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TS물-114화 (114/295)
  • 114회

    제국으로"어디를 그리 서두르느냐?"

    "…큰형님."

    서안 황자님의 큰형님이라면, 계승 순위가 높은 또 다른 황자님?

    나는 자연스레 물러나 고개를 숙였다.

    "흠. 옆에는 임신한 여성까지 데리고…."

    그런다고 눈에 띄지 않을 내가 아니었다.

    "곧 도착한다고 서한이라도 보내주면 좋았을 텐데."

    "죄송합니다. 사안이 워낙 급하여 빠르게 뛰어왔습니다."

    나는 슬쩍 황자님을 훔쳐봤다.

    서안 황자님보다는 나이를 먹은 티가 나지만, 흠잡을 데 없는 미남이다.

    턱에 난 뻣뻣한 수염이 잘 어울리는.

    "터놓고 할 얘기도 많은 것 같으니 입궁하자꾸나.

    네가 데리고 있는 그 여성과 함께."

    "이 자는…."

    서안 황자님은 무언가 망설이는 듯했다.

    "저런 배를 끌어안고 움직이려면 제약도 많겠지.

    별궁의 방을 손님께 하나 내어드리도록 하마. 부자유 없이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도하 형님."

    "고맙습니다."

    나는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이 사람이 도하…. 아멜리아가 나한테 붙잡혔을 때 도하 오라버니냐고 되물었던 적이 있어서 아는 이름이었다.

    그 말은, 아멜리아를 구하고 싶은 서안 황자님께는 껄끄러운 상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나저나 아주 아름다운 분이구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가 시현입니다."

    "아!"

    도하 황자님은 흥미로운 듯 나를 관찰했다.

    나는 허벅지를 오므리고 얌전히 있었다.

    수줍어서 그러는 게 아니다. 정액이 밑으로 샐 것 같아서였다.

    몸은 꼼꼼하게 씻었지만, 자궁 속에 가득 찬 정액은 빠지는 데 시간이 걸린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가자."

    "예."

    경호원들이 누구도 황자님께 다가오지 못하게 행인들을 통제하고 있다.

    덕분에 큰길을 독점한 기분으로 걸을 수 있었다.

    이게 권력의 맛?

    "서안 황자님이다."

    "얼굴에 빛이 나는 것 같아."

    "황궁에 계신 줄 알았는데."

    "전쟁터에서 돌아오신 거야!"

    북부에서 전쟁을 지휘하다 온 서안 황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니.

    마물과의 전쟁이 제국 신민의 관심 밖이라는 얘기를 트리샤에게 들은 적 있지만,

    정말로 그런 것 같다.

    실제로 위기가 맞긴 해?

    수도의 위용을 보니 작은 해프닝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거리에 가득한 사람들, 청결하고 정돈된 거리, 그리고…. 엄청나게 큰 투기장.

    고대 로마의 원형 투기장, 아레나를 닮은 건물이 웅장함을 뽐내고 있다.

    …구경하면서 걷다가 도하 황자님의 등에 부딪혔다.

    "아윽."

    경호원들이 눈을 부라린다.

    "흠?"

    "죄송합니다. 구경하다가…."

    "파르니에를 방문하는 게 처음이라면,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없지요."

    "파르니에…. 저 건물이요?"

    경호원이 나를 제지했다.

    "허락받지 않은 질문은 삼가라."

    "괜찮다."

    도하는 손을 들어 경호원을 제지하고, 한없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나를 내다봤다.

    "파르니에는 이 도시의 이름입니다. 저곳은 노예 검투사들이 싸우는 경기장이지요."

    "노예 검투사…."

    진짜 원형 투기장 맞네.

    다른 세계에서도 귀신같이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 보면, 사람은 어디에 있으나 유희와 오락을 추구하는 게 증명된 셈이다.

    그 특유의 예술적 감각으로 존나 큰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사람과 짐승을 함께 풀어놓고 죽어라 싸우는 것을 보며 즐기는.

    야만적이지만, 동시에 무척 자극적이기도 한 오락.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입니다."

    "굶주린 사자나 호랑이를 풀어서 싸우게 하는 거죠?"

    "하하하."

    도하는 웃음을 터뜨렸다.

    "사자나 호랑이는 쉽습니다. 결과를 빤히 예측할 수 있는 승부는 관객을 들끓게 할 수 없죠."

    "아."

    잘못 짚었다.

    여기는 맹수보다 사람이 더 강하지?

    맨몸으로 싸운다고 해도 잘 연마한 스킬이 있으면, 위기를 극복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러면 대체 뭐랑 붙게 하는 걸까.

    궁금하지만, 보고 싶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 왔습니다."

    나는 황자님을 따라 으리으리한 궁전에 입궐했다.

    입구부터 경계가 삼엄했지만, 동행이 동행인지라 나를 의심하고 가로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화려한 내실에 들어서니 등이 굽은 노파가 우리를 마중 나왔다.

    "태자 전하. 돌아오셨습니까."

    "내 동생과 편히 얘기를 나누고 싶소."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한데 그 여성은…?"

    자기소개해야 하나?

    "내 동생이 데려온 손님이오.

    마땅히 대접하기 위해 데려왔을 뿐."

    "폐하께서 태자 전하의 별궁에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되실까 염려됩니다."

    "아버님은 내가 아직도 어린애인 줄 아시는군.

    나는 동생의 여자를 건드릴 정도로 돼먹지 못한 놈이 아니오. 그래도 걱정할 일이 남았는가?"

    "…."

    노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그렇게 뚫어지라 쳐다보면 뭐가 변하겠어요?

    무언의 항의라고 생각되는 침묵은 살짝 불편해질 때까지 이어졌다.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누구도 들이지 마시오."

    "예. 전하."

    인제 보니 태자 전하의 사용인 중에는 젊은 여자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다.

    혼기가 차다 못해 멋들어지게 나이를 먹은 30대 초반 남성 주변에 여자가 없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규율이 있거나, 태자비가 아주 까다로운 성격이거나.

    혹은 둘 다.

    이 부분은 궁금하다고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얌전히 있었다.

    태자는 손님맞이용 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편히 앉게."

    "음, 실례하겠습니다."

    미상의 동물 가죽으로 만들어진 소파에 허리를 내린다.

    아, 편하다.

    임신하니까 걷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구나.

    표정에 긴장이 풀린 게 드러났는지 태자가 나를 보며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인상적인 활약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동생의 편지 중 절반은 당신에 관한 내용이더군요. 시현."

    칭찬받고 기분이 좋아서 몸이 배배 꼬였다.

    태자 전하. 사람 조련할 줄 아시네.

    "감사합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려주시겠습니까?"

    움찔했다.

    오크 성채에서 겪은 일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걸 남한테 어떻게 말하지?

    "형님. 동생은 뒷전입니까."

    "이런. 들켰구나."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시현은 제 여자가 아닙니다."

    "마음에 든 것이 아니더냐?"

    "시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제 곁에 두기로 했을 뿐입니다."

    "그 말은, 시현을 내 사람처럼 써도 된다는 뜻이지?"

    뭐야. 이 어색한 분위기.

    나를 두고 서로 노려보지 말아 줄래요?

    황자랑 태자만 아니었어도 벌써 엎었다.

    "그것이 태자 전하의 뜻이라면…."

    도하는 미소를 지었다.

    "장난이다. 장난.

    오랜만에 본 동생이 반가워 주책맞게 굴었구나. 용서해라."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십니다."

    "네가 아끼는 사람을 왜 건드리겠느냐? 신애도 그렇게 감싸고 돌면서."

    "윽…. 그 얘기는."

    서안 황자님이 내 눈치를 봤다.

    "여독이 많이 쌓였겠지? 잡설은 치우고 중요한 얘기부터 하자꾸나."

    "리아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루 전 도착했다. 폐하의 명으로 투옥된 상황이다."

    "황녀를 감옥에 넣었단 말씀입니까?"

    "예상하지 않았느냐?"

    "아무리 그래도…."

    "리아에게는 중대한 혐의가 걸려 있다. 네 뜻은 알지만, 리아를 도우면 너까지 같은 의심을 받을 수 있으니 그만두거라."

    "제국에 반기를 든다는 의심 말입니까."

    "…그래."

    큰형님 말이 백번 옳다.

    아멜리아를 감싸고 돌면 반역죄로 잡혀가도 이상할 게 없다.

    폐하가 딸에게 냉정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사형시켜도 할 말 없잖아.

    "이대로 얼굴 한 번 안 볼 생각입니까?"

    "…."

    "리아가 어렸을 때 얼마나 우리를 따랐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형님."

    "지난 일이다. 안타깝지만…."

    "저는 이야기라도 해보겠습니다."

    "폐하가 지켜보는 일이다. 경거망동해서는 안 된다."

    "큰형님. 도와주십시오. 아멜리아를 부추긴 자들이 있다면, 그들을 잡아야 합니다.

    제가 어떤 단서든 찾아서 진범을 잡아 오겠습니다."

    "진범?"

    "…."

    "진범이 잡혀도 아멜리아는 벌을 받게 된다.

    폐하의 방침은 네가 더 잘 알 텐데."

    폐하의 방침?

    역시 사형인가?

    "할 수 있는 일은 해두고 싶습니다."

    "정 때문이냐. 죄책감 때문이냐."

    "두고 볼 수 없어서입니다."

    "네가 아멜리아와 직접 만나는 건 다양한 문제를 낳는다. 허락할 수 없다."

    "형님."

    "대리인을 쓰도록 해라.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겠지?"

    "…."

    "나도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알아내고 싶은 마음은 같다."

    황자님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중요한 일이다. 매끄럽게 처리할 사람은 찾았느냐?"

    "마침 이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나를 돌아봤다.

    "두메른을 물리친 영웅이라면 부족함이 없군."

    물리친 건 아스테인데.

    정정할 틈 없이, 나를 두고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현에게 1급 시민권을 주겠다. 도시 내를 자유롭게 돌아다녀도 의심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시현. 부탁하마. 단서를 찾아다오."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막막한 심경을 밝혔다.

    "주로 아멜리아를 심문하는 일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도시에 은밀하게 숨은 자들을 찾으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황자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러운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다.

    파르니에를 처음 방문한 모험가에게 모든 걸 해내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다.

    신애를 붙여주마. 모르는 일이 있으면 물어봐라."

    "네."

    "그리고 아멜리아를 만나면….

    내가 포기하지 않았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었으면 한다.

    나 역시 막막하지만,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해보겠다."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서안 황자님이 아멜리아를 보러 간다고 했을 때 내심 태자님이 거세게 반발할 줄 알았다.

    아멜리아가 엇나간 이유를 태자님에게서 찾으려고 해봤지만, 아무런 징조도 발견할 수 없었다.

    사고를 친 여동생 때문에 곤혹스러워할지언정, 그녀를 증오하거나 차별하는 낌새는 없다.

    오히려 오빠라는 사람들이 됨됨이가 좋아.

    아멜리아는 왜 극단적인 선택을 한 걸까?

    "이제 아우와 단둘이 얘기를 나누려 하는데…."

    "아, 그러면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밖으로 나가면 하인들이 방으로 안내해 줄 겁니다.

    편히 쉬어요. 시현."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등이 굽은 노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분 나쁜 눈초리로 내 배를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다.

    "라곤이라 합니다."

    "시현입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나를 싫어하는 걸까?

    잘 모르겠다.

    "시현 님은 모험가십니까?"

    "네."

    "그렇다면 태자님께 결례가 되지 않도록 기본적인 예절은 숙지해주시길 바랍니다."

    "…어떤 게 있나요?"

    노파 라곤이 나를 흘겨봤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만.

    우선은 그 식탁보 같은 품위 없는 복장부터 어떻게든 해야겠습니다."

    "…."

    임부복이 예쁘면 그게 이상하지.

    "다행히 바탕은 나쁘지 않으니 개선의 여지가 있습니다."

    바탕이라면 얼굴 얘기인가?

    칭찬이라면 칭찬이지만, 기분이 나빠 고약하게 말하는 게 느껴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래도 입을 열지는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외부인.

    태자 전하에게 붙은 벌레 한 마리라고 생각되어도 이상할 게 없었으니까.

    이런 걸 주제 파악이라고 한다.

    "또한, 높은 분이 말을 걸기 전까지는 먼저 말하면 안 됩니다."

    "네."

    "언제나 품위 있게 말하고, 걸음걸이에 주의하십시오."

    "걸음걸이요?"

    "소리를 내지 말고 사뿐히 걸으라는 뜻입니다."

    까탈스럽네.

    "이렇게요?"

    "좀 더 조신한 자세로 걸으십시오."

    조신한 자세로 걷는 게 뭔데? 상상이 안 되네.

    "…됐습니다."

    기대를 저버린 모양이다.

    노파는 방문을 등지고 나를 돌아보며,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것만 명심하십시오. 함부로 신체접촉을 해서는 아니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달리 질문하실 게 없다면 물러나겠습니다."

    "나갈 때는 그냥 나가면 돼요?"

    "안 됩니다."

    "…."

    "태자 전하의 부름이 있을 때까지는, 방에서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그건 좀….

    기회를 봐서 몰래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노파는 날 의심스럽게 쳐다보지만, 심증만으로 뭘 어쩌겠어?

    "필요한 게 있다면 불러주시길."

    "예."

    겨우 혼자 남았다.

    긴장을 풀고 침대에 눕는다.

    "후아."

    방 좋네!

    태자 전하가 사는 데라 그런지 다르긴 달라.

    눈 닿는 곳, 손 닿는 것 모두 빠짐없이 고급품이다.

    이런 데서 살 수 있다면 다소 고생하는 건 참아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워하면서 좀전의 얘기를 정리해보자.

    마침 깨끗한 욕조도 있기에 세이나를 불러서 함께 목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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