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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성자-1201화 (1,168/1,205)
  • 1200화

    아니. 그렇게 말하면 괜히 더 궁금해지는데.

    하지만 사라는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알면서도, 더 말해 줄 생각 없다는 듯 묘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뭐, 뭐야 저 미소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내 기분 탓인가?

    "그런 것보다, 출발하는 건 밤이 되고 나서지?"

    "응. 그럴 생각인데."

    아무래도 그림자 이동으로 넘어가는 게 제일 편하니까.

    "그럼 레이아하고 그 사람도 여기에?"

    "응. 창관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어. 왜?"

    "그냥 좀 얼굴을 보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사라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마 중2병이 진짜 같이 다녀도 괜찮은 상태인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사라 얘는 중2병이 내게 굴복한 이후로 한 번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만약 중2병한테서 뭔가 건수를 잡으면, 그걸 빌미로 내 비스행을 막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혹시 그래서 그렇게 쉽게 허락한 건가?

    하지만 말이야, 사라야.

    "왜, 왜 여기에 용사가…!?"

    네가 얼굴을 보러 가면, 이렇게 된다고.

    요즘 내가 계속 압박하는 바람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착각하기 쉽지만, 중2병은 기본적으로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고 그만큼 겁도 없는 성격이다.

    괜히 자기는 남자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괜히 처음 잡혔을 때 그런 식으로 반항을 한 게 아니라는 얘기지.

    하지만 그 겁 없는 녀석이, 지금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흐으응. 정말로 길들였나 보네."

    아니. 지금은 내가 길들여서 저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라 너한테 겁먹은 거거든?

    잊었어? 너 옛날에 중2병이 덮치려고 해서 진짜 남자인 줄 알고 제대로 두들겨 팼다면서.

    물론 나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바프라를 죽이기 전에 사라가 바프라를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생각해 보면, 중2병이 어떻게 맞았을지도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됐다.

    "기, 길들여진 게 아니야! 협력 관계다!"

    우와…저 녀석, 그래도 일단 반박은 하네? 진짜 의지 하나는 대단한 녀석이야.

    하긴, 그러니까 내 성자 스킬에 맞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협력 관계…가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는 걸로 작전을 시작한다고 했었지?"

    "아, 응. 디아나한테 들었어?"

    "뭐, 그렇지. 아직 안 보냈다고 했지? 그럼…줘봐요."

    아주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행사하는 것처럼, 사라는 중2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중2병 성격에 순순히 넘겨줄 리가 없었지만.

    "화, 확인이라면 이미 성자가…."

    "왜 그러죠? 어차피 다 아는 내용만 쓰여 있는 거니까, 별로 상관없잖아요?"

    "그, 그래도 안 돼! 내가 협력하는 건 성자지 네가 아니야! 정 확인하겠다면 성자가…!"

    "수상해."

    "무, 뭐!?"

    사라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자국 다가가자, 중2병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사라가 또 한발 다가가고, 중2병은 또다시 뒤로 물러난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한 끝에, 결국 중2병은 등이 벽에 막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곳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중2병을 몰아넣은 사라는, 소위 말하는 벽치기 자세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수상하다고 했어요. 잘 들어요. 저 바보는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쉽게 믿었겠지만, 난 아니에요."

    사라야. 다 좋은데, 꼭 이런 때까지 오빠한테 바보라고 해야겠니? 나도 일단 중2병 앞에서는 쌓아놓은 위엄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그럴듯해지고 있어서,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아니. 같은 비스의 비수인 세이지까지 나한테 넘긴 마당에 이제 와서 중2병이 날 배신할 리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중2병이 당황하는 모습은 확실히 미심쩍었으니까.

    사라 말대로, 떳떳하면 그냥 보여준 다음에 어디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냐고 반격할 수도 있을 텐데.

    "하, 하지만…."

    "힘으로 뺏어가기 전에 내놔요. 나한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으, 으으윽…."

    거의 울먹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중2병은 결국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왠지 사라가 나보다 중2병을 더 잘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아, 아니. 저것도 전부 내가 미리 중2병의 기를 눌러놨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응.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흥."

    아무튼 편지를 건네받은 사라는 곧바로 편지를 꺼내서 펼쳤고, 펼치기가 무섭게 묘한 콧소리를 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들리는 콧소리를.

    "사라야?"

    "비밀 문자가 쓰여 있어.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 없게, 마나로."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사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뭐라고? 즉, 진짜로 중2병이 배신을….

    "자, 잠깐만! 아니야!"

    내가 중2병에게 시선을 돌리자, 중2병은 두 손으로 황급히 자기 다리 사이를 가리면서 외쳤다.

    상황과 자세가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중2병으로서는 나름대로 진지한 거겠지.

    "뭐가 아니라는 거죠?"

    "난 배신하지 않았어! 용사 넌 읽을 수 있으니까, 보면 알잖아!"

    "흥. 이제 와서 그런 변명이 통할…뭐죠 이건?"

    사라도 비밀 문자가 쓰여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아직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던 거겠지.

    중2병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치자, 사라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용을 확인했고, 글자를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더욱 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띄웠다.

    "이제 알겠지!? 생사람 잡는 것도 유분수지!"

    중2병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항변했다.

    다만 사라와 벽 사이에서 은근슬쩍 빠져나와서는 내 등 뒤에 숨은 채 그러고 있는 바람에,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니. 그보다 왜 하필 내 뒤야? 사라가 화나면 무서운 건 알겠는데, 사라가 그럴 땐 나도 무섭거든?

    다행히도 사라는 그런 중2병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사라는 그저 편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내용을 수차례에 걸쳐서 다시 확인하듯이, 뚫어져라.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끝에 결국 사라가 내린 결론은.

    "구원, 그 사람 도망 못 가게 잡아!"

    중2병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내게 그렇게 말하며, 본인도 이쪽으로 재빨리 달려오는 것이었다.

    "으하으!? 자, 잠깐만! 뭔가 오해하고 있어!"

    하지만 굳이 사라까지 달려올 필요는 없었다.

    내가 중2병의 몸을 두 팔로 꼭 붙들어서 베어허그를 할 때까지, 중2병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꼼지락거리기는 했지만, 이 녀석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저항하는 축에도 안 들어가는 거지.

    "오해? 제 눈에는 가족이나 가족만큼 친밀한 사람한테 쓰는 편지로 보이는데요? 보이는 글씨로는 위험하다. 사로잡힐 것 같다는 말을 썼으면서, 보이지 않는 글씨로는 안심해라? 곧 가겠다? 완전히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잖아요? 뭐가 오해라는 거죠?"

    "뭐? 가족?"

    저 편지의 수신인은, 비스의 수장이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간 비밀 편지가 가족에게 쓴 것 같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서 그 비스의 수장과 중2병이 가족이라는 얘기잖아?

    "으윽!? 어, 얼굴! 얼굴 너무 가까워!"

    내가 깜짝 놀라서 얼굴을 들이밀자, 중2병은 황급히 얼굴을 뒤로 빼며 발버둥 쳤다. 그래 봤자 그 허리는 내 팔에 단단히 안겨 있어서, 뒤로 빼는 것도 한계가 있었지만.

    아니. 그보다 이 녀석, 아까부터 왜 자꾸 하반신을 미묘하게 꾸물꾸물 움직이는 거지?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이 그런 거 의식하고 있을 때냐?

    "야. 줄리안. 내가 생각하기에, 넌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도 가족까지 배신하는 녀석은 아니야."

    이미 목적을 위해 비스를 배신한 녀석인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직접 보고 판단한 중2병의 성격은 그랬다.

    "으, 응…? 고마…워?"

    "그리고 넌 비스의 수장과 가족관계지."

    "아, 아닌데?"

    야. 아까부터 대답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니냐? 원래 나같이 가벼운 놈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면, 보통은 덩달아 진지해지게 마련인데 말이야.

    하지만 중2병의 대답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그게 더 믿음이 가는 면도 있었다.

    자기가 정말로 당당하다고, 그리고 우리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니까, 이렇게 가볍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그럼 설명해 봐. 저 편지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게."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정작 설명을 요구하자 중2병은 머뭇거리면서 내 눈치를 봤다.

    이 녀석,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못 한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 할 수 있어! 할 수는 있는데…그게…."

    "야."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머뭇거리는 중2병의 귀에 나는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내가 강제로 네 입을 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약속도 서로의 신뢰관계가 확실할 때나 지킬 수 있는 거야."

    설령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우리 애들한테, 특히 사라한테 직접 들려줬다가는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

    뭐, 내가 중2병의 귀에 입을 가져간 시점에서 이미 사라의 눈은 날카로워졌지만.

    아니야, 사라야. 겉보기에는 내가 중2병을 끌어안고 뭔가 정답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 나도 인정해. 심지어 중2병이 이 녀석은 이렇게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대기까지 하니까 더 그렇게 보이겠지. 인정해. 인정하는데, 그런 거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

    "으윽…아, 알겠어. 설명할게."

    내 협박을 들은 중2병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 교환으로 사라의 동의를 구하고 중2병의 몸을 놔주자, 중2병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서는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우선 그 남자, 카이젤과 내가 가족이라는 건 오해야. 편지의 수신인은 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브레디…전에 말한 적 있잖아? 수장의 곁을 지키는 비스의 비수가 있다고. 어차피 전서구는 "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세운 비스 공략 계획은 전부 비스의 수장이 생각보다 겁이 많다는 걸 전제로 둔 계획인데, 비스의 수장을 겁쟁이라고 판단한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그거였으니까.

    "그럼 그 사람이 네 가족이야?"

    "가족…유일하게 가족같이 지내던 사이는 맞지만,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야."

    뭐야. 혹시 또 다른 마인의 등장인 줄 알고 살짝 기대…아니. 잠깐만. 유일하게? 그럼 진짜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예 없다는 얘기야?

    혹시 이 녀석이 비스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인이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마인이란 즉 용사의 종족이다. 미리엘이나 중2병 같은 예외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용사만큼은 아닐지라도 동 레벨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강하잖아? 누가 봐도 용사를 하라고 만든 종족이지.

    아무튼 그렇게 강한 만큼, 마인이라는 종족은 이 전쟁신 세계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일 거다.

    그리고 그런 마인, 그것도 비스 유일의 마인으로 추정되는 중2병과 가족같이 지내는 사람이 비스의 수장 곁에 있다는 얘기는…잠깐만. 이거 얘기가 묘하게 돌아가는데?

    혹시 카이젤이라는 놈이 곁에 비수를 두고 있는 건, 자신의 몸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혹시 인질이야?"

    만약 그렇다면, 카이젤의 성격에 대한 평가도 정반대로 달라졌으니, 지금까지 세운 계획 역시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게 되는데.

    "으, 응!? 어, 어떻게 그걸…!?"

    설마 내 입에서 인질이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중2병은 새총 맞은 비둘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뻔하잖아. 마인인 너와…."

    "내가 마인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아니. 뭘 이제 와서 그렇게 놀라냐. 대놓고 말만 안 했지, 맨날 자기가 용사인 것처럼 떠들고 다닌 주제에."

    우리한테 사로잡혔을 당시만 하더라도 완전히 마왕한테 패배한 용사가 빙의해서는 "크윽…이 내가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같은 말이나 해댔고, 미리엘 에게도 엄청나게 동질감 느끼고 있었고.

    그런데도 이 녀석은 설마 숨길 셈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물론 이 녀석이 마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결국 애널라이즈 스킬 덕분이기는 했지만.

    "요, 용사인 것처럼…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신 나간 것 같다는 말밖에 안 해줬는데…."

    아니. 지금이 감동할 때냐? 너 나한테 출생의 비밀을 들킨 거거든?

    뭐, 세이지가 이 녀석한테 했던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속으로 상처받을 거면 애초에 중2병 짓을 안 했으면 됐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그 브레디라는 사람은 널 제어하기 위한 인질이라고 보면 된다는 얘기지?"

    "아, 아닌데?"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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