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332화 (1,203/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332화

    그렇게 해서 나는 우리 파티의 초창기 멤버와 미리엘이라는 이색적인 조합을 이끌고 유사 던전에 들어가게 됐다.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새삼 보면 참 조합 좋단 말이야. 정확히 우리가 2, 3계층을 탐험할 때의 파티에서 실비아 대신 미리엘이 들어온 격이잖아?

    전위는 나와 미리엘이 굳히고, 뒤에는 원거리 딜러 사라와 다재다능한 디아나, 그리고 힐러인 레이아까지. 그야말로 5인 파티의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뭐, 애초에 조합 생각하고 다녀야 할 수준은 한참 전에 뛰어넘었지만.

    "언니."

    "왜."

    "형부 팔은 그만 놔주고 진형을 갖춰야 하지 않을까?"

    그래. 사라가 아직도 이렇게 내 팔짱을 끼고 안 놓아줄 정도로, 우리는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여유가 있어도 방심은 금물. 쓴웃음을 지으며 당연한 말을 하는 미리엘이었지만.

    "하?"

    키야아아악!

    사라는 이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지 보자는 표정으로 가볍게 팔을 한 번 휘둘렀다.

    그 한 번의 손짓이 불러온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갑자기 사방팔방에 구멍이 뻥뻥 뚫리며 듣기 싫은 단말마가 다방면에서 들려왔으니까 말이야.

    사, 사라야? 지금 뭐한 거니?

    "걱정 안 해도 적은 전부……."

    트레이드 마크인 쿨한 표정으로 미리엘을 바라보며 자칫 중2병처럼 들릴 수도 있는 멋진 말을 내뱉으려던 사라였지만.

    "떼끼!"

    "디, 디아나!? 뭐 하는 거예요!?"

    그 말은 디아나의 딱밤에 의해서 저지되었다.

    여전히 물리 데미지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이는 딱밤이었지만, 그래도 자기와 미리엘 사이에 디아나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에 놀란 거겠지.

    깜짝 놀라 외치는 사라에게, 디아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분을 토해냈다.

    "그건 이 몸이 할 말일세! 무슨 짓을 하는 겐가! 이 몸들이 왜 여기에 왔는지 잊은 겐가! 구조를 조사하러 왔는데 이렇게 구멍을 숭숭 내버리면 어쩌자는 겐가!"

    역시 디아나야. 마법에 관련된 일이라면 설령 용사 자매 둘이 벌이는 수라장에도 주저 없이 발을 내딛는군.

    "으읏……."

    그리고 디아나의 그 말에, 사라도 드디어 자기가 미리엘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막 나가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뭐, 여기에 오기 전까지는 존재조차 몰랐던 이복동생이 갑자기 나타나서는 자기 남자까지 노리고 있는 상황. 아무리 얼음공주로 유명한 사라라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

    "구원……."

    "그래."

    부끄러움과 미안함. 그 밖에 여러 감정이 섞인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는 사라.

    그 얼굴을 마주 보고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사라는 스르르 팔을 풀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미안해. 네 말이 맞아."

    미리엘에게 사과도 잊지 않고 해주면서 말이다.

    역시 사라야. 아까는 잠깐 이성적인 판단이 안 돼서 그랬을 뿐, 진짜 멋진 여자라니까.

    "……그래."

    미리엘도 나와 비슷한 감상을 품었는지, 못 이기겠다는 미소와 함께 순순히 사과를 받아줬다.

    "그러면 성자님. 우리가 앞을 맡지."

    아니. 근데 미리엘아? 넌 또 왜 내 팔에 팔을 감는 걸까? 지금 엄청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분위기 아니었어?

    "하핫. 어른스러운 언니와 달리, 난 아직 어려서 감정에 거스르기 힘들어. 이렇게 마음이 가는 대로 몸을 움직여야 직성이……."

    "너 진짜 계속 그래 봐!"

    내 팔에 가슴을 밀어붙이며 말하는 미리엘의 모습에, 모처럼 멋지게 인정하고 물러났던 사라가 다시 흥분한 표정으로 달려들려고 했다.

    "하핫. 언니란 무서운 존재군."

    "흥!"

    그나마 다행인 점은, 둘 다 이번에는 끝까지 싸우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끝냈다는 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미리엘은 처음부터 도발할 생각이 아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냥 사라 혼자 나한테 매달리다가 끝나면 그림이 안 좋으니, 자기도 한번 매달려준 걸지도. 사라도 그걸 알고 적당히 화내는 척만 하고 끝낸 거고 말이다.

    만약 그렇다면……진짜 자매가 둘 다 이렇게 멋져도 되는 거야?

    "응? 왜 그래? 성자님."

    "아니. 전위는 미리엘 너 혼자 맡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난 그보다 한 발 더 앞서가면서 정찰하는 게 효율적일 것 같아."

    아무튼 드디어 제대로 정신 다잡고 탐험을 할 수 있을 것 같으니, 나도 마음을 다잡고 제대로 탐험하기 위한 판단을 내렸다.

    생각해 보니 여기는 유사 던전답게 벽이 자체 발광한다든가 하는 기능은 없잖아? 빛이라고는 벽에 가끔 걸려 있는 램프의 불이나, 디아나가 만들어낸 빛의 구체뿐.

    즉, 월영무사의 스킬을 쓰기에 최적화된 장소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걸 살리지 않을 수 없지.

    "안 돼."

    그렇게 생각했지만, 어째선지 사라가 곧바로 고개를 저으며 반대했다.

    왜지? 사라로서는 미리엘이 나한테 언제 치근댈지 경계할 필요도 없어지고 좋지 않아?

    "하지만 사라야……."

    게다가 그냥 구조만 확인할 거라면, 이렇게 다 같이 다니는 것보다 그냥 나 혼자 그림자 이동으로 돌아다니면서 맵을 완성시키고 오는 게 빠를 거다.

    뭐, 그래도 결국 마법진을 기동하려면 여기에 있는 몬스터들을 다 정리해야 할 테니, 얘들의 도움도 필요는 하겠지만.

    "이제 집중해서 제대로 할 테니까, 혼자 갈 생각 하지 마."

    하지만 아무래도 사라는 효율 따위는 별로 관심 없는 모양이었다.

    그런가. 그냥 내가 혼자 다니는 게 싫다는 거였구나. 이제는 서로 웃으며 얘기할 수 있는 추억이 되기는 했지만, 4계층에서 그런 일도 있었으니까.

    "알았어. 그냥 같이 다니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괜한 걱정 끼치기도 싫고.

    아무튼 그런 소란 끝에 겨우 제대로 탐험을 시작한 우리의 진행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뭐, 용사 둘에 대마법사, 거기에 성자와 성녀가 있는 파티니까 말이야. 화력으로만 놓고 보면 아마 모험가라는 직업이 생긴 이래로 최강의 파티가 아닐까?

    게다가 미리엘은 단순히 강하기만 한 게 아니라 베테랑 모험가로서의 관찰력도 있었다.

    "성자님. 거긴 함정이야."

    "응? 아, 그러네."

    뭐, 우린 알고도 일부러 함정을 밟아서 부숴 버릴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저 베테랑 모험가로서의 관찰력이나 판단력은 지금까지 우리 파티에 없었던 것인 만큼 상당히 신선했다.

    우리도 일단 7계층까지 온 모험가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그냥 전부 힘으로 뚫고 온 거니까 말이야.

    "이렇게 새삼 같이 다녀 보니 너 진짜……."

    "하핫. 반했어?"

    "아니. 진짜로 전에는 엄청 대충한 거였구나."

    5계층에서 와이번한테 고전한 것도 그렇고, 거북이굴에서 거대 거북이의 존재를 눈치 못 챈척한 것도 그렇고.

    "……미안."

    "응? 아, 아니. 딱히 핀잔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때는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어. 성자님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속이려고 하다니. 다시 생각해도 정말……성자님이 괜찮아도 내가 괜찮지 않아. 이 사죄는 반드시 몸으로……."

    "미리엘. 다 들리거든? 집중해."

    "언니는 귀도 밝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언니한테 혼난다는 사실이 마냥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미리엘은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내게서 살짝 떨어졌다.

    저 녀석……사라 앞에서 유난히 나한테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이유가 혹시…….

    "하지만 구조가 정말로 복잡하네요."

    "음. 게다가 비슷한 통로만 쭉 이어지니 어디가 어딘지 구분이 안 되는구먼."

    "응? 디아나도?"

    "뭔가? 또 이 몸을 길치라고 놀릴 생각인가?"

    레이아와의 대화에 내가 끼어들자, 디아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귀엽게 토라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여기도 결국 이반의 마법진이면, 디아나도 대충 어떤 구조인지 생각은 하고 왔을 거 아니야? 그런데도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어?"

    "으음. 애초에 이곳은 전쟁의 영향으로 끝까지 완성하지 못한 곳일세. 본래라면 이렇게 깊게 터널이 이어질 만한 곳이 아니네만……."

    "즉, 이 터널은 마법진이 아니라, 그냥 몬스터가 멋대로 파놓은 곳이라고?"

    "전체적인 모양을 알기 전에는 뭐라 말하기 힘드네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생각되네. 바프라의 수로를 타고 흐르는 물이나 피렌체의 마을을 누비는 바람 같은 매개체도 없지 않은가."

    "하긴. 그건 그……응? 근데 있잖아."

    디아나와 대화를 하며 아무 생각 없이 매개체를 느껴보려고 집중한 순간, 나는 문득 묘한 위화감을 눈치챘다.

    "왠지 덥지 않아?"

    "그러고 보니……."

    처음에는 미약한 위화감에 지나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터널 안 온도의 변화는 확실해졌다.

    "더, 덥네요……."

    얼마나 땀을 많이 흘린 건지, 평소에는 복슬복슬 뽀송뽀송한 천사님의 꼬리가 흠뻑 젖어서 채찍처럼 가늘게 변해 있을 정도였다.

    뭐, 사실 꼬리보다 더 눈에 띄는 건 따로 있었지만.

    안 되지 안 돼. 괜히 한눈팔지 말고 집중하자.

    변화는 온도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몬스터들도 점점 변하기 시작해서, 무기를 새빨갛게 달군 채 등장하는 놈들부터 아예 본인이 불을 뿜어내는 몬스터나 화염에 둘러싸인 몬스터까지.

    "처음 보는 몬스터가 많구먼."

    그래. 그 모두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몬스터였다. 뭐, 아예 새로운 몬스터라는 건 아니고, 원래 알았던 몬스터가 불 속성으로 변한 것 같은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처음 보는 몬스터라는 건 상당히 의미가 컸다.

    1계층부터 여기까지. 다양한 환경을 돌아다니며 각양각색의 몬스터를 만난 우리가 처음 보는 몬스터라니.

    그런 몬스터가 나온다는 건, 여긴 지금까지 우리가 가보지 못한 환경이라는 뜻인데…….

    "저것도 처음 보는 슬라임이네요."

    끝끝내 용암 슬라임까지 등장한 걸 보고, 나는 드디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아무리 봐도 플래그잖아?

    "야. 미리엘."

    "으응?"

    "혹시 여기에 오기 전에, 몬스터 얘기 말고 뭐 다른 얘기 들은 적 없냐?"

    "다른 얘기라니?"

    "예를 들어 옛날에 화산이었다든가."

    "……왠지 가신들이 이 근처는 다가가지 않는 게 좋다고 끈질기게 말리기는 했어. 몬스터 때문이 아니었다는 건가."

    야. 그거, 침착하게 할 말이 아니지 않냐?

    어쩔 거야!? 아무리 우리라도 만약 화신이 터지기라도 하면……아니. 잠깐만. 그보다.

    "디아나."

    "음."

    "혹시 그 마나의 매개체라는 게……용암은 아니겠지?"

    "일리 있구먼."

    지, 진짜로? 아니. 그런데 디아나야? 너도 왜 그렇게 침착해? 혹시 너희 용암이 뭔지 모르는 거 아니지?

    "걱정하지 말게. 만약 매개체가 용암이라도, 결국 마법진을 만든 것은 이반일세. 이 몸이 다루지 못할 리 없지 않은가."

    ……생각해 보니까 그건 또 그렇군. 뭐야. 나 혼자 괜히 겁먹었던 건가.

    "알았어. 그럼 어디 한번 끝까지 가보자."

    마음을 다시 다잡고, 우리는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시는 더위와 싸우며 계속해서 안으로 전진했다.

    그리고 드디어 도달한 최심부에는 초거대 용암, 아니. 마그마 슬라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저거, 건드리면 무조건 폭발할 것 같이 생기지 않았어?"

    애초에 슬라임도 마그마로 되어 있어서 어디까지가 슬라임이고 어디까지가 진짜 마그마인지 제대로 구분은 안 되지만, 저 녀석 지금 마그마 위에 있는 거잖아?

    "해 볼까?"

    아니! 사라야! 넌 왜 그렇게 겁이 없어!?

    "하지만 마나 변환 마법진은 아마 저 아래일세."

    "……진짜로?"

    "그럼 결정이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기도 전에, 사라는 무슨 악기라도 연주하는 것처럼 활을 가볍게 한 번 통 튕겼다.

    하지만 그 가벼운 행동이 불러일으킨 결과는 어마어마해서.

    쿠쿠구구구…… 투콰아아앙!

    아무리 이런 세계에 왔다지만, 설마 화산 폭발을 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줄이야.

    하늘로 높이 솟구쳤다가 아래로 추락하는 용암을 바라보며, 나는 황당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 아니. 웃을 때가 아니지. 젠장. 위에서는 용암이, 앞에서는 마그마가 덮치는 상황이라니. 지옥이라는 게 있으면 바로 이런 광경이겠지.

    하지만 설령 지옥의 한복판에 있을지라도, 우리 애들만큼은 이 한 몸 불살라 끝까지 지켜 보이겠어!

    "다들 뒤로 물러나! 내가……!"

    "이, 이 바보 뭐 하는 거야!?"

    "구원 씨! 안 돼요! 진정하세요!"

    내가 앞으로 튀어 나가려고 하자, 사라와 레이아가 화들짝 놀라서는 내 몸에 달라붙었다.

    화산이 폭발하는 순간에도 놀라지 않았던 애들이 이제 와서 놀라다니. 조금 감격스러운 기분도 들었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다들 놔줘! 너희를 이대로 죽게 할 수는……!"

    "자네. 진정하고 주위를 좀 보게."

    디아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미 우리 주변은 온통 마그마로 뒤덮여 있었다. 다만 우리 주변에 쳐진 투명한 막에 가려져서 그 이상 전진은 못 하고 있었다.

    "흠. 이 몸도 마그마를 막아보는 것은 처음이네만, 이 정도면 아직 막을만하구먼."

    "……대마법사님은 정말 규격 외의 존재로군."

    미리엘의 그 말이, 내 심정을 정확하게 대변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대마법사라지만, 이런 것까지 가능하다고? 왠지 지금까지 호들갑 떤 게 살짝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는데.

    아니. 그보다 사라나 레이아는 대체 어떻게 침착했던 거야!?

    "그러고 보니 구원은 디아나가 250레벨 넘고 제대로 마법 쓰는 거 본 적 없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못 보긴 왜 못 봐? 당장 바프라를 먹을 때만 하더라도, 디아나의 대규모 환영 마법이 없었으면……생각해 보니까 그것도 진짜 말도 안 되는 마법이기는 하네.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구원 씨. 디아나 씨는요. 자연도 거스를 수 있으세요."

    "엣헴!"

    디아나야. 너 대체 나 없을 때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별로 있지도 않은 가슴 활짝 펴고 우쭐대는 디아나의 모습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듬직하게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