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회
임신 보고
평소보다 다섯 배는 많은 하인이 돌아다니고 있는데,
별궁에 들어온 우리한테 눈길을 주는 이가 한 명도 없다.
처음에는 태자님이나 황자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지만, 나는 곧 이런 분위기를 어디서 느껴본 적이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병영에 듀롯 폭탄을 떨어뜨린 게 너냐?"
짜증 섞인 목소리.
어느새, 한 남자가 우리 앞을 가로막듯 서 있었다.
키 크다.
"누구시죠?"
내가 좀 전에 수도의 병사용 숙소에 갔다 온 건 사실이지만, 벌써 누구 귀에 들어갈 만큼 오래된 일이 아닌데.
나는 직감적으로 오만상을 찌푸린 이 젊은 남성이, 나보다 신분이 높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누군지 몰라?"
"제 3황자님!"
신애의 안색이 파래졌다.
그녀가 무릎 꿇으려 하자, 상대는 더욱더 눈살을 찌푸리며 손사래 쳤다.
"아, 하지 마.
여기서 그랬다가 큰형님이 무슨 소리 할지 모르니까."
이 사람이 서안 황자님의 형?
잘 보니 다른 황자님들처럼 잘생기긴 했지만, 성질이 더러워 보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안경을 고쳐 쓰고 말을 이었다.
"내가 기노단이다.
오랜만에 파르니에로 왔더니, 엄청난 양의 듀롯을 확보했다는 보고를 받고 다급히 달려오는 길이지."
"제가 한 일이 맞습니다."
"대체 어디서 그런 많은 양의 듀롯을 구한 거지?"
"서안 황자님께 보고드리러 가는 길입니다."
"내가 물은 건 그게 아닌데?"
"…."
나는 일부러 대답을 회피했다.
서둘러 자세한 경위를 말하기보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형. 뭐해요?"
그때,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귀엽게 생긴 금발의 남자애였다.
그런데 기노단을 형이라고 부른다는 건….
"별로.
아무것도 아니야. 신루."
"어, 신애다."
"안녕하세요. 제 5황자님."
나는 신애를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별궁에 황자가 둘씩이나….
이 난리가 난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귀한 분들이 대거 들이닥치면, 아랫것들은 힘든 법이지.
군대에서 자주 겪은 상황이다.
이 분위기를 보건대 아직 모르는 제 2황자까지 태자님의 별궁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
신루는 나를 빤히 보면서 탄성을 질렀다.
뭐, 뭐야.
"신애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저는 시현입니다.
서안 황자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우와. 와."
…젖가슴에 뜨거운 시선을 느낀다.
"예뻐요.
이렇게 예쁜 사람 처음 봐요."
"감사합니다."
나는 솔직히 기쁜 마음을 표현했다.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싫지는 않다.
「아름답다」보다는 덜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노단은 신루의 난입으로 추궁할 타이밍을 잃고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급한 일이라…."
"뭐야?"
…뭐 실수했나?
딱 그럴 때 나오는 반응인데.
"황자인 내게 등을 보이겠다고?
어처구니없군."
그래서 허락을 구하잖아. 시발놈아.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가 봐.
어차피 우리 앞에서 알고 있는 건 전부 말해야 할 거야."
"이따 봐요. 예쁜 분."
기노단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신루와 함께 멀어졌다.
말해야 할 거라니, 무슨 뜻이야?
신애는 살짝 긴장한 듯했다.
"무언가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서안 황자님께 가보자."
나는 신애와 함께 황자님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도 좋다."
서안 황자님,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차분하게 앉아 우리를 기다리는 황자님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진정되었다.
"궁내가 어수선하여 놀랐을 줄 안다.
설명해 줄 테니 앉아라. 혹시 이미 만났느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노단 황자님과 신루 황자님을 뵈었습니다."
"기노단 형은….
조금 까다로운 분이지. 이미 만나 봤다면 길게 설명할 것 없겠군.
현재 큰형님의 별궁에 황족들이 모여 있다. 내 형들, 그리고 동생…."
서안 황자님의 맞은편에 앉는다.
신애는 자연스럽게 한발짝 물러나 내 옆에 섰다.
"무슨 일인가요?"
"황제 폐하의 명으로 투기장이 열렸다. 제국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하는 큰 행사지."
투기장?
아, 노예들을 싸우게 한다는 그곳이구나.
제국에 처음 왔을 때 태자님이 설명해준 장소다.
그때 분명,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라고 했던가?
"그게 황자님들이 모인 이유와 무슨 관계가 있나요?"
"외부인인 네게 설명하려니 말을 고르기가 어렵구나.
원형 경기장은 노예 검투사가 싸워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대전사를 내세워 권력과 재력을 과시하는 곳이기도 하다."
"음, 그 말은….
황자님도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대전사를 내세워 참여할 수 있다는 얘긴가요?"
"그래. 때로는 직접 참여하기도 하지."
뭐, 진짜?
그건 좀 파격적인데.
밑바닥 천민과 귀족이 계급장 떼고 한 판 붙는다는 얘기잖아.
내 표정을 읽은 서안 황자님이 미소를 지었다.
"제국의 긴 역사를 통틀어도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자이로 형은 또 참여하겠지만…."
또?
자이로는 또 누구야.
태자님 성함이 도하, 그 밑으로 기노단, 서안, 신루….
아, 제 2황자님이구나.
아직 본 적 없네.
"결론은, 큰 행사 때문에 모인 건가요?"
서안 황자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언가 더 있는 듯하다.
"아멜리아가 나온다."
"예?"
나는 상상도 못 했던 이름을 듣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황제 폐하의 명으로….
개막의 열기를 더하기 위한 희생양으로 쓰이겠지."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아무리 범죄자라도 그렇지."
자기 딸을 구경거리로 만들다니.
"폐하께서는 오염을 불태우는 성스러운 정화의 의식이라고 생각하실 것이다."
서안 황자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는 감정의 떨림이었다.
"불행하게도 많은 제국 신민이,
오염된 황녀가 불에 타거나, 칼에 맞거나, 강간당하는 장면을 보고 싶어 한다."
"…."
설마….
아멜리아는 일이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을까?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른 황녀에게, 사형 선고까지는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죽이는 방식이 야만스러워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한때는 애지중지 사랑했던 딸이잖아?
투기장에 내보내서 싸우게 한다고?
노예한테 얻어맞거나 강간당하는 걸 모두에게 공개한다고?
…끔찍하다.
"네가 상상하는 일들은 모두 현실이 될 수도 있다."
"다들 이해하고 넘어간 거예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모인 것이다."
나는 안심했다.
황자들 인성이 터진 게 아니라서.
"하지만, 상황이 복잡하다는 것을 너도 알 것이다.
폐하의 순결에 대한 강박은 어머님이 변고를 당한 후로부터 계속 강해져 왔다.
아멜리아를 비참하게 만드는 쇼는 계획대로 진행될 가능성이 커."
그런 걸 대체 누가 보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신사·숙녀들.
사실은 그런 걸 보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고대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도,
미소년과 미소녀들이 관중 앞에서 수간 하는 걸 볼거리로 제공했었다.
정말로 똑같은 일이 이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그게 사람의 야만적인 본성이니까.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지는 잔인한 결투도 마찬가지.
모든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자극적인 볼거리로 제공된다.
이 엄청난 대형 사업에,
아리따운 황녀가 제국을 등졌다가 잡혀서 무슨 꼴을 당하는지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정말 없을까?
당장 나만 해도….
[숙녀「거품에서 태어난 여신」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숙녀「피의 어머니」가 슬슬 때가 되었다고 합니다]
[숙녀「방탕한 황후」보상을 준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흠칫했다.
무섭다.
그냥 이상한 변태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초월자들의 존재가 무섭게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 알고 나를 관음하고 있는 걸까?
"시현?"
"죄송합니다.
잠깐 생각할 일이 있어서…."
"불쾌한 이야기지. 이해한다."
"황자님들이 모여도 설득할 수 없다면, 아멜리아를 구출하는 수밖에 없습니까?"
"그것도 쉽지는 않다. 뜻을 하나로 모으면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멜리아를 구경거리로 만드는 일에는 모두가 반대하고 있으나, 구출에 동의하는 형제는 없다. 아멜리아가 응당 치러야 할 죗값이 있기 때문이지."
"…."
뜻이 하나로 뭉치지 않았구나.
아멜리아를 구출하고 싶은 건 나랑 서안 황자님 정도겠지.
나도 긴가민가해.
아멜리아를 위해 많은 걸 희생해야 할 상황에 놓인다면,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그냥 아멜리아의 처지가 가여워서 동정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는데.
"아직 시간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멜리아의 죄를 덜어내는 일이다.
정확히는 뒤에서 모략을 꾸민 진범을 잡아서, 형님들이 아멜리아를 다시 보게 하는 거지."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듣고 있다."
"역병의 디네스를 생포했습니다."
"뭐?"
황자님은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이번에는 내가 황자님을 놀라게 했군….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큰 공이다!"
"신애가 목숨 걸고 도와줬기 때문에 제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신애!"
서안 황자님은 크게 기뻐하며 신애를 불렀다.
"네, 황자님."
"정말 잘해주었다.
너를 시현 곁에 두기를 잘했구나."
"감사합니다."
"몸에는 이상 없나?"
"어, 음…."
이걸 보고해야 하나?
안 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길 것 같긴 해.
나와 신애가 임무 중에 약에 절어서 섹스하고 임신한 일.
누가 보면 그런 걸 뭐하러 일일이 말하냐 하겠지만.
군인에게 보고는 생명이다.
아무리 사소한 거라도 임무 중에 일어난 일을 보고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제 나는 군인이 아니지만.
서안 황자님과의 신뢰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급적이면 있었던 일은 그대로 보고하고 싶었다.
나는 신애와 눈을 마주쳤다.
"어려움 없이 말해라.
임무 중에 생긴 일이니,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다."
머뭇거리는 나를 대신해서, 신애가 말했다.
"임무 중에 타깃과 수월하게 접촉하기 위해 몸을 썼습니다."
"…."
황자님은 살짝 충격받은 듯 신애를 빤히 바라봤다.
나라도 충격받겠어.
그 신애가….
'몸을 썼다'고 말했으니.
"임신했을지도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은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괜히 죄지은 기분으로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소중한 황자님의 공작원을 창녀 메타로 끌어들여, 본의는 아니었다고 하지만 질내사정 섹스에서 구해주지도 못하고….
덜컥 임신하게 했으니.
"죄송합니다."
"하하."
황자님은 웃었다.
"두 사람 다 떳떳하게 고개를 들어라.
왜 사과를 하지?"
"배가 부르면, 앞으로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제한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황자님의 허락 없이 모르는 아저씨와 섹스해서 임신한 죄….
벌을 받으라면 달게 받겠습니다."
"그 밖에 상처는 없고?"
"예."
"그러면 됐다.
역병의 디네스와 맞서고, 사지 멀쩡하게 돌아와 준 것만 해도 고맙다."
"은혜로운 말씀, 감사합니다.
임신했더라도 쭉 황자님을 섬기겠습니다."
"그, 그래…. 시현은…."
"저도 임신했어요."
"…."
"…."
나는 황자님과 눈을 마주치고 배시시 웃었다.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왜 임신하고 나한테 사과를 하느냐….
내 기분까지 이상해지는군."
"신애의 몸 관리는 제가 맡아도 될까요?
금세 출산시키고, 다시 복귀시키겠습니다."
"그런 게 가능한가?"
"네."
권역 버프를 이용하면.
지금도 고블린을 양산하고 있는 좆집들처럼, 금세 출산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낳은 아기를 인큐베이터에 넣는 것처럼 보호할 수도 있지.
"그러면 그쪽 일은 맡기겠다.
신애. 같은 여자끼리 얘기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테니, 시현한테 의지해라."
"그러면 1주 간격으로 임신 상황에 대해 보고하겠습니다."
"아니…. 괜찮다."
참을 수 없이 민망한 기류가 흐른다.
황자님은 헛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더 알아낸 사실은?"
"아직 숨겨진 게이트가 더 있습니다.
디네스는 게이트 건너편을 마물이 사는 공간으로 개조해서 활용하고 있었어요."
"그건 위험하군."
"슬럼에 나도는 듀롯을 거의 확보했지만, 디네스의 약 제조 시설이 어딨는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디네스를 고문하게 허락해 주세요."
"위험하지 않겠나?
디네스는 삼장 중에 제일 교활하다고 들었다. 원하는 걸 얻어내기는 꽤 어려울 텐데."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알았다. 맡기지.
게이트에 관한 조사도 서둘러라. 원한다면 사람을 더 붙여줄 수도 있는데…."
"저와 신애로 충분합니다."
황자님은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