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228화 (1,195/1,205)
  •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227화

    …이 녀석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게 지금 이 타이밍에 할 말이야? 진짜 제대로 내 얘기 들은 거 맞아?

    젠장. 이래서 이 녀석은 이성으로 안 느껴지는 거라고. 무슨 여자가 머릿속에 든 생각이 그거밖에 없어!?

    "아, 아, 아니야!"

    허무함을 뛰어넘어서 진짜 별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손을 파닥파닥 거리면서 부정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중2병에게는 뭔가 다른 의도가 있었던 모양이다.

    맥락 없이 배틀마스터가 되고 싶다고 한 말에 대체 무슨 다른 의도가 있다는 건지, 중2병이 아닌 나로서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난…용사 좋아하잖아?"

    그래. 네가 용사 좋아하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기는 하지. 맨날 용사 얘기만 나오면 어린애처럼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들뜨니까.

    뭐, 정작 진짜 용사인 사라랑 있을 때는 주제도 모르고 덤볐다가 혼쭐났다는 모양이지만.

    "그러니까 그게,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성자 말대로 제대로 진지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배틀마스터가 되고 싶어!"

    그냥 빨리 배틀마스터가 되고 싶어서 내가 했던 말을 적당히 이용하려는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줄리안의 설명은 상당히 두서가 없고 앞뒤가 이어지지 않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면서도 곧은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 모습은, 절대 그런 게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즉, 이 녀석이 한 말에 적당히 살을 덧붙여서 앞뒤를 끼워 맞춰 보자면….

    용사를 동경하는 줄리안은, 용사의 힘을 이끌어 내준다는 전설의 직업 배틀마스터 역시도 동경하고 있다. 설령 진짜 용사가 될 수는 없더라도, 배틀마스터가 된다면 용사가 된 기분을 조금은 맛볼 수 있겠지.

    그리고 그렇게 동경하던 힘을 손에 넣은 후에도 여전히 내 여자가 되고 싶다는 감정이 자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그거야말로 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자신의 진심이라는 거지.

    그러니까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빨리 배틀마스터가 되고 싶다는 거다.

    "…좋아."

    "으, 응?"

    "좋다고 했어. 지금부터 배틀마스터가 되는 훈련을 받게 해주지."

    "어!? 저, 정말로!?"

    줄리안 자신도 그런 엉망진창인 설명만으로 내가 이해해 줄 거라고는 생각 못 했던 거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오히려 줄리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깜짝 놀랐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이 녀석의 부탁은 나한테도 그다지 나쁠 거 없는 얘기였다. 아니. 시간을 벌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오히려 좋을 정도였다.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이 전수받는다고 해서 그렇게 쉽게 전직할 수 있는 직업은 아닐 테니까 말이야. 줄리안의 말로는 전설의 직업이라는 모양이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쉽게 전직할 수 있는 직업이었으면 사라도 훨씬 빨리 전직했겠지.

    그러니까 이 녀석을 배틀마스터가 되기 위해 수행에 힘쓰게 하면, 그동안 나는 내 감정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 당장 갈까?"

    "지금? 아니, 응! 부탁할게! 고마워!"

    아까의 그 진지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좋아하는 줄리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제대로 이용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뭐, 이 녀석은 원래부터 이런 녀석이었으니까.

    어처구니가 없기는 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줄리안과 함께 바프라로 향하게 됐다.

    "음? 7계층으로 돌아가는 겐가? 그러면 이 몸도 함께 가세." 라면서 같이 따라온 디아나와 함께 구미호 마을까지 내려온 우리는, 곧장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바프라의 창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난 그림자 은신으로, 줄리안은 투명해지는 보법을 이용해서 성으로 잠입했다.

    사실 바프라에서 내 위치를 생각해 보면 줄리안 한 명 정도는 그냥 데리고 당당하게 들어가도 아무런 문제 없겠지만, 어차피 오래 머무를 것도 아닌데 소란스럽게 얼굴 보일 필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럼 다음 플리투스와는…."

    성에 들어가자마자, 레이를 곧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레이는 뒤에 실비아까지 대동하고 여러 신하와 함께 알현실에 모여서 뭔가 회의를 하는 중이었다.

    소란피우기 싫어서 일부러 몰래 들어왔는데, 저런 자리에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나는 조용히 그 자리를 뒤로하고, 사라를 찾기로 했다.

    사라도 이제 배틀마스터인만큼, 굳이 레이한테 부탁할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야. 아니. 오히려 사라가 더 적임자라고 볼 수 있었다.

    "흐으응. 이 여자를 배틀마스터로…."

    "우읏…."

    우리 사라는 이렇게 줄리안을 눈빛만으로 확실히 제압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심지어 사라가 대놓고 여자라고 하는데도 반박조차 못 할 정도라니. 진짜 사라한테 어떤 식으로 당했길래 이렇게까지 기를 못 펴는 걸까?

    "응. 부탁해도 될까?"

    줄리안의 앞에서 여신의 통찰력 때문에 얘를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를 대놓고 설명할 수도 없어서, 나는 그냥 아무런 설명 없이 다짜고짜 얘를 배틀마스터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구원, 배틀마스터가 어떤 직업인지는 알고 하는 말이지?"

    그러니 사라가 이렇게 퉁명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응. 용사와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보이는 전설의 직업이라면서."

    "어머, 그랬어? 그랬구나. 그래서…."

    아, 사라는 몰랐던 거구나.

    하긴, 생각해 보면 사라는 레이한테 전수받았을 뿐이고, 그 레이도 바프라한테 제대로 된 설명은 못 들었을 테니까.

    "응. 그런데 이 녀석이 용사 마니아라서 말이야."

    "분명 마인이라고 했었죠?"

    "그, 그래!"

    잔뜩 기가 죽어 있으면서도 그런 티를 내면 지는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줄리안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사라의 시선을 정면에서 받아냈다.

    "흐으응."

    "우윽…."

    뭐, 그것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지만.

    "좋아. 어차피 요즘에는 일도 없으니까."

    "어? 그래?"

    "그래. 어차피 난 가만히 자리만 지키고 있어도 내 역할은 충분히 하는 거잖아? 최근에는 레이도 일에 익숙해져서 딱히 도와줄 필요도 없고, 꽤 한가해."

    어쩐지 다들 알현실에서 회의하고 있는데 왜 사라는 방에서 혼자 느긋하게 있나 했더니.

    하긴 사라의 말대로 사라의 역할은 레이의 뒤에 용사의 힘이 있다는 걸 인지하게 해서 레이에게 힘을 실어주는 거니, 성안에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자기 역할은 충분히 하는 거지.

    "미안해. 많이 심심했어?"

    "딱히. 일이 없는 것뿐이지, 할 게 없는 건 아니니까. 구원한테도 도움 되지 않았어?"

    "됐어. 엄청 됐어. 사랑이 느껴질 정도로…."

    "바보. 다른 사람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어 정말."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은 좋은지, 사라의 퉁명스러운 표정이 살짝 부드러워진 것이 느껴졌다.

    "아무튼 배틀마스터가 되고 싶은 거라면, 좋아요. 도와주죠. 단."

    "단?"

    "나한테 배우는 건 꽤 힘들 테니까, 각오하는 게 좋을 거예요. 시작하고 나서 살려달라고 빌어도 소용없어요."

    "그런 거라면 문제없어! 맡겨둬! 용사가 되기 위해서라면, 죽을 각오로 해내겠어!"

    아니. 수행해서 되는 건 용사가 아니라 배틀마스터인데 말이야.

    "그 말, 기억해두세요."

    잔뜩 겁을 줘도 전혀 통하지 않는 줄리안의 모습에, 사라는 재미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데 사라, 배틀마스터가 되려면 보통 얼마나 걸릴까?"

    "글쎄? 이 여자 하기 나름이지만…빨라도 일주일은 걸리지 않을까?"

    "어? 그거밖에 안 걸려?"

    "빠르면 좋은 거 아니야? 어차피 비스에 다시 데려가야 하잖아?"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너무 빠르면 내가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하지만 그런 걸 줄리안의 앞에서 말할 수도 없어서, 나는 그냥 나중에 설명해주겠다고 눈짓만 했다.

    "뭐어…아무튼 부탁 좀 할게."

    "응. 그럼 곧바로 시작할까요?"

    눈치 빠른 사라는 내 눈짓만 보고도 뭔가 사정이 있다는 걸 이해해 줬는지, 조금 미심쩍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다 끝나면 연락할 테니까 돌아가도 괜찮아. 어차피 할 일도 많잖아?"

    아니. 딱히 할 일이 많지는 않은데.

    뭐, 그동안 우리 애들이랑 꽁냥꽁냥 거리는 것도 할 일로 친다면 그야 엄청나게 바쁘지만.

    "아, 이 여자가 고통받는 모습이 보고 싶은 거라면 남아 있는 걸 추천할게."

    "…돌아가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 줘."

    사라야, 그 의미심장한 미소는 대체 뭐니? 왠지 엄청 즐거워 보이는데. 너 혹시 줄리안이 남자인 척하면서 덮친 걸로 아직도 앙금 있니?

    "응. 그럼 시작하죠. 괜찮죠?"

    "네! 부탁하겠습니다!"

    "소리 지르지 않아도 들리니까 일일이 큰 소리로 대답 안 해도 돼요."

    "어? 하, 하지만 이런 건 기합이…."

    "그런 거 필요 없어요."

    둘이 나누는 짤막한 대화만 들어 봐도 둘만 놔두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물씬 풍겼지만, 나한테 남은 선택지는 이미 없었다.

    미안, 줄리안. 알아서 잘 살아남아라.

    나는 가볍게 줄리안을 위해 기도를 올린 다음, 짤막하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물론 방을 빠져나왔다고 해서 곧장 바프라를 떠난 건 아니다.

    이왕 바프라까지 왔는데, 실비아나 레이한테 인사도 없이 그냥 용건만 마치고 가버리면 서운하지 않겠어?

    마침 알현실에서 회의도 끝난 것 같아서, 나는 레이와 실비아가 여왕의 침소로 들어가는 타이밍을 노리고 모습을 드러냈다.

    "흐야앙!?"

    "꺅!? 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아앗!?"

    모습을 드러낸 날 먼저 감지한 건, 아니나 다를까 실비아였다.

    호위 기사로서 수상한 기척을 감지했다기보다는, 그냥 내가 곁에 있다는 걸 실비아 센서가 감지해냈다는 느낌이었지만.

    "어, 언제 왔어!?"

    "지금 막. 왠지 별로 안 기뻐 보인다?"

    "그, 그렇지 않아! 엄청 기뻐! 그렇지, 실비아!?"

    "기쁩니다아!"

    다리에 힘까지 풀렸는지 검에 기대고 서서 맹렬하게 대답하는 실비아의 모습은, 그야말로 오랜만에 사랑하는 님을 보게 되어서 기쁨에 환희하는 여기사 그 자체였지만.

    "수상해."

    실비아는 몰라도 레이 넌 다르지.

    "무, 뭐가…!?"

    자기는 찔리는 거 아무것도 없다는 듯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외치는 레이였지만, 그런 필사적인 모습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애초에 말이야.

    "네가 그러면 내가 모를 줄 알았냐?"

    "드, 들켰…어?"

    "당연하지 이것아! 너 시도 때도 없이 감정 공유 켜는 거 진짜 적당히 해라!"

    그래. 실은 비스에 있는 내내, 이것 때문에 신경 쓰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거든.

    전에는 결투하고 있을 때 감정 공유가 커지는 바람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니. 어차피 실력 차이는 명백한 상대였으니까 대결 자체는 그다지 곤란하지 않았지만 말이야.

    "게다가 매번 켤 때마다 왜 그렇게 두근두근 거리는 건데!? 대체 뭘 기대한 거야!? 심지어는 낮에까지 그러다니, 난 널 그렇게 변태로 키운 적 없어!"

    하마터면 결투 중에 바지 앞에 텐트를 칠 뻔해서 말이야.

    순식간에 마나를 돌려서 대응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대로 커졌다가는 대체 어떤 소문이 퍼졌을지.

    "나도 너한테 키워진 적 없어! 그리고 어쩔 수 없잖아! 전에 낮에 네 감정 엿보…감정 공유했을 때, 너 다른 여자랑 하고 있었으니까! 감정 공유할 때마다 생각난단 말이야! 자중해!"

    아니. 그러면 안 켜면 되잖아. 그리고 지금, 내 감정 엿봤다고 말하려고 했지?

    반박할 말은 수도 없이 떠올랐지만, 레이의 태다고 너무도 뻔뻔해서 나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실비아."

    "네, 네헷!"

    "곁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죄로, 너에게 실비아 테라피 30분형을 내리겠다."

    그 대신 나는 실비아를 불러서, 그 몸을 꽉 끌어안고 폭신폭신한 머리칼에 뺨을 무자비하게 문질러댔다.

    "느헷!? 그, 그언…흐야응!? 도, 도와…흐야아…."

    실비아는 레이에게 손을 뻗어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손은 허무하게 허공만을 가를 뿐이었다.

    훗. 여왕을 지키는 고고한 기사님도 이렇게 되니 그저 애처롭기만 하군.

    "그리고 레이 너는."

    "어, 나도!?"

    그럼 넌 그냥 넘어갈 줄 알았냐? 따지고 보면 주범은 너고, 실비아는 그냥 말려든 피해자인데.

    "넌 부끄러움 지옥 30분형에 처한다."

    그렇게 말하고, 나는 곧장 감정 공유를 켠 다음 레이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봤다.

    "사랑해."

    "하웃…."

    후훗. 역시 효과가 있군.

    뭐, 이 형벌은 나한테도 똑같이 데미지가 들어온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해주겠어!

    그렇게 기세 좋게 시작한 나였지만.

    "레이, 실비아, 식사 시간이 다 됐는데 왜…어머, 구원도 아직 여기에 있었구나. 셋이서 뭐 해?"

    결국 둘을 찾으러 사라가 방에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셋이서 계속 그 달달하고 부끄러운 지옥에 빠져 있어야 했다.

    아니. 감정이 계속 교환되면서 증폭되니까 멈추질 못하겠더라고.

    그나마 유일하게 개입할 수 있었던 실비아는 내 품에서 거의 복상사 직전까지 가고 있었고.

    부끄러움 스파이럴은 오랜만이라 살짝 방심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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