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1화
오늘의 교훈. 섣부른 추측으로 아는 척하지 말자.
"…으음. 그걸 말하려면 우선 내가 태어난 가문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렇게 시작된 중2병의 얘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내 예상대로 중2병의 비스마르크 가문은 원래는 용사 가문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플리투스에서 오래전에 떨어져 나온 분가라고 한다.
하지만 리리안 플리투스가 활약할 당시에는 이미 마인의 피가 옅어진 건지 더는 용사를 배출하지 못하게 됐고, 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권력도 약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리리안 플리투스가 대륙을 통일한 후에 행해진 대대적인 용사 숙청 작업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플리투스를 제외한 용사 가문이 모두 사라지니, 용사의 힘은 잃었다지만 여전히 마인으로서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비스마르크는 순식간에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고, 리리안 플리투스가 사라진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세력을 이뤄서….
"너희 가문이 원래 비스의 수장이었다고!?"
비스…비스마르크…내가 왜 이걸 눈치 못 챘지!? 플리투스도 바프라도 똑같이 자기들 성을 가져다 썼는데!
비스는 강자존의 원칙으로 수장이 수차례 바뀌었다는 얘기를 미리 들어서 그런가? 설마 그 정보다 독이 되어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다니.
"그럼 비스를 배신하겠다고 한 것도 전부…!"
"오, 오해야! 얘기를 끝까지 들어줘!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좋아. 얘기해 봐."
중2병이 진심으로 억울해 보인다는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것과는 별개로 궁금해서라도 얘기를 끝까지 듣기는 들어야 할 테니까.
나는 일단 판단하기를 보류하고, 중2병의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 예상대로, 비스마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비스라는 세력을 이루게 됐다.
하지만 당시의 비스마르크 가문의 수장은, 중2병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앙심이 두텁고 정정당당한 호걸이었다. 다시 말해서 너무 종교에 맹목적이고 너무 사람이 좋았다는 얘기다.
그는 전쟁신의 교리를 근거 삼아서 강자존의 법칙을 내세우며 누구든 자기보다 강한 이가 있다면 기꺼이 수장의 자리를 내놓을 것이라 말했고, 그 발언은 곧 현실이 됐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를 이기고 새롭게 비스의 수장이 된 이는 전임 수장과 같은 호걸이 아니었다.
다시 힘 있는 이가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을 염려해 가능성 있는 이들을 싹부터 제거하려 했고, 그 제일 처음 타겟은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 가문이었다.
그래도 비스마르크 가문은 마인으로서의 힘이 있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수장이 몇 차례 더 바뀌는 동안에도 근근이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결국 줄리안의 대에 와서 최악의 사태가 터졌다.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예였던 줄리안의 아버지가 무성별자인 줄리안 하나만을 남긴 채 요절해 버린 거다.
만약 줄리안이 남자로 각성하지 못하면, 비스마르크 가문은 이대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그냥 두고 볼 정도로, 카이젤이라는 남자는 멍청하지 않았다.
"카이젤이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손을 남자가 될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날 불렀어."
"데리고 있다가 자기 여자로 만들 셈이라는 거군.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손을 자기 여자로 두면, 마인의 핏줄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통성까지 생기는 거니까."
"…아마도."
거기까지 듣고 나니, 지금까지의 일들이 드디어 정리되어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중2병이 왜 그렇게 남자가 되는 것에 집착한 건지, 그리고 저런 성격이면서 왜 그렇게 쉽게 비스를 배신한 건지도.
물론 원래 자기 가문이 세운 세력인 만큼 비스가 무너지는 건 아깝겠지만, 그래도 비스마르크의 대가 끊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럼 네가 아니라 브레디라는 사람이 카이젤의 곁에 있는 건?"
"브레디는 원래 우리 비스마르크를 모시던 가문의 출생으로, 나와는 소꿉친구 관계야. 카이젤이 부르자, 마침 나와 마찬가지로 무성별자였던 브레디가 내 대역을 자처했어."
과연. 아까 인질이라는 말에는 그래서 반응한 거였군.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인질은 아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야. 브레디는 카이젤에게 가는 대신 다른 시종들의 안전까지 요구했어. 시종으로 분장하고 있던 카이젤에게 실력을 들켜서 여자가 될 뻔했지만, 브레디 덕분에 무사히 정조를 지킬 수 있었어. 그뿐만이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바프라로 피신까지 시켜줘서…."
과연. 이 녀석이 비스의 비수라는 역할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바프라의 그런 오지에서 식도락이나 즐기며 놀고 있었던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그래서 편지에 브레디만 볼 수 있는 글을 쓴 거야. 안심하라고. 곧 가겠다고."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중2병의 말을 100% 신뢰했다.
내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저건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짜낼 수 있는 수준의 변명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과거의 일까지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져.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다 그렇게 생각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제일 먼저 중2병을 의심한 사라에게 말을 건네자, 사라는 잠시 진실을 간파하려는 듯 중2병의 눈을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프라의 사례를 보고 희망을 가진 건 아니겠죠?"
사라의 그 말은, 나도 무심코 감탄을 내뱉었을 만큼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어.
물론 중2병이 바프라의 변한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내가 바프라를 뒤집어엎기 전에 사로잡혀서 쭉 우리 저택에 갇혀있었고, 그 이후에 나랑 같이 다닐 때도 바프라에 용무가 있을 때는 이곳 창관 지하에서 기다리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바보가 아니다. 중2병이 폭발해서 바보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리고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내가 바프라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들은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사라의 말대로 이 녀석이 헛된 희망을 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나와 협력 관계가 됐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비스 정복하고 바프라처럼 대리인을 내세운다면, 제일 명분이 있는 건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손이나 마인으로, 실력도 비수에 임명될 정도로 출중한 이 녀석이니까.
하지만….
"미리 말해두지만, 비스는 바프라처럼 그렇게 어중간한 형태로 남길 생각 없어."
바프라를 그런 형식으로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에는, 바프라가 섹스를 두고 말도 안 되는 억압정책을 펼친 덕분에 때문에 생겨난 은사모의 존재가 가장 컸다.
본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은사모라는 존재가 이미 여신의 교리에 반쯤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비스는 다르다.
여자를 경시하는 건 비슷할지 몰라도, 놈들은 섹스 자체는 딱히 금기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강한 남자의 상징으로 이용까지 하고 있다.
여신의 교리로 세상을 뒤엎을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중간하게 섹스를 적대시하는 놈들보다도 더 까다로운 상대라는 얘기다.
거기에 비스 사람들은 뭐든지 힘의 논리로 생각하며 상대를 강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기질까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약 중2병을 완전히 내 수족으로 만들고 왕을 시킨다 한들, 바프라처럼 어중간한 형태로 플리투스에 복속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비스 공략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뭐, 지금까지 일부러 숨기고 있었으니, 중2병은 우리 계획의 전모를 모르지만 말이야.
만약 그래서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거라면, 빨리 꿈 깨라고 말해줄 수밖에.
"비스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거다. 영원히."
이대로 헛된 희망을 품게 한 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방법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도중에 중2병이 현실을 깨닫고 적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파지니까 말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미리 현실을 알려주고, 확실하게 적이 될지 아군에 붙을지 선택하게 하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그래도 브레디는 구해낼 수 있잖아?"
과연. 이 녀석도 이쪽에 붙을 메리트가 없는 건 아니라는 건가.
중2병 모습에 가려져서 그렇지, 역시 그냥 생각 없는 놈은 아니었어.
"비스나 비스마르크 가문에는 미련이 없다고?"
"미련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비스는 이미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고 있어. 그리고 가문은 나만 멀쩡하면 굳이 비스가 아니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까."
만약 미련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면, 난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녀석을 계획에서 배제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 진정성이 느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괜히 더 고민되기 시작했다.
내 감은 줄리안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감만 믿고 처리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편하게 믿고 싶기는 하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나 혼자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니까.
"줄리안 씨…."
줄리안의 사정을 듣고 덩달아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시는 우리 천사님 쪽을 향해 나는 힐끔 곁눈질했다.
천사님이 동행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냥 마음 편하게 줄리안을 믿고 같이 다닐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천사님은 빠지라는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역시 이대로 줄리안이랑 섹스를 해서 확실하게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게…아니. 하지만….
"좋아. 믿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그렇게 결론 내리기로 했다.
"구원!?"
사라는 설마 내가 이런 선택을 할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지만, 난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괜찮아. 내가 제어할 수 있어."
레이아도 같이 가는 거잖아.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한 거야.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사라도 더는 이견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기는 했지만, 저것도 다 내가 걱정돼서 저러는 거니까 내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저, 정말로 믿어주는 거야?"
"왜? 문제 있냐?"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본인이 내 입장이었다면 믿기 어려웠을 거라는 거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난 네가 아니거든.
"난 남자 중에 남자니까 말이야. 이게 바로 그릇의 차이라는 거지. 너도 남자가 되고 싶은 거라면, 좀 더 날 본받는 게 좋을걸."
"그릇의 차이…."
대충 그럴듯하게 둘러댄 말이었지만 중2병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되뇌기까지 했다.
뭐, 그 뒤에서 사라는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당신, 조심하세요."
"연락은 자주 하게."
"다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그 이후 밤이 될 때까지 줄리안의 얘기를 들으면서 적당히 시간을 보낸 다음, 드디어 우리는 비스로 향하게 됐다.
"괜찮아. 사라 너도 알잖아?"
인간 상대로는, 아니. 감각이 있는 생물 상대로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성자 스킬만 말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나도 쓸 수 있는 수가 상당히 많아졌으니까 말이야.
"…응."
"그래. 그럼 진짜 다녀올게."
사라와 디아나, 마틸다의 뺨에 각각 입맞춤해준 다음, 나는 그림자 이동을 통해서 비스의 수도 근처로 이동했다.
그래. 이번에는 갑자기 수도부터 시작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예 수도 안으로 이동한 건 아니었고, 수도가 멀리 한눈에 보이는 위치의 평야 쪽으로 이동한 거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기 곤란해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편지랑 전서구는 준비됐지?"
"응."
"그럼 날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