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291화
"훗, 약한 놈의 이름 따위 일일이 기억하지 않는 성격이라서."
일단 변명을 덧붙여 봤지만, 주변의 시선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 아까까지 중2병에 흠뻑 빠져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바라보던 줄리안마저도 ‘성자…지금 변명은 너무 추했어.’ 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보고 있고.
제, 젠장. 기껏 지금까지 쌓아 올린 나일의 이미지가 이렇게 무너지다니. 망할 얼음땡. 용서할 수 없다.
"그나저나 카이젤과 라반이라니. 이것 참 의외의 이름이 등장했군요."
그리고 그 썰렁해진 분위기에서 날 구해 준 건, 의외로 알버트였다.
이런다고 내가 고마워할 거라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 하나도 안 고맙거든?
"그분께 원망 살 일을 한 기억은 없습니다만…아리엘. 혹시 짐작 가는 일 있습니까?"
"아, 아뇨. 저도 전혀!"
이런 대화에 끼는 것조차 송구하다는 듯, 아리엘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말했다.
알버트가 이런 자리에 동석시킬 정도니까 쟤도 어느 정도 지위는 있는 녀석일 텐데, 너무 저자세인 거 아니야?
뭐, 초면에 무릎까지 꿇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거 곤란하군요. 이유를 모르는 채 적시되는 것만큼 불편한 일도 없는데 말이죠."
"카이젤이 암살자를 썼다는 건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군."
턱에 손을 가져다 대고 중얼거리는 알버트에게, 나는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였던 점을 지적했다.
"네?"
"정정당당을 신조로 삼는 비스에서 그 수장이 암수를 썼다고 말한 거다. 원래라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일 텐데, 넌 상당히 쉽게 받아들이는군."
"아아…그런 말이었군요."
"어째서지?"
"흠. 어째서라…. 그분은 필요하다면 그런 짓도 서슴없이 할 것 같으니까. 라고 밖에 할 말이 없군요."
"비스의 수장이란 놈이 원래부터 그런 이미지였다고?"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의견이지만요. 다른 분들께는 비밀입니다. 들키면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요. 아니. 생각해 보니 벌써 당했군요."
그러니까 하나도 안 웃긴 말 하면서 웃지 말라고. 또 아리엘이 어디에 장단 맞춰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어색하게 웃고 있잖아.
"하지만 아무리 그분이라도, 제가 마음속에서만 하던 생각을 읽고 암수를 보냈으리라 생각하긴 힘들군요. 나일님은 혹시 짐작 가시는 일이 있으신지?"
"그래."
"역시 그렇겠…지금 있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고 했다. 자기가 물어봐 놓고 놀라지 마라."
"이거 죄송합니다. 설마 정말로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혹시 이 며칠 피렌체에 오시지 않은 것도?"
뭐야? 내가 네놈 주변의 정보 수집을 하느라 늦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럴 리가 없잖아.
그야 나일이 근처에 도착했다는 소문이 돌고 며칠 동안 방문이 없었으니 마음대로 착각은 할 수 있겠지만 말이야.
"상당히 자기 자신을 고평가하고 있는 모양이군. 네놈에게 그 정도 가치는 없다."
"…이거 또 한 방 먹었군요. 그럼 이유를 들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간단하다. 놈의 표적은 나다."
이걸 말해 줘도 될지 아주 잠깐 고민하기는 했지만, 결국 나는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말해주기로 했다.
이 녀석은 처음부터 카이젤이라는 놈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던 모양이고, 심지어 이젠 암습까지 당했으니까 말이야.
내게 도움이 됐으면 됐지, 카이젤과 내통해서 손해를 끼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한 거다.
"즉, 암습을 피해 숨어 계셨다고?"
"그런 연기를 했지."
"…하시는 말씀의 의미를 이해하기 힘들군요."
"카이젤의 밑에 있는 암살자는 놈 하나가 아니다. 상당한 규모의 암살단을 조직하고 있었지. 그리고 최근 비스 곳곳을 누비는 내 행보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놈은 내게 그 암살단을 보냈다. 물론 전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해줬지. 하지만 놈은 포기하지 않더군. 점점 더 많은 수의 암살자를 보냈고, 결국 놈들은 전멸했다. 암살단의 대장인 놈과 비장의 카드만을 남겨놓고."
"혹시, 또 이름 기억 못 하시는 겁니까? 아까부터 라반 씨를 놈놈…."
"아무래도 네놈은 네놈이 어째서 습격당했는지,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모양이군."
다시 한번 말해두지만, 기억 못 하는 게 아니야. 안 하는 거지.
"이거 실례했습니다. 입을 다물고 있도록 하죠."
"흥. 아무튼 놈은 마지막으로 비장의 카드를 보냈다. 하지만 그런 때조차도 본인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더군. 그래서 난 놈을 붙잡기 위해, 연기를 하기로 했다."
"연기라 하심은?"
"비장의 카드에 당한 연기다. 내가 약해진 척을 하면 놈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모습을 드러낼 테니까."
"그렇군요. 하지만 나일 님의 그 연기가 어떻게 제가 암습당한 것과 이어지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그야 그렇겠지. 얘기는 끝까지 들어.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이렇게 닦달하는 걸 보면 역시나 신경은 쓰이는 모양이군.
"내 연기가 너무 출중했던 거다."
놈이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기에, 나는 조금 더 놈이 안달 나게 해주기로 했다.
어때? 답답해서 속이 꽉 막히지?
"물론 나일님의 연기 실력을 의심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연기가 완벽했다면 라반 씨는 나일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했지 않습니까?"
"놈이 보낸 암수에 당하고 치명상을 입은 연기를 한 거다. 당당하게 남들 눈에 띄는 길로 다녔을 거라 생각하나?"
"…아아. 설마."
거기까지 말해주자 드디어 알버트도 겨우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는 듯, 허망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내 너무 출중한 연기에 놈은 내가 있는 장소를 특정해내지 못했다. 암살자라는 놈이 위치 추적도 제대로 못 하다니. 무능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지."
"이거 귀가 따가운 얘기로군요. 그 무능한 사람에게 당한 입장으로서는 말이죠."
"그러니까 아까 말한 거다. 네놈에게 그 정도 가치는 없다고."
"거듭 귀가 따가운 얘기 감사합니다."
일단 이 녀석도 비스 사람인만큼 내 말투가 상당히 자존심 상할 텐데, 놈은 지금 그런 게 문제가 아니라는 듯 허망하게 실소를 흘렸다.
"그나저나 설마 그런 이유로 습격당했을 줄이야…."
"저기…알버트 님? 무슨 말씀이신지…?"
"아리엘에게는 조금 어려운 얘기였나요? 이런 것이랍니다. 나일 님의 위치를 특정해내지 못한 라반 씨는, 나일 님을 함정에 빠뜨릴 새로운 계책을 생각해낸 겁니다. 절 습격하고, 습격자가 나일 님이라는 소문을 퍼뜨리는 거죠. 그렇다면 피렌체의 군대가 움직여 숨어 있는 나일 님의 위치를 찾아내 줄 테니까요. 만약 군대가 찾아내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언젠가 나일 님이 회복을 마치면 피렌체에 오게 될 테고, 그때는 저와의 결투가 아닌 피렌체의 군대 전체를 상대하게 될 테니까요. 아무리 나일 님이라도 피렌체의 군대 전체와 붙으면 몸이 성하지는 않을 거라는 계산이겠지요."
역시. 다시 한번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은 다른 비스놈들과 조금 다른 타입의 인간이군.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알아.
"그, 그렇다면…."
"네. 즉, 전 무슨 원망을 받고 습격당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나일 님을 처리하기 위해 이용되었을 뿐이지요. 하핫. 설마 피렌체 가주의 목숨을 그런 식으로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아니. 이렇게 보면 이 녀석도 비스 인간은 비스 인간이로군.
안에서 피가 새어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떠는 알버트의 모습에, 나는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비스 인간답지 않은 녀석이라 얘기를 다 듣고도 카이젤한테 별 감정이 안 생기면 어쩌나 살짝 걱정했는데, 역시 괜한 걱정이었군.
하긴. 자기 일도 아니고 그냥 다른 사람 일 때문에 자기 목숨을 이용당했는데, 그게 화가 안 나면 사람이 아니지.
귀찮은 걸 참고 사정 설명을 다 해준 보람이 있었어.
"나일 님."
"뭐냐."
"나일 님의 성격에 이렇게까지 자세하게 말씀해주셨다는 것은, 제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겠지요? 어느 쪽에 붙을지 지금 결정하라고."
머리에 피가 몰렸어도 판단력은 죽지 않았다는 듯, 알버트는 비스 사람다운 살기 넘치는 미소와 함께 날 바라봤다.
"별로."
"좋습니다. 그럼…네?"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라. 라반 따위에게 당한 네놈에게 그 정도 가치는 없다. 네놈 따위가 내 편으로 붙든 안 붙든 내가 신경이라도 쓸 것 같나? 물론 카이젤의 편에 붙어서 날 적대하겠다면 용서 없이 짓밟아주겠지만."
"하, 하지만 나일 님! 나일 님께서는 장차 비스의 수장이 되실…!"
주군의 체면이 짓밟히는 걸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는지 아리엘도 나서서 자기 주군의 유용성을 어필하려 했지만, 나는 그마저도 냉소와 함께 무시했다.
"착각하지 마라. 난 비스의 수장 자리 따위에 관심 없다."
"네? 하, 하지만 전에는…."
"수장이 될 거라고 했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이다. 내가 관심 있는 건 강자와의 싸움뿐이다. 그리고 그 강자에는 카이젤 역시도 포함되지. 비스의 수장과 싸울 순 있는 건 수장결정일 단 하루뿐. 그리고 그날 내가 이기면 난 비스의 수장이 된다. 수장 자리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말이지. 단지 그뿐인 얘기다."
‘그게 말이야 방구야!?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아리엘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눈으로 날 쳐다봤지만, 나는 표정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고 쿨하게 무시했다.
나일이라는 캐릭터랑 그만큼 대화해 봤으면, 슬슬 성격 파악할 때도 되지 않았냐?
"하지만 그 이후는 어떨까요?"
아리엘은 더 대화할 의욕을 완전히 잃어버린 모양이었지만, 알버트는 아직 나와 대화하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뭐?"
"나일 님께서 카이젤을 꺾는다면 그 이후 비스 안에서는 더 상대할 강자가 없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더라도 비스의 수장과 비스의 인간이 싸울 수 있는 날은 일 년에 단 하루뿐. 아무도 나일님과 싸우려고 하지 않겠죠. 그렇다면 남은 건 타국의 강자에게 눈을 돌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스의 수장 자리에서 지지기반을 든든하게 마련해둘 필요가 있겠지요. 수장까지 직접 참여하게 된다면, 아무래도 지금껏 없던 규모의 전쟁이 될 테니까요."
"그런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킬 때, 네놈이 힘이 되어줄 수 있다고?"
"이래 봬도 제법 인기가 있다고 자부하는 몸입니다. 하늘의 기사라는 부끄러운 별명도 있을 정도니까요. 물론 최근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나일님의 인기에 비할 바는 아니겠습니다만, 곁에 두시면 분명 발목을 잡지는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바로 그게 내가 원하던 대답이었어. 이런 데서 또 든든한 조력자를 얻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사고 쳐줘서 고맙다 얼음땡.
"그래서, 네놈이 내게 원하는 것은?"
"네?"
"시치미 떼지 마라. 무조건 날 따르겠다는 얘기가 아닐 텐데?"
"역시 날카로우시군요. 대단하십니다."
"아부는 됐으니까 본론을 말해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우선, 증거를 원합니다."
아부라는 말은 부정 안 하는 거냐. 진짜 성격 마음에 안 드는 녀석이야.
뭐, 앞으로의 계획에 도움 될 것 같으니까 봐주겠지만 말이야.
"증거?"
"네. 나일님께서 해주신 말은, 확실히 전부 앞뒤가 맞고 그럴듯합니다. 다만 아무래도 현 비스의 수장을 의심하는 일이니까요."
"카이젤은 그럴만한 놈이라고, 네놈 입으로 직접 말했을 텐데?"
"그것마저도 심증에 지나지 않습니다."
놈에게 반기를 들고 날 따르기 위해서는 조금 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는 건가.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라, 아직 날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거겠지.
하지만 증거라고 해도 말이지…이거면 되려나?
"브레디."
"넷! 주군!"
내가 이름을 부르자, 지금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브레디가 허공에서 스르르 모습을 드러내며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 누, 누구냐!?"
"…이건."
당연히 알버트의 호위 역할로 남아 있던 아리엘은 기겁하면서 검을 빼 들었고, 알버트 역시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눈을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뜨며 놀랍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개하지. 아까 말했던 놈이 보낸 암살단의 비장의 카드. 브레디다."
"적이 보낸 자객을 굴복시킨 겁니까?"
"그래. 멍청하게도 여자를 보냈더군."
"여자를…? 그렇군요. 본래는 무성별자였던 여자입니까. 제법 머리를 썼군요. 먼저 자기가 굴복시킨 여자라면 다른 이에게 넘어갈 일이 없으리라는 계산입니까."
"그렇겠지. 의미 없는 짓이었지만."
"과연. 나일 님이 그런 여자를 어떻게 굴복시키셨는지도 신경 쓰입니다만…그전에, 이자가 정말로 라반 씨가 보낸 자객인지 증명할 방법은 있습니까?"
"직접 싸워본 네놈이라면 알 텐데? 놈이 쓰는 기술과 이 여자가 쓰는 기술이 같다는 것쯤은."
"그러고 보니 라반 씨도 지금처럼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었죠. 흠."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알버트는 턱에 손을 가져다댄 채 브레디를 빤히 관찰했다.
"이걸 보고도 아직 못 믿겠다는 건가?"
"죄송합니다. 이런 위치에 있게 되면, 아무래도 의심이 많아져서 말이지요."
뭐, 이해 못 할 건 아니다. 아마 나도 놈과 같은 입장이었다면 선뜻 믿지 못했을 테니까.
브레디가 암살자와 같은 기술을 쓰는 것이 암살자의 정체가 얼음땡이라는 증거는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암살자가 브레디일 가능성마저 있다.
만약 전부 나일이 꾸민 짓이라면? 일단 브레디를 암살자로 보내고, 나중에 나타나서 치료해주며 구원자 행세를 한 거다. 자신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런 연극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알버트는 아마 그런 생각을 하는 거겠지.
"잠시 검을 맞대보아도 괜찮겠습니까?"
잠시 고민한 끝에 알버트가 내린 결론은, 결국 이거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녀석도 비스 인간이라는 거지. 직접 싸워보면 상대의 실력도 파악할 수 있고, 그 암살자와 동일인물인지도 판별 가능하다는 건가.
"그 몸으로?"
"네. 나일 님 덕분에 독 기운은 완전히 사라졌으니까요. 치료 기술이 좋으시군요."
"훗. 치료인가. 난 그저 독을 죽였을 뿐이다."
"독을 죽인다…과연. 그런 발상도 가능하군요."
내 대답이 제법 신선했는지, 알버트는 크게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 중2병틱한 대답에서 깨달음을 얻어도 곤란한데 말이야.
차라리 저기에 있는 줄리안처럼 반짝이 눈으로…아니다. 줄리안이 저러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사내새끼가 저런 눈으로 보면 진짜 때리고 싶겠다.
"아무튼 제 몸은 문제없습니다. 아직 체력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상대의 실력을 알아볼 정도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럼 장소를…."
"아니요. 이 자리에서 바로 부탁합니다. 습격당한 장소도 이곳이었으니까요."
아니. 어차피 실력만 알아보는 거니까 굳이 환경까지 똑같을 필요 없잖아? 너 그냥 빨리 싸우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지?
"…브레디."
내가 턱짓으로 명령하자, 브레디는 곧바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힘 조절은 필요 없습니다. 전력으로 부탁합니다."
그리고 알버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브레디의 몸이 연기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전력으로 해도 괜찮을지 몰라. 브레디 쟤 저래 봬도 상당히 강한 편인데.
애초에 줄리안의 수호 기사 출신에, 줄리안 대신 비스마르크의 후손 행세를 하고도 들키지 않았던 녀석이다. 게다가 비스의 비수로 선택받아 카이젤의 호위까지 했고, 종국에는 암살단의 최종 병기로 활용되기까지.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저 녀석도 참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단 말이지. 그리고 그 모든 건 실력이 뒷받침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실제로 애널라이즈를 써 보니, 브레디의 레벨은 알버트와 거의 비슷했다.
물론 알버트가 살짝 더 높기는 했지만, 알버트가 유력 가문 피렌체의 가주이자 하늘의 기사라는 이름으로 명성이 자자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수준인 거지.
뭐, 그래 봤자 둘 다 우물 안 개구리지만.
아무튼 연기처럼 사라졌던 브레디는, 갑자기 알버트의 코앞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무시무시한 기세로 주먹을 내뻗었다.
마치 등 뒤로 호랑이가 보이는 것 같은…아니. 환각이 아니라 진짜 보이잖아!? 줄리안의 흑룡도 그렇고 이 녀석도 그렇고, 하나같이 왜 이렇게 기술들이 멋있어!?
"크윽…권각술입니까. 단검술은?"
"그런 거 안 써."
"…아무래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군요."
만약 실력을 숨기기 위해 주먹을 쓰는 거라면, 이 실력은 말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한 건지, 알버트는 검을 고쳐 잡으며 진지한 눈으로 브레디를 쏘아봤다.
"그럼 이번엔 제 쪽에서 가겠습니다."
아니. 얘기 들어보니까 그 얼음땡은 단검술을 쓴 모양인데, 그럼 이제 알아볼 거 다 알아본 거 아니야? 뭘 더 하려고?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브레디도 더 싸우는 것에 이견은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싸움은, 실력이 비슷해서 그런지 좀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치 춤추는 것처럼 유려한 알버트의 검술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가 하면서 맹렬한 일격을 날리는 브레디의 권각술. 전혀 다른 전투 스타일을 가진 둘이었지만, 그게 또 은근히 잘 어울렸다. 둘이 합을 맞추고 댄스를 추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보여도, 결국 둘이 하고 있는 건 싸움이다.
그것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과열되기 시작해서, 이제는 거의 서로의 목숨까지 앗을 기세로 살벌하게 싸우고 있었다.
"그만. 거기까지다."
이 이상 내버려 두면 진짜 큰일 나겠군. 아예 본래 목적도 잊고 싸우는 데만 집중하고 있잖아. 그나마 실력이 엇비슷한 만큼 아직까지 둘 다 크게 다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그것도 시간문제겠지.
그렇게 판단한 나는 나지막한 명령으로 싸움을 멈췄다.
"윽!?"
그러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는 듯, 브레디는 뒤로 크게 점프해서 내 뒤로 안착했다.
평소의 4차원 같은 성격 생각해 보면 진짜 말 지지리도 안 들을 것 같은데, 막상 명령하면 꼬박꼬박 잘도 듣는단 말이야. 참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야.
"아직입니다."
아무튼 브레디는 그렇게 내 명령을 듣자마자 싸움을 멈췄지만, 알버트는 아직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격렬한 싸움으로 몸이 달아올랐는지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고서는 이글이글 거리는 눈으로 브레디를 바라보면서, 알버트는 한 걸음 다가왔다.
"아직 싸움은…."
"그 정도 검을 맞대봤으면 이 녀석의 정체가 네놈을 습격한 암살자가 맞는지 아닌지 정도는 알았을 텐데? 아니면 네놈은 그 정도도 파악 못 하는 머저리인가?"
"지금 말 다 했습니까!?"
아까까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젠틀한 척했던 녀석이 싸움 좀 했다고 갑자기 이렇게 되다니.
물론 비스의 인간이니 기본적으로 싸움을 좋아하기도 하겠지만, 그걸 고려해도 너무 과하게 변했어.
이건 역시 마신의 영향이라고 봐야겠지.
"…아무래도 몸 상태는 완벽히 회복된 모양이군. 좋다. 밖으로 나와라."
"자,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밖으로는 왜 나가십니까!?"
나도 알버트에게 지지 않고 살기등등하게 말하자, 아까부터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아리엘이 황급히 내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하늘의 기사라고 칭해질 정도다. 천장 없는 곳에서 싸워야 본 실력이 나올 텐데?"
성문에서 봤던 비병들이나 그 기사처럼, 아마 알버트도 날개가 튀어나오는 게 아닐까? 종족도 그리포니안이라고 되어 있고.
알버트의 레벨이 조금 더 높은데도 브레디와 전투가 호각이었던 건, 아마 장소의 영향도 있겠지.
"그, 그건 그렇지만…!"
"아리엘. 그만하면 됐습니다. 나일 님. 조금 전의 무례를 사과드리죠."
내 기세를 보고 위축된 건지, 아니면 아리엘의 필사적인 모습을 보고 흥이 식은 건지, 알버트는 어느샌가 차분한 얼굴로 돌아와서 내게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필요 없다. 회복이 끝났다면 나와 싸워라."
"아뇨. 아직 나일 님을 상대할 정도는 아닙니다."
"겁먹은 건가?"
"네. 당신과는 최상의 컨디션으로 붙어도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으니까요."
"쯧."
도발성 멘트도 이렇게 웃으면서 받아들여 버리면, 나로서는 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혀를 차며 문에서 멀어지자, 알버트는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겉으로는 여유로워 보여도, 일단 긴장을 하기는 했다는 건가.
"하지만 모르겠군요."
"또 뭐가 말이냐."
"당신은 자신의 실력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고, 제게 큰 가치가 없다고도 했습니다. 어차피 싸워봤자 자신이 이길 거라고 확신하고 계실 텐데, 어째서 저와 그렇게까지 싸우고자 하시는 건지요?"
지금까지의 내 말과 모순된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야 그렇겠지. 사실 내가 컨셉 살린다고 되는대로 막말하다 보니까, 가끔 나일이라는 캐릭터에 설정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거든. 진짜 연기라는 게 참 어려운 거야.
하지만 그럴 때 필요한 게 바로 말발이라는 거다. 지금 같이 모순을 지적당해도.
"그렇게라도 희망을 갖지 않으면 살맛이 안 나기 때문이다."
"…네? 살맛이요?"
"그래. 어차피 이 세계에 나보다 강한 놈은 없다. 내가 최강이다. 그런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하면 웬만한 싸움에는 흥조차 생기지 않는다. 너도 같은 신을 모시는 사람이라면 알 텐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싸움에서 오는 흥분이다. 피가 끓는 고양감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기분을 맛본 지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됐다. 그래서 실낱같은 희망에 기대어 찾고 있는 거다. 네놈같이 약한 놈이라도 일단은 유서 깊은 가문의 가주. 대대로 내려오는 성명절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겠지. 그리고 그런 성명절기는 때때로 사용하는 놈의 실력 이상의 위력을 내기도 한다. 그런 기술을 눈앞에서 보게 되면, 나도 싸움의 고양감을 다시 느끼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
훗. 봤냐? 이게 바로 말발로만 바프라 전체를 구워삶은 인간의 이빨 털기라는 거다.
"…그렇군요. 저로서는 인간이 그렇게까지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만…그러고 보니 그런 소문이 있었지요. 나일 님은 대결할 때 언제나 상대방이 최강의 기술을 사용할 때까지 기다린 후, 똑같은 방법으로 돌려줘서 이긴다는 소문이. 소문이 건너오면서 허황되게 부풀어진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만, 설마 그것도 전부 사실인 겁니까?"
이것 봐. 이 녀석도 완벽하게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끄덕이고 있잖아. 이래서 사람은 일단 말을 잘하고 봐야 한다니까.
"당장 싸울 생각이 아니라면 내 얘기는 더 할 생각 없다. 그보다 슬슬 네놈의 결론을 말해라."
아무리 내가 말발이 좋아서 웬만한 건 커버할 수 있다고 해도, 계속 내 얘기만 하다 보면 컨셉이 흔들릴 수도 있거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얘기를 돌리기로 했다.
"네? 아, 그렇군요. 브레디 님이라고 했던가요? 확실히 절 습격한 암살자와는 은신 기술만 같을 뿐, 다른 분인 것 같습니다."
"그럼 다음 조건을 말해라."
"네? 다음 조건?"
"아까 조건을 말하면서 우선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아아. 의외로 사람 말을 꼼꼼히 잘 듣는 타입이시군요."
이 자식 말투는 아무리 들어도 칭찬하는 건지 비꼬는 건지 알 수가 없네.
진짜 나중에 결투할 때 두고 보자. 내가 원래 웬만하면 결투에서 사람 다치게 안 하는데, 넌 좀 다쳐도 될 것 같아.
"네놈과 농담 따먹기를 할 생각은 없다."
"농담이라니. 어디까지나 칭찬이었습니다만…뭐, 좋습니다. 아무튼 그러면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다른 조건은 없다는 건가?"
"네. 원래는 있었습니다만, 얘기를 들어보니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지 않군요. 후일 나일 님과 직접 겨뤄보고 판단하도록 하겠습니다."
과연. 어차피 내 진짜 실력을 확인하면, 내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알 수 있다는 건가. 정말로 내가 스스로 말한 것처럼 강하다면, 괜히 뒷공작을 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그동안은 이곳을 집처럼 생각하고 편하게 머물러 주십시오. 어째 됐든 나일 님은 제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알버트가 그렇게 인사하고 아리엘에게 눈짓하자, 아리엘은 한시라도 빨리 나와 알버트를 떼어놓고 싶은지 서둘러서 우리를 접대용 방으로 안내했다.
뭐, 그래 봤자 며칠 후면 싸우게 될 테지만 말이야.
***
"피렌체 최종 오의! 솔라 플레어 토네이도 커트허아억!"
길어 새끼야.
공중에 높이 떠올라 태양을 등져서 시야를 멀게 하고, 그사이에 빠르게 활강해 내려와 온몸을 난도질하는 기술.
날개를 이용한 3차원적인 자유로운 움직임에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바람의 힘을 더해 더욱 속도를 붙여 사방팔방을 난자하는 그 기술은, 그야말로 필살기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기술이었다.
아깝지 않은 기술이었지만, 적어도 내 앞에서 바람은 쓰면 안 되는 거 아니냐? 며칠 전에 비병대가 어떻게 당했는지 들었을 거 아니야?
알버트가 조종하는 바람을 살짝 다른 방향으로 틀어주자, 놈은 그대로 날개가 꺾이면서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아마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알버트 혼자 난리 치다가 혼자 자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뭐가 토네이도 커터냐. 기왕 바람을 조종할 거면…."
나는 바람의 힘을 이용해 쓰러진 알버트의 몸을 공중으로 들어 올린 다음, 바람의 칼날을 만들어 놈의 온몸을 난도질했다.
"아, 알버트니이이임!"
야. 거기 관중석! 괜히 사람 가슴 아프게 비통한 비명 지르지 말아 줄래? 괜찮아. 이 정도로 안 죽어. 그냥 살짝 아프게만 해주는 거야.
"네 이노옴! 감히 알버트 님을!"
심지어 비명만 지르는 건 그나마 양반이었다.
전에 봤던 성문의 기사를 필두로 몇 명은, 날개를 꺼내 펼치더니 직접 우리가 있는 곳으로 날아오려고까지 했으니까.
"쯧."
뭐, 내가 살기를 내뿜자마자 날아오던 기세 그대로 땅에 추락했지만.
지금까지 대결을 상당히 많이 해봤지만, 이런 적은 또 처음이네. 보통 아무리 싸움이 격해져도 난입은 없었는데 말이야.
뭐, 이번에는 상처가 전부 자상인 만큼 피도 많이 흘러서, 보기에 많이 안 좋기는 했지만.
"원망하지 마라. 네놈들이 더럽히려던 주인의 명예를 대신 지켜준 거니."
나는 바닥에 추락한 놈들에게 그렇게 말해준 다음, 다시 알버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허억…바, 바람을 이런 식으로…!"
정작 알버트 본인은 자기가 아픈 것도 잊고는 새로운 깨달음에 눈을 뜬 표정으로 저런 말이나 중얼거리고 있는데 말이야.
…좀 더 아프게 할 걸 그랬나.
"졌습니다. 소문 이상의 실력이시군요."
"벌써 끝인가. 다른 성명절기는?"
"그렇게 몇 개씩이나 있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가."
"네. 그러니까 대결은 여기서 끝내기로 하죠. 이 이상은 제 몸이 버틸 것 같지도 않고요."
온몸에서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건지, 알버트는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까지 떨었다.
역시 좀 더 아프게 해줄 걸 그랬나.
"이걸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당신은 뒤에서 몰래 일을 꾸밀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난번에 해주셨던 얘기, 전부 믿겠습니다."
"그런가."
"네. 이걸로 당신과 제 목적은 일치하게 되는군요. 카이젤의 목을 칠 때까지, 저도 미력하나마 힘을 보태겠습니다."
딱히 내 목적은 카이젤의 목이 아닌데 말이야.
뭐, 계획을 실행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그렇게 될 확률이 농후하기는 하지만.
"딱히 네놈 힘 따위는 필요 없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필요로 하지 않더라도 멋대로 돕겠습니다. 저도 그런 취급을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마음대로 해라."
"네.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나일 님. 제가 힘을 보태는 건 어디까지나 카이젤의 목을 치고 나일 님께서 수장의 자리에 오를 때까지입니다. 암살범의 정보를 주신 대가로는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요. 만약 지난번에 말했던 그 이후의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 쪽에서도 하나만 더 조건이 있습니다."
그 이후의 도움…내가 직접 전선에 나서는 대규모 군사 작전 때에 힘을 보태는 것 말이로군.
확실히 저 녀석이 내 말에 힘을 실어주면 도움은 될 거다. 제법 인망 있는 모양이니까.
하지만 말이야. 고작 그거 해주는 것치고는 조건이 너무 많은 거 아니냐?
"그런가."
나는 그렇게만 대답하고, 몸을 돌려서 그대로 그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그러자 오히려 마음이 급해진 알버트가 황급히 날 붙잡았다.
"자, 잠깐 기다리십시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네놈에게 볼일은 끝났다."
설마 내가 며칠 동안 기다려줬다고 해서, 네놈의 도움이 간절한 입장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난 어디까지나 네놈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기다린 것뿐이야. 최상의 컨디션인 네놈과 대결을 하기 위해서 말이지.
그런 의미를 담아서 딱 잘라 말하고는, 나는 다시 뚜벅뚜벅 걸음을 옮겼다.
"기다려주십시오! 간단한 겁니다! 그리 어려운 조건이 아닙니다! 질문 하나만 대답해주신다면 이 알버트 피렌체, 나일 님께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그래. 나한테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그렇게 네놈이 매달리란 말이다. 감히 어디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까불어.
"몇 번이나 말하게 하지 마라. 네놈에게 그 정도 가치는 없다."
"기, 기다…! 바람을! 당신에게 바람을 다루는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대체 누구입니까!?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운 겁니까!? 그 사람은 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내가 무시하고 가려고 하자, 알버트는 절뚝거리는 몸을 황급히 움직여서 내 앞을 막으며 외쳤다.
…질문 한 개라고 하지 않았냐? 엄청 많잖아.
뭐, 대답 하나로 전부 해결되는 질문이지만 말이야.
"네놈들이 보여줬을 텐데."
어디까지나 네 충성을 원해서가 아니라, 질문이 하도 어이없어서 대답해 준다는 말투로, 나는 가볍게 한숨까지 섞으며 말해 줬다.
"네? 저희가 보여…? 네…?"
내 대답이 이해 안 되는 건지, 아니. 이 경우에는 이해는 했지만 믿고 싶지 않은 건가.
알버트는 미지의 괴물을 보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입술을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아까 그렇게 맞을 때도 표정만큼은 안 변하던 녀석이 이런 표정이라니. 제법 보기 좋군.
"그, 그럼 당신은 조금 전에 처음으로 바람을…? 그것도 제가 하는 걸 보고 따라 했다는…?"
"당연하지. 그런 걸 여기 말고 또 어디서 본다는 거지? 소문은 들었을 텐데? 내가 언제나 상대의 특기로 대결을 끝낸다는 것쯤은. 설마 내가 그 모든 가문의 성명절기를 누군가에게 미리 배우고 와서 싸웠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보, 보자마자 따라 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됩니다!"
맞아. 그건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런데 알면 뭐해? 사기 치면 결국 속을 거잖아?
"그건 네놈의 편협한 상식이다. 이렇게 내가 직접 하고 있으니까."
"그, 그건…."
훗. 괴물같이 센 놈이 직접 이렇게 말하니까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부정 못 하겠지? 그렇게 말문이 막힌 시점에서 네가 진 거야. 포기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이상 더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남자답지 않겠지요. 이 알버트 피렌체 앞으로 나일 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러니 잠시만 이곳에서 더 머물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영주로서 떠나기 전에 정리할 것이…."
"떠, 떠나다니요! 안 됩니다!"
알버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중석에 있던 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오며 알버트의 앞에 무릎 꿇었다.
"주군께서 떠나신다면 남겨진 저희는 뭐가 되는 겁니까!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미안하군요. 모두. 하지만 남자가 한 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법. 전 이미 마음을 굳혔습니다. 나일 님을 모시며 더욱 강한 남자가 되겠다고."
"저희 모두 이렇게 무릎 꿇어 부탁합니다! 제발! 제발 다시 생각해주십시오!"
"모두들…."
얘들은 왜 또 갑자기 시답잖은 신파극을 시작하는 거지?
아니. 너희끼리 신파극을 하는 건 딱히 상관없지만 말이야.
"난 데려가 주겠다고 한 적 없다."
"네!?"
그러니까 왜 그렇게 놀라? 상식적으로 너같이 땀내 나는 사내새끼를 데려갈 리가 없잖아? 내가 그 망할 영감을 어떻게 떼어냈는데.
게다가 얼음땡이 뭔가 액션을 보이면 다시 부르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벌써 전서구까지 보냈단 말이다.
지금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그 영감탱이한테 잡히게 생겼는데, 며칠 더 기다려달라고? 그것도 널 데리고 가기 위해서?
"네놈 마음대로 하라고는 했지만, 같이 데리고 다녀준다는 말은 한 적 없다. 걸리적거리는 놈은 데려가지 않는다."
"그렇…습니까…."
응? 뭐야? 의외로 포기가 빠르네? 분명 좀 더 매달릴 줄 알았는데.
"확실히 이런 몸으로 따라가 봤자 걸림돌만 되겠지요. 우선은 치료부터 하라는 것이군요. 알겠습니다. 지금은 포기하겠습니다."
아니. 딱히 상처가 문제라는 게 아닌데 말이야.
뭐, 포기만 해준다면 어떻게 생각하든 내가 신경 쓸 일 아니지.
"알았으면 됐다."
나는 무정하게 말하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서 그대로 피렌체에서 멀어졌다.
뒤에서 털썩하고 누군가 쓰러지는 소리와 "알버트니이이임!" 같은 비명이 들렸지만, 내 발걸음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게 왜 그렇게 무리를 하고 그러냐. 피까지 철철 흘리면서.
"으아아아! 드디어 연기 안 해도 되겠다! 진짜 피곤해 죽는 줄 알았네."
피렌체에서 벗어나자마자, 나는 기지개를 쫙 켜며 외쳤다.
나일 연기도 가끔 하면 재미있기는 하지만, 역시 사람은 꾸밈없이 편하게 지내는 게 제일이야.
"후훗. 고생하셨어요. 많이 피곤하시죠? 전혀 다른 성격인걸요."
내가 투덜거리는 모습이 귀엽다는 듯, 레이아는 내 등 뒤로 다가와서 어깨를 조물조물 만져주며 속삭였다.
성녀님이 손에 신성력까지 두르고 해주는 어깨 안마라니. 이보다 더 사치스러운 일이 있을까? 굳이 아쉬운 점을 꼽자면, 천사님이 남장 중이라는 점뿐이었다.
남장만 아니었으면 등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까지 더해져서 진짜 완벽했을 텐데.
"그러게 말이야. 계속 이렇게 지내면 진짜 이중인격이라도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어머, 그거 큰일이네요."
"역시 레이아도 나일 같은 성격이랑은 같이 있기 싫지?"
"으응…싫다기보다는…원래 성격이 더 좋아요."
진짜 우리 천사님은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잘하실까.
배시시 웃으면서 속삭여주는 그 목소리는, 온몸에 쌓였던 피로를 한 번에 날려주는 효과가 있었다.
"나, 난 나일도 좋은데! 멋있잖아!"
…줄리안아. 그 성격 파탄자가 멋있게 느껴지는 건 세상에 너 하나뿐 아닐까?
그러고 보니 아까 알버트랑 내가 대화할 때도 왠지 눈을 빛내고 있었지.
중2병이라고 해서 성격 더러운 걸 좋아하는 건 아닐 텐데, 대체 나일의 어디가 그렇게 중2병의 심리를 자극한 건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줄리안. 틀렸어. 그럴 때는 둘 다 멋있다고 해야지."
그리고 브레디. 넌 명령도 없었는데 은근슬쩍 나타나지 마라.
심지어 자기도 나한테 눈총을 받을 거리 생각했는지, 말하자마자 다시 사라져 버리고.
"그런 거 말하면…아. 성자."
브레디의 은신을 간파할 수 있는 줄리안은 브레디의 모습이 사라져도 아랑곳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가려고 했지만, 도중에 뭔가를 눈치챈 듯 내 소매를 잡아당겼다.
"응?"
"누군가 미행하고 있어."
"으응?"
줄리안의 말을 듣고 확인해 보니, 확실히 한참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우리가 지나왔던 길을 그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다만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미행…인가?"
일단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그 움직임이 너무 어설퍼서 도저히 전문 은신 훈련을 받은 사람처럼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 느낌은….
"저거 아리엘 아니야?"
"응? 아아…듣고 보니 그럴지도. 응. 맞는 것 같아."
확실치 않아서 줄리안에게 물어보니, 줄리안도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렇군. 그렇다는 얘기는 즉.
"그 자식이 보낸 건가."
"하지만 합류하려는 것 같지는 않은데?"
"걸리적거리는 놈은 안 받아준다고 했으니까. 아리엘이 알버트보다 강할 리도 없으니, 당연히 안 받아줄 거라고 생각하고 조용히 우리 뒤만 쫓아오는 거겠지."
"뭐하러?"
"뻔하지 않겠어? 그 자식, 몸이 다 나으면 합류할 생각인 거야."
영감탱이도 그렇고 그 자식도 그렇고, 왜 그렇게 여기 놈들은 나랑 같이 다니고 싶어 하는 거지? 내가 생각하기에도 싸가지 밥 말아 먹은 것처럼 행동하고 다녔는데 말이야.
…혹시 그 자식들, M…그, 그러고 보니 비스는 동성애가…아, 아니겠지?
"아무튼 계속 저렇게 따라다니면 귀찮아질 거야. 여기에서 더 추적을 못 하도록 아예…."
"어? 싸우는데?"
흔적을 지우고 사라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줄리안이 걸음을 멈추고는 아리엘이 있는 저편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걔도 일단 피렌체의 기사잖아. 알아서 하겠지."
"밀리는 것 같은데?"
"땅에서 싸워서 그래. 슬쩍 보니까 걔도 알버트랑 똑같이 그리포니안이던데. 질 것 같으면 알아서 날개 꺼내고 싸울 거야. 너도 전에 봤으니까 알잖아? 피렌체 놈들은 날개 꺼냈을 때랑 안 꺼냈을 때 전투력이 천지차이거든."
"아, 진짜다. 날았…추락했다."
"아오! 진짜!"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지!? 실력이 없으면 나서지를 말든가!
아니. 애초에 알버트 그 자식은 왜 하필 저런 녀석한테 미행을 맡긴 거야!?
"…브레디. 가서 도와주고 와. 굳이 모습을 드러낼 필요는 없어. 그냥 조용히 처리만 하고 돌아와."
"네. 주군."
"괜히 싸우다가 흥분하지 않게 조심하고. 만약 흥분해서 돌아오면 혼내줄 거다."
"네. 마음속 깊이 명심하겠습니다."
…저 녀석, 지금 살짝 두근거리는 표정 짓지 않았어? 괘, 괜찮겠지? 저래 봬도 시킨 일은 성실하게 해내는 성격이니까.
"빨리 가서 도와주고 와. 저러다가 다치겠다."
대체 누구랑 싸우길래 피렌체의 기사라는 녀석이 1대1로 붙어서 지고 있는 건지.
한숨과 함께 손을 휘휘 내젓자, 브레디는 가볍게 목례하고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기껏해야 3분이나 지났을까? 브레디는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나 빨리 돌아오다니. 싸우는 시간보다 왕복하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린 거 아니야?
"오냐. 누구랑 싸우고 있었어?"
"미노타우르스입니다."
"…몬스터? 그 소머리 달린?"
"네."
"……."
아니. 확실히 제법 레벨이 높은 몬스터인 건 맞아.
특히 이곳 7계층은 몬스터 레벨이 좀 제멋대로인 경향이 있으니, 유독 레벨이 높은 미노타우르스였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기사라는 녀석이 자기 영지 근처에 있는 몬스터도 1대1로 못 이겨? 심지어 지상 몬스터 상대로 날개까지 꺼내고도?
저 실력으로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무성별자를 유지하고 있는 거지?
"…가자."
뭔가 이것저것 엄청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나는 곧 생각을 그만뒀다.
그래. 내가 그런 거 알아서 뭐하겠어. 괜히 얽혀봤자 귀찮기만 하지.
"성자."
"……그래. 나도 알아."
이렇게 아리엘에게 위기 상황이 찾아온 게 벌써 몇 번째일까?
이제는 일과처럼 되어버린 트러블 상황에, 내 입에서는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어찌 보면 저것도 재능이야. 우리가 이렇게 앞에서 주변 몬스터를 쓸고 가고 있는데, 어떻게 뒤따라오는 녀석이 저렇게 매 순간 위기에 처하지?
그러면서도 임무를 포기하지 않는 근성 하나만큼은 인정할만하지만 말이야.
"이번에도 내가 가도 돼?"
"그래. 알고 있겠지만 조심하고."
"응!"
하도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우리는 이제 이 상황을 이용할 생각까지 하게 됐다. 바로 줄리안의 부족한 용사 레벨을 올릴 기회로 말이다.
사실 어차피 우리도 이동하면서 몬스터를 만나고 있으니, 아리엘을 도와서 더 싸운다고 획기적으로 레벨 업에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생각 안 하면 괜히 억울하잖아.
"대체 언제쯤 포기하려나."
"어차피 도움이 올 걸 아니까 버티는 것이 아닐까요?"
시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튀어나오지 마라, 이것아. 그 의견 자체는 타당하지만 말이야.
우리가 매번 이렇게 도와주니까 쟤도 안심하고 계속 따라오는 면도 없잖아 있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 도와줄 수도 없잖아?
"내버려두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봤잖아."
나라고 내버려두고 갈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당연히 해봤고, 심지어 실행에도 옮겨봤다.
하지만 그 결과, 아리엘은 몬스터에게 강간할 뻔했다. 자기를 여자로 만든 남자한테 평생 복종하는 비스의 무성별자가 몬스터한테 당할 뻔했다는 얘기다.
가까스로 당하기 직전에 구해줬기에 망정이지, 만약 조금만 더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지……괜히 죄책감 들어서 잠자리 엄청 뒤숭숭했을 거야.
애초에 여긴 전쟁신의 세계인데 왜 몬스터 따위가 강간을 시도하는 거야? 보통 싸움에 미쳐서 바로 죽여야 정상 아니야?
아니. 뭐, 그랬다가는 우리가 구해주기 전에 아리엘이 죽었을 테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말이야.
"저자도 무성별자라면 당할 각오는 하고 있을 겁니다. 상대가 설령 남자가 아닌 수컷일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넌 자기도 무성별자였다가 카이젤 같은 놈한테 당했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한다."
심지어 카이젤의 명령과 친구의 목숨 둘 중 하나도 포기 못 해서 자결까지 하려고 했던 주제에.
"무슨 속셈이야?"
"속셈이라니요?"
"시치미 떼지 마. 지금 나한테 솔직히 대답 못하겠다는 거야?"
확실히 이 녀석은 4차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감능력이 결여된 사이코는 아니다.
자기도 과거에 그런 고통을 겪었으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녀석은 아니라는 거지.
"누구에게 당하든 그 또한 운명입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마음에도 없는 기분 나쁜 수컷에게 당하더라도, 운이 좋으면 지나가던 멋진 남성이 구해줄 수도……."
"결국 그게 목적이었냐."
한마디로 이 녀석은 아리엘도 자기처럼 되게 유도하려 했다는 얘기다.
하긴. 내가 생각하기에도 내 성격에 아리엘이 몬스터한테 당해서 몬스터를 따르는 모습을 보면, 불쌍해서라도 내가 아리엘을 복종시켜서 데리고 다닐 것 같기는 해.
"지금보다는 훨씬 상황이 간단하게 정리되는 것이?"
"나도 알아. 그래도 안 해. 애초에 그렇게 해결할 거면 몬스터한테 당하기 전에 그냥 내가 여자로 만드는 게 간편하잖아. 넌 내가 그 정도도 모르는 바보 같아?"
"실례했습니다."
이 녀석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전에도 내가 각지를 돌며 모든 여자를 굴복시키는 게 가장 빠르고 간편하다는 얘기를 했었지.
진짜 얜 전쟁신 세계의 인간이면서 묘하게 생각하는 게 여신님이랑 비슷하다니까.
물론 가장 효율 좋은 방법을 생각하다 보니까 같은 결론에 도달한 것에 불과하겠지만 말이야.
"하아……브레디."
"네."
"넌 괜한 생각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시키는 것만 하면 돼.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이대로 내버려두면 언젠가 사고 한 번 거하게 칠 것 같아서, 나는 일단 그렇게 거듭 주의를 줬다.
물론 지금까지 내 명령에 불복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 크게 불안하지는 않지만.
"네. 이해했습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자길 굴복시킨 남자의 말에는 절대복종하는 게 비스 여자다.
브레디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는 인간은 아니라는 듯, 내 말에 얌전히 고개를 숙였다.
"다녀왔어!"
그리고 잠시 후. 아리엘을 구해주고 돌아온 줄리안은 왠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흥분하고 있었다.
"응. 왜 그렇게 기분 좋아 보여?"
평소에는 굳이 따지자면 기분 나빠져서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말이야.
마신의 영향을 억누른 채 적당히 싸우고 와야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용사 레벨 올랐더니 새로운 기술이 떠올랐어!"
내가 물어보길 기다렸다는 듯, 줄리안은 가슴 앞에 꽉 쥔 주먹을 위아래로 흔들면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외쳤다.
아……그런 거였어? 난 또 뭐라고.
"멋있는 기술이야?"
"보여줄까!?"
"아니."
"……그래."
야. 장난 좀 쳤다고 그렇게 시무룩해지지 마라. 아까까지 그렇게 기분 좋아 보이던 애가 순식간에 그렇게 변하니까 괜히 더 미안해지잖아.
"그런 멋진 기술은 허공에 쓰면 기술한테 미안하지. 나중에 몬스터 나오면 보여줘."
"그, 그렇지! 역시 성자야! 뭘 좀 아네!"
풀어지긴 또 금방 풀어져요. 애도 아니고. 하긴. 저 나이 먹고 중2병인 시점에서……아, 아니. 저런 점이 줄리안의 매력이지. 응.
"아무튼 또 레벨이 올랐을 정도면 좀 강한 놈이었나 봐? 너 용사 레벨 오른 지 얼마 안 됐잖아?"
"응. 왠지 이상할 정도로 강한 호랑이였어. 나도 용사가 되지 않았다면 위험했을지도 몰라. 역시 용사의 힘이란 굉장해!"
줄리안조차도 용사의 힘이 없었으면 위험했을 몬스터라니. 그 정도면 6계층의 초월체급은 된다는 뜻이잖아? 여기엔 그런 몬스터도 굴러다닌단 말이야?
"어디 안 다쳤어?"
"괜찮아! 멍 좀 들은 것 빼고는 아무……!"
"어디에? 보여줘."
"어, 어?"
"왜?"
"어, 엉덩인데……."
대낮부터 밖에서 바지를 까는 건 부끄럽다는 듯, 줄리안은 두 손으로 엉덩이 쪽을 가리고 우물쭈물 거렸다.
뭘 어떻게 싸우면 다른데도 아니고 엉덩이에 멍이 들어? 이 녀석 설마…….
"너 다 이겨놓고 멋있는 척한다고 이상한 기술 쓰다가 다친 거지?"
"히끅……아, 아닌데?"
"아니기는 이것아. 거짓말할 거면 적어도 내 눈은 똑바로 보고 말해라. 아니. 너 새로 생각해냈다는 기술. 그거 지금 여기에서 써봐."
"아, 아, 아, 안 돼! 그런 멋진 기술은 허공에 쓰면 기술한테 미안해!"
"흐으으음……."
"서, 성자가 해준 말이잖아!"
무척이나 의심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래. 봐줬다. 이제 와서 내가 한 말을 무를 수도 없으니까.
어차피 나중에 또 몬스터 만나면 자기가 신나서 먼저 쓰겠지. 그때 보고 판단해주겠어.
"뭐, 좋아. 그럼 레이아."
"네. 줄리안씨. 조금 만질게요."
"어? 아, 아니……이건 건 어차피……으으응……하읏……."
레이아가 손에 신성력을 두르고 줄리안의 엉덩이를 바지 위로 쓰다듬자, 줄리안은 곧바로 허벅지 안쪽을 비벼대면서 뜨거운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으읏……하아……조, 조금만 약하게에……."
바로 조금 전까지 치료를 거부하던 녀석이, 이제는 흥분할 때나 나오는 특유의 소프라노 보이스로 약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모습이라니.
말해두지만 레이아는 딱히 애무하는 것도 아니고, 손을 격렬하게 움직이는 건 더더욱 아니다.
다만 여신님의 신성력이라는 게 전쟁신 종족한테는 미약 같은 효과를 발휘하잖아?
줄리안의 경우 레벨이 높으니 어느 정도 내성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성녀님이 직접 쏴주는 고위급 힐링 마법에는 살짝 몸이 달아오르는 모양이었다.
이것 때문에 기껏 우리 파티의 최고 힐러를 데리고 다니고 있는데도 힐링 마법을 제대로 쓰질 못한단 말이지.
뒤에 따라오는 아리엘 같은 경우도 그렇고.
"그러고 보니 아리엘은 어땠어? 네가 고전한 몬스터 상대로 잠깐이지만 싸웠다는 거잖아? 괜찮았어?"
"응……조, 조금 다친 것 같았어……."
"날개 말고도?"
"온몸에……상처가……아으……레이아……거긴 아니야아……."
역시 그런가. 하긴. 그 정도 몬스터면 멀쩡할 때도 상대가 안 됐을 텐데, 지금 아리엘은 날 수도 없는 상태니까.
며칠 전에 우리 흔적을 놓쳤는지 하늘 높이 날아서 우리 위치를 탐색하려고 한 적이 있었거든.
그러다가 하필 공중에서 와이번이랑 맞닥뜨리는, 바람에 현재 아리엘은 한쪽 날개가 부러진 상태라는 얘기다.
저걸 레이아를 보내서 치료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내버려둘 수도 없고. 진짜 여러모로 골치 아픈 녀석이야.
브레디 말대로 그냥 확 여자로 만들어서 데리고 다는 게……아, 아니. 아니야.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것도 마신의 영향인가.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자식이야. 빨리 내 머릿속에서 나가!
"줄리안씨? 괜찮으세요?"
"흐아아……하아아아……."
마신이 들으면 억울해할만한 악담을 속으로 퍼붓고 있자니, 어느샌가 줄리안은 엉덩이만 위로 높게 치켜든 채 요염한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아, 맞다. 깜빡했다. 그러고 보니 얘는 레벨에 비해서 엄청 약한 편이었지.
정확히 말하자면 여신님의 마나에 약한 게 아니라, 그냥 쾌감에 약한 거지만.
사로잡힌 와중에도 ‘난 더러운 걸레신의 하수인 따위에게 절대 굴하지 않아!’ 같은 말이나 하면서 버티던 녀석이, 결국 역대 최고로 쾌감에 약한 용사가 되다니.
"괜찮냐?"
"괘, 괜차나아……."
말은 저렇게 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안 괜찮아 보였다.
물론 억지로 버티려면 버틸 수는 있을 거다. 이래 봬도 성자 스킬에 걸린 채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버티며 끈질기게 날 추적해왔을 정도로 정신력 하나는 끝내주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버티게 할 필요는 없지.
"오늘은 이쯤에서 야영 준비할까. 어차피 슬슬 해도 저물 시간이고."
"우으으……."
"그렇게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이쯤에서 쉴 생각이었으니까."
"그래요. 실은 나일씨도 일부러 저한테 부탁한 걸지도 몰라요."
줄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어 그렇게 말해주자, 레이아도 옆에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줄리안에게 그렇게 속삭여줬다.
"레이아. 그걸 말해주면 어떡해!?"
물론 줄리안이 유독 약하다는 걸 깜빡하고 부탁한 거였지만, 이렇게 말하는 게 줄리안의 마음이 편해질 테니까.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난 깜빡했다고 쳐도, 레이아는 왜 군말 없이 치료해준 거지? 설마 우리 천사님은 정말로 내가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시고……아니면 혹시…….
"어머, 죄송해요. 비밀이었나요?"
에이. 설마 우리 천사님이 그랬겠어? 그냥 천사님도 깜빡하신 거겠지. 저 미소를 보라고. 절대 속으로 뭔가를 꾸미는 사람의 미소가 아니야. 그냥 천사의 미소지.
"서, 성자아……."
"그래. 그래. 조금만 참아. 바로 텐트 설치하고 해결해줄 테니까."
"돕겠습니다."
나는 다시 은신을 풀고 튀어나온 브레디와 함께 텐트를 설치하려고 준비했다.
하지만 줄리안은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고는 힘겹게 손을 들어서 허공을 가리켰다.
"저기이……."
응? 저기라니? 뭘 가리키는 거야? 나무밖에 없잖아?
아니. 잠깐만. 저쪽은…….
한 박자 늦게 줄리안의 뜻을 이해하고 사도 의태를 사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리엘이 또다시 몬스터에게 습격 받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저 녀석, 혹시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가루 같은 거라고 뿌리고 다니는 게 아닐까? 게임에도 그런 거 있잖아. 노가다용 아이템.
그런 거라도 쓰는 게 아니면 설명이 안 돼. 어떻게 저렇게 운이 지지리도 안 좋을 수가 있지?
"……하아."
어쨌든 또 위기에 처한 모양이니 도와주기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