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TS물-129화 (129/295)

129회

데이트, 곤란.

"가슴만 조금 작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

나는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커서 죄송합니다…."

"타고난 몸이니 어쩔 수 없지요."

라곤 할멈이 내 목에 은목걸이를 걸어주었다.

"과한 장식은 눈에 거슬릴 뿐이지만, 어차피 가슴에 시선이 모일 테니 이렇게 합시다."

"네."

나는 솔직히 아무 생각이 없다.

가만히 서서 옷걸이가 되었더니 어느새 완성된 코디.

퍼펙트 폼 시현이다.

…혼자서는 입을 수 없는 옷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황자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엄격한 복장을 갖추고 서안 황자님께 갔다.

"…."

"…."

황자님이 먼저 말하기를 가만히 기다린다.

"하하하."

"…안 어울리죠? 벗을까요?"

나는 서안 황자의 큰 웃음에 볼이 뜨거워졌다.

"이런. 비웃은 게 아니다.

네 성격에 그런 옷을 입고 있으니, 어지간히 답답하겠구나 싶었다."

부들부들….

황자님은 빨개진 나를 달래듯 볼에 손을 댔다.

"잘 어울린다. 시현."

"예. 웃을 만큼 잘 어울리겠죠."

뭐야.

삐친 건가?

나 스스로 계집애 같다는 생각이 들어 점점 더 부끄러워졌다.

시발. 하늘하늘한 드레스 같은 걸 입는 게 아니었어.

"아주 아름답다.

내가 평생 본 적 없을 정도로."

…황자님의 격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토라졌던 마음이 바로 진정되는 걸 느끼고,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세상에, 시현아. 정신 차리자.

이러다 며칠 뒤에 남자랑 팔짱 끼고 웨딩 홀 밟는 수도 있어.

나는 심호흡하고 황자님과 함께 호위를 데리고 거리로 나갔다.

사람들 표정을 보고, 황자님의 칭찬이 입바른 소리가 아니었다는 걸 깨닫는다.

…엄청나게 주목받고 있다.

평소에는 머리통만 한 젖탱이와 튼실한 엉덩이를 과시하며 음란한 시선을 한눈에 받았다면.

오늘은 얼굴이 주인공….

사람들이 내 얼굴을 보고 경탄하고 있으니, 도저히 평소처럼 눈살을 찌푸리고 다닐 수 없었다.

가식이라도 입꼬리를 올리고 예쁜 표정을 짓는다.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저길 봐."

"대단하다."

"황자님 옆에 계신 저분…."

"혹시 황후님인가?"

"황후님이 저렇게 어릴 리가 없잖아. 멍청아."

황자님이 직접 나를 에스코트하며 말했다.

"마차를 준비했다. 가자."

"네."

여자가 예쁘면, 그만큼 복 받은 일도 없다고 한다.

가진 사람은 이런저런 단점을 들며 불평할 수도 있지만, 가지지 못했던 나에게는 꿈도 꾸지 못했던 세계다.

현대에 있을 때 길거리를 지나다가, 우연히 연예인과 마주친 적이 있는데.

그때 상대방 얼굴을 보고 놀라워서 입을 벌리고 멍하니 있었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

얼굴에서 빛이 나는 사람이 있구나, 하고.

죽어서 다시 태어난 후에야, 무슨 기분인지 알겠다.

사람들이 그때의 나와 같은 반응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황자님이 마차 안에서 내게 물었다.

"그냥, 예쁘게 태어나기를 잘했구나. 생각했어요."

"하하하."

"…오늘 자주 웃으시네요."

"네가 나를 웃기고 있다."

"차려입은 보람이 있었으니 잘 됐죠."

"자주 입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귀족이 될 테니까."

….

똑 부러지는 하녀부터 고용해야겠군.

마차 안에 있어도 사람들의 주목은 피해갈 수 없다.

나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얼굴도장을 제대로 찍고, 언덕 위에 있는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가로 이동했다.

여기 사람들은 입은 옷부터 부티가 난다.

내 전 재산 2은 73동으로는 손바닥 한 뼘만큼의 옷감도 살 수 없을 듯하다.

으리으리한 고급 주택가의 으리으리한 저택.

모두 다 규모가 굉장해서 일단 화려하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제국이라 불릴 만하네.

"내 손을 잡고 내려라."

"혼자서 내릴 수 있어요."

서안 황자님이 내 손을 낚아채듯 잡았다.

읏….

군말 없이 조용히 에스코트를 받고 내린다.

"…라곤 님이 신체 접촉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럴 때는 내 에스코트를 거절하는 게 더 문제다."

"정말 이게 약식 맞아요?"

"제대로 된 절차가 어떤지 듣고 싶으냐?"

"아뇨. 됐어요."

나는 황자님과 손을 잡고─정확히는 손을 붙잡힌 채─ 안뜰로 나아갔다.

황자님이 들어오기 무섭게 아는 척하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 몰려든다.

"서안 황자님. 평안하셨습니까?"

"고울 경. 오랜만입니다.

아직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서, 쉬고 있다는 게 꿈 같습니다."

"활약상은 전해 들었습니다. 황자님이라면 제국의 대장군이 되는 것도 시간 문제 같습니다. 하하!"

"그랬으면 좋겠군요."

"한데, 옆에 계신 아름다운 여성분은?"

하하하.

아름다운 여성분이래.

확 혀 깨물고 싶다.

방금까지 사람들이 예쁘게 봐줘서 좋았는데, 지금은 또 아니다.

왜 이러냐고?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TS 된 남자만이 알 수 있는 복잡하고 미묘한 심경이다.

오글거려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예쁜 표정을 유지한다.

"그녀가 시현입니다."

"오! 믿기 힘들군요.

어떻게 이런 가녀린 팔로 그런 위업을…. 저는 고울입니다. 시현.

와인 사업을 하고 있죠."

"반갑습니다."

"두메른을 처리했다는 게 정말입니까?"

"유리검과 황자님의 도움 덕분이에요."

"이 나이에 그런 위업을 이루고 겸손함까지 갖추다니….

아주 훌륭합니다."

황자님 곁에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지만, 대화 패턴은 다 비슷했다.

문안 인사를 올린 후, 나에 관해 물어본다.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고 기억하는 그 일련의 과정을 누구도 거르지 않는 걸 보면, 사교계가 참 무섭고 까다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어쩌면 몇 가지 흠결을 잡혀서, 나중에 언급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나는 황자님 얼굴에 먹칠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표정 관리에 공을 들였다.

물론 다 끝나면 냅다 쨀 생각이지만.

"지나갔군."

황자님이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황자님도 이런 게 낯설어요?"

"누군들 사람을 대하는 게 까다롭지 않을까.

웃는 얼굴 뒤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데."

나만 불편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여기 모인 사람 중에 특히 조심해야 할 자가 있다. 저길 봐라."

나는 황자님을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얼굴에 탐욕이라고 쓰인 듯한 돼지 한 마리…. 아니, 살찐 사람이 한 명 있다.

게으름과 나태의 화신이 있다면 저런 모습일까.

온몸을 치장하고, 손가락에는 번쩍거리는 반지를 수도 없이 끼워 놓았다.

덩치 큰 호위를 양쪽으로 네 명이나 끼고 사람들에게 과시하려는 모습이 무척 흉했다.

"저런 것도 귀족이에요?"

"제국에서 제일 유명한 노예 상인, 티모스 후작이다."

"왜 조심해야 하는데요?"

"그가 다루는 사업이, 너와 같은 여자를 팔아넘겨 돈을 버는 것이기 때문이다.

낙오된 여성 모험가나 젊은 처녀를 유괴하기도 한다."

"잡아서 감옥에 처넣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쉽지는 않다.

티모스는 제국의 여러 국책 사업에 자금줄을 대고 있기 때문이지.

너를 눈독 들일 게 뻔하니, 가능한 한 얽히지 말아라."

"알겠습니다."

말하기 무섭게 티모스 후작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이쪽으로 다가온다.

그는 황자님도 무시하고 내 몸을 빤히 훑어봤다.

…젖가슴 닳겠다. 야.

"티모스 후작."

"서안 황자님. 5년 만이군요."

"벌써 그렇게 되었군."

"이 여자는 노예입니까?"

"나한테 그런 취미는 없다."

티모스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아, 아히힉힉. 그랬었지요. 다른 황자님과 착각했지 뭡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아닙니다.

워낙 특등품의 보지 노예가 눈에 띄어서 말이지요…."

내 얘기는 아니겠지….

"오늘은 그런 얘기를 하는 자리가 아니다.

품위를 지켜 줬으면 좋겠군. 후작."

"예. 알겠습니다.

여성분께서는, 이름이…?"

"…시현입니다."

"혹시나~ 싸움을 그만두고 몸을 팔고 싶어지면 말씀하십시오.

우리는 사창가도 운영하고 있으니…."

"그만."

"아히힉. 죄송합니다. 워낙 탐나는 소재라…. 다음에 또 뵙지요."

티모스는 게걸스럽게 웃으며 떠나갔다.

…끔찍하군.

"어떤 자인지는 대충 알았겠지?"

"네."

"여자를 그런 눈으로밖에 보지 않는다."

"뭐. 다시는 볼 일 없지 않을까요?"

설마 내가 내 발로 매음굴에 가는 일이 있겠어?

촉괴들이 내 몸을 지키는 이상, 유괴당해도 걱정 없다.

"그러면 좋겠지만…."

"말이 씨가 돼요. 황자님."

"알았다. 쓸데없는 얘기는 접어두지.

자, 들어갈까."

"네."

약식이라고 들었지만, 황자님이 직접 온다고 하니 꽤 많은 귀족이 찾아온 것 같다.

나는 황자님의 호명을 받고 앞으로 나가서, 귀족의 책무를 읊었다.

법관이 하는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 할 뿐이다.

"나는 파누스 제국의 정통한 황제를 섬기는 충실한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

"나는 파누스 제국의 정통한 황제를 섬기는 충실한 신하가 될 것을 맹세한다."

나는 정식으로 백작위를 수여 받았다.

사람들 앞에 나와 있는 동안 젖가슴을 핥는 듯한 시선을 느낀다.

심지어 연세가 지긋한 법관님도 내 가슴골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남자의 본능이다.

이런 야한 젖탱이를 드러내고 있으면 눈이 갈 수밖에.

유두가 보일 듯 말 듯 한 지점에서 가려져 있기 때문에 아주 아슬아슬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귀부인들의 시선까지도.

"저건 대체 뭐야?"

"갑자기 나타나서는…."

"진짜 천박하게, 창녀처럼 입었어."

"황자님은 왜 저런 품위 없는 여자를 곁에 두신담."

나는 '품위 있는' 귀부인들에게 찍힌 듯하다.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은 저런 여자들이 아니니까.

짧은 수여식이 끝나고 황자님 곁으로 돌아간다.

"축하한다. 시현."

"황자님 덕분입니다."

"이제부터 너는 명예 귀족이다."

"아직 뭐가 부족한가요?"

"우선 봉토가 없지.

폐하의 명이 있을 때까지는 기다려라."

"알겠습니다."

이름뿐인 귀족이라도 좋다.

백작위에 어울리는 전차나 사병 부대는 없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강하고 믿음직한 권속들이 있다.

우리 혈족에 걸맞은 지위와 땅을 원해.

언젠가 황제 폐하 앞에 서겠지.

맡은 임무만 매끄럽게 해결하면 순탄하게 이어질 출셋길이다.

"시현."

황자님이 내 손을 잡았다.

"네?"

"…음. 흠.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지금부터 잠깐 식사라도 하지 않겠나?"

"새로운 임무인가요?"

"아니. 개인적인 요청이다."

"데이트요?"

황자님은 내 당돌한 태도에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뜨고 가만히 있었다.

"제가 오해했나요?"

"…아니, 오해하지 않았다. 데이트다. 건전한 데이트."

나는 들어줄 것처럼 배시시 웃었다.

"먼저 일어날게요. 황자님."

"…."

"해야 할 일이 생각나서…."

"나를 서운하게 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냐?"

바람맞은 황자님은 내 손을 꽉 잡고 매달렸다.

기분 좋은데?

"황녀님이 맡긴 일이에요."

"아멜리아가?"

"자기가 키우던 고양이를 봐 달래요."

"고양이? 그런 건 키운 적 없었을 텐데. 이상하군."

"이제 놓아주실래요?"

"함정일 가능성은."

"적어요.

만약 함정이라면, 꼭 가봐야 할 만큼 중요한 단서가 있는 곳이라고 했겠죠."

"…음."

이제 날 붙잡을 구실이 떨어진 듯, 황자님은 내 눈을 빤히 바라봤다.

드레스 입은 내 모습이 예쁘긴 한가 봐.

당장 벗고 싶어서 좀이 쑤시지만….

"섹스는 몰라도, 데이트는 좀."

"뭐?"

나는 황자님이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말했다.

"섹스라면 좋은데, 데이트는 싫어요."

"…."

황자님의 충격받은 표정, 잊을 수 없다.

나는 킥킥 웃었다.

"또 보고하러 갈게요. 황자님."

"…알았다."

발칙하게 황자님을 거절하고 내가 주인공인 파티를 떠난다.

군인일 때는 느껴본 적 없는 해방감.

제멋대로 행동하는 게 좋다.

사랑스럽고 예쁘니까 어쨌든 용서 받을 거라는 암컷 마인드가 뿌리 깊이 박힌 결과였다.

뭐, 꼬우면 사죄섹스 시키든가.

나는 한 번 별궁으로 돌아가서 드레스를 반납하고, 전신 타이즈 폼으로 돌아왔다.

…이게 아닌데?

쭈읍 쭈읍.

촉괴들이 피부에 밴 땀을 흡입한다.

나는 전신을 빨리는 쾌감에 흠칫했다.

"야, 너희들….

빨리 기본 폼으로 돌아가."

슈루룩.

촉수 갑옷의 면적이 마법처럼 줄어든다.

이제야 좀 움직이기 편하네.

나는 날이 저물기 전에 움직이기로 했다.

아멜리아가 사전에 알려준 은신처 위치는, 상점가 구석에 비밀스럽게 숨겨져 있었다.

벽에 난 표식을 구분해서 스위치를 찾아낸다.

벽돌을 꾹 누르자 바닥에 숨겨져 있던 비밀 통로가 나타났다.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다.

제국 지하에는 이런 은신처가 널려 있단 말이지…?

"읏차."

나는 구멍에 하반신을 쑥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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