할 것이다.

    곧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찬영이 밖으로 나서고 나서야 선우는 잠시 서류에서 눈을 뗐다. 잘한 짓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형을 보호할 아이템은 필요하니까. 게다가 요청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상태에서 던전형 포털이 터지면 인명 피해가 엄청날 것이다. 가는 편이 나았다.

    28.

    선우는 현우와 도진에게 소식을 알렸다.

    어딜 간다고?

    아프리카. 정확히는 케냐지만.”

    아프리카. 그 먼 나라에 포털을 닫기 위해 간다는 말에 현우의 얼굴에 걱정이 서렸다. 선우가 충분히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직 이쪽의 몬스터는 접해 본 적이 없기에 어떤 수준인지 몰랐다. 그러니 불안도 당연한 것이었다.

    위험한 일은 아니야.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런 현우의 마음을 읽어 내기라도 한 듯 선우가 걱정을 덜어 내고자 했다. 그래도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케로를 데려가.”

    그러면서 까만 털뭉치를 건네주었다. 마침 졸고 있던 케로는 하품을 쩍 하며 선우와 얼굴을 마주하였다.

    ?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지만 본 모습을 보았으니까. 원래는 강한 몬스터라는 것을 안다.

    안 돼.”

    선우는 케로를 그대로 현우에게 돌려주었다.

    나보단 형을 지키는 쪽이 더 나아.”

    자신보다는 형이 위험해질 확률이 더 높으니 말이다. 그러나 현우도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날 지켜 줄 사람은 많아. 그러니 네가 케로를 데려가.”

    안 된다니까.”

    졸지에 형제 사이를 왔다 갔다 하게 된 케로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면 날 데려가!

    거기가 어딘 줄 알고 데려가 달래.”

    케냐라며!

    안 돼.”

    대체 되는 게 뭐야?

    현우가 케로를 흔들며 물었다.

    형은 여기서 쉬고 있어. 이미 많이 힘들었잖아. 힘들 텐데 왜 따라온다는 거야?

    그거야!

    네가 걱정되니까. 현우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차라리 몰래 따라갈까?

    케로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경우, 당연하지만 이쪽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지켜야 할 대상인 현우가 없어지는 셈이 되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고민을 하는데 옆에서 도진이 말을 얹었다.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정말이야, 형. 나는 약하지 않아.”

    나보단 약해현우는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꾹꾹 내리눌렀다.

    역시 케로는 데려가.”

    끝없는 실랑이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실랑이는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진정되었다. 결론적으로 선우는 케로를 데려가기로 했다.

    와웅?

    선우는 그의 품에 안겨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케로를 보며 작게 한숨지었다. 결국, 형의 고집을 이기지 못했다.

    몰래 두고 갈까?

    몰래 두고 가면 나도 따라갈 거야.”

    생각을 읽는 것이 귀신같다.

    알았어. 데려갈게.”

    컨트롤 되지 않는 몬스터가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마는. 형의 불안을 잠재울 수만 있다면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그럼 부탁드립니다.”

    선우는 도진을 만난 후로 처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에 도진도 마주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선우의 외국행이 결정되었다. 지구로 돌아와서 처음 동생과 떨어지게 된 것이다. 겨우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집이 휑하니 빈 느낌이 들었다.

    부디 무사하기를.

    보내기 전에 케로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다.

    만약에 선우가 다치면.

    현우는 간만에 바짝 긴장한 케로를 앞에 두고 손으로 목을 그었다.

    넌 죽는다.

    와, 왕!

    군기가 바짝 든 케로가 힘차게 짖었다. 마계에서의 지옥 같던 나날을 떠올리며, 반드시 지키겠노라고 앞발을 들어 맹세했다. 아니면 아작나는 건 자신이었으니까. 그렇게 케로는 선우에게 덜렁 들려 같이 떠나갔다.

    이제는 선우가 돌아오는 나날을 기다리며 평소와 같은 생활을 하면 되었다.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

    찬영이 곤란한 표정으로 도진에게 서류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헌터관리국에서 보냈습니다.”

    도진은 묵묵히 봉투를 뜯어 안쪽을 보았다. 그러고는 곤란한 듯 눈썹을 들썩였다.

    국내에도 새로 포털이 열린 겁니까?

    네, S급, 어쩌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S급 각성자는 저뿐만이 아닐 텐데요.”

    다른 길드들도 거의 다 요청을 받은 듯합니다.”

    그동안 열린 포털의 대부분은 A급 이하였다. S급이라 불리는 포털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그 이상 가는 던전이 발견되었다고해외에서, 그리고 국내에서?

    그래서 국내의 S급 각성자는 전부 모으는 것 같습니다.”

    정말 S급 이상 가는 던전이 맞습니까?

    헌터관리국의 측정은 정확한 편이니까, 맞겠지요.”

    그야 그렇지만, 느낌이 나빴다. 분명 헌터관리국에서도 1세대를 탐내는 걸 알고 있는데, 그동안 너무 조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갑자기 그런 포털이 열렸다니, 의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종류는 뭐라고 합니까?

    게이트형이라고 합니다.”

    게이트형은 던전형보다 더 위험하다.

    만약에 이 모든 게 진실이라면.

    인명 피해가 커질 것이다. 그걸 알고 있었지만, 쉽사리 참여 여부를 결정할 수가 없었다. 현우가 있었으니까. 마침 케로도 선우를 따라 자리를 비운 상황인데 도진마저 빠지면 호위하는 사람의 수준이 확 떨어진다.

    일단 저는 여기 남아 있을 생각입니다.”

    찬영도 비슷하게 요청받았지만, 그는 어떻게든 거절할 생각이었다. 마침 길드장인 선우도 자리를 비우고 있으니, 부길드장인 그마저 억지로 참여시키지는 않을 것이란 계산이었다.

    도진은 이를 악물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목숨의 무게를 잰다면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러면 현우는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세요.”

    그런 도진에게 현우가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괜찮으니 가세요. 더 많은 사람을 살리는 게 중요하죠.”

    당신이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괜찮아요. 찬영 씨도 있고, 다른 사람도 남아 있잖아요.”

    노리는 사람이 더 강하면 어쩔 겁니까?

    제가 때려눕힐게요!

    그러면서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찬영이 고개를 뒤로 돌리며 어깨를 들썩였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놓고 웃을 수는 없었지만, 가소로워 보인 모양이었다.

    “……주먹은 그렇게 쥐는 게 아닙니다.”

    도진은 손을 뻗어 현우의 주먹 쥐는 법을 교정해 주었다.

    이렇게. 네, 힘을 좀 더 주고. 그래야 타격이 들어갑니다.”

    이렇게요?

    다시 쥐는 모양은 완벽했다. 습득력이 무척 빨랐다.

    그러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안심될 리가 있나. 도진은 손끝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걱정되잖아요저도 여기 남아 있는 것보단 가서 다른 사람을 지켜 주는 게 마음이 더 편할 거예요.”

    위험합니다.”

    괜찮다니까요. 찬영 씨도 강하지요?

    !

    그렇다잖아요.”

    얼른 다른 사람을 지켜 주라고 등을 떠미는 모습이 찬란하다. 본인도 힘들었을 텐데, 어쩌면 이리 상냥할까. 도진의 표정이 흐려졌다.

    그러면 대신 약속해 주십시오. 이곳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그럴 테니 안심하고 다녀오세요.”

    절대, 절대로 위험한 짓은 하시면 안 됩니다.”

    이어 도진은 조심해야 할 것을 하나하나 짚어 주었다. 어떤 게 위험한지, 그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처하는 게 좋은지, 몸을 사리는 법을 알려 주었다.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습니다.”

    하필이면 포털이 열리는 곳이 제주도다. 여차하면 당장에 달려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그렇기에 그런 약속밖에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도진도 거처를 떠나갔다. 도진이 떠나기 무섭게 찬영은 경비를 강화했다. 외부로 나갔던 팀들을 불러들이고, 본인은 거처에 들어앉았다.

    테이블 앞에 앉은 찬영은 태블릿을 조작하며, 종이를 빠르게 넘겼다. 작업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지겨워져 소파에 슬쩍 기대 누웠다.

    마음 같아서는 방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찬영이 자신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는 있지 말라 하였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심심해.”

    심정을 토로하니 찬영의 등이 움찔거렸다.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참으십시오.”

    네, 참을게요.”

    차라리 케로라도 있었으면 나았을 텐데. 아니, 지금쯤 케로는 동생인 선우를 열심히 돕고 있을 터였다. 뒹굴뒹굴하던 현우는 게임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제법 유명한 카트 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현란하게 칠해진 작은 자동차에 탑승한 캐릭터가 미친 듯이 질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게임에는 딱히 소질이 없었던 탓에 부딪치고 미끄러지고 난리다. 맵을 외우고, 원래 가진 힘을 써서 미세하게 조절하면 완벽하게 운행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얼마나 엉망진창으로 운전을 했을까.

    찬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2시. 점심시간 무렵이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부엌에 서서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땡. 땡. 땡.

    전자레인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식사하십시오.”

    얼린 밥을 데우고, 통조림 몇 개를 땄다. 선우가 본다면 이런 걸 형에게 먹일 순 없어하고 통곡했을 모습이었다. 그래도 찬영에게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외부에서 요리할 사람을 부를 수도 없었다. 내부에도 요리사는 존재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걸 조심하는 게 좋았다.

    최선은 직접 요리를 하는 것이었지만, 찬영은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혹시나 불평을 할까 봐 조마조마해하는데, 현우는 얌전히 식탁에 앉았다.

    아니, 외려 눈을 반짝이는 것 같았다.

    통조림이네요?

    네.”

    와, 통조림은 별로 못 먹어 봤는데.”

    그러면서 통조림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요즘엔 이런 것도 통조림이 나오네요.”

    깻잎, 진미채, 볶음김치, 여러 맛의 참치. 직접 만든 요리만큼은 아니었지만, 평균적인 맛은 되었다. 게다가 신기함까지 더해지니 식사가 즐거워졌다.

    29.

    선우나 도진이 없어도 일상은 굴러갔다. 위험한 일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손님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지금.

    미국에 전신을 둔 피닉스’ 길드의 부길드장이 찾아온 것이다. 요청 몇 번 거절했다고 직접 찾아올 건 뭐람.

    이래서 거대길드 놈들은!

    자기네가 가진 권력을 아는 만큼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는다. 게다가 국적이 미국이니 오죽하랴.

    찬영은 이를 악물었다. 상대는 미국의 거대길드지만, 선현 길드도 밀리지 않는다. 굳이 직접 상대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대는 쉽사리 물러가지 않았다. 로비에 죽치고 앉아서 찬영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무슨 일 있어요?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현우가 찬영에게 물었다.

    미국의 길드에서 부길드장이 직접 찾아왔습니다.”

    왜요?

    1세대와의 대면 요청을 몇 번 거절했거든요.”

    그렇다고 직접 와요?

    그러게 말입니다. 너무 끈질겨요.”

    어차피 돌아갈 답은 또다시 거절일 텐데 말이다. 머리에서 김이 날 정도로 고민하던 찬영은 결국 결론을 내렸다.

    잠시 자리를 비워도 되겠습니까?

    됩니다. 중요한 일이잖아요.”

    그야 그렇지만원래 이러면 안 되는데!

    찬영은 벽에 머리라도 박을 기세였다.

    잠시, 최대한 빠르게 다녀올 테니 여기 가만 계십시오. 절대로 나가시면 안 됩니다.”

    나가지 않겠습니다.”

    현우의 확답을 듣고 나서야 찬영은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되는 일이 없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타국의 부길드장이 찾아올 건 뭐람. 찬영은 빠르게 움직였다. 면전에 대고 거절한 뒤 다시 후다닥 돌아올 셈이었다. 현우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길드장의 가족이었다. 보호하는 일을 소홀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모든 건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째서 안 된다는 겁니까!

    상대 쪽에서 진상을 부리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손꼽히는 거대 길드가 둘 있었다. 그중 하나가 가디언 길드였고 다른 길드가 피닉스 길드였다. 둘은 한국으로 치면 선현 길드와 백호 길드 같은 느낌이었다. 하나는 압도적으로 1위를 하고, 2위가 1위를 넘기 위해 악을 쓰는 느낌. 더불어 무례한 것까지 똑 닮았다.

    통역 아이템을 통해 고스란히 들어오는 소리에 찬영의 얼굴이 구겨졌다.

    안 된다면 안 되는 겁니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것부터, 이 무슨 무례한 짓입니까?

    이쪽의 요청을 몇 차례나 거절하지 않았습니까그래서 직접 찾아온 것뿐입니다.”

    바보냐거절했는데, 왜 찾아와마음 같아서는 강제로 로비에서 끌어내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러기엔 데려온 면면이 무시 못 할 이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진상 부리는데 이 정도를 데려온다고?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를 벗어나려고 하는데 부길드장이 손을 뻗어 찬영의 팔뚝을 잡으려고 했다. 잽싸게 손길을 피하긴 했으나, 그 일로 인해 로비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워워. 싸우자는 게 아닙니다. 그냥 제 말을 더 들어 주길 원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부길드장은 웃으며 변명했지만, 이미 분위기는 틀어졌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건 찬영만이 아니었다. 집에 얌전히 머물고 있던 현우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인지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눈을 감고 주변을 훑기 시작했다.

    강대한 힘이 풀려나가고, 빌딩을 중심으로 주변을 싹 훑었다. 근처에 머무는 각성자들의 정보가 전부 현우의 머릿속으로 들어왔다.

    역시 이상한 게 맞았다. 로비에서 깽판 치는 이들은 그렇다 치고, 외부에도 왜 이리 각성자가 많은지. 선현 길드 빌딩 근처라는 걸 고려해도 지나쳤다.

    어쩔까.

    찬영은 당분간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문밖에서 지키는 사람이 있긴 했으나, 별일 없으면 들어오진 않을 것이다.

    좋아. 그럼 조금 움직여 볼까?

    현우는 몸을 일으켜 빠르게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 후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니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스크도 있으면 좋을 텐데.

    당장은 없으니 어쩔 수 없다. 현우는 그 상태로 열리는 창문 쪽을 향해 다가갔다. 안전장치가 되어 있어 다 열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 혼자서 통과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읏차.”

    비좁은 창문을 빠져나가 빌딩 벽면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좀 더 섬세한 기술 좀 배워 둘걸.

    뒤늦게 후회되긴 했지만, 지금에 와서 어쩌랴. 몸으로 때워야지. 현우가 빌딩 아래로 내려오는 건 금방이었다. 땅에 발을 대자마자 기척을 지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척 지우기 하나만큼은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 없었다.

    척박한 마계의 환경, 그곳에서 적응하느라 이걸 가장 먼저 익혔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숨는 것 하나는 능숙했다.

    움직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를 발견했다. 일반 각성자를 기준으로 더 강한 자, 그리고 외국인. 마침 그에 적합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는 빌딩의 그늘진 곳에서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현우는 다시 기척을 드러내며 그에게 다가가 모자를 벗었다.

    안녕?

    인사를 들은 각성자가 흠칫 놀라더니, 곧바로 뒤돌아섰다. 이어 현우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품에서 무전기를 꺼내 다급히 뭐라 외쳤다. 그걸 확인하자마자 모자를 다시 썼다. 그나저나.

    뭐라는지 모르겠다.

    영어를 배운 지도 한참이 지났다. 게다가 현우는 딱히 공부를 잘하는 학생도 아니었다. 문장이 길어지니 조금도 알아먹지 못하겠다. 일단은 유인부터 하자.

    현우는 그대로 뒤돌아서 뛰기 시작했다. 비각성자가 뛰는 속도에 맞췄기에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그러니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따라잡혔다. 하나뿐이던 외국인은 어느새 여럿으로 늘었다.

    그런데 외국인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일부는 현우와 같은 동양인이었다.

    지현우, 맞지?

    가장 앞에 나선 남자가 물어 왔다. 알면서 따라와 놓고 되묻기는. 현우는 피식 웃으며 손을 풀었다. 이럴 가치도 없는 녀석들이긴 했지만, 간만이었으니까.

    맞다면?

    순순히 따라와 줘야겠다.”

    그러면서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순순히 따라오라고 한다고 그럴 사람이 몇이나 있겠는가. 현우도 그럴 생각은 없었다. 선우가 없다고 설치는 이 바퀴벌레 같은 놈들을 전부 때려잡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막 주먹을 드는 순간,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보스인가?

    분위기가 주변을 둘러싼 녀석들과는 좀 달랐다. 현우는 자세를 바로잡고 갑자기 난입한 사람을 빤히 바라보았다. 장신에 20대로 보이는 청년인데 인상이 기묘하다.

    반쯤 감긴 듯한 실눈에 단정히 정리된 머리, 얼핏 보면 힘도 쓰지 못할 모범생 같아 보였으나 그게 아님을 현우는 알고 있었다.

    몸이 단단해.

    겉으로 보이는 분위기는 느긋해 보이지만, 숨겨진 기세는 날카롭다. 대충 가늠해 보니 선우보다 약간 아래 같았다. 하지만 그 차이는 미묘해서 노력 여하에 따라 뒤집힐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이번에도 무슨 뜻인지 못 알아듣겠다. 하지만 대충 국적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본 사람이네.

    뭐야끼어들지 말고 꺼져!

    앞에 나섰던 남자가 위협적으로 말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험악한 인상에 커다란 덩치, 일반인이라면 무서워서 도망칠 기세였으나 상대가 나빴다.

    새로 나타난 남자는 귓가를 톡톡 치더니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꺼지라고 하셨습니까?

    남자는 꺼지기는커녕 외려 그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쯤에서 현우는 방관자 모드로 돌아갔다. 여기서는 굳이 자신까지 끼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손을 더럽히기는 싫습니다만.」

    남자가 옆으로 손을 내밀자, 어느새 나타난 여성 한 명이 그에게 지팡이 같은 것을 내밀었다. 아니, 자세히 보니 지팡이가 아니라 가느다란 검이었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무례하시군요.」

    그다음은 예상대로의 결과가 이어졌다. 무례한 놈은 검집으로 실컷 두들겨 맞고 바닥을 기게 되었고, 밀린다 싶어지자 외국인들이 그를 들고 튀었다. 그 과정에서도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현우는 앉아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막 몸을 세우려는 순간, 목 부분에 검이 와 닿았다.

    「같은 일행입니까?

    뭐라는 거야?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해 줬으면 좋겠다. 감히 목에 검을 들이댄 이 녀석을 조질까, 말까 고민하는데 옆에 서 있던 여성이 말을 꺼냈다.

    같은 일행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녀는 한국어를 할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닌데요. 같은 일행이면 도왔겠죠.”

    「같은 일행이 아니라고 합니다.」

    남자는 혀를 차며 검을 거뒀다.

    「운이 좋군요.」

    그러고는 뒤돌아서려다가 갑자기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모자를 벗어 보시지 않겠습니까?]

    모자를 벗어 보시라고 합니다.”

    싫은데요?

    그렇다면 잠시 실례를.”

    여성이 앞으로 발걸음을 내디디며 현우의 모자로 손을 뻗었다. 이걸 받아쳐, 말아망설이다 뒤로 한걸음 물러서자 손이 모자 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때문에 대충 얹혀 있던 모자가 툭 떨어져 내렸다.

    !

    몰래 나온 거라 얼굴을 들키면 안 되는데. 아까 그 녀석들이야 기억도 안 나게 조질 생각이라 보여 줬던 거였고.

    너무 방심했다.

    현우가 다시 모자를 줍는 사이, 그의 얼굴을 본 여성의 눈이 동그래졌다.

    30.

    지현우!

    정체를 들켰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부정을 해 보았다.

    아닙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만. 대체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잠시 산책 중이었어요.”

    이럴 때요?

    어설픈 핑계는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지. 주변에서 자신을 노리는 상황인데 태연하게 혼자 외출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현우는 천천히 뒤로 물렀다. 이대로 도망친 다음에 외출한 걸 무조건 부정할 생각이었다. 목격자가 있긴 했지만, 아무도 저들의 말을 믿어 주지 않을 것이다. 다들 현우에게 힘이 없다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청년이 현우에게 말을 걸어왔다.

    지현우라고 했습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한국말에 현우는 잠시 멈칫했다.

    한국말 할 수 있었어요?

    조금.”

    그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현우에게 던져 주었다. 얼핏 보기에는 블루투스 이어폰처럼 생겼다. 그걸 받아들자 자신의 귀를 톡톡 쳤다. 이제 보니 그도 같은 걸 착용하고 있었다.

    번역 아이템이에요.”

    여성의 설명을 듣고 그걸 귀에 찼다.

    이제 편하게 말할 수 있겠군요.”

    신기할 정도로 명확하게 번역되어 들려왔다.

    그나저나 지선우의 형이라더니. 어째서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겁니까?

    그야 감추고 있으니까.

    각성을 하긴 한 겁니까?

    그걸 말해 줄 의무는 없을 텐데요.”

    그러자 청년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건방지시군요.”

    건방진 건 그쪽이겠지요.”

    존대만 하다뿐이지 당장 칼을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였다.

    조금도 지려고 하지 않는 건 지선우랑 비슷하긴 하군요.”

    뭐라는 겁니까내 동생보다 약하면서.”

    순식간에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 사이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건 내내 통역해 주던 여성뿐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청년이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하지만 딱히 살기가 느껴지진 않았기에 가만히 서서 그를 맞이했다.

    힘이 없는 자의 건방짐은 위험만 부른다는 걸 모릅니까?

    뭐라는 거야감추고 있긴 하지만 실제로는 현우가 더 강하다. 그걸 기준으로 본다면 저 청년이 내뱉는 말은 본인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뭐, 그러다 지옥으로 굴러떨어진다면 그것도 운명이겠지요. 그때가 되면 후회해도 늦습니다.”

    위험한 건 너겠지. 현우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한 대 후려칠 생각이었다. 만약에 골목길 사이로 또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여어. 준이치.”

    새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금발의 미청년이었다. 마치 천사와도 같은 외모를 가진 그는 천연덕스럽게 다가와 일본인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데서 다 만나는군.”

    지크프리트.”

    이름을 불러 달라니까. 레온이라는 멋진 이름이 있는데 왜 매번 성을 부르는 건가?

    부르기 싫습니다.”

    까탈스럽긴. 그런데 여기 이분은 누구신가?

    알아서 뭐 하려 그러십니까?

    준이치는 내내 까칠하게 굴었으나, 레온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외려 웃으며 몸을 숙여 현우에게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십니까저는 레온이라고 합니다. 당신의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찬영입니다.”

    찬영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장 생각나는 이름이 그것뿐이었다.

    찬영. 멋진 이름이군요. 하지만 본인의 이름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면서 눈을 둥그렇게 휘며 웃는데 후광이 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을 홀릴 만한 외모였다. 하지만 마계에서도 현실에서도 미인을 잔뜩 봐 왔던 현우는 거기에 넘어가지 않았다.

    맞는데요?

    뭐, 본인이 그 이름을 원한다면야. 그렇게 불러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러면서 손을 내뻗는데 그 앞을 검이 가로막았다.

    더 접근하지 마십시오.”

    이런, 질투하나준이치.”

    이름 부르지 말라 하지 않았습니까?

    대신 너도 내 이름을 부르면 되지 않나.”

    절대 싫습니다.”

    준이치의 날 선 목소리에 레온이 몸을 바로 세웠다. 이어 골목길로 다른 각성자들이 들어섰다. 하나같이 똑같은 제복을 착용하고 있고, 가슴에는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배지를 착용하고 있었다.

    변태.”

    뭐가 말인가?

    준이치는 말없이 그들의 복장을 바라보았다. 복장부터 시작해서, 착용하고 있는 액세서리, 태도까지 전부 마니악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미국의 가디언이었다. 만만치 않은 상대란 소리였다.

    유키.”

    호출은 아까 전에 끝마쳤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새로운 무리가 나타났다. 일본의 거대길드 오로치 길드의 길드원이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 갔다.

    새로이 등장한 이들을 바라보던 레온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현우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원하신다면 제가 저 위험한 사람들로부터 지켜드릴 수도 있는데요.”

    둘 다 비슷한 놈이면서 뭐래현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장담컨대 저들보단 이쪽이 훨씬 신사적입니다.”

    헛소리도 일품이군요.”

    준이치가 비웃듯이 말했으나, 레온은 그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정말입니다. 언제까지나 동생 밑에서 보호만 받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차라리 이쪽으로 와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원하는 건 뭐든 들어드리겠습니다.”

    레온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설탕 발린 소리를 내뱉었다. 하지만 현우는 거기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상황을 봐가면서 슬슬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뒷발로 차올린 돌을 손으로 낚아채서 골목길 입구로 던졌다. 어찌나 은밀하고 빨랐던지 그를 눈치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자연히 시선이 돌아갔고, 그 틈에 현우는 현장에서 몸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준이치와 레온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에는 아무도 없었다.

    ?

    준이치가 검을 움켜쥔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디서도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키.”

    !

    준이치의 비서나 마찬가지인 유키는 감각계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가진 힘이 강하지는 않았지만, 숨어 있는 자를 찾거나 추적하는 데 큰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유키도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했다.

    흔적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흔적을 잡아내지 못한 건 유키뿐만이 아니었다. 레온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을까.”

    마치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환상이라고 하기엔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추적에 능한 길드원이 나서서 찾아보았지만, 결과는 유키와 다르지 않았다.

    신기한 일이군.”

    준이치는 현우가 사라졌고, 찾을 수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그대로 골목길을 벗어났다. 그 뒤를 유키가 황급히 따르고, 남은 길드원은 쓰러진 사람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들의 출신지를 알아 두면 여러모로 쓸모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흐음.”

    레온도 그걸 알기에 쓰러진 사람이 탐났지만, 쉽사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여기 있는 길드원들은 가디언의 정예가 아니다. 그저 시간 남는 자들을 끌고 왔을 뿐이다. 반면 준이치는 길드원의 핵심 인력을 끌고 온 것 같았다.

    면면이 낯익다.

    오늘은 물러나야겠군.”

    레온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느낌이 묘하군.

    힘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약하게 보이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깊숙한 곳에 묻어 둔 본능이 그를 볼 때마다 꿈틀거렸다. 지금까지 이랬던 적은 없는데.

    뭐, 좀 더 두고 볼까.

    레온이 발걸음을 옮기자, 제복을 입은 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독특한 복장을 입고 지나가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코스프레인가?

    아니. 저거 가디언 길드의 복장 아냐?

    가디언 길드는 미국 길드잖아. 여기 왜 있겠어?

    하지만 저기 선현 길드가 있잖아. 모종의 이유로 방문한 게 아닐까?

    들려오는 소리를 잡아채 들은 레온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쏟아지는 관심이 제법 기껍다. 어느 애송이는 질색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 어느 애송이, 준이치는 마침 차에 올라타고 있었다.

    유키. 아까 잡은 사람들에서 얻은 정보는 언제까지 올릴 수 있습니까?

    하루 내로 해결하겠습니다.”

    반나절.”

    네, 반나절 내로 올리겠습니다.”

    그제야 준이치는 느긋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지선우의 다큐멘터리를 보자마자 빠르게 한국으로 왔는데, 운이 좋게도 그 형을 봤다. 방송을 전부 믿는 건 아니지만, 내용대로라면 내돌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았나.

    운과 별개로 지현우에 대한 이미지는 나빴지만 말이다. 준이치, 그는 무능력하고 약한 것을 혐오했다. 그리고 지선우의 형은 전형적인 약자로 보였다. 남에게 기대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거머리.

    1세대이기에 정말 무능력자일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힘을 감추고 있다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럼 역시 그 커다란 몬스터의 도움으로 마계에서 살아남아 온 것인가.

    그게 가능한가?

    준이치도 마계에 끌려간 적이 있었다. 2세대 각성자였으니까. 아무리 강한 힘을 가진 몬스터가 싸고돈다고 해도, 쉽게 살아남을 환경은 아니었다.

    먹을 수 있는 것은 드물었고, 그나마도 그걸 얻기 위해서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환경은 척박하고 몬스터의 종류는 다양하다.

    모르겠군.

    좀 더 파고들어야 할 것 같았다. 요즘 선현 길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포함해서 말이다. 지선우는 갑자기 해외로 불려 갔고, 1세대를 지키던 평화 길드의 길드장도 제주도로 불려 갔다. 그런데다가 갑자기 선현 길드를 찾아온 피닉스 길드의 부길드장. 길드 근처를 배회하던 수상한 자들.

    이 모든 것을 이으면 무언가 나올 것 같았다.

    적에 대해서는 많이 알수록 유리하지.

    그러니 이 모든 것을 파고들 생각이었다.

    한편, 이 모든 것을 내내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다.

    31.

    실패했군요.”

    겉면이 어둡게 코팅된 차 안, 핸들을 붙잡고 있던 남자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남자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제기랄.”

    그는 이를 악물며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냥 실패했으면 다행이지. 하필이면 이와모토 측에 몇 명이 잡혀갔어.”

    회수할 수는 없는 겁니까?

    그게 쉽겠냐. 지선우보단 뒤처진단 평을 받고 있긴 하지만, 그도 엄연한 S급 각성자다. 어지간한 각성자는 덤벼들어도 뚫지 못해.”

    회수할 수 없다면 처리는요?

    그도 쉽지는 않지. 아니, 왜 하필 여기서 일본과 미국이 나타나지그나마 러시아는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운이 나빴습니다. 그나저나 아까 추적했던 사람이 지현우는 맞는 겁니까길드에서 쉽사리 내보낼 리 없을 텐데요.”

    맞을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미끼일 수도 있지.”

    시대가 어느 때인가. 기이한 능력을 가진 각성자가 나타나고, 그 못지않은 아이템들도 쏟아져 나왔다. 얼굴을 바꾸거나 혼란을 주는 아이템이 있을 수도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선현 길드. 막대한 권력과 부를 자랑하고 있으니 그런 걸 가지고 있을 법도 하다.

    곤란하군요.”

    핸들은 잡은 남자가 버릇처럼 안경을 추켜올렸다.

    다음 작전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잠시 차 안에 침묵이 흘렀다.

    *

    드넓은 공동. 그 안에서 거대한 얼음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빠른 속도로 자라난 얼음꽃은 이내 성장을 멈추더니, 산산조각 나며 전면으로 비산했다.

    끼에에엑!

    무시무시한 속도로 쏘아진 얼음 조각은 전면에 위치한 대규모의 몬스터 무리를 전부 쓰러트렸다. 의기양양하게 몰려왔던 것치고는 초라한 최후였다.

    정리!

    선우가 물러나자 따라 들어온 1팀이 빠르게 쓰러진 몬스터들을 정리하며 확인 사살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선우는 연결되지 않는 폰을 꺼내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지만, 역시나 안에서 전자기기는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옆에 케로가 앉아서 앞발을 할짝이다 하품을 내뱉었다.

    캬앙!

    귀여운 그 모습을 무심결에 바라본 1팀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도 잠시, 다시 긴장이 맴돌기 시작했다. 케로가 보기와는 다른 존재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간보스를 만나서 활약한 것이 케로였으니까. 늑대의 형태를 가진 거대한 중간보스는 대뜸 뛰어든 케로에 의해 박살 났다.

    다리를 물어서 뜯어냈으며, 입에서 청백의 불꽃을 내뿜어 몸을 녹여 냈다. 날뛰는 모습만 보면 미친 것 같이 보였다. 여차하면 케로마저 제압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다행히 중간 보스를 처리하고 나서는 다시 작아져서 종종걸음으로 따라다니기만 했지만,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S급 이상의 던전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아.”

    높게 잡아봐야 A+급. 그 정도의 던전으로 느껴졌다. 만약 더 높은 등급의 던전이었다면 지선우도 저렇게 여유를 부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위화감을 선우도 느끼고 있었다.

    이상해.

    생각보다 던전 등급이 낮게 느껴진다. 같이 들어온 각성자들 또한 이상했다. 각성자가 적은 나라라는 점을 감안해도 그 수준이 너무 낮았다. 그나마 S급 각성자가 셋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마치 시간을 끄는 사람처럼.

    오, 정말 대단합니다역시 소문대로군요.”

    정말이요. 저희가 손대지 않아도 금방 클리어할 것 같습니다.”

    시시덕거리며 말을 걸어오는 모습이 거슬렸다.

    필사적으로 매달려서 더 위험할 줄 알았는데, 케로와 1팀만 풀어놔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물론 던전이란 언제나 유동적이라 진짜로 그렇게 두지는 않을 테지만.

    선우는 폰을 품에 넣으며 말했다.

    속도를 더 높입니다.”

    !

    일단은 최대한 빠르게 던전을 돌파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

    서걱.

    역수로 쥔 단검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몬스터가 쓰러져 나갔다. 그 모습에 같이 던전에 들어온 다른 각성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 국내에서 5위권에 머무는 길드의 길드장이기에 어느 정도 강하리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 예상은 금방 깨졌다. 한도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힘을 가진 실력자였다.

    뭐야. 언제부터 저렇게 강했어?

    앞에서 탱을 서던 혜선도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길드원에게 물었다.

    길드장님이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아니, 그도 그렇지만.”

    처음 지선우를 상대할 땐 저 정도로 강한 것 같지 않았는데. 힘을 감추고 있었던 건가. 혜선은 머리를 긁적이다 앞으로 힘차게 발을 내디디며 몬스터를 방패로 밀기 시작했다.

    에라이!

    개나 소나 다 힘을 감춰 대니, 정직한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원래도 힘을 갈구하던 욕망이 더 커졌다.

    강해지고 싶다.

    더, 더 강해져서 가장 위에 서고 싶다. 그걸 위해 혜선은 무엇이든 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여기서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

    밀리던 몬스터들이 쓰러지자 그 위를 방패 아래의 뾰족한 부분으로 내리찍었다.

    빨리 해치우자!

    혜선의 고함에 뒤를 따르던 각성자들이 기합을 넣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 도진은 어느새 저 멀리 앞서나가고 있었다.

    *

    던전 클리어!

    마지막 보스가 쓰러짐을 확인한 각성자가 크게 외쳤다. 길게만 느껴졌던 던전 공략이 드디어 끝났다. 밖으로 향하는 문이 열리자마자 선우는 가장 먼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선우가 나오자마자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이 멀리서 플래시를 터트렸다. 던전에서 폭력을 휘두르던 각성자는 막 던전에서 빠져나왔을 때, 가장 예민하다.

    그렇기에 보통은 접근을 막았지만, 선우는 달랐다. 그는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이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멀리서나마 기자들의 취재가 허용되었다.

    그래, 그랬는데.

    오늘따라 여기저기서 터지는 플래시 빛이 거슬렸다. 선우는 매서운 눈초리로 앞을 바라보았다. 당장 전부 꺼지라 하고 싶었다. 여기서 묶여 있을 시간이 없다. 얼른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서 형을 봐야만 했다.

    선우는 재차 폰을 꺼내 들었다. 마지막 보스와 싸울 때 망가졌는지 화면이 새카맣다. 그게 마치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져서 더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옆에서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캬오오오!

    어느새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케로가 기자들을 향해 포효하고 있었다. 중간 보스를 뜯어 버릴 때처럼 본격적인 건 아니었으나, 비각성자인 기자들은 몸을 움츠렸다.

    몬스터몬스터다!

    도망쳐!

    기겁한 일부가 도망치고, 주위를 막고 있던 각성자들이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1팀이 밖으로 빠져나왔다.

    잠깐, 잠깐만요!

    1팀의 팀장 아인은 앞으로 나서 다가오는 각성자들을 가로막았다.

    적이 아닙니다. 아니에요테이밍된 몬스터입니다!

    그 말에 미처 도망가지 못했던 기자들이 눈을 반짝였다.

    테이밍 말입니까?

    지선우 씨가 테이밍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니에요. 일단 물러나요. 몬스터가 흥분합니다!

    아인은 단호하게 소리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사람들과 케로 사이에 낮은 돌벽이 생겼다. 그제야 사람들은 조금씩 흥분을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길드장님, 어떻게 할까요?

    그제야 아인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선우에게 의견을 구했다.

    무시합니다.”

    ?

    그래도 되나지금까지 선우가 만들어 둔 이미지가 있는데. 아인은 당황했지만, 이내 납득했다. 아무래도 두고 온 형이 걱정된 탓이겠지. 그녀 또한 다큐멘터리를 보고 울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금방 1팀이 선우를 둘러쌌다. 그리고 케로도 다시 작은 모습으로 돌아와 선우의 뒤를 따랐다.

    지선우 씨!

    몇몇 기자가 목놓아 선우를 불렀지만, 깔끔하게 무시했다.

    인터뷰는 한국으로 돌아가서 하겠습니다!

    그래도 달라붙는 기자는 아인이 상대했다. 그렇게 케냐에 파견되었던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던전 클리어!

    제주도의 던전도 마찬가지의 상황을 맞이했다.

    와씨. 인간이 할 짓이 아니네.”

    혜선은 던전을 나오자마자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위험하다 한 던전치고는 수월한 편이었지만, 문제는 스케줄이었다. 중간중간 쉬면서 컨디션을 체크해야 하는데 앞에서 한도진이 날뛰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속도가 빨라졌다.

    그 때문에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니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명색이 S급 각성자인 혜선이 이러하니, 다른 사람들은 더했다. 일부는 나오자마자 그대로 기절하기도 했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도진은 나오자마자 혜선에게 보고하고 그대로 사라졌다. 미처 잡기도 전이었다.

    아니이대로 가면!

    어차피 리더는 탱커인 혜선이긴 했지만, 이래선 곤란하다.

    으아아아!

    혜선은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드러누웠다. 오늘따라 유독 하늘이 새파랬다.

    괴물새끼들.”

    지선우도 그렇고 한도진도 괴물이다. 언제가 돼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혜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앗, 길드장님이런 데서 주무시면 안 됩니다!

    몰라, 조금만 잘게.”

    그리고 이내 코 고는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32.

    으아아아!

    거꾸로 매달린 요정이 비명을 질렀다.

    살려, 살려 주세요이러시면 안 됩니다이건 계약 위반입니다.”

    필사적으로 소리쳤지만, 지금 여기 요정을 도와줄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제발 놔주세요!

    싫은데.”

    알베르크 님!

    요정은 훌쩍이며 바로 앞에 나른하게 늘어져 있는 마족의 이름을 외쳤다.

    풀려나고 싶으면 현우가 어디로 갔는지 말해.”

    안 돼요. 안 됩니다. 비록 포털이 열리긴 했지만, 그곳은 아직 청정구역이라고요. 알베르크 님은 못 가요!

    갈지 말지는 내가 결정해.”

    으아아아!

    요정은 묶인 상태로 펄떡거렸다.

    환장하겠네!

    그러나 아무리 날뛰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주인께서는 요정 하나둘쯤 사라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요정의 수가 워낙 많으니까. 이대로 끝없는 고문에 시달리느니 차라리 말해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요정은 엉엉 울었다.

    *

    선현 길드로 먼저 귀환한 이는 도진이었다. 그가 오자마자 맞이한 이는 눈 밑이 새까매진 찬영과 그에 비해선 편안해 보이는 현우였다.

    오셨군요.”

    왔어요?

    현우는 눈가를 쓱쓱 문지르며 도진을 반겼다. 그런 현우를 보며 도진은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누군가가 반겨 주는 상황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이다. 예원이 사라진 뒤로 그 누구도 사심 없이 그를 반겨 준 적이 없었다.

    힘들었지요?

    가까이 다가오는 현우의 모습에 도진은 저도 모르게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그러자 그만큼 현우가 가까이 다가섰다.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는 심술이 서려 있었다.

    왜 도망쳐요?

    도망자신이 도망친 거라고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리 와요. 힘들었으니 좀 쉬어요.”

    그러고는 소파를 탁탁 친다. 그 손짓에 이끌려 소파에 누우니 담요를 위에 덮어 주었다. 내내 현우가 두르고 다녀서 그런지, 폭신함 속에서 그의 향이 느껴졌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찬영은 그런 둘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현우를 지켜 줄 이가 왔으니, 그는 가끔 와서 진상을 피우는 미국 길드만 상대하면 될 터였다.

    상황이 이상해.

    선우나 도진이 눈치챈 걸 찬영이라고 몰랐을 리 없었다. 부길드장으로 지내 온 세월이 얼마던가. 그동안 늘어난 눈치가 이상함을 잡아냈다. 모든 걸 혼자서 감당하긴 어려웠다.

    길드장님, 빨리 돌아오세요.

    찬영은 빌고, 또 빌었다.

    다행스럽게도 며칠 뒤, 이어 선우가 도착했다. 그와 동시에 찬영을 달달 볶던 미국 길드도 더는 찾아오지 않았다. 그 때문에 끔찍한 접대로부터 해방되긴 했지만, 이제 미심쩍은 부분을 짚어 나가야 했다.

    그럼 그동안 형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단 말입니까?

    선우는 찬영에게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이마를 짚었다. 다행히 형은 무사했지만,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크게 후회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연 찬영을 바라보는 선우의 눈이 곱지 않았다. 그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알지만, 그래도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피닉스 길드라.”

    미국에서 가디언 길드가 정의를 뜻한다면, 피닉스 길드는 좀 달랐다. 정의를 세우기보단 좀 더 개인적인 이익에 치우친 느낌이었다. 그렇기에 전체적인 이미지는 가디언 길드가 피닉스 길드보다 훨씬 좋았다.

    찾아온 건 피닉스 길드뿐이지만, 길드 주변에서 가디언 길드와 오로치 길드의 사람도 목격되었습니다.”

    쟁쟁한 길드가 여럿 목격되었는데 그게 우연일 리는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1세대와 접촉하려는 속셈인 것이 뻔히 보였다.

    그 외에는 없습니까?

    2팀 팀장이 그 외에도 수상쩍은 각성자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쪽은 누구인지 알아냈습니까?

    아직 알아내진 못했지만, 추측으론 국내 사람인 듯합니다.”

    그 말을 듣자 곧바로 떠오르는 단체가 하나 있었다. 헌터관리국. 떨어져 있던 단서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김철수.

    지금의 국장이라면 헌터관리국, 정확히는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 외국과도 손잡을 만한 위인이었다. 케냐의 던전 건은 피닉스 길드가, 국내의 던전 건은 헌터관리국이 주도하고 나서서 속였다면 지금까지의 일들이 모두 말이 된다.

    형은 달리 큰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쉬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 사람을 굳이 끌어들이려는 그들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그놈의 힘이 뭐길래.

    안 그래도 못마땅하던 헌터관리국인데, 이제는 악감정마저 생겨났다.

    생각해야 한다.

    이번은 무사히 넘어갔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법은 없었다. 그러니 형을 지키기 위해선 좀 더 강한 힘을 가져야 했다. 그것이 무력이든 권력이든.

    선우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감정을 저 아래로 가라앉혔다. 이제 곧 형을 만날 시간이기 때문이었다.

    선우야!

    반갑게 달려오는 현우를 보자마자 선우는 그를 끌어안았다.

    형.”

    앞으로는 절대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간 떨어져 지낸 적이 있으니, 이 정도 기간은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보지 못하는 동안, 그립고 그리워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다.

    선우는 뒤에서 인사를 해 오는 도진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형제간의 해후를 즐겼다. 현우의 뒤에 찰싹 붙어서는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으휴, 아직 어리다니까.”

    현우는 자신보다 머리 한 개는 더 큰 동생을 붙이고 다니면서 태연하게 뒹굴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날 하루였을 뿐이다. 선우는 할 일이 많았기에 더는 붙어 있기만 할 수는 없었다.

    쉴 수는 없는 거야?

    안타까움에 말해 봐도 선우는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길드장이니까. 필요한 일이야.”

    선우는 이 자리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었다. 형과 둘이서 오붓하게 지내면 좋기야 하겠지.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다 위험이 닥치면선우는 강했으나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여럿이 있어야 해결되는 일도 있는 법이었으니까.

    나도 아쉬워.”

    애틋한 얼굴로 몇 번이나 돌아본 선우는 다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러니 자연 도진과 지내는 시간이 늘어났다.

    도진 씨도 길드장이라고 했잖아요. 여기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평소에도 제 일은 거의 부길드장이 처리해 주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되나그러다 부길드장에게 길드를 뺏기면 어쩌려고. 자신이 너무 부정적인 건가현우는 누워서 도진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말 괜찮습니다. 어차피 길드장 자리도 내려놓으려고 했습니다.”

    힘들게 세운 길드 아닌가요?

    목적을 이루었으니 이제 필요 없습니다.”

    가차 없이 말하는 모습이 어찌 보면 냉정해 보이기도 했다. 의외의 모습에 눈만 깜박이고 있자, 도진이 그를 눈치챈 듯 부연 설명을 했다.

    이제 제가 없어도 길드는 잘 굴러갈 겁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유지되는 길드라면, 차라리 제가 없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닐 것 같은데.”

    도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건데, 그는 여러모로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선량한 사람이기도 했고. 그런데 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현우의 말에 도진이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뭐, 본인이 그렇다니 제삼자가 끼어드는 것도 이상한 모양새겠지. 그걸 알면서도 나가는 말은 생각과 다르다.

    예원 누나는 오빠가 참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했는데.”

    좋은 사람.”

    도진의 표정이 흐려졌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좋은 사람인지.”

    왜요?

    예원이는 상냥하고 다정한 아이였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런 예원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오빠가 되고 싶어서 노력했습니다.”

    그럼 그 노력은 결과를 맺은 거네요. 예원 누나는 단 한 번도 오빠에 대해 나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멋지고 다정하고 상냥하고.”

    몇 번이나 말했던 수식을 다시 반복한다.

    그런 완벽한 사람이라고.”

    예원이가 그랬습니까?

    네.”

    도진은 고개를 떨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과분한 평가군요. 저한테.”

    목소리가 잠겼다. 그리고 도진은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현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저 도진을 위로하듯 손을 뻗어 무릎을 어루만졌을 뿐이었다.

    *

    선우는 불만에 가득 차 있었다. 최대한 일정을 축소하여 일찍 돌아왔지만, 그를 반기는 건 산더미 같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는 형의 옆에 있고 싶었지만, 그 옆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도 있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이 아래층으로 내려와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형은 한도진과 함께 있겠지. 그게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최대한 빨리 일을 해치우고 다시 형 곁으로 가는 게 베스트다.

    그렇게 선우가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비서가 손님이 왔음을 알려 왔다.

    손님?

    지금 올 만한 손님이 없을 텐데. 설마 또 피닉스 길드에서 진상을 부리려고 온 건가. 선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이 기회에 단단히 경고를 할 셈이었다. 하지만 찾아온 손님은 선우가 생각하던 이가 아니었다.

    최무혁.”

    헌터관리국의 최무혁이었다.

    올려 보내십시오.”

    ─ 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최무혁이 길드장실을 찾았다.

    안녕하십니까?

    그다지 안녕하지는 못하군요. 왜 찾으신 겁니까?

    선우는 예민하게 반응했다. 얼마 전에 일어났던 기이한 일로 의심하고 있는 헌터관리국 소속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도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고 말이다.

    33.

    선우는 물, 무혁은 불.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여러모로 잘 맞지 않았다.

    그야 용건이 있으니 찾아왔겠지요.”

    무혁은 날을 세우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게 무슨 용건입니까?

    당신은 현재의 헌터관리국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걸 굳이 물어야 알 수 있나자기 이득 챙기기에 바쁜 쓰레기, 선우에게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세워졌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국장이 김철수로 바뀐 뒤로 헌터관리국은 길드들을 적대하기 시작했다. 사사건건 물고 늘어지는 건 기본이요, 헌터관리국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했다. 그러니 이미지가 나쁠 수밖에.

    그걸 굳이 물어봐야 압니까?

    아니요. 사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긴 합니다.”

    무혁은 쓰게 웃었다. 그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수많은 길드의 콜을 무시하고 헌터관리국에 몸담았다. 개인의 세력인 길드가 덩치를 불려 나가면 국가가 흔들린다. 그러니 국가 기관인 헌터관리국을 키워서 길드를 견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남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초반에는 그 생각이 옳은 줄 알았다. 헌터관리국의 국장도 각성자였고, 그는 현 세태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무리하게 나서기보단 차근차근 헌터관리국을 키워 나가려 하고 있었다. 무혁도 그에 동의했다. 그런데 상황이 뒤집혔다.

    비각성자가 관리국 국장으로 내려오고, 원래 있던 국장이 좌천당했다. 각성자니, 비각성자니. 그건 사실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든 이상이 맞기만 하면 되었으니까.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현재 국장은 욕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욕심은 헌터관리국을 위태롭게 합니다.”

    순수하게 헌터관리국을 키우려는 욕심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선우는 조금 자세를 달리했다.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뭡니까?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전 위로 오르고 싶습니다.”

    더는 아래에서 맞춰 주기만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도 남 밑에서 일할 성격은 아니었다.

    쉽지 않을 텐데요.”

    위에 고인물이 있으니까요.”

    무혁은 그 고인물을 치우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가능한 혼자 처리하고 싶지만, 그게 불가능함을 알았으니까.

    그러니 저와 손을 잡읍시다.”

    설득력 있는 이야기였지만, 선우는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무혁의 생각은 알겠다. 지금 상황을 바꾸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그래서 더욱더 의문이 들었다.

    왜 하필 지금입니까?

    지금까지도 나설 기회는 많았을 텐데, 인제 와서 사이도 나쁜 선우에게 협력을 요구하는 이유가 뭘까.

    지금이니까요. 요즘 헌터관리국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국장이 정보부와 뭔가를 하는 것 같은데, 그걸 현장직에게는 알려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정작 대부분의 일을 해결하는 건 관리부인데 말이지요.”

    이상한 움직임 말입니까?

    네. 그래서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여기게 된 겁니다.”

    좋습니다. 그럼 손을 잡기로 하지요.”

    오래 고민할 일도 아니었다. 여전히 무혁이 못마땅하기는 했지만, 이로 인한 이득을 생각한다면 손을 잡는 게 맞았다. 그렇게 둘은 은밀한 계약을 하였다.

    *

    무혁이 돌아간 뒤, 다시 일에 몰두한 선우에게 다른 손님이 찾아왔다.

    약속 지켜요!

    아윤이었다. 화사한 원피스를 입고 온 아윤은 길드장실의 소파에 앉았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계약이행을 요구했다.

    좋습니다. 그럼 장소를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이번은 딱히 장소를 준비할 필요가 없어요.”

    그럼?

    지선우 씨. 당신이 할 일은 딱 하루, 현우 씨를 저에게 빌려주는 거예요.”

    하루 말입니까?

    이상한 짓은 하지 않을 거예요. 맹세해요.”

    그러면서 새끼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니 표정 좀 펴요.”

    뭘 하려고 하루나 필요합니까.”

    외출 좀 하려고요.”

    불가합니다.”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외출을 허락한단 말인가.

    불안하면 따라오면 되잖아요. 아니면 평화 길드 길드장을 붙이던가. 그 사람은 믿는 것 같던데.”

    그야 불공정 계약을 체결한 상대니까 말이다.

    대체 뭘 하려고 합니까?

    같이 놀 거예요.”

    ?

    논다고요. 노는 거 몰라요?

    뭘 하든 횟수는 차감됩니다.”

    알아요. 그래도 놀 거예요.”

    아윤은 당당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어떻게 보면 3번의 기회 중 1번을 날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안전한 방 안에서 대화를 좀 한다고 해서 상대가 정보를 다 털어놓을까?

    답은 아니요. 사방이 자기편이고 안정된 상태인데, 겨우 한 번 본 상대에게 뭣 하러 진실을 뱉어 낸단 말인가. 아윤이라도 그렇게는 안 한다. 그러니 조금 강수를 두기로 했다.

    사람과 친해지는 건 쉽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예쁘게 생기고 활발한 아윤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곤 했다. 그리고 누구든 결국엔 속내를 털어놓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걸 노리고자 했다.

    전 바쁩니다.”

    그러면 평화 길드장을 보내라니까요.”

    평화 길드장을.”

    선우는 잠시 이마를 짚었다. 형과 그, 둘만 보내기는 죽어도 싫었다. 안 그래도 최근 도진이 형에게 편하게 굴기 시작하는 것 같아서 거슬리던 참이었는데.

    시간을 내 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해결.”

    하지만 외출은 형이 동의해야 합니다.”

    그건 제가 물어보면 안 될까요?

    선우가 물어봤다가는 외출을 거절할 만한 말만 늘어놓을 것 같았다. 하여간 과보호라니까. 아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안 됩니다.”

    이상한 말은 안 할게요.”

    이상한 말이 뭡니까?

    그건 비밀!

    아윤이 지독하리만치 끈질기게 매달렸지만, 선우도 만만치 않았다. 형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그였다. 이런 정도의 피곤함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외출 여부는 선우가 물어보기로 했다. 곧바로 위로 올라간 선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마침 현우는 거실에 있었다. 있었는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선우의 목소리가 불쾌함에 낮아졌다.

    선우 왔어?

    형.”

    ?

    현우가 순진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다. 거실 바닥의 러그 위에 누워 있는 그는 도진의 허벅지를 베고 있었다.

    옆에 쿠션 있잖아.”

    선우는 부글거리는 속을 누르며 침착하게 말하려 애썼다.

    아, 그렇지.”

    그런데 왜 그러고 있어?

    어쩌다 보니?

    처음에는 장난삼아 베고 누웠다. 근육질의 허벅지는 빈말로라도 편하지 않아서 금방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후 도진의 반응이 제법 재밌었다. 그래서 장난치며 버티다 보니 이 시간까지 이른 것이다.

    불편하잖아.”

    딱히 그렇지도 않아.”

    적어도 높은 돌 위에서 벌벌 떨며 자던 때보단 편하다.

    불편해. 목이 들렸잖아.”

    선우는 누워 있는 현우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고마워. 그런데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급한 일은 대충 처리했어. 그리고 볼일이 있어서.”

    뭔데?

    아윤이 찾아왔어.”

    그 발랄하던 아가씨. 현우는 금방 아윤을 떠올렸다.

    같이 외출하자는데. 싫으면 거절해도 돼.”

    외출어디로?

    그건 모르겠어.”

    나 혼자?

    그건 절대 아니야. 내가 따라갈 거야.”

    그럼 딱히 함정은 아니라는 소리구나. 현우는 잠시 고민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높고 파랗다. 외출하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그럼 한번 나가 볼까?

    결정하고 나자 그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옷을 입고 나오자마자 미리 준비된 것처럼 경호 인력이 붙었다.

    오랜만이죠오늘 잘 부탁드려요!

    그렇게 말하는 아윤의 옆에는 어느새 나타났는지 자윤도 붙어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무려 S급 각성자가 3명. 무슨 일이 일어나려야 일어날 수 없는 최강의 파티가 만들어졌다.

    그 전에 잠시만.”

    아윤은 먼저 후드를 눌러쓴 도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합격.”

    그다음엔 선우 앞에 섰다.

    오늘도 정장이에요혹시 옷 갈아입고 올 수 없어요?

    “……가능합니다.”

    그럼 바꿔 입고 오시죠.”

    왜 그래야 하느냐는 듯한 시선에 아윤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정장 입은 상태로 마스크 쓰면 이상하잖아요설마 그대로 나갈 생각이었어요요즘 어떤 상태인지 몰라요?

    다큐멘터리 방송 이후, 선현 길드와 각성자들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아직도 그 열기가 식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얼굴이 알려진 선우와 현우가 그냥 밖으로 나선다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러니 가립시다.”

    전부 마스크와 모자를 쓰면 그게 더 수상하지 않겠습니까?

    전 안 쓸 거예요.”

    얼굴이 알려진 정도는 비슷할 것 같은데요.”

    아윤은 어려서부터 방송물을 먹으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그 때문에 자신을 내놓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자윤과 아윤은 제법 얼굴이 알려진 편이었다. 지선우만큼은 아니었지만.

    오빠는 분장할 거예요. 저는 아니지만.”

    괜찮겠습니까?

    괜찮아요. 저는 각성자가 아니라서 얼굴을 알려도, 오빠만큼은 알아보지 못하더라고요. 자자, 그러니까 빨리 갈아입고 오세요!

    어쩔 수 없이 선우는 옷을 갈아입고 나와 마스크에 모자를 썼다. 그렇게 모두 얼굴을 가리고 나란히 서니 참으로 수상쩍어 보였다. 만약에 아윤마저 가렸으면 더할 뻔했다.

    그럼 가죠!

    아윤은 씩씩하게 앞장섰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백화점이었다. VIP로 입장한 그녀는 곧바로 가장 위층으로 갔다. 퍼스널 쇼퍼가 그들을 맞이했고, 곧바로 많은 옷이 날라져 왔다.

    자, 그러면 옷을 갈아입어 볼까요누구부터 할래요?

    그 말에 현우가 냉큼 손을 들었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