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220화
아무튼 겨우 진정한 여신은 눈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
"사과합니다, 성자 구원. 최근 마음 상할 일이 많아 조금 평정심을 잃었군요. 못난 모습을 보이게 되어 죄송합니다."
조금…?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아, 아니요. 그보다 마음 상할 일이라니요?
"네. 성자 구원이 어찌나도 제 마음을 몰라주고 음해하는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답니다."
결국 전부 내 탓이라는 거잖아. 이 여신님도 태연한 얼굴로 사람을 면전에서 디스하네.
"정말로 어찌, 어찌 그런 생각을…훌쩍."
아, 아니! 그렇다고 해서 다시 울라는 말이 아니잖아요! 전 태연한 얼굴 좋아요! 쿨하고 멋지잖아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울어요! 뚝!
"훌쩍…쿠흐으응! 뚝…."
이런 식으로 강제로 의심도 못 하는 건 진짜 너무 치사한 거 아니야?
그리고 이 여신, 지금 내 옷에다가 코 풀었…아, 아니. 괜찮아. 뭐 얼마나 비싼 옷이라고. 여신님이 해주시는 거면 오히려 포상이지.
"포상…인가요. 성자 구원은 여전히 변태로군요."
이, 이 여신이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참자. 네가 참아라, 구원. 이 여신님은 속마음을 읽을 수 있어. 또 울어대면 너만 손해야.
"후우…아무튼 그래서, 매일같이 제 마음속을 들여다보며 애태우고 계셨던 여신님이니, 제가 지금 왜 불렀는지도 잘 아시겠지요?"
"여신의 통찰력 말이군요. 성녀의 레벨이 올라가면 자연히 얻게 되는 스킬이랍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여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니 뭐니 애매한 설명만 쓰여 있었으니, 그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고 할까, 까놓고 말해서 사도 임명 쓰게 하려고 수작 부리는 거 아니…잠깐만. 이거, 또 말하면 이 여신님 울어대는 거 아니야?
"괘, 괜찮답니다아? 그 정도는. 성자 구원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제가 문제인 거겠지요. 네. 그럼요. 전부 제가 부덕한 거랍니다. 훌쩍."
아니.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목소리부터 덜덜 떨리고 있는데. 마지막에는 대놓고 훌쩍이기까지 했고. 딱 봐도 마음에 상처 제대로 입었잖아요.
하지만 아무리 여신님이 저렇게 나와도, 이번만큼은 나도 양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속마음을 읽어서 다 알게 됐으니, 대답은 제대로 들어야겠어.
"그래서, 실제로는 어떤데요? 진짜로…."
줄리안을 내 여자로 안 만들면, 미래에 뭔가 큰일이라도 일어난다는 거예요? 대체 무슨 큰일이?
아무리 그래도 줄리안이 바로 옆에 있는데 이런 걸 대놓고 물어볼 순 없어서, 나는 다시 텔레파시로 대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읽은 여신도 텔레파시로 대답을 해주기는 했지만….
대답할 수 없어요.
그 대답이라는 게 고작 이런 거였다.
혹시 이 여신, 진짜 나랑 장난하고 있는 거 아닐까?
아니. 나한테 의심받는 게 싫다면서? 그러면서 저런 대답을 하는 게 말이 돼? 실은 그냥 즐기는 거 아니야?
아, 아니에요. 성자 구원,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전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음흉한 신이 아니랍니다. 대답할 수 없는 데에는 전부 제대로 된 이유가 있답니다.
그럼 오해가 없도록 말해주시죠. 그 제대로 된 이유라는 게 대체 뭔지.
당신도 이미 아시잖아요? 제가 힘을 써서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 그만큼 마신의 부활도 빨라진다는 것을요.
그리고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수많은 힘 중에서도, 미래를 예견하는 힘은 무척이나 영향력이 큰 힘이랍니다. 특히나 그것이 성자 구원의 미래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즉, 줄리안을 내 여자로 안 만들면 미래에 어떤 일이 생기는지, 여신 본인도 힘을 쓰지 않아서 모른다는 건가? 아니면 알아도 내게 알려줄 수는 없다는 건가? 마신의 부활 시기가 앞당겨지니까?
"네. 여전히 이해력이 좋으시군요."
그럼 줄리안을 내 여자로 만들지 않으면, 미래에 뭔가 일어나긴 일어난다는 얘기지요?
글쎄요. 하지만 스킬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답니다. 특히 여신의 통찰력은 성녀의 스킬 중에서도 여신 강림 다음가는 강력한 스킬. 어두운 앞길을 밝혀주는 길잡이 역할을 해줄 믿음직스러운 스킬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스킬은 성녀 자신이 제힘을 빌려 가는 것일 뿐, 제가 직접 성녀에게 개입하는 스킬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제가 사도 임명을 부추기기 위해 스킬을 발동시켰다는 의심도 거두셔도 좋습니다. 제가 성자 구원에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에요.
뭔가 일어나는지 일어나지 않는지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제약에 걸린다는 건가.
그럼 결국 이번에 여신을 불러서 얻은 건 아무것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얘기잖아.
"어머, 그렇지 않답니다. 성자 구원과 저 사이의 믿음이 더욱 돈독해지지 않았나요? 이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성과랍니다."
아니. 뭐, 그야 사도 임명을 부추기려고 한 게 아니라는 얘기는 들을 수 있었지만 말이야. 말로는 무슨 말이든 할 수 있는 거니까 딱히….
"서, 성자 구원은 아직도 절 못 믿는 건가요오?"
아, 아니요! 믿어요! 믿으니까 생각하기도 전에 눈물부터 장전하려고 하지 마세요! 여신님 씩이나 되면서 왜 그렇게 멘탈이 약한 거예요!?
"성자 구원은 몰라요! 고르고 골라서 믿고 보낸 아이가 절 의심하는 이 슬픔을!"
그, 그러신가요.
이 이상 대꾸하면 왠지 나만 더 나쁜 놈이 될 것 같아서, 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의 생활 꿀팁. 신이라고 해서 모두가 다 멘탈이 강한 것은 아니다.
"알면 됐어요."
된 거구나….
뭐, 좋아. 아무튼 그럼 듣고 싶었던 얘기는 전부 들은 것 같으니….
"네. 성자 구원. 또 듣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얼마든지 얘기해 보세요."
힘을 쓰지 않는 선에서 전부 성실히 대답해 드리지요.
뒷말은 굳이 텔레파시를 써서 말한 걸 보니, 여신님도 자신의 제약이 남에게 알려지는 건 경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약점을 알아도 되는 건 성자인 나뿐이라는 건가. 괜히 미안해지네. 난 여신을 그렇게 경계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지은 죄업의 무게가 이제야 느껴지시나요?"
여신님 입으로 죄업이니 뭐니 무서운 얘기 하지 말아주실래요? 괜히 더 무겁게 들리니까.
아니. 내가 딱히 그런 걸 무서워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옆에서 듣던 애들이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무튼 듣고 싶은 얘기는 다 들은 것 같아요. 말씀 감사합니다, 여신님."
"그런가요. 성자 구원의 앞날에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입니다. 그러면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습니다만, 이대로 끝내도 괜찮나요?"
"네."
"…성자 구원.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대답은 잘 생각해서 해주세요. 정말로 듣고 싶은 얘기는 더 없습니까? 괜찮겠어요? 저 정말 가버릴 거랍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서, 성자 구워언?"
…혹시 아직 가기 싫으세요?
"…그러면 다음에 또 보도록 하죠."
두 눈을 감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레이아의 몸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듯 무너져 내렸다.
그 몸이 완전히 쓰러지기 전에, 나는 황급히 다가가 레이아를 품에 안아서 받쳐줬다.
"레이아, 괜찮아?"
"네. 전 괜찮아요. 그런 것보다 구원 씨."
"응?"
"여신님, 정말로 슬퍼하고 계셨어요. 제 마음이 이렇게 아릴 정도로요."
아니. 그건 아마 여신님이 레이아의 몸으로 펑펑 울어댔으니까…이건 변명이 안 되나.
"응. 미안. 앞으로는 조금 자중할게."
"자네는 대체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기에 여신님이 저렇게 되는 겐가?"
"그래요. 저도 성녀 후보로서 전대의 성녀님이 여신님을 몸에 부르는 모습은 몇 번인가 본 적 있지만, 여신님께서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본 적이 없어요."
일단 사과했지만, 여신님이 펑펑 우는 모습이 너무도 강렬했는지 같이 지켜보던 우리 애들도 덩달아 날 추궁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다들 여신님의 독실한 신자니까 말이야.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게 보통, 아니. 그나마 상대가 사랑하는 나니까 이 정도지, 내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 정도 수준에서는 끝나지 않았을 거다.
뭐, 유일하게 여신님의 신자가 아닌 녀석이 하나 있기는 했지만, 그 녀석은….
"여, 여신을 울렸어…멋있어…. 그 이름도 갓 하트 브레이커…."
이상한 별칭을 지어내면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었다.
오늘 여신님을 불러낸 이유가 자기 때문이었다는 걸, 저 중2병 녀석은 알기나 할까.
"아무튼 그 얘기도 포함해서 다 제대로 설명할 테니까, 일단 위로 올라가자."
여신님이 남기고 간 골칫거리를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나는 일단 이 지하실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리고 장소를 옮겨 디아나의 집무실.
중2병은 일단 바넷사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그곳에 모여 여신님과의 대화를 다시금 생각해 봤다.
물론 그전에 여신님을 왜 울렸는지에 대한 변명을 잔뜩 해야 했고, 여신님과 나눈 대화도 결국 제대로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소득이 아예 없는 건 아닐세. 적어도 하나는 확실해지지 않았는가."
아무래도 디아나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뭐, 실은 나도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할 생각인지 대충 예상이 되지만.
"일단 묻겠는데, 뭐가?"
"줄리안 양을 자네 여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사실 말일세."
역시 그건가. 그렇겠지. 미래에 대해서 제대로 말한 건 하나도 없었지만, 스킬을 믿으라는 말은 결국 그런 거겠지.
"다들 그렇게 생각해?"
"네."
"과거의 성녀님들이 가끔 예언에 가까운 통찰력을 보여주셨다는 얘기는 저도 들어본 적 있어요. 그중에서는 책으로 쓰이기까지 한 유명한 사례도 몇 있고요. 아마 그것이 바로 여신님의 통찰력인 거겠지요. 믿어야만 해요."
여신의 통찰력을 직접 그 몸에 발동한 레이아는 물론, 마틸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례까지 들어가며 그렇게 주장했다.
그런가. 레이아뿐만 아니라 과거의 성녀 중에서도 여신의 통찰력을 발동한 사례가 있는 건가. 게다가 마틸다의 표정을 보아하니, 여신의 통찰력을 발휘한 성녀는 진짜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는 얘기가 되는데….
"…너희는 괜찮겠어?"
이제 와서 한 명 더 늘어난다고 얼마나 더 달라지겠어?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내 하렘 멤버가 몇 명이 되었더라도, 경쟁자가 하나 더 늘어난다는 건 우리 애들 입장에서 그다지 달가운 일이 아닐 테니까.
이런 건 익숙해져서도 쉽게 생각하고 넘어가서도 안 되는 일이다.
"자네 말대로 달가운 상황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네. 이번에는 자네가 반한 것도 아니니 말일세.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리 방도가 없어 보이는구먼."
"네. 지금은 저희가 질투 같은 걸 하고 있을 때가 아니죠. 저희가 제일 두려운 건 당신을 잃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구원 씨가 지금처럼 저희를 생각해주시는 마음만 변치 않으신다면, 저흰 그것만으로 충분해요."
다들 더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같은 의견이라는 것처럼, 셋은 동시다발적으로 그렇게 얘기하며 내 결단을 촉구했다.
"…알겠어. 너희 생각이 정 그렇다면…아니. 이건 내 판단이야. 내가 줄리안을 내 여자로 만들겠다고 결정한 거야. 미안하지만 내 결정에 따라줬으면 좋겠어."
안 그래도 배려해주고 있는 우리 애들한테, 판단의 책임까지 떠넘길 수는 없지.
나는 그렇게 얘기함으로써 이 불편한 대화를 끝내기로 했다.
나머지는 우리 애들한테 더 신경 쓰게 할 필요 없이, 내가 줄리안이랑 담판을 지으면 되는 문제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구원 씨, 곧장 줄리안 씨에게 가실 생각이신가요?"
"응? 으음…."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말이 있으니, 그야 이렇게 결심을 내렸을 때 바로 실행으로 옮기는 게 좋기는 하겠지만….
"그전에 잠시 이 몸과 보세."
"응? 단둘이?"
지금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데 굳이 저렇게 말한다는 건, 단둘이 보자는 얘기인가?
"음."
역시나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레이아와 마틸다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시선을 보냈다.
"네. 그럼 구원 씨, 나중에 봐요."
"당신, 당신이 마음 아파하시면 저희도 같이 마음 아파요. 너무 신경 쓰지 말고 당당하게 하세요."
그 시선을 받은 레이아와 마틸다는, 그렇게 각각 말을 남기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단둘이 남은 디아나는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철컥철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