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334화 (1,205/1,205)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334화

미리엘의 마음을 알면서도 거부하고 있는 내가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자격은 없다.

그래서 말할까 말까 잠깐 고민했지만, 결국 나는 말해 보기로 했다.

"전부터 느낀 건데 말이야."

"응?"

"날 이용하는 것 같아서."

저 아저씨 내쫓는 용도로.

내 핑계 대면서 저 아저씨한테 모질게 구는 거 보는 게 벌써 몇 번째야?

게다가 만날 때마다 날 향한 저 아저씨의 시선이 험해지는 걸 보면, 내가 없을 때도 날 들먹이며 모질게 굴었을 가능성이 농후했다.

"아아. 역시 성자님은 날카롭군."

"아니. 딱히 날카롭지 않아도 그런 모습 보면 보통은 알잖아. 무슨 생각이야?"

아무리 맘에 없는 남자가 열렬히 들이대는 상황이라고는 해도, 얘가 그렇게 부하를 모질게 구는 성격은 아닐 텐데 말이야. 그랬다면 아라크네라는 거대 클랜의 클랜장이 될 수도 없었을 거다.

"실은 저 발가스 장군 때문에 조금 곤란한 일이 많아."

저 아저씨 때문에? 아니. 확실히 나한테 적개심을 불태우는 모습은 짜증 나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날 연적으로 생각해서 그러는 거고. 냉정하게 보면 상당히 이상적인 현지 협력자라고 생각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들이대서?"

"하핫. 아니. 장군은 그런 사람이 아니야. 공과 사는 철저한 사람이니까. 거기에 신상필벌이 확실하고 부하를 아끼며 능력도 실적도 있어. 그야말로 이상적인 장군이지."

"그런 사람이 밑에 있으면 든든한 거 아니야? 뭐가 문제라는 건데?"

"너무 이상적이라는 게 문제야. 처음에는 장군 덕분에 어려움 없이 플리투스의 왕좌를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장군의 영향력이 너무 컸어. 아직도 ‘리리안 플리투스의 손녀인 용사 미리엘’이 아니라, ‘발가스 장군이 지지하는 미리엘’을 따르는 사람이 있을 정도라고 하면 알겠어?"

그렇군. 그런 건가. 대충 어떤 느낌인지 이해는 했다.

확실히 그래서는 우리 계획에 차질이 생기겠군. 저 아저씨가 우리 정체를 알고도 협력해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천생 장군인 사람이 그럴 것 같지도 않고.

"거기에 더해 최근에는 그도 내게 적극적으로 호의를 드러내다 보니, 사람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도 오가기 시작했어."

"그런 얘기? 아. 응."

결혼 말이군.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는 장군과 전설의 용사의 후손. 둘이 결혼하고 그 자식이 대를 이으면, 플리투스로서는 그보다 더 완벽한 그림도 없겠지.

그렇군.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미리엘이 나한테 대놓고 들이대기 시작했는데, 혹시 그것 때문에 조바심이 나서 그랬던 건가?

"으음."

생각보다 일이 복잡하게 흘러가는군. 미리엘을 받아주지 않고 있는 나로서는 함부로 뭔가 말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성자님께 폐는 끼치지 않겠어. 그러니 조금만 더 성자님의 이름을 빌려줘."

아니. 뭐, 그야 난 여기에 가끔씩 얼굴만 비추러 오는 것뿐이니, 저 아저씨가 날 얼마나 적대하든 나한테 폐가 될 일은 없겠지만 말이야.

"어쩔 생각이야?"

대놓고 말은 안 하고 있지만, 아마 미리엘은 나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고 그 아저씨한테 말해 버린 거겠지. ‘나한테는 이미 임자가 있어.’ 라고.

아니.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그 아저씨도 아직 미리엘을 포기하지 않았단 말이지. 아무리 좋아해도, 성격상 이미 결혼한 사람한테까지 들이댈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는 건……이 녀석 혹시 여지를 줘 버린 거 아니야? 나와 그런 관계라고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난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 같은 식으로 말해 버린 거다.

가능성이 있어. 이 녀석도 자기 언니랑 마찬가지로 묘하게 고지식한 면이 있으니까.

"야. 차라리 그냥 나랑 결……."

"……."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실제로 그런 사이도 아니면서 결혼했다고 거짓말하는 건 비참하다 이거지?

하아…….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끝이 없을 것 같은데. 계속 이런 식으로 내 이름을 팔아봤자, 저 아저씨 성격상 의욕만 더 커질 것 같지 않아?

"그게 목적이야."

"뭐?"

"발가스 장군은 본인에게 자신감이 있는 남자야. 스스로가 남자로서 성자님한테 절대 지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고 있겠지."

아니. 야. 착각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말투가 좀……너 아까는 이상적인 장군이니 뭐니 하면서 칭찬하더니, 실은 진짜 싫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이렇게 계속 여지를 주면서 부추기면, 결국 참지 못하고 뭔가 일을 일으킬 거야."

"……그러면 넌 그걸 핑계로 저 아저씨를 처리하고?"

"그래. 목숨까지 빼앗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플리투스에서 미리엘의 기반을 마련해 준 장군을 처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는 한지, 미리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솔직히 말해서 나한테도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하겠어?

미리엘을 거부하고 있는……에잇! 젠장! 맨날 얘만 만나면 우물우물 이게 뭐 하는 거야!?

"그럼 실제로 너랑 내가 그런 관계가 되면?"

말해 버렸다. 사라의 동생인데. 심지어 마법으로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바로 옆에서 사라도 디아나도 레이아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인데. 말해 버렸어.

질러 버렸다는 시원함과 나중 일에 대한 두려움이 공존하는 묘한 기분을 맛보면서, 나는 미리엘을 똑바로 바라봤다.

"응?"

설마 그렇게 철저하게 철벽 치던 내가 갑자기 이렇게 나올 거라고는 예상 못 했겠지.

미리엘은 눈동자를 크게 진동시키며 무슨 말인지 머리가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네가 진짜 내 여자가 되면, 전부 다 깔끔하게 해결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발가스 장군과의 문제뿐만이 아니다. 그냥 얘랑 관련된 모든 일이 전부 깔끔하게 해결된다. 진짜 좋은 일밖에 없잖아?

그렇게 생각했는데…….

"……하핫. 거절할게."

……어? 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거절? 뭐야? 나 지금 차인 거야?

"야. 나 하나 물어봐도 되냐?"

"얼마든지."

"너 나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설마 이게 착각이었던 건 아니겠지?

얜 그냥 장난으로 나한테 들이대고 있었던 거고, 실은 그냥 섹스 잘하는 섹스 프렌드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 혼자 착각해서 철벽치고 고민하고 그랬던 거라고?

아니지? 만약 진짜로 그런 거면 난…….

"좋아해."

"그렇지!? 와씨. 진짜 깜짝 놀랐잖아."

후우. 놀라라. 역대급 흑역사가 하나 탄생할 뻔했어.

만약 지금까지 전부 착각이었다고 했으면 농담 안 하고 진짜 접싯물에 코 박고 죽었을 거야.

"하핫.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놀라게 했다면 미안해."

"그러게 넌 왜……응? 잠깐만. 너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두 번이나 말하게 하다니. 성자님도 사람이 나쁘군. 아무리 나라도 부끄러워."

"……그런데 내 여자가 안 되겠다고?"

"그래."

"좋아하는데?"

"응."

아니. 저기 미안한데. 지금 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만 이해 안 되는 걸까?

좋아하는데 내 여자가 되는 건 거절하겠다니. 이건 또 무슨…….

"그 남자. 드디어 갔네."

"으악! 깜짝이야!"

고민하던 와중에 갑자기 허공에서 사라가 나타나는 걸 보고, 나는 화들짝 놀라서 공중으로 펄쩍 뛰었다.

"어머. 왜 그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어? 응? 아, 아니.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면 빨리 할 일이나 하는 게 어때?"

"할 일?"

"마법진.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얘기 안 해?"

"아아! 응! 해야지! 마법진 말이지! 응!"

그러고 보니 우리 그거 때문에 여기 온 거였지.

대머리 아저씨의 임팩트 있는 등장에 미리엘의 충격 발언까지 더해져서 완전히 까먹고 있었어.

"자, 다들 일단 어떻게 할지 얘기부터 해보자!"

"그래. 아, 그리고 구원."

"응?"

"얘기 다 끝나고 우리끼리 잠깐 얘기 좀 해."

"……네."

역시 다 보고 있었구나. 아니. 물론 못 보는 게 이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얘기 다 끝날 때까지 모습 감추고 기다려 주길래 혹시나 했지.

아무튼 우선 시작된 마법진 얘기는, 오면서 대충 얘기한 대로 결정이 됐다.

디아나가 여기에 남아서 쌍둥이 마법사 콤비와 같이 마법진을 보수하고, 우리는 각자의 진영에서 기다렸다가 마법진의 완성과 맞춰 계획을 실행한다.

그렇게 계획 얘기는 깔끔하게 정리가 됐지만.

"유언은?"

얘기가 다 끝나고 나서, 사라는 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끌고 오더니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위협했다.

그 뒤에 따라온 디아나도 레이아도 딱히 말릴 생각은 없어 보이고.

"나, 죽는 거야?"

"대답에 따라서는. 대답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내 동생한테 그런 말을 한 거야?"

"아니. 사라야. 너 전에는 동생으로 생각 안 한다고……."

"변명하지 마!"

사, 사라야? 오빠 슬슬 진짜 무서운데……거기 잡으면서 협박하지 말아 줄래? 나한테 아무리 아이언 페니스가 있어도, 용사가 있는 힘껏 쥐면 진짜로 터져요.

"너 말했지? 내 동생 상대로 그런 생각 절대 안 든다고. 그런데 뭐? 내 여자가 되라고?"

"아니. 하지만 사라야."

"하지만 뭐!?"

"……불쌍하잖아."

"……."

"너도 솔직히 말해서, 동생이 그렇게 불쌍하게 고민하며 사는 것보다는 그냥 내 여자가 되어서 행복하게 사는 게 마음 편하고 좋지 않아? 설령 동생이랑 같은 남자를 공유하게 되더라도 말이야. 난 네가 그런 여자라고 생각해. 어때? 내 생각이 틀렸어?"

미리엘한테 내 여자가 되라고 한 건 확실히 즉흥적인, 감정에 몸을 맡긴 행동이었지만, 머리 한구석에서 그런 계산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단언할 수 있는데, 만약 미리엘이 내 여자가 되어서 사라가 진심으로 슬퍼했다면 난 절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다.

뭐, 지금까지 여자를 엄청 만들어댄 놈이 이렇게 말해 봤자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겠지만 말이야.

"구원 너. 자기가 왜 차였는지 모르지?"

"응? 사라 넌 알아?"

"반성해."

"……응?"

"무릎 꿇고 반성해."

"여, 여기에서? 진심이야?"

일단 되물어봤지만, 사라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냐. 아니. 우리 말고는 사람 눈이 없기는 하지만……진짜 여기에서 무릎 꿇고 있으라고? 무슨 애도 아니고.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죄인인 내게 거부권은 없었다.

순순히 바닥에 무릎을 꿇자, 사라는 "흥." 하고 가볍게 콧소리를 내며 발끝을 뒤로 돌렸다.

"어? 사라야? 어디 가게?"

"그러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반성하고 있어."

그 말만을 남기고, 사라는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구원 씨. 구원 씨가 이해해주세요. 사라 씨는 지금 마음이 많이 복잡할 거예요."

사라는 사라졌지만 아직 디아나와 레이아는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사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는 걸 지켜본 다음에, 레이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와서 내게 그렇게 말해 줬다.

"물론이지. 다 내 잘못인데. 하지만 레이아는? 레이아는 괜찮아?"

"으응…….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찬성이에요."

"응? 그래?"

"네. 저한테는 다른 무엇보다……."

"자네의 안전이 가장 중요하네. 그리고 미리엘 양을 받아들이는 건 계획의 성공 여부를 크게 좌우하는 요소가 될 걸세. 자네는 미리엘 양을 철저하게 믿는 모양이지만……."

그런가. 미리엘이 조교된 모습을 본 건 나밖에 없다.

얘들이 본 거라고는, 나랑 미리엘이 같은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니 갑자기 미리엘이 나한테 살갑게 굴게 됐다는 것뿐.

내가 믿고 있으니 믿어주고 있을 뿐, 미리엘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라는 건가.

"그럼 디아나도 역시……?"

"음."

역시 그런가. 아니. 디아나나 레이아뿐만이 아니다. 얘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이미 얘기가 끝난 모양이었다.

만약 내가 미리엘을 내 여자로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그냥 인정해주자고 말이다.

아마 사라도 포함해서 모두가 모여 그렇게 합의를 마친 거겠지.

뭐, 그렇게 자기들끼리 얘기 다 끝내놓고도 아까 같은 반응을 보일 정도로, 사라는 머릿속이 복잡한 모양이었지만.

"어때? 조금은 반성했어?"

디아나와 레이아와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자니, 조금 전에 훌쩍 사라졌던 사라가 아까보다는 그나마 조금 속 시원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아마 미리엘이랑 얘기를 나누고 온 거겠지만, 생각보다 엄청 빨리 돌아왔네? 자기 할 말만 막 쏘아붙이고 온 건가?

"그야 무……으읍!?"

내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사라는 내 멱살을 틀어쥐고 그대로 거칠게 입술을 밀어붙여 왔다.

"사, 사라야?"

"디아나. 레이아. 미안한데 잠시만 자리 좀 비켜주면 안 될까요?"

당황하는 내게 아랑곳하지도 않고, 사라는 뒤에 있는 두 사람을 향해 말을 걸었다.

"네. 두 분 다 제대로 마음 푸셔야 해요?"

"빚 하나 진 걸세."

레이아는 물론 평소에 사라랑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디아나까지도 깔끔하게 자리를 물러나 줬고, 두 사람이 사라지자마자 사라는 곧장 옷을 벗어 던졌다.

"사라야?"

"뭐해? 구원도 벗어."

"뭘 하려고?"

"몰라서 물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