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212화 (1,179/1,205)
  • 1211화

    이 녀석은 아마 날 블래스터가 비밀리에 키운 인간쯤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파괴력 자체는 있을지 몰라도, 스피드로는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녀석이 자랑하는 스피드는, 날 상대할 때 제일 꺼내면 안 되는 장기였다.

    아니. 그도 그렇잖아? 이 녀석은 레벨이 250이 안 되니까. 아무리 속도가 빨라 봤자, 결국 민첩 스탯이 500을 넘지는 못한다는 거잖아?

    즉, 진작에 레벨 250을 넘었고, 민첩 스탯도 진작에 500 한계를 돌파한 나보다는 무슨 수를 써도 느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차라리 블래스터처럼 파괴력이 장기였으면, 날 맞췄을 때 어느 정도 데미지라도 줄 수 있지. 이래선 굳이 사라의 힘을 쓸 필요도 없이, 내 본래 스피드와 그림자 이동만으로 농락할 수 있잖아.

    뭐, 일단 나도 목적이 목적인 만큼, 사라의 힘을….

    "그렇군요. 무식한 블래스터 놈들이라도,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자존심이 철저하게 짓밟혔지만, 그래도 아직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런 오기를 담은 표정으로, 해골은 최대한 덤덤한 척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엄청 떨리고 있어서, 저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좋습니다. 사실 저도 적당히 상대해주려고 했습니다만."

    적당히는 무슨. 아까까지 전력으로 달려들었던 주제에.

    "과연 당신이…이 기술도 받아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놈의 칼끝이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칼날이 정확히 수직으로 들린 순간.

    "키에야아아앗!"

    상당히 없어 보이는 기합 소리였지만, 그 기술만큼은 진짜였다.

    이런 게 바로 쾌검의 극의라는 걸까? 마치 검이 여러 개로 갈라져서 사방에서 빈틈없이 덮쳐오는 것 같은 그 기술은, 민첩 스탯이 훨씬 높은 내 눈에도 얼마나 빠른 건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쾌검이었다.

    뭐, 그래 봤자.

    "이것이! 바로! 108! 방위에서! 검날이! 동시에! 덮쳐드는! 우리! 플레체의! 최종! 오의!"

    야. 기술 쓰면서 말하기 힘들면 말 안 해도 괜찮아. 듣는 내가 다 숨차네.

    그리고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말이야.

    "아…응. 다 끝났어?"

    108방위든 1080방위든 그런 기술은 그냥 그림자 이동으로 범위에서 벗어나면 그만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그만 허공에 칼질 그만하는 게 어떨까?

    "히엑…히엑…. 히엑!?"

    저렇게까지 놀라니까 괜히 더 미안해지네.

    아니. 일단 사라의 힘을 써서 일일이 피해 줄 수도 있기는 했는데, 귀찮아서 그만. 미안하다.

    사과의 의미로…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아무튼 네 체면도 조금은 세워줄게.

    나는 곧장 사도 의태를 발동해서, 사라의 힘이 내 몸에 깃들게 했다.

    "슬슬 장난은 끝내도록 하지."

    그리고 바닥의 먼지가 회오리치며 떠오를 정도로 기를 내뿜으며, 주먹에 힘을 집중시켰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그리고 흔히 무협지에서 말하는 궁신탄영의 원리를 이용하여, 몸을 튕겨 그대로 쏜살같이 해골에게 달려가며 주먹을 뻗었다.

    휘유우웅. 콰아아아앙!

    이게 고작 주먹을 내질러서 나온 소리라고, 대체 누가 믿을까? 심지어 주먹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허공에서 멈춰 섰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손가락 하나 반응하지 못한 해골의 얼굴 바로 앞에서 주먹을 멈추자, 놈이 머리에 감고 있던 끈부터 그 뒤로 이어진 길과 벽까지 모든 것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그래서."

    해골이 최종 오의인지 뭔지를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떠들썩했던 주변 관중도 완전히 조용해져서, 고요하게 침묵이 내려앉은 정원.

    그곳에서 나는 나지막하게 해골에게 말을 건넸다.

    "이대로 항복을 인정할 거냐. 아니면 결투를 계속할 거냐. 말해두지만, 계속하겠다면 다음에는 멈추는 일 없을 거다."

    뭐, 거짓말이지만. 아니. 진짜 그러면 나도 기분 나쁠 거 아니야.

    속으로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보여준 압도적인 힘은 그런 내 속내를 감추기에 충분했다.

    쨍그랑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해골은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져, 졌습니다…."

    "훗. 현명한 판단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골에게 한번 비릿한 미소를 지어준 후에,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관중들이 내 힘을 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일부러 듣지 못한 척했다.

    저렇게 자기들끼리 멋대로 추측하고 떠드는 사이에 소문은 부풀어 오를 거고, 그게 다 내 명성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

    내가 할 일은, 소문이 더 무성하게 퍼지도록 조용히 사라져주는 거다.

    원래 사람이라는 건 수수께끼가 많을수록 더 상상력을 부풀려 생각하는 생물이니까 말이야.

    "출발하자."

    레이아와 중2병을 데리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탄 나는, 그대로 곧장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어!? 바로 출발하게!?"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어째선지 중2병이 제동을 걸어왔다.

    "그럴 생각인데. 왜?"

    "아, 아니. 그게…하루는 여기에서 쉬어갈 줄 알았으니까…."

    "여기에 뭐 볼 일이라도 남았어?"

    "그런 건 아니지만…."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중2병은 명백하게 아쉬운 눈치였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혹시 배틀마스터를 찾기 위해 바프라를 찾아갔던 것처럼, 이 근처에도 뭔가 얘만 아는 전승 같은 게 남아 있는 건가?

    아니. 만약 그렇다면, 플레체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어떤 식으로든 티를 냈을 거다. 이 녀석, 얼굴에 감정이 전부 드러나는 타입이니까.

    그런데 이전까지는 딱히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여기에 와서 이런다는 건….

    "너 혹시, 도시가 축제하는 것처럼 들뜬 거 보니까 덩달아 설레서 그러냐?"

    "어? 아니…마, 맞아! 그거야!"

    아니. 맞기는 뭘 맞아. 늦었거든.

    하도 이상한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진짜 상황 파악 못 하고 축제를 즐기고 싶은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 말이야. 지금 자기 입장 알고 있는 거 맞지? 계속 그렇게 수상하게 행동하면, 네가 원하는 그건 영원히…."

    "왁! 마, 말할게! 말할게! 그, 그러니까 그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일단 말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말하려니까 부끄럽다.

    그런 표정으로 나와 레이아의 눈치를, 그리고 특히 마부석 쪽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더니, 중2병은 최대한 애원하는 표정으로 내게 매달렸다.

    "나, 나중에 말하면 안 돼?"

    이 녀석, 언제 이런 조르기 기술까지 연마하게 된 걸까. 혹시 우리 천사님의 애교를 보고 따라 하는 건가?

    확실히 평소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자다운 느낌이라서 임팩트가 크기는 했지만.

    "나중에 언제?"

    그래 봤자 중2병이지. 우리 천사님한테는 한참 멀었어.

    "어? 그, 그게…돌아가서?"

    아니. 의문형으로 말해도 말이지.

    "……."

    "…우…으읏…."

    내가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자, 중2병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힐끔힐끔 눈을 내리깔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뭐, 좋아. 그럼 우선 출발하지."

    그리고 잠시 생각한 결과, 나는 그냥 중2병의 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말해두지만, 이 녀석의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에 넘어간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다.

    아니. 말하다 보니까 왠지 모르게 느껴져서 말이야. 이 녀석이 여기에 남고 싶었던 이유가, 진짜 별거 아닌 이유일 것 같다고.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천천히 가지. 밤을 밖에서 보내는 것도 슬슬 질리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중2병에게 신경을 쓰고, 마부석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소문이 퍼질 시간도 줘야 하니까 말이야. 올 때는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중간에 다른 마을도 안 들르고 일직선으로 달려왔지만, 돌아갈 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네. 그럼 밤이 되기 전에 중간에 있는 마을에 머물러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줘."

    하지만 나와 마부가 그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 중2병이 또 "읏…!" 하고 헛숨을 삼키면서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얘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중2병이 보여준 이상 행동의 원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허무하게 밝혀졌다.

    마부가 말한 대로, 우리는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찾아서 근처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드디어 방으로.

    고작 3일 못한 것뿐인데도, 나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갈 때는 천천히 가자고 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정도였다.

    천사님과 매일 밤을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3일만 쉬게 되어도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지거든.

    "레이아. 그럼 잘까?"

    그래서 나는 곧장 레이아의 허리를 팔로 휘감고 침대에 밀어붙이며 몸을 겹쳤다.

    그리고 그대로 그 옷가지를 하나둘 벗겨내…려고 했지만, 그때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상한 소리라고 해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알고 있지만 말이야.

    "어어!?"

    "왜 그래, 줄리안?"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거기에는 바지를 반쯤 내린 채 이쪽을 보고 굳어져 있는 중2병이 있었다.

    "어, 아, 아니. 나 먼저…."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했더니. 비어 있는 2인실이 없다고 해서 같은 방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 건가?

    "오늘은 그냥 자도 돼."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중2병은 쾅! 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쩌억 하고 벌렸다.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말이야?

    "어, 어, 어째서어…?"

    "아니. 처음에 할 때 설명해 줬잖아."

    내가 자기 전에 항상 중2병을 먼저 기절시킨 이유는, 내가 잠든 사이에 중2병이 엄한 짓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내 감은 가만히 놔둬도 중2병은 그런 짓을 안 할 거라고 말해주고 있지만, 레이아의 안전까지 걸려 있는 일인 만큼 감만 믿고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기억하냐?"

    "……."

    끄덕끄덕. 중2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서 대답했다.

    뭐, 저래 봬도 바보는 아니니, 그야 기억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오늘 왜 그냥 자게 하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아?

    "네 꿈이 내 손안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더는 널 의심할 이유도 없으니까 말이야. 넌 날 배신하지 않아. 아니. 배신할 수 없어. 내 말 틀려?"

    "어? 응…하, 하지만! 할지도 모르잖아? 수상한 짓. 나, 내버려 두면 어디로 튈지 몰라?"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니. 그보다 얘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그럼 배틀마스터의 꿈은 영영 빠이빠이 하는 거지."

    "안 해! 수상한 짓 같은 거 절대 안 해!"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면 처음부터 협박 같은 짓 하지 마라.

    "우윽…하, 하지만…."

    그러고도 아직 미련이 철철 넘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중2병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그런 쪽으로 흘러가 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말할 수밖에 없겠군.

    "뭐야 너. 실은 나한테 그냥 애무 당하고 싶은 거야?"

    "아, 아, 아니야!"

    다행이다. 만약 긍정해 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렇지? 아니지? 하긴. 내 성자 스킬에 맞고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던 네가, 이제 와서 무너질 리가 없지?"

    중2병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렇게 말해서 완전히 못을 박아 버렸다.

    그러자 중2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연하지! 애무 당하고 싶다니, 당치도 않아! 난 그냥 너한테 해주고…!"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벌린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다가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개지나 싶더니,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고는.

    "아…아니야아아아!"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자리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어…음. 그 뭐냐. 일단 물어보겠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건 전부 다 아니야! 난 여신의 간악한 속삭임에 홀리지 않았어! 아무리 네가 하는 유혹이 달콤할지라도, 난 흔들리지 않아! 언젠가 남자가 되고, 용사가 되고, 이 몸에 깃든 흑염룡과 함께 정의를 실현할 거야!"

    "…정의의 사도랑 흑염룡은 안 어울리지 않냐?"

    나도 모르게 그렇게 태클을 걸자, 내 밑에 깔린 천사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구원 씨, 지금은 그런 말을 하실 때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속삭여주셨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말이죠, 천사님.

    "하지만 멋있잖아!"

    쟨 저렇게 받아주는걸요. 진짜 이런 주제가 되면 무슨 말이든 받아주는 녀석이라니까. 얼굴도 제대로 못 들 정도로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고 있는 주제에.

    "뭐, 멋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대체 얼마나 기뻤던 건지, 중2병은 순간 자기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나랑 눈이 마주친 순간 "우읏…."하고 부끄러워하며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지만.

    "그래서, 그 멋있는 기술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멋진 꿈을 가진 우리 줄리안은, 갑자기 어떤 이유로 나한테 봉사해주고 싶어진 건데?"

    "그, 그건…."

    말문이 막힌 중2병은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손가락 사이를 벌려서 눈만 살짝 내밀어 날 힐끔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 바보 취급 안 할 거야?"

    바보 취급?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 취급을 한 적이나…생각해 보니, 속으로 맨날 중2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보 취급의 일종인가. 이거 양심에 찔리네.

    "그래."

    괜히 미안해져서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중2병은 내 진의를 확인하겠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더니.

    "…억울하잖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억울? 얘 지금 억울하다고 한 거야?

    너무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에,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반대로, 중2병은 말문이 뻥 뚫렸는지 갑자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전부 네가 헷갈리게 해서 그래! 나 하는 거 봐서 되게 해준다고 하니까! 맨날 야한 짓이나 하는 색정신의 사자가 그렇게 말하면, 헷갈리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히 성적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잖아! 그래서 각오했는데! 도착할 때까지 속으로 각오 단단히 했는데! 도시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늘 밤 이 도시에서…! 라고 생각했는데! 도시는 갑자기 떠난다고 하고! 오늘이 아니라고 안심하고 있자니까 또 오늘밤 다른 마을에서 묵을 거라고 하고! 또 새롭게 각오하고 따라오니까 이젠 매일 하던 애무도 안 해준다고 하고!"

    순식간에 말을 쏟아낸 다음, 중2병은 씨익…씨익…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그런가. 어쩐지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그런 이유였던 건가. 돌아가면 말해주겠다고 한 것도, 돌아가서 같이 자게 될 줄 알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로군.

    내 예상대로 진짜 별거 아닌 이유…아니. 얘한테는 나름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정을 알았으니, 이제는 진정시킬 차례다.

    "야. 줄리안. 흥분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뭘."

    "배틀마스터는 일단 떼어두고 생각해 보자고. 너 나한테 성적인 봉사를 하고 싶어?"

    "…아, 아니."

    왜 그 타이밍에 목소리를 살짝 떠는 걸까요, 줄리안 씨.

    "그렇지? 하기 싫은데 배틀마스터 때문에 억지로 각오했던 거잖아? 그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거야. 억울해할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 아닐까?"

    "그건…어…어?"

    마치 ‘듣고 보니 그러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2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건 보통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눈치채지 않냐?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뭐, 원래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을 땐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니,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렇지? 그럼 잘 자라."

    "어, 어어…응."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중2병에게, 나는 씨익 한차례 웃어주고 그대로 이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아까는 나도 살짝 흥분해서 신경 못 쓰고 있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중2병이 맨 정신으로 깨어 있는 거니까 말이야. 이불이라도 뒤집어써야, 천사님도 그나마 덜 부끄러우시겠지.

    "구원 씨.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곧장 천사님의 입술을 찾아서 입을 맞추려고 했지만, 천사님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서 내 입술을 막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응? 뭐가?"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끝까지 그렇게 잡아떼자, 천사님은 복잡한 표정으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레이아가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는데 말이야. 하여간 우리 천사님은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해서 탈이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레이아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아응…."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줬으면 좋겠어."

    옷 위로 천사님의 유두를 살짝 비틀며 말하자, 천사님의 달뜬 한숨이 내 얼굴을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그 한숨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나는 천사님의 옷을 한 꺼풀씩 천천히 벗겨 냈다.

    이불 속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조심하며 옷을 벗기는 건, 서로의 피부가 자연스럽게 닿고 서로의 숨결이 상대방의 민감한 부위를 간질여서,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애무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아…하아…."

    벗긴 옷은 이불 밖으로 손만 내밀어서 던져놓자, 레이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건 이제 새하얀 속옷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위쪽 속옷은 처음부터 입고 있지 않아서, 남아 있는 건 아래쪽 속옷뿐이었다.

    "이런 것도 왠지 야하네."

    "으응…몰라요…."

    레이아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레이아는 살포시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물론 그래 봤자 그 가슴을 다 가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누워 있어도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레이아의 가슴을 두 손이 가볍게 받치고 모아주는 모양새가 되어서, 나한테 자신의 가슴골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브래지어는, 남장할 때 필요 없으니까 안 하는 거지?"

    "네…."

    손 위로 보이는 새하얀 언덕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하자, 레이아는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이정도 크기의 가슴이다. 모르긴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브래지어를 차고 다니는 게 당연했을 테니까 말이야. 이제 와서 브래지어를 안 차고 다닌다니, 괜히 더 부끄러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아는 가슴이 민감하잖아?"

    "아응!"

    가슴 위쪽에 키스 마크가 남을 정도로 강하게 쪽 빨며 말하자, 레이아는 가슴이 민감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변신해서 작아져도, 감도는 변함없지 않아?"

    "그, 그건…."

    의문형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변신을 풀지 않은 모습으로 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야.

    "옷에 쓸리거나 하면 신경 쓰이지 않아?"

    "신경 써본 적…없아응…."

    가슴을 가리고 있는 손등 위로 쪽쪽 하고 키스 세례를 퍼붓자, 레이아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겠다는 듯 슬쩍 손을 비켜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가슴을 입에 덥석 물고 혀로 유두를 살살 간질였다.

    "그래? 평소에는 이렇게 안 서 있어서 그런가?"

    "으으응…!"

    그러자 크기만큼이나 모양도 색도 완벽한 핑크빛 유두가 점점 더 딱딱해지는 것이 혀끝으로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으…구원 씨. 왠지. 평소보다 짓궂으세요."

    "3일이나 안 했으니까 말이야. 이제 레이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후훗. 과장이 너무 심하세요…."

    아니. 제법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인데 말이야.

    아무튼 레이아는 내 말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지, 손을 뻗어서 내 바지 벨트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적극적이네. 레이아도 급해?"

    "으응…후훗."

    다시 한번 살짝 장난을 쳐보자, 이번에는 레이아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살짝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네. 그래요."

    그렇게 속삭여주면서, 그 특유의 길고 얇은 혀로 내 귓바퀴를 청소하듯이 빙글빙글 핥아줬다.

    "그러니까 빨리해주세요."

    그리고는 어느샌가 아홉 개로 늘어난 꼬리를 이용해서 내 허리와 두 허벅지를 감싸더니, 스스로 속옷을 벗고 내 물건을 잡아서 자신의 다리 사이에 조준하게 했다.

    "벌써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는걸요."

    그리고 귀두 끝에 천사님의 끈적끈적한 애액의 감촉이 느껴진 순간, 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껏 허리를 내리찍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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