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330화 (1,201/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330화

    내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훌렁훌렁 벗었던 걸 지적받고 의식하는 거겠지.

    옷 갈아입고 따라갈 테니 먼저 가달라는 미리엘의 말에, 나는 그냥 그렇게만 생각하고 밖으로 나갔다.

    "……."

    에이씨. 깜짝이야. 이 대머리 아저씨는 왜 또 문 바로 앞에 이런 표정으로 서 있는 거야? 하마터면 반사적으로 한 대 칠 뻔했네.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얼굴은, 마치 당장에라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처럼 불쾌하게 비틀려 있었다.

    하지만…….

    "……훗."

    문틈을 통해 미리엘의 모습을 한 번 엿보고, 이번에는 또 보란 듯이 자기 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한번 확인한 다음, 대머리 장군은 왠지 갑자기 표정으로 180도 반전시키며 상쾌한 비웃음을 내게 던졌다. 아니. 비웃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기까지.

    설마, 혹시 이 새끼……내가 조루라고 생각하는 건가?

    옷은 아직 갈아입지 않았지만, 미리엘은 지금 마법을 써서 겉보기에는 무척이나 말끔해 보였다. 얼굴이 살짝 붉기는 했지만, 섹스로 절정을 느낀 사람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모습.

    게다다 내가 방에 있었던 시간까지 생각해 보면, 대머리가 그런 결론에 도달하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말이야. 너 진짜 그걸로 괜찮은 거냐?

    아니. 물론 절대 아니지만, 만에 하나 내가 진짜 조루라고 쳐. 그래도 네가 그렇게 흠모하는 미리엘이랑 섹스하고 나왔다는 건데, 그래도 괜찮다는 거야?

    뭐지? ‘네놈은 미리엘 님을 만족시킬 수 없어! 미리엘 님도 날 통해 진짜 남자가 뭔지 깨닫는다면, 네놈 따위는 순식간에 버려질 거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도저히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감도 안 잡히는군.

    너무 황당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대머리의 얼굴만 보고 있자니, 뒤에서 미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가스 장군. 아직도 돌아가지 않았어?"

    목소리를 보아하니, 예상하고 있었던 모양이군.

    설마 이것 때문에 일부러 날 먼저 밖에 내보낸 건가?

    "죄송합니다. 미리엘 님의 용태가 걱정되어……."

    "난 괜찮다고 했을 텐데? 오늘도 내 일은 릴리가 대신할 테니, 업무상으로 할 말이 있다면 릴리를 찾아가."

    릴리라니……하필이면 성기사를 자기 대행으로 내세운 거야? 뭐, 개성 넘치는 아라크네 클랜 간부진 면면을 생각해 보면, 제일 무난한 선택일지도 모르겠지만.

    "아닙니다. 일 때문에 찾아뵌 것이……."

    "그러면 이만 돌아가 주겠어? 난 성자님과 할 일이 생겼어."

    미리엘이 그렇게 말한 순간, 방금까지 기분 좋아 보였던 발가스의 얼굴이 또 순식간에 구겨졌다.

    왜 그래? 난 조루니까 너한테도 찬스는 있는 거잖아? 힘내!

    "……할 일이라 하심은?"

    "발가스 장군."

    "네."

    "내가 장군에게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해?"

    "……그그그극……아닙니다."

    아니. 그러니까 말한 건 미리엘인데 왜 날 죽일 듯이 노려보시는 걸까? 하지만 뭐, 나는 그릇이 큰 남자니까 이해해주지.

    "으드드드득."

    ‘미리엘 쟤 참 성격 지랄 맞지? 네가 고생이 많아.’ 라는 뜻을 담아서 씁쓸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해주고 마지막으로 대머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자, 대머리의 입에서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상쾌해라. 아니. 뭐, 생각해 보면 내가 이 대머리랑 척져서 좋을 건 하나도 없지만, 왠지 미리엘이 그렇게 유도하는 느낌이 있으니까 말이야.

    쟤도 생각 없는 애가 아니니, 뭔가 의도가 있어서 이러는 거겠지. 뭔가 정치적인 의도가.

    ……정치적인 의도 맞겠지? 설마 이 대머리랑 경쟁심을 부추겨서 자기를 여자로 더 의식하게 한다든가, 그런 어이없는 이유로 싸움 붙이는 건 아니겠지?

    미리엘. 너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여자잖아? 나 진짜 믿는다?

    "그럼 난 이만 먼저."

    "응. 성자님. 곧 갈게."

    대머리의 이빨 갈리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서, 나는 상쾌한 발걸음으로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머, 빨리 왔네."

    사라야. 넌 항상 내가 다른 여자한테 갔다가 섹스 안 하고 오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더라. 혹시 어디서 몰래 감시하고 있었니?

    "뭐, 가볍게 성자의 손길 한 방이면 해결될 문제였으니까."

    "……그래."

    일단 섹스 안 하고 왔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어필해 봤지만, 사라는 오히려 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빤히 날 쳐다보더니.

    "하아……정말……."

    아니. 사라야. 왜 사람 얼굴 보고 한숨을 쉬고 그래.

    "야. 구원. 너……."

    "기다리게 했군. 오랜만입니다. 다이……애나님 혼자가 아니었군. 오랜만이에요. 레이아씨. 오랜만이야……언니."

    사라가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뭔가를 말하려고 한 찰나, 미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엘은 등장하자마자 곧바로 사라와 묘한 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해서, 나는 사라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둘의 모습만 바라보게 됐다.

    "……그래. 오랜만이네."

    얘, 얘들아? 너희 둘 다 왜 그러니? 딱히 자매 관계라는 게 밝혀지고 나서 처음 만나는 것도 아니잖아?

    물론 그때는 최대한 빨리 미리엘을 용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핑계가 있어서, 둘 다 제대로 된 대화는 나누지 않고 훈련에만 집중하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생각해 보면, 자매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둘이 제대로 대화할 기회를 가진 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설마 이반의 마법진을 살펴보러 갈 때까지, 쭉 이 분위기를 유지할 생각은 아니지?

    괜히 나까지 몸이 움찔움찔 움직일 정도로 긴장된 분위기 속, 먼저 입을 연 건 바로 미리엘이었다.

    "하핫.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딱히 언니한테서 형부를 빼앗으려는 게 아니니까. 난 그저 형부와 조금 더 친밀……."

    야! 미리엘! 너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핫, 빼앗을 수는 있고?"

    사, 사라야? 아무리 먼저 도발을 들었기로서니, 말이 너무 센 거 아니니!? 오빠가 누누이 말하잖아! 넌 가끔 말이 너무 세서 안 친한 사람이 들으면…….

    "……."

    저렇게 된단 말이야.

    이제 어쩔 거야!? 이 분위기 대체 어쩔 거야!? 나 미리엘이 저렇게 정색한 표정 짓는 거 처음 봤어!

    "성자님."

    "왜!?"

    왜 나야!? 왜 날 끌어들이는 거야!?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 제발 가만히 놔둬! 아니. 물론 너희 두 자매가 기 싸움하는 이유가 애초에 나 때문이기는 하지만!

    "상처받았어."

    나보고 어쩌라고!? 고작 그런 말이나 하려고 날 끌어들인 거야!? 너 때문에 괜히 사라가 나까지 노려보잖아!

    사라야. 진정해. 오빠 믿지?

    "성자님이 상처받은 여자를 내버려두다니. 하핫. 성자님은 상상 이상으로 언니한테 꽉 잡혀 사는군."

    미리엘은 웃으면서 그렇게 넘기려는 모양이었지만, 그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것처럼 보이는 건 내 기분 탓일까?

    "하지만……."

    "미리엘 양."

    "실례했습니다. 다이애나 님."

    뭔가 더 말하려는 미리엘을 보고, 이대로 놔두면 끝이 없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디아나가 적당히 하라는 듯 끼어들자, 그제야 미리엘은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한발 물러났다.

    미소 짓기 전에 아주 잠깐 분한 듯이 아랫입술을 깨무는 모습이 보였지만, 저 정도는 못 본척해 주자.

    "그래서, 마법진의 위치를 찾았다고 했는가?"

    "네. 디아나님이 말씀해주신 근방을 샅샅이 살펴보니 한곳 의심스러운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걸어서 반나절 정도 걸리는 곳입니다만……바로 출발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해주면 고맙겠구먼."

    "네. 그러면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움직일 준비를 마치고 오겠습니다."

    움직일 준비라……뭐, 미리엘은 지금 플리투스의 왕 같은 존재니, 마음대로 이곳을 벗어날 수는 없겠지.

    "둘이 있을 때도 저래?"

    고개 숙여 인사하고 미리엘이 방을 벗어나자, 사라가 기다렸다는 듯 날 추궁했다.

    "무, 뭐가?"

    "구원도 봤으니까 알잖아?"

    "……뭐, 요즘 들어서 좀 노골적으로 티를 내기는 하지. 아, 그래도 오빠는 안 받아줬다?"

    일단 자기변호를 덧붙여 봤지만, 오히려 그게 사라의 불타는 심정에 기름을 부어 버리는 격이 된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런 마음을 품게 한 것 자체가 문제라고는 생각 안 해!?"

    "아니. 그건 내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쩔 수 없기는 왜 없어!? 상냥하게 대하지 마! 잘생기지도 마!"

    "……사라야."

    "나 지금 화내는 거거든?"

    아니. 그렇게 말해도 말이야. 그렇게 귀엽게 칭찬하면서 화내버리면 남자는 흐뭇해질 수밖에……아야!

    "아파. 사라야."

    "아프라고 한 거거든?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지 마."

    "아까는 잘생겼다고 했으면서."

    "시, 시끄러워! 그건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야!"

    계속해서 내 옆구리를 꼬집으면서 얼굴을 붉히는 사라를 보고, 옆에서 디아나와 레이아가 뭔가 속삭이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속삭이는 척만 하면서 대놓고 들으라는 듯 대화를 나눴다.

    "……레이아 양."

    "네?"

    "이 몸의 눈에는 사라 양의 행동이 그저 미리엘 양의 핑계를 대면서 낭군님과의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이네만."

    "으, 으응……그, 그런……가요……?"

    "시치미 떼지 말게. 보아하니 레이아 양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먼. 그러면 이 몸도 양보할 필요도 없겠구먼! 사라 양! 멈추게! 이런 식으로 낭군님을 독점하려 하다니! 정말 방심할 수가 없구먼!"

    "무……!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까까지의 그 긴장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와 티격태격하면서 순식간에 분위기를 완화시키는 디아나였다.

    이게 바로 최고 연령에서 뿜어져 나오는 배려심이라는 건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역시 이럴 때 믿을 수 있는 건 디아나라니까.

    "정말 디아나 님은 대단하시네요."

    "그러게."

    "전 도저히 흉내 못 낼 것 같아요."

    "뭐, 굳이 흉내 낼 필요 없잖아? 레이아는 레이아 나름대로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주고 있으니까."

    "어머……구원 씨……."

    "레이아! 또 치사하게 그러기에요!"

    "자네도 정말 방심을 할 수가 없구먼!"

    아무튼 뭐, 그런 식으로 평소처럼 사라와 디아나가 티격태격하고, 레이아랑 노닥노닥하면서 조금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곧 미리엘이 보낸 아라크네 클랜원 한 명이 준비 끝났다면서 우리를 부르러 왔다.

    "그래서,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안내해 준 곳으로 가보니, 어째선지 미리엘 뿐만 아니라 병사들도 집결해 있었다.

    모두 여자로만 구성된 부대. 게다가 병사들 사이에 드문드문 아는 얼굴이 보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용사단인 모양이다.

    "하핫. 성자님도 비스의 왕이 되었으니까 알잖아? 우리 같은 사람은 움직이려면 이유가 필요하단 걸."

    "무슨 이유를 댔는데 군대까지 동원해?"

    "몬스터 토벌이야."

    "뭐? 하지만 그런 이유를 대 버리면 실적을 남겨야 하잖아?"

    이정도 병력을 끌어모으고 미리엘 본인이 직접 나섰는데, 실적이 없으면 아무리 그래도 의심받을 텐데? 대체 어떤 식으로 실적을 남기려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미리엘은 특유의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으면서 내 팔을 꽉 끌어안았다.

    야. 너무 달라붙지 마라. 넌 사라 시선이 의식도 안 되냐?

    뭐, 지금은 모습이 안 보이기는 하지만.

    사라도 디아나도 레이아도, 괜히 플리투스에서 얼굴이 팔리면 나중에 골치 아파지니까 말이야.

    그래서 일단 모습을 드러내는 건 나 혼자만으로 하고, 셋은 지금 디아나의 마법으로 투명해져 있다는 얘기다.

    "하핫. 안심해."

    "아니. 안심하라고 해도 말이지……."

    뭐, 물론 너도 생각이 있으니까 이렇게 했겠지만.

    "이제 그만 떨어지지?"

    일단 미리엘의 유도에 따라 마차에 타고 문을 닫자, 그제야 투명 마법을 풀고 나타난 사라가 곧장 미리엘을 노려봤다.

    "하핫. 언니도 끌어안아 봐. 안는 느낌이 무척 기분 좋아."

    물론 미리엘은 그런 사라의 시선을 받고도 기죽기는커녕 오히려 내 팔을 더욱 꽉 끌어안았지만.

    "나도 알거든!?"

    아니. 사라야. 그럴 땐 그냥 쿨하게 "흥. 나도 알아. 내가 너보다 훨씬 더 많이 안아봤으니까." 라고 말했으면 되지 않았을까? 너도 평소라면 그랬을 거 아니야?

    왜 도발에 순순히 당해서 반대쪽 팔을 끌어안는 거야!? 왜 둘이서 날 사이에 두고 눈싸움을 하는 거야!?

    "자매를 둘을 같이 양옆에 끼다니. 자네도 사람이 참 못됐구먼."

    아니. 디아나야. 넌 왜 아까부터 그렇게 남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 거야!?

    다른 여자 둘이 네 낭군님을 사이에 두고 기 싸움하고 있다니까!? 너도 참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혹시 그건가? 미리엘 문제는 언니인 사라한테 일임하기로 했다는 건가?

    "구원 씨. 죄송해요."

    처, 천사님? 진짜로? 진짜 사라한테 다 맡기기로 한 거야? 그래서 둘 다 그렇게 안 껴드는 거야?

    아니. 그야 이 복잡한 자매 사이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지만……그럼 나 혼자 다 감당해야 하잖아! 이대로 반나절을 어떻게 버티라는 거야!? 살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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