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선우에 의해 불려온 도진은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모습에서 달리 변한 것이 없었다. 눈을 가리는 기다랗고 너저분한 앞머리, 깨끗하지만 너무 오래 입었다는 티가 나는 낡은 옷. 그 상태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으니 쉽게 접근할 모습은 아니었다.
“안녕하세요.”
일어나서 어색하게 존댓말로 인사를 하자, 도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그대로 얌전히 서서 현우를 바라보았다. 가진 힘이나 덩치에 비해 얌전한 느낌이 묘했다.
“그럼 앉을까요?”
“네.”
현우가 소파에 앉자 잠시 머뭇거리던 도진이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심지어 무릎까지 꿇고 있다. 아니, 지금 벌 받는 중이세요?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집어삼키며 소파를 향해 손짓했다.
“여기 앉으세요.”
“네.”
도진은 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옮겨 앉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우가 거실과 가까이에 붙어 있는 부엌에서 머그컵을 가져와 현우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 안에는 보기에도 달아 보이는 핫초코가 들어 있었다.
‘이런 건 어디서 구해 오는 거람.’
잠시 망설이다가 한 모금 마셔 보니 생각보다 맛있다. 저도 모르게 홀짝홀짝 마시다가 뒤늦게야 자신 혼자 머그컵을 쥐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넌 안 마셔?”
선우에게 물어보니 금방 답이 돌아왔다.
“난 괜찮아. 단 거 별로 안 좋아해.”
사실 현우도 딱히 좋아하진 않는다. 그래도 이건 제법 먹을 만했기에 선우에게 머그컵을 밀었다.
“너도 마셔 봐. 먹을 만해.”
“응.”
선우는 배시시 웃으며 머그컵을 받아들었다. 그렇게 동생이 핫초코를 마시고 있는 걸 보다가, 뒤늦게야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손님인 도진의 앞에는 그 무엇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그 때문에 도진을 힐끔 바라보니, 선우가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하지만 손님인데?”
“누가 손님이야? 딱히 원했던 사람도 아닌데.”
선우는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다시 핫초코를 홀짝였다. 아무래도 저번에 도진이 먼저 공격해 왔던 걸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러나.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
“잠시만 기다려.”
핫초코 정도야 현우도 탈 수 있었다. 현우가 부엌으로 가자 선우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왜?”
“그래도 뭐라도 내놔야지.”
“그럼 내가 할게.”
“나도 할 수 있는데?”
나이가 몇인데 이 정도도 못 할까. 현우는 선우에게 물어 핫초코 통을 꺼내 거기에 쓰인 설명을 읽었다. 아니, 정확히는 읽으려고 했다. 설명서의 내용이 전부 영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역시 내가 할게.”
“아냐. 할 수 있다니까.”
핫초코 타는 법이야 거기서 거기지. 일단 전기포트에 담겨 있는 뜨거운 물을 머그컵에 붓고 그 안에 핫초코 가루를 풀었다. 정량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니까 조금씩 붓고 젓자 제법 그럴싸한 모양이 되었다.
“잘하네.”
옆에서 선우가 그렇게 말해 주긴 했지만, 현우 자신이 먹은 것과는 뭔가 좀 달랐다. 그래서 다른 그릇에 조금 부어서 맛보았더니 뭔가 미묘한 맛이다. 가루가 부족했나.
현우는 가루를 더 추가했다.
‘얼추 색이 비슷하네.’
이 정도면 됐겠지. 현우는 자신만만하게 머그컵을 도진 앞에 내려놓았다.
“드세요.”
도진은 머뭇거리다가 머그컵을 들었다. 잠시 셋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핫초코를 전부 해치운 도진은 조용히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예원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습니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그게 무엇이건 전부.”
대가는 필요 없다. 그저 과거의 이야기를 해 주는 것일 뿐인데 대가는 무슨 대가. 하지만 선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무엇을 내놓을 수 있습니까?”
현우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으로 선우를 찔렀다. 그러나 선우는 했던 말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런 선우에게 도진은 신중하게 대답했다.
“무엇이든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건 어떻습니까? 형을 지켜 주십시오.”
재차 선우를 찌르려던 현우가 손가락을 거뒀다. 이게 무슨 이야기람?
“물론 형은 제가 지킬 거지만, 세상일은 혹시 모르니 말입니다.”
1세대 실종자의 가치. 선우는 형만 있으면 되었지만, 다른 이들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은 유독 실종 기간이 긴 1세대 실종자가 아는 모든 것을 궁금해했다. 혹시라도 더 강해지는, 도움이 되는 단서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도움이 될 만한 강자는 많을수록 좋다.
‘게다가 가준보다 강한 것 같았지.’
싸워 보면서 느꼈다. 그는 절대 자신의 아래가 아니다. 그런 이가 지금껏 어떻게 실력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알게 된 이상 저런 쓸모 있는 사람을 그냥 놓아줄 수는 없었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도진의 대답은 빨랐다. 깊게 고민해 보지도 않은 것 같았다.
“좋습니다. 그럼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하죠.”
선우는 언제 준비해 뒀는지 서류 하나를 꺼내 왔다. 온갖 조건이 더덕더덕 붙은 계약서였지만, 도진은 망설이지 않고 사인을 했다. 지구에서의 나이는 현우보다 도진이 위인 것 같은데, 저렇게 아무 데나 사인을 하다니. 어디 가서 사기당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현우는 그 생각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그러다 사기당하려면 어쩌려고요?”
“사기 치실 겁니까?”
“그건 아니지만.”
현우는 사기 칠 생각이 없었고, 선우도 그럴 아이가 아니다.
“그럼 됐습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말을 더 얹기도 그랬던 현우는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그럼 예원 누나의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이 이야기는 예원의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현우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초반에는 자주 같이 다니곤 했으니 말이다.
현우는 고르고 골라 그나마 괜찮았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처음 같이 몬스터를 사냥하면서 당황했던 일,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가 마계의 열매를 먹고 배앓이를 했던 일. 끔찍한 기억은 말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이 도진뿐인 게 아니었으니까.
현우도 선우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줄어 가는 사람들, 그 때문에 예민해져서 미친 짓을 저지르는 이도 늘었다. 어리고 약했던 현우나 예원은 쉽게 마음을 놓을 수 없는 환경이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은 전부 뭉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누군가를 고통에 밀어 넣어서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 상황에서 아득바득 버티다 보니, 잊는 법을 깨달았다. 같이 하던 사람을 잊고, 인간성을 버리기 시작했다. 독기는 있었지만, 나름 모범생에 가까웠던 현우가 망가져 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마지막 사람이 죽는 순간으로부터 수십 년간 현우는 혼자 살아남아 마계에 머물렀다.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 정도 이야기하는 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자신은 달라졌다. 약하던 현우는 이제 없다. 그런데도 이야기를 이어나갈수록 기분이 이상해졌다.
“형, 그만하자.”
어느 순간,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 왔다.
“뭐?”
“오늘은 이걸로 됐어.”
그러면서 도진을 노려보자, 그도 말을 덧붙였다.
“제가 너무 무리를 시킨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왜 저러는 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둘은 현우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끼잉.”
어느새 소파에 있던 케로도 저 멀리 떨어져서 낑낑대고 있었다. 현우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한 번에 전부 말하기엔 이야기가 길지요.”
“그런 것 같습니다. 이만 쉬십시오.”
“그래, 형. 일단 눕자.”
선우는 또다시 현우를 덜렁 들어 침실로 데려갔다. 그런 후, 침대에 눕히고서는 이불을 덮어 주었다. 옆에는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케로도 데려다 놓았다.
“잠시만 기다리면 힐러를 데려올게.”
힐러까지? 무슨 일이람.
“아니, 됐어. 무슨 힐러까지 불러. 나 멀쩡한데?”
그 말에 선우가 씁쓸한 표정으로 현우의 손을 잡았다.
“알았어. 그럼 힐러는 나중에 부를 테니, 일단 좀 쉬자.”
그러면서 가슴을 토닥여 주고는 작은 등을 켠 뒤, 방을 나갔다. 엉겁결에 끌려와 눕긴 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다가 케로를 잡아당겨 안았다. 최근 토실토실해진 케로의 뱃살을 주물거리니 제법 기분이 좋았다.
뭐, 동생이 걱정이 된다니 자는 척이라도 해야지. 현우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문을 닫고 나온 선우는 그대로 도진에게 턱짓을 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도진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선우도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두터운 문이 닫힌 뒤에야 입을 열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도진도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마계에서 10년 동안 있었다면, 그만큼 괴로운 기억도 많았을 텐데 배려하지 못했다. 동생의 일을 듣고 싶은 욕심에 안 그래도 약한 사람을 힘들게 하고 말았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그것은 선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필사적으로 누르며 깊게 숨을 내쉬었다. 그라고 형이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았겠는가.
마계에서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왜 힘이 느껴지지 않는지. 묻고 싶은 것은 많았다. 그런데도 묻지 못했다. 형을 지키고 싶었으니까. 좀 더 천천히 접근할 셈이었다.
‘그랬는데.’
그걸 도진이 모두 망쳤다. 아니, 아니다. 거기에는 선우의 잘못도 있었다. 선우는 주먹을 꾹 쥐었다.
18.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도진을 핑계로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자신이 있었다. 욕심을 과하게 부렸다. 그래 놓고 남에게 화풀이라니. 선우는 쓰게 웃었다. 그리고 도진에게 사과했다.
“저도 죄송합니다.”
성격이 그렇게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도진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이런 선우도 과거 순진하고 착하던 때가 있었다. 형과 같이 있던 그때 말이다.
“아닙니다.”
선우의 말에 대답한 도진은, 고개를 숙여 바닥을 바라보았다.
‘예원이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하지만 그걸로 인해 타인이 고통받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래의 그라면 그런 것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사랑하는 동생의 이야기를 더 듣기 위해 애썼을 테지만. 이상하게 현우에게는 마음이 약해졌다.
‘약해 보여서 그런가.’
작고 말랐으니까.
‘그나저나 이제 어쩐다.’
상황이 난감해졌다. 선우가 사과를 해 오긴 했지만, 다시 단단하게 굳어 버린 표정을 보니 더는 도진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았다. 계약서를 파기하고 싶어 할지도 몰랐다. 그에게 불리한 계약서라도 파기되는 건 곤란하다.
해결책이 필요했다. 생각을 정리한 도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계약서대로 그분을 지키겠습니다.”
선우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예원의 이야기는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굳이 제 형을 지킬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려는 겁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이요.”
도진은 손으로 입가를 매만졌다.
“당장은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오지 않으면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어차피 도진에게는 더 살 의욕도 없었다. 그래서 죽어 버리고자 했는데, 그를 가로막은 이가 현우였다. 그러니 이 목숨, 그에게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길드도 있긴 했지만, 애초에 필요에 의해서 만들었던 것이니 미련은 없다.
‘이참에 길드도 정리해야지.’
동생을 찾겠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위선을 내세워 모은 사람들이다. 이제는 놓아줄 때도 되었다. 도진이 빠지면 전력이 줄어들겠지만, 그래도 적당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도진은 그렇게 생각했다.
“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유독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가 예민해 보이는 남자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이름은 박현희. 평화 길드의 부길드장이었다. S급 각성자는 되지 못하고 A급 각성자인데, 그나마도 턱걸이로 간신히 인정받은 자였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노려보다가 재차 물었다.
“제가 잘못 들은 거지요?”
“아닙니다. 맞게 들으셨습니다.”
얇은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럼 진짜 길드에서 나가시겠다고요?”
“네.”
현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꾹 눌렀다. 평화 길드는 타 길드와 사정이 조금 달랐다. 무려 5위에 든 길드라고 하나 아직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길드원들이 하나같이 독기를 품고 노력하는 부분은 좋았지만, 그것만으로는 되지 않는 것도 있었다. 강함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평화 길드에는 길드장이 필요했다. 그들을 구원하고 여기까지 끌어준 강자. 그런데 그 강자가 자신들을 버리겠단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현희는 이를 악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그동안 길드장인 도진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왔다. 노력하고 노력해서 간신히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는데. 절망이 현희의 심장을 조여 왔다.
“목적을 이루었습니다.”
“길드 출범 때 말씀하셨던 그 목적 말입니까?”
“네.”
당시 도진은 말했다.
‘나는 목적이 있어서 길드를 세웠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길드는 수단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때 현희와 길드 수뇌부는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저희를 여기까지 이끌어 주신 분은 도진님입니다. 그런 도진님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때는 그랬다. 하지만 시간은 흘렀고, 상황이 달라졌다. 길드가 점점 발전하면서 욕심이 생겼고, 더 위를 노리고 싶어졌다. 길드장이 빠져나가면 그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나는 길드장을 맡을 위인이 되지 못한다.’
운영 정도야 하겠지. 그렇지만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현희가 길드장이 된다면 길드는 다시 아래로 점점 내려가게 될 것이다.
“다시, 다시 생각하실 수는 없습니까?”
“죄송합니다.”
도진은 단호하게 답했다.
“저희는 길드장님만 보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은 저도 거들어 드릴 생각입니다.”
그걸로는 부족하다. 발밑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그 1세대 실종자 때문에 그렇습니까?”
정보는 통제되었지만, 몇몇 수뇌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길드장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거기에 더해 현희는 도진의 여동생이 1세대 실종자 중 하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그게 오히려 답이 되었다. 1세대가 뭐라고 말했는지 모르지만, 그 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 현희는 머리를 팽팽 굴렸다.
“그냥, 지금까지처럼 저희를 이용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민폐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게 왜 민폐입니까!”
“예전처럼 던전도 자주 가지 못할 텐데요.”
“괜찮습니다!”
“길드장이 해야 할 일도 대부분 하지 못할 겁니다.”
“제가 할 줄 압니다.”
그런 현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진이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그가 선수를 쳤다.
“길드장은 길드에서 가장 강해야 합니다. 저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부길드장님도 저 다음으로 강하지 않으십니까.”
“그 차이가 많이 나잖습니까. 제발 저희를 버리지 마십시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도 생각을 조금이라도 돌린 것 같으니 다행이다. 현희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 상황을 만들어 낸 1세대에게 원망을 품었다.
툭툭.
책상을 손으로 두드리던 반백의 남자가 무혁에게 말했다.
“도로 데려오지.”
“선현 길드가 접근도 못 하게 막고 있습니다만.”
“아무리 선현 길드라 하더라도 정부의 행사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지 않나.”
“그라면 거부하고도 남습니다.”
“거참, 국가가 먼저이거늘 이렇게 이기적이어서야.”
남자는 혀를 차더니 말을 이었다.
“길드, 그놈의 길드. 저들의 이익만 생각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 정말 지선우, 그가 헌터관리국의 제안을 무시할 거라고 생각하나?”
“그동안 무응답으로 대응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렇군. 그럼 우리도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 없지.”
남자, 김철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헌터관리국 국장, 김철수. 정치질로 국장의 자리를 차지한 그는 비각성자였다. 거기다 언제나 보호받고 있으니, 각성자가 작정하면 얼마나 무서워질 수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다들 마지못해 지켜 주는 예의를 자신의 권력 때문인 줄 아는 것이다.
무혁은 한숨 쉬고 싶은 걸 참으며 바로 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힘으로 겁박하는 건 이미 옛적 이야기지. 이제는 다르게 대응할 때야. 그러니 정보를 퍼트려 보자고.”
“1세대의 정보를 말입니까?”
“그래! 1세대 실종자 유족에게도 알리고, 언론사도 좀 찔러 보고. 여기저기서 원하면 아무리 지선우라도 계속 감추고 있을 수 있겠나. 선현 길드 이미지가 있는데. 가족이라도 그 이상은 힘들지. 최대한 복잡하게 해 놓고 보호를 미끼로 우리가 낚아채 보는 거지!”
김철수다운 발상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이 기회에 선현 길드의 목줄을 잡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지현우가 지선우의 가족이라는 걸 밝히지 말 걸 그랬나. 일이 더 복잡해지게 생겼다.
‘차라리 내가 국장이 된다면.’
아니,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이제 20대 후반인 젊은 사람을 국장에 앉히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무혁도 이 자리에 머무는 것이기도 했고.
“그럼 정보부에 전달하여 이렇게 진행하도록 하지.”
S급 각성자의 원한만 살 것 같은데. 무혁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물러가 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국장은 손을 휘휘 저었다. 무례한 태도였다.
탕.
섬세하게 세공된 문이 닫히고, 무혁은 곧바로 혀를 찼다. 이제 국내는 새롭게 알려지는 1세대의 정보로 들끓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소식은 외국까지도 새어 나가겠지.
각성자 강국인 일본과 미국에 말이다.
‘나도 움직여야겠군.’
적어도 외국에는 뺏기지 말아야 하지 않겠나. 앞으로 할 일이 많았다.
‘안 그래도 요즘 일이 많은데.’
당분간은 야근 확정이다.
*
소문의 시작은 인터넷 뉴스였다.
[1세대 실종자 나타나다!]
10년 전 처음 열린 포털로 사라진 1만 명!
그중 1명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익명의 제보자가 전해 준 소식에 의하면 다시 모습을 드러낸 최초의 1세대는 길드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1세대를 생각하면 조금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는 길드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게 맞을까? 강제로 잡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제보자가 전해 준 또 다른 정보에 의하면…….
작은 언론사에서 시작된 인터넷 뉴스는 점점 들불처럼 크게 번져갔다.
“1세대? 지금에 와서 나타났다고? 거짓말 아냐? 여기 언론사도 찌라시 잘 떠들어 대는 곳이잖아.”
“하지만 다른 곳에서도 뉴스가 떴는걸? 여기는 믿을 만한 곳이잖아?”
“그건 그런데.”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던 사람들도 정보의 양이 늘어나자 그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9.
어딜 가도 1세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뉴스에 뜨는 소식은 점점 자세해지기 시작했고, 상위 길드에서 그를 독점하고 있단 소문도 퍼졌다.
“설마.”
“설마가 사람 잡는다지. 상위 길드라면 사람 하나 숨겨도 모르지 않을까?”
“그것도 그렇네?”
사람들은 길드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길드들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더 몰린다면 그들도 더는 가만있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아무리 강한 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길드라고 해도, 국민의 시선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 소란 속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만든 단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족이 사라진 지 10년. 긴 세월에도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던 이들에게는 빛과 같은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1세대 실종자를 만나야 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만난단 말입니까? 인터넷에서는 연일 떠들어 대고 있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길드들은 입을 다물고 있고 그가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압니다. 알지만!”
단체장인 박덕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울분을 토해 내는 그 목소리에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런 와중에 중년 여성이 손을 들며 말했다.
“일단 길드에 문의라도 해 보는 게 어떻습니까?”
“그 오만한 작자들이 들어 주겠습니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죠.”
앞으로 어떻게 할지 열심히 이야기하는데, 갑자기 사무실 문이 쾅 열렸다. 그리고 청년 하나가 들어오며 외쳤다.
“선현, 선현 길드랍니다!”
“뭐?”
“1세대 실종자를 데리고 있는 길드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뉴스에 떴습니다!”
방송이나 거대 언론사에서 나온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선현 길드에 연락을 넣어 보겠습니다.”
선현 길드의 이미지는 좋은 편이었다. 다른 상위권 길드처럼 거만하게 군 적도 없었고 사회적인 공헌도 자주 하였으니까.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답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다.
*
“와, 씨발. 이렇게도 엿 먹이네?”
새로 들어온 소식에 가준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죽어도 1세대 독점은 못 보겠다 이거지.”
1세대 실종자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는 길드들은 전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앞으로 진득하게 기다리면 기회는 다시 생기기 마련이다. 그걸 굳이 다른 데 떠들어서 경쟁자를 늘릴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조용히 있었는데, 이걸 다른 이가 다 풀어 버렸다.
헌터관리국이 말이다. 최대한 정보의 출처를 감추려고는 하는 모양이었지만, 멍청이가 아닌 이상 이걸 모를 리 없었다.
기가 막혀 헛웃음만 터트리고 있자니, 전화가 왔다. 혜선이었다.
“여어, 누님.”
─ 미친 거 아냐?
“걔네는 언제나 반쯤 미쳐 있었어요.”
원하는 목표는 큰데, 그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이 많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래서 이런 일을 벌였는지도 모른다.
─ 이 정보가 퍼져 나가면 경쟁자만 더 들러붙을 건데 왜 이런 짓을 한 거지?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지선우가 적이 얼마나 많은데 말이죠.”
─ 너를 포함해서?
“그래도 저는 신사죠.”
─ 헛소리하네.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덮을 거야?
“그러기엔 정보가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요람 길드도 이번에는 쉽게 손을 쓰지 못할걸요.”
자윤과 아윤은 언론사 집안의 자식들이었고, 덕분에 정보전에 능했다. 하지만 그런 둘도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을 것이다.
─ 빌어먹을 인터넷!
분노한 혜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일단은 대책을 생각해 봐야 할 테니 한번 모이죠.”
─ 알았어. 요람 길드에는 내가 전하지.
혜선의 최강 길드는 요람 길드와는 사이가 괜찮은 편이었다. 자윤의 동생인 아윤과 언니동생할 정도로 친한 탓이었다.
“네, 그럼.”
전화를 끊은 가준은 서랍을 뒤져 담배를 찾았다. 어떤 독한 걸 피워도 독술사인 그에게는 심심하게 느껴져서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그게 당겼다.
“정말 어쩌자고. 쯧.”
가준은 혀를 차며 1세대 실종자, 현우를 떠올렸다. 이제 그는 어떻게 되려나. 힘이야 약하지 않았지만, 때로는 힘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는 게 있는 법이었다.
‘지선우가 어떻게 대처할지도 궁금하군.’
가준은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며 담배를 물었다.
*
국내에서 돌던 정보는 이내 해외까지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러시아, 미국. 각성자 강국은 그 정보를 전해 듣고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모처.
반질반질하게 닦여진 나무 바닥 위에 무릎을 꿇고서 명상에 잠겨 있던 청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준이치 님.”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저편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험악한 인상을 가진 남자 하나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입니까?”
“정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급히 찾아온 걸 보니 정말 중요한 정보인가 보군요.”
목소리는 상냥했지만, 그 말에 남자는 몸을 굳혔다. 눈앞에 보이는 부드러운 인상의 청년, 준이치가 보이는 것과는 다른 사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해 보십시오.”
“1세대 실종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말에 준이치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 모습에 남자는 공포를 느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1세대 실종자를 감추고 있는 곳이 선현 길드라고 합니다.”
“선현 길드?”
준이치의 표정이 달라졌다.
“네!”
“흐음. 좀 더 자세히 조사를 해 보십시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물러나세요.”
남자는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문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자마자 준이치는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주먹을 힘주어 쥐었다.
선현 길드. 그가 라이벌로 여기는 지선우가 길드장으로 있는 길드였다. 그 길드에서 1세대 실종자를 데리고 있다고? 신경이 쓰였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었다.
‘신경이 쓰인다면 가져야지요.’
준이치는 가볍게 감고 있던 눈을 뜨고 매섭게 앞을 노려보았다. 어쩌면 이번 일로 지선우를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섣부르게 움직일 생각은 없었다.
“1세대 실종자?”
“그렇습니다. 이반 님.”
붉은 머리의 남자가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깜박였다. 그의 이름은 이반, 러시아의 신예 중에서는 첫 번째로 손꼽히는 강력한 각성자였다.
화염의 이반.
“아버지는 어쩌시겠다고 하는데?”
“표드로 님은 당분간은 지켜보신다고 합니다.”
그는 타국의 신예와는 달리 아직 길드장의 자리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성격이 게으르기도 했거니와, 그보다 더한 강자인 아버지가 길드장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나도 지켜보지, 뭐.”
그렇게 결정하긴 했지만, 조금은 흥미가 생긴다.
‘사라진 지 10년이 지난 각성자라.’
얼마나 강할까. 게으르단 소리를 듣는 이반이었지만, 그래도 그의 속성은 불이었다. 내부에는 깊이 타오르는 불꽃을 지니고 있기에, 호승심이 강한 편이었다. 그런 그도 1세대 각성자에 대해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일본의 준이치나, 러시아의 이반뿐만이 아니었다.
높은 빌딩. 창가 가까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깔끔하게 넘긴 금발에 보기 드문 외모를 가진 그는 실전으로 다져진 단단한 근육을 정장 아래 감추고 있었다.
“1세대 실종자라고.”
“네. 이번에 헌터관리국에서 찾아낸 모양입니다.”
“지금도 거기 있나?”
“그건 아닙니다. 찾은 건 헌터관리국이 맞지만, 선현 길드에 빼앗긴 모양입니다.”
“흐음.”
흥미가 돋았다. 2세대 실종은 전 세계에서 발생했지만, 1세대 실종은 한국의 한 지역에서만 이루어졌다. 이후 2세대 실종자들이 돌아올 때까지도 아무런 소식이 없길래, 다들 포기했는데. 설마 10년이 지나서 되돌아올 줄이야.
“선현 길드라. 거긴 좀 위험한데.”
“하지만 그래 봤자 조그만 나라의 길드 아닙니까.”
“길드장이 S급 각성자이지 않나.”
“그래 봤자 1명입니다. 아무리 강하더라도 1명이 여럿은 못 이기지요. 저희 가디언 길드에는 S급만 3명이 있지 않습니까? 레온 님도 계시고요.”
“그래, 그렇지. 그래도 일단은 온건하게 접촉해 볼까? 알렉. 한국에도 지부가 하나 있지?”
크지는 않았지만, 유독 포털이 잘 열리는 나라가 한국이었다. 그 때문에 한국과 우호 관계를 지닌 미국은 돕는다는 핑계로 자국 길드의 지부 몇 개를 집어넣어 두었다. 가디언 길드도 그중 하나였다.
“네.”
“그쪽에 말해 놔.”
“네, 일러두겠습니다.”
바야흐로 세계가 움직이고 있었다.
*
“으으, 좋다.”
보드라운 잠옷을 걸치고, 양손에는 율무차가 담긴 머그컵을 꼭 쥔 현우는 그 상태로 커다란 TV를 보고 있었다. TV에서는 10년간 보지 못했던 영화가 흘러나오고, 바닥의 러그 위에서는 케로가 뒹굴며 자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간만에 보는 화려한 화면의 영화도 제법 마음에 들었고. 현우는 율무차를 홀짝이다가 작게 하품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문 입구 쪽에 서 있는 도진을 바라보았다.
처음에 선우는 도진을 안에 들이지 않으려고 했지만, 현우가 반대했다.
“그래도 도와주겠다는 사람인데 문밖에 세워 놓는 건 좀 그렇잖아?”
“형, S급 각성자는 튼튼해서 며칠 내내 서 있어도 멀쩡해.”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현우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안쪽에 있으시라고 해.”
선우는 불만이 많은 듯했지만, 결국 현우의 말을 들어주었다. 그 과정에서 더 많은 타협의 과정이 있었지만, 늘어놓기엔 너무 길어서 생략하겠다. 하여간 그렇게 도진은 내부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도진은 현관 앞에 저렇게 서서 현우를 지켰다.
20.
“굳이 거기 서 있지 않아도 되는데요. 이쪽에 와서 앉아요.”
“저는 괜찮습니다.”
도진은 단호하게 말하며 그 자리를 지키고 섰다. 이럴 때는 비장의 수단이 있지.
“계속 거기 서 있으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그러면서 눈을 내리깔자, 도진이 느릿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덩치로 그렇게 움직이는 걸 보니 어쩐지 대형견이 생각난다.
‘까만색 커다란 레트리버.’
다만 사람을 좋아하는 일반적인 레트리버와 다르게, 이 레트리버는 아직 낯을 가린다. 도진은 현관 안쪽으로 들어오긴 했으나 더 다가오지는 않고 머뭇거렸다.
“더 가까이 와요.”
손짓을 하자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온다. 그 모습이 어쩐지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여 현우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지켜 준다면서요. 너무 떨어져 있어도 힘들지 않을까요?”
그렇게 도진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최후엔 현우가 몸을 기대고 있는 소파 가까이 섰다.
“앉아도 되는데.”
“이렇게 있는 편이 반응이 빠릅니다.”
“힘들잖아요.”
“힘들지 않습니다.”
“보는 내가 힘든데요? 그러니 여기 앉아요.”
현우가 어떻게든 도진을 앉히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가 그어 놓은 선이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고 다시 TV로 시선을 돌렸다.
선우는 오랜만에 아래층으로 내려와 길드장의 업무를 다하고 있었다. 밀린 일을 처리하는 손이 빠르다. 순식간에 서류를 다 처리한 그는 몸을 일으켜 회의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서는 올라가서 형과 같이 있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찮았다. 회의실에는 미리 연락을 넣어 부른 길드의 수뇌부가 선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드장님.”
부길드장인 찬영을 선두로, 몇몇 길드원이 선우를 반겼다.
“상황은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선우의 말에 찬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좋지는 않습니다. 어떻게든 정보를 막아 보려고 했지만, 이미 전부 퍼진 뒤입니다.”
“해외 반응은요?”
“아직은 크지 않지만, 알 사람은 거의 다 알고 있다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근원지는 예상대로입니까?”
“네, 헌터관리국입니다.”
그러면 그렇지. 가준을 포함한 다른 상위권 길드가 이런 짓을 벌였을 것 같지는 않았다. 욕심이 있으니까.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그들로서는 원하는 걸 쟁취하기 더 힘들어진다. 그러니 입을 다물었을 것이다.
거기에 헌터관리국이 난장을 부린 것이다. 선우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차라리 그를 가지고 수작을 부렸으면 모를까, 형에게 손을 댔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속이 들끓었다.
‘이제야.’
평온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는데. 헌터관리국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분노를 삭이고 있자니, 찬영이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서류를 내밀었다.
“그리고 오늘 헌터관리국에서 공문을 보내왔습니다.”
선우는 누런색의 봉투를 뜯어내고 안의 서류를 꺼내 보았다. 이어 표정이 더 험악해졌다. 개소리를 길게도 적어 놓았다. 글은 길고 장황했지만, 대충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1세대 실종자를 넘겨라.」
손안에 있던 종이가 구겨졌다. 이어 얼어붙은 종이는 강한 힘에 바스러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무시합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정보가 국민에게 다 퍼졌습니다. 게다가 1세대 실종자 가족 연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1세대 실종자가 있는 게 맞다면 만나고 싶다 합니다.”
이해는 한다. 선우는 가족이 사라진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우를 외부에 내보내고 싶진 않았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각성자가 되기까지, 많은 인연이 생겼다. 그중에는 좋은 인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인연도 많았다.
그런 이들 앞에 형을 내밀라고? 그 끝이 안 좋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이대로 감추어 둘 수만도 없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죽일까.’
형을 죽었다고 위장하고, 더 은밀한 곳에 감추면 되지 않을까. 아니, 아니다. 그러면 형의 남은 인생은? 살아남더라도 내내 숨어 살아야 하는 인생을 형이 반길까?
고민 중인 선우를 보며 찬영은 침을 꿀꺽 삼켰다.
현우는 선우의 가족이었다. 그런 사람을 함부로 밖으로 내돌리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선우가 받는 상처도 상처였지만, 선현 길드에도 흠집이 생긴다.
“저는 현우 님을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보호를 택했다. 그건 다른 이들도 같은 의견이었다. 나머지는 어떻게든 감수할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의견을 제시했다. 그런 찬영을 힐끔 바라본 선우가 물었다.
“보호해야 하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보다 부길드장.”
“네?”
“방송에 우리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이 어느 정도 됩니까?”
“크지요?”
아, 바보같이 대답했다.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에 요람 길드의 영향력까지 더하면?”
“더할 수만 있다면 최고지요. 요람 길드의 길드장은 거대 언론사의 핏줄 아닙니까.”
“그렇지요. 좋습니다. 요람 길드에 연락하십시오. 최대한 빨리 만나 보고 싶다고.”
이어 선우는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말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수뇌부들은 전부 그 계획에 찬성했다. 상대가 언론 플레이로 나왔다면, 이쪽도 그렇게 나가면 그만이다.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현 길드에서 연락이 왔어.”
자윤의 말에 아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가왔다.
“뭐래?”
“만나자는데?”
“흐음, 하긴. 언론 플레이를 하려면 우리가 돕는 쪽이 빠르겠지.”
“언론 플레이?”
“지선우는 형이란 사람을 보호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그럼 방법은 두 가지뿐인데. 형을 더 깊이 감추거나, 아니면 아예 드러내거나.”
아윤이 펼친 손가락을 접어 보였다.
“하지만 더 깊이 감추는 건 지금으로서는 하책이니까, 나라면 아예 내보일 거야.”
“위험하지 않나?”
“어느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잘만 내보이면 적어도 대낮에 사람 많은 곳에서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될 텐데. 평소에 지선우 이미지가 워낙 좋았잖아? 사실 성격이 개차반이긴 해도 인간이 지켜야 할 도리는 잘 지키는 편이고.”
지선우가 난폭하게 구는 건 같은 각성자들 한정이었다. 아윤은 그 점을 콕 찍어 말했다.
“그럼 우리가 돕는 게 낫나?”
“돕는 게 낫지. 다만 우리도 공짜로 도울 수는 없으니 뭔가 얻어 가는 게 있어야겠지? 내가 지선우라면 돈이나 아이템으로 때우려 하겠지만,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건 그게 아냐.”
“1세대와의 만남.”
“맞아! 와, 나 1세대는 처음이야. 만날 생각 하니 두근거리는걸?”
“쉽게 만나게 해 줄까?”
“그걸 조율해 봐야지. 나한테 맡겨!”
아윤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요람 길드와 선현 길드의 만남은 쉽게 이루어졌다. 요람 길드로 찾아온 지선우를 앞두고 아윤은 몸을 긴장시켰다. 이제 원하는 걸 받아내야 한다. 그 길이 쉽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탕!
아윤은 책상을 두 손으로 내려치며 말했다.
“저희 길드가 원하는 것은 1세대와의 만남입니다!”
절대 양보하지 않으리라! 눈을 부릅뜨고 말하자, 지선우가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어떻게 말해도 절대 물러나지… 네?”
“좋다고 했습니다.”
이걸 이렇게 쉽게 허락한다고? 아윤은 미심쩍은 눈으로 지선우를 바라보았다.
“대신 횟수는 3회로 제한합니다.”
“10회!”
“2회.”
“9회!”
“1회.”
“흐응, 이렇게 나오시면 그쪽만 손해일 텐데요?”
“언론사가 한 군데만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거대 언론사를 섭외하기는 쉽지 않을 텐데요?”
“방법이야 많지요.”
으으, 저 생긴 것만 잘생긴 얼굴. 반드르르한 낯짝을 보며 아윤은 이를 갈았다. 그런 아윤을 선우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두 분 다 너무 흥분하지 마십시오. 적절한 정도를 같이 정해 봅시다.”
그런 둘을 자윤이 중재했다. 아윤은 머리가 좋은데 가끔 급발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녀의 오빠인 자윤이 나서곤 했다.
“좋아요. 그러면 양보해서 5회.”
“제가 처음 말한 횟수도 많이 양보한 횟수입니다.”
지선우는 조금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원래 이 정도 횟수일 거라고는 생각했어.’
하지만 조금도 넘어가 주지 않는 모습이 얄밉다.
“그럼 대면 시간은요? 설마 10분 보여 주고 다시 감출 생각은 아니겠지요?”
“설마요. 20분 드리겠습니다.”
“20분 동안 뭘 해요! 1시간은 줘야지요.”
이런저런 사정으로 조율하는 데 제법 시간이 들었다. 그래도 결국엔 적절한 선을 찾을 수 있었다. 최소한 아윤이 생각했던 최저기준에는 도달했던 것이다.
“아무래도 우리가 손해 보는 것 같아.”
“그럴 리가요. 제 쪽이 손해입니다.”
형 얼굴 몇 번 보여 주는 걸로 생색내긴. 아윤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럼 다음 단계를 진행하죠.”
“좋습니다.”
“먼저 시작할 건 이미지 확립하기예요.”
아윤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종이봉투를 건넸다.
“안에 든 거 다 제대로 작성해서 오세요.”
안에 든 건 별다른 게 아니었다. 흔히 연예인들이 처음에 작성하곤 하는, 프로필 시트였다. 이것이 앞으로 벌일 일에 중요한 시작이 될 것이다.
“제대로 스타를 만들어 보죠.”
아윤의 명랑한 목소리 아래 요람 길드와 선현 길드가 손을 잡은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21.
거처로 돌아온 선우는 낯선 광경에 눈을 깜박였다. 분명 현관에 세워 두었던 도진이 거실로 들어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둘은 같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성공!”
현우가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나무 탑에서 나무토막을 빼내자 이어 도진이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신중하게 중간에 끼워진 나무토막을 손으로 밀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모르겠다.
“형.”
“어, 선우 왔네!”
현우가 손을 흔들었다. 선우는 그런 현우에게 다가가며 둘 사이에 놓인 젠가를 노려보았다. 형이 심심할까 봐 여러 가지 게임을 갖춰 놓긴 했지만, 그걸 도진과 둘이 하고 있을 줄이야.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처음은 자신과 같이 하면 좋았을 텐데.
“게임하고 있었어?”
“응. 생각보다 재밌더라.”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그 사이 도진이 건드리던 나무 탑이 무너졌다. S급 각성자가 그 정도도 못 할 리 없으니 아마 고의로 무너트린 것일 터였다.
“졌습니다.”
“또요? 젠가에 약한가 보네요.”
그럴 리가 있나. 그래도 형이 웃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선우는 형의 옆에 앉으며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뭐야?”
“프로필 시트.”
“그게 뭔데?”
되묻는 현우에게 선우는 사정을 천천히 설명했다. 지금 밖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들, 그로 인해 벌어지는 사람들의 움직임. 그 모든 걸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선택한 방법을 말이다.
“미안해.”
설명을 마친 선우는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진심으로 형을 볼 낯이 없었다. 어떻게든 지켜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형을 힘들게 만들고 말았다. 자신이 좀 더 강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자책하는 선우를 보며 현우가 말했다.
“사과는 그만해. 네가 원해서 벌어진 일도 아니잖아?”
현우도 어느 정도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다. 그렇기에 선우가 최선을 다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한번 사과하면 화낼 거야.”
현우가 단호하게 말하니 선우가 눈을 글썽거렸다. 그런 형제를 바라보며 도진은 절로 떠오르는 씁쓸함을 감추었다. 의좋은 형제를 볼 때마다 예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울지 마. 아직 어리다니까.”
현우는 붉은 기가 감도는 선우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러리고는 손에 든 서류 봉투를 열어 보았다.
‘프로필 시트라.’
이름, 나이, 성별, 생일, 취미, 특기 등등. 하나씩 비어 있는 빈칸을 채워 나갔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조금씩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취미?”
내가 취미가 있었던가? 현우는 가만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마계에 가기 전에는 너무 바쁘고 힘들어서, 마계에서는 살아남기도 바빠서 취미를 가지지 못했다. 심심할 때 몬스터를 때려잡거나, 마족과 싸우긴 했지만 그게 취미가 될 수는 없겠지.
아마 여기서 요구하는 취미는 좀 더 평범한 것일 터였다. 현우는 손에 든 볼펜으로 머리를 긁었다. 아무리 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생각나는 게 없어?”
“그러네. 넌 취미가 뭐야?”
“나?”
“참고해 보게.”
현우의 말에 선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현우 못지않게 치열하게 살아 온 선우였다. 평범하게 취미생활을 구가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도 굳이 말해 보라면 하나 있긴 했지만, 그걸 취미라고 해도 좋을까?
형의 옛날 흔적을 더듬는 것인데 말이다. 예전에 같이 살던 집을 사들여 주변을 그대로 유지하고, 가끔씩 가서 자고 온다거나. 하는 것들.
“독서.”
그래서 선우는 가장 평범한 취미를 말해 보았다.
“독서? 무슨 책을 보는데?”
“그냥 이런저런 책?”
선우의 답을 들은 현우는 이번엔 도진에게 물었다.
“도진 씨는 취미가 뭐예요?”
그러자 쓰러진 젠가를 정리하던 도진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취미 말입니까?”
“네.”
도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딱히 없는 것 같습니다.”
현우, 선우와 마찬가지로 도진도 취미생활을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동생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말이다.
주변의 사람에게 물어봐도 딱히 괜찮은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빈칸에 뭘 써넣어야 하는지도 고민이 됐다. 현우는 손가락으로 볼펜을 휙휙 돌리며 생각해 보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생각나는 게 없다면 같이 해 볼까?”
그런 현우에게 선우가 제의했다.
“취미생활을?”
“같이 해 보다 보면 마음에 드는 걸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좋은 생각이네.”
“그럼 나갈까?”
선우는 현우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러나려 했지만, 현우가 그런 그를 잡았다.
“여럿이서 하면 더 쉽게 생각날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도진은 얌전히 합류했다.
먼저 독서를 해 보기로 했다. 다행히 선현 길드의 본거지인 빌딩에는 도서관이 존재하고 있었다. 전부 직원복지를 위한 시설이었다. 실제 이용하는 사람은 적었지만.
“도서관 크네?”
전용 사서도 존재했다. 일단 셋은 흩어져서 읽고 싶은 책을 찾아오기로 했다. 현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가장 가까운 책장으로 다가갔다. 대충 책 하나를 골라잡고 돌아오자, 선우와 도진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책이야?”
“이거.”
『몬스터 대백과』
“너는?”
현우의 말에 선우가 책을 내보였다.
『추리의 역사』
그다음엔 둘의 시선이 자연 도진에게로 향했다.
『네덜란드 동화 모음집』
무슨 기준으로 책을 고른 건지 모르겠다. 셋 다 보이는 대로 집어 온 모양이었다. 그래도 일단은 한번 읽어 보기로 하고 도서관 한편에 자리 잡았다. 일반적인 도서관은 아니라 그런지 편하게 앉을 수 있는 소파에 쿠션과 담요도 있었다.
선우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쿠션을 놓아 주자, 현우가 거기 앉았다. 그리고 그 위에 도진이 담요를 덮어 주었다.
그런 후 셋은 독서 시간을 가졌다.
‘몬스터 대백과라.’
지금까지 발견된 몬스터들이 등급에 따라 분류되어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현우도 아는 몬스터들이었다.
‘아, 얘는 때릴 때 손맛이 좋았지. 그리고 이 녀석은 속도가 빨라서 가끔 타고 놀기 괜찮았고.’
지나간 기억이 떠올랐다. 대부분 폭력으로 점철된 기억은 금방 질렸다. 현우는 책을 넘기다가 슬쩍 동생을 바라보았다.
선우의 책은 현우의 것보다 더했다. 삽화라고는 일절 없고 빽빽한 글씨가 종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연 흥미가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에는 도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동화책이라 그런지 표지부터 알록달록했다. 옆에서 훔쳐보다 보니 제법 재밌기도 했다. 현우의 고개가 점점 도진에게로 기울었다.
도진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눈치챘다. 그냥 집어 들었으니 읽고 있긴 했지만, 딱히 흥미는 없었기에 책을 현우에게로 기울여 주었다. 그러자 기울던 현우의 자세가 좀 더 편해졌다.
팔랑팔랑.
고요 속에서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책을 바꿔 왔는데, 이번에는 방금 전과 다르게 표지가 화려했다.
도진과 같은 동화책이었다. 그러나 현우는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선우의 미간이 좁아지며 종이 넘기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제야 현우가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아까 책은 벌써 다 읽었어?”
“응.”
“이건 무슨 책이야?”
『독일 동화 모음집』
“재밌겠네?”
“형도 같이 볼래?”
선우는 언제 인상을 구겼냐는 듯이 배시시 웃으며 물어왔다. 그러고는 자연스럽게 도진과 현우 사이에 끼어들어 앉았다.
그렇게 조용하다면 조용할 독서 시간이 지나갔다.
“으아아!”
도서관을 빠져나온 현우는 길게 기지개를 켰다. 동화책은 나름 재밌긴 했지만, 계속하고 싶은 취미는 아니었다. 선우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듯했다.
“그럼 다음엔 다른 걸 해 볼까?”
“뭐 하지?”
셋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인터넷으로 취미를 검색해 보았다.
“게임.”
“그건 패스.”
지금도 가끔 게임을 하고 있지만, 취미라고 하기엔 미묘했다.
“영화감상.”
“그것도 패스.”
“요리?”
“그건 해 본 적 없네. 해 볼까?”
셋은 다시 꼭대기 층의 거처로 돌아왔다. 선우는 익숙한 듯 앞치마를 두르고, 현우에게도 입혀 주었다. 그리고 냉장고에서 요리 재료를 턱턱 꺼냈다. 거기에 칼까지 집어 드는 모습이 무척 익숙해 보인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매번 차를 끓여 주기도 했었지.
“요리 잘해?”
“기본적인 것밖에 못 해.”
“어떤 거?”
“가벼운 밑반찬이랑 밥 정도? 형은?”
“나도 그 정도.”
부모님이 없는 집에서 어린 선우에게 요리를 맡길 수는 없었으니, 밥을 하는 건 언제나 현우였다. 그랬는데 이제 선우도 요리를 하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감개무량했다. 정말 많이 컸구나. 감동에 젖어 있다가 도진에게도 물어보았다.
“도진씨도 요리 잘해요?”
“예원이는 잘한다고 했습니다.”
그랬었지. 마계에서 맛없는 몬스터의 시체를 뜯을 때면 예원은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우리 오빠가 얼마나 요리를 잘하는데. 여기서 이런 맛없는 걸 먹어야 한다니!’
그렇게 말했으니 정말 요리를 잘하는 모양이었다.
셋은 각자 역할을 나눠 요리를 시작했다. 선우가 밥과 국을 하고, 현우가 가벼운 밑반찬을, 도진이 메인을 맡았다. 재료는 충분했고 부엌도 넓었기에 셋은 움직이며 열심히 요리를 했다.
불고기에 잡채, 계란말이에 시금치나물, 콩나물무침, 멸치볶음, 소고기뭇국에 밥이 놓였다.
“도진 씨는 정말 요리를 잘하네요.”
도진의 요리를 먹어 본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반면 현우가 만든 요리는 맛이 애매했다.
22.
요리가 맛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딱히 맛있지도 않은 묘한 맛.
‘그러고 보니 제대로 요리를 한 지도 오래됐지.’
어렸을 때도 딱히 잘하는 건 아니었고. 새삼 이런 걸 잘 먹어 준 동생에게 미안함이 느껴졌다.
“내 건?”
“네 거도 맛있어.”
도진만큼은 아니었으나, 선우도 제법 손재주가 좋았다. 덕분에 점심은 잘 먹었지만, 이것도 취미에 넣고 싶지는 않았다. 손이 너무 많이 갔기 때문이었다.
‘남이 해 주는 요리가 최고다.’
현우는 새로 깨달은 진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로도 많은 것을 시도해 보았다. 가벼운 스포츠부터 예술적 취미까지. 하지만 딱히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현우는 그 모든 걸 끝내고 평소 자주 누워 있는 소파로 다가가 드러누웠다. 거기 누워 담요를 덮고 케로를 끌어안으니 이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이제 알 것 같다. 내 취미는 낮잠 자기야.”
“좋은 취미네.”
“하지만 그대로 적으면 안 되겠지?”
“안 될 건 뭐람. 조금 서사를 부여하면 될 것 같아.”
“서사?”
“응, 이건 내가 알아서 할게.”
선우가 알아서 한다니 믿음이 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럼 하루 종일 움직인 건 뭐였을까? 싶기도 했다.
‘뭐, 그래도 선우가 좋아했으니까.’
가끔은 동생과 함께 움직이는 것도 좋지. 현우는 배시시 웃으며 몸을 쭉 폈다. 점차 졸음이 몰려왔다. 여느 때와 같은 평온한 밤이었다. 물론 평온함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른 아침, 현우는 의자에 앉은 채 반쯤 졸고 있었다. 지나치게 일찍 일어난 탓이었다.
“더 잘래?”
“아니, 괜찮아. 약속 있다며.”
“늦추면 돼.”
당당하게 대답하는 선우에게 현우는 손을 휘저었다.
“안 돼. 약속 시간은 지켜야지.”
“역시 형이야.”
선우는 그런 현우를 치켜세우며 자연스럽게 등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안 그래도 졸린 데 담요까지 더해지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문이 열리며 활발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요람 길드의 아윤이라고 합니다!”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여성, 아윤은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보기에는 선우랑 비슷한 듯했다.
“어디 보자. 이쪽은 아는 사람이고, 이쪽도 낯이 익으니 남은 사람은 하나뿐이네요. 반가워요. 1세대는 처음 보네요!”
아윤이 가까이 다가오려는 걸 선우가 중간에 막아섰다.
“저는 비각성자인데도 경계하는 건가요?”
투덜거리자 선우가 말을 받았다.
“요람 길드의 길드장이 여동생을 아껴서 여러 가지 아이템을 건네준 건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래도 누군가를 납치할 만한 아이템은 없답니다. 이미 입구에서 확인해 놓고선.”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 않습니까?”
“당신답네요.”
아윤은 불퉁한 표정을 짓고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작은 가방에서 태블릿 하나를 꺼냈다.
“그럼 오늘 일정을 말씀드릴게요. 일단은요.”
숍에 간다. 물론 일반적인 숍은 아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재벌 집 안주인이 다니는 숍 중에서도 가장 좋은 곳으로, 아무나 받아 주지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저희가 누군가요. 국내 상위 길드의 일원. 예약은 어렵지 않았답니다. 제 어머니가 자주 다니는 숍이기도 하고요. S급 각성자야 저절로 피부가 좋아진다지만, 저희는 아니니까요. 관리가 필요하답니다. 풀코스로 부탁드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어 숍의 원장이 직원 하나와 함께 현우에게 달라붙었다.
“어머, 피부가 너무 좋으신데요?”
원장은 감탄하며 현우의 얼굴을 마사지했다.
“크게 손대지 않아도 되겠어요.”
얼굴을 비롯한 전신을 마사지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뒤 메이크업까지 했다. 메이크업 부분에선 현우가 반항을 했지만, 아윤이 안 된다고 못 박았다.
“살짝 할 거예요. 살짝. 한 듯 안 한 듯 그런 느낌으로요. 너무 해도 효과가 없으니까요.”
“굳이 해야 하나요?”
“자고로 예쁜 것에 약한 게 사람이지요.”
“예쁘지는 않은데.”
현우가 투덜거렸지만, 아윤은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러리고는 태블릿을 톡톡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진짜 물건인데.’
그 지선우의 형이라고 해서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나 싶었는데, 아니다. 키가 좀 더 작고, 호리호리하며 순하게 생겼다. 화장을 위해 눈꺼풀을 살짝 내리까니 청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계획에는 딱 적합한 외모였다.
아직 성격은 어떤지 몰라도 하는 걸 보니 딱히 모난 것 같지도 않고. 가만히 세워만 놔도 방송에서 좋은 반응을 얻을 것 같았다.
‘연기는 좀 못해도 돼.’
그쪽은 지선우가 잘하니까. 대충 그에게 묻어만 가도 된다.
‘먼저 다큐멘터리에 모습을 비추고, 그다음에는 손님을 불러서 대담하는 디너쇼 방송. 어느 정도 이목을 모은 후에는 외부 활동을 시작한다.’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1세대 실종자 가족 연합을 만나는 것. 물론 혼자 보낼 생각은 없었다. 안전을 지켜 줄 사람 몇은 붙여야 했다.
이런 식으로 차근차근 진행하면서 선현 길드가 그를 데리고 있는 게 당연한 일이 되도록 만들어야 했다.
‘으으, 말 걸고 싶다.’
아윤은 괜스레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다. 하지만 일하는 중에는 묻지 않기로 약속했으니 물을 수 없었다. 물었다가는 저 꼬장꼬장한 지선우가 계약을 파기하겠지. 자윤과 아윤이 거대 언론사의 자식은 맞지만, 다른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니까. 지금은 몸을 사리는 게 맞았다.
“어때요?”
모든 과정을 끝마친 현우가 바로 앞에 섰다.
“멋져요! 역시 원장님이시네요.”
관리하기 전에도 미인이었는데, 하고 나니 더 빛이 난다. 이어 아윤이 불러온 코디네이터가 옷을 새로 입혀 주었다. 폭신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톤다운된 핑크색 앙고라 상의에 적당한 바지를 입혀 놓으니 정말 무해한 사람으로 보인다.
‘25살 된 사람으로 보이지 않네.’
어쩌면 군대를 가지 않아서 그런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갈 일은 없겠지. 앞에 세대가 붙는 실종자, 각성자는 군대 면제니까. 서로 경계하는 길드가 그때 최초로 손을 잡았었다.
각성자가 강제로 차출되면, 나라에서는 어떻게든 놓아주지 않으려고 발악할 테니까. 게다가 환경이 열악하기도 하고.
‘그놈의 망할 군비리.’
이건 이쯤 생각하자. 아윤은 군대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관리가 끝난 현우를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리가 끝난 현우를 내보이자 대기실에서 기다리던 선우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도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말했죠? 여기가 잘한다고.”
“……정말 잘하긴 하는군요.”
아윤은 어깨를 으쓱했다.
*
이어 넷은 차를 타고 장소를 이동했다. 목적지는 외진 곳에 있는 달동네였다. 아니, 정확히는 달동네였던 곳이겠지.
들어서는 입구에는 경고판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사유지입니다.」
그 앞에는 미리 섭외한 이들이 와 있었다. 과거 지선우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제작사 팀이었다. 다큐멘터리 쪽으로는 아윤도 인정하는 최고였다.
“일찍 오셨네요.”
“시간에 맞춰 왔을 뿐입니다.”
감독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오늘 잘 부탁드립니다.”
“제가 잘 부탁드려야지요.”
이걸 찍기로 한 뒤로 받은 돈이 어마어마하다. 뿐이랴. 최초로 1세대에 대해 찍는 것이다. 여파 또한 굉장할 것이다. 감독으로서도 반드시 잘 찍어야 하는 일인 것이다.
그나저나 이 넓은 땅이 사유지라니. 대단하다. 감독은 휘파람을 불고 싶은 걸 간신히 눌러 참았다. 저쪽에서는 작가가 미리 작성해 온 대본을 형제들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너무 과장되거나 가식적이지 않게, 그러면서도 사람의 가슴을 자극할 수 있는 그런 느낌으로 적느라 작가도 고생했다.
“그럼 대본 숙지 후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감독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외쳤다.
방송 시작 전, 현우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대본을 숙지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여기는.”
11년 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남은 돈으로 간신히 구한 달동네의 작은 월세방. 선우와 함께 1년 동안 둘이서만 살았던 그 집이 있는 동네였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이 감정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현우는 천천히 길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 빨리 카메라!”
그걸 본 감독이 뒤에서 빠르게 카메라를 찾았지만, 현우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과거의 추억만이 선명하게 떠오를 뿐이었다.
높은 비탈길을 오르다 보면 끝부분에 작은 집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낡은 녹색의 대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니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의 집이 보였다.
현우는 조심스럽게 걸어서 그들이 머물렀던 방으로 향했다. 나무 문은 많이 낡았지만,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드나든 흔적이었다.
문을 열자 오랜 기억 속의 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관리된 문처럼 안도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다. 그렇지만, 오래된 물건 특유의 느낌은 지우지 못한 모양이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낮은 앉은뱅이책상부터 수저통에 꽂힌 숟가락 하나까지 전부 기억을 자극했다.
“형.”
이 모든 것이 그냥 남아 있을 리는 없었으니, 누군가가 손을 쓴 것일 터였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있다면 선우뿐이겠지. 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다 커 버린 선우가 서 있었다.
23.
손꼽히는 S급 각성자. 그걸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이 이해하지 못한다. 현우에게 선우는 아직 어리고 사랑스러운 동생일 뿐이었다.
고작 11살이던 아이를 10년 동안 방치했는데, 바르고 꿋꿋하게 잘 자랐다. 그게 기쁘면서도 죄책감이 되어 마음을 두드린다.
현우의 눈가가 붉어지면서 눈동자에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내 하고 싶었던 말을 이제야 꺼냈다.
“다녀왔어.”
그 말에 선우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어서 와, 형.”
오래전에 같이 살았던 집에서 형제는 다시 재회의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다시는 사라지지 마.”
“응, 사라지지 않을게.”
“약속.”
현우는 선우가 내미는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손가락을 걸었다. 어린 선우를 두고 자리를 비울 때마다 했던 약속을 다시 했다. 그러면서 다짐했다. 이제는 요정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존재가 오더라도, 선우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완벽해!”
감독은 황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미리 대본을 준비했는데, 필요 없는 일이었다. 이리도 날것 그대로의 모습이 펼쳐지는데, 여기에 대본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땀 빼면서 필사적으로 따라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화면이 너무 좋다.’
지선우는 보기 드문 미남이다. 거기에 형도 타입은 다르지만, 잘생겼다. 그런 둘이 함께 어우러지니 어찌 좋지 않으랴.
감독은 자연스럽게 방을 둘러보고, 마당으로 나온 둘을 따라 움직였다. 이후로도 촬영은 수월하게 이어졌다. 편집까지 해 봐야 알겠지만, 대단한 물건이 탄생할 것 같았다.
촬영은 늦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끝났다. 예전에 살았던 동네에서 찍고, 선현 길드로 갔다가 주변을 잠시 돌았다. 선우나 현우나 긴장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딱히 힘든 점은 없었다.
“편집본은 언제쯤 나와요?”
아윤이 감독에게 물었다.
“밤새우면 다음 주까진 어떻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완성되자마자 확인부터 할게요.”
방송 날짜는 이미 잡아놓았다. HBC 방송의 황금시간대로 말이다. 원래 그 시간에는 『인간 시대』라는 다큐멘터리가 방영되는데, 제법 인기 있는 프로였다. 그 프로에 이걸 밀어 넣을 생각이었다.
물론 홍보도 철저하게 할 생각이었다. 아윤은 감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조곤조곤 대화 중인 선우를 바라보았다. 자윤과 아윤도 사이가 좋은 남매였지만, 저들은 더한 듯했다.
‘여차하면 안고 다니겠네.’
이어 시선이 그 옆을 향했다. 선우야 자기 형이니 그렇다 치지만, 도진도 만만치 않았다. 다 자란 성인 남성을 마치 어화둥둥 대하고 있었다. 저녁이 되니 추울까 봐 담요를 덮어 주고, 어디선가 구해 온 뜨거운 음료를 쥐여 준다.
‘둘이 알게 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것만 봐서는 소중한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다. 선우나 현우에게 직접 물어보기는 좀 그렇지만, 도진은 다르다. 아윤은 슬쩍 도진의 옆에 달라붙었다.
“안녕하세요?”
아까는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했기에, 인사부터 다시 했다. 그러자 도진이 무심한 얼굴로 아윤을 내려다보았다.
“저희 오랜만에 보죠?”
“네.”
“오늘 날씨도 좋고 촬영하기엔 딱이었던 것 같아요.”
“네.”
다른 사람이라면 물러날 정도로 싸늘한 단답이었으나, 상대가 누구인가. 아윤이 아니던가.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런데 현우 씨와는 어떻게 친해졌어요? 나도 친해지고 싶은데. 비결이 있나요?”
“……친해 보입니까?”
도진이 되물어왔다. 그 정도면 충분히 친한 거지! 누가 친하지도 않은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한단 말인가.
“네, 친해 보여요.”
도진이 시선을 돌려 현우를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눈에 어린 것은 아윤으로서는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름 눈치는 빠르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참 만에 부정의 답변이 나왔다.
“그럼요?”
“그저 죄를 갚는 중입니다.”
죄는 무슨 죄람. 그렇게 치면 아윤도 현우에게 죄를 갚아야 할 것이다. 그를 납치하기 위한 계획에 참여했으니 말이다. 아니면 뭔가 다른 이유라도 있는 것인가. 아윤은 생글생글 웃으며 태연하게 대화를 이었다.
“그럼 저도 갚아야 할 게 있겠네요. 어떻게 한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아윤은 주먹으로 손바닥을 내려쳤다.
“현우 씨에게 물어볼까요? 혹시 원하는 게 있는지?”
“지선우가 반기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도진이 옆에 붙어 있는 것도 마지못해 허락했다는 뜻이렷다? 어떻게 비벼 볼 틈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윤은 다른 사람을 시켜 근처 가게에서 음료 여러 개를 사 오라 일렀다.
그런 후, 종이 트레이에 담긴 음료를 들고 현우에게 슬쩍 접근했다.
“이제 가을이 다 되어 가서 그런지 좀 싸늘하네요.”
“그러게요.”
현우는 금방 말을 받아 주었다. 옆의 선우는 노려보고 있었지만, 딱히 제지를 하지는 않았다. 여기까지는 괜찮다는 것이다.
“음료수를 좀 샀는데 드실래요?”
“이미 마시는 게 있는데.”
“하나 더 마시면 되죠. 어떤 걸 좋아해요? 종류별로 있어요.”
그러자 현우가 호기심이 생긴 듯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 틈에 아윤은 슬쩍 가까운 곳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딸기라떼도 있고요, 핫초코도 있어요. 아니면 자몽에이드는 어때요?”
“자몽에이드요?”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아윤은 트레이에서 자몽에이드를 빼서 현우에게 건네주었다. 현우는 들고 있던 컵을 선우에게 넘기고, 자몽에이드를 받아들었다. 그리고 쭉 마셔보더니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씁쓸하네요.”
그러면서 계속 마신다.
“하지만 달기도 하고.”
“묘한 맛이죠? 그게 자몽에이드의 매력이죠.”
아윤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좋아, 이렇게만 가자. 그러면 며칠 사이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도진과 대화해 보길 잘한 것 같았다. 아윤은 슬쩍 웃으며 다른 음료도 빼 들었다.
*
토도독. 폰을 두드리는 손이 빠르다.
야, 그거 봤어? |
뭐? |
금요일 저녁에 하는 다큐멘터리 『인간 시대』. 거기에 지선우가 나온대. |
정말? 봐야겠다! S급 각성자의 이야기는 쉽게 보기 어렵지. |
그렇지. 그런데 예고편 보니까 뭔가 의미심장해. 못 보던 사람이 하나 더 나오더라고. |
누굴까? 지선우랑 붙어 다니던데. |
모르겠어. 호기심만 잔뜩 자극하고 말이야. 궁금해서 미치겠어. |
빨리 금요일이 되었으면 좋겠다! |
먼저 풀려난 예고편은 폭발적인 반응을 가져왔다.
보통 S급 각성자를 하늘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높이 있고 알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최초로 TV의 다큐멘터리에 나온 지선우 때문에 깨졌다.
각성자가 일반인에게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그 뒤로 각성자들의 방송 출연 횟수가 늘어났다. 지선우만큼의 열풍을 몰고 오지는 못했지만, 일반인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충분했다.
각성자를 좋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었으며, 어린이들은 장래 희망을 각성자라고 써내곤 했다. 그러나 지선우는 한 번의 다큐멘터리 이후엔 방송에 잘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에 안타까워했다.
그러던 와중에 『인간 시대』에 지선우가 나온다고 한 것이다. 그것도 정체 모를 다른 사람과 함께! 자연 호기심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금요일 빨리 안 오나?”
“아, 너도 『인간 시대』 보려고?”
“봐야지! 무려 지선우인걸. 이제 21살인데 세계에서 손꼽히는 S급 각성자잖아!”
“으으, 빨리 보고 싶다.”
“나도!”
예고편에 대한 반응이 폭발적이니, 『인간 시대』 전후로 들어가는 광고의 값도 하늘 모르게 치솟았다. 그러니 HBC는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아윤도 마찬가지였다.
“와와, 이것 봐. 오빠!”
아윤이 신난 표정으로 태블릿을 자윤 앞에 들이밀었다.
“반응이 죽여 줘!”
방방 뛰면서 하는 말에 자윤은 여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너라도 좋으니 됐다.”
“왜, 오빠는 안 좋아?”
“반응이 이렇게 좋다는 건, 그만큼 지선우의 인기가 높다는 거잖아.”
“그렇긴 하지.”
그런 면에서는 위기감이 느껴지긴 했다. 아윤은 슬며시 들이밀었던 태블릿을 회수했다.
“그래도 오빠 인기도 높아.”
“지선우만큼은 아니지.”
“가준 아저씨보단 높을걸.”
“그 사람은 그런 거 생각하고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잖아.”
그도 그렇다.
“좀 천상천하 유아독존이긴 하지.”
“그보다 1세대와의 면담 준비는 잘 되어 가?”
“응. 꼼꼼하게 질문할 걸 정리해 뒀어. 뭐든 대답해 준다고 했으니까,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좀 더 높은 곳으로 도약하고 싶다. 자윤도, 아윤도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었다. 고작해야 3위 길드에 멈추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철저히 준비하는 것은 당연했다.
“언젠가는 정상으로!”
“정상으로.”
우렁차게 외친 둘은 이내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시간은 예외 없이 흘렀다.
금요일 밤, 9시.
HBC 다큐멘터리 『인간 시대』.
방송 시작!
『지선우, 영웅을 조명하다.』
시작은 전에 방영되었던 다큐멘터리의 타이틀이었다. 과거 찍었던 다큐멘터리의 내용 일부가 빠르게 지나간다. 그리고 마지막, 무덤 앞에 하얀색 국화를 내려놓는 지선우에게 묻는다.
『만약에 형을 다시 만난다면 가장 먼저 어떤 말을 할 것 같으세요?』
그 말에 서글픈 표정으로 국화를 내려다보던 지선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형, 어서 와.』
카메라의 앵글이 바뀌고 회색의 묘비를 비췄다. 이어 그 위에 작은 무언가가 툭 떨어지며, 작은 원형으로 퍼져나갔다.
24.
눈물. 그것은 눈물이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S급 각성자가 보인 최초의 눈물.
이어 다시 바뀐 앵글이 하늘을 비추고 천천히 떨어져 내린다. 그러고는 저 멀리 멀어져 가는 선우의 뒷모습을 비췄다.
이어 음악이 흘러나오며 새로운 타이틀이 떠올랐다.
『영웅의 가족』
다시 배경이 바뀐다. 이번에는 포근하고 단정한 느낌의 스튜디오였다. 스튜디오 중앙에 놓인 의자에는 평소와는 다르게 편한 옷을 입은 지선우가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보이지 않는 리포터의 인사에 지선우가 마주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첫 번째 다큐멘터리로부터 2년이 지났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그 말에 지선우가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글쎄요. 잘 지낸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저에게는 하루하루가 지옥과도 같았기 때문입니다.』
『선우 씨는 S급 각성자에 모든 걸 가지셨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힘드셨나요?』
『모든 걸 가졌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에게는 단 한 가지, 부족한 게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이어 화면 한구석에 단어 하나가 떠올랐다.
[가족]
『형이요.』
『아, 기억납니다. 첫 번째 다큐멘터리에서 나왔었죠. 1세대 실종자라는 형 말입니다.』
시청률이 가파르게 치솟기 시작했다.
현우는 커다란 쿠션을 끌어안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TV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 있는 동생이 방송을 타는 걸 보니 신기했다. 그동안은 외부 방송을 거의 차단해 둬서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들었다.
“대단하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선우를 바라보니 어색한 표정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천하의 선우라도 형의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처음 방송에 나갈 생각은 어떻게 한 거야?”
“선현 길드의 이미지를 잡는 데 대중매체가 효과적일 거라는 결론이 나왔거든. 그리고.”
“그리고?”
“방송은 어디서나 볼 수 있잖아. 소문도 빨리 퍼지는 편이고. 혹시 형이 지구 어딘가에 있다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
“윽.”
현우는 끌어안고 있던 쿠션을 놓고 선우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직도 다른 곳을 보는 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선우는 알아서 고개를 숙여 높이를 맞춰 주었다.
‘망할 요정.’
더 빨리 올 수 있다면 좋았을걸. 동생이 이렇게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난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그놈의 요정 때문에 동생을 지켜 주지도 못하고, 자라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혹시 어릴 적 사진 있어? 중학생 때나 고등학생 때 찍은 사진.”
졸업앨범을 기대하고 묻자 선우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없는데. 각성 이후엔 학교를 다니지 않아서.”
그 말에 현우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면 공부는!”
“나중에 검정고시는 봤어. 봐 두면 좋다고 해서.”
“학창 시절의 추억은?”
“딱히 필요하지 않아서?”
필요하지 않은 게 어딨어! 현우는 치솟아 오르는 울분을 삼켰다. 만약 옆에 있어 줄 수 있었다면 선우가 제대로 학교를 졸업하도록 도울 수 있었을 텐데.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신은 이곳에 없었다. 그게 너무나도 속상했다.
아무래도 다음에 요정을 만나면 사지를 찢어 놔야 할 것 같았다.
“난 진짜 괜찮았어.”
선우는 계속 괜찮다고 말했지만, 쉽사리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보다 방송이나 마저 보자. 나 나오는데 안 볼 거야?”
“……봐야지.”
현우는 다시 시선을 TV로 돌렸다.
화면 속의 선우는 담담하게 말을 잇고 있었다.
『네, 저에게는 단 하나뿐인 가족입니다.』
이번에는 아래에서 다른 글씨가 떠올랐다.
[성실하고, 다정한]
화면은 내내 그렇게 흘러갔다. 지나치게 음울하지 않게, 그렇다고 너무 밝지도 않게. 하지만 그게 외려 사람들의 가슴을 두드렸다.
『형이 사라졌을 때 나이가 어떻게 되셨나요?』
『11살이었습니다.』
『보호자는요?』
『없었습니다. 제 유일한 보호자는 형이었습니다.』
『그러면 형의 나이는요?』
『15살이었습니다.』
고작해야 중학교 2학년생. 그러나 그 어린 소년은 더 어린 동생을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아침마다 신문 배달을 다녔으며,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애썼다. 그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동생을 생각하며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으아.”
현우는 쿠션으로 얼굴을 가렸다. 동생의 이야기는 괜찮았는데, 본인의 이야기가 나오니 부끄러워졌다.
“보기 힘들어.”
얼굴을 가린 채 웅얼거리자 선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좋은데?”
“너무 추켜세우는 것 같단 말야.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아니야. 형은 충분히 노력했어.”
선우의 말에 속이 울렁거렸다.
“정말 내가 충분히 노력했다고 생각해?”
“응.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자랐지.”
정말 자신의 동생은 어쩜 이리 기특하고 상냥한 걸까. 현우는 쿠션에 고개를 묻은 채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우가 그 손을 마주 잡아 주었다.
그래, 예전에도 이랬다. 힘들어서 무너지고 싶을 때마다 선우는 형의 손을 꼭 잡아 주곤 했다. 그러면 다시 힘이 솟아났다.
“마저 보자.”
“응.”
둘은 다시 방송에 집중했다.
『그런 형이 사라졌을 때, 어땠어요?』
선우가 손으로 턱을 부드럽게 쓸더니 입가를 가렸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언제나 형이 곁에 있어 줄 거로 생각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에는 무작정 기다렸습니다.』
차가운 방 안에서 이불을 덮어쓰고 기다렸다. 하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뭔가 큰일이 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밖으로 나서서 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러도, 불러도 형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보호자가 없는 어린아이, 선우는 오래지 않아 집주인의 신고로 고아원에 가게 되었다. 가지 않겠다고 버텨 보았지만, 힘없는 어린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포털이 열렸고, 그 근처에 있던 1만의 사람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끔찍한 사건이었죠.』
『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사건이네요.』
수많은 실종자가 생겼고, 많은 사람이 슬픔에 빠졌다. 그리고 이후, 2세대가 실종되었다 돌아오면서 각성자의 세계가 열렸다.
『만약에요. 정말 만약에 형이 돌아온다면, 어떤 기분이실 것 같으세요?』
『더없이 기쁠 겁니다.』
[마지막 인터뷰로부터 2년]
화면이 전환되며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카메라에 모습을 드러낸다. 단정하게 차려입은 청년은 무척이나 순한 인상이다.
『안녕하세요.』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네, 제 이름은 지현우. 현재 25살입니다. 그리고 1세대 실종자이기도 하지요.』
하늘 모르고 치솟았던 시청률이 더 올라갔다.
댓글
- 지금 내가 뭘 본거지?
- 1세대 실종자라고?
- ?????
- 거짓말!
HBC 방송의 게시판이 터져나갈 듯 들썩였다. 아니, 터져나가는 건 방송국의 게시판만이 아니었다. 인터넷에는 관련 정보가 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고, 어느 곳이건 1세대의 이야기로 넘쳐났다.
댓글
- 이게 가능한 이야기야?
- 주작 아냐?
- 설마, 지선우가 거짓말을 할 리 없어! 게다가 HBC 방송이잖아? 공영방송이라고?
다들 놀라서 이야기하는 와중에도 방송은 착실하게 송출되었다.
리포터는 여전히 차분한 어조로 질문을 이어나갔다.
『1세대면 10년 전 실종자, 맞지요?』
『맞습니다.』
『그러면 지선우 씨의 형, 맞지요?』
『그도 맞습니다.』
[돌아온 형]
이어 화면이 다시 전환되고, 이번에는 형제가 나란히 모습을 비췄다.
『처음 형이 돌아온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기뻤습니다.』
『형은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10년이면 서로 많이 변했을 텐데, 한 번에 알아보셨나요?』
『네, 세월이 얼마나 지나건 형은 형이니까요.』
『대단하시네요.』
리포터는 자극적이거나, 사람들에게 반발을 살 만한 질문은 하지 않았다. 그저 시종일관 비슷한 어조로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대담이 끝나자 두 형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선현 길드 내에 둘이 머무르는 방을 보여 주고, 일상을 살짝 엿본다. 그런 다음에는 감독이 찍은 회심의 장면을 풀어놓았다.
과거의 집으로 돌아온 형제. 그들은 비탈길을 올라 낡고 작은 집에 도달한다. 그리고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집을 보며 처음으로 눈물을 내보인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사람들은 넋을 잃고 화면에 눈을 고정했다. 그렇게 눈물을 빼는 구간을 지나고 나서는, 낯선 일상에 젖어 드는 형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뭐야, 이렇게 변했어?”
어디를 가건 현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많은 것이 변했다. 게다가 사라지기 전에도 어린 나이였기에 겪어 보지 못한 것이 많아,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런 형의 곁을 지키고 선 선우는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얼핏 보면 형제가 뒤바뀐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댓글
- 귀엽다!
- 형제가 둘 다 잘생겼네.
- 그런데 그럼 다른 1세대는 어떻게 된 거야?
- 그러게. 그건 궁금하네. 일부러 말 안 한 건가?
- 대놓고 말할 건 아니지 않아?
- 내가 아는 사람이 있는데, 1세대 실종자 유족 연합하고 대담을 하기로 했대.
- 그게 정말이면 다행이고. 그런데 보다가 운 사람 없어? 난 너무 울어서 휴지를 다 썼다.
- 나도. 보다 보니 눈물이 나오더라고. 그렇게 어렸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여기저기서 선우와 현우의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아마 한동안은 어디서나 이 이야기로 떠들썩할 것이다.
25.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현우가 볼멘소리로 항의했으나, 이미 방송은 나가고 난 뒤였다.
“잘 만들었네.”
선우는 다 보고 난 뒤에 감상을 말했다. 이미 최종 편집본을 보긴 했지만, 다시 봐도 완벽했다. 자극적인 이야기는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러게.”
일단 이렇게 첫 발자국을 떼었다. 한동안은 계속 방송 출연이 이어질 것이다. 물론 언제까지나 그렇게 지낼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때에 끊어내야 해.’
물론 그 과정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여전히 1세대인 형을 노리고 있었고, 대중의 관심이 끊어지는 순간 거리낌 없이 나설 것이기 때문이었다.
*
다큐멘터리 방송 후 반응은 두 가지로 갈렸다. 긍정적인 반응, 부정적인 반응. 물론 긍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렇다면 부정적인 반응은 묻어 버리면 된다. 아윤은 그쯤 되어 정보를 풀었다.
‘좋은 일 많이 했네.’
선우는 자신 또는 선현 길드를 내세워 좋은 일을 많이 했다. 대충 조사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파고드니 미담이 쏟아져 나왔다.
‘일단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재단을 세웠지.’
이 재단은 실종자 가족을 도움과 동시에 어려운 환경에 처한 아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원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선현 길드를 좋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연일 선현 길드와 형제의 이야기가 뉴스를 탔다.
“남 좋은 일만 한 건 아닌가, 몰라.”
아윤은 투덜거리며 선현 길드에 들어섰다. 내일은 실종자 가족과의 대담이 있는 날이었다. 그 전에 미리 이야기를 듣고 입을 맞춰 두기 위해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활발하게 회의실로 들어서자, 그 안에 있던 이들이 아윤을 돌아보았다.
지선우, 지현우, 한도진, 서찬영.
‘화려한 구성이네.’
물론 아윤도 어디 가서 밀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 먼저 이거 받으세요.”
아윤은 도착하자마자 종이뭉치를 하나씩 나눠 주었다.
“예상 질문 리스트예요. 참고로 이건 미리 약속한 만남 횟수에 포함되는 거 아닙니다? 필요해서 적은 질문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먼저 질문을 훑어봐 주세요.”
「더 살아남은 다른 사람이 있나요?」
「그곳의 환경은 어땠나요? 힘이 없는 것 같은데 거기서 어떻게 살아남으신 건가요?」
「기억나는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런 질문들이 지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자연 질문을 바라보는 선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굳이 이런 걸 물어야 합니까?”
“상대는 실종자 가족이라고요. 가족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더한 것도 물어볼걸요.”
선우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형은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어쩔 수 없다니까요. 자, 그럼 시작해 보죠!”
질문자는 아윤이었다.
“더 살아남은 사람이 있나요?”
“없어요.”
“어떻게 혼자서만 살아남았나요?”
운이 좋아서, 그리고 강해서.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기에 대응할 핑계가 필요했다. 현우는 발치에서 꾸벅꾸벅 조는 케로를 들어 책상 위에 올렸다.
토실토실한 포메라니안같이 생긴 강아지가 그러고 있으니 오죽 귀여우랴. 아윤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귀여워!”
저번에는 촬영에 신경 쓰느라 바빠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자세히 보니 무척 사랑스러웠다. 아윤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한번 만져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동그란 눈이 반짝 떠지더니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으르르릉.”
고작해야 작은 강아지일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더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몸을 잠식해 나갔다. 그쯤, 현우가 강아지의 머리를 탁 쳤다.
“그만해, 케로.”
동시에 압박감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평범한 강아지가 아니네.’
아윤은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 사이 케로를 들어 올린 현우가 말했다.
“소개할게요. 케로베로스, 케로입니다.”
소개가 끝나기 무섭게 작은 케로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기 시작했다. 상당히 넓은 회의실인데도 좁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 어어?”
아윤은 의자를 빼고 뒤로 물렀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달아날 생각이었다.
“괜찮아요. 안전해요.”
그런 아윤에게 현우가 웃으며 말했다.
‘안전해 보이지 않는데요!’
계속 자라나던 케로가 성장을 멈춘 순간,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가 셋에 울끈불끈 근육질의 몸을 가진 몬스터는 그 자리에 서서 몸을 길게 폈다. 그 때문에 회의실에 있던 책상과 의자가 밀려 넘어졌다.
“그만, 그만!”
현우가 그런 케로의 다리를 찰싹찰싹 때렸다.
‘저러다 물리면 어쩌려고!’
아윤은 겁에 질렸으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거대한 몬스터는 얌전히 다리를 오므리고 그 자리에 웅크리고 앉았을 뿐이었다.
“다시 소개할게요. 케로예요. 다른 세상에 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테이머세요?”
“아뇨, 테이머는 아니고요.”
“그런데 어떻게 몬스터를 다루세요?”
아윤의 질문에 현우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계는 인간이 살기 힘든 곳이었지만, 몬스터라고 살기 편한 곳도 아니었다. 언제나 투쟁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몬스터라도 다치는 일이 많았다.
케로베로스는 그런 몬스터였다. 누군가에게 다쳐서 쓰러져 있던 케로베로스. 그리고 그런 케로베로스를 치료해 준 현우. 이후 케로베로스는 현우를 지켜 주기 시작했다. 그런 미담이었다.
물론 실제는 달랐다. 케로베로스가 사경을 헤맬 정도로 때린 것은 현우, 간신히 회복되자마자 끌고 다니며 탈것으로 이용한 것도 현우였다. 그냥 간만에 특식을 먹어 보고자 인간을 건드렸다가 지옥을 맛본 케로베로스의 서글픈 흑역사일 뿐이었다.
“그런 일도 가능하군요.”
아윤이 신기한 눈으로 케로를 바라보았다. 연극이긴 하지만 좋은 역할을 맡은 케로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개 낮춰! 천장 무너져.”
그 결과는 다시 다리를 찰싹 맞는 걸로 돌아왔지만 말이다.
“확인했으니 이제 원래대로 돌아가도 될 것 같아요.”
“네.”
“그런데 케로라고 했죠? 얼마나 강한 거예요?”
“그건 모르겠네요. 아직 여기서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를 다 몰라서요.”
“아, 그건 그렇겠네요. 그러면 실험해 보는 건 어때요? 몬스터는 이쪽에서 제공할 수 있어요. 어느 정도 강한지 알아 두면 좋지 않겠어요?”
새로운 정보에 아윤은 흥분했다. 하지만 뭔가를 더 진행해 보기도 전에 선우에게 가로막혔다.
“그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단호한 말에 아윤은 아쉬운 얼굴로 다시 질문지를 내려다보았다.
“네, 그럼 다음 질문을 이어 나갈게요. 기억나는 사람은 있으신가요?”
“몇몇은 기억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많았기에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합니다.”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죽은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사람이 많이 줄어들고 친해진 후에는 죽기 전에 유언을 들어 주는 게 가능했지만, 그전에는 불가능했다.
과거를 떠올린 현우의 어깨가 살짝 흔들렸다. 모든 것을 잊고자 했지만, 전부 잊혀진 건 아니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그 약이 완벽하게 모든 것을 치료해 주진 않았다.
선우는 그런 현우의 어깨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의 온기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닿길 바라면서.
질문은 계속 이어졌다. 현우는 모든 질문에 성의껏 대답했다. 그렇게 긴 시간에 걸친 연습이 끝나자, 지쳤다.
“쉬고 싶어.”
“그러면 올라갈까.”
“응.”
현우는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선우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선우는 그런 현우를 안아 들었다. 회의실을 나서는 그의 뒤로 케로가 쫄랑쫄랑 따라갔다.
도진은 그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대답하는 내내 떨리던 어깨를 그도 감싸 주고 싶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실종될 당시 예원의 나이는 18세. 그리고 현우의 나이는 15세였다.
여동생인 예원보다 어린 나이였다. 그런 아이가 혼자서 살아남아 10년 만에 돌아오기까지, 어떤 일을 겪었을지.
저지른 죄를 갚기 위해 지켜 주겠노라 생각했는데,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안 따라가요?”
혼자 남아 있던 아윤이 도진에게 물었다.
“잠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하긴 지금은 지선우에, 케로라는 몬스터까지 붙어 있으니 안전하겠네요. 애초에 선현 길드 본사에 쳐들어올 미친놈이 몇이나 되겠느냐마는.”
아윤은 책상 위에 놓인 질문지를 톡톡 치더니, 다시 말을 꺼냈다.
“대단한 것 같아요.”
도진은 대답도 없는데, 혼자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 어린 나이에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져서 살아남은 거잖아요. 난 그 나이 때 친구들과 놀러 다녔는데. 상상도 되지 않네요.”
아무리 냉정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아윤은 한숨을 쉬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준비는 대충 끝났으니 내일을 대비해 봐요.”
나올 만한 질문은 다 뽑아왔지만, 어디까지나 가상의 질문일 뿐이었다. 실제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디 이성적으로 질문만 할까.
‘아니.’
아윤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더 많은 대비를 해야 했다. 아직 딱히 친해진 건 아니지만, 현우가 망가지는 걸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원래 이렇게 마음이 약하진 않은데.’
기지개를 쭉 켜고는 그대로 회의실을 나섰다. 그렇게 아윤이 나가는 와중에도 도진은 여전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