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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204화 (1,171/1,205)
  • 1203화

    어리둥절해하는 중2병의 시선을 대충 얼버무리면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전서구를 따라서 로빈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저 건물 안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나야 중2병은 그렇다 쳐도, 천사님은….

    "구원 씨. 어서 가요. 이러다가 놓치겠어요."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사님은 그렇게 말하며 제일 먼저 건물 쪽으로 달려가셨다.

    아니. 잠깐만! 천사님! 그렇게 무방비하게 가시면 위험…!

    "웬 놈이냐!"

    그것 봐요! 벌써 문지기한테 들켰잖아요!

    하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조금 계획은 변경해서…!

    "죄송해요! 조금만 주무시고 계셔주세요!"

    나는 천사님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건 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문지기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 천사님은, 직후 가벼운 몸놀림으로 문지기의 뒤로 돌아가 그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러고 보니, 성녀는 대사제와 성기사 둘 다 전직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직업이었지.

    성녀라는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 때문에, 그리고 줄곧 전문 힐러 역할만 해온 천사님의 이미지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어.

    미리엘의 수업을 듣고 전투 훈련도 받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그래 봤자 문지기고, 우리 천사님하고는 레벨 차이가 어마 무시하게 나기 때문에 저렇게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우리 천사님을 마냥 가녀린 힐러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내게는, 직접 보니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게다가 천사님의 파격적 행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구원 씨.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문지기를 기절시키자마자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돈 천사님은, 평소에 남장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낮고 걸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 아까 들었던 그 문지기의 목소리로 말이다.

    "……."

    "구원 씨? 왜 그러시나요?"

    아뇨. 그 얼굴에 그 목소리로 제게 상냥하게 말씀 걸어주시니까 천사님이란 걸 알고 있어도 괜히 소름 돋아서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천사님이 어떻게 같이 잠입할지에 관한 문제도 해결됐으니, 우리는 기절한 문지기를 마당의 보이지 않는 그늘에 숨겨두고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서구의 모습은 창문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더 뒤쫓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중2병이 방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세이지 때처럼 핵심 인물의 방까지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병사들이 머무르는 병영 같은 넓은 방이었다. 문도 살짝 열려 있는 것이, 그야말로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살짝 열린 문틈에서, 여성의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아응…!? 흐읏…저, 전서…."

    "헉, 헉? 뭐? 쉴 틈 없어 이년아. 뒤에 줄 밀린 거 안 보여!? 다 끝날 때까지 쉴 시간 없을 줄 알아!"

    문지기로 변하고 있는 천사님이 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열자, 거기에는 나체의 여자 한 명을 중심으로 십 수 명의 남자들이 하반신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심지어 다들 발정 나서 여자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지, 방안으로 천사님이 들어가도 다들 눈치조차 못 챈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우리는 전서구를 쫓아왔는데, 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거지? 중2병만큼은 아닐지라도, 비수는 개개인이 상당한 실력자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잠깐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나타내는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내 계획이 완전히 꼬였다는 거잖아.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싶더라니.

    "으으응…그게, 아니라…전서구…."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남자의 밑에 깔려 있던 여자가 손을 위로 내밀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전서구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아? 으헉!? 까, 깜짝이야. 저건 씨발 볼 때마다 놀라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야? 쫄아서 쪼그라들었잖아."

    "병신. 겁은 더럽게 많아요."

    "닥쳐. 이 새끼야. 야. 읽을 동안 빨아서 다시 세워봐."

    "네헤…하음…."

    "그럼 난 그동안 뒷구멍 좀 쓴다."

    "내꺼 다시 서면 비켜라."

    여자를 공유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 그런 대화를 나눈 남자는, 이것 또한 자연스럽다는 듯 여자의 손에서 편지를 건네받아서 자기가 마음대로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어떤…응? 뭐야 이거? 이 여자보고 돌아오라는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야. 어떻게 된 거야. 네 임무는 우리 감시 아니었어?"

    "맞…으하응…."

    "그런데 갑자기 왜 돌아오라는 거야!? 씨발 설마 들킨 거 아니겠지? 꼬박꼬박 편지 제대로 보낸 거 맞아? 만약 들키면 대장한테 우리 다 죽는다고!"

    "보냈어, 새끼야! 지도 맨날 같이 봐놓고!"

    갑작스러운 귀환 명령은 놈들도 예상 밖이었는지, 놈들은 웅성웅성 대면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말이야, 아니. 사실 하나도 좋지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안 하는 놈들은 하반신에 뭐라도 좀 걸치고 있어 주면 안 될까? 진짜 보기 괴로운데.

    속으로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슬슬 등장할 때임을 직감했다.

    "아, 미안미안. 그거 실은 우리 때문이야."

    신호를 보내서 천사님은 원래의 남장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고, 중2병은 투명 모드를 풀게 한 다음, 나는 자신도 그림자 은신을 풀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빈을 이용하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꼬여 버렸지만,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계획대로 움직였다고.

    지금까지도 순발력을 이용해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잘 해왔잖아? 그걸 한 번 더 반복하는 것뿐이야.

    "어, 어떤 새끼야!?"

    "너희랑 똑같은 새끼."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대답해주자, 놈들은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 뭐?"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도 너희랑 똑같이 카이젤의 자객을 사로잡은 몸이라고. 그쪽은 로빈이라고 했던가? 안녕. 오랜만이지? 줄리안이야."

    중2병의 어깨에 팔을 얹어서 끌어안고 그 손을 잡아서 대신 살랑살랑 흔들어주며 인사하자, 지금까지 남자들이 하라는 대로 몸을 대주던 여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2병을 쳐다봤다.

    "그리고 비수를 손에 넣은 자가 또 다른 비수의 앞에 나타났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겠냐?"

    "…이름은?"

    계속해서 중2병의 손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흔들면서 살짝 무시하는 말투로 도발해 봤지만, 의외로 놈들의 반응은 신중했다.

    아까의 그 시정잡배 같은 말투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강자존의 법칙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곳이니, 그만큼 이런 것에는 신중한 건지도 모른다. 비수를 사로잡았다는 것만 하더라도, 내 강함은 어느 정도 증명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신상파악부터 하려는 거겠지만.

    "나일이다."

    당연하게도, 이 녀석들이 내 신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구원이라고 했어도 모를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나일? 야. 넌 들어봤냐?"

    "아니. 처음 들어봤는데."

    그야 그렇겠지. 지금 막 지어낸 이름이니까.

    난 지금 나이 조절 팔찌로 평소보다 더 늙어 보이는 모습에, 약자 태세로 매력 수치도 대폭 깎아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처럼 이렇게 변장을 했으니, 그에 걸맞은 가명도 사용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가명의 유래는 내 이름을 살짝 비튼 거다. 구원91에서 한영을 뒤바꿔 나인일로. 거기에서 살짝 다듬어 나일로.

    "뭐, 모르는 것도 당연해. 유명한 이름은 아니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놈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즉, 무명 소졸이라고?"

    너희 같은 놈들한테 무명 소졸이라는 얘기까지는 듣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소졸은 아니야. 그냥 무지막지하게 강한 무명이지. 그래서, 처음 질문의 대답은 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는데?"

    "처음 질문이라고?"

    "조금 전 일을 벌써 까먹었어? 그 나이에 벌써부터 치매 온 건 아니지? 젊은 나이에…쯧쯧. 조심해. 지금부터 견과류라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처음 질문이 뭐냐고 물었다!"

    혀까지 차면서 안타까움 듬뿍 담아 걱정해 줬지만, 놈은 그걸 도발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야. 네 딴에는 윽박지를 셈인지 모르겠는데, 하반신 드러내놓고 손에 무기 하나 없이 그래 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온 이유 말이야. 뭐일 것 같아?"

    "…감히 주군을 만만히 보는 거냐!?"

    잠깐 침묵이 흐른 끝에, 놈들은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는 듯 덜렁덜렁 후다닥 움직이며 각자 손에 무기를 꼬나쥐었다.

    어째서 얘기가 또 그렇게 되는 거지?

    보통 말이야. 비수를 사로잡은 애가 또 다른 비수한테 왔으면, 그 또 다른 비수도 사로잡을 목적으로 왔다고 보는 게 정상 아니야?

    하여간 여기 놈들은 머리에 든 게 싸움밖에 없는지 꼭 생각을 해도 그딴 식으로…아니. 잠깐 기다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여기에서 굳이 부정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오히려 이게 더 잘된 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거지. 너희도 비수를 사로잡았으면 알 거 아니야? 카이젤이 비수를 어떤 목적으로 파견했는지. 그리고 너희 블래스터와 마찬가지로, 카이젤은 나한테도 비수를 파견했어. 그리고 난 그 비수를 사로잡았지. 그럼 너희 대장이랑 비교해도 딱히 손색이 없다는 뜻 아니야?"

    "개소리를 잘도 나불나불 지껄이는군! 비수라면 우리도…!"

    "부탁이니까 너희가 잡았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 너희는 뒤에서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너희 대장이 나서서 간신히 잡은 그림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지금 모습만 봐도 그래. 나머지 놈들은 주위에서 한 놈 끝날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면서 이렇게 우르르 몰려서 둘러싸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겁나는 거잖아? 만약 그 여자가 다른 마음먹고 반항하면 감당해낼 자신이 없으니까. 자신 있었으면 혼자 따먹었겠지. 안 그래? 내 말 틀려?"

    "…이, 이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도 모르는 호로잡놈새끼가!"

    꼭 할 말 없으면 욕부터 하는 놈들이 있더라. 쟤들은 저러면 다른 사람들이 무서워할 줄 아는 걸까?

    뭐, 좋아. 쟤들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증명해주면 그만이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야? 그럼 시험해 볼까? 줄리안."

    "…응."

    평소라면 또 바보처럼 ‘어? 나?’ 같은 말이나 했을 중2병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로빈에게 고정된 채로, 줄리안은 덤덤하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저 녀석들 전부 처리하는 데 몇 분 필요해?"

    "분 단위까지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중2병의 두 팔에서 검은 화염이 이글이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진짜 쓰는 기술 하나는 엄청 멋있단 말이야. 아니. 난 딱히 중2병이 아니지만, 이거 실제로 보면 진짜로 멋있다고.

    그 증거로, 조금 전까지 큰소리를 치던 놈들이 중2병이 투지를 불태우자마자 잔뜩 쫄아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너희가 거기에 있는 비수를 사로잡은 실력자라면, 여기에 있는 비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아, 안심해. 나도 딱히 1대1로 하라는 건 아니니까. 전부 덤벼도 좋아. 그럼 줄리안."

    가서 전부 쓸어 버려.

    중2병의 어깨를 가볍게 탁 치면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저쪽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

    알몸으로 남자 밑에 깔려서 그저 남자들의 성욕배출구 역할만 수행하던 여자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선 거다.

    "…로빈? 어째서?"

    "너도 그 남자의 여자가 됐으니까 알잖아? 우리들 여자는, 결국 남자한테 굴복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야."

    그렇게 돌려지면서도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런 건가.

    저 여자는 자신을 여자로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심으로 그 남자한테 절대복종하고 있는 거다.

    뭐, 저 여자를 여자로 만든 건 저기에 있는 저놈들이 아니라 블래스터의 대장이라는 놈이겠지만, 아마 저놈들한테 협력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거겠지.

    아무튼 패배하고 여자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은 전부 버리고 남자한테 절대복종하는 여자의 모습을 진짜로 보고 나니, 나는 뭔가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뭐라고 할까. 저게 진짜 되는구나. 그럼 여차하면 정말로 줄리안도…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걸 진짜로 가능하게 하는 세뇌 교육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너와는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거든. 줄곧 궁금했어. 네가 정말로 비수에 어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

    뭐,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멋대로 결투 분위기를 만드는 로빈의 막기 위해, 나는 줄리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려. 누가 너보고 껴도 좋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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