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회
부조리한 시련
"아세나스 황후님이 이쪽을 보고 손을 흔들었어!"
"여기도 봐주세요! 황후님!"
아세나스 황후.
정신이 오염된 후로 황제의 눈 밖에 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사이 좋게 같이 앉아 있잖아.
아니, 어쨌든 제정신은 아니다.
정상적인 부모였으면 경기장에 멀뚱히 서 있는 자기 딸을 봤을 때 거의 반 광란이었을 테니까.
'아멜리아…!'
아멜리아는 속이 비치는 하얀 천 옷만 걸친 채, 무기도 없이 경기장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손에는 수갑, 발목에는 철 구슬.
금발 황녀의 표정에는 깊은 어둠이 내리깔려 있었다.
'제기랄.'
하필이면 저렇게 눈에 띄는 곳에 가 있냐.
계획이 완전히 틀어졌잖아.
도망칠 생각은 없어.
알림창으로 여황제 퀘스트가 점멸하고 있다.
「원형 경기장에 참가하라」
그것이 피의 어머니가 내린 단 하나의 지령!
정령을 수 천개 킵해둔 나한테 무서울 건 하나도 없었다.
정면 돌파로 수수께끼를 박살 내 주겠어.
하지만 아직 시작하지는 않았어.
황제가 있는 곳까지 갈 수 있을까?
일단 말은 꺼내 봐야지.
흰 수염이 덥수룩한 호리호리한 남자. 많이 쳐도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황후에 비해 엄청나게 늙었다.
저 남자가 파로스 제국의 황제란 말이지?
"아직 시작 안 했어?"
"소문으로만 듣던 아멜리아 황녀라고. 기대돼!"
"내가 저기에 가고 싶다."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도 드는데…."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해. 저 년 때문에 없어진 마을이 몇인 줄 알아?"
"그건 그래."
술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가로질러 황제가 있는 스카이라운지에 다가간다.
예상대로 주변은 제국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
직접 숨어들지는 못하겠어. 그렇다면…!
나는 소리를 내려다가 깜짝 놀랐다.
태자님이 바로 뒤까지 와 있었기 때문이다.
"도하… 태자님…!"
"시현 씨. 이런 곳에 와 계셨군요.
분명히 서안이랑 함께 있을 줄 알았는데…."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지금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다.
뿌리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괜찮다면 함께 보시겠습니까?"
"아멜리아를 이대로 둘 생각이에요?"
"이미 투신전은 시작됐습니다.
아멜리아한테는 안 됐지만, 경기장에 몸을 던졌으니 남은 건 신들이 운명으로 판가름하겠죠."
"무슨 운명으로 판가름을 해요? 가족인데!"
"…시현 씨. 안 됐지만, 폐하께 무례를 범해선 안 됩니다."
"이씨!"
"왜 그렇게 화가 나셨습니까?
당신의 가족도 아닐 텐데….
우리는 이미 받아들였습니다. 아멜리아의 숭고한… 희생을."
둥, 둥, 둥….
어디선가 큰 북소리가 들렸다.
마치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듯한 웅장한 소리에 태자님과 함께 고개를 돌린다.
"시작되었군요. 신들께 바치는 전희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신들께 바치는 전희라고.
이것도 내가 이 세계에 와서 섹스돌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초월자들의 뜻이라면, 내가 취해야 할 행동은 하나뿐이다…!
"황제 폐하께서 말씀하십니다!"
"제국을 위하여!"
"제국을 위하여!"
황제가 허리를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경기장 전체로 울려 퍼진다.
"보아라. 한때는 이 제국의 황녀로 총애받았던 내 아름다운 딸의 모습을."
"…."
아멜리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금은 추해졌구나. 마물에게 아첨하고, 마물에게 타락한 내 못난 딸의 모습을 봐라!"
"우우우!"
야유가 쏟아진다.
"오염된 여자는 사육하기에도 모자란 짐승에 불과하다.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모두는 수치스러운 황녀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이번에는 환호한다.
"네가 그토록 바란 마물과의 교접을 허락하겠노라. 아멜리아!
너의 신음으로 신들을 흥겹게 하라!"
폐쇄문이 열리면서 남자들이 쏟아져 나온다.
아니, 남자들이 아니야.
…오크다!
수십 마리의 뚱뚱한 오크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아멜리아에게 다가오고 있다.
아멜리아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당황했다.
"아멜리아!"
나는 아멜리아를 불렀다.
멀어서 목소리는 닿지 않는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표정은, 몸짓은, 말하고 있었다.
"싫어!"
상상해 보았다.
아멜리아의 작고 비좁은 보지에 오크의 자지가 처박히고, 모두의 예상대로 허덕이는 아멜리아를 보며 비웃는 사람들 얼굴을.
뚱뚱한 오크들이 일제히 아멜리아에게 달라붙어 옷을 찢는다!
"와아아!"
"벗겨라. 강간해라!"
"황녀가 보지 따먹히는 걸 보고 싶었다고!"
"보지 타락한 황녀님이라니! 최고야!"
기노단 황자의 말에 의하면, 투신전에는 모든 게 구경거리가 된다고 했다.
패배를 모르던 전사의 처절한 죽음도.
순결한 여자가 힘에 눌려 억지로 범해지는 부조리함도.
모든 것이 초월적인 존재에게 진상할 공양물이라고.
그렇다면 온 힘을 발휘해도 되겠죠? 어머니.
당신이 준 힘을 여기서 사용하겠습니다.
피의 권역이 열리고, 오크들이 쏟아져 나왔다.
"저게 뭐지?"
"추가로 나온 오크인가?"
"진짜냐. 저런 근육질 오크 본 적도 없는데….
황녀님 죽는 거 아니야?"
"잠깐만. 이상해…."
나는 촉수 갑옷을 믿고 관람석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한다.
위협을 느낀 뚱뚱한 오크들이 아멜리아를 벗기다 말고 이쪽을 돌아봤다.
아멜리아는 겁탈당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할 만큼 숨을 헐떡이면서 울먹이고 있었다.
구해줄 맛 나네.
"조금만 기다려."
곧 거대한 오크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크 부대를 지휘하는 권속 부욱.
관람석의 소란이 커진다.
이제 밑으로 내려와서 뭐라고 하는지는 안 들리지만,
예상 밖의 전개에 다들 즐거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도망칠 생각은 안 하지.
여기서 제공되는 건 아무리 추악해도 하나의 콘텐츠니까.
그러면 살육 쇼도 마찬가지겠지?
"부욱. 뒤엎어!"
"부우욱!"
부욱이 전차처럼 돌격한다.
뚱뚱한 오크들은 잽싸게 이쪽으로 몸을 돌려 대응하려고 했지만, 어림없지.
적들은 큰 충격을 받고 튕겨 나가거나 버티다가 부러지듯이 도끼나 칼을 맞고 피를 흩뿌리며 바닥에 엎어졌다.
일방적인 살육이었다.
나는 혼잡한 틈에 아멜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구속구를 촉괴 검으로 부쉈다.
자유가 된 아멜리아를 내려보며 말한다.
"이제 괜찮아. 아멜리아!"
크, 내가 생각해도 멋있다.
틀림없이 시현이 최전성기!
"어리석은 녀석!!"
아멜리아가 소리쳤다.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다.
"뭐?"
"왜 여기에 들어온 것이냐. 왜!
나는 대전사를 둘 자격이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이 멍청한 녀석아!"
"구해줬더니 못 하는 말이 없어."
"나는 두고 빨리 가라. 빨리…. 「시련」이 시작되기 전에!"
"시련?"
폐쇄문이 다시 한번 더 열린다.
덩치 좋은 검투사 몇 명이 이쪽으로 입맛을 다시며 다가온다.
어디 보자. 하나, 둘, 셋, 넷….
6명?
이쪽은 백 마리의 오크 군세라고. 너무 얕잡아보는 거 아니야?
"시현! 얼른. 신들이 노여워하기 전에…!"
"조용히 있어. 황녀님."
"…."
"나는 네 아비가 저지르는 짓, 도저히 두 눈 뜨고 못 봐주겠으니까 말이야."
관중들이 환호한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면서, 여론은 어쨌든 나한테 좋은 쪽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우리 혈족을 우습게 보지 말라고.
시련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을 보여주겠어.
다가온 남자 검투사들이 비열한 미소를 띤다.
"이게 웬 떡이야?"
"금발 황녀와 도색눈의 천사라…."
"크. 듣던 대로 끝내주는 젖탱이랑 엉덩이잖아."
"얼굴은 또 어때. 고와서 못 때리겠는데?"
"지랄은."
나는 욕지거리로 그들의 말을 끊었다.
우리 앞을 든든히 버티고 서 있는 오크들이 안 보이나 보지?
그냥 어디든 찾아볼 수 있는 좆밥 오크라고 생각하지 마.
"부욱. 혼내줘!"
"부욱!"
"흐흐흐."
아무리 봐도 위험할 구석 하나 없는 좆밥 검투사들의 낌새가 이상하다.
몸에 붉은색, 노란색 광채가 깃들어 있어…?
뭐야, 저 부자연스러운 색채는?
[신사「요승」이 시현의 보지를 원합니다]
[신사「최면의 신」은 나서지 않고 무게감 있게 자리를 지킵니다]
[신사「촉수 괴물」은 가만히 있습니다]
[신사「인생의 절반 손해」가 오크들보다 훌륭한 자지를 선사할 생각입니다]
신사들의 말투가 평소랑 달라.
"죽어라!"
나는 화들짝 놀라서 돌아봤다.
오크 세 마리가 순식간에 죽었어.
검투사들은 신들린 듯이 싸워나가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거지?
"신들의 축복을 받은 거야."
"신들의 축복?"
"투신전이 열리는 날은…. 신들의 기운이 여느 때보다 강해져.
시련을 겪는 자는 부조리한 전투를 하게 돼!"
"그럼 시발, 저것들이 신들의 버프를 받고 있단 얘기야? 대체 뭣 때문에?"
아멜리아는 무릎 꿇고 쓰러진 채, 나를 올려봤다.
"네가 당하기를 원하고 있는 거다. 멍청한 녀석아!"
"윽…!!"
하나님 맙소사.
"애초에 나를 구하려고 뛰어들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그럼 네가 구멍이란 구멍을 모두 오크한테 범해지는 걸 보고만 있으라고?"
"네가 나한테 했듯이, 보고 있으면 되지 않았느냐!"
"그렇게는 못 해!!"
"…."
아멜리아는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바라봤다.
"하더라도 내가 해. 알았어?!"
"그, 그래…."
"시련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수십 마리의 오크들이 쓰러지고 있다.
설마 내가 기른 오크가 오합지졸처럼 쓰러지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들이 신들의 대전사라도 된다는 말인가?
신이라고 표현하니 괜히 부아가 치미네.
초월자라고 불리는 변태 새끼들이 수작질 부리는 장소일 뿐이야!
구경만 하면 좀이 쑤시니 이제 내 앞에 튀어나오시겠다?
"비르!"
비르가 벼락불을 휘감고 권역에서 뛰쳐나왔다.
부욱이 남자 한 명을 붙들고 구속한 사이에, 급소를 베고 지나간다!
그러나 비르의 벼락의 검도 검투사에게 치명상을 주지는 못했다.
미친, 상처가 재생하잖아?
적당히 해!
[신사「요승」이 무의미한 노력을 비웃습니다]
"머리를 떨어뜨려!"
비르와 부욱이 요승의 분신체를 상대하는 사이에, 나는 여기까지 오크들을 쓰러뜨리고 돌격한 검투사들을 검으로 상대했다.
내가 검을 빼 들고 건장한 검투사들과 맞닥뜨리자 관중들의 환호가 지면을 울린다.
'아니, 씨발. 신나는 전개인 건 알겠는데….'
이쪽은 이런 전개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똥줄이 탄다고!
"히히힉! 몸이 날 듯이 가벼워!"
"제법 잘 싸우는구나. 좋은 후원신이라도 얻었나 보지?"
"큭…!"
진짜 오싹하다.
만약 촉수 괴물 같은 초월자가 중립이 아니라… 적이었으면?
부조리한 전투라는 게 뭔지 제대로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상대는 엄청나게 강해지기는 했지만, 초월자들의 수준이 그렇게 대단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래. 시련이라고 해도….'
이 장소 한정의 고난도 미션이라고 생각하면 돼.
저것들이 영원히 버프를 받느냐 하면 그건 아니거든.
하지만 난 반영구적인 후원을 받으며 여기까지 힘을 길러온 서큐버스야.
"당장 쓰러뜨려 범해줄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쓰레기 새끼들. 죽어도 불평하지 마."
"젖탱이 출렁거리면서 센 척하는 것 좀 봐. 하아…. 하아…!"
"시끄러워! 일부러 흔드는 거 아니거든?"
촉괴들아. 할 수 있지!
촉괴검이 톱날처럼 회전한다.
이빨을 드러낸 황금 촉괴 검. 현재 내가 다룰 수 있는 무기 중에 제일 강하다.
"간다!"
나는 달려오는 검투사를 베어 갈랐다.
도끼나 검을 들어서 막으려고 해도 소용없다.
한 번에 벨 수 있어!
"으윽!"
"괴물 같은…."
"너무 강하잖아. 신들의 축복을 받고도 이 정도밖에…!"
"좀 더 기다려보라고."
뭘 기다려?
이것들 점점 강해지고 있다.
"헤나, 클로라!"
지원군을 부른다.
광역 마법과 함께 떨어진 두 명의 마법사는, 검투사들을 모조리 불태우거나 수압으로 쓰러뜨려 제압했다.
"겨우 이 정도 상대로 고전하고 있…."
불탄 줄 알았던 검투사가 헤나를 덮친다!
"으, 으앗! 왜 살아있는 거야!"
"방심하지 마!"
"히히히!"
남자가 헤나의 팬티를 벗긴다.
"뭐, 뭐 하려는…!"
헤나는 그대로 강간당했다!
수압 커터로 팔이 갈렸던 놈도 일어나서 싸우고 있다.
헤나가 보지를 팡팡 당하자 관중들의 환호도 커진다.
'망할. 진짜 좆같은 행사네.'
강간 쇼를 보며 즐거워하고 있잖아.
"윽, 읏, 앗…! 크, 클로라. 이 녀석. 삽입 못 하게…. 앗…. 앗…. 해줘…!"
"이쪽도 두 명이랑 싸우고 있어서…. 앗…!"
나는 클로라를 보호했다.
작정하고 죽일 생각으로 검투사의 심장에 칼을 박아 넣고 톱날을 돌려야, 간신히 하나 쓰러뜨릴 수 있다.
'좀비도 이보다는 잘 죽겠다.'
헤나와 클로라가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 투신전의 경기장에서는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신'이라 불리는 짓궂은 신사 숙녀들이 준비한 최종 던전….
헤나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마치 그것이 헤나의 운명인 것처럼.
찌걱찌걱찌걱찌걱.
어쩔 수 없이 젖어버리는 보지로 자지를 조이고 있는 헤나.
"응…. 응…. 응호…. 앙대…! 이런 거, 창피해…. 창피해…!
다들 보고 있는데, 나…. 나…!"
"…."
나는 헤나를 덮치고 있는 남자를 칼로 베어버렸다.
그러나 어깨를 베이고도 남자는 멈추지 않고 헤나의 보지를 찔러댄다.
찌봅찌봅찌봅!
"응. 응. 응긋…. 윽…. 읏…. 오혹…!"
환호가 더욱더 커진다.
"뚝배기 깨지고도 허리 흔드나 보자!"
나는 검을 망치로 만들어 남자의 머리를 후려쳤다.
"하아…. 하아…."
뒤통수가 깨지고 나서야 남자는 멈춘다.
헤나는 다리를 활짝 벌린 채 움찔거렸다.
아주 잠깐이지만, 힘찬 좆 찌르기 받아서 움직일 수 없는 거야.
'이런 곳에 세이나와 설아를 불러도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