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315-1327화 (1,198/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315화

    "네? 네에…… 하, 하지만 정말로 처음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전 조금 전 나일 님의 성은을 받아 여자가……!"

    처음인데도 불구하고 고통이 없다는 사실에 초조해진 건지, 아리엘은 또 얼굴색을 바꾸며 내 가슴에 두 손을 얹고 매달렸다.

    난 딱히 그런 걸 의심한 게 아니었는데. 대체 얜 왜 이렇게 비굴한 거야?

    "알아. 나도 그냥 예의상 해본 말이야."

    처음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차피 나한테는 섹스 시 자동으로 발동되는 힐링 섹스가 있으니까. 당연히 파과의 고통 같은 걸 느낄 새도 없이 순식간에 치유되었겠지.

    "아……."

    내가 몸을 일으키자, 아리엘은 그제야 본인의 자세를 자각했는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뭐, 물러나 봤자 하반신이 연결되어 있는 이상 그리 멀리 떨어지지는 못하지만.

    "그래서,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지?"

    "네? 아, 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조금 전입니다! 제가 성은을 받자마자 나일 님께서 일어나셔서……. 시간으로 따지만 1……2분……? 죄, 죄송합니다! 정확한 시간은 저도 잘……!"

    그러니까 아까부터 너무 비굴한 거 아니냐?

    "흐음."

    아무튼 내가 그리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하긴. 오래 잠들어 있었으면 아리엘이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겠지.

    다른 사람도 아닌 나랑 섹스를 하고 있는 거다. 레벨 차이도 매력 차이도 압도적. 게다가 처녀라면 응당 따라와야 할 고통조차 없는 섹스.

    이렇게 내가 가볍게 허리만 움직여줘도.

    "흥하으앗!?"

    우와. 깜짝이야.

    내가 허리를 가볍게 위로 쳐올리자, 아리엘의 등 뒤에서 갑자기 커다랗고 새하얀 날개가 펄럭하고 펼쳐졌다.

    줄리안이 봤으면 부럽다고 손가락을 물고 쳐다봤을 광경이군. 걘 사도 인장도 등 뒤에 새겨달라고 할 정도니까.

    뭐, 아무튼 내가 허리만 가볍게 움직여도 이렇게 되는 거다. 그러니 삽입하자마자 내가 깨어났다는 아리엘의 말은 아마 사실이겠지.

    애초에 우리 애들도 그 이상 날 오래 재워둘 이유가 없었을 테니까.

    "나, 나일니힘……이거헌……."

    "왜? 무슨 문제 있어?"

    "힉!?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조금 전 절정을 느끼며 다시 나와 얼굴 거리가 가까워진 게 부끄러운지, 아리엘은 이번엔 활짝 펼친 날개를 퍼덕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는 아예 날개를 앞으로 접어서 자기 상반신 전체를 가리기까지…… 야. 네가 그러고 있으면 내가 기분이 이상하잖아. 무슨 깃털 뭉치랑 섹스하는 것도 아니고.

    "이, 이게 여자의 기쁨……흐핫!? 왜, 왜 그러십니까!?"

    내가 억지로 날개를 양옆으로 벌리자, 날개 안에서 혼자 뭔가 중얼거리고 있던 아리엘은 더욱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날개를 파닥파닥 움직였다.

    그래 봤자 내 손에 잡혀 있어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깃털만 날렸지만.

    "가리지 마라. 아직 나한테 숨길 게 있어?"

    본의가 아니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렇게 섹스하게 된 거다. 이제 와서 빼봤자 아리엘이 내 물건으로 여자가 됐다는 사실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아리엘도 첫 경험인만큼 제대로 추억을 간직하고 싶을 테고.

    뭐, 지금 모습만 봐서는 추억 같은 것에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어 보이지만.

    "어, 없습니다! 다만! 그게……지금 막 여자가 된 몸이니, 나일 님의 눈에 보이기에 부끄러울 따름인지라……!"

    아니. 넌 너 자신한테 너무 비굴해서 그렇지, 스스로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부끄러운 몸은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지금 막 여자가 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슴은 줄리안이나 브레디랑 비교해 봤을 때 훨씬 더 여자다운……아, 아니. 가슴이 여자의 전부는 아니지만 말이야.

    우리 줄리안이 가슴만 없다 뿐이지, 권각술을 쓰는 만큼 몸매는 참 훌륭하거든. 보기 좋은 직각 어깨나 호리병 같은 허리 골반 라인, 잘 빠진 각선미까지. 여러모로 훌륭해.

    그리고 난 줄리안의 평평해서 손을 얹어도 유륜과 유두 밖에 안 느껴지는 가슴도 좋아하거든. 진짜로.

    "나, 나일 님……?"

    "응? 아, 아니. 제법 여자다우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아리엘의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이 정도면 사라랑 동급……아니. 사라보다 살짝 더 작나?

    내 여자들 기준으로는 하위권이지만, 그건 그냥 우리 애들 중에 큰 애들이 많아서 그런 거고. 이정도면 충분히 있는 수준이다.

    절대 줄리안이랑 브레디 때문에 기준점이 낮아진 게 아니다.

    "그, 그렇…… 습니까……?"

    하지만 내게 가슴을 주물럭주물럭 만져지면서도, 아리엘은 선뜻 믿기 힘들다는 듯 내 안색을 엿봤다.

    진짜 왜 이렇게까지 비굴한 걸까?

    아니. 전에 들었던 얘의 과거사나 얼마 전에 알버트한테 배신당한 것까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니지만.

    뭐, 좋아. 계속 이런다면.

    "흥흐읏!?"

    비굴한 생각 같은 거 할 틈도 없이, 그 몸에 철저하게 쾌락을 때려 박는 수밖에.

    그게 아니더라도, 얘한테 들을 얘기는 다 들었으니, 이제 밖에 가서 우리 애들 얘기를 듣고 싶기도 하고 말이야.

    "흐하아…… 하아…… 하아……."

    "자, 그럼…… 이걸 어쩌지."

    침대에 엎어져서 몸을 움찔움찔 떠는 아리엘을 바라보면서, 나는 예상외의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됐다.

    아니나 다를까 아리엘은 엄청나게 약했다. 약자 태세가 아니었으면 죽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그래서 손쉽게 기절시켜 버린 것은 좋았지만……저 날개를 어쩌면 좋지?

    이불이라도 덮어주고 가고 싶은데, 커다란 날개가 방해되어서 똑바로 눕히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흐으으음……."

    "주군."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니, 허공에서 브레디가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설마 보고 있었던 건 아니겠지? 뭐, 좋아.

    "그래. 브레디냐. 잘 왔다."

    "네. 으윽!?"

    나는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곧장 브레디의 바지를 아래로 내린 다음, 그 음부에 물건을 밀어 넣었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던 만큼 브레디의 그곳은 전혀 젖어 있지 않았지만, 내 물건이 아리엘의 애액으로 범벅되어 있었던 만큼 삽입 자체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주, 주군……?"

    "너 나한테 뭔가 할 말 없냐?"

    "죄, 죄송합니다……."

    웬일로 솔직하게 사과하네. 또 특유의 4차원 대답을 늘어놓으면 한 대 때려주려고 했는데.

    "흐하읏……하아……주, 주군……?"

    내가 삽입을 풀고 그 몸을 놔주자, 브레디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날 올려다봤다.

    "바지 챙겨 입어."

    "안 하시는……겁니까……?"

    "안 해. 애초에 한 대 때려줄 생각으로 삽입한 거였으니까."

    내 여자……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지금까지 쌓아온 정이 있으니, 그냥 때리기는 미안해서 말이야. 적어도 힐링 섹스로 아프지는 않게 해주려고 했던 건데.

    하지만 뭐,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는 아는 것 같으니까 됐어. 이제 와서 한 대 때린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읏……."

    내 말을 들은 브레디는 드물게도 무안한 표정을 지으면서, 꾸물꾸물 바지를 끌어올렸다.

    "그래서, 다른 애들은?"

    "옆방에 계십니다."

    "가자."

    나는 브레디를 대동하고 곧장 옆방으로 향해서 문을 쾅 열어젖혔다.

    "오, 오오……자네 왔는가."

    "새, 생각보다 빨리 왔네!"

    "저어……잘하고 오셨나요?"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뭔가 얘기하던 디아나와 레이아, 줄리안은 내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일제히 어색한 표정으로 날 맞이해 줬다.

    뭘 아무렇지 않게 인사하는 거야?

    "그게 지금 할 말이냐 이것들아!?"

    "꺅!"

    내가 성큼성큼 다가가자, 셋은 무슨 일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건지 동시에 몸을 움츠렸다.

    디아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고, 레이아는 쫑긋 솟은 귀를 앞으로 접으면서 자기 꼬리를 끌어안았으며, 줄리안은……야. 넌 왜 가랑이 사이를 막아!? 넌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짜 한 대 콱 때려줄까 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벌인 거야!? 특히 디아나 넌 전에 나랑 할 때……."

    아리엘 보고 예쁘장하게 생긴 처자니 뭐니 하면서 질투까지 했으면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전에 디아나가 황급히 내게 날아와서는 내 입을 틀어막았다.

    "나, 낭군니임……."

    그리고는 힐끔힐끔 다른 사람들을 향해 곁눈질하는 디아나.

    그렇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기 체면은 좀 세워달라는 건가. 이래 봬도 최고연장자다. 꼴사납게 다른 여자 질투했다는 얘기를 남한테 들려주기는 싫은 거겠지.

    그러면 애초에 이런 짓을 안 했으면 됐을 텐데.

    "디아나 네가 날 재운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상황에서 브레디한테는 그럴 능력이 없다. 설령 독을 썼어도 완전히 잠들기 전에 내가 먼저 깨닫고 해독했을 거다.

    거기에서 그렇게 날 순식간에 잠재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이 앙증맞은 대마법사님밖에 없다.

    "그, 그것은……."

    "주군! 죄송합니다! 제가……!"

    "나도 아니까 좀 조용히 하고 있어. 어찌 됐든 얘들이 동의하고 협력했다는 건 마찬가지잖아?"

    우리 사이에 끼어들려는 브레디를 그렇게 차단했지만, 그래도 브레디는 우리 애들한테 의리를 세우려는 건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제가……."

    "말했지? 다 안다고. 얘들한테 말하기도 전부터 네가 독단으로 꾸미고 있었다는 거잖아?"

    "어, 어떻게……."

    그야 아리엘의 반응이 너무 덤덤했으니까.

    아무리 이제 아리엘한테 남은 게 나밖에 없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여신님의 사자라는데 반응이 너무 심하게 덤덤했어. 심지어 걔는 여신 세계의 저주 때문에 대대손손 고통받아왔었던 녀석인데도.

    아무리 생각해도 사전에 어느 정도 얘기를 들었던 사람의 반응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역시나 얘기할 사람은 브레디밖에 없다. 오늘까지 계속 알버트와 아리엘을 감시하고 있었으니, 얘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겠지.

    "넌 나중에 다시 혼낼 거니까 일단 빠져 있어. 일단은 얘들부터야. 대체 뭐하자는 거야?"

    다시 디아나와 레이아, 줄리안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말하자, 다들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너무 이렇게 풀 죽으니까 또 기분이 묘하네. 따지고 보면 내가 다른 여자와 자고 온 건데, 오히려 우리 애들이 이런 반응이라니.

    아무튼 그렇게 다들 시선을 피하는 와중, 결국 제일 먼저 결심한 건 역시나 우리 대마법사님이었다. 괜히 최고 연장자가 아니라는 거지.

    "하지만 그 처자에게는 이미 자네가 여신님의 사자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는가. 나중에 아니라고 변명했어도, 의심은 사라지지 않았을 걸세. 그대로 놔둔다면 반드시……."

    "그래서 아예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리자는 생각을 했다고? 그게 가장 손쉬운 방법이니까?"

    "어차피 자네가 그러지 못하는 건 이 몸들 때문이 아닌가."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다음, 디아나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뭐……너희 때문이라고 할까……엄청나게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게다가 아리엘을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게 가장 손쉬운 해결법이라는 말 자체도 틀린 말이 아니기는 하고.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자네는 지금 적진의 한복판에 있는 걸세. 한 번의 사소한 실수로 자네의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걸세. 이 몸은……이 몸들은, 그깟 고집 때문에 자네를 잃고 싶지 않네."

    "……."

    치사하게. 그렇게 말하면 내가 더 할 말이 없잖아.

    "구원 씨……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디아나 씨와 같은 마음이에요."

    "나, 나도……."

    게다가 레이아는 물론, 이런 걸 표현 잘 못 하는 줄리안까지 저렇게 말해 버리니, 나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다.

    "하아…… 진짜. 아니. 뭐, 나도…… 으음."

    아무리 그래도 이런 분위기에서 ‘섹스할 상대 더 늘어나서 이득이다.’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장난으로도 할 말과 못할 말이 있으니까.

    결국 장난스럽게 넘어갈 타이밍도 놓치고 말아서, 나는 잠깐 생각한 끝에 타겟을 돌리기로 했다.

    "들었어!? 우리 애들이 이렇게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브레디 넌 어째서 그렇게 막무가내로 행동한 거야!? 우리 정보를 미리 말해 버리다니! 아리엘이 넘어왔으니 망정이지, 만약 실패했으면 어쩔 뻔했어!"

    브레디한테 살짝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 묘해진 분위기를 넘어가려면 이제 이 방법밖에 없어.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주군. 실패할 확률은 없었습니다."

    "…… 뭐?"

    "아리엘은 이미 주군의 나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주군의 나신을 보고 주군을 거부할 수 있는 여자는, 적어도 이 비스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전에도 줄리안이랑 둘이 비슷한 얘기를 했었지. 여자를 굴복시키는 카리스마가 있네 어쩌네 하면서.

    "너 말이야. 그런 건 너나 줄리안이……."

    "아니요. 그 어떤 비스 여성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시험해 보십시오. 실제로 아리엘도 처음 만난 날부터 사지를 땅에 붙이고 복종하지 않았습니까?"

    그, 그러냐……. 아니. 그때는 내 물건 보고 굴복한 분위기는 아니지 않았냐? 물론 내가 물건을 드러내놓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야.

    하지만 묘한 고집마저 느껴지는 브레디의 단호한 태도에, 나는 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하아…… 아무튼 너희 생각은 잘 알았어. 그래도 다음부터는 이런 일 생기면 우선 나랑 얘기부터 하고 결정하자. 그냥 막 저지르지 말고."

    "후흥."

    "후훗."

    할 말 없어진 나는 결국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런 식으로 마무리하려고 했다.

    일단 내 나름대로 가벼운 불평도 섞어서 말한 거였는데, 어째선지 그 말을 들은 디아나와 레이아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본 후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웃었다.

    "뭐야, 둘이? 또 왜 그래?"

    "다음부터는 이럴 일이 생기면 내가 알아서 내 여자로 만들겠다. 라고는 안 하는구먼."

    난 또 뭐라고. 그런 거였어? 반성은커녕 그런 걸로 좋아하기나 하다니.

    둘의 미소를 보고 있자니 ‘그럼 다음부터는 그럴까?’ 라는 말로 반격하고 싶어졌다.

    실은 아까 아리엘은 안으면서, 한 가지 확인한 게 있거든.

    브레디나 다른 애들이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아리엘을 내게 보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예상치 못했던 수확이라는 거지.

    무슨 말이냐면, 아리엘을 안으면서 전처럼 심하게 감정이 동요되거나 하지는 않았다는 얘기다.

    본인부터가 내 여자보다는 내 수하로서 있길 원하는 브레디와 지속적으로 사무적인 섹스를 해왔기 때문일까? 전처럼 섹스에 그렇게 의미 부여를 안 하게 되는 느낌이었다.

    아니. 우리 애들이랑 할 때는 여전히 섹스가 엄청 특별하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말이야.

    감정도 없는 애한테 섹스만으로 감정이 생길 정도로 동요하지는 않게 된 느낌?

    나 자신도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아무튼 전과는 뭔가가 좀 다른 느낌이었다.

    지금이라면 필요할 때마다 다른 여자를 안게 되어도 전처럼 호들갑 떨지 않고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그럼 다음부터는 그럴까?’ 라는 말로 반격도 하고 싶어진 거지만……아마 진짜 이렇게 말하면 나만 나쁜 놈 되고 끝나겠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또 나한테 안긴 여자가 늘어난 거다.

    얘들도 자기들이 결단하고 진행한 거니까 겉으로 이렇게 웃고 있는 거지, 속으로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는 않겠지.

    "진짜 남자 하나는 잘 골랐어.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래서 나는 아주 잠깐 생각한 끝에, 누구도 상처 입지 않는 멋진 대답을 내놨다.

    이렇게 말하면 그냥 ‘그렇구먼. 바람기만 없으면 완벽할 터인데 말일세.’ 같은 말로 구박 좀 받고 끝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해요."

    "아니. 레이아. 그렇다고 그렇게 바로 대답하면 부끄러운데."

    "하지만 정말로 생각하는걸요."

    "아, 알았어. 내가 다 잘못했어! 앞으로는 이런 상황 자체가 없도록 할게! 그러니까 그만! 이제 이 얘기는 끝!"

    왜 우리 천사님은 내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공격하시는 걸까?

    아니. 아마 천사님은 공격할 의도 하나도 없이 순수하게 말씀하시는 거겠지만, 저 순수한 시선이 오히려 더 날카롭게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야.

    "레이아양도 사람이 못됐구먼." "네? 무슨 말이세요?"

    디아나와 레이아가 소곤소곤 나누는 대화를 무시하고, 나는 황급히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알버트."

    "네. 나일 님."

    아리엘을 안는다는 예상외의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지체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우리가 디아나를 데려온 본래 목적은 알버트의 힘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일단 오늘 해야 할 업무를 대충 끝나자마자, 나는 알버트를 불러 세웠다.

    "끝나고 얼굴 좀 보지."

    "네."

    알현실에는 여전히 많은 신하들이 모여 우리를 주목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여기 있는 인간은 대부분 내 사람이니까.

    비스의 군주가 카이젤에서 나로 바뀌면서, 당연히 대신들 간의 권력 개편도 대대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뭐, 정확히 말하자면, 의도적으로 권력 개편을 시행한 거지만.

    카이젤과 함께 수도에서 머무르던 놈들은 지금까지 누리던 권력을 잃고, 이제는 이 자리에 올 수 있는 인원도 소수. 그것도 말석을 간신히 몇 자리 차지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 그 대신 권력을 차지한 인간들이 바로, 내가 그동안 각지를 돌아다니며 꺾은 강자들이라는 얘기다.

    힘이 전부인 강자존의 세계에서, 내가 힘으로 직접 꺾은 놈들만큼 믿음직한 놈들은 없으니까 말이야. 내가 괜히 카이젤의 초대장을 받고도 계속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강자들을 꺾고 다닌 게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그 대대적인 권력 이동에서 핵심 역할을 맡은 것이 바로 블래스트의 고릴라 인간, 한스 영감, 그리고 이 알버트 피렌체였다.

    뭐, 고릴라 인간은 내 사정을 하나도 모르는 만큼, 적당히 높은 장군 자리에 앉혀준 것뿐이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지금 비스의 권력 서열은 날 제외하면 한스와 알버트가 투톱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니 나와 알버트가 회의를 끝내고 개인적으로 만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거지.

    "나일 님. 이 여성분은?"

    내 방에 있는 디아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알버트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 우리 디아나는 겉보기만 봐서는 그냥 귀엽고 깜찍한 여자일 뿐이니까 말이야. 그냥 여자라고 하기에는 너무너무 예쁘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래도 내 방에 있다는 건 무시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 건지, 알버트는 일단 정중한 태도를 보였다.

    비스에서 나고 자란 남자 놈이 여자한테 이런 태도라니. 이 녀석도 참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이야.

    "네 바람 기술을 선보여 봐라."

    "네? 이 여성분께 말입니까? 이런 곳에서요?"

    "그래."

    "하지만……."

    "이 몸도 이 방도 걱정할 것 없네. 빨리하게."

    아무리 그래도 자기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여자가 저런 말투를 쓰는 건 기분 나쁜 걸까?

    알버트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옆에 내가 있으니 함부로 행동은 못 하겠다는 듯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마 어디 한번 혼쭐나 보라는 생각이겠지.

    나한테도 느껴질 정도로 마나를 끌어모은 다음, 알버트는 그 마나를 한 번에 대기 중으로 방출하여 바람을…….

    "이, 이건 대체……!?"

    아마 일으킨 모양이지만, 방안에는 미풍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놀란 알버트는 황급히 다시 한번 바람을 조종하려 해보는 것 같았지만,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호. 그렇구먼. 재미있는 기술을 쓰는구먼. 자네가 보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네."

    "나, 나일 님! 이건……!?"

    "당황하지 말게. 자네는 제대로 마법을 썼네. 그저 이 몸이 상쇄한 것뿐일세."

    여전히 사기적인 기술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대마법사님이었다.

    나야 이제 익숙하니 디아나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딱히 놀랍지 않았지만, 이런 걸 처음 보는 알버트로서는 믿을 수 없겠지.

    "사, 상쇄라니……! 당신은 대체……!"

    "그래서 디아나. 뭔가 좀 알 것 같아?"

    숨 쉬는 것조차 잊고 놀라는 알버트를 무시한 채, 나는 디아나에게 질문했다.

    "음. 이것은 확실히 마법, 그것도 제법 특수한 마법일세."

    "특수하다니?"

    "제법 익히기가 까다로운 마법이라네. 바람을 전문으로 다루는 마법사들 중에서도……그렇구먼. 부 학파장급은 되어야 겨우 익힐 수 있을 걸세. 게다가 부유 마법도 살짝 섞었구먼. 재미있는 응용이야."

    아무렇지 않게 자기 기술을 상쇄하고 분석까지 완벽하게 하는 디아나의 모습에, 알버트는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이 되었다.

    "나, 나일 님……이분은 대체?"

    이 여성에서 당신, 그리고는 이제 이분인가.

    정체를 완벽하게 알게 되면 뭐라고 하려나?

    "넌 말해 줘도 잘 모를 거다. 우리 세계에서 지고의 대마법사라는 이명을 가진……."

    "지, 지고의 대마법사님!? 그, 그, 모든 마법을 창시해냈다는 전설의 대마법사님!?"

    어? 잘 아네? 아,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의 아버지, 마법사라고 했지. 엄청 얘기했겠구나. 마법사라는 족속들은 다들 하나같이 디아나의 팬이니까.

    "응? 하지만 아버지의 말씀에 의하면, 지고의 대마법사님은 그 누구도 자애롭게 감싸 안아줄 것 같은 어른스러운 분위기의 아름다운, 마치 여신님과 같은 분이시라고……."

    "이 몸은 아니라는 겐가?"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디아나가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말하자, 알버트는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외쳤다.

    하지만 뭐, 이번만큼은 알버트의 마음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알버트, 네 아버지는 틀리지 않았어. 네 아버지가 디아나를 봤을 때는 아직 전생하기 전이었을 테니까 말이야.

    저 모습만 봐서는 믿기지 않겠지만, 전생하기 전 디아나는 진짜로 그런 분위기의 누님이었거든.

    "흥. 아무튼 이 자의 기술을 보니 아버지라는 자가 누군지 알 것 같구먼. 분명 이름이……이반이었던가?"

    "마, 맞습니다! 아버지를 아십니까!?"

    "그리 잘 알지는 못하네. 몇 번 얼굴을 본 적 있는 것이 전부일세."

    "지고의 대마법사님께서 아버지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해주시다니!"

    그 이반이라는 사람 본인이면 모를까, 네가 그렇게까지 감격할 일이야?

    비스에서 살면서 여신님을 추종할 때부터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지고의 대마법사님에 대한 존경심도 다른 마법사들과 똑같이 가지고 있는 알버트였다.

    "그러면 낭군님."

    "응. 알버트. 일단 돌아가라."

    "네? 아……네."

    영문도 모른 채 기술만 보여주고 이대로 물러나기는 아쉬운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여신님의 사자와 지고의 대마법사님이 동시에 축객령을 내리는데 버티고 있을 만큼 알버트의 간은 크지 않았다.

    "지금 나일 님을……낭군님이라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면서, 알버트는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터덜터덜 방을 빠져나갔다.

    "일부러 낭군님이라고 한 거지?"

    "후흥. 이렇게 내조 잘하는 여자를 곁에 두다니. 낭군님도 복 받았구먼."

    내가 한 말 똑같이 따라 하기는.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알버트의 저 디아나를 대하는 태도를 봤을 때, 내가 디아나의 낭군님이라는 걸 알면 자연스럽게 나에 대한 존경심도 지금 이상으로 강해질 테니까.

    "아무튼 이걸로 확실해졌네."

    "음. 저자는 믿고 계획에 끌어들여도 될 것 같네."

    "왠지 깊게 얽히면 디아나한테 마법 배우고 싶다고 귀찮게 굴 것 같은 느낌이 풀풀 풍기기는 하지만 말이야. 뭐, 그건 내가 알아서 적당히 쳐내야지."

    설마 지고의 대마법사님에 대한 존경심까지 위쪽 사람들이랑 똑같이 탑재되어 있을 줄이야. 그 이반이라는 남자는 알버트의 유아기 교육을 대체 어떤 식으로 한 걸까?

    "필요하다면 이 몸은 가르침을 줘도 상관없네만."

    "아니. 그건 내가 싫어."

    "으음? 후흐응?"

    내가 고개를 저으며 말하자, 디아나는 갑자기 묘한 미소를 지으며 두둥실 내게 다가와서 얼굴을 빤히 엿봤다.

    "뭐야, 그 미소는."

    "질투하는 겐가?"

    "아니거든. 그냥 안 그래도 요즘 나랑 있을 시간도 부족한데, 디아나가 누굴 가르치면 더 시간이 없어질 거 아니야. 난 그게 싫은 거야. 다른 의도는 전혀 없어."

    "그렇게 말이 길어지니 더욱 수상하구먼."

    "진짜라니까!?"

    "쿡쿡. 그런 걸로 해두겠네."

    젠장. 다 안다는 표정으로 머리 쓰다듬기는. 내 머리에 손도 제대로 안 닿아서 공중에 떠 있는 주제에.

    하지만 왠지 거역할 수 없어서, 나는 얌전히 디아나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졌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놀랍구먼. 그 이반이 이런 곳까지 왔었다니……."

    "왜? 잘 모른다면서?"

    "그렇기는 하네만……말하지 않았는가? 부 학파장 급이라고. 그 정도 실력이 되면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고 해도 소문으로 근황 정도는 전해 듣게 마련일세. 이 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반이라는 사내가 던전의 이런 깊은 곳까지 드나들었다는 소문은 없었네. 기껏해야 2, 3계층에 마법 연구에 필요한 소재를 얻으러 직접 나선 것이 전부일 터이네만……."

    "뭐, 사라네 할아버지도 비슷한 느낌이잖아? 그렇게 유명한 모험가도 아니었다면서?"

    "세상에는 이 몸이 모르는 비밀이 아직 많다는 겐가."

    "그런 거지."

    그렇게 말해 줘도, 디아나는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계속 턱을 내 머리 위에 올려놓고 골몰이 생각에 잠겼다.

    "으음……낭군님. 이 몸은 잠시 할 일이 생각났네."

    "응? 일이라니?"

    "그냥 저자의 마법 응용을 보니 조금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말일세. 슬슬 아리엘양도 깨어났을 테니, 자네도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야 그렇기는 하지만."

    왠지 지금 디아나가 미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야. 그냥 내 기분 탓인가?

    "어차피 이제 마법진으로 연결도 되어 있으니,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만날 수 있지 않은가. 금방 또 보게 될 걸세."

    날 다독여주듯이 내 입술에 가볍게 키스를 해주고 나서, 디아나는 텔레포트 마법진 쪽으로 돌아갔다.

    대체 뭐지? 그냥 마법 연구를 하러 가는 분위기는 절대 아닌데.

    디아나가 대체 무얼 하러 간 건지. 알게 된 건 그로부터 며칠 후였다.

    오늘도 평소처럼 땀내 풀풀 나는 아저씨들과 회의라는 이름의 눈싸움을 하고 온 나는 곧장 방 안 침대에 다이빙했다.

    "흐아아아! 죽겠다."

    "후훗. 오늘도 고생하셨어요."

    "그러게 말이야. 진짜 어울리지도 않게 이게 무슨 짓이람."

    레이가 바프라의 여왕이 되고 나서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를 드디어 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나 같은 자유인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란 말이지.

    "그나저나 줄리안은?"

    침대에 대자로 누워서 고개만 들어 방안을 둘러보니, 줄리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테이블에 앉아서 ‘내가 생각한 최강의 기술’ 같은 망상이나 끄적이고 있을 텐데.

    "시험해 볼 게 있다면서 나가셨어요."

    "시험이라니……혹시 그 망상 기술?"

    "그런 말 하시면 안 돼요. 줄리안 씨가 들으면 슬퍼하실 거예요."

    "미안미안."

    줄리안도 참 어지간하다니까. 중2병을 그냥 망상에서 그치지 않고 몸으로 직접 실현해 볼 생각까지 하다니.

    게다가 정말로 실현 가능성이 있다는 게 더 무서웠다. 아직 레벨은 낮지만 걔도 일단은 용사니까.

    뭐, 아무튼 지금은 그런 것보다.

    "줄리안이 없다는 건, 여기엔 우리 둘밖에 없다는 거네?"

    나와의 섹스 이후 브레디와 마찬가지로 내 충실한 수하가 된 아리엘은 여전히 알버트 곁에서 나와의 중간다리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브레디도 여전히 아리엘의 호위 겸 알버트의 감시를 맡는 중.

    즉, 줄리안이 없는 지금 여기에 있는 건 나와 레이아 둘뿐이라는 얘기가 된다.

    "네. 그러니까 제대로 누워주세요."

    내가 침대 위에서 몸을 뒤집으며 말하자, 레이아도 쿡쿡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해 줬다.

    분위기를 잡기도 전에 눕힐 생각부터 하다니. 레이아. 혹시 요즘 좀 욕구 불만이었어? 이상하다. 분명 밤마다 제대로 해줬는데.

    "그런 게 아니에요. 귀, 파드릴게요."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손을 움켜쥐고 있더라니, 귀이개 들고 있는 거였어?

    "후훗. 실은 조금 전에 줄리안 씨께도 했거든요. 나일 씨도 하게 해주세요."

    레이아가 나한테 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레이아한테 하게 해주는 거야?

    뭐, 확실히 레이아가 저런 걸 좋아하기는 하지.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그럼 실례할게요."

    내가 다시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자, 레이아는 예쁜 눈웃음과 함께 침대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꿇어앉은 자신의 허벅지에 부드럽게 내 머리를 얹더니, 고개를 숙여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아프면 말해주세요."

    귀를 간질이는 숨결부터 머리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까지. 모든 것이 훌륭했다.

    게다가 이런 걸 좋아하는 레이아답게 귀 파는 솜씨도 그런 전문점을 차려도 성공할 만큼 훌륭해서, 통증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하아아……."

    "후훗. 안 돼요. 그런 소리 내시면. 누가 들어오면 어쩌시려고요?"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오자, 레이아가 쿡쿡 웃으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야 이런 모습 보이면 지금까지 쌓아온 나일의 이미지가 한 방에 깨지겠지만 말이야, 그런 소리 내지 말라면서 귓가에 그렇게 숨결 불어 넣는 건 반칙 아니야?

    "후우우……."

    "으하아……."

    "후훗. 또 이상한 소리."

    아니. 진짜 반칙이라니까. 그거. 게다가 이번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숨만 불어넣지 않았어?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지 말라는 소리는 절대 아니지만.

    전 괜찮으니 마음 내키시는 대로 원 없이 해주셔도 됩니다.

    "괜찮아. 어차피 아무도 안 봐. 이 방에 누가 들어온다고."

    이 성에 있는 고위 관료들은 모두 카이젤과의 혈투를 직접 눈으로 본 놈들이다.

    다시 말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게 아닌 이상 내 방에 함부로 쳐들어올 인간은 없다는 얘기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그러겠어?

    "흐응. 엄청 한가해 보이네?"

    그래. 저런 식으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또라이가 세상에 있을 리가…….

    "사라!? 아야!"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났지만, 귀에서 느껴진 엄청난 통증에 나는 다시 레이아의 허벅지에 얼굴을 처박았다.

    "꺅!? 괘,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 바보야!? 빨리 누워서 치료받아!"

    그러고도 일단 괜찮은 척해 봤지만 그런 허세가 통할 리도 없었고, 나는 결국 레이아의 무릎베개를 베고 얌전히 치료나 받게 됐다.

    "진짜 호들갑은."

    "호들갑이라니. 사라 네가 갑자기 들어오니까 그런 거 아니야. 대체 무슨 일이야? 연락도 없이."

    "……뭐, 그냥."

    아니. 사라야. 억지로 쿨한 표정으로 대충 얼버무릴 생각인가 본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한테는 안 통하거든?

    "미안하구먼. 사라 양이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다고 해서 말일세."

    "디아나!"

    사라의 뒤쪽 허공에서 스르르 모습을 드러낸 디아나. 사라는 그런 디아나에게 원망의 눈초리를 보냈지만, 디아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받아넘겼다.

    "낭군님이 다쳤는데 이유 정도는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으읏……."

    "흐음. 호오. 과연과연. 사라는 오랜만에 만나는 서방님이 깜짝 놀라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 연락도 없이 날 찾아왔던 거였군. 이렇게 귀엽고 깜찍할 수가. 이 오빠는 사라 얼굴만 봐도 흐뭇한 미소가 멈추질 않네."

    "시, 시끄러워. 조용히 안 해?"

    일단 본인이 잘못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내가 대놓고 놀려대도 사라는 새빨개진 얼굴로 노려보기만 할 뿐 그 이상 뭔가 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뭐, 아마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한 대 맞겠지만.

    "그래서, 둘 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내 얼굴 보고 싶어서?"

    "흥. 안 됐지만 틀렸어."

    "이 몸은 낭군님 얼굴이 보고 싶어서 왔네."

    새초롬하게 대답하는 사라와 달리, 디아나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그렇게 말했다.

    저 녀석, 평소에는 저런 말 잘 하지도 않는 주제에. 꼭 사라가 있을 때만 저렇게 경쟁의식을 보인다니까.

    물론 디아나의 저런 태도에 사라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디아나! 아까부터 치사하게 계속 그럴 거예요?! 사람이 기껏 도와줬더니!"

    "이 몸을 위해 도운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도 디아나가 부탁한 거잖아요!"

    "이 몸도 대의를 위해 자네에게 부탁한 것 아닌가. 그렇게 시야가 좁다니. 사라 양도 아직 어리구먼."

    "그야 3천 살인 디아나가 보면 누구든 어려 보이겠죠!"

    "누, 누가 3천 살이라는 겐가!"

    "그만! 그만!"

    가만히 내버려두면 내 방에서 용사 vs 대마법사라는 최악의 대전이 일어날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둘 사이에 끼어들어 가 말렸다.

    진짜 얘들은 보면 볼수록 사이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니까.

    ‘후훗. 구원 씨 앞에서만 괜히 저러시는 거예요. 저희끼리 있을 때는 얼마나 사이가 좋으신데요.’ 라고 언젠가 레이아한테 들은 적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디아나. 괜히 도발하지 마. 그리고 사라 너도."

    "난 왜!?"

    "거짓말했잖아. 사실은 내 얼굴 보고 싶어서 따라온 거 아니야?"

    "……시, 시끄러워. 바보야."

    "오빠는?"

    이 분위기라면 가능해!

    그렇게 생각했지만, 사라로서는 여기에서 오빠라는 말까지 붙여주는 건 괜히 지는 것 같아서 분했던 모양이다.

    사라는 황급히 디아나를 다그치며 말을 돌리려고 했다.

    "……디아나! 설명이나 하죠!"

    "어쩔 수 없구먼."

    디아나는 그걸 또 받아주고. 아까는 치고받고 싸우기 직전까지 갔으면서 이럴 때는 또 도와주네. 알다가도 모를 콤비야.

    "설명이라니?"

    "음. 전에 말했던 이반에 관한 얘기일세."

    "이반? 아아. 그……그 사람이 왜?"

    그러고 보니 디아나, 전에 그 사람 얘기하다가 갑자기 생각난 게 있다는 듯 황급히 돌아갔었지.

    "아무래도 이반은 사무엘의 동료였을 가능성이 높지 않은가?"

    "그렇겠지. 7계층에 도달한 모험가 파티가 그렇게 많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드니까."

    게다가 6계층에서 7계층으로 가는 문을 열기 위한 암호 해독에는 반드시 이방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사라네 할아버지와 알버트의 아버지가 모험가 동료였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

    "그리고 사무엘은 용사 리리안을 데리고 지상으로 돌아감으로써 여신님의 사명을 훌륭히 달성했네."

    "응. 그랬지. 그게 왜?"

    "이상하지 않은가? 여신님의 사명을 끝마쳤는데도, 어째서인지 이반은 같이 지상으로 돌아가지 않은 걸세."

    "……그러고 보니."

    처음 들을 때는 그냥 ‘피렌체 사람이랑 사랑에 빠져서 남았나 보다.’ 하고 넘어갔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일이다.

    사랑에 빠졌더라도, 그냥 그 사람도 같이 위로 데리고 가면 그만이잖아? 사라네 할아버지가 사라네 할머니를 데려간 것처럼.

    "그래서 이 몸은 생각했네. 어쩌면 이반은 할 일이 있음을 깨닫고 이 땅에 남은 걸지도 모르겠다고."

    "할 일이라니?"

    "이전에 여신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가? 이 몸들이 오기 전에는 여신님조차도 7계층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셨다고 하셨지. 그래서 여신님께서는 용사만 지상으로 데려오면 전쟁신의 힘이 약해질 거라 판단하셨고, 그래서 자네 이전의 이방인들에게는 그런 사명을 내리셨다고도 하셨지."

    "응. 기억해."

    "즉, 이반은 깨달은 걸세. 어쩌면 사무엘이 여신님의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더라도, 여신님의 생각처럼 전쟁신의 힘이 약해지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일세."

    "……에이.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비약이 심한 거 아니야?"

    만약 진짜로 전쟁신의 힘이 약해지지 않을 걸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고작 마법사 한명이 남아서 뭘 할 수 있겠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디아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닐세."

    "근거가 있다고?"

    "며칠 전에 본, 이반의 자식이 쓴 마법일세."

    "알버트의 바람 마법?"

    "음. 그 아이의 마법은 순수한 바람 계통 마법이 아니었네. 부유 마법의 술식도 가미되어 있더구먼."

    "응. 그때 그렇게 말했지. 그게 왜?"

    "부유 마법이라고 하면 언뜻 바람을 다루는 것과 같은 계통의 마법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공간을 다루는 계통의 마법일세. 즉, 전혀 다른 계통의 마법을 섞었다는 말일세. 자네도 알겠지만, 마법사들은 보통 한 계통의 마법만 연구하지 않는가?"

    "응."

    뭐, 여러 계통의 마법을 익히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지만, 보통은 학파끼리 사이가 안 좋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이반은 바람을 다루는 학파에서도 부학파장급의 인재라고 했으니, 다른 계통의 마법을 깊게 익히기는 쉽지 않았을 거다.

    "이상하게 생각한 이 몸은 위로 올라가서 이반이 사라졌을 당시의 자료를 마법사 협회에서 조사해 봤네."

    아, 그래서 그때 그렇게 서둘러서 돌아간 거였구나? 역시 그냥 마법 연구하러 간 게 아니었어.

    "그랬더니 이반이 사라진 시기와 절묘하게 맞물려 공간 마법과 변환 마법에 관한 연구 자료들의 도난 사건이 있었더구먼."

    "공간 마법과……변환 마법?"

    "음. 그것도 마나 변환에 관한 연구 자료였네."

    "마나 변환이라니……혹시 텔레포트 마법진에 같이 달려 있는 그거?"

    "음. 슬슬 이 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해하겠는가?"

    "대충은."

    이곳 던전의 대기에 흐르는 마나는 전부 마신의 마나다.

    즉, 마나로 변환기를 통해 이곳의 마나를 여신님의 마나로 변환만 해도, 전쟁신의 힘은 약해지는 거다. 이론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자네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는 아네. 확실히 현실성이 없는 생각이지."

    여신님이 괜히 모험가들을 시켜서 던전의 몬스터를 잡게 하고, 그 부산물을 위로 가져가서 사용하게 하는 게 아니다.

    그것도 목적은 결국 마신의 마나를 여신님의 것으로 바꾸는 것.

    마나 변환기가 효율이 더 좋았으면 진작에 여신님이 몬스터 잡는 건 때려치우고 마나 변환기나 많이 만들라고 시켰겠지. 하지만 여신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던전의 자기 수복 능력 때문이라네."

    던전은 기본적으로 지금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벽을 뚫고 가는 것도 바닥을 뚫고 가는 것도 기본적으로 불가능. 그렇게 가려고 해봤자 본인만 던전의 벽에 파묻혀서 질식사할 뿐이다.

    "그런 성질은 지형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닐세. 대기 역시도 마찬가지라네. 그래서 마나 변환기를 설치해도 기껏해야 텔레포트 마법진을 발동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 한계. 대기에는 크게 영향을 줄 수 없지. 4계층의 마을처럼 주변에 마나 방벽을 쳐서 구역을 한정하고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을 최소한으로 억누르면 그 한정된 공간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할 수 있네만, 그런 것을 던전 전역에 설치하려면 나라 전체를 팔아도 돈을 전부 충당할 수 없을 걸세."

    그런 거구나.

    너무 복잡해서 완벽하게 이해는 못 하겠지만, 그래도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아.

    그러니까 마나 변환기로……응? 잠깐만. 그런데 그럼 뭔가 이상하지 않아?

    "음. 자네도 깨달은 모양이구먼."

    내 의문스러운 표정을 보고, 디아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 말대로 던전의 대기마저 자기 수복 능력이 있어서 여신님의 마나를 지우려고 든다면, 내가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발동할 때마다 마나 변환기만 끄고 여신님의 마나를 다 소모할 필요도 없었다는 얘기가 되니까.

    생각해보니 이상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구미호 마을을 생각해 보라고. 구미호 마을은 4계층처럼 마나 장벽 같은 걸 펼쳐놓은 것도 아니잖아? 그냥 커다란 텔레포트 마법진 하나 설치해놓은 것뿐인데, 성녀인 마틸다조차도 멀쩡할 정도로 대기 중의 마나가 전부 여신님의 마나가 되어 버렸다.

    물론 그 마을은 전부터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으니, 그게 던전의 자기 수복 능력을 차단하고 여신님의 마나를 잡아뒀다는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만.

    "자네 생각이 맞네. 어째서인지 이 7계층만큼은 자기 수복 능력이 없네. 그랬다면 사람들이 도시를 만들고 지하 수도를 뚫으며 생활하지도 못했을 걸세."

    "응? 그렇다면……."

    "음. 마나 변환을 이용한 정화가 가능하다는 말일세. 아마 이반도 그 사실을 눈치챈 것이겠지."

    뭐야. 잠깐만.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한 고생은 대체 뭐였던 거야?

    전쟁을 없애고 사람들을 교화시키고 할 것 없이, 그냥 마나 변환기만 전세계에 깔아놓으면 전쟁신이 부활할 일은 없다는 거야?

    "걱정하지 말게. 마나 변환이 가능하다고는 하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정도로 간단한 문제일 리 없지 않은가. 일단 이 7계층 전체의 마나를 변환하려면 대체 어느 정도 규모의 마나 변환기가 필요할지. 하나를 만든다면 웬만한 성, 아니. 도시보다도 큰 마나 변환기가 필요하네. 아니면 작은 마나 변환기를 수없이 많이 만들어 각지에 꼼꼼하게 깔아야 하네만, 어느 쪽이든 실현 불가능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하긴. 일단 마나 변환기를 만드는 돈만 하더라도 천문학적인 액수가 들 거다.

    눈앞에 있는 대마법사님부터 해서 고위 귀족의 딸, 교황의 손녀, 길드장의 딸, 공주님, 최강 모험가 클랜의 간부, 거기에 여왕님까지.

    내 여자 중에서도 잘사는, 아니. 그냥 잘산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여자들이 많지만, 걔들이 가진 돈 전부를 끌어모아도 아마 그 정도 마나 변환기를 마련하는 건 불가능하지 않을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디아나가 전 세계의 마법사들을 결집해서 마나 변환기만 만들게 하는 거지만……자신의 손으로 직접 마법사 협회를 학파별로 쪼개고 본인은 협회를 빠져나온 디아나다. 이제 와서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지.

    그리고 만약 그런 마나 변환기를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전부 해결되는 건 아니다.

    마나 변환기가 7계층의 모든 마나를 변환할 때까지, 이 세계에 있는 마신의 신봉자 전원이 마나 변환기를 부수려고 달려들 테니까.

    이 세계에 있는 마신의 신봉자라고는 했지만, 바꿔 말하면 7계층에 사는 모든 인간이다.

    공통의 적 앞에서 3국의 대립 관계 같은 건 무의미. 그야말로 전세계 사람들이 마나 변환기를 파괴하기 위해 합심하겠지.

    그렇게 되면 아무리 우리가 강해도 마나 변환기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니. 내가 디아나나 사라랑 섹스하면서 원거리 공격만 난사하면……."

    "구원……욕구 불만이야? 레이아가 잘 안 해줬어?"

    "제, 제대로 했다고……생각하는데요……그랬나요?"

    "아, 아니! 그런 거 아니거든!? 레이어는 잘 해줬……사라 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차라리 평소처럼 "바보 아니야!?" 라면서 매도를 해줘! 그렇게 불쌍한 사람 보는 눈으로 쳐다보지 말고!

    "먼저 이상한 말 한 건 구원이잖아."

    "무슨 소리. 나는 어디까지나 그 상황에 최적화된 합리적인 전투법을……."

    "만약 그런 상황이 와도 이 몸은 절대 안 할 걸세."

    "하긴. 디아나는 좀……그렇지? 응. 디아나는 어쩔 수 없지."

    "그게 무슨 뜻인가아!?"

    난 그냥 긍정해 준 것뿐인데, 디아나는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무슨 뜻이냐니. 몰라서 물어? 원거리 공격만 한다고 해도,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사람들 시선을 다 피할 순 없을 거 아니야. 뭐, 그런 거야.

    "뭐가 그런 겐가아!"

    "아무튼 디아나가 안 되면 역시 사라밖에……."

    "나도 안 해줄 거거든?"

    "쳇."

    "야. 구원. 너 지금 혀 찼지?"

    "아, 안 찼는데. 그리고 오빠한테 너라니!"

    "말 돌리지 마, 변태야!"

    "사라 양 말이 맞네! 이상한 소리 하는 자네가 문제일세. 진지하게 듣게!"

    얘들이 또 치사하게 협공을! 아까는 둘이 그렇게 으르렁대면서 싸우더니! 꼭 나한테만 그래! 나 삐졌어! 레이아랑 놀 거야!

    "어머……."

    "아앗! 레이아! 또 치사하게!"

    "레이아양! 이런 때까지 어리광을 받아주면 안 되네! 어서 그 가슴으로 튕겨내게!"

    내가 레이아의 품 안에 안기자, 사라와 디아나가 또 무시무시한 눈으로 날 노려보며 레이아를 다그쳤다.

    근데 디아나야. 넌 대체 레이아 가슴을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저기, 구원 씨……?"

    곤란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리며 미소 짓는 천사님의 모습에, 나는 마지못해 그 가슴에서 떨어졌다.

    "훗. 하는 수 없지. 이 이상 우리 천사님을 곤경에 빠트릴 순 없으니."

    "뭘 잘난 듯 말하는 거야. 방금까지 어린애처럼 가슴에 매달려 있었으면서."

    "훗. 남자는 몇 살을 먹든 어린애라는 거야."

    "자기 입으로 말하지 말게."

    사라와 디아나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되기는 했지만, 뭐, 분위기 환기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아니. 어차피 실현 가능성 없는 얘기를 하는 거니, 그냥 우리는 우리 계획대로 하면 그만이잖아? 그런데 괜히 분위기만 너무 진지해지는 것 같아서 장난 좀 쳐 본 거야. 진짜로.

    섹스하면서 싸운다니. 누가 진지하게 그런 생각을 하겠어?

    "그래서, 결국 결론이 뭐야? 이반이 여기 남은 이유를 알아냈다. 그게 끝?"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이반이라는 사람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없는데.

    뭐, 사라는 존경하는 할아버지의 동료로서, 디아나는 그래도 안면 정도는 있던 후배 마법사로서 관심이 가겠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중요한 얘기는 지금부터라네. 이반도 실력 있는 마법사. 방금 자네가 생각한 문제점들을 깨닫지 못했을 리 없네. 하지만 이반은 그럼에도 해결책을 생각해냈네."

    "응? 무슨 말이야? 해결책을 생각해냈다고?"

    "생각해 보게. 바프라의 칼데라 호수. 그곳에서는 지속적으로 여신님의 마나가 검출되지 않았는가?"

    "아, 그러고 보니."

    대체 원인이 뭔지 언젠가 규명하겠다고 생각만 한 다음 까맣게 잊고 있었어.

    그럼 설마 사라가 도와줬다는 게.

    "그래. 호수 밑바닥을 샅샅이 뒤진 끝에 발견했어. 이반이라는 남자가 남긴 유산."

    "마나 변환기였어?"

    "변환기라는 표현은 조금 부적절하구먼. 거대한 마법진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걸세."

    "마법진이라. 하지만 거대해 봤자 호수 크기가 한계 아니야?"

    아까도 나왔던 얘기지만, 이 세계 전체를 물들이려면 적어도 도시 하나 규모의 마나 변환기가 필요하다.

    심지어 그것도 온갖 재료를 쏟아 부어 만들어진 마나 변환기일 때의 얘기고, 단순한 마법진이면 효율은 더 떨어지겠지.

    확실히 그 호수가 넓기는 했지만, 그 정도 크기의 마법진으로는 도저히…….

    "지하수로가 있지 않은가."

    "뭐?"

    "호수 밑바닥부터 지하수로까지 그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마법진이었네."

    "……그게 말이 돼?"

    "안 될 게 무엇이겠는가? 레이양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 수로는 통일 전쟁 후에 들끓는 몬스터를 처리하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지 않은가."

    그건 나도 들은 적 있는 얘기였다. 신이었는지 유리였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수로를 통과할 때 얘기해 줬었지.

    "이 몸이 직접 가보니 수만 많을 뿐 몬스터의 레벨 자체는 썩 높지 않더구먼. 7계층에 도달할 정도의 실력이라면 문제없이 돌아다니며 구조를 뜯어고칠 수 있었을 걸세."

    생각해 보니 그렇군. 막연하게 부학파장 급 실력의 마법사라고만 생각했는데, 7계층까지 왔을 정도면 실력을 숨기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잖아?

    "호수 밑바닥에서 생성된 여신님의 마나가 마법진 모양의 수로를 타고 돌면서 점점 더 마법진의 힘을 증폭시킨 걸세. 이반도 머리를 제법 잘 썼구먼."

    "감탈 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응? 잠깐만. 근데 그 마법진, 제대로 기동 안 되지 않았어?"

    "이 몸이 창관 지하에 여신님의 마나를 가둬두지 않았는가. 그래서 기동을 안 하고 있는 걸세."

    "창관이 지어지기 전에는?"

    "음? 자네가 마나 먹는 몬스터를 해치웠다고 들었네만."

    아……그러고 보니 그런 적이. 아니. 잠깐만. 그거 성자 스킬 아니면 못 잡을 것 같아서 내가 대충 지어낸 말이었는데?

    설마 진짜로 그놈이 수로에 마나가 통하지 않게 막고 있었던 거였어!? 어쩐지 크기가 이상할 정도로 크더라니.

    "그러면 창관 지하에서 여신님의 마나를 가둬두지만 않으면……."

    "아니. 그 마법진은 하나로 완성되는 마법진이 아니었네."

    "무슨 말이야?"

    "그 자체로도 바프라의 수도 근처의 마나는 전부 변환 가능하겠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세. 그 마법진은 멀리 떨어진 마법진들과 합쳐졌을 때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마법진. 모양을 보아하니 비슷한 마법진이 앞으로 두 개 더 있을 걸세. 아마도 그 위치는 바로……이곳쯤. 그리고 이곳쯤에 있을 것 같구먼."

    디아나는 아공간에서 뒤적뒤적 지도를 하나 꺼내더니, 각각 비스와 플리투스의 영역을 콕콕 손가락으로 짚었다.

    "이 지도는?"

    "내가 그렸어."

    "……일단 묻겠는데, 어떻게?"

    "보고."

    "……."

    아니. 그야 여긴 하늘 저편에 땅이 보이는 곳이니까, 눈만 좋으면 그냥 높이 올라가서 눈으로만 보고 지도를 그리는 것도 가능하기는 해. 가능하기는 하지만, 진짜 사기 아니야?

    뭐, 좋아. 덕분에 편해졌으니까.

    "잠깐만 기다려 봐. 확인해 볼게."

    나는 사라가 그린 지도에서 디아나가 손가락으로 짚은 장소와, 내 맵 화면을 비교해가면서 위치를 확인해 봤다.

    "비스에 있는 건……역시 피렌체의 영지로군."

    뭐, 이건 예상 대로라고 할까, 너무 뻔한 결과였다.

    하지만 피렌체에서는 딱히 여신님의 마나를 느낀 적이 없는데, 일부러 발동 안 시키고 있었던 건가?

    "그리고 플리투스는……수도에서 미묘하게 떨어진 곳이네. 디아나. 위치 확실해?"

    "이 몸도 다른 곳까지 전부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니 확실하지는 않네만, 마법진을 만들기에 가장 적절한 위치는 이곳이 맞네."

    "흐음."

    그렇다는 얘기는 직접 플리투스에 가서 확인해 봐야 한다는 얘긴가.

    뭐, 피렌체 쪽도 일단 가서 확인해 봐야 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좋아. 둘 다 여기에 얼마나 있을 수 있어?"

    아마 디아나는 괜찮겠지만, 사라는 바프라에서 하던 일도 있지 않아?

    "괜찮아. 어차피 며칠 전부터 디아나를 돕느라 쉬고 있었어."

    그런가. 하긴. 바프라는 이제 상당히 안정된 모양이니, 딱히 사라가 없더라도 알아서 잘 굴러가겠지.

    "알겠어. 그럼 일단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 내일부터 나도 움직일 수 있게 손을 써둘게. 같이 돌아다니면서 확인해 보자."

    "구원도?"

    "그래. 어차피 제대로 길을 아는 건 나밖에 없잖아? 그리고 적지에 둘만 보는 것도 걱정되고. 아예 레이아까지 제대로 파티 짜서 같이 움직이자."

    뭐, 눈으로 직접 보고 지도까지 그린 사라다. 솔직히 말해서 길 안내 같은 건 전혀 필요 없겠지만.

    게다가 이 둘이라면 돌아다니다가 해를 입을 걱정도 없으니까 말이야. 용사랑 대마법사라니. 오히려 내가 끼는 게 방해일 수준의 사기 파티잖아.

    하지만 오랜만에 얘들이랑 움직일 기회가 생긴 거다. 이런 기회를 손쉽게 놔줄 수는 없지.

    "좋아."

    "알겠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사라도 디아나도 나랑 똑같은 거겠지. 둘은 은근슬쩍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크으으. 오랜만에 이 넷이서 움직인다니. 왠지 설렌다."

    "바보. 소풍 가는 어린애도 아니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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