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218화
"잠깐만 정리해 보자. 그러니까 레이아는 이 이상 내 여자가 늘어나는 건 싫지만, 그건 레이아의 고집일 뿐이고, 사실은 내가 줄리안을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거지?"
고집 때문에 후회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지금 이 상황에 대입해 보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결론밖에 나오지 않았다.
"네."
레이아는 정확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은 남아 있었다.
"어째서? 왜 줄리안이 내 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데리고 다니고는 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앞으로의 계획에서 중2병의 역할은 그다지 크지 않다. 아니. 조금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중2병은 이제 없어도 크게 상관없는 존재다.
우리가 중2병에게 원하는 건 비수만이 다룰 수 있는 전서구를 관리하는 것인데, 이제는 블래스터 가문이 내 편의를 봐주고 있으니 말이야. 굳이 중2병이 아니더라도, 또 다른 비수인 로빈을 통해 전서구는 충분히 관리할 수 있잖아?
즉, 우리한테는 중2병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뭐, 그렇다고 해서 내 정체를 알고 있는 중2병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만 말이야.
그뿐만 아니라, 저 녀석의 가문이 비스의 근본이 되는 가문이니 그걸 무시할 수 없다는 이유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버려 두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녀석이니까 말이야. 최악의 경우, 하루빨리 배틀마스터가 되고 싶다면서 바프라에 쳐들어가서 난동을 피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다른 녀석이라면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저 녀석이라면 진짜로 가능해.
이렇게 일일이 따지고 보니 중2병을 곁에 둬야 하는 이유는 산더미처럼 있었지만, 그래도 역시나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할 이유로는 많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천사님만이 알고 있는, 뭔가 다른 이유라도 더 있는 걸까?
"그게…."
대체 천사님이 무슨 말을 할지 살짝 긴장하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천사님도 덩달아 긴장한 듯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천사님이 말씀해주신 이유는….
"…왜, 왠지 모르게요…."
"무, 뭐?"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천사님 지금 왠지 모르게라고 한 거야? 왠지 모르게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질투심도 억누르고 내 여자를 더 늘려주려고 했다고?
"여자의 감…은 조금 다르네요. 저도 이 느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믿어주세요, 구원 씨. 정말로 줄리안 씨를 구원 씨의 여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게다가 천사님은 그런 모호한 근거로 날 설득까지 하려고 했다.
아니. 천사님. 아무리 천사님의 말이라도, 그건 조금….
"예감이라고 해도 말이지. 너무 갑작스럽잖아. 혹시 줄리안을 처음 봤을 때부터 그렇게 느꼈어?"
"아니요."
아, 그건 또 아닌 건가.
천사님은 처음부터 중2병한테 다정했으니 혹시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헛짚은 모양이다.
"그럼 언제부터?"
"으응…그러네요…아, 전에 줄리안 씨와 배틀마스터에 관한 얘기를 하셨잖아요?"
"응. 그랬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얘기를 듣고 갑자기 줄리안 씨도 구원 씨로 여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계시라도…어머,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요. 이 느낌, 단순히 제 예감이 아니라, 여신님의 계시일지도 모르겠어요. 으응…하지만 여신님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와는 조금 느낌이…."
자기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듯 중얼중얼 고민하는 천사님의 모습에, 나는 왠지 모르게 꺼림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 여신, 또 나 몰래 뒤가 구린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천사님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님의 몸을 이용한다든가.
성녀는 여신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는 직업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얘기였다.
"혹시 나 없을 때 여신 강림이라도 썼어?"
"아니요. 중요한 때를 위해 아껴두고 있어요."
레이아의 여신 강림 쿨타임은 이미 진작에 돌아왔으니 혹시나 싶었지만, 역시나 레이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 그렇겠지. 갑자기 예감이 든 게 배틀마스터 얘기를 들은 직후라고 했는데, 그 얘기를 했을 때는 물론 그 이후로도 나랑 천사님은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으니까. 시기상으로도 불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체….
나는 혹시나 싶어서, 레이아의 스테이터스 창을 모조리 열어봤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스킬창의 성녀란에서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스킬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스킬의 이름은 여신의 통찰력.
쿨타임까지 있는 주제에 발동은 랜덤이라는 이 황당한 스킬에는, 일반적으로는 알 수 없는 여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때때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아리송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진짜 설명을 읽어봐도 대체 뭐 하는 스킬인지 잘 알 수 없는 스킬이군.
"어머, 어느새 제 몸에 그런 능력이…하지만 구원 씨."
천사님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얻게 된 미지의 능력에 조금 놀란 눈치였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듣고 뭔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래. 이 여신의 통찰력 스킬에는 긴 쿨타임이 존재해서, 지금도 쿨타임이 돌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쿨타임으로 역산해 보면….
"응. 마침 우리가 배틀마스터 얘기를 했을 때에 발동했네."
그래. 스킬 설명이 아리송해도, 이거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지금 이 소동은 전부 이 여신의 통찰력에 의한 것 말이다.
추측해 보자면 이런 거겠지. 배틀마스터 얘기를 들은 천사님은 여신의 통찰력을 통해 미래를 어렴풋이 알게 됐지만, 그게 예지 능력처럼 확실하게 미래를 떠올리는 식은 아니었다.
단지 이대로 가면 미래에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고, 그런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는 줄리안을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게 됐다.
내가 분석을 하고도 진짜 뭐 하자는 스킬인지 알 수가 없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구원 씨, 그럼 역시…."
중2병을 내 여자로 만들지 않으면, 미래에 뭔가 큰일이 일어난다는 점이었다.
뭐, 그것도 저 여신의 통찰력이라는 스킬을 믿을만한 스킬이라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말이지만.
"레이아는 어떻게 생각해?"
"믿어요."
일단 레이아의 의견도 구해 봤지만, 물어보지 않아도 대답은 뻔한 거였다. 여신의 독실한 신자인 우리 천사님이, 저런 스킬을 의심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의심스럽단 말이지.
아니. 여신은 옛날부터 내가 사도 임명을 적극적으로 쓰길 바랐잖아? 하지만 여신이 나한테 직접 그렇게 제안해도, 난 흔들리지 않고 있었지.
그러니까 여신이 이번엔 수단을 바꿔서, 천사님을 이용해서 사도 임명을 쓰게 하려는 거 아니야?
"레이아. 여신 강림…여기서는 안 되겠구나."
괜히 혼자서 머리 쓰며 고민할 바에야, 그냥 여신 본인을 불러서 대놓고 직접 물어보는 게 빠르고 편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여신 강림을 쓰자고 하려 했지만, 생각해 보니 우린 지금 전쟁신 세계의 한복판에 있었다.
여신을 부르면 그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고 목소리도 울려 퍼지니까 말이야.
이런 데서 여신을 불렀다가는, 대참사도 그런 대참사가 없다.
"…이 문제는 일단 보류하자."
"구원 씨는 믿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니. 믿지 않는 건 아니지만…."
"만약 이것이 여신님께서 직접 내린 계시라고 하더라도, 여신님께서 저희에게 불리한 계시를 내리실 리가 없지 않나요?"
그건 그렇지. 애초에 우리는 여신이 준 사명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 여신이 우리에게 불리한 계시를 내려서 방해하지 않을 거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다만 그 여신은 아무래도 수단이라고 할까 방향성이라고 할까, 그런 게 나랑 좀 안 맞아서 말이지.
"아무튼 왜 줄리안을 내 여자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건지, 제대로 이유를 듣고 나서 행동해도 늦지 않을 거야. 그게 레이아도 더 좋지 않겠어? 이렇게 술에 취한 채로 우리 둘을 맺어 버리는 것보다는, 둘 다 정신 말짱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의지로 맺어지는 게 낫잖아?"
"그건…네에…죄송해요."
"아니. 사과할 필요 없어. 결국 아무 일도 없었잖아?"
게다가 레이아도 잘 알지도 못하는 스킬에 휘둘려져서 그런 돌발 행동을 해버린 거니까.
레이아는 전부 자신의 의지로 행동한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분명 저 여신의 통찰력이라는 스킬에는, 안 좋은 미래를 바꾸기 위한 강제력도 들어가 있는 게 틀림없어.
그런 게 아니면 우리 천사님이 그런 행동을 했다는 게 설명이 안 돼.
"뭐, 아무튼 그런 거니까. 줄리안과의 관계는 나중에 여신의 얘기도 들어본 다음에, 말짱한 정신으로 줄리안이랑 둘이서 천천히 얘기를 나눈 다음 결정할게."
"네."
"그러니까 지금은."
"흐읏!?"
아까부터 진지한 얘기를 하느라 전혀 움직이고 있지 않았던 허리를, 나는 한차례 거세게 움직였다.
음. 이 착 달라붙는 것 같은 쫀득함. 역시 최고야.
"듬뿍 즐기고 마음 편하게 자자."
"네, 네헤…."
피스톤질 한 번에 순식간에 얼굴 근육이 풀린 레이아에게 미소 지으며, 나는 천천히 피스톤질을 반복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어제 있었던 일로 머리가 조금 복잡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천사님과의 즐거운 시간 덕분에 잠은 상쾌하게 자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 다르게.
"아, 안녕…."
중2병은 그다지 푹 잘 수 없었던 모양이다.
원래라면 지금까지 푹 자고 있어야 할 정도로 쾌감을 주입해 줬는데 말이야. 그런 것까지 무시하고 일찍 일어나서 저렇게 눈이 퀭해져 있을 정도라니.
혹시 술에 취해서 어젯밤 일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닐까 살짝 기대했지만, 저 모습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중2병은 어제 있었던 일을 전부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 응. 잘 잤냐?"
"그, 그다지…."
"그러냐."
"응…."
솔직한 녀석. 보통 빈말로라도 잘 잤다고 하지 않냐?
네가 그렇게 의식하고 있는 티를 내면, 나까지 괜히 의식하게 되는데 말이야.
이 녀석을 내 여자로 만든다니…그전까지도 펠라는 잔뜩 시킨 주제에 이런 말 하기는 조금 그렇지만, 이전까지는 이 녀석을 이성으로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 녀석을 내 여자로 만들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중2병이 이성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기는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사랑에 빠졌다든가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얘도 여자는 여자구나 하는 수준이었지만.
"뭐,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까, 졸리면 더 자도 돼."
"괘, 괜찮아…일어날래. 하읏!?"
중2병은 그렇게 말하고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엉덩이에서 뭔가 위화감을 느꼈는지 화들짝 놀라서 손으로 뒤를 가렸다.
혹시 어젯밤에 싼 게 아직도 남아 있는 건가?
"하,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