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회
결혼 x 6
우두머리를 잃은 하피 무리의 난입으로 혼잡해진 경기장.
겁에 질린 군중들은 빗발치는 화살비에서 살아나기 위해 폭풍우에 휩쓸린 배처럼 움직이고 있다.
여러 사람이 울부짖는 참상이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속으로는 안도하고 있었다.
…내 창피한 짓이 어느 정도 묻혀서.
덕분에 자연스럽게 두메른을 달래고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었어.
이제부터 거리낌 없이 날뛰어 주겠어!
"어머니. 화살을 가져왔어요."
"고마워!"
설아는 병사들이 떨어뜨린 화살통을 가져와서 내게 건넸다.
활 같은 건 쏴본 적 없다.
아주 어렸을 때 수학여행으로 제주도에 가서 한 번 쏴본 정도?
그러나 고민하지 않고 하피를 향해 시위를 당긴다.
"아악!"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보다 하피의 단말마가 더 빨랐다.
최후반 사기 무기에 조준 같은 건 필요 없지?
적당히 허공에 놓은 화살이 총알처럼 날아가서 대기를 가른다.
공격 범위도 엄청나서 하피 서너 마리가 대기를 가르는 화살에 휘말려 바닥으로 추락했다.
추락한 하피는 오크 밥이다.
하피도 강간하는 성욕에 혀를 내둘렀다.
초월자들 간섭만 없으면 일이 이렇게 쉬운데!
"세이나!"
"네, 엄마!"
세이나가 밝은 얼굴로 포탈에서 나왔다.
빠른데?
설아를 먼저 불렀기 때문에, 자기 차례는 언제 올까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귀여운 녀석.
"고블린 백 마리, 오크 백 마리 내어줄게. 사람들을 통제하고 보호해!"
"알겠습니다. 총사령관님!"
세이나는 누구한테 배웠는지 귀여운 경례를 하고, 포탈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블린, 오크 부대와 함께 관중석을 타고 올라갔다.
"비르릇! 비르!"
고블린 부대는 비르가,
오크 부대는 세이나가 통솔한다.
비르는 양치기처럼 능숙하게 사람들을 한곳에 몰아넣었다.
"으악! 고블린이다."
"칼도 들고 있어!"
"밀지 마!"
"비르릇!!"
거리를 두고 적당히 위협해서 사람들을 한 곳에 뭉친다.
무질서한 상황은 하피가 바라는 일.
"통제를 따라요. 살고 싶으면!"
나를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럽게 한 음성 확대 마법이, 이번에는 내 도움이 된다.
큰 소리로 부르짖던 사람들이 차츰 안정을 되찾고 내 말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자 하피들이 모여 있는 민간인을 공격했다.
'역시 괴물.'
그럴 줄 알았어.
전쟁에도 최소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는 법.
두메른조차 여자는 건드려도 죽이는 건 자제하는 방침으로 왔는데, 저것들은 우두머리를 잃은 주제에 뭘 믿고 저러지?
아, 우두머리를 잃어서 그런가.
"세이나!"
"네!"
세이나가 사뿐히 뛰어오른다.
제약 없이 풀려난 크라켄의 이빨이 우산처럼 군중의 머리 위를 뒤덮고, 하피의 공격을 모조리 흡수했다.
"하피의 바람 쐐기가 사라졌어!"
"저 여자애는 뭐지?"
"시현을 엄마라고 불렀잖아. 딸이야!"
"세상에…."
뜻하지 않게 세이나가 눈도장을 단단히 찍는다.
사랑스럽고 예쁜 용모로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모습이 역시 내 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이나 같은 여자애가 용감하게 싸우는 모습은 모두를 감화시킨다.
'통제 성공.'
나머지는….
두메른의 돌팔매질이 하피를 파리처럼 떨어뜨리고 있다.
한 번에 한 마리씩 확실하게.
하피 입장에서는, 여차하면 단단한 다리로 두메른을 협공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감히 두메른과 근접전을 하려는 머저리 하피가 있었다면, 진작 뒤졌겠지.
그러니 놈들의 시선이 나한테 쏠렸다.
"어머니. 제 뒤에 계세요."
"설아야. 괜찮겠어?"
"네."
수가 좀 많은데.
걱정하던 찰나, 이제는 익숙한 바람의 검술이 하피들을 휩쓸었다.
"황자님!"
"돕겠다."
"저기, 아까 일은…."
"지금은 사람들을 보호하는 게 우선이다. 시현. 너의 지휘를 따르겠어."
역시 황자님. 상황 판단이 빨라.
세이나, 설아를 비롯한 마물 부대가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 빠르게 알아챈 모습이다.
"네!"
"시현!"
아스테가 새로운 유리검을 들고 끼어들었다.
지난 모욕을 씻기 위해 투지로 불타오르는 듯하다.
칼밥 먹어서 그런가, 멘탈이 남다르네….
"아스테는 쉬고 있어.
상처가 안 아물었잖아."
"네가 위험하니까, 두고 볼 수 없어."
아스테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거야. …허락해 줘."
한 번 내 말 안 듣고 데인 게 컸는지, 아스테는 살짝 풀이 죽은 모습으로 말했다.
"이제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은 없어."
"말도 안 되는 일…?"
"하피는 여성체라서 버프를 안 받거든."
"버프?"
이런, 얘기할수록 수수께끼만 늘어나는 모양새다.
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고 말했다.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줄게. 두메른한테 진 건 신경 쓰지 마.
…방금은 누가 와도 안 됐으니까."
"알았어."
"어머니, 대비해야 합니다."
"부탁해!"
나는 활을 잡고 뒤로 물러난다.
마치 썩은 시체에 몰려드는 까마귀 떼를 보는 듯하다.
우리를 발톱으로 뜯으려고 구름처럼 뭉쳐 내려오는 하피들.
설아의 화려한 발차기를 시작으로, 하피 격추가 시작되었다!
"하앗!"
유리검이 참격을 날려서 상대의 공중 진형을 박살 내고, 서안은 바람의 칼날로 상대의 움직임을 묶는다.
나는 촉괴의 힘을 빌려 가벼운 장난감 활 다루듯이 운궁으로 화살을 쏘아 보냈다.
내 편이 다치지 않게 약간 위로 조준하면….
충격파와 함께 대기를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하피를 꿰뚫는다.
화살은 서안 황자님이 다루는 바람과는 또 다른, 보이지 않는 기류를 만들어 하피를 바람 지옥으로 끌어들였다.
'대단한 활인데.'
역시「거품에서 태어난 여신」
그녀의 남편이 그리스 신화 최고의 대장장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성능이다.
「대장장이 신」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체현한 초월자일 뿐, 신화에 나오는 본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세이나가 쓰는 크라켄의 이빨, 비르가 사용하는 벼락의 칼, 마지막으로 내 손에 들어온 운궁까지.
모두 마스터피스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는 사기 장비들!
하피는 세이나와 비르가 있는 곳도 공격하고 있었지만, 당연히 하늘에서 내려온 순간 끔찍하게 살해당한다.
벼락의 칼에 맞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 통구이가 되거나 크라켄의 이빨에 흔적도 없이 삼켜진다.
우리 혈족 최강 전력을 보낸 이유가 뭐겠어?
사람들은 털끝 하나도 다쳐선 안 돼.
파멸이니 뭐니 해도 누가 생명을 잃고 죽는 건 싫어서, 두메른 앞에 그런 꼴을 내보인 건데.
좆같은 불청객 때문에 다들 죽기라도 하면 내 수치스러운 꼴은 보답받지 못한다.
"하피가 도망친다!"
누가 등을 돌린 하피를 가리켜 그렇게 외치면서,
관중들의 환성이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음성 확대 마법도 거의 끝나가는 듯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였다.
두메른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서안과 아스테가 길을 비키는 모습을 보고 살짝 충격받았다.
…두 사람의 뇌리에 강하게 기억된 모양이다.
두메른이 내 '서방님'이라는 게….
그런데 일직선으로 나를 보러 올 줄 알았던 두메른은, 설아를 끌어안았다.
"앗…."
순간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크는 딸까지 건드릴지도 모른다는 위험한 상상이다.
내 걱정은 두메른의 실룩거리는 입꼬리를 보고 없어졌다.
휴….
"숨 막혀요. 아버지…. 우읍."
"내 딸…. 시현과 나의 딸…."
설아는 아빠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저 허그에서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다….
돼먹지 못한 초월자들이 얼마나 꼴렸는지 두메른은 상상 초월의 버프를 받고 온몸에 광채가 흐르는 중이었다.
'무슨 최종 보스 같아….'
초월자들이 원하는 건 하나다.
설아와 세이나를 강간하는 것.
하지만 그 추잡한 요구는 자연스럽게 묵살되었다.
두메른은 아빠니까.
내가 내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두메른도 딸에게 손을 대지는 않는다.
그게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사랑스럽구나. 이름은 뭐라고 하지?"
"설아입니다. 아버지. 놓고 얘기해요."
"뿔…. 쓰다듬어 봐도 되겠나?"
"…부끄러워요."
"아아. 견딜 수 없다. 너무 사랑스럽구나."
"…."
딸바보 두메른.
좀 전까지 목숨이나 정조를 위협받던 사람들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보고 있다.
아스테조차 두메른이 등을 보이는 데도 덮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딸을 끌어안고 볼을 비벼대는 모습이 워낙 우리가 잘 아는 팔불출 부모 같아서 그랬으리라.
두메른은 두꺼운 손으로 설아의 머리와 뿔을 쓰다듬었다.
"보고 싶었다. 내 딸아."
"…."
"혹시 내 이야기를 들은 적 없니?"
"네."
두메른이 나를 바라본다.
"시현.
딸과 함께 이야기할 게 아주 많을 것 같아서 즐겁다."
"그만 내려줘. 설아 답답하겠다."
간신히 풀려난 설아는 마찰열로 빨개진 한쪽 볼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아빠를 올려봤다.
"아버지는 어떤 분인가요?"
"두메른. 오크의 왕이다."
"그럼 어머니는요?"
"암컷의 여왕.
마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군. 나는 시현을 거스를 수 없으니까."
"…."
"어머니는 마왕, 아버지는 오크의 왕…."
설아는 기쁜 듯했다.
두메른과의 재회가 이렇게 훈훈할 줄 몰랐던 나는 조금 당황스럽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설아의 아빠가 오크라는 사실이 떳떳하지 못했다.
설아 성격에 전혀 안 어울리지만, 속으로는 「내 아빠가 오크라니, 왜 말 안 했어요. 어머니! 미워요!」하며 반항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던 나였다.
예상외로 두메른은 사랑이 넘친다.
방해되면 용서 없이 쓰러뜨리고,
마음에 드는 암컷은 모조리 범하고 보는 오크의 왕과 동일한 인물인지 의심될 정도야.
하지만, 마왕이라….
조용해진 경기장.
다들 나를 보고 있다.
수도를 점령한 건 두메른이지만, 두메른이 나를 따르면 자연스럽게 공은 나한테 돌아온다.
그러나 여기서 범행 성명 같은 걸 했다간, …틀림없이 천박한 보지섹스 마왕으로 알려지겠지.
이번에는 서안이 내게 다가왔다.
"황자님…."
두메른은 나와 황자님이 가까워지는 걸 보고도 아무 말 하지 않는다.
후련한 질내사정 섹스로 나를 향한 믿음을 되찾았기 때문일까?
별로 예민하게 굴지 않아서 다행이다.
"마물계로 갈 테냐. 시현."
"마물계…."
"두메른을 서방님으로 모시면서 살겠느냐?"
"…서방님으로 모신다고는 했지만,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어요."
"투신전은 끝났다.
네 행선지가 어디라고 해도 나는 원망하지 않겠다."
"황자님…."
좀 전에 벌인 창피한 짓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신경 쓰지 마라.
나는 너의 털털한 성격이 좋았어. 그런 모습을 봤다고 해서 실망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정말요?"
"그 천박한 몸짓은, 역사에 남길 수 없겠지만…."
"병 주고 약 주고…."
"하하."
털털한 성격이 좋았다…라.
듣기 좋은 말이야.
그러니 나도 사소한 건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우선 떠날까? 여기 있으면….
"어디도 못 간다!"
생각하기 무섭게 황제가 달려오고 있다.
무수한 병사들을 대동하고.
두메른이 움직였지만, 나는 일부러 막았다.
"두메른.
오크들 물러나게 해. 끼어들지 마."
"알았다.
나중에 보자. 설아."
"네, 아버지."
두메른은 군말 없이 물러난다.
풀려난 관중들의 행동은 둘로 나뉘었다.
경기장을 빠져나가거나, 남아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끝까지 지켜보거나.
그러니 나도 사람들을 불안하게 할 수 있는 마물 무리는 퇴거시키기로 했다.
비르는 고블린 부대를,
세이나는 오크 부대를 통솔해서 포탈 속으로 사라진다.
"황제 폐하.
쇼는 즐거우셨습니까?"
나는 머리를 숙이고 정중히 말했다.
"아직 한참 부족하다. 채워지지 않았다. 이번 투신전은 예상할 수 있는 일뿐이었어."
예상할 수 있는 일뿐?
이쪽은 초월자들의 간섭에 휘둘리느라 신물이 나는데.
이 노인은 정말 뇌 깊숙이 망가진 모양이다.
"역시 너뿐이다!"
"저한테 실망한 거 아니었어요?"
"아무리 추잡하게 허우적거리더라도 새침한 얼굴로 돌아오는 여자.
시현은 여신이 내린 선물이 분명해! 거두어들여 축복함이 옳다. 마물계로 간다니, 얼토당토않은 소리!"
"아버님, 외람되지만, 시현은 이 나라를 위해 값으로는 매길 수 없는 일을 해준 사람입니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조용히 해라. 서안!"
"…."
"타락해야 해! 더 타락해야 해! 어차피 오염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타락시켜주겠다.
내가 직접 이 손으로 조교 해주마!"
"앗…."
황제가 내 손을 잡는다.
두메른 때도 그렇고 수컷한테 이리저리 끌려다닐 운명인 것 같다.
이번에는 정신 나간 노인 상대야?
뼛속 깊이 박힌 파멸원망이 내 자궁을 울린다.
'이런 개새끼한테 따먹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그래도 지금은 참아야겠지.
나는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이리 오지 못할까?"
"그만 하세요."
"우선 내 침실로 와라. 승리자가 없는 투신전이니, 너를 내 첩으로 삼겠다."
더는 들어주기 힘들 지경이야.
슬슬 이 지랄도 끝내자.
촉괴 검을 빼려던 그 순간, 내가 하려고 마음먹은 일을 누군가가 대신했다.
예리한 칼날이 황제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것이다.
나는 새빨간 피로 물든 칼날을 정신없이 쳐다봤다.
"허억!"
"폐하!"
병사들이 동요한다.
하지만 쉽사리 뛰쳐 들지는 못했다.
폐하를 뒤에서 덮친 범인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