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회
충돌…아마도 성채로 침입하기 위한 루트 중 하나.
나는 부옥이 발견한 은신처를 통해 왔지만, 그 방법은 한 번 들키면 써먹을 수 없다.
그래서 뚫으려면 정공법뿐이었을 텐데.
두메른이 나와 열심히 섹스하는 시간이 제국군에게는 기회가 된 셈이다.
이것도 공이라면 공이지만, 자랑스럽지는 않다.
…오히려 부끄러워.
신애가 본 그대로 보고를 올렸다면, 황자님과 어떤 얼굴로 마주 봐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내 체면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를 고민하는 사이 우리는 오크 성채로 향하는 진입로를 건너,
아멜리아 황녀가 이끄는 오크 워리어 부대의 배후를 포착할 수 있었다.
"난입할까요?"
"멈춰라."
두메른이 한마디 읊조리자 오크들이 발을 멈췄다.
"시현. 뭐가 보이지?"
"아멜리아 황녀. 그리고…."
나는 숨을 삼켰다.
헤나와 클로라가 있는데, 아멜리아가 밀리지 않는다.
아니, 아멜리아의 오크 부대는 오히려 두 사람을 고전하게 만들고 있었다.
"살려주세요!"
"죽기 싫어."
"아악!"
아멜리아는 붙잡힌 여자를 수레바퀴에 매달아 "인간 방패"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이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멜리아가 지휘한 부대가 사람을 방패로 삼아 헤나를 압박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너희는 저런 식으로 싸우기도 해?"
코스카가 대신 답했다.
"더러운 방법이지만, 사용할 때도 있다."
그래. 이건 전쟁이었지.
더한 범죄도 일어날 수 있어.
"두메른. 몰아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
"사로잡는 게 이상적이다.
비축한 식량이 있으니 암컷의 수를 늘리는 게 효과적이지."
"…."
"이대로 간다면 우리 도움은 필요 없다. 대기하라."
"예!"
두메른은 팔로 나를 감쌌다.
헤나, 클로라….
"아, 짜증 나네!
그냥 한꺼번에 같이 죽여주겠어!"
"꺄아. 헤나, 그러면 안 돼!"
"시끄러워. 일일이 희생자 같은 거 생각하며 싸울 수 있겠냐고. 엄호해!"
"보호 마법으로 지원할게!"
두 사람의 목소리다.
열풍이 한차례 지면을 휩쓸고 지나갔다. 헤나를 중심으로 일어난 폭발이 뭉쳐있던 오크들을 모조리 날려버린다.
폭압으로 오크들의 사지가 찢겨 나갈 정도였지만, 수레바퀴에 매달린 여자들은 멀쩡했다.
트리샤를 지킬 때도 선보인 적 있는 클로라의 보호 마법이다.
그렇지!
나도 모르게 손을 꽉 쥐었다.
헤나는 두메른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야.
아멜리아가 이끄는 오크들에게 질 리가 없어.
오히려 헤나가 보여준 퍼포먼스는 오크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저 마법사…."
"대단한 암컷이군."
"지금 마법으로 스물은 죽었다."
두메른의 안색을 살핀다.
당장이라도 두메른이 뛰어들면 두 사람은 제압당해.
하지만,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두메른은 난입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나를 배려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녀들에게 도망칠 기회, 시간을 주고 있다면….
지금이다.
"응?"
헤나와 클로라가 이쪽을 발견했다.
"시현!"
헤나는 당장 뛰어오려는 듯하다가 멈춰서서, 상황 파악을 마친 듯 표정을 찡그렸다.
그래. 너희가 불리해.
지금은 도망쳐!
전장에는 헤나와 클로라를 제외한 수백 명의 제국 병사들이 있었지만, 양측의 균형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아멜리아가 이끄는 오크 워리어들, 그리고 지금 막 진입로에 들어온 나와 두메른, 코스카.
한편으로는 한동안 보지 못했던 "기형 오크"까지.
이 공터에서 눈어림으로 파악할 수 있는 오크의 수는 족히 육백을 넘는다.
심지어 성에는 상비군처럼 남겨둔 오크가 꽤 있었기 때문에, 양동 작전이라 해도
헤나와 클로라를 포함한 제국군이 삽시간에 전멸할 가능성이 훨씬 컸다.
그런 대치 상황에, 아멜리아가 입을 뗐다.
"돌격하라! 상대는 마법사. 쉴 틈을 주지 말고 몰아세워!"
"두메른…!"
"안 된다."
두메른이 날 끌어당겼다.
"내 암컷인 네가 적들을 돕게 둘 수는 없지."
"아멜리아는 두 사람을 죽이고도 남을 거야."
"진정해라. 황녀라면 오히려 사로잡아 모욕을 주려 할 것이다."
…두메른 말이 옳아.
황녀의 뻔한 사고방식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동요하고 있는 건가?
"적지 않은 피해가 발생했다.
귀찮은 암컷 둘을 한 번에 정리할 기회다."
오크 입장에서는 거저먹을 수 있는 상황이다.
두메른과 갈라서면서 초를 칠 명분이 없어.
"잘됐네. 우리도 그냥 갈 생각은 없었거든!"
헤나의 주변은 고열로 인해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중이었다.
열기는 봉황의 깃털처럼 작열하는 붉은 빛으로 피어나, 바람의 흐름에 따라 헤나를 감싼다.
모두 그 광경에 압도된 것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고귀한 불의 여신이여. 내 눈앞의 적을 섬멸할 힘을 내리소서."
헤나의 손끝을 따라 일어난 화염이 오크 무리와 제국군 사이를 갈라놓았다.
"구옥!"
"뜨겁다!"
장벽을 앞에 두고 멈춘 오크들에게, 무수한 불덩어리가 쏟아졌다.
우리는 공격 범위 밖에 있었지만, 대치하고 있던 아멜리아의 부대는 큰 타격을 입는 듯했다.
기형 오크가 팔을 늘려, 날아오는 불덩이를 요격하기 전까지는.
"저게 뭐야…."
"역시 기형 님이다!"
저게 말이 돼?
뜨겁게 타오르던 불의 장벽이 걷히고 오크들이 역공을 준비한 찰나.
"어…?"
제국군은 이미 등을 돌리고 후퇴하는 중이었다.
오크에게 잡혔던 포로들까지 등에 업고!
"쫓아라!"
아멜리아는 서둘러 추격을 지시하지만, 제국군이 지나간 바닥은 늪처럼 질척거려서 뜻대로 되지 않았다.
클로라의 마법이다.
대규모로 지면의 성질을 변화 시켜 추적할 수 없게 만든 거야.
일련의 대응으로 지금까지 헤나와 클로라가 어떻게 아멜리아의 추격을 피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두 사람도 비르와 마찬가지로 성장했다.
오크들이 상대하기에는 버거운 적으로.
"흠."
허망하게 타깃을 놓친 아멜리아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오크들이 두메른을 우러러봤다.
"여기서부터 치고 나간다. 준비하라."
"예!"
두메른의 한마디로 오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아멜리아 황녀의 명을 따르던 오크들까지도!
이것이 코스카가 말한 오크의 충성심이라면, 두메른의 장악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메른이 쓰러지면 어떻게 될까?
오크들은 오합지졸이 되지 않을까?
"시현. 내리자."
"이제 어쩔 거야?"
나는 코스카의 도움을 받아 바닥을 디뎠다.
"진을 치고 적의 움직임을 살핀다. 너도 쉬어둬라."
"알았어."
늠름하네.
전장의 두메른은 한없이 진지하다.
나는 내 서방님을 올려보다가, 다른 곳에 관심을 돌렸다.
아멜리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오크들과 오순도순 사이좋게 지낼 이유도 없으니 혼자 쉬고 있겠지….
"산책 좀 하고 올게."
"코스카를 데려가라. 시현. 혼자서는 위험하다."
"그게 더 위험하지. 붙잡혀서 뒤치기 당할 게 뻔한데."
두메른이 코스카를 쓱 쳐다본다.
코스카는 헛기침을 하며 몹시 당황했다.
"그, 그런 사실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다. 코스카. 시현을 원하면 공을 세워라."
"옛…!"
"너희도 들어라!"
두메른이 갑자기 소리를 크게 높였다.
"누구든 흑발 암컷을 원한다면 공을 세워라.
사소하게는 돌을 들어 옮기는 일부터 크게는 거슬리는 암컷을 사로잡는 일까지.
모두 공정하게 평가하도록 하겠다."
"오오!"
"시현! 시현!"
"흑발 암컷!"
…다들 내 몸을 원하고 있어.
나는 오크들의 열기가 가라앉을 때까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어쨌든. 나는 혼자가 아니니까, 지휘에나 힘써요. 서방님."
"음. 그러도록 하겠다."
진입로 밖은 무성한 수풀로 뒤덮인 숲이었기 때문에 몸을 감추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멜리아는 헤이스트 링의 도움을 받아 곧장 빠져나갔겠지.
하지만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아멜리아를 발견하기 위함이 아니다.
"시현 님."
신애가 나무 위에서 불쑥 나타났다.
속 알맹이가 야하게 비치는 망사 수트를 입은 황자님의 측근.
아무리 봐도 닌자 같다.
'시현 님께 제 흔적을 남겼으니, 위치가 바뀌더라도 추적할 수 있습니다.'
그 말처럼, 신애는 내가 혼자 있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접근했다.
황자님의 말을 전하기 위해서.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우븝!?"
갑자기 신애가 나한테 달라붙어 입맞춤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옷 위로 젖가슴을 사로잡힌다.
"읍? 우? 츕…. 츕…."
영문도 모른 채 키스하다가, 눈이 마주치자 신애는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죄송합니다.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아, 정신 오염?"
여자끼리도 하는구나. 그거….
달리 남자가 없으니 어쩔 수 없었던 거겠지만.
….
둘 사이로 민망한 공기가 흘렀다.
"저, 시현 님의 체질은…"
"…정신 오염에 저항력이 있어요."
그게 신애가 원하는 대답이겠지.
정황상, 내가 오염에 강하다는 건 비밀도 뭣도 아냐.
당장 헤나가 황자님한테 보고하면서 알렸을 가능성이 크니까.
하지만 황자님을 지키는 신애 입장에서는, 돌다리라도 두드려보고 건너야만 했겠지….
"실례했습니다.
최근 침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지켜봤기에…."
"그, 그걸 봤어요?"
"네…."
신애의 볼이 다소 붉게 물들었다.
"직접 확인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아직은 제정신이니까."
내가 두메른한테 황자님 얘기를 꺼냈다는 것도 알고 있을까?
슬슬 이쪽을 의심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그러나 아멜리아 황녀가 수중에 들어오기 전까지, 황자님은 내 협력이 필요하겠지….
"황자님의 말을 전하러 온 거죠."
"예."
나는 속옷 밖으로 빠져나온 젖가슴을 원위치로 돌리면서 말했다.
"뭘 하면 돼요?"
"황자님이 직접 오고 계십니다."
…뭐?
아멜리아를 잡으러 직접 오고 있단 말이야?
"유리검 아스테 님과 함께."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힘의 두메른은 여기서 죽어야 합니다.
전쟁의 종결을 위해서."
"…여기가 두메른을 끌어들이기 위한 함정이라는 거예요?"
"저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황자님은 뭐라고 했는데요?"
"…."
신애는 나를 힐끗 바라봤다.
"'약탈만으로는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는 걸 두메른도 알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에 대비해, 제국군은 총력을 기울일 겁니다."
"…알았어요."
올 게 왔구나. 그런 느낌이었다.
그 녀석은 상황이 이런데 나랑 섹스하는 데 정신 팔렸었단 말이야?
그저 다른 수컷이 손대기 전에 내 안에 싸고 싶다는 이유로?
…오크의 생각은 이해를 못 하겠어.
"곧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시현 님."
신애의 말에 정신을 차렸다.
"…부디, 실수하지 마시길."
"…."
신애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났다.
정 때문에 일을 그르치지 말라는 뜻이겠지.
여기까지 잘 해왔어.
결과적으로 나는 제국군의 미인계가 되어 두메른을 망쳐 놓은 셈이다.
물론, 모든 게 까발려진 후에도 서방님이라면"오크가 제 암컷을 안는 게 무슨 문제인가!"하겠지만.
잘 됐잖아.
서안 황자님은 내 조력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다.
힘의 두메른을 쓰러뜨리는 걸 도운 영웅으로서, 금의환향하면 돼.
그러면 여생 편안하게 살 수 있겠지.
나는 또 다른 중요한 목표에 집중하기로 했다.
아멜리아 생포다.
"비르!"
비르는 무수한 고블린을 이끌고 위풍당당하게 포탈에서 걸어 나왔다.
하나, 둘, 셋… 스물네 마리.
쿠키를 포함한 신관 고블린도 셋이나 있었다.
비르를 위한 고블린 유격대가 탄생한 셈이다.
이놈들은 내 권속의 권속.
정신파 한 번에 머리를 조아릴 정도로, 나한테 구속돼 있다.
"마마!"
비르가 나한테 달라붙었다.
"트리샤와 유피넬은?"
"나 불렀어?"
무장한 트리샤가 산뜻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시현!"
유피는 나를 보자마자 안겼다.
"유피."
"보고 싶었어! 이번에는 뭘 하면 돼?"
권속들이 목을 길게 빼고 내 말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유피를 잠시 떼어 놓고, 입을 열었다.
"우리는 아멜리아 황녀를 잡는다."
[메인 퀘스트 - 마왕]
[【후원자】- 거품에서 태어난 여신]
[권속에게 아멜리아 황녀를 강간하라고 지시한다]
[보상 - 크라켄의 이빨]
…또.
퀘스트가 교묘한 타이밍에 눈앞에 떠오른다.
내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타깃만 트리샤에서 황녀로 옮겨갔을 뿐이다.
"우리한테는 설명이 좀 필요한 것 같은데."
트리샤가 말했다.
"제국군과 오크가 부딪치기 직전이야.
황자님은 여기서 오크도 제압하고, 아멜리아 황녀도 사로잡으려 하고 있어."
"그러니까. 황자님을 도와서 아멜리아 황녀를 생포하자는 얘기지?"
"그래."
황자님의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아멜리아 황녀가 제국군 앞에 얼굴을 드러내는 건 무조건 막고 싶을 거야.
아멜리아는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지만, 점점 아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황족에게는 좋은 흐름이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다 끝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