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16)
  • 1.

    지선우.

    세기의 영웅이라 불리는 세계 최강의 남자!

    2세대 귀환자!

    처음 1만의 사람들이 사라졌다. 전체 인구수에 비해 너무나도 적은 수였기에 그들의 실종은 크게 조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어 10만이 넘는 사람이 사라지자, 문제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쯤 포털이 열렸다. 이세계와 연결된 포털에서는 신화 속에서나 볼법한 괴물이 쏟아져 나왔다. 처음에는 군대로 그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그러나 생체 방어막을 지닌 그들에게 총은 통하지 않았다. 갈수록 더 강한 무기를 사용하였으나 소용없었다. 심지어는 최후의 수단으로 여겼던 핵도 통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류가 처참하게 죽어 나갔다. 그때 등장한 이들이 바로 2세대 귀환자각성자였다.

    그들은 돌아오자마자 각성한 능력을 이용하여 몬스터를 죽여 나갔다. 그리고 그런 이들 중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낸 이가 지선우였다!

    선한 마음씨에 뛰어난 실력, 그는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아픔은 있었으니.

    조명 비춰.”

    바로 실종되기 전에 하나뿐인 형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부모님 없이 살아오던 지선우에게는 단 하나뿐인 가족이자 버팀목. 그러나 지금 그는 여기 없다.

    카메라가 무덤 앞에서 하얀색 국화를 들고 있는 지선우를 비췄다. 수려한 얼굴에 슬픈 표정이 떠오르자 주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는 그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아직도 형이 그리우십니까?

    PD가 묻자 그가 서글픈 목소리로 답했다.

    네, 그립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목소리였다.

    형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성실하고 상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지선우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좋은 분이셨군요.”

    네. 분명 살아 계셨다면 저보다 뛰어난 영웅이 되셨을 겁니다.”

    그 말에 모두 안타까워하며 한숨지었다.

    그리고 그 시각, 마계의 어느 장소.

    한 남자가 귀를 후벼 파며 외쳤다.

    씨발, 누가 내 욕하냐!

    지구에서는 죽었다고 알려진 지선우의 하나뿐인 형, 지현우였다. 그는 그대로 손을 올리더니 바로 옆에 쭈그리고 앉아 있던 괴물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고통에 찬 괴물의 비명이 이어졌다.

    크와앙!

    부들부들 떨며 뒤통수를 문질렀으나, 정작 때린 사람은 끄덕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연히 물어볼 뿐이었다.

    너냐?

    괴물, 발록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빡.

    그러자 이번에는 손이 다른 뒤통수로 향했다. 졸지에 의자 역할을 하고 있던 케로베로스가 2차로 비명을 내질렀다.

    깨개갱!

    너냐?

    멍멍!

    케로베로스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면.”

    현우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으로 향했다.

    너냐?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이 갈라지며 작은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고, 전 아닙니다. 결백 그 자체입니다.”

    지랄하고 자빠졌네. 여기서 날 욕할 놈이 너밖에 더 있어?

    제가 하나뿐인 고객님을 왜 욕합니까?

    염병할.”

    제발 말 좀 곱게 하십시오.”

    내가 말하는 데 뭐 보태 준 거 있어?

    욕쟁이 할머니 같지 않습니까?

    요정이 투덜거리며 말했다.

    누가 할머니냐누가?

    현우는 투덜거리는 요정을 보면서도 그에게는 손대지 않았다. 요정이 어떤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지구인을 마계로 끌고 와 죽인 장본인. 정확히는 장본인의 수하지만.

    본인의 입으로는 전부 다 지구를 위해서라고 했지만, 죽어 간 사람들의 면면을 생각해 보면 동의하기 어려웠다.

    난이도 조절에 실패한 것뿐입니다. 덕분에 2차, 3차에선 적절한 난이도 조절에 성공, 많은 사람이 살아서 돌아갔습니다. 이제 그들이 지구를 구해 주겠지요.”

    그러면 영문도 모르고 끌려와 죽어서 마계의 거름이 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저 재수가 없었을 뿐이지요. 흔한 일이지 않습니까?

    그래, 그럼 이것도 재수가 없는 거겠지.”

    현우는 허공에서 주절주절 떠들어 대는 요정을 낚아챘다. 그동안은 목숨과 연결된 문제라 살려 두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기분이 지독하게 나빴다. 뒈져도 요정은 조져 놓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하하, 고객님?

    손아귀에 꽉 잡힌 요정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이러시면 안 됩니다!

    !

    손아귀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요정이 빠져나오려고 발버둥 쳤지만, 이대로라면 손안에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저, 정말 좋은 소식입니다!

    요정은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그러나 현우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요정의 말은 도통 믿을 수가 없단 말이지.

    저엉말입니다귀환, 귀환!

    요정은 현우의 손을 작은 주먹으로 탁탁 치며 다급히 외쳤다. 그러자 손에서 힘이 약간 빠졌다. 물론 요정이 빠져나갈 정도로 힘을 빼진 않았다.

    귀환 뭐?

    귀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디로?

    지구로요. 지구!

    정말?

    제 주인님의 이름에 걸고 맹세합니다!

    그제야 현우의 손에서 완전히 힘이 빠졌다. 요정은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데굴데굴 구르다 간신히 몸을 바로 세웠다. 진짜 성격 지랄 맞아서는.

    돌아갈 수 있다고?

    현우는 가만히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마계로 끌려와 고생한 기나긴 나날. 그동안 계속해서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단 하나의 존재. 하나뿐인 가족. 사랑하는 내 동생.

    지선우.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 재산을 노리는 친척 틈 사이에서 기댈 곳은 단 하나뿐이었다. 언제나 형이 제일 좋다며 웃던 작고 귀여운 동생. 그 동생만을 바라보며 힘겹게 살아왔다.

    이 엿 같은 곳에 끌려와 고생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돌아가실 거죠?

    현우는 빨개진 눈으로 요정을 노려보았다. 마계로 오고 나서 많은 시간이 지났다. 너무 많은 시간이 말이다. 여린 동생은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살아는 있을까. 어느 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돌아가고 싶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었다. 그 갈망 하나로 현우는 대답했다.

    돌아갈 거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요정이 입을 쭉 찢어 웃었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습니다!

    바로 앞에 까만 점이 생기더니 이내 점점 부피를 키워 나갔다.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포털이었다. 이게 정말 지구로 가는 길일까. 현우는 의심을 가지면서도 포털을 외면하지 못했다. 어쩌면 동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럴 수 없었다.

    크르륵!

    포털을 본 발록이 당황하며 날뛰었다.

    크륵!

    주인이 현우가 무얼 하든 옆에서 지키며, 모든 것을 알리라고 하였는데 시간이 촉박했다. 망할 요정발록은 속으로 외치며 다급히 주인을 불렀다. 바로 마계의 서열 1위인 알베르크를!

    그동안 수시로 현우랑 드잡이한 인물 되시겠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현우는 포털 속으로 발을 내딛고 있었다. 안 되겠다발록은 다급한 표정으로 케로베로스를 잡아 현우의 뒤를 향해 던졌다.

    깨갱?

    나는 왜케로베로스가 허공을 허우적거리며 현우의 등판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이윽고 현우가 손을 내뻗어 케로베로스의 목을 잡아챘고, 둘을 삼킨 포털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어라케로베로스는 예정 외인데요.”

    요정이 뺨을 부풀리며 발록을 노려보았다.

    크륵크륵?

    발록은 필사적으로 다른 곳을 보는 척하며, 요정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썼다. 현우는 날파리처럼 다루던 요정이었지만, 다른 이들에겐 재앙이었다. 그러니 발록이 이러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그때, 발록의 주인이 도착했다.

    마계 서열 1위. 알베르크. 2미터에 달하는 장신에 기다란 흑발을 늘어트린 그는 절세의 미남이었다. 고혹적인 보랏빛 눈동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현우가 없군.”

    그는 가야 할 곳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야 할 곳이라. 그가 가야 할 곳은 없어.”

    아니요. 그분은 지구로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요정은 어디선가 안경을 꺼내 쓰며 난데없이 나타난 서류를 넘겼다.

    저희가 지구인 훈련 장소로 마계를 빌리긴 했지만, 1차 대여 기간이 방금 끝났습니다. 처음엔 뭣 모르고 기간을 좀 길게 잡긴 했지요. 그 때문에 지현우 님이 생각보다 오래 마계에 머물게 된 것이고요.”

    “……알고 있다.”

    알고 계시면서 왜 그러십니까?

    현우가 돌아가는 건 싫어.”

    이미 돌아갔습니다.”

    데려올래.”

    안 됩니다. 중간계 서약을 잊었습니까?

    다 안 된대. 되는 게 뭐야?

    정말 안 되니까 그러지요요정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막무가내인 작자가 마계의 마황이라니. 하지만 무시할 수도 없는 게 전투력이 엄청나게 무시무시한 데다가 보기와는 다르게 약삭빠르다. 그러니 살살 달래야 했다. 현우에게 당했던 것처럼 또 쥐어 잡히기 싫으면. 요정은 단단히 각오하고 알베르크를 바라보았다. 이제 설득의 시간이다!

    우엑.”

    기나긴 까만색 포털을 통과하고 나니 속이 울렁였다. 대체 이런 감각을 느껴 본 게 얼마 만이지알베르크와 드잡이질을 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이런 느낌. 현우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어디야?

    사방이 금속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어디 공장 안인가현우는 비척거리며 걸어 나가 벽을 어루만졌다. 문이 어디지. 문을 찾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2.

    어디?

    시선이 느껴지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CCTV가 보였다. 누군가 렌즈 너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기물 파손을 하면 안 되겠지. 마계와는 다르게 지구는 그러면 안 되니까. 현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렸다.

    끼잉.”

    그런 현우의 곁으로 작은 온기 하나가 달라붙었다. 까맣고 복슬복슬한 작은 강아지. 얼핏 보기엔 지구의 포메라니안을 닮았다.

    넌 뭐냐?

    커다란 눈망울이 어쩐지 낯익다. 기억이 떠오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 케로.”

    마계에서 내내 같이 있던 케로베로스.

    끼이잉!

    현우가 알아본 듯하자 케로베로스가 신나서 앞발을 파닥였다. 그런데 얘는 왜 작아졌담머리는 왜 또 하나고너무 작아져서 이제는 실수로라도 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끌어안아 보았다.

    작고 따끈한 몸이 부드럽게 달라붙었다. 품에서 놓기 싫은 감촉이었다. 그래서 멍하니 케로베로스를 안고 있자니, 갑자기 벽면이 열리며 사람 여럿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완전 무장을 한 채 총을 들고 있었고, 현우를 위험한 존재인 듯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흑발에 얼핏 보이는 피부는 동양인의 그것이었다. 가끔 들려오는 목소리를 들으니 중국이나 일본은 아니다.

    한국이구나.

    다행히 요정은 현우를 돌려보내는 데 있어 실수를 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

    오랜만에 보는 동향인은 참으로 무례했다. 언제 봤다고 반말이람저도 모르게 손이 움찔거렸다.

    한 대 쥐어 팰까.

    폭력은 누구에게나 공평해서 맞고 나면 알아서 숙이게 되어 있다. 원래 자신이 이런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마계가 사람을 버려 놨다.

    어떻게 할까 싶어 손을 폈다 오므리기를 반복하는데 밖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짧은 실랑이 후에 완전 무장을 한 이들이 반으로 갈라지며, 그 사이로 머리를 짧게 자른 남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복을 걸친 몸이 제법 단단해 보인다.

    안녕하십니까.”

    남자는 현우에게 차분히 인사를 건넸다.

    헌터관리국의 최무혁이라고 합니다.”

    최무혁. 헌터관리국이 자랑하는 S급 신진 헌터. 그들이 S급 헌터를 끌어들이기 위해 제시한 많은 조건들은 지금도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었다. 수많은 재물과 권력.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걸 걸고서라도 무혁을 끌어들인 걸 후회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는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으므로.

    귀하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무혁의 질문에 현우는 자신의 이름을 툭 내뱉듯이 던졌다.

    지현우.”

    그것이 지구로 돌아와 인간과 한 첫 대화였다.

    이곳은 추우니 다른 장소로 이동해서 이야기할까요?

    그러면서 무혁은 손을 내밀었다. 조금도 경계를 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현우는 그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무혁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앞장섰다. 그렇게 바뀐 장소는 처음과 비교해서는 많이 나아졌지만, 폐쇄적인 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다. 방에는 창문 하나 없었으며, 커다란 전면 거울 하나가 전부였다.

    전면 거울 너머에는 보나 마나 사람들이 서서 이곳을 바라보고 있겠지. 다시 슬슬 기분이 나빠져 왔다. 확 다 뒤엎어 버릴까.

    이들이 이러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유일하게 돌아온 1세대 귀환자여서. 의심하고 궁금해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현우가 그를 배려해 줄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그의 손이 바로 앞에 있는 묵직한 책상에 닿았다.

    그 모습을 본 케로베로스는 몸을 움츠리며 얌전히 뒤쪽으로 물러났다. 이제 일어날 상황을 알아서 추측하고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막 현우가 폭발하려는 순간, 무혁이 현우 앞으로 잔 하나를 밀어 주었다.

    커피 마십니까?

    책상을 잡고 있던 손이 멈췄다.

    커피?

    네.”

    현우는 컵을 바라보더니 정색하고 답했다.

    난 커피는 안 마셔. 다른 거 줘.”

    무혁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커피가 싫으시군요. 그럼 뭘로 드릴까요?

    과일 주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어느새 책상 밑에 있던 손이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기다리기를 잠시, 폐쇄된 방문이 열리고 과일 주스가 들어왔다. 딸기주스였다. 현우의 가슴이 격하게 두근거렸다. 강해진 뒤로 굶은 적은 없었지만, 그게 다였다. 마계의 음식은 하나같이 맛이 지랄 맞아서 배를 채우는 데 그쳤다. 그런데 딸기딸기주스라니.

    덜덜 떨리는 손이 주스 잔을 잡았다. 그리고 한 모금. 새콤달콤한 맛이 혀를 감싸 안았다. 그래, 이 맛이야현우는 딸기주스를 조금씩 아껴 마시며 환희했다.

    주스 좋아하십니까?

    현우는 대답 대신 딸기주스에 몰두하는 걸 택했다.

    더 가져오라 할까요?

    무혁은 제법 친절하게 물었다. 비쩍 마르고 작은 몸이 동정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예쁘장하게 생기기도 했고.

    현우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주스 잔을 몇 개나 비웠는지 모르겠다. 배부를 정도로 주스를 마시고 나니 절로 노곤해졌다.

    좋아, 특별히 봐줬다.

    깽판 치는 것보다는 적당히 상대해 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모두 환상적인 주스 맛 때문이었다.

    그럼 몇 가지 질문하겠습니다.”

    무혁은 그렇게 말하며 앞에 과자를 밀어 주었다. 주스에 이어 과자라니입이 호강했다. 현우는 과자를 갉작이며 먹었다. 아껴 먹기 위함이었다. 오랜만에 넣어 보는 달달한 것은 그에게서 이성적인 사고를 빼앗아 갔다.

    이름이 지현우 맞습니까?

    끄덕.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는 스물다섯 살.”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이는 기억하지 못한다. 마계의 흐름은 지구와는 달라서 더 빠르기 때문이었다. 중간까지는 열심히 나이를 계산했던 것 같은데, 결국엔 귀찮아서 때려치웠다.

    가족이 있습니까?

    끄덕. 있지. 내 작고 어리고 사랑스러운 동생, 지선우. 그 아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사라진 형을 원망하고 있을까. 울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다. 그와 동시에 무서워졌다.

    하나뿐인 사랑하는 가족이 자신을 미워할까 봐. 동생을 생각하며 마계에서 힘겹게 버텼지만. 지켜 주겠다던, 언제나 곁에 있겠다던 약속을 어긴 것도 사실이었다.

    혹시 그 가족이.”

    무혁이 재차 입을 여는 순간, 어디선가 쿵하는 울림이 들려왔다. 울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쿵여러 차례 울리며 점점 이곳으로 가까워져 왔다. 무혁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최대한 소식이 새어 나가지 않게 단속을 했는데, 그게 실패한 모양이었다.

    으득. 무혁은 이를 갈았다.

    한 번 더 장소를 이동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왜현우가 그런 뜻을 담아 물끄러미 바라보니 무혁이 그를 살살 달랬다. 강제로 끌고 가도 되는 일인데 이상하게 세게 못 나가겠다. 무혁은 혀를 찼다.

    먹고 싶은 건 전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바나나주스는 어떻습니까?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무혁은 현우가 일어나자마자 그를 안아 들었다. 남자의 품에 안기다니저도 모르게 주먹이 움찔거렸다. 만약에 먹고 실은 걸 전부 주겠다는 말이 아니었으면 진작 후려쳤으리라.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케로베로스도 냉큼 주인의 다리에 매달렸다. 작은 강아지의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본체는 무서운 마수인지라. 매달리는 것쯤은 쉽게 해내었다.

    그렇게 무혁이 잽싸게 자리를 비우자마자, 폐쇄된 공간-취조실-의 벽이 마지막으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이는 장신의 한 남자. 말끔한 정장 차림의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이였다.

    세기의 영웅. 지선우.

    씨발, 왜 아무도 없습니까?

    그였다.

    까만 눈동자가 싸늘한 시선으로 취조실 내부를 훑었다. 방금까지 누군가가 있었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들어온 정보는 틀리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선우는 우르르 몰려오는 헌터들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글쎄, 무슨 짓일까요?

    들어 올린 손 위에서 생겨난 머리통만 한 커다란 물방울이 미친 듯이 제자리에서 돌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가장 약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일정 조건 하에서는 가장 강할 수도 있는 물. 선우는 그런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헌터였다.

    머리통만 한 물이 여러 개로 나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새파래졌다. 일부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선우는 그들을 쉽게 놔줄 생각이 없었다. 인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물러서려던 이의 발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움직이지 않으시는 게 좋으실 겁니다. 잘못 움직이면 부서지거든요.”

    그런 끔찍한 말을 상냥한 목소리로 하지 마헌터관리국의 헌터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오들오들 떨었다.

    뭐야, 저 사람 지선우 맞아지선우는 세기의 영웅이잖아.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신입이 중얼거리는 말에 몇몇 헌터들이 푹 고개를 숙였다.

    여기 아직 쓸데없는 환상을 지닌 헌터가 하나 있었다. 외부에서는 지선우를 영웅이라 추켜세웠지만, 그와 접촉한 적 있는 헌터들은 알고 있었다. 그가 사실은 미친 개새끼란 걸. 방송에 나오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위장에 불과했다.

    자, 그럼 대답해 주십시오. 여기 있던 분은 어디로 갔습니까?

    그, 그건.”

    가장 앞에 선 헌터가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눈치를 보자 가차 없이 물방울이 몸을 관통했다.

    3.

    어, 어헉!

    고작 팔이잖습니까.”

    고작 팔이라니. 물방울 하나가 통과했을 뿐인데 당장이라도 떨어질 듯 너덜거린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팔을 움켜쥐었다. 끔찍한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당장이라도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지겹네.

    선우는 물방울을 좀 더 잘게 쪼개며 기온을 떨어트렸다. 지금 그에게 다른 헌터의 상태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빨리, 취조실에 있었던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외부에는 2세대 실종자들이 되돌아오고 나서 포털이 열렸다고 알려졌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포털은 1세대 실종자들이 생기면서부터 있었다.

    1세대 실종자들이 사라지면서 처음으로 생긴 포털. 그 포털은 몬스터를 뱉어 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이 들어갈 수도 없었다. 그걸 정부가 연구하던 도중에 2세대 실종자가 생기고, 그들은 새로운 포털을 통해 돌아왔다.

    이후, 동시다발적으로 생겨난 대량의 포털은 사람 대신 몬스터를 토해 냈고, 자연 발생 각성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지경까지 가서도 처음 생긴 포털은 여전히 용도를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선우는 헌터관리국에 사람을 심었다. 그리고 정부가 감추고 있는 처음 생긴 포털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실종되었던 형이 다시 돌아올까 봐. 아니면 그 관계자라도 나타날까 봐.

    그렇게 10년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 새로운 정보가 들어왔다. 닫힌 포털에서 사람이 하나 나왔노라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선우는 서슴없이 이곳으로 향했다.

    형이 사라졌을 때 선우의 나이는 열한 살. 부모 없이 자라 온 그에게 형은 유일한 핏줄이었다. 그런데 그런 형이 하루아침에 없어져 버렸다. 믿을 수 없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형을 찾아 헤매었다. 고아원에 가게 되어서도, 마계로 끌려가서도, 되돌아오고 길드를 세우면서도. 계속. 계속. 계속.

    현실에 절망하면서도 끝없이 찾았다. 그리고 지금, 오랜만에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뭐, 말하기 싫으면 하지 마십시오.”

    전부 죽여 버리고 찾으러 가면 된다. 아무런 방해하는 이 없이. 나중에 헌터관리국에서 들어올 항의 따위는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다. 손 위에서 머물던 물방울이 수십, 수백 개로 나눠지며 허공을 맴돌았다.

    겉보기에는 아름다워 보였으나, 결과까지 그러진 않으리라.

    다, 다 말하겠습니다.”

    이미 늦었다. 선우는 무료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빨리 형을 찾아야 하는데 이 버러지 같은 이들 때문에 시간을 낭비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시간을 단축하자.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반대편 벽이 터져 나가며 무혁이 도착했다.

    그만하시죠?

    싫다면?

    무력 대응하겠습니다.”

    화르륵. 무혁의 손에서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다루는 것은 불. 선우와는 반대되는 원소였다. 그 때문이었을까둘은 평소에도 사이가 나빴다. 그런데 하필 이런 상황에서 부딪치게 되다니.

    한쪽에서는 물이, 다른 쪽에서는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중간에 낀 관리국 헌터들의 안색만 새하얘졌다. 아무래도 오늘이 제삿날인 모양이었다.

    여기서 잠깐 기다리십시오.”

    무혁은 현우를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무언가 일이 생긴 것 같은데.

    현우는 손가락으로 톡톡 턱을 두드리다가 문에 손을 얹었다. 먹는 것을 제공해 준다기에 얌전히 있었지만, 배가 부르니 슬슬 이성이 돌아왔다. 굳이 여기 묶여 있을 필요가 있나답은 아니다.였다.

    동생도 찾아봐야 하고.

    !

    가볍게 손을 퉁기자 제법 두꺼워 보이는 철문이 문짝째로 떨어져 나갔다.

    이 정도야 쉽지.

    현우는 손을 탁 털고는 그대로 소란이 일어나는 곳으로 향했다. 가기 전에 무슨 일인지 확인만 해 볼 셈이었다. 뒤에서는 케로베로스가 헥헥거리며 열심히 따라왔다. 그게 거슬려 목덜미를 잡아 들자 좋다고 짖어댄다.

    왕왕!

    그래, 그래.”

    현우는 그대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처음 왔던 방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혁이 한 건 현우를 안고서 직선으로 달린 것뿐이었으니까. 뻥하니 뚫린 벽을 통해 안쪽을 들여다보니 절로 이런 소리가 나왔다.

    개판이네.”

    그 목소리에 대치 중이던 장신의 남자 둘과 헌터들이 일제히 현우를 돌아보았다. 장신의 남자 하나는 아까 만났던 무혁이었고, 다른 하나는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래서 현우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누구세요?

    그와 동시에 허공에 떠 있던 물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어 남자는 현우를 향해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했다.

    거참, 얼굴이 반듯하게도 생겼네.

    무혁이 남자답게 훈훈한 외모라면, 그는 좀 더 미인형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스럽단 소리는 아니었다. 키도 크고 몸도 제법 탄탄해 보였으니까.

    그런데 진짜 낯이 익네.

    무혁이 아까 자신의 나이를 스물다섯 살이라고 했으니, 지구의 시간으로는 10년 정도가 흐른 듯했다. 그러면 그때 얼굴을 본 사람이라는 소린데.

    모르겠어.

    현우는 가까이 다가온 남자를 보며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떨어지지 않는 시선이 따갑다. 평소 성격이라면 어디서 눈깔을 부라리냐고 진작 눈알을 찔렀을 텐데. 이상하게도 이 남자에게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현우.”

    남자가 현우 앞에 무릎 꿇고 앉았다. 바닥이 더럽고 엉망인데도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 이름을 어떻게 알아?

    모를 리가 없지.”

    남자가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그러더니 이내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울고 있는 미인의 모습은 파격적이라, 현우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역시 다정하네.”

    자신이 다정하다고소름 끼치는 이야기였다. 아직도 목덜미를 잡힌 채 들려 있는 케로베로스가 몸을 부르르 떠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넌 누군데막 질문을 이으려는 순간, 남자가 눈물을 닦아 준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 왔다. 그리고 말했다.

    형.”

    조심스럽게 불러오는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10년 전의 작은 아이가 떠올랐다.

    지선우?

    작고 여리며 사랑스러운 나의 동생.

    응.”

    남자는 지선우였다.

    지구 시간으로 10년. 마계 시간으로는 수십 년. 그 기간을 버티면서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동생을 지구에 두고 와서 가슴이 미어지는 순간에도 이를 악물고 버텼다.

    어떻게든 지구로 살아 돌아가겠다고. 그전까지는 절대 울 수 없다고 버티는 사이 점점 감정이 죽어 갔다. 다리가 부러져도, 팔이 찢겨 나가도 웃으면서 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랬는데. 눈앞이 흐려졌다. 흐려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선우를 제대로 봐야 하는데. 현우는 손등으로 눈을 닦아 냈다. 그런데 눈이 고장 난 모양이었다. 눈물이 도통 멈추지 않았다.

    선우, 선우야?

    응.”

    돌아오는 대답에 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왜, 왜 울어.”

    이번에는 선우가 현우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아까는 분명 크다고 생각한 남자의 손이건만, 지금은 달리 느껴졌다. 여전히 선우는 여리고 작은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현우는 눈물을 닦는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내내 손에 들고 있던 케로베로스는 이미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다행히 원래 하던 가락이 있어 땅에 제대로 착지한 케로베로스는 눈을 크게 떴다.

    세상에저 미친놈이 울고 있어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케로베로스는 작은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어트리는 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건 케로베로스뿐만이 아니었다.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헌터들과 무혁도 서로의 눈을 의심하며 선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세상에그 지선우가 무릎 꿇은 채 울고 있어사실 저 사람은 지선우가 아니었던 건가아니면 지금 이 모든 게 환상인 걸까.

    ?

    특히 무혁은 스스로 자신의 손에 상처를 입혀 보기도 했다. 그러나 눈앞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선우는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현우는 한참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다가 선우처럼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미안해. 정말 미안해. 선우야.”

    현우의 미안하다는 말에 선우의 가슴이 서늘해졌다. 사과하는 이유를 알 수 없어서. 내내 형만 생각해 오던 마음에 찬바람이 스쳤다. 혹시 형은 자신과 만나는 걸 원하지 않은 걸까.

    왜.”

    왜 사과해되물으려는 순간, 현우가 말을 이었다.

    나만은 곁에 있어 주겠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고작 열한 살이었던 동생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 부모님이 돌아가시던 날, 이 여린 존재를 세상의 모든 상처로부터 보호해 주겠다고 그렇게 결심했는데. 무려 10년이란 세월 동안 혼자 두었다.

    약속 어겨서 미안해.”

    선우가 용서하지 못한다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여전히 다정하다니. 그건 과분한 말이었다.

    현우의 그런 말을 들은 선우는 안심했다. 떨어져 있는 동안, 형도 내 생각을 했구나. 나를 잊지 않았구나. 그리고 그 세월만큼 자신에게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구나.

    형을 만나 터져 나온 감정의 파도에 허우적거리면서도, 계산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다.

    4.

    모든 것은 어린 동생을 버려두고 사라졌던 형의 잘못. 선우는 본능적으로 형의 죄책감을 가장 자극할 수 있는 말을 골랐다.

    괜찮아.”

    그렇게 말하자 형의 눈에서 또다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마계로 끌려가서 그곳에서 지냈지만, 지구의 상황은 대충 알고 있었다. 빌어먹을 요정이 가끔 소식을 알려 줬다. 진작 터트렸어야 하는 건데.

    몬스터가 쏟아지고 세상이 변화하는 와중에 어린아이가 의지할 이 하나 없이 홀로 남은 것이다. 많이 힘들었을 터였다. 그런데 괜찮다니. 선우의 거짓말은 현우를 더 괴롭게 했다.

    아냐, 나는 정말 괜찮았어. 비록 많이 힘들고, 많이 괴로웠지만.”

    선우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형에게 말했다.

    현우의 추측은 틀리지 않았다. 선우는 각성하기까지 힘들게 살아왔다. 각성하고 나서도 믿을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버텨 내며 지금의 자리를 거머쥐었다. 그래도 선우는 괜찮다고 말했다.

    형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으니까.”

    그 담담한 목소리가 현우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봐, 결국 돌아왔잖아.”

    현우는 무너져 내렸다. 돌아온 것, 그걸로 된 거야자신의 동생은 어쩜 이리도 착한지 모르겠다. 어떠한 원망을 토해 내도 모자랄 판국에 상냥한 말을 하는 동생을 보고 있자니,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명확해졌다.

    내가 너를 지켜 줄게. 아무도 널 해칠 수 없도록. 현우가 생각하는 바를 입으로 꺼내려는 순간, 선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니 이제 형은 내가 지켜 줄게.”

    그래, 네가 이제 형을 지켜 줘. 응현우는 울다 말고 고개를 들어 선우를 바라보았다. 뭔가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예전에는 형이 나를 지켜 줬으니까. 이제는 내가 지켜 줄 차례야.”

    아니, 나 진짜 강한데. 안 지켜 줘도 되는데. 내가 그렇게도 약해 보이나. 현우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구의 무력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마계 1위랑 맞짱 뜰 정도면 강한 축이 아닐까 싶은데. 왜 저렇게 말하나 모르겠다.

    낑.”

    현우랑 선우의 만남을 내내 지켜보던 케로베로스도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었다. 어이, 인간. 그건 아니지 않을까. 네 앞에 있는 사람은 마계 서열 1위의 알베르크 님과 맞짱도 떴다고. 그 말은 어지간한 인간은 현우를 이기지 못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왕왕!

    케로베로스는 멍청한 인간에게 현실을 자각시켜 주기 위해 앞으로 나섰으나, 그런 그의 머리를 현우가 내리눌렀다.

    닥치고 가만히 있어.

    강렬하게 전해지는 의도에 케로베로스는 다시 얌전해졌다.

    현우는 생각했다. 그래, 선우가 그걸 원한다면. 나는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어차피 힘을 쓰는 생활도 지쳤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동생을 위해 내내 성실하게 달려왔지만, 실상 그의 본성은 게을렀다. 쉬고 싶었다.

    그래. 지켜 줘.”

    네가 원한다면 뭐든 못할까. 현우의 말에 선우가 환하게 웃었다. 마치 햇살 같은 미소였다.

    응, 형.”

    그러더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현우를 대뜸 일으켜 세우더니 그대로 안아 들었다. 치욕의 공주님 안기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케로베로스는 앙증맞은 두 발로 머리를 가리고 엎드렸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니, 일어나긴 했다. 선우는 현우를 안아 든 채로 저 멀리 걸어가고 있었다.

    와앙!

    나도 같이 가야 하는데케로베로스는 허겁지겁 달려 나갔다. 그리고 남은 헌터들과 무혁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저대로 보내도 됩니까?

    그나마 간신히 입을 연 건 한참 뒤였다.

    보내지 않으면 어쩌겠습니까.”

    무혁이 답했다. 사실 보내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둘의 눈물에 생각이 많아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옷을 툭툭 쳐서 먼지를 떨쳐 내고는 뒤돌아섰다. 하나뿐인 1세대 실종자를 선우에게 빼앗겼으니 후속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전까지는 오래 떨어져 있던 형제가 재회하는 순간을 내버려 두는 게 낫겠지. 무혁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든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 그렇게 결심했지만,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았다. 현우에게는 아직 어릴 때의 기억이 선명해서, 힘센 장신의 남자와 어린 동생을 매치시키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그렇기에 당장 떠오르는 건 여리고 약한 동생이라. 그런 동생에게 무리를 시키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무겁지 않아?

    전혀.”

    선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말 그대로였다. 형은 지나치게 작고 말랐다. 이런 몸으로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한 걸까. 목이 메어 왔다.

    전혀 무겁지 않아.”

    그러더니 현우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현우는 좀 더 편하게 몸에서 힘을 뺐다. 지금은 동생을 믿어 보자. 그런 생각에서였다.

    형은 너무 말랐어.”

    말랐나마계의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최소한으로 먹은 건 맞다. 그래도 나름 근육도 잡혀 있는 몸인데.

    또 너무 작아.”

    마른 건 참아도 작은 건 못 참는다.

    그건 아니지.”

    그래도 키가 175는 넘는데 그게 작다니. 정확히는 자신이 작은 게 아니라 선우가 큰 것이었다.

    네가 너무 큰 거야.”

    작고 귀엽던 동생이 정말 많이도 자랐다.

    각성자는 등급이 높을수록 신체 조건이 좋아지니까. 자연히 키가 크고 몸이 단단해지지. 형, 나는 S급 각성자야.”

    뭐라고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이 말은 강할수록 몸도 같이 큰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 나는 왜 이래분노에 절로 몸이 떨려 왔다.

    시발 놈의 요정새끼!

    요정에게 따지고 싶은 것이 아주 많았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면 여기에는 요정이 없다는 것이었다. 요정은 다른 세계에서는 미친 듯이 참견하지만, 인간 세상까지는 나오지 못한다고 했다. 세상의 균형을 위해서.

    역시 진작 터트렸어야 했다.

    분노로 떨림이 멈추지 않는 가운데, 선우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자신보다 커서 늘 든든하게 보이던 형이 지금은 그보다 작고 약해졌다. 심지어 지금은 몸까지 떨고 있지 않은가.

    예전과는 완전히 바뀐 입장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형이 싫다거나, 한심스러워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바뀌었어도 형은 여전히 선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하나뿐인 가족이었다.

    역시 형은 자신이 지켜 줘야 한다. 그 생각이 더 확고해지는 순간이었다.

    뻥 뚫려 기능이 망가진 건물을 지나 밖으로 나왔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엔 환한 해가 떠 있었고, 어디선가 기분 좋은 따스한 바람이 불어왔다. 마계와는 완전히 다른 환경을 보니 그제야 내내 생각하고 있던 것이 마음에 와닿았다.

    돌아왔구나.

    정말 돌아왔다. 현우는 울컥했다.

    이제 내려 줘.”

    좀 더 지구의 환경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알기라도 한 듯, 선우는 현우를 바닥에 내려 주었다. 들이켜는 숨이 달다. 마계의 톡 쏘는 듯한 대기와는 완전히 다르다.

    생각해 보면 열다섯 살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끌려간 사람 중 현우가 가장 어린 나이였다.

    그래도 이제 그 엿 같은 곳을 벗어났어.

    현우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얼마 만에 제대로 웃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때,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길드장님.”

    장신에 호리호리한 몸을 가진 남자가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몸에 달라붙는 레이싱 슈트를 입은 그는 곱슬곱슬한 옅은 갈색 머리를 손으로 흐트러트렸다. 그러고는 선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런, 벌써 저지르셨습니까?

    그는 이번엔 현우 쪽을 바라보았다.

    1세대 생존자입니까?

    시선은 현우를 향하고 있었지만, 말은 선우에게 걸고 있었다. 완벽하게 현우를 무시하는 행태였다. 그 모습에 선우의 손이 자연스럽게 올라가더니, 인정사정없이 곱슬머리의 머리를 후려쳤다.

    !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내 머리!

    남자는 머리를 붙잡으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내 형입니다. 예의를 지키십시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

    두 번 말해야 이해합니까?

    선우는 다시 손을 들었다. 그러자 남자가 양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러고는 현우를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약해 보이는데.”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현우가 뭐라도 하기 전에 뒤에서 까만 털 뭉치가 쏜살같이 뛰쳐나가 남자에게 박치기를 했다. 마치 대포알 같은 기세였다.

    뭐야, 이 털 뭉치는!

    겉보기에는 손바닥 두 개 합친 크기의 작은 강아지. 그러나 실상은 마계의 이름난 마수 케로베로스였으니. 작정하고 부딪치니 이마가 얼얼했다.

    왕왕!

    케로베로스는 남자를 응징하고 가슴을 폈다. 보세요, 현우 님. 제가 무례한 자를 혼내 주었습니다현우가 열받으면 주변이 초토화되는데, 이 무례한 자는 그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괜히 엮여서 같이 처맞기는 싫었다.

    저건 뭐야?

    그런 케로베로스를 보며 선우가 물었다.

    아, 케로?

    여기서 사실 케로베로스가 마계의 마수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으니. 최대한 밝힐 수 있는 부분만 밝히기로 하였다.

    강아지야.”

    강아지평범한 강아지 같진 않은데.”

    그건 그런데 말은 잘 들으니 괜찮을 거야.”

    그동안 주먹으로 길들였으니, 안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누구야?

    부길드장.”

    안녕하십니까, 서찬영이라고 합니다. 선현 길드의 부길드장을 맡고 있습니다.”

    인사는 정중했지만, 그게 다였다.

    5.

    아무래도 이 사람은 현우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사람에게는 굳이 대우를 해 줄 필요성을 못 느껴 현우도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만 한 것이다. 적어도 주먹으로는 인사하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길드가 뭐야?

    자신이 없는 사이에 뭔가를 세운 건가현우의 질문에 선우가 대답했다.

    그냥 사람 모인 단체.”

    그래도 그런 곳의 길드장이면 대단한 거 아냐?

    그 말에 선우가 수줍게 웃었다. 그리고 옆에서 그걸 실시간으로 보고 있던 찬영은 기겁한 표정을 지었다.

    언제나 냉랭하게 찬바람만 몰고 다니던 길드장이 웃고 있었다. 심지어 반말을 쓴다.

    나한테는 안 써 주면서!

    왜 반말을 쓰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랬다. 자신은 친해지기 전까지는 말을 낮추지 않는다고. 그랬는데 형이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게 모든 걸 터놓고 있었다.

    아니, 알지.

    선우가 열한 살 때 형을 잃었고, 이후 힘겹게 길드를 세우기까지의 이야기는 다큐멘터리로도 나왔다. 그래서 찬영도 사정은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약한 거 아냐?

    1세대 실종자일 텐데. 아무런 힘도 느껴지지 않는다. 자연 찬영의 안에서 현우의 위치는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갔다. 강한 사람이 좋아서, 선우의 길드에 들어와 힘겹게 여기까지 올라왔다. 그런데 고작 형이란 이유로 옆에 서 있다니. 불공평하다.

    찬영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차는 준비되었습니까?

    네,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가자, 형.”

    선우는 또다시 현우를 안아 들려고 했다.

    아니, 괜찮아. 이번엔 내가 걸을게.”

    하지만 그러면 형이 힘들잖아.”

    전혀 힘들지 않다. 옆에서는 케로베로스가 저 인간이 뭔 개소리를 하냐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현우는 그런 케로베로스의 머리를 살짝 쳤다. 그러자 죽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깨개개갱!

    엄살이 심하다. 현우는 한참을 구르다 축 늘어진 케로베로스의 목덜미를 잡아 들며 말했다.

    정말 괜찮아.”

    그럼 천천히 걷자.”

    !

    둘은 여름의 초입에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만끽하며 차까지 걸어갔다. 차는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랗고 고급스러운 차였다.

    내 차야.”

    선우가 그렇게 말하며 수줍게 웃었다.

    대단하구나!

    해 준 것도 없이 사라져 버렸는데, 선우는 그동안 너무나도 잘 자랐다. 그 사실에 순간 울컥했다. 이 모든 게 현우, 자신의 죄였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도 않았을 텐데 어쩜 이리 잘 자라 주었는지. 그저 미안할 뿐이었다.

    타자.”

    선우가 운전대를 잡고, 현우가 보조석에 탔다.

    길드장님, 저는요!

    타고 온 게 있을 것 아닙니까.”

    그야 그렇지만!

    알아서 돌아가십시오.”

    그렇게 선우는 매정하게 찬영을 뿌리쳤다.

    탑승을 거부당한 찬영은 황급히 구석에 놓인 자신의 바이크에 올라탔다. 그리고 이미 출발하여 저 멀리 앞서 있는 선우의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선우는 찬영에게 살갑게 굴지 않았다. 그걸 아는데도 이상하게 평소보다 더 가슴이 답답했다.

    바이크네.

    까만색에 날렵하게 생긴 독특한 바이크가 뒤를 따랐다. 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선우가 물어 왔다.

    맘에 들어?

    뭐가?

    바이크.”

    맘에 들기야 한다. 보고 있자니 마계에서 타고 다녔던 드래곤이 생각나 어쩐지 그리워졌다. 잘 지내고 있겠지. 나의 바이크 1호.

    물론 2호랑 3호도 있다. 연료는 마계의 마수요, 시동은 주먹이면 충분했던 자신의 바이크들. 하지만 그걸 선우에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수줍게 웃으며 대답했다.

    멋지긴 하네.”

    그 말에 선우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저런 바이크쯤 형이 원한다면 몇 개든 구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걱정되는 건 단 하나. 안 그래도 연약해 보이는 형이 바이크를 타다가 다칠까 봐. 차마 구해 주겠단 말을 하지 못했다.

    더불어 찬영에게서 바이크를 뺏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괜히 형이 보고서 타고 싶어 할라. 대신 다른 차를 주면 되리라. 찬영이 듣게 되면 기겁할 생각을 하며 선우는 부드럽게 운전대를 돌렸다.

    그런 동생을 보며 현우는 새삼 감상에 잠겼다. 쭉 뻗은 도로, 높은 빌딩, 거리를 메운 사람들. 하나같이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들이었다. 그 때문인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마침내, 차가 어느 빌딩 앞에서 멈춰 섰다.

    다른 건물보다 훨씬 크고 번쩍거리는 빌딩 앞에 선 선우는 먼저 현우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었다.

    내리자, 형.”

    여긴 어딘데?

    현우의 질문에 선우의 답이 돌아왔다.

    우리 집.”

    아니, 우리 집은 좀 더 작고 아담했는데. 달동네 구석에 있던 작은 월세방. 여름에는 비가 새고, 겨울에는 추웠던 그 방이 그들의 집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집이라니.

    엉겁결에 선우에게 이끌려 빌딩으로 들어서니,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쪽을 향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그 모습에 현우가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둘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는 가장 위층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문이 나타났다. 일반적인 문과는 다르게 생긴 은빛의 두꺼운 문. 현우는 가까이 다가가 문을 손으로 만져 보았다.

    깰 수 있을 것 같은데.

    느낌으로 보아 마수의 껍질을 사용하여 만든 문인 듯했다.

    들어가자.”

    선우가 카드를 대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드러난 내부를 본 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아하고 고급스러운 내부는 생전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그야 어릴 땐 단칸방에서 살았고, 커서는 마계에서 머물렀으니까 당연한 소리였지만 말이다.

    우리 집이야.”

    선우는 강조하듯 다시 말했다.

    형의 방도 있어.”

    그 말에 다시 가슴이 찡하니 아파왔다. 다시 나타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자신을 위해 방을 만들어 놓은 동생의 심정이 와닿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가 보자.”

    현우는 씩씩하게 선우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다시 감탄했다. 자신의 방이라 안내해 준 곳이 너무나도 크고 아름다워서. 감탄사밖에 내뱉을 수 없었다.

    와아.”

    한참 감탄하다가 뒤늦게야 제정신을 차리고 선우에게 물었다.

    이런 데는 비싸지 않아?

    아무리 마계에 살아서 물가를 모른다고 해도, 이 정도는 알았다.

    괜찮아. 이 빌딩이 내 거거든.”

    하지만 이어지는 선우의 대답에 현우는 다시 입을 벌렸다. 이 빌딩이 선우 거라고밖에서 보았던 빌딩의 크기를 생각해 보았다. 주변 건물들에 비해 훨씬 컸었지그리고 주변에도 이 빌딩보다는 작지만, 비슷한 건물이 여럿 있었다. 그럼 이 빌딩의 가격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다른 데도 또 있어. 혹시 여기가 맘에 안 들면 말해 줘.”

    그런데 여기 말고 또 있단다. 자신이 없는 사이에 동생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아냐, 맘에 들어!

    현우는 잽싸게 고개를 내저었다.

    앙앙!

    내내 존재감이 잊혀 있던 케로가 이때다 싶어 잽싸게 짖었다. 그러고는 근엄한 포즈로 서서 방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제 이 방은 현우 님이 지낼 방. 케로로서는 안전을 철저히 점검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라도 사소한 일로 귀찮게 했다가는 지랄 맞게 화를 낼 테니까. 체크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 애완동물은 금지인데.”

    그런 케로를 보며 선우가 배시시 웃었다.

    ?

    누구보고 애완동물이래케로가 발광하려는 순간, 현우가 선우를 올려보며 물었다.

    안 돼?

    말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안 되진 않지.”

    어이, 방금 안 된다며. 케로는 차갑게 식은 눈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형이 원하면 안 되는 건 없어.”

    오랜만에 만난 형제는 서로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절로 분위기가 포근해졌다. 아, 이게 행복이구나. 현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

    1세대 실종자라고.”

    말을 내뱉은 남자는 독특한 외모의 소유자였다. 한쪽 눈은 백안인 데다가 눈을 가로지르는 상처가 있다. 그 때문에 원래도 싸늘해 보이던 인상이 더 험악해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도가준. 선현 길드에 밀려 2위가 된 백호 길드의 길드장이기도 했다.

    그걸 지선우 혼자 삼켰단 말이지. 욕심도 많지. 그런 건 나눠야지.”

    하지만 혼자서 지선우에게 1세대 실종자를 공유하자고 하면 귓등으로도 안 들을 게 뻔했다. 그렇다고 그걸 강제로 듣게 만들 수도 없었으니. 그럼 어떻게 하느냐?

    모이면 되지.”

    가준은 히죽 웃었다.

    다른 길드에 소식 돌려.”

    정말 돌립니까?

    부길드장인 민영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가준은 말을 바꾸지 않았다.

    현재 각성자들은 정체되어 있다. 그런 상황에서 등장한 1세대 실종자라니. 탐나는 소재 아니던가. 물론 꽝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닐 가능성도 있었다. 그게 뭐든 지선우 혼자 가지게 두는 것도 거슬렸고.

    좋은 건 나눠야지.”

    가준은 독한 눈빛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가준이 마음먹고 움직이니 길드마다 1세대 실종자에 대한 소문이 도는 건 금방이었다.

    정보 출처가… 보자, 도가준?

    온화하게 생긴 청년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이 지선우.”

    둘의 사이를 알고 있는 청년, 자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6.

    대놓고 도가준이 지선우에게 시비를 거는 모양인데 여기 끼어도 될까하지만 1세대 실종자의 존재는 자윤도 탐났다.

    뭔데, 뭐야?

    고민하고 있는데, 자윤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 책상 위로 엉덩이를 올렸다. 자윤의 여동생인 아윤이었다. 비록 같이 각성하지는 않았지만, 머리가 좋아서 길드 내의 지낭 역할을 하곤 했다.

    1세대 실종자가 나타났어.”

    1세대 실종자다 죽은 거 아니었어정말?

    그래, 그런데 정보 출처가 도가준이다.”

    아, 그 아저씨?

    너랑 몇 살 차이 안 나잖아.”

    20대 후반이면 다 아저씨지.”

    너 그러다 돌 맞는다.”

    누가 감히 돌을 던져요람 길드 자윤의 여동생인데.”

    그야 그렇지만, 좀 더 말을 조심할 수는 없나.

    아윤은 머리는 좋은데 가끔 말을 쉽게 하는 게 단점이었다.

    하여간 이렇게 되면 한 손에 꼽히는 길드는 다 노리겠네?

    그렇겠지.”

    어디 보자, 선현 길드는 지선우 길드니까 빼고. 2위인 백호 길드. 3위인 우리 요람 길드. 4위인 혜선 언니의 최강 길드. 5위, 5위는 누구였더라. 최근 길드 순위가 엎치락뒤치락해서. 아, 맞다평화 길드. 이름이 참 촌스럽네. 여기 길드장이 누구였더라. 보자… 한도진. 그런데 이 사람은 정보가 너무 없어.”

    최근에 급부상한 길드인데, 길드장의 정보가 너무 없었다. 각성자들끼리 힘 순위를 다투는 대회에 나온 적도 없었고, 길드 회의에도 언제나 대리인을 보냈다. 그러니 몇 세대 각성자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2세대 아니면 3세대겠지만.”

    세대를 올라갈수록 헌터의 힘은 강했으니까. 이름을 들어 봤을 법한 길드는 2세대나 3세대 헌터가 길드장이다.

    딱 한 번 본 적 있긴 하지만 참 음침했지.”

    몸을 구부정하게 말고 후드티를 깊이 눌러쓰고 있었다. 옷도 어쩐지 낡은 느낌이 나서 접근하고 싶지 않았다.

    옷만 제대로 입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왜 매번 같은 옷만 입는지 모르겠다니까.”

    그랬었나?

    그랬어. 자세만 바르게 하면 오빠보다 키가 더 클 덴데.”

    나보다?

    응.”

    그 말에 자윤은 새삼 감탄했다. 한 번 스치듯 본 사람이었는데, 그런 건 또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대. 이러니 여동생이 사랑스럽지 않을 리 없었다.

    잘 봤네.”

    나는 원래 잘 봐.”

    아윤은 헤헤 웃으며 답했다.

    자, 그럼 우리도 1세대 실종자를 노려 볼까?

    상대가 지선우이긴 하지만, 도가준이 힘을 모으자고 했으니.”

    승산이 없는 건 아냐!

    선현 길드가 아무리 크고 강해도. 지선우가 지랄 맞아도.”

    길드 여럿이 힘을 모으는데 아예 모르는 척 넘어갈 순 없겠지.”

    그거지!

    둘은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1세대 실종자라니, 그에게서 무엇을 알 수 있게 될지 두근거렸다.

    *

    커다란 창에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하지만 덥지는 않았다. 내부에서 에어컨이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으니까. 그 상태로 소파에 길게 누워 있자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앙앙!

    케로도 바닥에 네 발을 쭉 펴고 누워서는 가끔 작게 짖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하긴 마계는 날씨도 엿 같고, 평화로운 낮잠을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그렇게 가만히 평화를 즐기고 있자니 선우가 컵을 하나 들고 다가왔다.

    형, 주스 마셔.”

    옅은 주홍빛의 주스는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다소 낯선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주스가 빛나네?

    햇빛 때문인가 했는데, 그도 아닌 것 같았다.

    몸에 좋은 걸 조금 갈아 넣었어.”

    선우는 수줍게 말하며 현우에게 컵을 넘겼다.

    어쩜 애가 이리 착해.

    오랫동안 버려둔 형을 원망해도 모자랄 판에, 이러는 걸 보니 가슴이 찡했다. 나도 뭔가 해 줘야 할 텐데. 현우가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그걸 읽기라도 한 듯 선우가 입을 열었다.

    형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해. 그러니 형은 아무것도 안 해도 돼.”

    선우야.”

    결국, 감동의 파도에 허우적대던 현우는 선우를 꼭 끌어안았다. 어릴 적에 선우를 돌보던 버릇이었다. 선우는 형이 안아 주고 스킨십을 하는 걸 무척 좋아했으니까.

    혀엉.”

    선우는 그런 형을 마주 안았다. 오랜만에 만난 둘 사이에서는 우애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런 둘을 케로베로스는 흰 눈으로 바라보았다.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수시로 눈에 들어오니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저 인간이 뭐라고 저렇게 수시로 끌어안아 대냐. 형제라고는 하나도 없는 케로베로스로서는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길드장이라며. 일 안 해도 돼?

    머무르면서 선우가 건네준 휴대폰으로 이런저런 정보를 검색해 보았다. 보아하니 선우의 길드는 한국에서도 1위로 손꼽히는 커다란 길드로, 기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며칠 쉬기로 했어. 나도 그동안 계속 달려오기만 했으니까.”

    그래쉴 땐 쉬어야지.”

    케로베로스는 이제 관심 없는 얼굴로 탁자 다리를 이로 갉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케로베로스를 무시하며 현우는 선우에게 권했다.

    너도 여기 누울래?

    소파가 커서 둘도 충분히 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돼?

    당연하지.”

    현우가 다시 눕고 바로 옆에 선우가 누웠다. 선우의 덩치가 더 커서 몸의 일부가 소파 밖으로 삐져나왔지만, 아무도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외려 현우는 동생이 떨어질까 봐, 선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갉작갉작.

    케로베로스가 탁자 다리를 갉는 소리가 더 커졌다. 그렇지만 둘은 그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환장하겠네. 케로베로스는 한숨을 쉬며 자기가 갉던 탁자 다리에 기댔다.

    현우는 금방 곯아떨어졌다. 그런 형을 선우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지금은 잘 자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깊은 잠에 들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이해는 한다. 그도 다른 세계로 끌려가 요정에 의해 혹사당한 적이 있으니까.

    매일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마수 때문에, 미쳐 버린 사람들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 때문인가. 지구로 돌아와서도 오랫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창백한 안색으로 눈을 감은 형이 안타까웠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선우는 눈을 감은 형을 꼭 끌어안았다. 이제는 절대 형과 떨어지지 않으리라. 형을 지켜 주리라. 이제는 그럴 힘도 능력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사납게 웃었다.

    도가준, 씨발 새끼.

    길드 사이로 1세대 실종자가 귀환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파고든 결과, 소문의 근원지는 백호 길드의 도가준 같았다. 그 또한 선우와 같은 2세대 각성자였다. 다른 세계에서부터 서로 견제하던 둘은 현실로 돌아와서도 사이가 나빴다.

    눈알 긁어 준 거로는 성에 안 찼나.

    감히 형을 노려어떻게 만났는데 쉽게 다른 이들에게 넘겨줄 수 없었다. 그리고 형을 힘들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이제부터 그들에게 대응할 때였다. 선우의 표정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그도 잠시, 다시 표정이 풀렸다. 일단 지금 여기 있는 형에게 집중할 때였다. 선우는 형처럼 자신도 눈을 감았다.

    *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선현 길드에 가해지는 압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제아무리 1위 길드라 해도 다른 길드들이 모여서 힘을 합치니 버텨 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걸 가장 몸으로 느끼고 있는 자는 부길드장인 찬영이었다.

    길드장인 선우가 미룬 일을 전부 처리하고 있던 찬영은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소식에 이를 갈았다.

    이것들이 미쳤나!

    떨거지들이 모이면 뭔가 달라질 줄 아나. 왜 난리들인지 모르겠다. 그놈의 1세대 실종자가 뭐라고. 길드장인 선우는 며칠째 출근을 미루고, 다른 길드들은 자신들과도 실종자를 공유하자고 땍땍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헌터관리국은 한 발짝 물러서 눈치만 살피고 있으니 다행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까짓 1세대 실종자 따위 저들에게 던져 주고 싶었다. 하지만 안 된다. 아무리 약하고 쓸모없어 보여도 길드장의 가족이다. 무려 대한민국 서열 1위인 길드장의 가족. 마음에 안 들어도 다른 데서까지 무시당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건 길드장의 권위와도 관련된 일이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던 찬영은 회의 때 실무진들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는 1세대 실종자를 절대 넘기지 않습니다. 다른 길드에서 뭐라 말하건 자리를 지키십시오. 이건 선현 길드의 위상과도 관계된 일입니다. 함부로 정보를 유출하거나, 다른 길드의 생각에 동조하는 이는 엄하게 벌하겠습니다.”

    개 같은 성격이었지만 지선우의 밑에서 몇 년을 굴렀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찬영은 누구보다 선현 길드의 부길드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귀하가 말한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도가준은 선현 길드에서 도착한 서류 봉투를 뒤집어 보았다. 그러나 저 한 문장이 적힌 종이 외에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지어 보낸 사람은 서찬영이네?

    선현 길드의 부길드장. 지선우라면 사족을 못 쓰는 개새끼.

    야, 이게 몇 장째냐?

    세 장째입니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배에 힘을 빡 주며 대답했다.

    그래. 세 장째. 우리가 제안 넣은 건 몇 개고?

    다섯입니다.”

    두 번은 답장도 안 했단 소리네?

    “……네.”

    옆에 서 있던 부하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도가준은 깊게 숨을 내쉬었다.

    7.

    건방진 서찬영. 지선우 밑에 있으니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지선우 하나 믿고 날뛰는 놈이라 욕을 보내지 않은 걸로도 나름 자제한 것이다. 그걸 알긴 아는데 말이지.

    속이 뒤집혔다.

    지금까지 가준의 말이 이렇게까지 먹히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쳐 준다고 해도 독불장군은 오래 버틸 수 없다. 지선우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다른 길드의 의견도 수용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진짜 뭔가 있나 보네?

    도가준이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웃었다. 비열해 보이는 웃음이었다. 선현 길드가 이렇게 나오니 더 찔러 보고 싶어졌다. 정식 루트로 말을 안 받아 주면 다른 방법도 있지 않은가.

    언제까지 안에서 박혀 있기만 하겠어.”

    정부 기관인 헌터관리국도 아닌 척하면서 슬슬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계속 한 장소에 1세대 실종자를 둔다고자신 같으면 안 그런다.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겠지. 그때를 노리면 된다.

    도가준은 새로이 계획을 세웠다.

    이리 데굴, 저리 데굴. 거실의 러그 위에서 구르던 현우는 괜히 잘 자고 있는 케로를 찔러 보았다.

    꾸억!

    배를 찌르니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도 깨지 않는다. 원래 이렇게 경계심이 없는 마수가 아닌데, 벌써 평화에 찌든 모양이었다. 현우가 죄 없는 케로를 괴롭히자, 소파에 앉아 흐뭇한 얼굴로 형을 바라보고 있던 선우가 물었다.

    심심해?

    아니. 딱히 심심한 건 아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얼굴에는 심심해 죽겠다고 적혀 있었다. 내내 집에 갇혀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뭔가 해 보고 싶은 거 있어?

    해 보고 싶은 거?

    현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해 보고 싶은 거. 마계로 간 초반에는 하고 싶은 것들을 손꼽으며 버티던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점점 기억은 희미해졌다. 남아 있는 건 하나뿐인 가족인 선우에 대한 것뿐. 그 외는 이미 포기한 지 오래였다.

    쇼핑이라도 갈까?

    선우가 담담하게 물어 왔다.

    나가도 돼?

    현우도 바보는 아니었다. 대충 선우의 상황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1세대 실종자, 그를 품고 있는 선현 길드. 그다음은 대충 예상이 되었다.

    안 될 건 뭐람.”

    쉽게 이야기할 게 아닐 텐데. 현우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선우를 바라보았다. 그런 현우를 보며 선우는 웃었다.

    형, 내가 왜 길드를 만들었는지 알아?

    왜 만들었는데?

    혼자보다는 여럿이 형을 찾기 더 쉽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야. 선현 길드는 형을 위해서 존재하는 거야. 그리고 선현 길드가 있으면 형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무엇보다 나도 있잖아.”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선우는 대체 왜 이리 자신을 위해 주는 걸까. 10년을 홀로 둔 못난 형인데. 괜스레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울지 마, 형.”

    안 울거든?

    응. 알았어. 그럼 나갈까, 형?

    현우는 찡해 오는 코끝을 문지르며 일어났다.

    그래, 나가자까짓것 나가지 뭐!

    기특한 동생과의 첫 외출이다. 방해하는 놈이 나타나면 으깨 버릴 테다현우는 살벌한 생각을 하며 동생과 마주 웃었다.

    으앙!

    현우가 일어서자 케로도 자리에서 엉기적거리며 일어섰다. 따라가야지.

    외출 준비는 금방 끝났다. 애초에 준비할 것도 별로 없었다. 그냥 입고 뒹굴던 옷만 갈아입으면 끝날 일이었다. 현우는 선우와 나란히 걸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다. 층수가 점점 내려가고, 1층이 되자 문이 열렸다. 그리고 이어 보인 광경에 현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깜박였다.

    넓은 1층 홀에 사람이 가득 차 있었다. 하나같이 정장을 걸치고, 무기를 소지한 각성자들이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사람 하나가 다가왔다. 저번에 보았던 레이싱 슈트를 입은 청년, 부길드장 찬영이었다.

    오늘의 그는 다른 이들처럼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피곤한 듯 눈 밑이 거뭇하긴 했으나 말끔하게 차려입으니 제법 잘생겼다. 현우의 동생인 선우만큼은 아니었지만. 현우는 아직 선우보다 잘생긴 사람을 보지 못했다. 사람이 아닌 존재라면 하나 있었지만, 알베르크는 다신 만나지 못할 존재가 됐으니까 패스다.

    오셨습니까?

    준비는 끝났습니까?

    끝났습니다. 백화점도 섭외했고, 미리 사람을 보내서 점검 중입니다. 도착할 무렵엔 끝날 겁니다.”

    철저히 하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둘의 대화가 끝나고 선우가 현우를 돌아보았다. 현우는 그제야 어깨를 으쓱하며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뭐야?

    경호원이야.”

    경호원?

    아무래도 둘만 움직이기엔 위험해서 사람을 조금 동원했어.”

    선우는 그렇게 말했지만, 조금이라기엔 그 수가 제법 많다. 게다가 선우에게는 한참 미치지 못했지만, 제법 쓸 만한 자들이었다.

    괜찮지?

    둘만 외출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너무 많이 붙는다. 도로 들어가서 뒹구는 게 나을까, 하고 선우를 바라보니 눈이 반짝거린다.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괜찮아.”

    결국, 현우는 선우가 원하는 대로 하기로 했다. 양쪽에 늘어선 사람들을 지나 차에 탑승하자, 앞과 뒤를 차가 에워쌌다. 어쩐지 조금 부끄러웠지만, 선우를 보면서 참았다.

    대체 누구람경호를 맡은 1팀에서 3팀까지의 팀원들은 하나같이 호기심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호위 대상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부길드장인 찬영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길드장님에게 소중한 분입니다.”

    찬영은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그 이상은 아직 그들에게도 밝힐 수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팀장들은 의욕이 넘쳐났다.

    평소에 그들의 손을 필요로 하지 않던 길드장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니. 성격에는 여러모로 문제가 있었지만, 그들을 여기까지 이끌어 온 사람이었다. 존경하지 않을 리 없었다.

    맡겨 주십시오!

    그들은 힘차게 외쳤다.

    선우는 그들의 합류를 막지 않았다. 아무리 본인이 주의해도 만약의 경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으로 현우를 본 순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누군지 알 수 없는 건 둘째 치고, 길드장이 보이는 태도 때문이었다.

    언제나 무감해 보이던 길드장이 한 사람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를 본 몇몇은 자신의 눈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변하지 않았다.

    지금 내가 보는 거 환상 아니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 길드장님이!

    능력은 뛰어나지만, 성격은 개차반이라 언제나 외부에 보이는 모습을 조작하느라 바빴는데. 그런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저런 모습은 처음 봤어!

    그러게 말입니다.”

    팀장들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오늘 임무, 제대로 해내야겠는걸.”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들은 기합을 넣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선우가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어디부터 갈까?

    들떴네.

    정작 외출하고 싶었던 건 자신보다 선우였던 모양이었다. 선우는 밖으로 나오는 순간부터 내내 들뜬 것 같았다. 반면 현우는 신경을 거슬리는 감각을 내리누르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기준으로는 강하다 할 수 없는 자들이었으나, 그런 자들이 수십 명이 들러붙자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나름 거리를 두고 호위를 하고 있었지만, 감각이 예민한 현우에게는 그 거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참자, 동생이 원하는 일인걸. 현우는 손을 꽉 쥐었다.

    이제 백화점에 갈 건데, 뭐 사고 싶은 거 없어?

    그런 현우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우가 웃으며 물어 왔다. 그래, 모처럼 동생과 외출했는데 타인의 존재감은 잊도록 노력해 보자.

    어, 그럼. 옷?

    옷이라면 선우가 잔뜩 사다 나르고 있었지만, 달리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좋지. 형에게 어울리는 걸로 골라 보자. 그리고 새 옷을 입고 카페에 가서 차를 마실까?

    좋지.”

    차는 커다란 백화점 앞에 멈춰 섰다. 어렸을 적에도 지나가면서 보기만 했지, 단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미지의 장소였다. 그 때문인가조금 긴장이 됐다.

    들어가자.”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백화점의 문 입구의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문 닫은 거 아냐?

    겉으로는 그렇지.”

    선우는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환영하듯 문이 열리며 백화점 직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화려하게 반짝이는 불빛 아래, 넓은 공간이 드러났다. 그 모습에 잠시 멈칫거리니 선우가 현우의 손을 잡아왔다.

    괜찮아. 오늘 여기 하루 종일 빌렸거든. 형이 하고 싶은 건 뭐든지 해도 돼.”

    내가 뭘 들은 거지현우는 놀람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렇게 커다란 백화점을 하루 종일 빌렸다고그게 가능해어렸을 적에 마계로 끌려가 아직은 현대의 상식이 다소 부족한 현우로서는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아니, 가능하니까 했겠지만.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런 그의 앞으로 한 여성이 다가와 인사와 함께 자신의 소개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H백화점 퍼스널 쇼퍼 유진아입니다. 다시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고객님의 만족스러운 쇼핑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퍼스널 쇼퍼는 또 뭐람. 슬쩍 선우의 눈치를 보니 귓가에 속삭이듯 설명해 준다.

    쇼핑을 도와주는 사람이야.”

    원래 백화점에는 그런 사람이 붙나의문을 가지는 사이, 선우가 퍼스널 쇼퍼에게 물었다.

    8.

    남성복 매장은 몇 층입니까?

    3층과 4층입니다. 3층은 일상복, 4층은 정장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는데어디부터 갈까?

    3층!

    좋아. 그러면 엘리베이터 탈까아니면.”

    에스컬레이터 탈래.”

    현우는 냉큼 대답했다. 다소 부끄럽긴 했지만, 처음 와 보는 곳인데 이 정도의 흥분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딱히 사고 싶은 건 없었지만, 구경하는 재미도 제법 괜찮았다. 동생은 뭘 입어도 잘 어울려서 입히는 보람이 있었다.

    이것도 입어 봐!

    응, 형.”

    선우는 얌전히 의상을 들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뒤늦게 생각난 듯 사이로 얼굴을 내밀며 말했다.

    형은 안 입어 봐?

    나는 괜찮은데.”

    그러자 선우의 눈꼬리가 축 처졌다.

    입어 볼게!

    현우도 선우가 골라 준 옷을 입고 옆의 탈의실로 들어갔다. 옅은 아이보리 색의 니트를 걸치고 나오자, 같은 옷을 입은 동생이 옆에서 웃었다.

    잘 어울린다.”

    너도.”

    이대로 입고 갈까?

    선우가 현우의 어깨에 머리를 올리며 속삭였다. 키 차이 때문에 불편할 법도 한데 한번 기댄 머리는 도무지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우는 그런 선우의 머리를 손으로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럴까?

    현우가 말하자 선우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돌아왔다.

    왜 웃어?

    행복해서.”

    선우는 그렇게 말하며 아쉬운 듯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퍼스널 쇼퍼에게 말했다.

    지금까지 입어 본 것 전부 다 주십시오.”

    현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전부 다?

    의상을 갈아입다 얼핏 가격표를 보았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무시무시한 가격이었다. 그래도 이제 빌딩까지 가진 동생이니까, 하나 정도는 받아도 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전부 다라니현우는 당황했다.

    그건 아니지!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

    비싸잖아!

    현우가 그렇게 외치자 퍼스널 쇼퍼의 표정이 묘해졌다.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헌터인 선우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던전을 닫아 온 각성자였다. 한 번 던전을 닫을 때마다 들어오는 수익은 기본이 억 단위. 물론 한 자릿수가 아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이 정도 옷은 간식값도 되지 않을 텐데, 비싸다니.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구나.

    진짜 무슨 사이람?

    퍼스널 쇼퍼는 궁금증에 근질거리는 입을 꾹 다물며 손톱으로 손등을 눌렀다.

    안 비싸.”

    비싸!

    선우는 말을 정정했다.

    나한테는 안 비싸.”

    그래도 받을 수 없어.”

    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동생이 고생해서 번 돈인데 쉽게 쓸 수 없었다. 그래서 거절했건만 선우는 그런 마음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왜 받을 수 없어?

    그야.”

    현우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네가 힘들여 번 돈이잖아.”

    선우의 미간 주름이 사라지며 눈꼬리가 축 처졌다.

    형.”

    알고 있다. 비록 지금은 드래곤도 쉽게 쥐어 패는 능력을 갖췄지만, 거기까지 올라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1세대 실종자 중에서 어린 나이였던 현우는 최약체 중 하나였다. 가진 건 독기뿐이었다. 그랬는데 더 어렸던 선우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차라리 내가 돈 벌어서 사 줄게.”

    안 돼.”

    이번에는 선우가 단호하게 잘랐다.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 모셔 놓고 싶은데 일이라니. 약하기만 한 형이 어떻게 돈을 벌겠다고.

    그럼 나도 안 받을래.”

    현우는 고집을 부렸다.

    몰라, 나는 살 거야.”

    선우는 선우대로 고집을 부렸다.

    전부 선현 길드로 보내 주십시오.”

    당황한 현우가 선우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갑자기 그가 표정을 굳혔다. 내가 너무 세게 나갔나현우가 후회하며 의견을 철회하려는데, 이질감이 느껴졌다. 거리를 두고 늘어서 있던 각성자들의 기운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어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겨우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내부에 긴장이 감돌았다. 선우가 이를 드러내며 현우에게 말했다.

    형, 잠시 여기 있어.”

    어.”

    선우는 그대로 일어나 앞으로 나섰다. 그러더니 퍼스널 쇼퍼에게 말했다.

    이후 금액은 선현 길드 앞으로 달아 두십시오.”

    천장이 얼어붙더니 파스스 부서져 내렸다. 그와 동시에 사람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선우가 뛰쳐나갔다. 마치 몸을 웅크리고 있던 짐승이 튀어 나가는 것 같았다.

    !

    내내 구석에 박혀서 졸던 케로가 네 다리로 당당하게 서더니 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

    커다란 울림과 함께 격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상대가 악을 쓰며 덤벼들고 있었지만,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선우가 조금도 밀리지 않고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주위를 지키던 선현 길드의 길드원들이 모이고 있었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승패는 확실해진다.

    기껏 쳐들어온 보람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닐 것 같은데.

    차분하게 주위를 살펴보니, 인기척이 하나 더 느껴졌다. 그는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곧바로 선우에게 덤벼들었다. 선우가 쥐어 패던 사람을 내던지고 그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서로 쉽게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지?

    현우가 목을 으득 소리 나게 꺾었다. 아무리 힘을 감추고 있다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가만히 있을 생각은 없었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지만, 시원하게 뻗은 눈매가 어쩐지 낯익다.

    어디서?

    어디서 보았지생각나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가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누구지?

    현우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애절한 표정이 눈에 박혀 왔다.

    그때였다. 벽에 까만 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그 점은 점점 커져서 사람만 한 크기가 되어서야 확장을 멈췄다. 이어 그 안에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아, 또 나보다 키가 크네.

    기분 더럽다. 또다시 여기 없는 요정을 탓하는데, 그 안에서 나온 남자가 싱긋 웃어 보였다. 생긴 건 나쁘지 않은데 특이하게 한쪽 눈이 멀쩡하지 않다. 인상도 너무 냉정해 보였고.

    역시 생긴 건 선우가 최고네.

    흐뭇하게 미소 짓고 있는데 남자가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왕왕!

    케로가 짓다가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그러자 남자는 케로를 잡아채더니, 힐끗 쳐다보곤 내던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얌전히 떨어질 케로는 아니었다. 케로는 솜씨 좋게 벽을 뒷발로 차고 제대로 바닥으로 착지했다.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개의 능력은 아니었다.

    케로는 으르렁대며 다시 달려들려고 했다. 그 남자가 현우에게 말을 걸지만 않았더라면.

    자, 그럼 같이 가 보실까, 공주님?

    저게 미쳤나. 부풀려졌던 케로의 털이 쪼그라들며,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심지어 몸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괜히 옆에 있다 불똥 튀길라.

    케로는 제일 최약체로 보이는 퍼스널 쇼퍼 뒤에 숨었다. 그래도 현우는 힘이 없는 자는 어지간해서 패지는 않았으니까. 예전에도 때릴 때 그랬다. 이 정도 처맞아도 죽지 않을 걸 아니까 때리는 거라고.

    ?

    현우는 기가 막혔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지공주님그는 오늘 처음으로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일을 겪으면 몸이 굳는다는 걸 깨달았다.

    1세대 실종자라고 해서 뭔가 대단할 줄 알았는데. 막상 보게 된 이는 작고 말랐다. 이런 걸 보호한다고 그 애를 썼단 말이지. 가준은 피식 웃으며 가죽 장갑을 낀 손을 1세대 실종자의 몸에 댔다. 공포로 굳어서 그런지 설득하거나 강제로 끌고 갈 필요도 없었다.

    쉽네.

    물론 선우를 붙잡아 두는 건 쉽지 않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던 혜선과 평화 길드장 도진이 제대로 활약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선우는 때에 맞춰 오지 못했다. 그가 왔을 때는 이미 가준과 1세대 실종자의 몸이 커다란 까만 점, 정확히는 텔레포트 포털을 통과한 뒤였다.

    도가준!

    다급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우!

    언제나 자기 잘난 줄 알던 지선우. 그런 그가 소리를 높이는 건 처음 들었다. 가준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성공!

    가준은 포털의 반대편으로 빠져나오며 즐거운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힘겹게 포털을 유지하고 있던 각성자가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비싼 돈을 들여서 텔레포터를 길드에 가입시킨 보람이 있었다. 최근에 남모르게 가입시킨 거라 지선우도 모르고 있었을 터였다. 알았으면 대처했겠지.

    절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짜 오랜만에 지선우에게 엿 먹였다. 이 어찌 즐겁지 않을까.

    자, 그럼 1세대 실종자씨.”

    가준은 잡고 있던 작은 어깨를 놓고 빙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처음으로 1세대 실종자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예쁘장한 얼굴이 사슴처럼 순해 보였지만, 눈 밑의 눈물점 때문에 묘하게 색기가 도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가준의 취향은 아니었다. 그는 이런 비리비리하고 작은 몸을 가진 남자보다 풍만한 몸의 관능적인 여성을 사랑했다.

    이제부터 아는 정보를 전부 토해 내야 할 텐데.”

    가준은 선우가 1세대 실종자에게서 캐낸 정보, 그걸 전부 알고 싶었다. 그러니 온건한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과격하게 굴 생각도 있었다. 그러니 조금 겁만 줄 생각이었다.

    아픈 거 좋아해손톱을 뜯는다거나, 바늘로 각막을 걷어 내거나 하는 거.”

    눈을 가늘게 뜬 채 입꼬리를 찢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싸늘하게 생긴 인상인데, 이러고 웃으면 더 무서워 보인다. 그래서 그런가앞에 선 1세대 실종자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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