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성자-1211화 (1,178/1,205)
  • 1210화

    미래는 전부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고릴라는 어째선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감격한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야. 다 좋은데, 왠지 표정이 아까 우리 천사님 봤을 때랑 비슷하지 않냐?

    아니지? 아니. 그러고 보니 비스는 동성애가 성행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지만, 그래도 아니지?

    …그,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로빈을 잡아놓고도 자기가 가질 생각 안 하고 없이 부하들한테 던져줬었지.

    "그, 그래. 그럼 마차나 하나 준비해 둬."

    이 고릴라,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일지도 몰라.

    그렇게 판단한 나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풍경을 보고 있으면, 왠지 이곳도 평화롭게 느껴지네요."

    "그러게."

    블래스터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플레체라는 가문을 향하는 여정 길.

    길을 아는 마부도 하나 붙여줬기 때문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마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처음 하루는 그래도 창밖 풍경이라도 보면서 버틸만했지만, 이틀째가 되니 그것도 지겨워졌다.

    역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성에 안 맞아.

    천사님과 알콩달콩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마부의 귀를 의식하다 보니 마음 놓고 얘기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대체 뭘 하면서 남은 시간을 버틸지 고민한 끝에, 나는 전에 느꼈던 의문점이나 조사해 보기로 했다.

    "나일 님?"

    뭐, 남이 보면 허공을 쳐다보고 멍하니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엿보는 천사님의 어깨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서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다음, 나는 조사를 계속했다.

    뭐, 조사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지만.

    대체 이건 어떻게 된 걸까? 아니. 그 이전에, 고작 이거 하나로 그렇게 됐다고 단정해도 되는 걸까?

    "으으음…."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아아…응. 잠깐만."

    천사님도 잘 모르실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는 같이 생각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렇게 판단한 나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마차 안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것도 마나 소모가 은근히 크니,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지만.

    "실은 사라의 힘이 갑자기 너무 세진 것 같아서 잠깐 조사해 봤거든. 일단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는 했는데, 이게 정말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를 않아서."

    "어머, 사라 씨가요?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응. 사라의 직업에 배틀마스터가 추가된 건데…."

    정확히 말하자면, 추가된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직업인 궁사를 배틀마스터로 전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튼 원래 배틀마스터가 누구 직업인지를 생각해 보면, 어떤 경위로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됐다.

    사라가 강해지면 그 힘을 따라 쓸 수 있는 나 역시도 안전해진다.

    그런 이유로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고심하던 사라에게, 레이가 가진 배틀 마스터라는 직업이 눈에 띈 거겠지.

    배틀마스터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특수 직업이다. 바꿔 말하자면 무기를 다루는 모든 직업의 상위 호환으로도 볼 수 있는 직업이라는 얘기다.

    최근에는 활을 이용한 원거리전뿐만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활약하는 사라다.

    게다가 배틀마스터가 되면 내가 사도 의태로 그 힘을 이용할 때도 그냥 내 몸에 편한 격투술을 쓰면서 직업 보정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무기를 다루는 배틀마스터의 특성은 대충 봐도 전투와 관련된 모든 능력치를 뻥튀기해주는 용사의 특성과 시너지 효과를 무시무시하게 낼 것 같으니까 말이야.

    여러모로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배틀마스터란 직업을 보고 사라는 레이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거고, 레이도 내가 더 안전해질 거란 말을 듣고는 기쁘게 사라의 전직을 도와줬을 거다.

    그러니 사라가 배틀마스터가 된 건 딱히 이상할 게 없다. 용사와 배틀마스터의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만으로 그렇게 강해진다고?

    "가, 강해지고말고!"

    내가 레이아에게 의문을 털어놓자,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갑자기 중2병이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뭐야?"

    이 녀석, 아침에 한 번 더 기절한 것 때문에 아직 다리에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어디서 이런 기운이 샘솟은 거야?

    "레이는 누구야!? 아, 혹시 네가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는 바프라의 새 수장!? 맞지!? 바프라의 새 수장을 말하는 거지!? 크으으! 설마 배틀마스터가 바프라에게 전승되고 있었다니! 난 분명 이름 모를 노사가 이어받아서 산속 깊은 곳에 조용히 살고 있을 거라고만…!"

    "일단 진정해 이것아."

    "흐야응!?"

    옷 위로 유두를 잡고 살짝 비틀어주자, 그제야 중2병은 내 멱살을 놓고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나도 이해할 수 있게 순서대로 설명해 봐. 우선 배틀마스터가 뭐길래 그렇게 호들갑이야?"

    "대대로 진정한 용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용사의 힘을 100%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전설의 직업!"

    그, 그러냐. 눈을 그렇게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할 정도로 전설이냐.

    아니. 그보다 용사의 힘을 100%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니. 그럼 지금까지 내가 봤던 용사의 힘은 그게 100%가 아니었다는 거야? 나한테는 그게 더 충격인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사라의 힘이 갑자기 배는 더 강해진 느낌이 드는 것도 충분히 설명됐다.

    단순히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특수 직업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래서, 산속 깊이 남겨뒀을 거란 얘기는 또 뭐야?"

    "응? 그, 그건…그게…어렸을 적에 바프라의 어딘가에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을 전승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과연. 그래서 용사가 못 된다면 적어도 용사에게 전해져왔다는 전용 직업이라도 얻고 싶었던 우리 줄리안은, 어디에 숨겨 있을지 모를 기연을 찾아서 바프라 곳곳을 헤매고 있었다고."

    "으…으으읏…! 으, 응…."

    자기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중2병은 얼굴을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랬군. 처음 만났을 때 그냥 할 일 없이 식도락이나 즐기며 다니느라 그런 촌구석에 있는 줄 알았더니, 기연을 찾아다니려고 일부러 그런 촌구석을 전전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원래부터 중증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증이잖아?

    하지만 그렇군.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에 그런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문득 루이스 바프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내가 놈 앞에서 용사인 척했을 때 놈이 보였던 열등감과도 비슷한 감정은, 단순히 용사의 힘에 대한 시기가 아니라, 놈이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가.

    여기에 있는 중2병은 그거라도 얻고 싶어서 바프라 곳곳을 찾아 헤맨 모양이지만.

    "흐으음. 그렇게 되고 싶냐? 배틀마스터."

    아무튼 그런 거라면, 잘 됐군.

    갑자기 증폭된 사라의 힘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뿐만 아니라, 이 녀석을 제어할 고삐마저 손에 넣게 되는 거니까.

    "어, 으, 응!? 되게 해줄 거야!?"

    얼굴을 화악하고 밝히며 미끼를 덥석 무는 중2병에게, 나는 진한 미소를 지어줬다.

    "너 하는 거 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를 3일하고도 반나절. 창밖의 풍경이 황량한 황무지에서 푸른 초원으로 변해가기 시작할 즈음, 우리는 드디어 플레체 가문이 다스리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왠지 떠들썩하군. 무슨 축제라도 하는 건가?"

    "글쎄요…저도 무슨 일인지 잘…."

    이곳에 자주 왕래한다는 마부도 영문을 모르는 모양이라, 우리는 일단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눈을 돌리고 플레체 가문의 저택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 우리는 이 소란의 원인을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까지 오는 도중부터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와 떠들썩한 인파로 이어진 길이, 우리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결투를 구경하러 온 모양이네요."

    레이아의 말대로, 플레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니 넓은 정원의 바깥쪽에 수많은 갤러리가 모여 있었고, 안쪽에는 질서정연하게 나열해 있는 수많은 병사가 갤러리들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병사들의 정중앙에 있는 호리호리한 사내가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맞이해 줬다.

    "호오. 당신이 블래스터가를 굴복시켰다는 나일 씨입니까. 생각보다 젊군요."

    젊다니. 일단 이것도 평소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변장한 건데 말이야. 대체 내 나이를 몇으로 생각했던 걸까.

    "뭐, 그렇지. 그나저나 제법 성대한 환영이군. 결투는 여기서 할 생각인가?"

    초면에 다짜고짜 말을 놓는 게 거슬렸던 걸까? 사내는 눈썹을 한차례 움찔 떨었지만, 그래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강자와의 결투를 상당히 즐기신다고 하시니, 도착하자마자 곧장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지요. 무언가 문제라도?"

    "아니.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냥 뭔가 우글우글 몰려 있구나 싶어서."

    "훗. 여기에 있는 전원이 당신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기를. 당신을 상대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저 한 명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저 흥을 돋우기 위한 관중입니다."

    "흐음."

    흥이라. 자기가 질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얘기로군.

    뭐, 나로서도 관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말이야. 소문도 빨리 퍼질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적당히 흘려 넘겼지만, 그런 내 태도를 사내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니면…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할 것 같습니까?"

    응? 저건 또 갑자기 무슨 뜻이지? 빈정거렸다는 건 왠지 모르게 알겠지만 말이야.

    "이거 실례. 블래스터 가문과의 결투는 비공개로 치러졌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이 삐쩍 마른 해골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결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 녀석도 블래스터 가문이 전해 준 진실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는 건가.

    "뭐, 그렇지. 나도 사람으로서 인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야."

    "인정…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의 본거지에서, 너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면 미안하잖아?"

    "…그러면 시작할까요?"

    더 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놈은 노골적으로 내 말을 무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야.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이대로 멋대로 얘기를 마치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전에 하나만."

    "뭐죠?"

    "진짜 관중들 안 물려도 돼? 미리 말해두는데, 나 힘 조절 같은 거 잘 못 해."

    "네. 물론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껏 비아냥거린 내게, 해골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놈의 손에는 어느샌가 검이 쥐어진 채 그 끝이 내 목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당신의 힘이 얼마나 강하든, 그 주먹은 제 몸을 스치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렇군. 블래스터 가문의 특징이 파괴력이라면, 이쪽은 스피드라는 건가. 확실히 속도 자체는 상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해?"

    상대가 너무 나빴어.

    "그럼 시작해 볼까? 와라."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해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게 달려들어 왔다.

    일단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조금 전의 자기 움직임을 보고도 내가 전혀 겁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걸까? 놈의 검은 아까보다도 훨씬 끈적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어딜 보고 있는 거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내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놈은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그땐 이미 내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그러니까 느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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