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대충 이세계 TS물-98화 (98/295)

98회

살과 불"…."

아멜리아는 황자님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죄인처럼 고개를 떨궜다.

미안한 마음이 있기는 했나 보지?

황녀씩이나 되면서 마물 앞잡이나 했으니, 내가 친오빠였으면 먼지 나게 팼다.

"리아…."

뜻밖에 서안 황자님의 음성에는 짙은 연민이 묻어 나왔다.

어쩌면 헐벗은 채 울고 있는 동생을 가엾게 여겨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생각은 없다.

비켜달라면 비켜주고, 왜 벗겼냐고 물어보면 당당하게 말해줄 생각이다.

"황녀님!"

한발 늦게 도착한 신애는 아멜리아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누가 이런 짓을…."

음.

조금 쫄리는데?

황족을 모욕한 죄라며 잡아가면 어쩌지?

거기서도 죄수 좆집 하려나….

기구한 내 인생이 걱정되기 시작할 때쯤, 황자님이 나를 돌아봤다.

"수고 많았다. 시현."

"전부 끝난 거예요?"

"오크와 전면전을 피할 수 없게 됐으니, 전부 끝난 건 아니다.

하지만 아멜리아는 보호할 수 있게 됐어."

"누가!"

나는 황녀의 독기 어린 눈빛을 보고 움찔했다.

"누가 그런 걸 원한다고 했어?"

"…둘이 사이 안 좋아요?"

"그렇게 보이나?"

"자길 벗기면 작은 오라버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말하던데."

"…."

"아."

미친. 눈치 없이 이딴 소리 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호기심이 죽음을 부른다는데 지금 상황이 딱 그랬다.

"죄송합니다. 자리 비켜드릴게요."

"아멜리아가 그렇게 말했나?"

"…네."

나는 처음보다 훨씬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했다.

황자님의 속마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확실히 황족을 모욕한 대가는 크다.

혀를 자르거나 달군 솥에 넣고는 하지."

"…."

도망칠 준비 해야겠다.

"하지만, 네가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 알고 있다.

가혹한 환경에서 임무를 잊지 않은 네가, 동료를 잃을 뻔한 분노를 표출했다고 벌을 줄 수는 없지."

다행이다….

상대가 서안 황자님이라서.

뒤를 보니 신애가 어느새 걸칠 것을 꺼내서 아멜리아의 어깨를 덮어주고 있었다.

"조금 과했다고 생각해요."

팬티 정도는 남겨줄걸.

서안 황자님의 신사적인 태도에, 나까지 창피해졌다.

"괜찮다. 원치 않는데 헐벗은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

불쑥 다가온 황자님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내 어깨에 덮어주었다.

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뿐이다.

맨살이 드러나지 않게 꼭 붙잡고 있거라."

"…네."

나는 잊었던 창피함이 되살아나 어깨를 움츠렸다.

벗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지.

왜 그런 걸 잊고 있었을까?

알몸이거나,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생활해온 탓에,

사람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양식이 많이 무너졌다는 걸 깨달았다.

다 두메른 탓이야.

씩씩한 오크 자지 탓이야.

"시현. 왜 내가 아멜리아를 찾으라고 했을 것 같으냐?"

"당연히, 가족이니까…."

"음. 그렇다면, 가족을 찾는 일을 비밀리에 해결해달라고 한 이유는?"

"알려지면 큰일 나니까요.

제국군 사기도 개판이 될 테고…."

아차.

개판이 뭐야. 개판이!

품위 있는 어휘 쓰자. 시현아. 잠시 속어와 멀어지는 거야!

서안 황자님은 날 보며 빙긋 웃었다.

개판이라는 말 듣고 웃은 게 분명해.

"제국의 상황을 모르는 너라면, 그렇게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겠군."

"틀렸나요?"

"나는 아멜리아를 살리고 싶었다.

아멜리아의 변절이 알려지면, 즉시 암살 명령이 내려왔을 테니까…."

즉, 보호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건…."

"그래. 아버님뿐이다."

"암살 명령이라니…. 정신 오염 때문인가요?"

"황궁에 아멜리아를 편드는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

"아버님이라면 기꺼이 죽이려고 하시겠지.

신애가 속한 암살단이 움직이면 아멜리아의 목숨은 열 시간도 채 버티지 못했을 거야."

아멜리아는 예쁜 얼굴을 오만상 찌푸렸지만, 반박하지 않는 걸 보면 황자님 말은 사실인 듯하다.

그래서 얼굴을 가리고 다녔구나.

왜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지 줄곧 신경 쓰였는데.

제국의 추적을 피하기 위함이었다는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

"…원래부터 말썽꾸러기였어요?"

아멜리아는 악을 썼다.

"천박한 년! 말을 신중하게 골라라."

황자님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 부분은, 말한다고 해서 황족이 아닌 자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지 자신이 없구나."

…대체 어떤 가정교육을 받았길래 저렇게 비뚤어져?

코스카의 말이 떠올랐다.

아멜리아의, 제국을 향한 적개심은 진짜라는.

제국 신민들까지 모조리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려는 증오의 바닥에는 뭐가 있는 걸까.

좆도 안 궁금해.

"그렇게 자세히 듣고 싶지는 않아요."

신애는 내 언행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놀란 표정이었다.

왜?

"하하. 볼수록 당돌하구나. 너는."

…너무 직언이었나?

"아멜리아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서안은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가지 중 하나다.

죄인으로서 제국 땅을 밟든지, 먼 땅으로 가서 정체를 숨기고 살든지."

"저를 생각해주셔서 정말 고맙네요. 넷째 오라버니."

"리아. 이 일을 알면 아버님이 어떻게 나올지 알고 있겠지.

너는 계승권을 박탈당하고 황녀조차 아니게 된다. 신민들이 던진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어.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도 내뱉겠지…."

"그 사람이라면 그러고도 남겠죠."

"내가 안전한 곳을 알아두었다.

그곳의 양치기가 내 오랜 친구야. 너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온화하고 정직한 남자다.

부부 행세를 하면 아무도 너를 건드리지 못할 거야."

"저는 그럴 수 없어요. 넷째 오빠."

아멜리아의 눈은 차가운 증오와 살의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까도 기겁했지만.

도저히 저 나이대의 여자애가 품을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모조리 다 죽이고 불사른 후에 자기 몸도 태우고야 말 것처럼 느껴진다.

실족사 후 걸어 다니는 섹스로 환생해서 온갖 교배섹스를 해온 나도 저렇게까지 화를 품어본 적이 없는데.

그렇다고 과거사가 궁금해졌다는 얘기는 아니고.

"알고 계시잖아요.

저한테 남은 길은 하나뿐이라는 걸."

"아직도 제국을 멸망시키고 네가 여왕이 될 수 있다고 믿느냐?"

"모든 사람을 노예로 만들어 증명하겠어요. 내가 옳다는걸."

"나는 네가 아파하는 걸 지켜보고 싶지 않아. 리아."

"…."

"그만하자.

이미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많아."

"상관없어. 그런 거!"

아멜리아의 숨이 무척 거칠어졌다.

화를 감당하지 못해서 자기 몸까지 망치고 있는 격이었다.

"골라야 한다면 골라주겠어. 나는 제국이 낳은 가장 끔찍한 죄인이 될 거야.

나를 데려가! 재갈을 물리고, 족쇄를 채우고, 돌을 던져."

"…."

나는 살짝 빡이 쳤다.

"황자님. 외람되오나, 매가 약이 아닐까요?"

"…시현 님!!"

신애가 버럭 소리쳤다.

"신애. 괜찮다."

"예."

그때 근처에서 오크들이 나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시현!"

"흑발 암컷. 어디냐!"

"두메른 님이 찾고 있다."

"못 찾으면, 우리 다 죽여버린다고 했다!"

윽.

도망친 거 아닌데. 참을성 없기는….

"대화를 나눌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신애. 리아를 호송할 준비를 해라."

"명 받들겠습니다."

"가면 죽는 거 아니에요?"

"위험해지겠지. 내 이름으로 어떻게든 막아볼 생각이다."

황자님도 고생 많네.

풀어주면 또 지랄할 테고. 도망치는 건 본인이 안 하겠다고 하니 잡아가는 수밖에.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신애는 아멜리아를 데리고 모습을 감췄다.

"시현. 너는…."

"저는 괜찮아요.

잘 적응했거든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지만, 심신 모두 괴롭겠지."

…아니, 진짜 견딜 만한데요.

사람 편을 들어야 할지, 오크 편을 들어야 할지 머리 부서질 것 같은 나날이었지만….

아멜리아는 가족 품으로 돌아갔다. 임무는 성공이라고 봐도 좋겠지.

비록 임무에 참여한 자들은 오크 좆집이 되거나 죽어버리고 말았지만.

이제 그 정도로 무너지지는 않는다.

강해졌다. 시현이!

"이제 뒤처리만 남았군."

"네?"

"금방 두메른을 죽이고 구해주마."

황자님이 어려운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머릿속이 하얘졌다.

두메른이 죽어?

뻔한 전개잖아. 왜 내 멘탈이 흔들리지?

"적절한 때에 신호를 보내겠다. 그럼…."

나는 돌아서는 황자님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두메른을 죽…."

"음?"

"…일 수 있어요?"

"정면에서는 어렵겠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다.

애초에 그러려고 왔으니 걱정하지 마라. 너희를 버리고 가지는 않는다."

"…."

"오크들이 너를 찾는군.

여기서 함께 도망치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야."

"알고 있어요."

왜 이렇게… 진정되지 않는 거야.

황자님은 포위망이 좁혀오는 급박한 상황에도 내 어깨에 손을 얹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시현. 가족은 있나?"

"…있어요."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야지.

오크들에게 붙잡혀, 새끼를 낳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미래를 원하나?"

그래.

그러려고 여기에 남은 거 아니잖아.

정신 차리자. 시현아.

정들어버린 거야.

지금 같은 상황에는 정이 정신오염보다 무서울 수도 있어.

황자님이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돼.

"진정됐나?"

"네. 신호 주세요.

포로들 데리고 탈출할 기회를 가늠해 볼게요."

"좋다. 나는 너의 그 씩씩함을 좋아한다.

내 사람으로 원할 정도야."

"무슨 그런 과분한 말씀을…."

어색한 웃음을 짓는 나에게, 황자님은 사뭇 진지한 태도로 말했다.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면, 남지도 않았다."

"…."

"더 할 말 있나?"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아멜리아의 반지를 황자님께 보여드렸다.

"아멜리아가 가지고 있던 반지예요."

"가지고 있어라. 위급한 상황에 도움이 될 거다."

"그렇지만, 이거 엄청나게 비싸다고 들었는데…."

사실 마음에 걸리는 건 값어치보다 사연이었다.

…덥썩 받으면 뭐에 씌는 거 아니야?

"임무를 성공한 너에게 상을 내릴 수 없는 상황이니, 이 반지를 잠시나마 너에게 주는 선물로 삼겠다."

말 참 멋있게 하시네.

얼굴까지 잘생긴 사람이 이러면 반칙 아니야?

물론, 얼굴 보고 설레는 일은 없었다.

"또 봅시다. 황자님."

우리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황자님은 뛰어서.

나는 걸어서.

"시현이닷!"

"시현이!"

"흑발 암컷!"

"저 젖탱이와 엉덩이. 틀림없다!"

나는 다가오는 오크의 찌찌를 힘껏 꼬집었다.

"기엑!"

"젖탱이랑 엉덩이로 구분하지 말라고. 얼굴도 있잖아."

"어두워서 그랬다. 그렇게 잡아당기면, 오크 찌찌 찢어져버렷!"

얘들은 고블린만큼 밤눈이 밝지는 않은가 보네.

"돌아가자. 앞장서."

"두메른 님, 화 많이 났다."

그렇겠지.

말도 없이 나왔으니까….

무슨 짓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며 오크 진영에 발을 디뎠는데,

두메른의 반응은 상상 초월이었다.

"시현!"

곧장 다가와 나를 껴안는다.

몸이 자연히 들려서 발이 땅에 닿지 않게 되었다….

이대로 허리가 으스러질 때까지 조일 생각은 아니겠지?

"화났어?"

"어디에 가 있었지?"

바람난 아내를 추궁하듯, 두메른이 눈을 부라린다.

"잠깐…. 화장실…."

"…."

좋은 변명거리가 생각이 안 나.

나는 황자님이 준 윗옷을 꼬옥 잡았다.

어차피 황자님 만나고 있는 거 알잖아. 솔직하게 말할까?

두메른이 눈을 감았다.

"내 배려가 부족했군. 급조한 공용화장실로는, 마음이 불안했겠지."

"아…. 응. 혼잡한 틈을 타… 나를 덮치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잖아?"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흠."

두메른이 내 젖가슴과 엉덩이를 조물조물 만졌다.

그러면서 점점 굳었던 얼굴 근육이 풀어진다.

"후우."

…내 엉덩이랑 젖탱이로 진정하고 있는 거 맞지?

암컷의 오크의 진정제 겸 흥분제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내 이야기가 될 줄은.

"…진정했어?"

"내 곁으로 돌아왔으니 족하다.

연회를 준비해야겠군!"

"그거 하다가 습격당했는데 또 한다고?"

"오늘은 좋은 암컷을 많이 건졌다. 다른 방법은 없지."

지금 보니, 오크들의 흥분은 최고조로….

아니, 다들 이미 시작하고 있었다.

"가자. 시현.

가장 좋은 곳에서 구경하게 해주마."

"…좋아."

나는 두메른과 함께 중심부로 나아간다.

이래도 좋은 걸까?

황자님과의 만남으로 두메른의 품에 녹아드는 나를 다시 의심하곤 하지만….

곧 듬직한 수컷의 체온으로 마음이 차분해진다.

어차피 누가 뭐래도 광란의 섹스 파티는 막을 수 없다.

흥분한 오크들의 불알이 전부 텅텅 빌 때까지.

나는 황자님이 준 웃옷을 벗고, 두메른의 팔에 안겨 구경했다.

눈앞에 추잡한 광경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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