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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205화 (1,172/1,205)
  • 1204화

    그리고 아까까지의 가벼운 분위기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분위기 잡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오오. 나이 먹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평소보다 진중한 멋이 느껴져서 좋네.’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난 딱히 비수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싸우더라도 어차피 중2병이 이기기는 하겠지만, 둘이 싸워서 내가 득 볼 게 없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저 녀석은 내가 나서서 처리해 버리는 게 간편하고 낫지.

    "마치 네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것 같은 말투군."

    "같은 말투가 아니라,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아까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결국에는 남자한테 굴복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훗. 그런 건가. 착각하지 마라. 내가 굴복하고 복종할 남자는 네가 아니야. 날 여자로 만들어주신…."

    "틀렸어."

    "뭐?"

    "네가 복종할 남자는 널 여자로 만든 남자가 아니야. 강한 남자지. 그리고 난 이곳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다. 즉, 모든 여자는 내게 굴복해야 한다는 얘기지."

    음. 내가 한 말이지만 진짜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군. 악역도 이런 악역이 따로 없어.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십중팔구 내가 나쁜 놈인 줄 알 거야.

    "훗. 후훗. 하하하핫!"

    그래도 일단 한껏 무게 잡고 한 말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로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뭐, 실제로 허무맹랑한 말이기는 하니까 말이야. 나도 누가 내 앞에서 저런 말을 했으면 ‘뭐야, 저 또라이는?’ 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줄리안을 사로잡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기고만장해져 있는 모양인데, 제명에 살고 싶다면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하는 게 좋아. 저 녀석은 우리 비수 중에서도 유일하게 실력 검증이 안 된, 인맥으로 우연찮게 들어온 머릿수 채우기 요원에 지나지 않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업신여기는 말투로 날 향해 그렇게 말하는 로빈이었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로빈의 말에 직접 말로 대답하는 대신,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제발 이 모습을 보고 천사님이 환멸하지 않으시기를.

    그리고 속으로 그렇게 빌면서,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아래로 내렸다.

    "흡!? 그, 그건…!?"

    바지를 벗는 것과 동시에 되살아난 자존심으로 물건을 최대로 발기 시키자, 그 압도적인 위용에 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마치 적의 비밀병기라도 마주한 것 같은 반응이군. 아니. 그걸 노리고 벗은 거지만 말이야.

    자길 여자로 만든 남자한테 꼼짝 못 하고 절대복종하는 걸 보니, 거근 신앙에도 분명 꼼짝 못 하고 영향받을 거라고.

    다 계산하고 행동한 거지만, 그래도 진짜로 이게 통하다니. 사실은 여기가 여신의 세계보다 훨씬 더 섹스에 미친 세계가 아닐까?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로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왜 그러지? 조금 전까지는 입이 꽤나 잘 돌아가는 것 같더니만. 이 압도적인 남성성을 마주하니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짜 악당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그냥 악당이 아니라 희대의 변태 악당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게 진짜로 통하고, 심지어 제일 효과적이니까.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도 못 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로빈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지그시 아래로 눌렀다.

    그러자 별 힘들이지 않았는데도 로빈의 무릎이 천천히 굽혀지더니, 결국 바닥에 제대로 주저앉아서 내 물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지? 내가 복종하고 굴복할 남자는 네가 아니야?"

    한껏 비꼬듯이 이죽이며 물건을 강하게 휘둘러 로빈의 뺨을 때렸지만, 로빈은 멍하니 내 물건을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 좋아. 어차피 로빈을 무력화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줄리안."

    "어, 어? 나?"

    야. 아까는 제대로 반응해놓고 이제 와서 그러기냐?

    마음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이러고 있는 나 자신도 이렇게 기분이 복잡한데, 옆에서 보고 있는 넌 오죽하겠냐.

    "그래. 너. 지금 가만히 뭐 하는 거지? 저 녀석들을 전부 도륙 내라고 말했을 텐데? 1분도 안 걸리는 것 아니었나?"

    "아, 아아…응."

    내 말에 겨우 자신의 할 일을 기억해낸 듯, 줄리안은 잠깐 꺼졌던 두 손의 흑염을 다시 이글이글 불태웠다.

    아까보다 상당히 투기가 옅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투지가 있든 없든 저런 잔챙이들을 정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자, 자, 자, 잠깐! 잠깐 기다려 보실까! 나일! 나일이라고 했던가!?"

    그러자 뒤에 물러나 있던 잔챙이들도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허둥지둥 대면서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뭐지?"

    "네 목적은 우리들 블래스터 가에 정식으로 도전하고 싶은 거겠지? 좋아. 알았어! 우리들이 주군에게 안내해주지!"

    저 녀석, 아까 제일 역정 내던 걔 아니야?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구나.

    아니. 이것도 강자에게 따른다는 자기들만의 원칙에 철저히 따르는 건가?

    "야, 너 미쳤어!?"

    아,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다른 놈들이 기겁하면서 놈을 말리려고 했지만, 놈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럼 여기에서 이대로 죽고 싶어!? 저걸 좀 봐! 너도 눈깔이 있으면 저 모습을 보라고! 저 새끼 정상이 아니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새끼가 아니라고!"

    …뭘까, 이 기분은.

    아니. 아마도 말이지.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저 변태새끼 제정신이 아니야!" 라는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야.

    거근 신앙이라는 건 비스 전체에 퍼져 있는 상식 같은 거니, 그 영향도 여자만 받는 것이 아닐 테니까.

    여자만큼 강하게 영향받는 건 아니겠지만, 남자 역시도 자기보다 더 큰 물건을 가진 남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기가 죽고 남자로서 졌다는 느낌을 받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니 저 녀석이 내 물건을 가리키며 저런 말을 해도, 아마 "저렇게 남자다운 놈을 우리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어!" 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

    "화, 확실히…."

    "저게 뭐야 씨발…무서워…."

    "세상은 불합리해…."

    "저게 인간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찝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로빈을 찾으러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정신 나간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면서 조금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계획대로 로빈을 사로잡더라도 결국 목적은 블래스터의 대장을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결과만 놓고 보면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 계획보다 훨씬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게 된다.

    그러니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주군! 저 그게…손님이 오셨습니다!"

    잔챙이들의 안내를 받아서 건물 안을 이동하며 그렇게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자니, 어느샌가 우리는 척 보기에도 안에 대장이 머무를 것 같은 으리으리한 문 앞에 도착했다.

    "아앙? 손님이라고오?"

    그 부하에 그 대장이라는 걸까? 안에서 들려온 낮고 굵은 목소리에서는, 품위도 위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넷! 그,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그런 목소리라도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거겠지. 문을 두드린 잔챙이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옹알옹알 뭐라고 하는 거야!? 들어와서 똑바로 말해!"

    아무래도 문 너머에 있는 놈은 상당히 성급한 성격인지, 부하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자 답답하다는 듯 입실 허가를 내렸다. 그 입실 허가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당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앙? 너는 뭐야?"

    방의 안에는 인간과 고릴라를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아니. 고릴라의 비율을 조금 더 높여서 섞어놓은 것 같은 고릴라인간이 앉아서 술병째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중2병이 블래스터 가문은 비스에서도 최고로 파괴적인 무술을 자랑한다고 했던가? 확실히 힘 하나는 엄청 세 보이네.

    뭐, 그래 봤자 내 상대는 아니지만.

    "내 이름은 나일. 블래스터 가문에 대결을 청하러 왔다."

    "…아앙?"

    이 새끼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표정으로 멍하니 내 얼굴을 보던 고릴라인간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내 말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그래. 내 목적은 처음부터 이거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비스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강자존의 세계. 수장의 자리마저도 힘 있는 자가 차지하는 세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 어느 때나 쳐들어가서 수장과 싸워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건 또 아니다.

    그랬다가는 개나 소나 도전해 보겠다고 나설 테고, 수장은 하루도 쉴 날 없이 싸우기만 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테니까 말이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비스의 초대 수장은 일 년에 한 번 수장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처음 그런 날을 만들었을 때는 신분에 상관없이 뜻있는 자라면 누구나 수장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에 중2병한테 얘기를 들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비스의 초대 수장이라는 사람은 좋게 말해서 상당히 호탕한 사람이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비스 내의 권력 구도가 정착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수장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리도 예전과 같은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 일신의 무력이 널리 알려진 인물들만 초청되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즉, 내가 아무리 수장을 이길 힘이 있더라도, 우선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지지 않으면 비스의 수장 자리를 빼앗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수장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렇게 블래스터 가문에 와 있다는 얘기다.

    수장의 자리에 일반인들이 도전할 수 있는 걸 벤치마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스의 명문 가문들도 저마다 강자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전하는 자는 이기면 명성을 얻을 수 있고, 명가들도 자신들이 이만큼이나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제자를 끌어모을 수 있고, 그 제자라는 명목의 사병이 곧 자신들의 힘으로 이어지니까 말이야.

    뭐, 쉽게 말해서 명가는 무협지에 나오는 문파나 세가를, 강자의 도전은 도장 깨기를 생각하면 편하다.

    물론 도전을 환영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름이 알려진 강자에 한하는 얘기로, 이겨봤자 아무런 선전도 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찾아와봤자 문전박대를 당하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나도 우선 이쪽 사정에 정통한 로빈을 먼저 사로잡은 다음, 그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약점을 잡든 뭘 하든 해서 블래스터 가문이 내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한 거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이, 난 지금 이렇게 블래스터 가문의 가주가 기다리고 있는 방까지 오게 됐다. 그것도 가주 본인의 입실 허가를 받아서.

    이렇게 된 이상, 상대가 제아무리 무명 소졸이라도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들어오라고 말한 건 다름 아닌 가주 본인이니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저 고릴라인간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 화를 참고 있는 거겠지.

    "이…이 쓸모없는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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