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9화
우와. 엄청 어색한 웃음.
야. 어젯밤 일이 의식되는 건 알겠는데, 어차피 서로 취해서 벌인 일이니까 크게 신경 쓰지 말자고.
뭐,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특이한 녀석. 보통 뒤보다는 앞을 먼저 가리지 않냐?"
"어!? 응!? 헷!? 아, 아니! 이건 그런 게…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살짝 농담을 던져봤지만, 아무래도 실패해 버린 모양이다.
음. 내가 생각해도 이 분위기에 그런 농담은 좀 아니었던 것 같아.
황급히 한 손을 앞으로 돌려서 가린 중2병은, 발끝으로 이불을 걷어차서 위로 들어 올리더니, 다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이불 속으로 쏙 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는 한쪽 팔만 빼꼼 나와서 바닥을 더듬더듬 더듬기 시작했다.
"자, 여기."
"힛!? 고, 고마워…."
아무래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옷가지를 찾고 있는 것 같아서 건네주니, 중2병은 나와 손이 닿는 것조차 조심스럽다는 듯 잔뜩 움츠렸다.
솔직히 말해서, 깨어나자마자 다시 자길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 조르면 어쩌나 싶었는데.
여신을 불러서 제대로 얘기를 들어 보고 결정하기로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사정이니까 말이야.
그런 거 하나도 모르는 중2병으로서는, 지금도 자기가 나한테 부탁만 하면 바로 여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래서 혹시 중2병이 바로 부탁해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군.
"응…앗…이, 이거…새어 나와…."
"휴지라도 줄까?"
"으힛!? 괘, 괜찮…아, 아니. 그게…응…그, 그럼…한 장만…줘…."
이불 안에서 부스럭부스럭 소란스러운 중2병을 바라보면서,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바로 여신을 불러내 이것저것 따져보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당장은 무리였다.
나 혼자만 다녀와도 되는 거라면 밤사이에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서 훌쩍 다녀오면 그만이지만, 그런 게 아니니까 말이야.
마틸다의 여신 강림은 쿨타임이 돌고 있으니, 여신을 불러내려면 레이아도 같이 데려가야만 한다.
나 혼자 갔다 오면 중2병을 천사님과 단둘이 여기에 놔둬야 하니, 그것도 살짝 불안하기도 했고.
즉, 여신을 불러내려면 일단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바로 전날 고릴라인간을 시켜서 각지의 강자들에게 다시금 도전장을 보냈는데, 갑자기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다면서 단독 행동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저 고릴라인간, 보기와는 다르게 머리가 돌아가는 편인 모양이니까 말이야. 괜히 의심받을 행동을 할 필요는 없지.
그래서 나는 기회를 엿보면서, 우선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처리해나가기로 했다.
"마, 말도 안 돼! 저 단단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철괴피 블루와 노가드로 주먹을 주고받아서 이기다니!"
"이번에는 둠피수톨 아카를 탄지공으로 제압했다! 사람 열 받을 정도로 쫄랑쫄랑 때리고 튀기 잘하는 인간이 제대로 피해 보지도 못하고 제압되다니, 어설프게 익힌 게 아니야! 탄지공도 박투술만큼이나 수준급이다!"
"거, 검신 하세기 노사를 검으로 이겼다! 박투술에 탄지공뿐만 아니라 검술까지! 사람의 몸으로 저런 경지에 이르는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나일, 그는 정녕 신인가!"
뭐, 이런 식으로. 플레체 가문을 찾아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마차를 타고 비스의 각지를 돌아다니며 로빈이 눈여겨보고 있던 강자들을 차례차례 제압해나갔다.
그리고 그렇게 마차를 타고 다니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곳까지 가는 일도 있었으니, 도중에 텔레포트 마법진을 사용할 기회를 엿봤지만.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군요! 대단하십니다!"
"…그러냐."
어째선지 플레체를 박살 낸 이후부터는 이 고릴라인간이 마부를 자처하면서 따라다닌 바람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한 가문의 가주라는 직위가 이렇게 자기 가문을 내버려두고 남이나 졸졸 따라다녀도 되는 위치였나?
"아무튼 이걸로 로빈이 감시하던 인원은 전원 제압했군."
"네. 이쯤 되면 분명 그 영악한 카이젤 놈의 귀에도 형님의 이름이 닿았을 겁니다."
언젠가부터 은근슬쩍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고. 일일이 따지기도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넘어갔지만 말이야.
아무튼 이 고릴라인간의 말대로, 이걸로 목적은 대충 달성했다.
내 명성은 이제 이곳 비스 서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퍼졌다.
그리고 카이젤이라는 녀석도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챘겠지. 나일이라는 놈이 비수 로빈을 사로잡아서는, 카이젤 자신이 경계하던 인간들만 골라서 깨부수고 다닌다는 것을.
그러니 이제는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도 알아서 일이 진행될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으음. 가만히 기다리고 있는 건 성에 안 맞는군."
나는 일부러 일을 더 벌이기로 했다.
사실 일을 벌이는 건 겸사겸사 하는 거고, 진짜 목적은 따로 있었지만.
"또 강자를 찾아가실 생각이십니까, 형님?"
왜 네가 눈을 빛내냐? 설마 또 따라오려고?
"그래. 하지만 그전에, 우선은 또 한 명의 비수를 잡으러 간다. 소문만 믿고 강한 놈을 찾아가봤자 태반이 어중이떠중이들일 테니까."
"그렇습니까! 그럼 곧바로 마차를 준비…."
"마차는 됐어. 비수를 잡으러 가는 거다. 굳이 눈에 띄게 행동해서 몸을 숨길 여지를 줄 필요는 없겠지."
"네? 그, 그럼…."
드디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았다는 듯, 고릴라인간은 당황…아니. 실망한 눈치였다.
사내새끼가 그런 표정 지어봤자 내 아이언 하트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지만 말이야.
"이번에는 나만 간다."
"크윽…형님의 무위를 볼 수 없다니…."
그래. 이 자식아. 좀 따라오지 말라고. 라는 말을 돌려 말하자, 고릴라인간은 무릎까지 털썩 꿇으며 좌절했다.
그러니까 시꺼먼 사내새끼가 그래 봤자 내 아이언 하트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다니까.
"굳이 시간 끌 필요도 없으니 당장 다녀오지. 넌 그동안 또 도전장을 보낼 준비나 해 놔라."
"네…."
좌절하는 고릴라인간을 철저하게 무시하고, 나는 곧장 블래스터 가문을 뒤로했다.
"후아아아아! 드디어 그 땀내나는 시선에서 해방이다!"
"어머, 나일 씨. 도와주시는 분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돼요."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이 없는 황량한 황무지. 거기까지 도착한 다음 내가 겨우 기지개를 켜고 말하자, 천사님이 가볍게 타일러주셨다.
그러는 천사님도 입을 가리고 쿡쿡 웃고 계시잖아요. 천사님도 그 고릴라인간의 땀내 나는 시선이 제법 갑갑했던 걸까?
"아니. 아무리 그래도 눈치가 정도껏 없어야지. 우리의 오붓한 시간을 그런 식으로 계속 방해하다니. 이번에도 내가 대놓고 따라오지 말라고 안 했으면 또 따라왔을걸."
내가 나 혼자 가겠다고 안 했더라면 말이야.
아, 참고로 혼자 가겠다고 말했는데 왜 고릴라인간이 천사님과 중2병이 따라오는 건 걸고넘어지지 않았냐 하면, 이곳에서 여자란 애초에 머릿수로 쳐주지 않고 남자에게 딸려가는 부속물 취급이기 때문이다.
물론 중2병은 내 여자가 아니기는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미 그렇게 알고 있으니까 말이야.
"어머,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건가요?"
"응. 당연하지. 뭐, 우선은 할 일부터 하고."
"후훗. 그러네요."
"그래. 그러니까 우선은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자."
아무리 인기척이 없다고 해도,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곳에 설치하는 건 조금 부담이 됐다.
조금 주변을 둘러본 끝에, 우리는 바위로 둘러싸여 마법진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를 찾아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다음,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해서 천사님과 중2병을 먼저 구미호 마을로 보낸다.
그리고 혼자 남은 내가 텔레포트 마법진을 다시 회수한 다음, 그림자 이동을 통해 구미호 마을로.
그런 과정을 거쳐서, 나는 오랜만에 다시 구미호 마을로 올 수 있었다.
뭐, 오랜만이라고 해봤자 한 달도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음. 자네 왔는가."
"디아나!"
"응햐앗!? 무, 뭔가아!? 무슨 일인가아!?"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갑자기 끌어안자, 디아나는 팔다리를 파닥파닥 움직이며 당황했다.
"아니. 그냥 오랜만에 보니까 좋아서."
그냥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이라고만 하면 그리 오래 느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는 기간이라고 하면 얘기가 달라지잖아.
"뭔가. 그런 일이었는가. 사람 놀라게 하지 말게!"
그렇게 말하면서 내 머리에 콩닥 하고 가볍게 딱밤을 먹이는 디아나였다.
"하지만 디아나 씨, 기뻐 보여요."
다만 레이아의 말대로, 디아나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는 듯 헤실헤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으, 으음…나쁘지는 않네."
"뭐야. 디아나. 왜 그렇게 빼? 그냥 솔직하게 기쁘다고 해도 되잖아. 나처럼 이렇게. 응? 응?"
"자네가 이러니까 이 몸이 솔직해지기 부끄러운 것일세!"
"라고 말하면서도 끌어안은 구원의 몸을 절대 떼놓으려고 하지 않는 디아나였다."
"이상한 나레이션 넣지 말게!"
크으. 역시 이거야. 그동안에도 반지를 통해 대화를 나누기는 했지만, 역시 직접 얼굴 마주 보고 얘기하는 건 느낌이 전혀 달라.
특히 이 토닥토닥 마사지는, 반지 너머로는 절대 맛볼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전에 말한 그 건으로 여신님을 강림시키기 위해 온 것인가?"
"응."
아무튼 그렇게 해후의 기쁨을 만끽한 후, 우리는 드디어 본래의 목적을 상기해냈다.
미리 반지로 얘기한 적이 있었던 만큼, 디아나는 우리가 온 이유를 바로 눈치챈 모양이었다.
"미안하구먼. 원래라면 자네가 굳이 올 필요도 없었을 터인데."
"아니. 괜찮아. 이해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실은 디아나를 시켜서 여신님과 대화하게 할 생각이었거든.
각지를 돌아다니며 강자들을 쓰러뜨리던 도중에, 마틸다의 여신 강림 쿨타임이 다 돌았으니까 말이야.
그러니 누군가 여신과 직접 대화를 나눠서 의문을 해소할 수 있다면, 굳이 내가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잖아?
하지만 아무리 연륜 넘치는 디아나라도, 아니. 디아나이기 때문에, 여신을 그렇게 추궁하는 것 같은 행위를 하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이곳에서는 모두가 여신의 독실한 신자고, 디아나는 3천 년 가까이 여신을 믿었다는 얘기가 되니 너무도 당연한 얘기였다.
뭐, 본인한테 말하면 "아직 3천 년은 안 됐네!"라고 말하겠지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신한테 막말할 수 있는 내가 직접 올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그럼 우린 곧장 위로 올라가서 여신님을 불러낼 생각인데, 디아나는 어떻게 할래?"
"음! 미리엘 양과의 대화도 조금 전 마쳤으니, 이 몸도 같이 가겠네."
아, 미리엘이랑은 벌써 얘기 끝났구나. 아직 그렇게 밤이 깊은 것도 아닌데, 오늘은 생각보다 빨리했네.
뭐, 빨리 끝났다면 나야 좋지만 말이야.
"응. 그럼 갈까?"
디아나와 레이아, 그리고 중2병을 대동하고, 우리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여 지상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한 다음, 곧바로 여신을 불러내 설명을 듣기로….
"성자! 구원! 당신은 대체! 절! 뭐라고 생각하는 건가요오오오!"
"여, 여신?"
이거 지금 여신 맞지?
두 눈을 감고 양손을 마주 잡아 가슴 위로 모은 레이아가 갑자기 대성통곡하기 시작해서, 나는 하려던 말도 까먹고 굳어졌다.
목소리가 이렇게 사방으로 울리는 걸 보면, 일단 여신이 맞기는 맞는 모양인데 말이야.
"이젠 님자도 안 붙이시는 건가요오! 으아앙! 데려온 사자한테 무시 받다니, 전, 전 대체 어쩌면 좋나요오오!"
"아, 알았어! 야! 알았으니까! 아니. 알았으니까요! 진정해요! 여신님! 일단 진정해요!"
네 목소리 사방으로 다 퍼진다니까! 동네방네 다 들리는 목소리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진짜 그만둬! 왠지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진정 못해요오오!"
못 하기는 또 뭘 못해!?
"제가, 훌쩍! 이렇게 노력하는데! 이렇게 도와주고 있는데! 성자 구원은 언제나언제나언제나 절 믿지도 못하고!"
왠지 듣고 있자니 지극정성인 여자 친구를 괴롭히며 방탕하게 사는 쓰레기가 된 기분이야.
"…자네, 여신님께 대체 무슨 짓을 한 겐가."
"당신……."
그러게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디아나가 엄청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보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틸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자신이 믿는 신 중 뭘 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진지하게 고민하는 눈치고!
"아니. 여신님. 일단 진정하죠.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아요."
"없어요! 매번 절 보고 걸…으읍!"
걸래 여신이라고 하는 것도, 실은 그냥 성자 구원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죠!?
그렇게 말하기 전에, 나는 황급히 그 입을 틀어막고 이마를 맞대서 겨우 그 소리가 다른 사람한테까지 퍼져 나가는 것만큼은 막았다.
이, 이 여신이 진짜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누굴 매장하려고 작정했나.
여신님. 어차피 텔레파시로 대화할 수 있잖아요? 우리 이렇게 대화하죠. 진짜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전 딱히 여신님을 걸레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리고 믿지 않는다니요. 믿지 않았으면 애초에 이렇게 불러내지도 않았어요. 어차피 말해 봤자 안 믿을 건데 왜 불러냈겠어요? 안 그래요? 믿으니까 불러냈죠!
물론 살짝 겉과 속이 살짝 다르다든가, 보기와는 다르게 속이 검다는….
"우와아아앙!"
이, 입이 막힌 채로도 닭똥 같은 눈물 흘리면서 오열하지 말아 줄래요!? 우리 천사님 얼굴로 그러니까 괜히 더 죄책감이 배가 되잖아요! 사람 얘기는 끝까지 들어 봐요!
보기와는 다르게 속이 검다는 의심을 살짝 하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저랑 여신님이랑 수단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었을 뿐이지, ‘애초에 저년과 난 목적이 달라! 믿을 수 없는 년이야!’ 라는 생각이 아니었다고요!
제가 밑에서 그 고생을 하는 모든 이유가 여신님이 내려주신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인데, 목적이 다르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
우리의 목적은 하나! 그 생각은 처음부터 단 한 번도 흔들린 적 없고, 결국 마지막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건 여신님이라고 언제나 생각했어요!
훌쩍…정말로요?
거기까지 말하자 겨우 조금 진정했는지, 여신님이 드디어 텔레파시를 사용해주기 시작했다.
텔레파시로도 훌쩍이는구나…아, 아니. 지금은 이게 중요한 게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