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정말 초식 동물 같네.’
가준은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때,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잠시 귀를 의심했다. 그러다 혹시나 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쯤 기절한 텔레포터 하나, 좀 떨어진 곳에서 문을 지키는 길드원 둘. 그 외에 이 공간에 있는 사람은 가준과 1세대 실종자뿐이었다.
“나다.”
1세대 실종자가 가준을 노려보며 이를 드러냈다. 그래 봤자 귀여운 송곳니, 조금도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
기가 막혔다. 가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1세대 실종자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이 자그마한 게 뭐라고 한 것인가.
“아픈 거 좋아하냐고?”
1세대 실종자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넌 좋아하냐? 모르겠다면 내가 알려 주지.”
1세대 실종자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어 북 터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화끈거리는 통증이 배에서 느껴졌다.
“쿨럭!”
가준은 기침을 하며 그 자리에서 무너져 내렸다. 뭐지?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장기까지 으깨지는 듯한 통증이었다. 애써 통증을 참고 위를 올려다보니 사슴 같다고 생각한 순한 얼굴이 웃고 있었다.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현우는 태연하게 자신을 협박하는 덩치를 보며 머리에 열이 오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 화난 거, 무척 오랜만이었다. 마계에선 하도 이놈 저놈 쥐어 패놔서 덤벼드는 이들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오랜만의 신선한 경험이었다.
이렇게 새로운 경험을 준 이에게 보답해야 하는 게 아닐까?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리고 힘차게 배를 후려쳤다. 그래도 현대에서 살인은 안 된다는 기억은 남아 있기에, 죽지 않을 정도로 쳤다. 장신의 몸이 현우보다 낮아지며 기침을 토해 냈다.
현우가 으르렁거리듯 물었다.
“아프냐?”
남자는 대답 없이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무너진 몸을 바로 세우며 경계 태세를 하고, 독을 살포하기까지 물 흐르듯 동작이 이어졌다. 제법 실력이 있는 남자였다. 그게 덜 처맞는단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독쟁이네?”
“시발! 누가 독쟁이!”
독이 더 강해졌다. 하지만 남자에게는 불행하게도 현우는 어지간한 독은 통하지 않는 몸이었다. 더불어 마계로 간 초기에 독 때문에 무척 고생해서 독을 싫어했다. 절로 주먹에 감정이 실렸다.
훙!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주먹이 휘둘러졌다. 그리고 남자는 그걸 피해 냈다!
“와, 이걸 피하네?”
보통은 보고도 피하지 못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미리 대비하고 있었던지 어떻게 피해 냈다. 간만에 때리는 맛이 있는 놈을 만난 것 같았다. 현우는 주먹을 으득 쥐고서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이어 다리가 허공을 가르는 순간, 벽이 터져 나갔다. 남자가 그대로 벽을 무너트리고 밖으로 몸을 뺀 것이었다. 그러나 그걸 그대로 놔두면 재미없지. 현우는 이를 드러내며 짐승처럼 웃었다.
남자가 뛰쳐나간 벽 사이로 몸을 빼내자, 골목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 막 빛이 쏟아지는 거리로 뛰쳐나가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현우는 잽싸게 그 뒤를 따라 몸을 날리며 그의 뒷덜미를 잡았다.
“잡았다.”
쿵!
사람이 사람을 깔아뭉개는 거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났다.
“씨발!”
제법 독기가 있어 맞는 족족 반격하려고 애썼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현우와 남자의 실력 차는 컸으니까.
“꺄아악!”
마침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현우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자, 그사이에 남자가 몸을 비틀어 빠져나갔다. 그리고 재빠르게 가까운 건물 벽을 박차고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다면, 현우도 할 수 있다.
현우는 금방 몸을 위로 끌어 올렸다.
“도망가네?”
“씨발, 너 뭐야!”
퉤. 남자는 피가 섞인 침을 뱉었다.
“알잖아?”
“1세대 실종자.”
“맞아.”
“그런데 이렇게 세다고? 2세대와 3세대도 이렇게 차이가 나진 않아!”
내가 알 게 뭐람. 현우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둥그렇게 휘었다.
“뭐,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조금만 더 맞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는 다음 건물로 건너뛰었다. 제법 너비가 있는데 하는 행동에 망설임이 없다. 현우는 그 뒤를 따라 뛰면서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백화점을 처음 구경했을 때에 느꼈던 두근거림. 그것과는 질이 다른 느낌이었다. 마계에서 사냥을 할 때 느끼던 그 격렬하던 감정, 그 감정이 되살아났다.
“하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남자를 다시 따라잡는 것도 금방이었다.
“시!”
남자가 현우에게 걷어차이며 말을 이었다.
“발!”
곧바로 굴러서 피하며 현우의 발을 잡아채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외려 한 번 더 거세게 차였다. 현우는 손가락을 들어 이마 옆을 톡톡 두드렸다.
“아까 뭐라고 했더라? 손톱을 뜯어내고.”
그대로 남자의 가죽 장갑을 잡아당겨 벗겼다.
“각막을 걷어 낸다고 했나?”
겁도 없지. 상대가 누군 줄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나. 현우는 어리석은 남자에게 작은 교훈을 주기로 하였다.
“시발, 억울하면 너도 뽑던가.”
그러면서 치켜뜬 눈이 사납다. 아, 생각났다. 마계에서도 이런 놈이 하나 있었다. 하도 덤벼들길래 몸을 망가트렸더니 기어서라도 덤비려고 했다. 그게 짜증 나서 좀 더 손을 봐줬는데, 그래도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했더라? 손이 남자의 목으로 향했다.
맞아, 죽이려고 했었다.
‘그렇지만 안 되지.’
작은 교훈은 작은 교훈으로 그쳐야 했다. 여기가 마계가 아니란 걸 잊어서는 안 됐다. 현우는 아쉬운 표정으로 손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남자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세차게 후려쳤다. 버티고 있던 몸이 벌러덩 뒤로 넘어가며 코피가 터졌다. 이미 피범벅이던 얼굴이 더 엉망이 되었다.
“너, 이름이 뭐냐.”
남자, 독쟁이가 목소리를 쥐어 짜내 물었다. 참 빨리도 묻는다. 현우는 이대로 가 버릴까, 하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현우.”
“1세대는 다 너같이 강해?”
“아니.”
강하고 뭐고 1세대는 현우 혼자 남았다. 그러니 강함을 측정할 대상이 없었다.
“시발, 그나마 다행이네.”
“욕은 그만하고.”
다시 손을 올리자 그제야 나불대던 입이 다물린다. 이제 이걸 어떻게 하지. 문득 내려다본 아래쪽에서는 소란이 일고 있었다. 건물 위를 사람 둘이 날아다니며 날뛰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현우는 머리를 긁적이다 독쟁이를 돌아보았다.
“이거 어쩔 거야?”
“뭘?”
아래를 가리키자 독쟁이가 얼굴을 구겼다.
“해결할 수 있지?”
그러면서 주먹을 흔들어 보이자 독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운동 거리도 못됐지만, 그래도 간만에 움직였더니 나름 개운하다. 현우는 나오지도 않는 땀을 닦으며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켰다.
“간만에 몸 좀 풀었네.”
그 말에 엎어져 있던 독쟁이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그런 그에게 다가가 바로 앞에 주저앉은 현우는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 참고로 이번 일은 무덤에 갈 때까지 비밀로 하는 거다?”
“그런 게 어디 있.”
“여기 있지. 싫어?”
현우는 주먹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그렇게 사람을 개 패듯 팼는데 손에는 피 한 방울 묻어 있지 않다. 그게 더 오싹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가준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1세대 귀환자를 잡기 위해 왔는데, 되레 본인이 처맞았다. 얼마나 맞았는지 몸이 떨려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내 이름은 도가준이다. 기억해.”
“내가 왜?”
가준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을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방금 전에도 욕을 하다가 한 대 더 맞았기 때문이었다. 주먹도 작으면서 얼마나 매서운지. 맞으니 골이 흔들렸다.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너무 떨려서 땅을 두 손으로 짚고 나서야 겨우 일어설 수 있었다. 몸을 세운 가준은 떨리는 손으로 피범벅이 된 얼굴을 훔쳤다. 죽을 맛이다.
‘장기도 좀 다친 모양인데.’
조금만 방심해도 피를 토할 것만 같았다.
‘지선우랑 싸울 때도 이렇게 처맞진 않았는데.’
기분이 개 같았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던 가준은 문득 현우의 시선을 느끼고 비아냥거리듯 말했다.
“왜, 더 패게?”
“아니.”
현우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이미 팰 만큼 팼는걸. 더 맞고 싶어?”
“사양하겠다.”
순해 보이는 얼굴이 새삼 두렵게 느껴졌다. 저런 게 사슴은 개뿔. 그랬다가는 생태계가 망가질 게 뻔했다.
가준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잠겨 있는 옥상 문을 발견하고 뜯어냈다. 올라올 때는 벽을 타고 올라왔지만, 똑같이 내려갈 기운도 없었다. 힘없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자니, 옆에 현우가 붙었다.
“너.”
“왜?”
“돈 있냐?”
“있지.”
“그럼 내놔.”
이젠 삥도 뜯냐. 말없이 지갑을 건네니 안에서 만 원짜리 하나를 빼곤 돌려준다.
“차비가 없어.”
태연하게 말한 현우는 만 원을 접어 옷 주머니에 넣었다.
“가는 길은 알고?”
“길드 이름 알면 다 되는 거 아닌가?”
“여기 선현 길드랑 거리 멀어.”
그 말에 현우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되돌아섰다.
“많이 머냐?”
“많이 멀지.”
“그럼 데려다 놔.”
“싫다면?”
그 말에 현우가 주먹을 들어 보였다. 자그마한 게 왜 이리 폭력적인지 모르겠다. 가준도 폭력으로는 어디서 지는 사람이 아닌데 말이다.
“알았다. 데려다주지.”
먼저 손을 든 이는 가준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외면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었을 뿐이다. 방금 전까지 현우와 붙어서 싸워 지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1대 1의 상황에서였다.
10.
가준은 버릇처럼 턱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그러다 신음을 내뱉었다. 시발, 턱도 아파. 어찌나 구석구석 팼는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사람이 좀 더 늘어나면 어쩌려나.’
다행히 미리 차고 있던 전자 기기들은 망가지지 않았다.
‘운이 좋았군.’
사람을 더 동원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강자라도 수가 많으면 지치기 마련이다. 거기에 자신이 낀다면 좀 더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시선을 느꼈다. 그리로 고개를 돌리니 현우가 가준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이, 시선이 지나치게 소름 끼친다.
“허튼 생각은 하지 마.”
조용한 목소리가 계단 사이로 울려 퍼졌다.
“죽는다.”
문득 가슴이 조여 왔다. 알 수 없는 공포가 똬리를 틀고 가준을 압박하는 느낌이었다. 저도 모르게 기기에서 손을 떼자, 압박감이 줄어들었다. 가준은 애써 태연한 척하려 애쓰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나? 선현 길드가 어떤 조건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두 배로 주겠다.”
그 말에 현우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내 얼굴 보고 뭐 떠오르는 거 없어?”
가준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사슴.”
“뭐?”
“사슴 생각난다고.”
“누가 사슴이냐?”
“너. 작은 사슴 같아.”
이 부분에서 가준은 당당했다.
“평균 성인 남성 키거든?”
“각성자들 사이에선 작은 편이지.”
“내가 너보다 더 세.”
“외양과 강함은 상관이 없지.”
“아오!”
순간 더 맞게 될까 봐 움찔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남에게 굽히고 싶진 않았기에 등을 펴고 버텨 냈다.
“됐다.”
“뭔데?”
“나중에 직접 알아봐. 난 힌트를 다 줬어.”
무슨 힌트를 줬단 말인가. 가준이 기막혀하는 사이, 1층에 도착했다.
아래층에 내려오자, 백호 길드의 길드원 몇이 가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서 힐러이자 부길드장인 민영이 기겁한 표정으로 가준에게로 달려왔다.
“이게 무슨 꼴입니까? 지선우와 정면으로 맞붙었습니까?”
“지랄. 지선우랑 정면으로 맞붙었다고 이렇게 다칠 리가 있겠냐?”
“그럼 몸 상태가 왜 이렇습니까?”
“됐고. 치료나 해.”
민영은 한숨을 쉬며 가준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러자 엉망이 되었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어 가기 시작했다. 이어 새로 옷을 갈아입고 나니 훨씬 나아졌다.
“가지. 데려다줄 테니.”
그 말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현우가 벌떡 일어서 따라붙었다.
“왕?”
케로는 현우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에, 인간이 현우 님을 끌고 갔어. 말 한마디로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했다.
‘공주님.’
키워드는 그것이었다. 공주님, 외워 둬야겠다. 뭐, 일단 그건 그거고. 중요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현우 님이 사라지자마자 이 자리에 도착한 선우의 상태가 너무 이상하다.
원래 저런 인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싸늘하게 가라앉은 모습이 마계의 마왕님을 떠오르게 했다.
“형.”
한 손을 들어 얼굴을 감싼 선우가 재차 말했다.
“형.”
언뜻 보이는 눈을 보니 반쯤 맛이 갔다. 이러다 큰일 나는 건 아니겠지. 케로는 눈치를 보다가 선우의 곁으로 다가가 짖었다.
“왕왕!”
정신 차려. 현우 님은 되돌아오실 거야! 그러나 그 소리는 선우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걸 어떻게 하지? 현우에게 소중한 이는 케로에게도 소중했다. 왜냐하면 현우의 지랄 맞은 성미를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망가지면 가장 먼저 혼나는 게 누구겠는가. 자신 아니겠는가!
케로는 다급하게 선우의 바지 끝자락을 물어 당겼다.
“왕!”
내가 알아. 케로는 마계의 입구를 지키는 파수견이었다. 지금은 이런 모양새지만, 본신의 능력은 대단하단 소리였다. 거기다 현우와는 마계에서 상당히 오래 알고 지냈다. 그 말은 추적이 가능하단 소리였다.
케로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다가 냄새 맡는 시늉을 하곤, 다시 선우의 바지 끝자락을 물어 당겼다. 선우가 이해할 때까지. 차분하게 반복했다.
“형이 있는 곳을 아나?”
그 말에 케로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가 바닥으로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는 케로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안내해.”
아니, 어린 짐승의 목덜미를 함부로 잡으면 안 된다고. 케로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현우가 있는 방향을 향해 힘차게 짖었다.
“왕왕왕!”
그와 동시에 선우의 몸이 빠르게 앞으로 튀어 나가더니 벽을 뚫고 뛰었다.
‘다른 입구도 있지 않아?’
기막혔지만, 다른 방법도 없었기에 케로는 선우의 손에 들려 빠르게 이동했다.
‘그냥 내가 본체로 뛰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헌데.’
아직 그래도 되나 모르겠다. 그래서 케로는 내내 달랑 들려 갔다.
“길드장님!”
뒤에서 선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렇게 달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그들은 외딴곳의 도로에서 현우를 태우고 달려가는 차를 발견했다.
그를 발견한 선우는 곧바로 행동에 나섰다. 차의 곁에 붙어서 문짝을 뜯어내고,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형을 안아 들었다. 문짝이 떨어지자 얼마간 더 미끄러지던 차가 멈춰 섰다.
“형, 뒤에 있어.”
드디어 찾았네. 케로는 입을 벌려 하품을 했다. 그러고는 현우와 함께 뒤로 물러섰다.
‘아, 피 냄새.’
이미 한탕 하신 거 같은데. 저기 서 있는 선우란 인간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분노로 가득 차 있으니 뭔들 보일까. 케로는 그냥 얌전히 지켜보기로 했다.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그토록 형을 지킬 거라고 다짐했는데, 형을 놓쳤다. 다른 길드들이 연합할 거라는 건, 뻔히 알고 있었는데. 왜 방심했던 걸까.
선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나마 형이 데리고 다니던 작은 개가 냄새를 잘 맡은 탓에 다시 찾을 수 있었지만, 머리끝까지 치민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도가준.”
절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선우. 이 차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 건 줄 알아? 그걸 문짝을 부숴 놓아?”
도가준이 능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목젖을 뜯어 놓고 싶었다. 그러면 다시는 저렇게 말을 할 수 없을 테지. 선우는 손을 폈다 오므렸다.
“말이 많습니다.”
“내가 말이 많건 말건.”
“각오는 하고 이런 일을 저지른 거라고 믿고 있겠습니다.”
“무슨 각오?”
가준이 피식 웃었다.
“죽을 각오.”
그와 동시에 선우는 가준을 공격해 들어갔다. 순식간에 도로가 얼어붙고, 빠르게 회전하는 물방울들이 한 방향으로 폭사되었다.
그걸 차를 던져 막은 가준은 곧바로 독을 사용했다. 하지만 허공에 나타난 물방울이 곧바로 독을 흡수하여 가둬 버렸다. 그러더니 그 상태로 가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래서 선우와의 싸움은 짜증 난다. 딱히 상극인 능력도 아닌데 잘 맞아떨어지질 않는다. 독은 소용없으니 몸을 써야 하는데, 그는 몸을 쓰는 데도 엄청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바닥을 구르면서 제법 싸워 봤다고 생각했는데.’
곱게 자란 도련님처럼 생긴 선우에게는 이겨 본 적이 없다. 가준은 본인이 망가트린 차의 파편을 던지고는 그대로 선우에게 돌진했다. 그러나 그를 쉽게 맞아 줄 선우가 아니었다. 그는 날아오는 파편을 그대로 걷어내고 돌진해 온 가준에게 손을 휘둘렀다.
다리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지고 싶지 않아서 가준은 이를 악물고 움직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러하듯이, 가준은 선우를 넘어설 수 없었다. 추위에 점점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맞는 횟수가 늘어나고, 결국엔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되었다.
‘재수 없는 날이네.’
하루 내내 처맞기만 했다. 치료받자마자 무리하게 움직인 몸이 욱신거렸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가준은 중지를 세우며 가진 것 중 가장 강한 독을 퍼트렸다. 그와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평소에 선우는 가준이 덤벼들면 상대해 주긴 했지만, 어느 정도 선을 두는 편이었다. 인간들의 세계는 각성을 위해 끌려갔던 마계와는 달랐으니까.
“어딜 가려고 합니까?”
무뚝뚝한 목소리가 이어지며 선우가 가준의 목으로 손을 뻗었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간 손끝이 목에 상처를 냈다. 화끈한 통증에 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더 뒤로 물러섰다.
조금만 늦었어도 목을 뜯겼을 것이다.
“와우. 오늘따라 적극적이네?”
차갑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던 선우가 가준을 노려보았다.
“당신이 자초한 겁니다.”
“그래, 어디 죽을 때까지 해 보자.”
가준은 히죽 웃으며 다시 자세를 바로 잡았다. 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셔츠를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막 둘이 다시 부딪치려는 순간,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던 현우였다.
“왕왕!”
현우 님이 배고프시단다! 당장 밥을 대령해라! 케로도 덩달아 짖었다.
“배고파?”
반쯤 돌아갔던 선우의 눈동자가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응, 밥 먹으러 가자.”
현우가 익숙하게 케로를 잡아 올렸다. 그걸 본 선우는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내렸다.
“허?”
반대편에서 서 있던 가준은 그런 선우를 보며 기가 막혔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던 그가 다른 사람이 한 말을 듣고 태도를 달리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뭐 먹고 싶어?”
“치킨이 먹고 싶은데.”
“맛있는 치킨 집을 알아.”
심지어 보면 현우가 주도권을 잡은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1세대 실종자에 강자라 하더라도, 선우가 저럴 성격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가준은 의문을 가졌다.
11.
“너희 둘 무슨 사이냐?”
가준의 질문에도 선우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폰을 꺼냈다. 하지만 휴대폰은 이미 망가진 상태였다.
“난 휴대폰 멀쩡한데.”
가준이 보호 케이스 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두 손가락으로 들어 보였다.
“내놓으십시오.”
“깡패냐. 질문에 대답하면 줄게.”
선우가 귀찮다는 듯이 눈썹을 휘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 싸웠다가는 형의 배고픔이 더 길어질 수도 있었다.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뭐라고 물었습니까?”
“둘이 무슨 사이냐고.”
그러자 선우가 의아하단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보면 모릅니까?”
“모르겠는데.”
“형제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선우가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뭐?”
“형제라고요.”
“형제?”
안 닮았잖아! 가준은 몇 번이나 둘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그사이 선우가 가준의 손에서 휴대폰을 채 가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길드장님!
“부길드장. 주소 부를 테니 여기로 차 한 대 보내 주십시오.”
─ 네,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니, 그보다 괜찮으십니까? 다른 길드가 공격해 왔다면서요!
전화 저편에서 당황한 찬영이 우다다 질문을 쏟아 냈으나, 선우는 주소만 말하고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뒤로 던졌다. 그를 간신히 받아 든 가준이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진짜냐.”
“진짜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제가 대답을 해 줄 의무는 없는 것 같습니다만.”
“그럼 저쪽이 동생이야?”
가준이 현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형입니다.”
“아, 형. 형이라고?”
가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까 현우가 작다는 말에 보였던 살벌한 눈길을 기억하고 있는 탓이었다.
아니, 방송에서는 성실하고 착하고 좋은 형이었다며? 어디가? 그 형에 그 동생이라더니. 겉으로 내숭 떠는 것은 똑 닮은 모양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현 길드에서 보내온 차가 도착했다. 그 옆에는 바이크 하나가 따라붙었는데, 그 위에는 정장을 입은 찬영이 타고 있었다. 답답해서 직접 온 모양이었다.
“길드장님!”
애처로운 목소리가 선우를 불렀지만, 그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차에 현우를 태웠다. 그리고 자신도 맞은편에 탔다.
“먼저 가지.”
그 말과 함께 곧바로 차가 출발했다. 그렇게 차가 출발하고 남은 이는 찬영과 가준뿐.
“어라, 선현의 개 아냐? 버림받았네?”
“닥치십시오!”
찬영이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가준은 큭큭 웃으며 비웃는 걸 그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덤벼들고 싶었지만, 찬영은 자신이 가준을 이기지 못할 걸 알았다. 게다가 상대는 백호 길드의 길드장. 그로서는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었다. 그저 이를 갈며 이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럼 다음에 보자.”
가준이 인사를 들은 찬영이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바이크까지 떠나가고, 홀로 남은 가준은 몸에 달라붙은 먼지를 털어 내고, 반대편으로 걸어갔다. 그러다 휴대폰이 울림을 깨달았다.
─ 야!
“아, 혜선 누님.”
─ 어떻게 됐어? 왜 연락이 없어? 설마 혼자 먹으려는 건 아니지?
“아니, 제가 그럴 위인입니까?”
─ 그럼 뭐야!
“지선우에게 도로 뺏겼어요.”
─ 그걸 왜 뺏겨!
“누님도 지선우 혼자서는 오래 상대하지 못하시면서, 제 탓하시는 겁니까?”
─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지선우 추적 막으려고 되게 외진 곳으로 골랐잖아. 어떻게 온 거래?
“그러게요. 어떻게 왔을까요?”
─ 장난치는 거 아니거든?
“저도 아닙니다.”
─ 아이씨. 뭔가 다른 알아낸 거 없어?
가준은 잠시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없습니다.”
─ 진짜 하나도?
“네.”
─ 거짓말.
저편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치는 빠르네. 하긴 일부러 답을 늦게 했는데 모르면 바보다.
─ 뭔가 알아낸 거 있지? 알려 주면 나도 정보 하나 줄게.
“무슨 정보인데요?”
─ 평화 길드장에 대한 거.
“그 사람에 대한 건 누님이나 저나 아는 게 비슷하지 않습니까?”
─ 하나 더 알게 된 게 있어.
“뭡니까?”
─ 너 먼저.
까탈스럽긴.
“지선우와 1세대 실종자 지현우는 형제다. 다음 누님!”
─ 그런 거였어? 어쩐지 지선우가 기를 쓰고 보호하더라. 하마터면 괴수 입 안에 머리를 넣을 뻔했네.
이미 가준은 처넣고 신나게 두들겨 맞았다.
“뻔했네, 가 아니죠. 지선우 성격이라면 보복 들어올 텐데요. 당분간 몸 사려야 하겠습니다?”
─ 그렇지. 간만에 정보가 좀 들어오나 했더니. 이번엔 내 차례지? 평화 길드장 나보다 세더라.
“……누님보다?”
─ 그래. 지선우 붙든 거 거의 평화 길드장이었어. 난 제대로 붙잡지도 못했어. 그거도 전력 아닐지도 몰라.
새로운 정보였다. 갑자기 치고 올라온 것 치고 정보가 너무 없다 싶었는데, 그런 강자였단 말이지. 가준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당분간 해야 할 일이 많을 것 같았다. 가준은 아직 1세대 실종자를 포기한 게 아니었다. 딱 1명 되돌아온 사람이 그렇게 강한데 어떻게 쉽게 포기가 되겠는가. 궁금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강해졌는지, 왜 혼자서 돌아왔는지. 알고 싶은 것은 많았다.
‘다음번엔 더 주의해서 움직여야겠네.’
가준은 타고나길 뱀이었다. 음습하고 포기를 모르는 끈질긴 뱀. 그러니 상황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슬슬 지는 해 때문에 가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뱀처럼.
*
출발한 차 안에서 선우는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 형. 직접 식당에 가서 먹는 게 맛있는데, 그러기엔 아직 위험해.”
마음 같아서는 직접 식당에 데려가고 싶으나, 아직 위험은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길드원을 시켜 치킨을 포장해 오기로 하였다.
“난 괜찮아.”
어디서 먹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곳에 선우가 있는데. 현우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집에 빨리 돌아가자.”
현우의 말에 선우의 얼굴에 감동이 서렸다. 그곳을 집이라고 불러 주는구나. 당연한 그 말에도 가슴이 저렸다. 그동안의 노력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그럼 빨리 돌아가자.”
선우는 바로 옆에 앉은 형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어디 다친 데는 없지?”
“응, 멀쩡해.”
외려 다친 쪽은 현우가 아닌 가준 쪽이었지만, 그건 입 다물었다.
“정말이지?”
“응, 너도 괜찮아?”
“나는.”
선우는 잠시 눈을 굴리다가 대답했다.
“조금 아픈지도.”
“뭐? 어디?”
현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선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차가 급하게 멈춰 섰다.
끼이이익!
선우는 잽싸게 현우를 끌어안아 보호했다. 거칠게 멈춰 서긴 했지만, 운전기사도 각성자이기에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차가 멈춘 이유. 그건 차 앞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운전기사는 직업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서 무리하게 멈췄을 리는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이는 어디까지나 길드장인 선우니까. 그렇다면 다른 이유 때문에 멈춰 섰단 것이고,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는 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려섰다.
“형은 안에서 기다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운전기사가 단단히 각오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그는 현우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 들 것이다.
차에서 내려선 선우는 맞은편에 선 남자를 쏘아보았다. 장신에 낡은 후드티, 청바지를 걸친 남자는 허리를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었다. 아까 백화점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평화 길드의 길드장, 한도진. 그 정체를 눈치채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직 볼일이 남아 있습니까?”
운전기사는 이미 길드에 연락을 넣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찬영도 가까이에 있었다. 여러모로 그에게는 불리한 상황이다. 그런데도 도진은 다시 나타났다.
“죄송합니다만.”
도진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 말에 선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부탁을 이딴 식으로 합니까?”
“너무, 너무 급해서 그랬습니다.”
도진은 그리 말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부탁입니다. 원하신다면 어떤 대가라도 드리겠습니다!”
“필요 없습니다.”
선우는 단호하게 도진의 말을 잘랐다. 그에게는 부족한 것이라고는 형뿐이었는데, 그도 이미 충족되었다. 그런데 굳이 대가를 받아 가며 남의 부탁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바를 대충 짐작하고 있기에 더 그랬다.
“1세대 실종자를 만나고 싶습니다.”
“거절합니다.”
“잠시, 잠시… 하나만 물어보고 싶습니다.”
“거절합니다.”
“원하는 걸 모두 드린다고 해도 말입니까?”
“딱히 부족한 건 없습니다만.”
몇 차례나 거절했다. 그러자 도진의 등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에겐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1세대 실종자가 돌아가면, 다시 찾을 수 있을는지 몰랐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킨 도진이 곧바로 차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그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선우에게 가로막혔다. 기다란 다리가 우아하게 허공을 가르며 휘둘러졌으나, 도진은 피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면 큰일 나는 사람처럼, 두 팔을 교차하여 공격을 가로막았다. 그런 후, 다시 차를 향해 미친 사람처럼 달려들었다.
빠른 공방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막기만 하던 도진도, 이대로라면 끝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결국 그는 휘둘러지는 다리를 향해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12.
살과 살이 맞부딪친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난폭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어 선우는 다리를 회수하며 곧바로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S급 각성자답게 몸을 사용하는 것도 능숙했지만, 도진과 맞부딪치고 나서 깨달았다. 신체적으로는 그를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란 걸.
아무래도 도진의 능력은 신체와 관련된 모양이었다. 그러니 능력을 사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어졌다. 날카롭게 회전하는 물방울이 그에게 탄환처럼 쏘아졌으나, 또다시 강하게 주먹을 휘두르니 그대로 휘말리듯 터져 나갔다.
그사이 운전기사는 현우와 케로를 차에서 빼내 밖으로 대피시켰다. 차 안에서 공격을 받았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된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자연 현우는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직접 눈으로 보게 되었다.
‘음?’
자연스럽게 수준을 가늠해 보던 현우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선우에게 덤벼들고 있는 남자가 생각보다 강하다. 그동안 지구에서 머물며, 많은 대중 매체를 접해 왔다.
그 과정에서 선우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선우는 세계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강하다 하였다. 자연 한국에서는 가장 강한 게 되었다. 그런데 저 남자는 선우보다 윗줄로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선우를 해치려는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당장 움직이기엔 애매했다.
문득, 남자와 눈을 마주쳤다. 날카롭지만, 시원하게 뻗은 눈매. 백화점에서 보았던 남자였다. 하지만 더 이전에 그를 보았던 적이 있었다. 현우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가 살아오며 접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열다섯 살 이후엔 마계에서 지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계로 가기 전의 기억은 선명하지 않았다. 남아 있는 기억의 대부분은 선우에 대한 것이었다.
그럼 저 눈매를 어디서 봤던 걸까? 더듬고 더듬어 마침내 기억해 냈다.
“한예원.”
오랜 시간 동안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사람 하나가 떠올랐다.
한예원. 현우보다 세 살 많았던 소녀. 고등학교 2학년인 소녀는 제 앞가림도 힘든 상황에서 남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 특히 가장 어렸던 현우를 보살피려 애썼다.
현우가 그 이름을 내뱉자마자, 미친 사람처럼 돌진하던 도진은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 때문에 선우의 공격이 그대로 적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한예원, 예원이를 아십니까?”
다급히 말이 이어졌다.
“짧은 단발에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색이 옅은 편입니다. 키는 160 정도. 성격은 무척 밝고 명랑하며 남 돕는 걸 좋아합니다. 실종 당시 나이는 열여덟 살이었습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선우는 공격을 위해 들었던 손을 내렸다. 도진은 당장이라도 달려들고 싶은 표정으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외쳤다.
“그 아이도 1세대 실종자입니다!”
알고 있다. 내내 묻어 두었던 기억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당시 겪었던 끔찍한 상황들이 떠올랐다.
예원은 너무나도 착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마계는 착하다고 해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투에 관한 재능과 독기가 있어야 살아남았다. 그랬기에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무모하게 나선 전투에서 죽어 버렸다. 지금도 기억난다.
‘나한테 오빠가 하나 있는데.’
마지막으로 죽음의 자리를 지킨 사람은 현우였다. 평소 예원과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겉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이야. 내가 돌봐 줘야 하는데.’
피를 토하며 예원은 서럽게 울었다.
‘이제 지켜 주지 못하겠네. 오빠, 도진 오빠.’
언제나 강하게 보이려 애쓰던 예원이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아파, 나 아파.’
동생을 다시 되찾기 전까지는 울지 않으려 했다. 그랬기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그런 현우도 예원의 마지막에는 흔들렸다.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죽게 된 예원이 가엾어서, 자신도 저렇게 될까 두려워서. 울고만 싶어졌다.
‘괜찮아, 예원아. 나 여기 있어.’
그걸 참고 거짓말을 했다. 목소리를 속이려 애쓰며 예원의 오빠 시늉을 하였다. 아마 죽어 가는 예원은 알았을 것이다. 그 모든 게 현우의 어설픈 배려였다는 것을. 그런데도 예원은 마지막으로 웃으며 말했다.
‘오빠. 고마워.’
그게 예원의 끝이었다.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내내 잊으려 애썼던 죽음들이 현우의 속을 뒤흔들었다. 울렁이는 가슴을 손으로 내리누르며 애써 버텨 냈다. 선우 앞에서는 과거의 괴로움을 내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걸 눈치채서였을까? 선우가 단호하게 말했다.
“형, 무시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서. 현우가 아는 선우는 너무나도 다정한 아이였기에, 고개를 내저었다. 괴로워도 괜찮다. 지금은 선우를 만났으니까, 이 정도는 버텨 낼 수 있었다.
“아냐, 알아. 나 알고 있어. 한예원.”
그렇다면 저 남자는 보나 마나 그 사람일 터였다.
한도진. 한예원의 하나뿐이라던 오빠.
“그럼 그쪽은 도진이겠네.”
“……맞습니다.”
도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몇 번이나 망설이고,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예원이는, 예원이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겉은 냉정해 보이지만, 사실은 착한 사람이라. 예원이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현우는 도진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은 눈매 때문에 언뜻 보면 싸늘해 보였지만, 눈동자는 달랐다. 희미한 불빛 아래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는, 그만큼 깊고 아름다워 보였다. 현우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한예원… 예원 누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죽었어.”
도진의 눈이 일그러졌다.
“1세대 각성자는 나 하나뿐이야. 전부 다 죽었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도진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더니 이내 바닥으로 뚝 떨어져 내렸다. 바닥의 흙이 물기를 머금고 어두운 색으로 물들었다.
“으으.”
도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새끼 잃은 짐승이 우는 소리가 저리 서글플까. 그를 바라보는 현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으아아!”
그 자리에 무너진 도진은 주먹으로 땅을 내려치며 울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부모님은 어려서부터 도진을 싫어했다. 그가 말을 더듬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더듬는 멍청한 아이는 자신들의 자식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학대했다. 하지만 그런 도진을 3살 어린 여동생만은 버리지 않았다. 언제나 웃으면서 곁에 있어 주었다.
‘오빠!’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그래서 지켜 주고 싶었다. 지켜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어느 날, 한국에서 1만의 사람이 사라졌다. 그 인원 중에는 도진의 사랑하는 동생 예원도 있었다. 예원이 사라진 순간부터 도진의 세상은 지옥이 되었다. 모든 것이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그런 상황에서도 도진은 다시 일어서려고 버둥거렸다.
예원이를 찾아야 했으니까. 그날부터 발품을 팔며 일을 시작했다. 여동생을 찾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정보를 모았다. 그렇지만 그는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그쯤 다시 10만의 사람이 사라지고, 포털이 열렸다. 세상은 엉망이 되었지만, 도진은 포기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그때, 2세대 실종자 중 일부가 각성자가 되어 귀환했다.
‘돌아올 수 있는 거구나.’
희망이 생겼다. 희망은 도진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움직이고, 또 움직이고.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각성자가 되어 있었다. 힘을 손에 넣었고, 말더듬도 고쳤다. 이제 동생만 찾으면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각성자가 되니 정보를 모으기 훨씬 쉬워졌다. 쉬워졌지만, 개인이 모으는 데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길드를 세웠다.
이름은 평화 길드.
길드장이 되니 정보는 더 쉽게 모였지만, 그걸로도 예원을 찾을 수는 없었다. 1세대 실종자가 애초에 나타나지를 않았기 때문이었다. 몇몇 분석가는 그걸 가지고 이야기했다. 어쩌면 처음 사라진 1만의 사람은 운이 나쁜 샘플일지도 모른다고. 왜냐하면, 세대를 더해 갈수록 더 빠르게 실종자가 돌아왔으며, 더 많은 수가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1세대는 버리는 말이었다.
그게 다른 이들의 결론이었다. 그래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에 계속 정보를 추적했고, 마침내 1세대 실종자의 정보를 알게 되었다. 되돌아온 1세대 실종자가 있다.
‘같이 손잡도록 하지.’
나쁜 짓인 줄 알았지만 가준의 손을 잡았다. 1세대 실종자를 차지한 선현 길드가 그를 내보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수십 번 면회 요청을 넣었지만, 전부 거절당했다.
‘지선우 발목만 잡아.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 말대로 해 줬다. 하지만 가준은 실패했고, 도진은 다급해졌다. 다시는 1세대 실종자를 만나지 못하게 될까 봐. 이제 길드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1세대 실종자를 만나는 건 하늘의 별 따기가 되리라. 그래서 서둘러 그들을 찾았고 여기까지 왔다.
왔는데. 알게 된 소식은 기쁜 소식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여동생이, 소중한 존재가 죽었다 하였다. 온몸에서 힘이 빠졌다.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살아갈 이유가 있나?’
알 수 없었다. 도진은 멍하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점점 어두운 생각이 머릿속을 채워 가기 시작했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내 꺼내지 않았던 무기를 꺼냈다.
카라. 그가 던전에서 얻은 저주받은 단검. 보통보다 긴 도신을 가진 단검이 도진의 손안에서 회전했다. 이어 역수로 쥐어진 단검이 곧바로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그 목표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13.
콰직.
순식간에 단검을 내려찍었다. 하지만 도진에게는 어떠한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검이 뚫은 건 그의 몸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다급히 힘을 빼긴 했으나, 너무 늦었다.
당황한 도진은 고개를 들어 바로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1세대 실종자,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바로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런 그의 손에는 단검의 날이 잡혀 있었다.
“형!”
선우가 기겁하며 달려들고, 이어 도진도 빠르게 움직였다.
“이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단검의 날을 잡고 있는 손을 폈다. 이어질 상황에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카라는 저주받았으며, 그 무엇보다 날카롭고 단단하다. 무엇이든 손쉽게 베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 걸 힘도 느껴지지 않는 사람이 맨손으로 쥐었으니 걱정되는 것도 당연했다.
도진은 이를 악물고 손을 완전히 펼쳤다.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피투성이가 되어 있어야 할 손이 너무나도 멀쩡했다. 생채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멍하니 중얼거리는 사이, 펼쳐진 손이 회수되었다. 이어 달려온 선우가 다시 그의 손을 잡아 펼쳤다.
“형, 손이!”
“손은 멀쩡해. 중간에 힘을 뺐나 봐. 다치지 않았어.”
아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는데. 도진은 멍하니 자신의 단검을 바라보다가 그것으로 자신의 손을 그어 보았다. 힘을 주어 긋자 상처가 생기며 붉은 피가 흘렀다. 단검은 멀쩡하게 제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은 어떻게 된 거지?’
알 수 없었다.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부드러운 살이 닿아 왔다. 무언가 싶어 보니 1세대 실종자가 그의 뺨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뺨을 잡아당겼다. 힘도 없어 보이는데, 제법 아프다.
“피부가 탱탱해서 잘 당겨지지도 않네. 뭐 하려고 했어요?”
물어오는 말에 도진은 입을 다물었다.
“형!”
“나는 괜찮으니, 잠시만 기다려 봐.”
“위험해.”
“그리 위험해 보이진 않는데. 봐 봐, 이래도 가만있잖아.”
그러면서 다시 뺨을 잡아당겼다 놓는다. 이어 재차 물었다.
“뭐 하려고 했냐니까요?”
도진은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죽으려고 했습니다. 그 말 한마디 하기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예원이가 이걸 보면 좋다고 할 것 같아요?”
아니, 아니다. 예원이라면, 그 착한 아이라면 이 모습을 보면 울 것이다. 왜 오빠는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느냐고, 어째서 그런 행동을 했느냐고 나무랐을 것 같았다.
“아니, 아닙니다.”
“그럼 왜 그랬어요?”
따져오는 말에 도진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바로 앞에 있는 이는 예원이 아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할 일은 아닌데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재차 사과를 하자, 매섭게 눈을 뜨고 있던 그의 눈이 서서히 내려왔다.
“죽지 말아요.”
이어지는 말에 다시 눈가가 뜨거워져 왔다. 도진은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그에게 물었다.
“이름, 이름이 알고 싶습니다.”
“현우, 지현우.”
“현우 님.”
“그냥 현우라고 불러요.”
“현우.”
이름을 부르자, 현우가 잘했다는 듯이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그 잠깐의 손길에 어쩐지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어째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형, 이리 와.”
옆에서 내내 노려보고 있던 선우는 그런 현우를 잽싸게 안아서 끌어당겼다.
“그럼 이제 볼일은 끝난 겁니까?”
끝난 건가? 동생에 대해 알게 되었으니, 이제 모든 것이 끝난 건 맞았다. 하지만 쉽사리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죽었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 있었다.
“아직입니다.”
그 말에 선우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하지만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현우, 제가 당신을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현우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이유는 금방 떠올랐다.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가, 그를 생각하니 결론이 나왔다.
“예원이. 예원이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습니다.”
예원이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죽었다는 이야기만 듣고 끝을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란 것도 깨달았다. 아직 시체도 찾지 못했고,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알아내지도 못했다.
도진은 마음을 다잡았다.
“뭐든 하겠습니다. 그러니 따라가게 해 주십시오.”
“무슨 헛소리입니까? 당신도 한 길드의 길드장이 아닙니까?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중간에 끼어든 선우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도진을 바라보았다.
“길드장을 그만두겠습니다.”
“미쳤습니까?”
“길드는 부길드장에게 물려주면 됩니다.”
“정정하지요. 돌았습니까?”
선우가 그렇게 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힘겹게 5위권 내로 든 평화 길드의 길드장을 포기하겠다니. 지금 가진 걸 모두 버리겠단 소리와 똑같았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만약 같은 상황이라면, 선우도 그렇게 했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었다.
“받아 주십시오.”
“길드장은 그만두실 필요 없고요. 그냥 가끔 찾아오시면 이야기는 해 드릴게요.”
현우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약속은 꼭 지킵니다.”
“그것 때문이 아니라 걱정이 돼서 그럽니다.”
“뭐가요?”
그 말에 도진이 현우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까 단검의 날을 쥐었던 손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일어나면 어찌합니까?”
“아.”
현우가 어색한 표정으로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선우가 도진처럼 현우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쩌자고 그런 위험한 일을 했어, 형.”
“위험하지 않았어.”
그건 사실이었다. 암만 위험한 무기라고 해도, 현우 정도의 강자가 그런 걸로 상처 입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선우도, 도진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위험했습니다.”
“위험했어, 형.”
도진과 선우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말을 꺼냈다.
“아니라니까.”
부정은 하지만,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힘으로는 둘을 이길 자신이 있는데, 어째서 이렇게 움츠러드는지 모르겠다. 둘의 눈빛을 피해 고개를 돌리자, 미묘한 얼굴로 올려다보는 케로가 보였다.
“뭐야.”
인상을 팍 쓴 채 케로를 잡아 들어 화풀이 겸 손으로 마구 주물렀다.
“우옹.”
케로는 그런 현우의 손에 자신을 맡긴 채 얌전히 있었다. 그래도 몸이 작아져서 그런지 후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제 돌아가자, 형.”
괜히 현실을 도피하는 현우를 바라보던 선우가 눈빛을 누그러트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쯤 되어 찬영이 현장에 도착했다.
“길드장님?”
뒤늦게 도착한 찬영은 옆에 서 있는 도진을 보고 경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에게 선우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평화 길드 길드장입니다.”
너무 간략해서 상황을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다.
“네?”
평화 길드 길드장이 왜 여기 있는데? 혹시 1세대 실종자를 노리는가, 싶었지만 그렇다 하기에는 태도가 지나치게 얌전하다. 찬영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선우는 현우를 다시 차에 태웠다. 그리고 찬영에게 말했다.
“참, 저번에 갔던 치킨집 기억합니까?”
“가끔 들르셨던 그곳이요? 네, 기억합니다.”
“거기서 치킨 세 마리만 포장해 오십시오. 간장, 양념, 후라이드.”
“네?”
“최대한 빨리.”
그 말을 남기고 선우는 우아하게 차에 올라탔다. 그러는 사이에도 도진의 시선은 내내 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게 지독하게 거슬렸지만, 일단은 형을 안전한 장소에 두는 게 먼저였다. 그렇기에 선우는 운전기사를 재촉했다.
“빨리 출발합시다.”
“네!”
운전기사는 다시 운전석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하지만 막 출발하려는 순간, 앞을 가로막는 인영 몇이 보였다. 도진 때문에 잠시 지체한 사이, 다른 이들이 따라잡은 모양이었다. 선우는 짜증을 내며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귀찮게 하네.”
선우는 다시 차에서 내려야 했다. 그가 혀를 차며 나오자마자, 찬영이 잽싸게 곁에 붙었다. 지금은 현우를 지키는 것보다, 선우에게 가세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은 선우와 궁합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곧 길드원들도 도착합니다.”
“얼마 정도 걸립니까?”
“5분에서 10분쯤으로 예상합니다.”
그 정도 시간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다.
“지키십시오.”
선우는 서 있는 도진을 지나쳐 가며 차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말에 도진은 얌전히 움직여 차의 옆에 섰다.
“여어.”
그런 선우를 바라보며, 가준이 손을 흔들었다. 그 옆에는 머리색이 금발에 가까운 인상이 부드러운 청년과, 시원시원해 보이는 외모를 가진 여성 한 명이 서 있었다. 다른 길드의 길드장이자 S급 각성자인 자윤과 혜선이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혜선이었다.
“금방 다시 만나네.”
“귀찮게 말입니다.”
선우가 차가운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가준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가로챘다.
“어쩔 수 없었다고.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순 없어서 말이지.”
다음을 노리기로 한 건 철회했다. 기회가 있을 때 더 부딪혀 봐야지. 선우도 머리가 있다면 이 일 이후로 현우가 머무는 장소를 옮길 것이다. 경비도 더 철저히 세우겠지. 그러니 지금 움직이는 게 맞았다.
“제가 내줄 리 없다는 건 알 텐데요?”
“알지. 아니까 이리 몰려온 거 아니겠어?”
선우가 어느새 자신을 포위하듯 선 3명을 바라보며 코웃음을 쳤다.
“여럿이 모인다고 이길 것 같습니까?”
“그건 해 봐야 하지 않을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해도 상대는 같은 S급 각성자이다. 짧은 시간 내로 쓰러트리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낮에도 그래서 시간을 끄는 방법을 택하지 않았던가.
14.
가준은 새로운 가죽 장갑을 잡아당겨 단단히 여몄다.
‘뭐, 원래 고전이 잘 먹히는 법이지.’
이번에도 시간을 끌 속셈이었다. 여기 온 이들은 이들 셋만이 아니었다. 각자 길드에서 강자로 손꼽히는 이들도 끌고 왔다. 길드장들이 선우와 찬영을 상대로 시간을 끄는 동안, 그들은 다른 쪽을 공략할 것이다.
‘그래, 그랬는데 말이지.’
가준은 선우의 뒤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거기에는 낯이 익은 사람 하나가 더 서 있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얼굴이 하나 더 있네?”
“한도진.”
평화 길드 길드장이 왜 여기 있는데?
“네가 왜 여기 있지?”
도진은 가준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그저 몸을 늘어트린 채 차를 보호하듯 서 있을 뿐이었다.
‘곤란하게 됐네. 안 그래도 저쪽은 괴물이 있는데 말이지.’
원래라면 이런 위험한 일에서는 슬쩍 발을 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 가정 때문에 다시 움직이기로 했다. 그건 바로 선우가 현우가 가진 힘을 모를 가능성. 현우가 선우에게 힘을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강한 힘을 가진 형제를 그리 대하겠어?
각성자들이 자신의 가족을 대하는 극단적인 상황이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약한 가족을 무시하는 것, 다른 하나는 지나치게 과보호하는 것이다. 가준은 선우의 행동이 후자라고 생각했다.
‘만약에 동생에게 힘을 감추고 싶어 하는 거라면 이쪽에도 승산은 있지.’
그리 생각하며 서로 가진 패를 가늠하는데, 찬영이 끼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무슨 짓이냐니.”
“지금 선현 길드에 맞서시는 겁니까?”
“아니, 뭐. 대충 그런 셈이지?”
가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미쳤습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쟁이라도 하자는 소리입니까?”
“그 정도는 아니고. 우리도 머리는 있거든. 여기서 전쟁을 벌일 생각은 없다고.”
“S급 각성자가 여럿 모였지 않습니까!”
찬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시발, 상대 쪽에는 괴물이 있는데.’
가준은 기가 차서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걸 찬영은 다르게 오해한 모양이었다. 가준과 마찬가지로 장갑을 낀 손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어 강렬한 전류가 찬영의 몸을 휘감았다.
찬영은 보기 드문 전격계 각성자였다. 전격을 이용하여 몸을 빠르게 움직일 수 있고, 상대를 감전시킬 수 있었다. 원거리 저격은 다소 어려워하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어려운 능력이었다.
거기에 선우의 능력은 수계였으니, 궁합이 딱이었다. 불꽃과 함께 일어난 전격이 이리저리 튀기 시작하자, 그와 동시에 허공에 물방울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튀던 전격은 물방울에 스미듯 달라붙었다.
이어 전격을 머금은 물방울이 빠르게 쏟아지자, 혜선이 방패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쿵!
커다란 방패가 땅에 박히며 반투명한 막이 세 사람을 감쌌다.
불굴의 방패.
그게 혜선이 가진 능력이었다. 대부분의 공격 효과를 반감시키며, 몸이 튼튼하고 질겨 잘 버틴다.
혜선이 공격을 막자 곧바로 자윤이 바람을 쏘아 보냈다. 나무도 두 동강 내는 절삭력을 지닌 바람이었지만, 그는 이내 얼음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자윤은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애초에 요란한 공격을 보낸 건 본격적인 공격을 가리기 위한 속임수에 불과했다.
진짜 공격은 가준에게서 시작되었다. 그가 독을 풀고, 자윤이 그걸 은밀하게 바람으로 실어 나른다. 몇 번인가 합을 맞춰 본 덕분인지 공격은 수월하게 이어졌다. 문제가 있다면 선우가 예민해서 독 공격으로는 딱히 이득을 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선우는 독이 실린 바람을 물로 가뒀다.
“와, 저걸 저렇게 막네.”
혜선이 방패 뒤에서 고개를 빼며 투덜거렸다. 그러다 또다시 날아오는 공격에 다시 몸을 감췄다.
“누님도 잘 막으시는데요?”
“안 막으면 뒈지는데 막아야지.”
혜선은 인상을 찌푸리며 선우에게로 신경을 집중했다. 몇 차례 공방이 이어지고, 슬슬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할 무렵 따로 분리해 뒀던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S급 각성자가 있다는데?”
요람 길드의 길드원이 불안한 표정으로 말하자,
“그래 봤자 1명이잖아. 이쪽은 여럿이니 괜찮아.”
백호 길드의 길드원이 혀를 날름 내밀며 답했다.
“몇은 시간을 끌고, 몇은 차를 공략한다.”
선현 길드라면 운전기사도 각성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각 길드의 정예. 그를 이기는 건 어렵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한도진, 그만 붙잡아 두면 되었다.
새로운 기척을 느낀 도진은 차에서 몸을 떨어트렸다. 그리고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싸울 셈이었다. 그게 현우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는 일일 테니까.
구부정하게 구부리고 있던 등이 펴지며, 장신의 몸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특유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일부러 죽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그는 그림자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현우가 있는 차를 향해 은밀하게 움직이던 몸이 갑자기 그 자리에 덜컥 멈춰 섰다.
‘왜 이러지?’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언가가 그를 붙잡고 있는 듯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
미친 듯이 굴러가던 눈동자가 이윽고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 그는 깨달았다.
‘미친, 그림자잖아?’
그를 붙잡고 있는 것은 그림자였다. 희미한 달빛 아래 길게 늘어선 그림자는 마치 괴물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사이로 까만 어둠이 스치고 지나가며 하나둘씩 그 자리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도진은 그제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옷을 툭툭 턴 그는 다시 차 옆으로 다가가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걸 가준도 보았다.
‘일진이 나쁘네.’
상황이 꼬였다. 그래도 나름 길드의 정예들을 데리고 왔는데, 이렇게 쉽게 도진에게 쓰러질 줄은 몰랐다.
‘어쩔까.’
고민하는데 옆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물러나죠.”
자윤이었다.
“뭐? 왜!”
방어에 신경 쓰느라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혜선이 되물었다.
“우리 측 사람들이 전부 쓰러졌습니다. 지금은 물러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그 말에 주위를 둘러본 혜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쪽 사람들은 전부 쓰러졌으나, 상대 쪽의 전력은 변함이 없었다. 딱히 밀릴 것 같진 않았지만, 문제는 시간제한이었다. 조금 있으면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이 이곳에 도착한다.
찬영이 쏘아 보낸 전격을 후려쳐 흩어낸 혜선이 이를 으득 갈았다. 자윤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이만 물러나야 했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물러남을 결정하자마자 혜선은 깊게 숨을 들이켜고 고함을 질렀다. 그 소리에 쓰러진 이들이 부들거리며 정신을 차렸다.
“후퇴!”
그 말에 그들은 힘겹게 몸을 세워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차 몇 대가 나타나고, 그 안에서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혜선은 아직도 공격 중인 찬영과 선우를 내버려 두고, 곧바로 몸을 빼내어 자기 길드원을 챙겼다. 그는 가준과 자윤도 마찬가지였다. 필요에 의해 손을 잡긴 했어도, 결국 그들도 서로 경쟁자였을 뿐이었다.
“잡아!”
찬영의 목소리에 길드원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나 부상을 입었다고 해도 상대측도 만만한 이들은 아니었기에 얼마 잡아들이지 못했다.
이들을 죽일 수는 없겠지만, 나중에 소속 길드에서 돈이나 아이템을 뜯어내고 돌려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아.”
찬영은 엉망이 된 주변을 둘러보며 머리를 거칠게 쓸었다. 그래도 너무 늦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아무리 선우가 강하다고 하더라도 상대는 S급 각성자 셋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선우에게 묻자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리는 확실하게 하십시오.”
“네.”
“아, 그리고 치킨. 잊지 마십시오.”
“네, 네?”
찬영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선우가 뭘 하려는지 깨달은 순간, 잽싸게 길드원을 반 나눠서 호위로 붙였다. 선우와 현우를 태운 차가 호위를 꼬리같이 달고 서서히 멀어졌다.
현장을 정리하는 건 길드원들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찬영은 멀어져 가는 차를 보다가 자신의 바이크를 찾았다. 치킨을 사러 갈 생각이었다. 그게 누구 입으로 들어갈지 생각하면 울분이 터졌지만, 선우의 말을 어길 수는 없었다.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찬영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헬멧을 썼다.
*
지내던 숙소로 돌아온 현우는 기지개를 쭉 켰다.
“먼저 씻어, 형.”
“응.”
간단하게 씻고 잠옷을 입은 채 거실로 나오니, 고소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도 모르게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가니 테이블 위에 곱게 놓인 잘 튀겨진 치킨 세 마리가 보였다.
“배고프지?”
그러고 보니 납치되는 바람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새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현우는 얌전히 테이블 앞에 주저앉아 선우가 건네주는 앞 접시를 받았다.
“뭐부터 먹을래?”
“후라이드!”
선우는 후라이드 치킨 한 조각을 집어 현우의 앞 접시에 놓아 주었다. 침이 흐를 것만 같았다. 노란색의 치킨은 노릇노릇 제대로 익혀진 상태였다. 하지만 아직 동생이 자리에 앉지 않았기에 얌전히 기다렸다.
“먼저 먹지.”
음료까지 세팅하고 앉은 선우가 그렇게 말했지만, 현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넌 뭐 먹을래?”
“나도 후라이드.”
현우는 집게를 들어 선우의 앞 접시에도 치킨을 놓아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드디어 치킨을 먹어 볼 수 있었다.
15.
치킨 조각을 들어 베어 물자 바삭바삭한 껍질이 이 끝에서 부서졌다. 이어 적당히 짭조름한 맛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고기가 닿아 온다.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씹으니 그 맛이 가히 천상의 맛이었다.
현우는 정신없이 치킨을 먹었다. 마계에서 치킨이 너무 그리워 비슷하게 생긴 마수를 잡아 튀겨 본 적도 있는데, 맛이 끔찍했었다.
그에 비해 이 맛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현우는 치킨을 뜯으며 히죽 웃었다.
“맛있어?”
열심히 먹는 현우를 보며 선우가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만한 모습이었다.
“맛있어!”
현우의 말에 내내 아래쪽에 앉아서 치킨을 먹는 둘을 올려다보던 케로가 움찔했다. 먹고 싶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현우의 성격을 아는 케로는 인내심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먹고 싶은 만큼 먹어. 더 사 올 수 있어.”
현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치킨을 탐닉하기 시작했다. 정신없이 몇 조각을 해치우고 나니 그제야 배가 좀 찼다.
“이번에는 양념.”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우가 양념 치킨을 접시 위에 놓아주었다. 양념도 후라이드 못지않게 맛있었다. 양념에 살짝 눅눅해진 겉면도, 그 안의 고소한 속살도 혀를 자극하기에는 충분했다.
간장도 만만치 않았다. 약간의 청양고추를 썰어 넣어 매콤하면서도 달착지근한 간장 맛이 맛있어 끊임없이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슬슬 먹는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하자, 내내 다정한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보던 선우가 입을 열었다.
“예전에 기억나? 내가 감기 걸려서 아팠던 날.”
그 말에 현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지.”
기억나지 않을 리 없었다. 당시엔 현우도 어렸다. 갑자기 열이 심하게 오른 동생을 두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려고 약국에 가서 약을 사 와 먹였지만, 열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힘겹게 업고서 병원도 가 보았지만, 돈이 없었다.
동생이 죽는 건 아닌가 무서웠다. 그래서 내내 옆에서 수건으로 땀에 젖은 이마를 닦아 주며 울음을 꾹 내리눌렀다.
서툰 솜씨로 끓인 죽을 조금이라도 먹여 보려고 애썼다. 그러나 입이 꺼끌꺼끌한지 도무지 넘기질 못했다. 그 와중에 선우는 먹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그게 치킨이었다.
“내가 치킨 먹고 싶다고 했었잖아.”
그래, 그랬다. 아픈 동생이 먹고 싶단 말에 현우는 달랑 5천 원을 들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치킨집을 죄다 뒤져서 간신히 마리당 5천 원 하는 옛날 통닭을 찾아냈다. 혹시나 식을까 봐 품에 넣고 달려와, 제 입에는 살 한 점도 넣지 않고 모두 선우에게 주었다.
“그랬지.”
“그때 먹어 본 치킨 맛이랑 여기랑 비슷해.”
어쩌다 먹어 본 맛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선우는 그 가게의 단골이 되었다. 형이 생각나는 건 뭐든 놓칠 수 없었기에, 바쁜 와중에도 가끔 그곳을 찾았다.
선우의 말에 현우는 먹던 치킨을 내려놓았다.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당시 그가 가졌을 감정이 손에 잡히는 듯했다.
‘나도, 나도 네가 그리웠어.’
현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형.”
“선우야.”
둘은 치킨을 사이에 두고 애절한 눈빛을 교환했다. 기나긴 세월을 돌아 마침내 다시 만났다. 이제는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라.
현우는 선우에게 남은 치킨을 밀어 줬다.
“치킨. 더 먹어.”
“아냐, 난 괜찮아.”
“먹으라니까.”
현우는 치킨을 먹기 좋게 발라서 선우의 입에 넣어 주었다. 선우는 그걸 받아먹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동생이 잘 먹는 걸 보니 기분이 좋아진 현우는 재차 치킨을 발라냈다.
그렇게 둘 다 배불리 먹은 후, 소파 위에 늘어졌다.
*
날렵한 검은 차 한 대가 도로를 달리다 한편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자 둘이 내려섰다.
한 명은 무혁이었고, 다른 이는 다소 마른 듯한 몸에 안경을 쓴 남자였다.
“이미 말끔하게 정리하고 튀었군요.”
안경을 쓴 남자, 영진의 말에 무혁의 표정이 굳었다.
“소식이 너무 늦었습니다.”
“예산 단위가 길드들과는 달라서요. 저희 정보부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따라잡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이미 한차례 싸움이 벌어진 다음, 정리된 자리에 도착하는 것 말이다.
“이래서는 곤란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영진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대답했다.
“이렇게 나가다가는 헌터관리국이 길드들을 앞서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겠지요.”
무혁의 얼굴에 불쾌함이 떠올랐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분발하십시오.”
“노력하겠습니다.”
영진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나저나 1세대 실종자는 어땠습니까? 정보부에 인계되기 전에 선현 길드에 뺏겨서 아는 게 있어야지요.”
어땠냐고? 무혁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었다. 작고 여려 보이는 사람이었지. 사실 일반인 기준으로는 그다지 작은 편도, 여린 편도 아니었지만, S급 각성자인 그에게는 그렇게 보였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1세대라서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약해 보였다니 유감이군요.”
보통 각성자는 세대가 높을수록 강하다. 3세대보단 2세대가 강하단 소리였다. 그렇기에 1세대는 2세대보다 강하리라 추측했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유일하게 귀환한 1세대니까 쓸모는 많겠지요.”
다른 1세대의 행방, 가진 힘의 정도, 알고 있는 정보. 모든 것이 중요했다. 어떤 사소한 것이라도 놓칠 수 없었다.
“특히 마계에 관한 것을 좀 더 많이 알고 싶습니다.”
지구와는 또 다른 세계. 특이한 식생을 지닌 그곳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면,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어쩌면 1세대의 등장으로 인해 자국이 해외보다 앞서나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되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쉬울까. 무려 선현 길드의 선우와 같은 핏줄인데. 게다가 현장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상당히 아끼는 것 같았다고 했다.
“여러모로 이야기가 복잡해졌군요.”
영진은 혀를 차며 다시 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무혁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도로 옆의 공터를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영진이 기다리기 지칠 무렵, 무혁은 다시 차로 돌아갔다.
*
꿈을 꿨다.
뺨이 통통한 작은 아이가 현우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형!”
한 손에는 빵 봉지를 들고 열심히 뛰어오다가 넘어질 듯 갸우뚱거렸다. 당황하여 달려가 몸을 잡아 주었다. 다행히 아이는 넘어지지 않았다.
“조심해야지, 선우야.”
“응! 형, 이것 봐. 학교에서 빵 받았어.”
그러면서 단팥빵을 보여 주었다.
“반반 먹자.”
혼자 다 먹어도 괜찮은데. 반반 나눠 먹자는 기특한 소리를 하는 동생이 사랑스러웠다. 부모를 잃은 지 몇 년, 동생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현우도 없었을 터였다.
사랑하는 동생. 현우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익숙한 천장이다. 선우의 집 천장이었으니까. 현우는 눈을 깜박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보았다.
바로 옆에는 케로가 배를 까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원래 예민하기로 소문난 종족인데 이리 배를 까고 있는 걸 보니 이 녀석도 많이 변했다. 현우는 케로의 뱃살을 만지작거리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간만의 평화로운 시간이 기꺼웠다. 이런 감각이 얼마 만이던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조금 더 누워서 잘까.’
다시 몸을 눕히는데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형.”
선우는 작은 가방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형에게 줄 게 있어.”
또? 여기 오면서 현우는 선우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았다. 한때는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동생에게 받기만 하자니 슬슬 부담이 되기 시작했다.
“안 줘도 되는데.”
몸을 일으켜 세우며 슬쩍 말해 보았지만, 듣지 못한 척을 한다. 안 들렸을 리가 없으면서. 선우는 침대로 다가와 이불 위에 가방의 내용물을 털어 냈다. 작은 가방에서 나오는 건 생각보다 많았다.
“아공간 가방이야.”
그래서 그 많은 게 들어 있었구나.
“그런데 이건 뭐야?”
현우의 물음에 선우가 침대 위에 흩어진 액세서리 하나를 들어 올렸다.
“이건 반지.”
“그냥 반지는 아닌 것 같은데?”
“맞아. 아티팩트야. 보호의 반지라고.”
그러면서 능력을 이야기해 주었다.
[보호의 반지(유니크)]
소유자가 위험에 처할 시 강력한 배리어를 펼친다. 재사용 시간 48시간
이어 현우의 손을 잡은 선우가 반지를 끼워 주었다. 다소 큰 것처럼 보이던 반지는 손가락에 들어가자마자 착 달라붙었다.
“일단 이걸 끼고.”
전혀 필요 없는 반지였지만, 이걸 껴서 동생의 마음이 안정된다면야. 현우는 열린 마음으로 반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선우의 마음은 반지로 끝나지 않았다.
[이동의 귀걸이(유니크)]
착용 시 짧은 거리의 이동이 가능하다. 이동 장소 무작위, 재사용 시간 24시간
“귀걸이도 하고.”
[희생의 팔찌(유니크)]
소유자가 입는 상처를 대신 받는다. 10회 사용 후 부서짐.
“팔찌도.”
[재생의 목걸이(유니크)]
소유자가 입은 상처를 천천히 치료한다. 마나를 보충 후 사용 가능.
“이건 목걸이야.”
이미 귀걸이부터 부담되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있어.”
“하지만 다 큰 성인 남자가 이걸 전부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아?”
현우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선우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그래도 너무 화려한 디자인은 피했어.”
그건 그렇다. 전부 제법 단아하게 생겼으나, 그건 하나만 착용할 때의 이야기지. 개수도 많았고, 일단 착용자가 자신이다.
16.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
현우의 완곡한 거절에 선우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다시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사실 몇 가지 더 준비한 게 있는데. 이게 싫으면 다른 걸 써도 돼.”
“어? 그럼 다른 거 할게!”
현우는 냉큼 대답했다.
“그럼 이걸로 할래?”
그러면서 꺼낸 아이템은 서클릿이었다. 왜 판타지에 보면 엘프들이 이마에 두르는 화려한 장식 말이다.
[정화의 서클릿(유니크)]
독 저항, 정신 공격 저항률을 30% 올려 준다.
그걸 보는 순간, 현우는 얌전히 귀걸이를 부여잡았다. 절대 서클릿을 찰 수는 없었다! 다음으로 나오는 아이템들도 그에 못지않게 화려한 것이 보기만 해도 두려울 정도였다. 보드라운 털이 달린 망토며, 왕이나 들 법한 완드, 정강이까지 오는 화려한 세공의 각반 등등. 뭐든 하나만 껴도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것들은 한두 개만 차면 돼.”
“아냐, 됐어.”
현우는 한숨을 삼키며 마지막 미련을 담아 물었다.
“그런데 이거 진짜 다 해야 해?”
“응, 전부.”
“너무, 너무 많은데?”
“이게 뭐가 많아. 그래도 추리고 추린 거야.”
현우는 울고 싶어졌다. 형에게 상처 나는 게 싫다더니 귀를 뚫는 건 괜찮은 거니? 주섬주섬 액세서리를 모으는 손길이 느리다. 할 수만 있다면 전부 창밖으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혹시 케로가 이걸 전부 물고 도망가 주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지고 바라보았으나, 졸린 눈으로 하품을 하고 있다.
‘도움도 안 되는 녀석!’
현우는 절망했다.
“그래도 이제는 좀 안심이 되네.”
“그래, 너라도 안심이 된다니 다행이다.”
“괜찮아, 형. 각성자들은 능력을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차고 다니는데. 오히려 없어서 못 차는걸.”
이 정도는 무난하다. 선우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현우의 생각은 달랐지만.
“그렇구나아. 하지만 저번에 보니까 안 하는 사람도 있던데?”
“누구?”
“가준이라는 사람이라든가.”
그 말에 선우가 잠시 멈칫했다.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고는 답했다.
“아냐. 도가준도 여러 개 쓰고 있어.”
“어떤 거?”
“일단 장갑. 몇 켤레 두고 번갈아 쓰고 있지. 구하기 어렵지 않은 탓에 등급은 높지 않지만, 제법 쓸모 있어.”
“그리고?”
“보이지는 않지만, 목걸이에 꿴 반지 여러 개.”
“그랬나?”
도가준의 멱살을 잡은 기억은 있었지만, 액세서리까지 눈여겨보지는 않았다.
“도가준뿐만이 아니야. 이혜선도, 류자윤도 비상용으로 액세서리 몇 개는 가지고 다녀. 귀걸이랑 반지는 기본이지.”
“이혜선이라면?”
“최강 길드의 길드장. 방패를 들고 있던 여자 말이야. 그 뒤에 서 있던 금발 머리의 남자는 류자윤.”
선우가 간단한 외모와 함께 이름을 설명해 주자, 누가 누군지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액세서리를 차고 있었던가? 그 부분은 잘 떠오르지 않았다. 싸우는 와중에 액세서리가 번쩍였으면 금방 알았을 것 같은데. 의문을 가지는 사이, 선우가 재차 말했다.
“하여간 이제부터는 절대 나서지 마. 알았지? 차라리 날 시켜.”
“알았어.”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고 나서야 선우는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괜찮겠지.’
마계의 알베르크도 액세서리를 제법 했었잖아? 그래도 보기 싫지 않았다.
‘그건 알베르크라서 그렇지!’
알베르크는 절세의 미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아니다! 현우는 괴로움에 침대를 뒹굴었다.
“역시 안 되겠어! 조금만 줄이자!”
“줄일 게 없는데?”
“하지만!”
“잘 어울려, 형.”
선우는 배시시 웃었다.
‘나보단 너에게 훨씬 어울릴 거야!’
정장을 입고 있어도 워낙 잘생겼다 보니 이 정도 액세서리도 너끈히 소화할 것 같았다.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현우는 괴로움에 뒹굴다가 떠오르는 것이 있어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넌 액세서리 안 하고 있잖아! 다들 몇 개 들고 다닌다면서!”
“나도 들고 다니는데?”
“착용은?”
“당장 쓸 것도 아닌데 할 필요가 있나? S급 각성자는 그 자체로 전략 무기 같은 느낌이라서. 액세서리를 굳이 할 필요는 없어. 그냥 비상용으로 인벤토리에 몇 개 가지고 다니는 수준이지. 도가준은 워낙 조심성이 많아서 따로 하고 다니는 거고.”
얄밉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 처음으로 얄밉게 보였다. 그런 이유라면 현우도 액세서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강자였으니까.
굳이 동생에게 힘을 밝히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이걸 다 차고 다니느니 강함을 증명하고 편하게 다니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고백하자.’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선우가 눈을 휘며 평범해 보이는 목걸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금속 목걸이였지만, 이것 또한 특수한 효과를 가진 액세서리였다.
“그럼 이걸 쓸래?”
“뭔데? 더는 추가하고 싶지 않은데!”
“도가준이 목걸이에 반지를 여러 개 달고 다닌다고 했지?”
“그랬지?”
“이게 그 목걸이야. 단순해 보이지만, 특수한 능력이 있지. 여기에 아이템을 여러 개 끼우면, 능력치가 반영돼. 더불어 아이템 축소 기능이 있어서 딱히 불편하지도 않아.”
그러면 굳이 이렇게 액세서리를 하나하나 차고 다닐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목걸이는 이외의 능력이 없어도 유니크 등급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 세계에서 단 두 개만 존재했다. 선우에게 하나, 가준에게 하나.
한국에서 열린 던전에서 나왔기 때문이었다. 막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려던 현우는 그걸 보고 나서야 차분해졌다. 이 정도면 다시 생각을 바꿔도 될 것 같았다.
‘저 정도라면 할 수 있지.’
가준과 똑같은 목걸이라는 건 좀 싫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
“그거 할래.”
“좋아. 그럼 작업해서 돌려줄게.”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현우가 찬 액세서리를 떼기 시작했다.
“그런데 좀 아쉽다.”
“뭐가?”
“형한테 잘 어울리는데.”
현우는 저도 모르게 오만상을 찌푸렸다.
“아니거든?”
“정말인데.”
“나보단 네가 해 보지, 그래? 정말 잘 어울릴 텐데.”
“정말?”
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고는 현우에게서 떼어낸 귀걸이를 자신의 귓가에 가져다 댔다.
“잘 어울려?”
현우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얄밉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이었다. 그래, 선우는 이제 20대 초반이다. 아직 어리단 소리였다. 이런 장난 정도는 칠 수도 있지 않나.
“그럼 형이랑 나랑 세트로 귀걸이 하나 할까?”
그 말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생과 같은 귀걸이 좋지.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퍼뜩 제정신을 차렸다.
“형제끼리 세트 귀걸이는 이상하지 않아?”
“뭐가 이상해? 원래 형제자매끼리는 이런 거 흔하게 하지 않아?”
“……그랬나?”
오랫동안 마계에 가 있었더니, 그새 한국의 풍습이 조금 바뀐 모양이었다. 자매라면 몰라도 형제까지 그러는가. 고민하는 사이, 귀걸이를 몇 개 꺼내 현우에게 대 보던 선우가 물어왔다.
“형은 어느 게 좋아?”
단순한 거. 제일 단순한 거! 현우는 까만색의 보석이 박힌 작은 귀걸이 하나를 골랐다.
“아, 이거? 지금 가진 건 하나뿐인데, 하나 더 구해야겠네.”
작게 콧노래를 부른 선우는 현우가 고른 귀걸이를 소중하게 챙겼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어쩐지 피곤했다. 현우는 그대로 다시 축 늘어졌다. 그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선우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어떻게 됐어?”
“누구?”
알아들은 것 같은데 의뭉을 떤다.
“예원이 오빠.”
선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현우를 바라보았다. 참으로 귀여운 모습이었지만,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현우는 선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알고 있잖아.”
“알고 있지.”
작게 한숨을 쉰 선우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런 위험한 작자를 가까이 둘 필요가 있어?”
“그냥 이야기나 좀 해 주는 건데?”
“그럼 형이 이야기하고, 내가 그걸 녹음해서 들려주는 건 어떨까?”
이럴 땐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쓰다듬던 머리카락을 반대로 넘기자 잘 정돈되어 있던 선우의 머리가 엉망이 되었다.
“심술부리지 말고.”
“안 부렸는데.”
“거짓말하네.”
코를 잡고 가볍게 흔들어 주니 선우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딨는지 말해 봐.”
선우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아래?”
“로비 입구에서 죽치고 있어.”
“왜?”
“못 들어오게 했거든.”
“들어오라고 해.”
“싫은데.”
투정을 부리는 선우의 모습을 다른 이가 본다면 기겁할 것이다. 언제나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딱딱한 태도를 고수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뭐.’
무려 10년 만에 만난 형이다. 선우는 만나지 못했던 기간 동안 하고 싶었던 모든 걸 현우와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이 보기엔 다소 위화감이 들 만한 행동도 꺼리지 않았다.
선우는 침대에 앉아 있는 현우의 무릎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현우가 좀 더 편한 태도로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지켜야 해.’
그러자면 선우가 더 강하고, 더 예리해져야 했다. 아무도 현우에게 손댈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다시는 형을 잃는 일이 없게 말이다.
“선우는 착하지? 그러니까 불러오자.”
“알았어.”
형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해야 했다. 그리고 그걸 안전하게 지키는 건 선우의 몫이었다.
그 전에 일단은 그 남자를 불러오자. 내키지는 않지만, 형이 원하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