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회
가장 순결한 처녀(웃음)
"우우우!"
관중은 황제 편이 아님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야유가 쏟아진다.
결투에 찬물을 끼얹었으니 당연한 결과다.
투신전이 아니었으면 참수당해도 할 말이 없는 행동이지만, 투신전의 여론은 황제라고 하더라도 거스를 수 없다.
알았다.
투신전을 중지하고 나를 끌어낼 셈이다.
마음대로 그런 짓 했다간, 역풍 제대로 맞을걸?
여기 모인 신민들이 황제를 지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즐거운 이벤트 때문이다.
현재 관객들이 좋아하는 메인이벤트의 중심에는 내가 있다.
나를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끌어내려고 한다면, 정치 생명에 엄청난 타격을 받겠지.
그것이 설령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라도!
"제멋대로 싸우는 건 허락할 수 없다.
신성한 투신전을 뭐라고 생각하는 게냐!"
자이로는 스카이라운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왜 저래?'
규칙을 지켜서 싸우라는 말이야?
자이로 황자님은 순서를 무시하고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그 덕에 살아놓고 역정을 내는 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시현을 향한 공격 행위를 금한다. 검을 거두어라."
자이로가 검을 집어넣었다.
더는 싸울 이유가 사라진 나도 창을 없애고, 세이나를 품에 안았다.
"엄마!"
"잘했어. 세이나."
"저 할아버지 싫어요."
"나도 싫어."
세이나를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는다.
긴 야유가 멎고 고요해진다.
한차례 폭풍이 일었으나 잠잠해진 후.
우리는 모두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현은 정식적인 참가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로 이 경기장에 뛰어들었으며,
이는 신들의 뜻이다."
"옳다! 옳다!"
관중들이 호응한다.
갑자기 내 이야기로 넘어갔네. 왜 저러지?
"마물에게 아무리 범해져도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바로 그 증거!
저 여자야말로 세상에 하나뿐인, 가장 순결한 처녀가 아닌가?"
"와아아!"
"시현! 시현! 시현!"
나는 어처구니없어서 망연히 서 있었다.
뭐? 순결?
세상에서 나와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가 황제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수도에 오기 전 들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서안 황자님과 함께 싸웠던 병사들….
내가 오염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오히려 순결한 여자라고 생각했었지.
즉, 황제는 육체가 아니라 정신적인 처녀성을 논하고 있다.
이 세계가 아무리 절개를 지켜도 마물에게 몇 번 교배섹스 당하면 금세 타락하는 세계라는 건 뼈저리게 깨달은 후다.
처음부터 오염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아무리 범해져도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여자가 신선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황제의 태도가 돌변했어. 설마….'
내 가치가 폭등했다는 뜻인가?
나는 자이로 황자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아무 말도 없다.
물어본다고 이 상황을 설명해줄 것 같지도 않다.
"나는 신들의 뜻을 깨달았노라.
후희를 장식할 검투(劍鬪)에서 승리한 자에게는 시현을 주도록 하겠다!"
나를 줘?
내 의사는?
"와아아!"
"시현! 시현! 시현!"
내 편인 줄 알았던 여론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황제가 나를 상품으로 만들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사람을 상품으로 걸어도 돼요?"
답답한 심정을 토해냈더니, 자이로는 이쪽을 보며 말했다.
"네가 아멜리아를 숨겼으니까.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필요하다."
"그게 나라고?"
어이가 없네.
누가 상품이 되어준대?
세이나가 내 몸에 달라붙어서 울먹거렸다.
"싫어요. 엄마를 다른 사람한테 뺏기는 거예요?"
"안 뺏겨. 누가 뭐래도 나는 네 엄마야."
"저도 참여할래요. 엄마를 가질래요."
"엄마는 물건이 아니야."
"몰라요. 엄마 주기 싫어요!"
이런 세이나, 처음 본다.
나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반대로 지금까지 세이나가 너무 어른스러웠던 것이 마음에 걸렸는데, 아이처럼 떼쓰는 모습을 보고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세이나 엄마라니까?"
"엄마…. 엄마…."
"황제가 원하는 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훌쩍이는 세이나를 잘 타이르고, 황자를 마주 본다.
"황자님은 알고 있었어요?
아멜리아를 상품으로 걸지도 모른다는 걸."
"…확실하지는 않았다."
"혹시 황자님은 아멜리아를 구하기 위해…."
"…."
너무 억측인가?
자이로 황자는 그 전부터 투신전에 참여했다고 들었다.
황자 신분으로.
그전에도 초월자 취향에 따라 역보정이 걸리는 좆같은 대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방금 말은 잊어주세요.
황자님은 작년에도 참여했었죠."
"…."
자이로 황자의 붉은 머리가 바람에 나부낀다.
그는 가만히 서 있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조용히 읊조렸다.
"작년에는 우리 어머니가 상품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황자의 어머니라면 따로 첩을 둔 게 아닌 이상, 황후 아세나스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아멜리아가 처음이 아니었던 거야.
타락한 황후도 투신전의 구경거리가 되어… 정신적으로 파멸해버린 거라면?
자이로는 어머니를 구해내지 못했을까?
아니면 구해내고도….
나는 차마 깊이 물어볼 자신이 없었다.
작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나를 막았어요?
황제가 밉지 않아요?"
"아멜리아를 구해준 널 죽게 두고 싶지 않았다."
"…."
"황제 폐하를 해치는 건 네 일이 아니다."
"그건, 그렇지만…."
결국 처음 추측한 대로 붉은 황자님이 나를 구해준 셈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지르지 않도록.
황제 폐하가 비호감에 역겨운 짓만 골라서 한 건 사실이지만, 나는 애초에 황제를 암살할 계획으로 여기에 온 게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황제를 해쳐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황제는 진짜 악인이다.
아무리 오염되었다고 해도 자기 가족을 그렇게 만들다니….
제정신이라고 볼 수 없다.
황제를 해치면 나는 마왕인가?
초월자「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 생각한 대로다.
내 안에서 악한 충동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낀다.
…누군가를 죽여서 사건을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이 든 건 처음이었다.
폐쇄문이 열리고 제국 병사들이 다가온다.
내 손에 수갑을 채워 연행할 생각이다.
세이나가 곧장 크라켄의 이빨을 빼 들었다.
"세이나!"
"하지만, 엄마…! 엄마를 데려가려고 하잖아요!"
"나는 괜찮아. 권역에서 기다려."
"엄마…."
"세이나의 힘이 필요할 때 부를게."
"꼭이에요.
언제든 나타나서, 엄마를 도울게요. 설아도 같이!"
"그래."
저 병사들은 그저 명령을 수행하러 왔을 뿐이다.
표정을 보면 안다.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해야만 하는 불쌍한 병사들.
검투사들이 내 칼을 맞고 죽는 걸 봐서인지, 누구도 쉽게 다가오지 못했다.
어쩌지.
그냥 도망치고 나 몰라라 할까?
내가 없어지면 황제는 미쳐 날뛰겠지.
나를 찾기 위해 좆뺑이 칠 병사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심지어 황제의 분노가 가족을 향할 수도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군.
그때, 자이로 황자님이 내게 말했다.
"시현. 아멜리아를 구해줘서 고맙다."
"저는 상품이 됐지만요."
비아냥거렸다가 후회했다.
자이로 잘못도 아닌데.
제국을 적으로 돌릴 뻔한 나를 구해준 은인에게 신경질이라니….
"이번에는 내가 널 구해주겠다."
"…."
두근두근했다.
드디어 몸도 마음도 여자가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님.
그냥 예술 작품처럼 기가 막히게 잘생긴 사람이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구해주겠다고 하니까, 설렜을 뿐이다.
…이건 남녀 구분 없이 듣는다.
두근거림은 금세 시들었지만,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아멜리아는 구해냈어.
저 쓰레기 황제 손에서.
오히려 내가 황제의 관심을 독차지해서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경기장에서 사라진 아멜리아를 신경 쓰지 않으니까.
"잘 부탁해요."
나는 도망치지 않고 얌전히 사로잡혔다.
병사들은 손을 내민 나에게 수갑을 걸고, 발에 족쇄를 채운다.
말만 보지노예, 보지노예 했지….
진짜 노예처럼 온몸에 구속구를 차니까 마음이 절로 슬퍼진다.
촉괴들도 아우성쳤다.
엄마의 슬픔이 전해진 것 같다.
쭈읍 쭈읍.
…슬퍼하면서도 내 젖은 빠는구나.
슬프다고 했지만, 흥분되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몸을 구속당해서.
진짜 섹스밖에 모르는 몸이야.
이런 몸으로 세상에서 가장 순결한 처녀라니, 웃음거리도 이런 웃음거리가 없다.
현타 세게 오네.
"시, 시현 님.
안내하겠습니다…."
내가 예민하다는 걸 알아서인지 병사들도 알아서 기었다.
"어디로 가요?"
"후희 일정이 잡힐 때까지는 감옥에 가두라고 명하셨습니다."
"누가."
"황제 폐하께서…."
…쪼잔해.
투신전 전희가 누구 덕에 흥행했는데, 방이라도 좀 좋게 주지.
경기장 밖으로 연행되는 길.
나를 구경하러 나온 사람들이 좌우로 벽을 만들고 웅성거리고 있었다.
"저기다!"
"시현 님! 꺄아악!"
"여길 봐주세요!"
…관객 중에 생각보다 여자가 많다는 사실도 놀랍다.
관중석에서 모르는 사람과 난교라도 한 듯이, 온몸에 정사의 흔적이 가득하다.
추잡한 행사에 어울리는 천박한 관객들이야.
하지만 환성이 싫지는 않았다.
"손 한 번 흔들어 줘도 돼요?"
"네."
수갑에 묶인 손이지만, 머리 위로 슬쩍 들어준다.
"와아아!"
"시현! 시현!"
"나도 참여할게요!"
"우승하면 저 여자를 가질 수 있는 거야?"
"미치겠다. 매일 밤 허리 부러질 때까지 섹스하겠어."
"그럴 힘도 없는 게…."
"시현이라면 오늘, 내일 하는 할배 좆도 세울 수 있지. 뭐가 문제야?"
"하하하! 옳은 말이다."
다들 내가 상품으로 걸려서 좋은 모양이다.
아마도 다음 투신전이 열리기 전에….
내 얼굴을 팔아서 새로운 검투사를 수혈하고 풍성한 경기를 진행하려는 것 같다.
오늘 죽은 사람들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준비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나는 흑사 감옥에 수감되었다.
하필이면 아멜리아가 썼던 독방이다.
…탈출 마렵네.
"족쇄와 수갑을 벗겨드리겠습니다."
"네."
돌침대에 앉아 병사가 내 족쇄를 풀어주기를 기다린다.
병사는 내 다리 사이를 훔쳐보려는 것처럼 흘깃거렸다.
슬쩍 다리를 벌려서 속살을 보여준다.
"…!"
병사는 볼이 빨개진 채로 다급히 돌아섰다.
돌아가면 딸감으로 열심히 써먹겠지?
감방 안에서 자유의 몸이 된 나는, 병사들이 떠나는 발소리를 듣다가 돌침대에 드러누웠다.
"에라이."
「가장 순결한 처녀」답게 다리를 쩍 벌리고 배를 긁적거린다.
긁적긁적.
"시현!"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서안 황자님!?
나는 황급히 허벅지를 오므리다가 쥐가 나서 끙끙거렸다.
"으으응!"
"…."
"쥐, 쥐 났어…. 다리에 쥐 났어요."
"…이쪽 다리냐?"
"네. 거기…."
서안 황자님이 내 종아리를 주물러 주었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미안하다."
"아니에요…."
민망해 죽겠다.
황자님은 내 다리를 주무르면서 다정하게 미소지었다.
"…다친 데는 없는 모양이구나. 다행이다."
부끄러워….
다짜고짜 보지섹스 하는 것보다 이런 게 더 민망해.
황자님은 내 종아리, 발목, 흙 묻은 발가락까지 세심하게 마사지했다.
단단한 팔에 엮여서 벗어날 수 없는 느낌….
나는 보지가 젖는 걸 느끼고 참을 수 없이 창피해졌다.
"이제 그만 해도 돼요."
"가만히 있어라. 제대로 풀어두지 않으면, 또 그럴지도 모르니까."
"읏…. 아…."
황자님한테 발 마사지를 받는 죄수라니.
누가 이 광경을 본다면 오해 없이 설명할 자신이 없다.
아니, 오해고 나발이고.
…서안 황자님은 날 좋아하잖아?
마사지에 애정이 어릴 수밖에.
"조마조마했다.
지금껏 여러 번 사선을 넘었는데도, 오늘이 가장 떨렸던 것 같다."
"저는 괜찮아요."
"네가 황제 폐하에게 칼을 들이밀었을 때는 정말이지…."
"…."
나는 헛기침했다.
"그때 자이로 형님이 아니었으면,
너는 역적이 되어 제국 어디에도 발을 붙일 수 없게 됐을 거다."
"그렇겠죠…."
"다행히 폐하도 연극이라고 생각하여 넘어가는 듯하지만…."
연극이라….
잠시나마 세이나를 불러 진심으로 싸웠으니까.
황제한테도 까부는 암컷이라는 콘셉으로 먹힌 듯하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어땠을까?
즉결 처형이었겠지.
특히 내가 남자였으면 순결한 처녀라는 상징성도 어필하지 못했을 테니, 역보정을 뒤집어쓰고 불리한 싸움을 하다가 죽었을 게 분명하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지만, 큰 위기였던 셈이다.
여자 모습이라서 득을 봤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예리한 날붙이를 들어도 머리만 한 젖통을 흔들며 덤비면 여전사 코스프레를 한 음란 암컷처럼 보일 뿐이니까.
"그래도 위험한 다리였음에는 변함이 없다."
"죄송해요. 황자님."
"내가 어찌 너를 탓하겠느냐?"
서안 황자님이 나를 끌어안았다.
…어? 이게 다야?
"…황자님?"
"네가 죽을까 봐 무서웠다."
추, 추잡한 보지섹스 안 해?
다정하게 끌어안고 끝?
나는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아, 앙대…."
"너를 더 안고 싶다. 가만히 있어라…."
"으, 읏…."
사락사락.
내가 남자의 체온으로 달아오른다고?
가슴이 두근거린다고?
심장이 터질 것 같다. 차라리…. 차라리 섹스해버리면…!
손을 허벅지에 갖다 대자, 황자님은 그런 나를 말리듯이 더욱더 끌어안았다.
으아앗. 그만둬.
"반드시 너를 구해주겠다. 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