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333화
일단 디아나가 틀어막은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디아나가 아무리 대마법사고 아무리 자연을 거스를 수 있어도, 마나에는 결국 한계가 있으니까.
"오늘은 일단 이쯤하고 물러나자. 이대로 화산이 폭발하면 위험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라크네 클랜원들까지 위험해질 거야."
나는 간만에 파티 리더다운 냉철한 판단력을 발휘했지만, 디아나의 그 자리에서 조금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흐음."
"디아나? 왜 그래?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이상하구먼."
"뭐가?"
"이 몸도 마그마를 막아보는 것은 처음이니 확실하지는 않네만, 마그마치고는 너무 약하구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닐세. 확실히 이반은 뛰어난 마법사였네만, 어디까지나 전공은 바람 마법이었다네. 정말로 이반이 이 정도 규모의 마그마를 뜻대로 조종하여 마법진의 매개로 삼았다는 것인가? 무언가 이 몸이 놓치고 있는 것이……으음. 으으으으음."
그렇게 잠시 끙끙거리며 생각에 잠긴 다음, 디아나는 뭔가 결심했다는 듯 날 바라보며 말했다.
"낭군님. 하나 허락받고 싶은 것이 있네."
"뭔데?"
"이 마법진. 어쩌면 못 쓰게 만들어도 괜찮겠는가?"
"으, 응?"
"이 몸들의 계획에는 애초에 이런 마법진의 존재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잖은가. 그러니 마법진을 못쓰게 하여도 괜찮은지 묻는 걸세."
아니. 확실히 그렇기는 하지만, 마법진의 존재를 깨닫고 제일 신나서 조사해 보자, 이걸 활용하면 우리 계획의 완성도가 훨씬 높아질 거다. 라며 떠들었던 건 디아나 아니었어?
"뭘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할 걸세."
디아나는 한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는, 손바닥 위에 하얀 마법 구체를 만들어냈다.
나도 언젠가 디아나의 힘을 빌려서 쓴 적 있는, 닿는 것 전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소멸 마법이었다.
다만 그 마법의 크기는 내가 사용했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커서, 마치 지구인들이 모두 힘을 조금씩 빌려줘서 완성된 것 같은 엄청난 크기였다.
그 엄청난 크기의 소멸 마법을, 디아나는 마그마를 막고 있던 보호막을 푸는 것과 동시에 던져 버렸다.
"그냥 마신 부활시키면 너 혼자 없애 버릴 수 있지 않을까?"
다시 위로 솟구치기도 전에, 폭발음도 아무것도 없이 고요하게 사라져 버린 마그마를 바라보며,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애초에 저건 진짜 마그마도 아닐세."
"무슨 말이야?"
"저길 보게."
디아나의 턱이 가리키는 곳을 눈으로 좇아보니, 거기에는 커다란 마법진이 그려진 바닥이 있었다.
응? 바닥? 마그마라는 게, 원래 밑에 바닥이 있는 거였어?
"이것이 문제였구먼."
"디아나. 알기 쉽게 설명 좀 해줄래?"
"말했다시피 이반은 바람을 전문으로 다루는 마법사일세. 이곳의 매개체 역시 마그마가 아닌 바람이었다는 것일세."
"그럼 그 마그마는?"
"전쟁통에 떠나면서 이 장소가 들키지 않도록 손을 써둔 것이겠지. 이 마법진은 주변의 마나를 불 속성 마나로 변환하는 마법진일세. 본래는 여신님의 마나로 변환하기 위한 마법진을 급하게 손 본 것이겠지. 머리를 잘 썼구먼."
"그럼 그 마그마도?"
"음. 불의 슬라임이 남긴 잔해일세. 아마 이반이 이 마법진과 함께 슬라임을 대량으로 풀어뒀던 것일 걸세. 그리고 그 슬라임 무리가……."
"불의 마나에 영향받은 채로 10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이렇게 변한 거라고."
"이해가 빠르구먼."
잘했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디아나였지만, 별로 기쁘지 않았다.
아니. 그럼 뭐야? 나 혼자 괜히 슬라임 잔해 상대로 벌벌 떨고 있었던 거였어?
"너희 설마 알고 있었냐?"
"설마. 그런데 마나가 약했잖아? 그러니까 왠지 질 것 같은 느낌이 안 들어서."
아니. 사라야. 마그마한테 지고 안 지고가 어디 있어?
하지만 그렇군. 마나인가. 처음부터 나도 마나의 크기를 느꼈으면 그렇게 당황하지는 않았을 텐데.
"애초에 왜 그렇게 당황한 거야? 구원도 마나 정도는 느낄 수 있잖아?"
"아니. 뭐……."
나 혼자만 있었으면 냉철하게 분석하고 행동했겠지만, 너희까지 마그마에 휩쓸려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래?
"바보. 당황해서 판단력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어쩌면 조금 해이해진 건지도 모른다. 진짜 목숨이 위험한 위기가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됐으니까.
내 위기조차도 그런데, 오랜만 같이 다니게 된 우리 애들의 위기는 오죽하겠어? 해이해진 정신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 하게 한 거겠지.
"그러게. 미안해."
그나마 다행인 건, 이렇게 별일 아닌 사건을 계기로 경각심을 가지고 됐다는 점이었다.
또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말이야. 만약 이번 같은 경우가 아니라, 진짜 위기의 상황에서 당황해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면 그것보다 최악은 없을 테니까.
마지막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마음을 다잡은 좋은 기회가 됐다고 생각하자.
"언니. 그 정도로 봐주는 게 어때? 성자님이 저렇게까지 당황해주시다니,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잖아?"
마치 ‘나로서는 부러울 정도야.’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미리엘이 끼어들자, 사라는 고개를 홱 돌리면서 귀여운 목소리로 투정 부렸다.
"봐주고 자시고……애초에 질책하는 것도 아니거든?"
"그래.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이건 사라 나름의 애정 표현……아야!"
"그게 애정 표현……성자님과 언니는 과격한 사이로군."
옆구리 꼬집는 거 말고 이것아!
뭐, 따지고 보면 이것도 사라 나름의 애정 표현이라는 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하지만 과격함이라면 나도 지지 않아. 성자님. 때려주겠어?"
"무, 때리긴 뭘 때려!?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네!"
아니야! 정말 아니야 얘들아! 난 절대 그런 짓……아니. 한 적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 녀석이 더는 전투를 못 하게 하려고 조교를……그야 물론 얘는 아직도 멀쩡하게 전투하면서 다니기는 하는데, 아아아! 진짜! 하여튼 이 녀석과 관련되면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어!
"하핫. 한 대 때려주고 싶어졌어?"
아오! 진짜! 저걸 콱 그냥!
그렇다고 진짜 때리면 저 변태는 또 신음 흘리면서 좋아할 테고.
"앗,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네요."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주먹만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레이아가 어색한 미소와 함께 내 주먹을 가볍게 끌어안으며 말해 줬다.
"응? 아……디아나. 뭐 좀 알아냈어?"
팔에 닿은 가슴의 감촉은 사람을 순식간에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어서, 나는 미리엘에게서 눈을 떼고 마법진 근처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디아나 쪽에 시선을 돌렸다.
"음. 아까 설명한 그대로일세. 이 마법진이 주변 마나를 불 속성으로 변환하고 있었던 것이 문제이니, 이렇게 조금만 만져주면 기온도 곧 원래대로 회복될 걸세."
"하지만 유사 마그마라고는 해도 그 속에서 잘도 녹지 않고 남아 있네."
"특수한 금속을 썼구먼. 전에 이 몸이 했던 말 기억하는가? 마법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 들어간다는 얘기? 이 금속이 그 원인이라는 거야?"
"음. 아무래도 이반은 세 마법진 중 이 장소를 중추로 삼았던 모양일세."
하긴.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는 플리투스의 수도가 통일 왕국의 수도였으니, 당연히 여길 중추로 삼고 계획을 진행하려고 했겠지.
"그래서, 어때? 본래 목적대로 기능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 마법진을 손보는 것 자체는 간단하네. 문제는 몬스터들이 난잡하게 뚫어놓은 터널일세. 자네. 지도는 다 완성되었는가?"
"응. 구석구석 돌아다녔으니까."
터널은 미로처럼 복잡했을 뿐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길이 뻗어 있는 입체적인 구조였다. 당장 여기만 하더라도 우리가 들어온 입구에서 상당히 밑으로 들어온 곳이니까 말이야.
그래서 이 입체적인 구조를 디아나에게 전해주는 건 무척이나 힘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철사로 모형까지 만들며 노력했다.
"흐음. 확실히 전체적인 구조는 마법진 모양이네만, 제대로 모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시간이 걸리겠구먼."
"다이애나 님. 원하신다면 제가 사람을……."
"아니. 자네도 알겠지만 마법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네."
"마법진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마법사가 아니면 안 된다는 뜻이군요. 그렇다면 리아와 레아는 어떻겠습니까?"
"그 쌍둥이 처자들 말인가? 음. 그렇구먼. 그 처자들이라면 도움이 되겠구먼. 낭군님."
미리엘과 머리를 맞대고 몇 가지 상의한 다음, 디아나는 고개를 들고 내게 말을 건넸다.
"응?"
"이 마법진이 완성되려면 아마 적어도 한 달은 걸릴 걸세. 그때까지 이 몸은 이곳에 머물러야 할 것 같네만."
"완성시키려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게 그렇게까지 필요한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냥 셋 다 완성된 상태라면 있는 김에 써준다는 느낌으로 이용하겠지만, 굳이 디아나를 한 달씩이나 여기에 붙잡아두면서까지 할 가치가 있는 걸까?
"마법진의 위치를 보면 알겠지만, 이 마법진이 완성되면 삼국의 수도에 강력한 영향을 행사할 걸세.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삼국이 맞닿아 있는 국경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점일세."
"우리 계획이 마무리되는 장소에……."
"음.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면 7계층의 혈기 넘치는 인간들 모두가 그 자리에 모이지 않겠는가? 그곳의 대기가 여신님의 마나로 변환된다고 생각해 보게. 이 마법진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걸세."
"하지만 그렇다는 건, 최종 계획의 실행도 한 달 이후에나 가능하다는 거잖아?"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할 수도 있겠네만, 그동안 각자 정비도 하고 기분도 다잡다 보면 금방 지나갈 걸세."
뭐, 확실히 대규모 군사를 일으키기 위한 준비만 하더라도 족히 한 달은 걸릴 테니, 굳이 이 마법진 때문이 아니더라도 계획의 실행은 한 달 넘게 걸릴 것 같기는 하지만.
"……알았어. 그러면 텔레포트 마법진도 여기에 놔두는 게 좋을까?"
"음. 그렇구먼. 하지만 그전에 우선은 다 같이 나가세. 자네들은 계속 여기에 있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지 않은가?"
마법으로 땅을 움직여서 마법진이 보이지 않게 위를 덮어둔 다음, 우리는 서로 계획의 시기 조정이나 마법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을 나누며 터널 밖으로 빠져나갔다.
"놔라! 진정한 충신이란 들어야 할 명령과 들으면 안 되는 명령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명령받았다고 해서 이런 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니! 너희가 그러고도 미리엘 님을 따르는 용사단이란 말이냐! 막지 마라! 나는 가겠다! 기다려주십시오! 미리엘 님! 이 발가스가 기필코 무사히 구출해내겠습니다! 에에잇! 놓지 못할까! 미리엘님! 미리엘니이이이임!"
들어올 때는 맵을 완성해서 전체적인 구조를 살핀다고 구석구석 들쑤시면서 들어왔지만, 나갈 때는 그냥 이미 알고 있는 최단 루트를 통해 쭉 나가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래서 들어올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속도로 탈출해 보니, 거기에는 땀내 나는 아저씨가 우리를 기다리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가 아니라 미리엘을 기다린 거겠지만.
"발가스 장군?"
"미, 미리엘 님! 무사하십니까!? 아무리 미리엘 님이라고 해도 홀로 화산 안에 들어가시다니, 무모한 것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아니. 홀로라니. 사라나 디아나, 레이아는 재빨리 투명 마법으로 모습을 감춰서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바로 옆에 내가 있잖아?
"걱정 안 해도 돼."
"……으드득."
미리엘 대신 내가 말해주자, 대머리는 ‘누가 네놈의 걱정 따위를 했다는 거냐!?’ 라고 말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날 노려봤다.
"발가스 장군. 여기에 어떻게 들어왔지? 난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했을 텐데? 입구를 막고 있는 용사단원에게 못 들었어?"
"네! 미리엘 님의 용사단에는 잘못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이 발가스가 무단으로 벌인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전부 미리엘 님을 걱정하는 마음이 앞서 벌어진 일!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아랫사람에게 잘못을 전가하지 않고 자기가 전부 자기가 떠안으면서 용서를 구하는 걸 보면, 그렇게까지 나쁜 아저씨는 아는 것 같은데 말이야.
물론 실제로 전부 이 아저씨 잘못이 맞기는 하지만.
"그런가. 장군이 독단으로 내 명령을 무시했다는 건가."
"네? 미, 미리엘 님. 하지만……."
"하아……장군은 가면 갈수록 날 실망하게 하는군."
우와. 저 아저씨, 세상 무너진 것 같은 표정 짓고 있어.
미리엘도 엄청 냉정하네. 나 같으면 저런 표정 앞에서는 미안해서라도 저렇게 말 못 할 것 같은데.
"장군."
"네, 넷!"
"난 여기 성자님과 더 할 말이 있어. 성으로 돌아가 주겠어?"
"하, 하지만."
"명령뿐만 아니라 부탁조차 들어줄 수 없다는 건가."
"그, 그런 것이…… 끄으으윽……!"
아니. 아저씨. 그러니까 날 노려보지 말래도.
아까부터 댁한테 모질게 구는 건 전부 미리엘인데 왜 계속 날 원망하는 거야?
"알겠……습니다……."
거의 입에서 피를 토하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입가에 살짝 피가 흐르고 있잖아?
아무튼 무겁게 고개를 숙인 다음, 아저씨는 마지막으로 날 한 번 더 노려본 다음 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