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회
부조리한 시련
침대로 기어들어 가서 여유롭게 늦잠을 자다가, 헤나의 목소리로 눈을 떴다.
"시현! 느긋하게 자고 있을 때야?"
"으으응. 벌써 시작했어?"
화난 헤나도 귀여워서 무심코 끌어안는다.
"읍!?"
헤나는 내 젖가슴에 파묻힌 채 당황했다.
"뭐 하는 거야. 여자끼리…."
"젖가슴 싫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좋아."
"만져도 돼."
하품을 하며 잠을 깬다.
헤나가 깨우지 않아도 밖은 충분히 소란스러웠다.
마침내 투신전이 열리는구나.
제국에서 가장 큰 행사라고 할 수 있는 투신전은, 수도 중심부에 있는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서 개최된다.
태자님은 스포츠라고 하지만, 다른 황자님의 말로는 매해 엽기적인 쇼가 펼쳐진 인신 공양의 현장이라고 한다.
모든 게 허락되는 무법지대는 아니나, 합리적인 규칙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믿을 수도 없다.
"여유 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야.
황녀가 개막전 제물로 바쳐진다는 소문이 파다해."
"다들 준비 끝났어?"
"피의 권역에서 대기 중이지."
나는 헤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뭐, 뭐야."
"고마워. 헤나."
"…."
헤나는 내 젖가슴을 조물조물 만지면서 말했다.
"우리는 잘 연마된 무기야.
휘두를 때는 충분히 주의하도록 해.
쓸데없이 피해를 늘리고 싶지 않다면…."
"어디에 휘두를지는 내가 정하라는 소리지?"
"그래. 혈족들은 너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어."
"다른 애들은?"
나는 준혈족의 행방을 물었다.
그들과는 정신파로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신고하지 않으면 어딨는지 알 수 없다.
헤나, 클로라는 권역에서 대기하는 것 같지만….
"각자 네 도움이 되려고 위치에 가 있어.
찾으려고 하지 않아도 만나게 될 거야."
"헤나…."
다시 보니 헤나는 현역 시절 마법사 복장을 하고 있다.
헤나의 눈빛.
영점 조준이 잘된 총기를 보는 듯하다.
내 젖가슴에 파묻힌 채로 있어서, 꼴이 좀 우습지만.
"젖가슴 자랑은 그만하고 놓아줄래?"
"자랑한 건 아닌데."
"흥. 몇 년 지나면 나도 너처럼 매력적인 가슴을 갖게 될 거야."
"…."
헤나는 지금이 최대치 아닐까?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굳이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수하지 마. 시현.
지낼 곳이 없어지는 건 사양이니까."
"알았어."
헤나가 나를 적극적으로 돕는 이유가 뭘까.
오염된 김에 나를 돕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아니.
그녀가 본인 입으로 말했듯이,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어서」라고 보는 편이 옳다.
헤나와 클로라….
아마도 유피넬과 트리샤도, 현재 생활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유피넬은 비르라는 남편도 있고, 늦으나 빠르나 내 권역에 속한 여자들은 모두 좆집이 된다.
오염된 여자들은 그 생활을 무척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
내가 실패하면 권역에 있는 여자는 모두 제국 신민들의 딸감이나 편리한 오나홀이 된다.
누군가가 사육해주어야 연명할 수 있는 삶.
지금과 무엇이 다른지 모르겠다.
나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물의 교배섹스에 오염되지 않는 몸이니까.
'첫 번째. 어쨌든 아멜리아를 보호한다.'
나는 스스로 세운 목표를 되새기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저택은 조용하다.
마지막 날 모두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하녀들이 누가 지냈던 흔적이 없도록 깨끗하게 청소한 후, 내 식사만을 준비해 놓았다.
가볍게 아침 식사를 마치고 제국의 원형 경기장을 향했다.
가는 길 찾는 건 어렵지 않다.
어느 사람이나 한 방향으로 쭉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에 사람이 이렇게 많았구나.'
벌써 국가적인 행사라는 걸 실감하게 되는 인파다.
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섞여 이동했다.
가는 길에 세금 내듯이 젖가슴과 엉덩이를 성추행당하지만, 뭐, 신경도 안 쓴다.
만질 테면 만져.
오히려 자신 있게 등을 펴고 성추행을 받아준다.
길이 막혀도 콧노래까지 부르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나는 제국 병사들의 통제를 받는 줄에서 빠져나와, 스태프들이 이동하고 있는 외곽 쪽에 관심을 보냈다.
"시현 님. 맞으십니까?"
"네."
예정대로, 서안 황자님이 보낸 간수와 마주친다.
그 간수는 흑사 감옥에서도 여러 번 봤기 때문에 친숙한 얼굴이었고, 심지어 나를 덮친 적도 있는 녀석이라서 질내사정 섹스까지 한 사이다.
"잘 부탁해요."
"네."
"일이 잘 풀리면 또…. 알죠?"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볼을 혀로 문질러서 자지 빠는 시늉을 해주니까, 간수는 발기했다.
역시 자지 세우는 게 제일 쉽다니까?
딴생각 하는지 떠보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무사히 통과다.
나는 간수만 믿고 뒤를 따랐다.
오래 머무를수록, 아니….
잠시만 머물러도 사람들 눈에 띄기 때문에 은밀하게 움직이려면 발이 빠를수록 좋았다.
스태프들만 사용하는 입구를 통해 먼저 경기장 내부로 들어온 나는, 긴 복도를 보고 살짝 감탄했다.
'진짜 콜로세움보다 나은데?'
콜로세움도 옛날 사람이 세웠다고 하면 충분히 놀라운 건축물이지만, 이 경기장은 현대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제법 놀라운 수준이었다.
"경기장 지하는 총 12구획으로 나뉘는데, 노예나 검투사, 혹은 행사용 마물이 머무는 공간으로 쓰입니다."
"그중 한 곳에 아멜리아가 있다는 얘기죠?"
"예. 아멜리아 황녀는 폐하의 명으로 개막전에 나갈 예정이라서, 지금은 1인 대기실에 머물러 있습니다. 서두르시죠."
"좋아."
내가 투신전에서 뭘 하든, 아멜리아부터 구조하고 본다.
속 편하게 피의 권역에 쑤셔 넣고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제가 안내해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길이 더 남았는데요?"
"쭉 나아가면 됩니다. 제국 병사의 눈에 띄지 않게 주의하시길."
쳇.
결국, 안내역은 안내역인가.
위험한 곳까지 같이 가줄 수 없다. 이거야?
그때, 옆으로 난 작은 통로에서 낯익은 얼굴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
트리샤다.
갈색 세미 롱 헤어에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이 예쁜 그녀.
"기다리고 있었어. 보스."
"역시 잠입하면 도적이지?"
"마법 도적이야. 마법 도적.
경비 마법은 모조리 해제해 두었어. 하지만, 황제 폐하의 감시병들이 이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조심해야 해."
"좋은 생각 있어?"
"보이면 둘러대기보다는 그냥 쓰러뜨리는 게 나아."
"알았어."
"내가 뒤를 봐줄게."
나는 간수와 헤어진 대신 트리샤와 합류하고 복도를 은밀하게 통과했다.
그러자 맞은편 모퉁이에서 흑의를 입은 남자 두 명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특이한 경갑을 걸치고 있네.
"황제 폐하 직할 부대야.
맞춰서 쓰러뜨리자. 할 수 있지?"
고개를 끄덕이자, 트리샤가 신호를 준다.
"1, 2…."
트리샤는 순식간에 남자의 뒤로 돌아가 무기로 여러 번 찔러서 무력화시키고, 목을 졸랐다.
나도 즉시 촉괴를 상대방 머리에 날려 제압한다.
"우우웁!"
우주선에 숨어든 외계 생물체가 사람을 하나씩 죽여 나가는 SF 영화에 나올 법한 장면이다.
귀찮은 일은 모두 촉괴한테 맡겼다.
그게 내 스타일이니까.
"돌아와."
기절한 두 사람을 두고 계속 나아간다.
"이 방이야. 얼른 들어갔다가 나와."
"알았어."
트리샤가 망을 보는 사이, 나는 아멜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다.
위험하다고 생각한 순간 촉괴들이 주위로 가시를 뻗어, 어둠에 숨어 기습하려던 남자들을 제압했다.
'잘했어. 얘들아.'
정령 4천 개나 먹여 키운 보람이 있다니까?
지금 촉수 갑옷이 얼마나 강한지는, 나도 알 수 없을 정도다.
갑옷이 살아있다는 특성 때문에 기습에도 강했다.
칠흑같이 검었던 방에 불이 켜진다.
잠시 본모습을 드러냈던 촉괴는 어느새 옷으로 돌아온 뒤였다.
눈앞에 있는 흑의인이 쓰러진 부하들을 보고 혀를 찼다.
"실력이 꽤 늘었군."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여유롭게 웃어 준다.
"이 정도는 예상했지!"
"호오. 꼴사납게 다리 들고 '앙앙'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윽!!"
그놈이구나!
내 하이킥 받고 그대로 보지섹스로 전환한, 그 재수 없는 녀석!
황제 폐하의 직할 부대라고 했을 때 다시 만날 줄 알았어야 했는데….
"아멜리아는 어디에 있어?"
"이 방에 들어온 자가 맞이할 운명은 죽음뿐이다."
죽으라고? 그럴 순 없지!
나는 촉괴 검을 만들어 흑의인과 맞붙었다.
처음부터 상대도 진심으로 검을 들고 맞부딪친다.
'촉괴들아. 믿는다!'
강화된 촉수 갑옷의 힘으로 흑의인과 맞선다.
상대는 혼자가 아니다.
다 같이 덤벼도 될 텐데, 끼어들지도 못하는 걸 보면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체감한다.
훨씬 빠르고 강해졌어.
촉수 갑옷의 스탯을 나누어 받은 덕이야!
"큭!"
나는 바로 흑의인의 팔을 잘라버리고, 허공에 검을 휘둘러 피를 털어냈다.
"아멜리아는 어디 있냐고!"
"…아멜리아 황녀가 갈 곳은 하나뿐이다. 방해하지 마라."
갈 곳은 하나뿐…?
이미 경기장에 올라갔구나!
아직 투신전은 시작하지 않았을 텐데?
함정을 파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건….
"황제 폐하의 명으로 여기를 지키고 있었어?"
"말해줄 의무는 없다."
"대답해줘서 고맙네."
망할 놈 같으니라고.
자기 딸을 어떻게 하려는 거야?
나는 참을 수 없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너희는 황제가 뭘 하려는지 알기나 해?"
"우리는 그저 내려온 명령을 따를 뿐이지…."
"그래서 투신전이 시작하기도 전부터 아멜리아를 가두어 놓았어?"
"너는 뭐라고 제국에 반역한 여자를 구하려 하지?"
"잔말 말고 죽어!"
바로 검을 휘두른다.
흑의인은 진짜 당황한 것처럼 편수로 내 검을 받아치며 말했다.
"지금은 악당의 물음에 멋있게 대답해야 할 때 아니냐!"
"좆까!"
나쁜 말 해서 미안해. 세이나!
속으로 세이나한테 사과하면서 검을 계속 휘두른다.
"너랑 한가롭게 얘기하고 있을 시간 없어. 인마!"
"크윽…. 보기와는 다르게 잘 싸우는군. 시간을 벌어라!"
"예!"
다른 흑의인들이 치고 들어온다.
"너희는 나한테 안 돼!"
검을 휘둘러 한 명씩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
촉괴의 특성을 해방하면 손쉽게 죽일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불필요하게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보다….
한 명씩 불구로 만드는 게 더 재밌어!
"너도 외팔로 만들어 줄까? 앙?"
"크, 크윽. 난폭한 년…!"
"다리 한쪽 필요 없다고?"
뭐야.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는데 왜 손이 벌벌 떨리지?
정육점 고기도 아니고 사람을 썰었으니 당연한가.
누가 보면 겁에 질린 아녀자인 줄 알겠다.
실제로 겁에 질린 건 흑의인들이다.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있기는 해도, 정신적인 부담감 때문에 그러고 있을 뿐.
외상은 하나도 없었다.
쭈읍 쭈읍.
촉괴들이 긴장하지 말라고 달래주는 것처럼, 피부를 기며 내 땀을 빨아 먹는다.
'고맙다. 얘들아.'
"깔끔하게 패배 인정하고 꺼져!"
"물러나라!"
흑의인이 모습을 감췄다.
또 나타나겠지?
잘린 팔까지 들고 깨끗하게 사라졌네.
간파를 써보니 방에는 잠시나마 아멜리아가 머물렀던 흔적이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걸 듣고 발 빠르게 빼돌린 듯하다.
'젠장.'
잘 풀리지 않을 줄 알았어.
서안 황자님한테는 미안하지만, 일이 좀 더 커질 것 같아.
빼돌리려면 개막 직전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상대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사전에 나와 아멜리아의 면회를 막고, 당일까지 덫을 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나는 촉괴 검을 꽉 쥐었다.
'할 수 있어.'
제멋대로 날뛰어 주겠어!
"트리샤. 아멜리아는 여기에 없어.
계속해서 경계해 줘."
"알았어. 반대편에는 신애가 있는데, 가볼래?"
"아니, 바로 경기장에 올라가겠어."
"바로!? 지금 바로 올라가면, 관중들 눈에 띌 텐데. 괜찮아?"
"상관없어. 이미 시작했으니까. 지금 막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처음에는 아멜리아를 검투사로 내보낼 줄 알았다.
그러면 이 타이밍에 내보낸 건 이상하다.
모든 관중이 경기장에 들어오기도 전에 시작할 이유는 하나뿐이다.
개막의 열기를 더하기 위한 제물.
「상품」도 「검투사」도 아니다.
그저 구경거리로 쓸 생각인 거야!
"몸 좀 보호해 줘!"
촉괴들이 전신 타이즈로 폼을 바꾼다.
목부터 발가락 끝까지 촉수 괴물의 내장 속에 들어온 것처럼 따뜻하고 촉촉하다.
온몸에 흐르는 땀을 빨게 두면서, 나는 관중석으로 이동했다.
"와아아!"
환성 때문에 귀가 먹는 줄 알았다.
벌써 이렇게 많이….
경기장에서 나를 보면 좁쌀만 하게 보이지 않을까?
경기장 규모가 워낙 커서 나를 주목하는 사람 따위 아무도 없었다.
반대로 몹시 눈에 띄는 곳이 있다.
황실 사람들이 머무는 스카이라운지.
마치 경기장 일부를 떼어 놓은 것처럼 돌출된 휴게소에, 황제와 황후가 앉아 있었다.
황후는 멀리서 보아도 알 수 있을 만큼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